천자총통(天字銃筒)에는. ‘텬〉쳔〉천자’는 단모음화와 구개음화를 거치면서 단순화된 발음용이화 현상에 따른 소리의 변동이다. 천자총통(天字銃筒) : 조선시대 사용했던 중화기 가운데 하나. 『융원필비(戎垣必備)』 천자총통조에 따르면, 화기 모양의 크고 작은 차이와 화약의 중량, 탄환수, 사정거리를 구별하기 위해 천자문 가운데 천(天)·지(地)·현(玄)·황(黃)이라는 글자를 따서 총통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천자총통은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제일 먼 거리까지 발사할 수 있다. 글자의 순서에 따르면 천자총통이 우선이나, 기록에는 태종 때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이 먼저 나타나고, 가장 빨라야 할 천자총통은 세종 7년(1425) 1월에 비로소 나타난다. 그러나 같은 해 1월 전라감사가 천자총통 철탄자 1,104개를 새로 만든 것으로 보아, 기록상으로만 나타나지 않을 뿐 먼저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융원필비』 천자총통조에는 중약선이 1조, 화약이 30냥, 격목이 7촌, 대장군전을 발사할 때 그 무게가 50근으로서 1,200보에 이른다고 실려 있어, 두 기록에 많은 차이가 있다. 현재 전하는 천자총통으로는 보물 647호로 지정된 것이 있는데, 명종 10년(1555)에 만든 것으로 총신에는 “嘉靖乙卯十月天四百九十三斤十兩匠梁內了同”이라는 새김글이 실려 있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중간치 심지. 총통의 약통 속에 있는 화약을 폭발시키는 대약선보다 작은 심지이다. 약통에 뚫려 있는 약선 구멍에 끼워서 약통 속의 화약과 연결한다. 약선은 약통 속에 화약을 넣기 전에 끼우며, 약선의 반은 약통 속에, 나머지 반은 약통 밖에 나오도록 끼운다. 종류로는 대약선·중약선·소약선·소소약선이 있다. 앞의 주석 ‘약선(藥線)’을 참조할 것.
한 오리요. 한 올이요. ‘오리[條]’는 실, 나무, 대 따위의 가늘고 긴 조각. 또는 그것을 세는 단위. ‘오리〉올’. ¶갖가지 빛깔의 헝겊 오리. 아무리 찾아도 머리털 한 오리도 보이지 않다. 一綟ㅅ 실 믈드료매 一千 올 一萬 오리 빗 이룸 젼라(일려의 실 물들임에 일천 올 일만 올이 함께 빛을 이룸과 같은 까닭이라.)〈원각경언해 상1의1:114ㄱ〉.
군대에서 쓰는 화살의 한 가지. 2년 정도 묵은 나무로써 화살의 몸통을 만들어 전체의 길이는 11자 9치, 그 둘레는 5치, 무게는 50근이며 위와 아래 모두가 쇠로 덮였다. 윗몸의 길이는 4자 6치 가량 된다. 쇠의 날개는 3개이며 길이는 2자 5치다. 거기다가 쇠고리 4개로 4층으로 나누어 고리로 맞춘다. 대장군전의 살촉은 무쇠촉을 붙이는데 길이는 7치고, 사정거리는 9백 보 정도 나가니 당시로써는 엄청난 화력을 지닌 셈이다. 여기 ‘화살’이란 활과 노의 줄에 맞추고 당기며, 시위를 당길 때 손가락에 끼는 깍지와 활을 잡은 손의 소매를 걷어매는 팔찌로 가늠하는 결습(決拾)을 하는 피사체다. 천자총통에 넣어 사격을 하면 적들은 놀라 어쩔 줄을 모르며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처음으로 보는 이들은 그 외형만 보아도 제압을 당하고 말았다는 여러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중세 일본의 장군인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1542~1600)의 후손 집안에는 대대로 전해져 오는 가보가 있다고 하는데, 그 보물은 다름 아닌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대장군전(大將軍箭)과 장군전(將軍箭)이라 한다. 대장군전과 장군전은 조선시대 총통에서 발사하던 초대형 화살이다. 이들은 길이 2m에 굵기가 10cm가 넘어 화살이라기보다 차라리 나무기둥에 가깝다. 천자총통에서 발사한 대장군전은 수백 미터를 날아가 시멘트 석축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 수군의 임진왜란 종군기록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를 보면, “조선군의 대형 화살에 맞아 일본 배의 망대와 갑판, 방패가 모조리 부서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초창기의 화포류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형 화살이 사용됐으나 나무기둥 수준의 초대형 화살을 사용한 것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대장군전과 장군전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병기도설(兵器圖說)과 『융원필비(戎垣必備)』 같은 문헌에 설계도만 남아 있을 뿐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전해 오지 않는다. 해군박물관이나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대장군전과 장군전은 모두 198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복원품일 뿐 진품 유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연으로 한국에도 없는 대장군전이 구키 가문에 전해져 왔을까? 구키 요시다카는 일본 시마(志摩) 지역 영주이자 임진왜란 당시 수군 장수로 조선침략의 최선봉에 섰던 장본인이다. 구키는 1592년 7월에 벌어진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서 이순신 장군과 대결했다. 이 해전에서 구키는 참패를 당했다. 구키가 타고 있던 군함의 돛대가 조선군의 함포사격으로 부러질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구키는 조선 수군이 발사한 대장군전에 강한 인상을 받은 탓인지 일본으로 돌아가는 그의 배에 대장군전을 싣고 갔다. 이후 그 대장군전은 구키의 후손들이 소중히 보관해 오다가 지금은 일본 규슈(九州)에 위치한 가라쓰(唐津)성 역사자료관에 소장돼 보관하고 있다. 이런 소중한 군사문화재가 일본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69년의 일이다. 일본에 남아 있는 대장군전과 장군전 실물은 국내의 추정 재현품과는 형태와 크기가 조금씩 다르다. 일본에 남아 있는 실물 유물의 지름이 상대적으로 큰 것이 특징이며 안정날개의 형태도 차이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군이 노획한 일본 무기는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현재 국내에 전해져 오는 것은 거의 없다. 반대로 대장군전처럼 일본군이 획득한 조선 무기들은 일본에 상당수가 그대로 보존되어 전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군사문화재 보존에 너무나 소홀했던 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세 냥. ‘석’은 ‘삼(三)’을 뜻하는 우리말 관형사로서, ‘돈’, ‘말’, ‘발’, ‘푼’ 따위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 앞에 쓰여, 그 수량이 셋임을 나타낸다. ‘냥’은 ‘양(兩)’의 우리말로서, 귀금속이나 한약재 따위의 무게를 잴 때 쓰는 의존명사다. 한 냥은 귀금속의 무게를 잴 때는 한 돈의 열 배에 해당한다. ¶금 서 돈. 쌀 서 말. 서 푼. 서 발 장대. 금 석 냥.
텬츙통애:천자총통(天字銃筒)에는. ‘텬〉쳔〉천자’는 단모음화와 구개음화를 거치면서 단순화된 발음용이화 현상에 따른 소리의 변동이다. 천자총통(天字銃筒) : 조선시대 사용했던 중화기 가운데 하나. 『융원필비(戎垣必備)』 천자총통조에 따르면, 화기 모양의 크고 작은 차이와 화약의 중량, 탄환수, 사정거리를 구별하기 위해 천자문 가운데 천(天)·지(地)·현(玄)·황(黃)이라는 글자를 따서 총통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천자총통은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제일 먼 거리까지 발사할 수 있다. 글자의 순서에 따르면 천자총통이 우선이나, 기록에는 태종 때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이 먼저 나타나고, 가장 빨라야 할 천자총통은 세종 7년(1425) 1월에 비로소 나타난다. 그러나 같은 해 1월 전라감사가 천자총통 철탄자 1,104개를 새로 만든 것으로 보아, 기록상으로만 나타나지 않을 뿐 먼저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융원필비』 천자총통조에는 중약선이 1조, 화약이 30냥, 격목이 7촌, 대장군전을 발사할 때 그 무게가 50근으로서 1,200보에 이른다고 실려 있어, 두 기록에 많은 차이가 있다. 현재 전하는 천자총통으로는 보물 647호로 지정된 것이 있는데, 명종 10년(1555)에 만든 것으로 총신에는 “嘉靖乙卯十月天四百九十三斤十兩匠梁內了同”이라는 새김글이 실려 있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중약선(中藥線):중간치 심지. 총통의 약통 속에 있는 화약을 폭발시키는 대약선보다 작은 심지이다. 약통에 뚫려 있는 약선 구멍에 끼워서 약통 속의 화약과 연결한다. 약선은 약통 속에 화약을 넣기 전에 끼우며, 약선의 반은 약통 속에, 나머지 반은 약통 밖에 나오도록 끼운다. 종류로는 대약선·중약선·소약선·소소약선이 있다. 앞의 주석 ‘약선(藥線)’을 참조할 것.
오리오:한 오리요. 한 올이요. ‘오리[條]’는 실, 나무, 대 따위의 가늘고 긴 조각. 또는 그것을 세는 단위. ‘오리〉올’. ¶갖가지 빛깔의 헝겊 오리. 아무리 찾아도 머리털 한 오리도 보이지 않다. 一綟ㅅ 실 믈드료매 一千 올 一萬 오리 빗 이룸 젼라(일려의 실 물들임에 일천 올 일만 올이 함께 빛을 이룸과 같은 까닭이라.)〈원각경언해 상1의1:114ㄱ〉.
대장군전(大將軍箭):군대에서 쓰는 화살의 한 가지. 2년 정도 묵은 나무로써 화살의 몸통을 만들어 전체의 길이는 11자 9치, 그 둘레는 5치, 무게는 50근이며 위와 아래 모두가 쇠로 덮였다. 윗몸의 길이는 4자 6치 가량 된다. 쇠의 날개는 3개이며 길이는 2자 5치다. 거기다가 쇠고리 4개로 4층으로 나누어 고리로 맞춘다. 대장군전의 살촉은 무쇠촉을 붙이는데 길이는 7치고, 사정거리는 9백 보 정도 나가니 당시로써는 엄청난 화력을 지닌 셈이다. 여기 ‘화살’이란 활과 노의 줄에 맞추고 당기며, 시위를 당길 때 손가락에 끼는 깍지와 활을 잡은 손의 소매를 걷어매는 팔찌로 가늠하는 결습(決拾)을 하는 피사체다. 천자총통에 넣어 사격을 하면 적들은 놀라 어쩔 줄을 모르며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처음으로 보는 이들은 그 외형만 보아도 제압을 당하고 말았다는 여러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중세 일본의 장군인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1542~1600)의 후손 집안에는 대대로 전해져 오는 가보가 있다고 하는데, 그 보물은 다름 아닌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대장군전(大將軍箭)과 장군전(將軍箭)이라 한다. 대장군전과 장군전은 조선시대 총통에서 발사하던 초대형 화살이다. 이들은 길이 2m에 굵기가 10cm가 넘어 화살이라기보다 차라리 나무기둥에 가깝다. 천자총통에서 발사한 대장군전은 수백 미터를 날아가 시멘트 석축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 수군의 임진왜란 종군기록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를 보면, “조선군의 대형 화살에 맞아 일본 배의 망대와 갑판, 방패가 모조리 부서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초창기의 화포류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형 화살이 사용됐으나 나무기둥 수준의 초대형 화살을 사용한 것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대장군전과 장군전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병기도설(兵器圖說)과 『융원필비(戎垣必備)』 같은 문헌에 설계도만 남아 있을 뿐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전해 오지 않는다. 해군박물관이나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대장군전과 장군전은 모두 198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복원품일 뿐 진품 유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연으로 한국에도 없는 대장군전이 구키 가문에 전해져 왔을까? 구키 요시다카는 일본 시마(志摩) 지역 영주이자 임진왜란 당시 수군 장수로 조선침략의 최선봉에 섰던 장본인이다. 구키는 1592년 7월에 벌어진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서 이순신 장군과 대결했다. 이 해전에서 구키는 참패를 당했다. 구키가 타고 있던 군함의 돛대가 조선군의 함포사격으로 부러질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구키는 조선 수군이 발사한 대장군전에 강한 인상을 받은 탓인지 일본으로 돌아가는 그의 배에 대장군전을 싣고 갔다. 이후 그 대장군전은 구키의 후손들이 소중히 보관해 오다가 지금은 일본 규슈(九州)에 위치한 가라쓰(唐津)성 역사자료관에 소장돼 보관하고 있다. 이런 소중한 군사문화재가 일본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69년의 일이다. 일본에 남아 있는 대장군전과 장군전 실물은 국내의 추정 재현품과는 형태와 크기가 조금씩 다르다. 일본에 남아 있는 실물 유물의 지름이 상대적으로 큰 것이 특징이며 안정날개의 형태도 차이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군이 노획한 일본 무기는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현재 국내에 전해져 오는 것은 거의 없다. 반대로 대장군전처럼 일본군이 획득한 조선 무기들은 일본에 상당수가 그대로 보존되어 전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군사문화재 보존에 너무나 소홀했던 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석 냥:세 냥. ‘석’은 ‘삼(三)’을 뜻하는 우리말 관형사로서, ‘돈’, ‘말’, ‘발’, ‘푼’ 따위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 앞에 쓰여, 그 수량이 셋임을 나타낸다. ‘냥’은 ‘양(兩)’의 우리말로서, 귀금속이나 한약재 따위의 무게를 잴 때 쓰는 의존명사다. 한 냥은 귀금속의 무게를 잴 때는 한 돈의 열 배에 해당한다. ¶금 서 돈. 쌀 서 말. 서 푼. 서 발 장대. 금 석 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