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화포식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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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뢰(震天雷)


震진天텬雷뢰 鑄주水슈鐵텰體톄圓원니 重듕이 一일百十십三삼斤근이오 盖개鐵텰重듕이十십兩냥이오 柱듀檄격鐵텰重듕이 一일斤근八팔兩냥이오 筒통腰요애 有유四穴혈니라 中듕藥약線션八팔條됴ㅣ니 火화藥약

화포식언해 8ㄴ

五오斤근과 菱릉鐵텰三삼十십을 藏장筒통고 以이柱듀檄격鐵텰로 自筒통底뎌貫관穿쳔盖개鐵텰야 用용釵차釘뎡고 合합四穴혈線션야 付부結결於어柱듀檄격鐵텰端단야 埋於어地디고 或혹以이 走주火화여 或혹以이 隱은連년線션으로 放방之지라
Ⓒ 구결 | 이서 / 1635년(인조 13)

震진天텬雷뢰주001)
진천뢰(震天雷):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선조 때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폭탄으로, 하늘을 진동시키는 소리를 낸다 하여 붙여진 이름임. 비진천뢰(飛震天雷), 진천뢰라 부르기도 한다. 모양은 박과 같이 둥글고 죽통을 넣는 네모난 구멍과 화약을 넣는 허리 구멍이 나 있다. 무게는 20근, 뚜껑이라 할 두에쇠의 무게는 4냥, 사정거리는 300보이나 포열이 없는 완구로만 쏠 수 있었기 때문에 정확도가 낮았다. 주요 부품으로 심지를 감는 목곡(木谷), 목곡이 들어가는 죽통(竹筒), 그리고 부리를 막는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있다. 목곡은 폭파 시간을 조절하는 장치로서 그 재료는 박달나무를 사용한다. 목곡은 나사 모양으로 골을 파는데, 목곡에 감겨져 있는 약선의 숫자에 따라 폭발 시간이 좌우된다. 적게 감으면 빨리 폭발하고 많이 감으면 천천히 폭발하는 것이다. 사용 순서는 포탄 안에 철 조각을 넣고 목곡을 넣은 죽통을 넣은 후에 뚜껑을 덮고 주위를 종이로 밀봉한다. 화약은 허리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하여 채워 넣고 격목으로 구멍을 막은 후 완구로 발사한다. 발사된 비격진천뢰는 죽통에 연결된 약선이 타 들어가 구멍을 통하여 화염과 마름쇠가 방사된다. 당시 화포의 발사체는 모두 목표물에 충격을 주어 부수는 것인데 반해 진천뢰는 목표물에 날아가 폭발하는 일종의 시한폭탄인 셈이다. 선조 25년(1592) 9월 경주성 탈환 때 그 위력을 발휘했으며, 수군에서는 1593년 2월 웅천 수륙합공작전 때 “언덕 위의 진지에 진천뢰를 쏘았는데, 터지고 부서지고 죽고 상하여 시체를 끌고 쩔쩔매며 달아나는 적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는 이순신의 장계 기록이 있다.

〈비격진천뢰〉

무쇠로 디워주002)
무쇠로 디워:
무쇠를 끓여 녹여. ‘디워’의 기본형은 ‘디우다’이고 여기에 부사형 어미 ‘-어’가 통합된 형임. 오늘날에는 쓰이지 않는 사어가 되었다. ¶쇠 디울 주(鑄)〈신증유합 하:7〉.
얼굴이 둥그러니 므긔 一일百 열세 斤근이오 두에쇠주003)
두에쇠:
뚜껑쇠. 덮개쇠.
므긔 열 兩냥이오

화포식언해 9ㄱ

柱듀檄격쇠 므긔  斤근 여 兩냥이오 筒통 허리에 네 굼기주004)
굼기:
구멍이. ‘+이’. 윗 글에는 ‘구멍’이라는 표기도 있는 것으로 보아, 토씨가 붙지 않을 때는 ‘구멍’이라고 표기했음을 볼 수 있다.
잇니라 中듕藥약線션이 여 오리니 火화藥약 닷 斤근과 마람쇠주005)
마람쇠:
세 끝이 날카로운 세모꼴 쇠로서 일명 능철(菱鐵)이라고 한다. 흔히 마름쇠라고 한다. 마름쇠란 적의 침투를 저지, 지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지면에 깔아 사용하는 방어용 무기의 일종이다. 또 여철(藜鐵) ·질려철(蒺藜鐵) ·철질려(鐵蒺藜)라고도 한다. 마름쇠의 끝이 뾰쪽한 네 갈래의 쇠침을 이어놓은 형태의 적진 방어용 무기다. 던져만 놓으면 안정되게 어느 방향에서나 하나의 쇠침이 위를 향하도록 구실을 한다. 적의 진행 방향에 촘촘히 깔아 놓아 보병이나 말이 밟으면 발에 치명상을 입도록 만들어져 있다. 원시적인 지뢰의 한 갈래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의 교전에서 썼던 용례가 있으며, 조선 시대 들어오면서 부자들이 도적을 막는 방범용으로 도적이 들어올 것으로 보이는 길목에 깔아 썼다고도 한다.
셜흔을 筒통에 녀코 柱듀檄격쇠주006)
주격(柱檄)쇠:
진천뢰의 가운데 구멍에 끼워 두는 기둥 구실을 하는 쇠. 수류탄에서 스트라이커(striker)와 같은 격자 쇠에 비유할 수 있다. 구개음화와 단모음화를 거치면서 ‘듀격〉쥬격〉주격’으로 소리가 단순화되어 쓰인다.
로 筒통밋트로브터 두에쇠  여 釵차釘뎡주007)
차정(釵釘):
비녀못. 덮개쇠를 고정시키는 구실을 한다.
곳고주008)
곳고:
꽂고. ‘곳고〉꼿고’로 소리가 뒤로 오면서 경음화를 거치면서 소리가 바뀌었다. 경음화에 따른 소리의 강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일부 경상 방언에서는 겹소리가 나지 않는다. 확고하게 음소로서의 자리매김을 못한 것이다. 경음화와 음운탈락을 통하여 ‘사홈〉싸옴〉싸움’으로 소리가 바뀌어 굳어졌다.
네 굼엉 심을 모도와 柱듀檄격쇠 긋테 브텨 아 헤 뭇고 或혹 走주火화주009)
주화(走火):
날아가는 불화살. 일종의 로켓형 화살이다. 신기전은 세종시대 박강(朴薑)에 의하여 발명된 세계 로켓역사의 신기원을 이룬 한국형 로켓 과학기술의 압권이다. 조선시대 불이나 화약을 화살에 달아 쏘던 일종의 로켓형 병기. 말하자면, 그 병기의 정확한 명칭은 화차(火車) 곧 불수레라고 불리는 총통(銃筒) 무기의 일종이며, 신기전은 화살에 화약을 매달아 쏘는 무기를 말하는 것이다. 신기전을 로켓으로 본다면 총통기는 일종의 로켓발사대라 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형태는 현대의 다연장 로켓포와 상당부분 비슷한 부분이 있다. 14세기 말엽 중국에서는 원 왕조가 무너지고 명 왕조가 성립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와 조선이 왕조교체를 하는 혼란기였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북쪽에서는 유목민족이 남쪽에서는 일본왜구가 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은 일찍이 고려 말엽 최무선(崔茂宣)에 의해 개발된 화약무기로 인해 극성이었던 왜구의 해상침입을 물리친 바 있었다. 화약무기의 효용과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당시의 화약무기는 해상에 떠 있는 목조군선을 격침시키거나 화염으로 태울 목적으로 개발된 것으로 육상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한편 1392년 새로운 나라를 세운 조선은 세종대왕 때 와서야 차츰 왕조가 문물이 안정을 찾아갔고, 그에 따라 국방력 강화 및 육상에서 효율적인 전투를 목적으로 각종 화기를 개발하게 된다. 성종 때 가서야 모든 제도가 확립되기에 이른다.

〈신기전 1〉


〈신기전 2〉


신기전(神機箭)은 조선시대 화약 추진 화살로 고려 말기 최무선(崔茂宣)이 만든 주화(走火)를 세종 30년(1448)에 고친 것이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일반나무로 대[幹]를 만들고 가죽으로 깃[翎]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무화살은 만들기도 쉽지 않고 가죽은 구하기 어려우므로, 대나무로 대를 만들고 깃[羽]으로 살깃을 만들어 재시험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 성능이 우수하여 시험한 이는 다음처럼 세종대왕에게 아뢰었다. “화살이 멀리 가고 단단하여 나무화살보다 훨씬 나으니,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갑절이나 됩니다. 또 깃털로 살깃을 만드는 것 역시 편하고 쉬우니, 이 뒤로는 이 예(例)에 따라서 만들고, 모름지기 물고기의 기름으로 살깃[翎]을 붙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나무 역시 습기나 부패에 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옻칠을 하여 그 대안을 삼았다. 그 갈래에는 크기에 따라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등이 있다. 그 밖에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도 있긴 하지만 대신기전과 같은 크기로 보면 된다. 그런데 이 같은 화약무기를 최초의 로켓 형 발사포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하여 풀이한 것일 수 있다. 우선 중국에서는 1232년 등장하는 비화창(나는 불창)을 최초의 로켓무기로 주장하고 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비화창은 발사하면 200m정도 날아가 떨어져 사방 6~7m 정도를 불바다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금나라 군대가 몽고군에 저항하기 위해 사용한 신무기로 중국이 개발한 무기라고 볼 수 없다. 더구나 이 비화창에 로켓 무기가 적용되었다고 확인할만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그리고 서양 최초의 로켓 발사포는, 인도군이 사용하던 것을 모방하여 영국의 콩그레브가 1805년 제작한 것이다. 물론 콩그레브의 개발품은 살상력이나 효율성면에서 대신기전보다 앞선다. 이는 상당히 늦은 19세기의 발명품이며 무게도 가벼운 편이다. 평균 길이는 1m, 평균 지름은 10cm, 무게는 1~2.8kg정도이며, 최대 사정 거리는 2천 7백m 정도였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 신기전의 경우, 성종 5년(1474)에 편찬된 『국조오례의』 〈병기도설〉에 그 설명 및 설계도까지 정밀하게 나와 있어, 로켓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하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선 대신기전은 1448년 제작된 것으로 시기적으로 서양의 로켓무기보다 147년이나 앞설 뿐만 아니다. 길이는 무려 5m가 넘는 17자(521cm)이고 무게는 7~8kg이나 된다. 윗부분에 원통형의 종이통(로켓엔진)이 부착된 형태로 이 속에 화약을 채우며, 아래에는 연소가스 배출을 위해 지름 1치 2푼(36.8밀리)의 구멍을 내게 된다. 바로 신기전에 최초의 로켓원리가 적용되었다고 보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대신기전의 경우, 사정거리 역시 1천보(800~900m)가량 되어, 19세기 이전까지의 어떠한 로켓형 무기보다도 가장 무거운 중량을 가장 멀리까지 보낼 수 있었다. 여기에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은 대신기전과 같은 규격이지만 발화통 내에 철편(鐵片)을 포함하고 있어 살상 효과를 극대화 하였다. 대신기전의 사거리가 2km 이상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압록강이나 두만강 너머까지 적을 요격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사거리를 확보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중신기전은 길이 4자 5치(137.9cm)로 역시 휴대하기 어려웠지만 소신기전은 길이 3자 3치(101.1cm)로 병사 개인 화기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소신기전의 경우 대·중신기전과는 달리 폭발물이 부착되지 않았다. 중신기전은 150m, 소신기전은 100m쯤으로 추측된다. 그림처럼 개인화기로서의 신기전은 발화통에 붙인 뒤 병사가 직접 활을 쏘아야 한다. 물론 정면으로 맞으면 충분한 살상력을 가지겠지만, 지휘 장교가 신호를 보내거나 적을 혼란시킬 목적으로 많이 쓰였다. 이렇게 개발된 무기를 최전방인 4군 6진에 배치시켰음은 물론이다. 보다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화기를 다루는 훈련까지 실시하였다. 다만 화약무기 제조가 어려워 원활하게 이루어지진 못하였다. 따라서 총통 및 신기전의 연습은 매우 제한적이고 엄격하게 실시되었는데, 중소 신기전의 경우 국경지대인 함경도와 평안도에서만 매년 1회씩 실시하였으며, 대신기전은 2년에 1회씩 실시하였다. 마침내 이 신기전을 실전에 시험할 때가 왔다. 문종 1년(1451) 정월 김종서(金宗瑞) 장군이 지키던 압록강 방면에는, 북방유목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데 북방유목민들의 주력은 기마병으로, 조선의 단순한 보기병만으로는 그들의 움직임을 막을 수가 없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에 얼음이 얼었다. 기마병으로도 자유자재로 넘어 올 수 있게 되면, 조선으로서는 맞서기가 매우 어려운 위기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김종서 장군은 조정에 최대한 많은 양의 신기전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도 사태의 긴박함을 인식하고 중 신기 3천과 소 신기전 4천을 평안도로 보내도록 하였다. 이렇게 김종서 장군과 조정의 신속한 화기 충원으로 인해 야인들의 적극적인 공세를 원천봉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징옥(李澄玉) 등의 변방무장 역시 북방야인들을 견제할 무기로 신기전보다 더 뛰어난 것이 없다고 평가할 만큼 유용한 무기였다. 다만 소신기전의 경우 실용성과 화력에 문제가 되어 생산이 1451년 이후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후 신기전은 중신기전을 주축으로 하게 되었다.
로 며 或혹 隱은連년線션으로 노흐라
Ⓒ 언해 | 이서 / 1635년(인조 13)

진천뢰는 무쇠로 끓여 녹여 만들어 모양이 둥글다. 무게는 일백열세 근이요, 덮개쇠의 무게는 열 냥이다. 주격쇠 무게는 한 근 여덟 냥이요, 화통 허리에 네 구멍이 있다. 가운데 치 심지가 여덟 오리며 화약 다섯 근과 마름쇠 서른을 통에 넣고 주격쇠로써 통밑으로부터 덮개쇠를 뚫어 비녀 같은 차정을 꽂고, 네 구멍의 심지를 합하여 주격쇠 끝에 매어 땅에 묻고, 혹은 주화로써 혹은 은연선 심지로써 쏘아라.
Ⓒ 역자 | 정호완 / 2013년 7월 30일

원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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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진천뢰(震天雷):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선조 때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폭탄으로, 하늘을 진동시키는 소리를 낸다 하여 붙여진 이름임. 비진천뢰(飛震天雷), 진천뢰라 부르기도 한다. 모양은 박과 같이 둥글고 죽통을 넣는 네모난 구멍과 화약을 넣는 허리 구멍이 나 있다. 무게는 20근, 뚜껑이라 할 두에쇠의 무게는 4냥, 사정거리는 300보이나 포열이 없는 완구로만 쏠 수 있었기 때문에 정확도가 낮았다. 주요 부품으로 심지를 감는 목곡(木谷), 목곡이 들어가는 죽통(竹筒), 그리고 부리를 막는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있다. 목곡은 폭파 시간을 조절하는 장치로서 그 재료는 박달나무를 사용한다. 목곡은 나사 모양으로 골을 파는데, 목곡에 감겨져 있는 약선의 숫자에 따라 폭발 시간이 좌우된다. 적게 감으면 빨리 폭발하고 많이 감으면 천천히 폭발하는 것이다. 사용 순서는 포탄 안에 철 조각을 넣고 목곡을 넣은 죽통을 넣은 후에 뚜껑을 덮고 주위를 종이로 밀봉한다. 화약은 허리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하여 채워 넣고 격목으로 구멍을 막은 후 완구로 발사한다. 발사된 비격진천뢰는 죽통에 연결된 약선이 타 들어가 구멍을 통하여 화염과 마름쇠가 방사된다. 당시 화포의 발사체는 모두 목표물에 충격을 주어 부수는 것인데 반해 진천뢰는 목표물에 날아가 폭발하는 일종의 시한폭탄인 셈이다. 선조 25년(1592) 9월 경주성 탈환 때 그 위력을 발휘했으며, 수군에서는 1593년 2월 웅천 수륙합공작전 때 “언덕 위의 진지에 진천뢰를 쏘았는데, 터지고 부서지고 죽고 상하여 시체를 끌고 쩔쩔매며 달아나는 적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는 이순신의 장계 기록이 있다.
〈비격진천뢰〉
주002)
무쇠로 디워:무쇠를 끓여 녹여. ‘디워’의 기본형은 ‘디우다’이고 여기에 부사형 어미 ‘-어’가 통합된 형임. 오늘날에는 쓰이지 않는 사어가 되었다. ¶쇠 디울 주(鑄)〈신증유합 하:7〉.
주003)
두에쇠:뚜껑쇠. 덮개쇠.
주004)
굼기:구멍이. ‘+이’. 윗 글에는 ‘구멍’이라는 표기도 있는 것으로 보아, 토씨가 붙지 않을 때는 ‘구멍’이라고 표기했음을 볼 수 있다.
주005)
마람쇠:세 끝이 날카로운 세모꼴 쇠로서 일명 능철(菱鐵)이라고 한다. 흔히 마름쇠라고 한다. 마름쇠란 적의 침투를 저지, 지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지면에 깔아 사용하는 방어용 무기의 일종이다. 또 여철(藜鐵) ·질려철(蒺藜鐵) ·철질려(鐵蒺藜)라고도 한다. 마름쇠의 끝이 뾰쪽한 네 갈래의 쇠침을 이어놓은 형태의 적진 방어용 무기다. 던져만 놓으면 안정되게 어느 방향에서나 하나의 쇠침이 위를 향하도록 구실을 한다. 적의 진행 방향에 촘촘히 깔아 놓아 보병이나 말이 밟으면 발에 치명상을 입도록 만들어져 있다. 원시적인 지뢰의 한 갈래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의 교전에서 썼던 용례가 있으며, 조선 시대 들어오면서 부자들이 도적을 막는 방범용으로 도적이 들어올 것으로 보이는 길목에 깔아 썼다고도 한다.
주006)
주격(柱檄)쇠:진천뢰의 가운데 구멍에 끼워 두는 기둥 구실을 하는 쇠. 수류탄에서 스트라이커(striker)와 같은 격자 쇠에 비유할 수 있다. 구개음화와 단모음화를 거치면서 ‘듀격〉쥬격〉주격’으로 소리가 단순화되어 쓰인다.
주007)
차정(釵釘):비녀못. 덮개쇠를 고정시키는 구실을 한다.
주008)
곳고:꽂고. ‘곳고〉꼿고’로 소리가 뒤로 오면서 경음화를 거치면서 소리가 바뀌었다. 경음화에 따른 소리의 강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일부 경상 방언에서는 겹소리가 나지 않는다. 확고하게 음소로서의 자리매김을 못한 것이다. 경음화와 음운탈락을 통하여 ‘사홈〉싸옴〉싸움’으로 소리가 바뀌어 굳어졌다.
주009)
주화(走火):날아가는 불화살. 일종의 로켓형 화살이다. 신기전은 세종시대 박강(朴薑)에 의하여 발명된 세계 로켓역사의 신기원을 이룬 한국형 로켓 과학기술의 압권이다. 조선시대 불이나 화약을 화살에 달아 쏘던 일종의 로켓형 병기. 말하자면, 그 병기의 정확한 명칭은 화차(火車) 곧 불수레라고 불리는 총통(銃筒) 무기의 일종이며, 신기전은 화살에 화약을 매달아 쏘는 무기를 말하는 것이다. 신기전을 로켓으로 본다면 총통기는 일종의 로켓발사대라 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형태는 현대의 다연장 로켓포와 상당부분 비슷한 부분이 있다. 14세기 말엽 중국에서는 원 왕조가 무너지고 명 왕조가 성립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와 조선이 왕조교체를 하는 혼란기였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북쪽에서는 유목민족이 남쪽에서는 일본왜구가 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은 일찍이 고려 말엽 최무선(崔茂宣)에 의해 개발된 화약무기로 인해 극성이었던 왜구의 해상침입을 물리친 바 있었다. 화약무기의 효용과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당시의 화약무기는 해상에 떠 있는 목조군선을 격침시키거나 화염으로 태울 목적으로 개발된 것으로 육상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한편 1392년 새로운 나라를 세운 조선은 세종대왕 때 와서야 차츰 왕조가 문물이 안정을 찾아갔고, 그에 따라 국방력 강화 및 육상에서 효율적인 전투를 목적으로 각종 화기를 개발하게 된다. 성종 때 가서야 모든 제도가 확립되기에 이른다.
〈신기전 1〉
〈신기전 2〉
신기전(神機箭)은 조선시대 화약 추진 화살로 고려 말기 최무선(崔茂宣)이 만든 주화(走火)를 세종 30년(1448)에 고친 것이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일반나무로 대[幹]를 만들고 가죽으로 깃[翎]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무화살은 만들기도 쉽지 않고 가죽은 구하기 어려우므로, 대나무로 대를 만들고 깃[羽]으로 살깃을 만들어 재시험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 성능이 우수하여 시험한 이는 다음처럼 세종대왕에게 아뢰었다. “화살이 멀리 가고 단단하여 나무화살보다 훨씬 나으니,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갑절이나 됩니다. 또 깃털로 살깃을 만드는 것 역시 편하고 쉬우니, 이 뒤로는 이 예(例)에 따라서 만들고, 모름지기 물고기의 기름으로 살깃[翎]을 붙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나무 역시 습기나 부패에 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옻칠을 하여 그 대안을 삼았다. 그 갈래에는 크기에 따라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등이 있다. 그 밖에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도 있긴 하지만 대신기전과 같은 크기로 보면 된다. 그런데 이 같은 화약무기를 최초의 로켓 형 발사포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하여 풀이한 것일 수 있다. 우선 중국에서는 1232년 등장하는 비화창(나는 불창)을 최초의 로켓무기로 주장하고 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비화창은 발사하면 200m정도 날아가 떨어져 사방 6~7m 정도를 불바다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금나라 군대가 몽고군에 저항하기 위해 사용한 신무기로 중국이 개발한 무기라고 볼 수 없다. 더구나 이 비화창에 로켓 무기가 적용되었다고 확인할만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그리고 서양 최초의 로켓 발사포는, 인도군이 사용하던 것을 모방하여 영국의 콩그레브가 1805년 제작한 것이다. 물론 콩그레브의 개발품은 살상력이나 효율성면에서 대신기전보다 앞선다. 이는 상당히 늦은 19세기의 발명품이며 무게도 가벼운 편이다. 평균 길이는 1m, 평균 지름은 10cm, 무게는 1~2.8kg정도이며, 최대 사정 거리는 2천 7백m 정도였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 신기전의 경우, 성종 5년(1474)에 편찬된 『국조오례의』 〈병기도설〉에 그 설명 및 설계도까지 정밀하게 나와 있어, 로켓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하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선 대신기전은 1448년 제작된 것으로 시기적으로 서양의 로켓무기보다 147년이나 앞설 뿐만 아니다. 길이는 무려 5m가 넘는 17자(521cm)이고 무게는 7~8kg이나 된다. 윗부분에 원통형의 종이통(로켓엔진)이 부착된 형태로 이 속에 화약을 채우며, 아래에는 연소가스 배출을 위해 지름 1치 2푼(36.8밀리)의 구멍을 내게 된다. 바로 신기전에 최초의 로켓원리가 적용되었다고 보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대신기전의 경우, 사정거리 역시 1천보(800~900m)가량 되어, 19세기 이전까지의 어떠한 로켓형 무기보다도 가장 무거운 중량을 가장 멀리까지 보낼 수 있었다. 여기에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은 대신기전과 같은 규격이지만 발화통 내에 철편(鐵片)을 포함하고 있어 살상 효과를 극대화 하였다. 대신기전의 사거리가 2km 이상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압록강이나 두만강 너머까지 적을 요격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사거리를 확보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중신기전은 길이 4자 5치(137.9cm)로 역시 휴대하기 어려웠지만 소신기전은 길이 3자 3치(101.1cm)로 병사 개인 화기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소신기전의 경우 대·중신기전과는 달리 폭발물이 부착되지 않았다. 중신기전은 150m, 소신기전은 100m쯤으로 추측된다. 그림처럼 개인화기로서의 신기전은 발화통에 붙인 뒤 병사가 직접 활을 쏘아야 한다. 물론 정면으로 맞으면 충분한 살상력을 가지겠지만, 지휘 장교가 신호를 보내거나 적을 혼란시킬 목적으로 많이 쓰였다. 이렇게 개발된 무기를 최전방인 4군 6진에 배치시켰음은 물론이다. 보다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화기를 다루는 훈련까지 실시하였다. 다만 화약무기 제조가 어려워 원활하게 이루어지진 못하였다. 따라서 총통 및 신기전의 연습은 매우 제한적이고 엄격하게 실시되었는데, 중소 신기전의 경우 국경지대인 함경도와 평안도에서만 매년 1회씩 실시하였으며, 대신기전은 2년에 1회씩 실시하였다. 마침내 이 신기전을 실전에 시험할 때가 왔다. 문종 1년(1451) 정월 김종서(金宗瑞) 장군이 지키던 압록강 방면에는, 북방유목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데 북방유목민들의 주력은 기마병으로, 조선의 단순한 보기병만으로는 그들의 움직임을 막을 수가 없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에 얼음이 얼었다. 기마병으로도 자유자재로 넘어 올 수 있게 되면, 조선으로서는 맞서기가 매우 어려운 위기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김종서 장군은 조정에 최대한 많은 양의 신기전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도 사태의 긴박함을 인식하고 중 신기 3천과 소 신기전 4천을 평안도로 보내도록 하였다. 이렇게 김종서 장군과 조정의 신속한 화기 충원으로 인해 야인들의 적극적인 공세를 원천봉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징옥(李澄玉) 등의 변방무장 역시 북방야인들을 견제할 무기로 신기전보다 더 뛰어난 것이 없다고 평가할 만큼 유용한 무기였다. 다만 소신기전의 경우 실용성과 화력에 문제가 되어 생산이 1451년 이후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후 신기전은 중신기전을 주축으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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