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가는 불화살. 일종의 로켓형 화살이다. 신기전은 세종시대 박강(朴薑)에 의하여 발명된 세계 로켓역사의 신기원을 이룬 한국형 로켓 과학기술의 압권이다. 조선시대 불이나 화약을 화살에 달아 쏘던 일종의 로켓형 병기. 말하자면, 그 병기의 정확한 명칭은 화차(火車) 곧 불수레라고 불리는 총통(銃筒) 무기의 일종이며, 신기전은 화살에 화약을 매달아 쏘는 무기를 말하는 것이다. 신기전을 로켓으로 본다면 총통기는 일종의 로켓발사대라 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형태는 현대의 다연장 로켓포와 상당부분 비슷한 부분이 있다. 14세기 말엽 중국에서는 원 왕조가 무너지고 명 왕조가 성립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와 조선이 왕조교체를 하는 혼란기였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북쪽에서는 유목민족이 남쪽에서는 일본왜구가 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은 일찍이 고려 말엽 최무선(崔茂宣)에 의해 개발된 화약무기로 인해 극성이었던 왜구의 해상침입을 물리친 바 있었다. 화약무기의 효용과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당시의 화약무기는 해상에 떠 있는 목조군선을 격침시키거나 화염으로 태울 목적으로 개발된 것으로 육상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한편 1392년 새로운 나라를 세운 조선은 세종대왕 때 와서야 차츰 왕조가 문물이 안정을 찾아갔고, 그에 따라 국방력 강화 및 육상에서 효율적인 전투를 목적으로 각종 화기를 개발하게 된다. 성종 때 가서야 모든 제도가 확립되기에 이른다.
〈신기전 1〉
〈신기전 2〉
신기전(神機箭)은 조선시대 화약 추진 화살로 고려 말기 최무선(崔茂宣)이 만든 주화(走火)를 세종 30년(1448)에 고친 것이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일반나무로 대[幹]를 만들고 가죽으로 깃[翎]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무화살은 만들기도 쉽지 않고 가죽은 구하기 어려우므로, 대나무로 대를 만들고 깃[羽]으로 살깃을 만들어 재시험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 성능이 우수하여 시험한 이는 다음처럼 세종대왕에게 아뢰었다. “화살이 멀리 가고 단단하여 나무화살보다 훨씬 나으니,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갑절이나 됩니다. 또 깃털로 살깃을 만드는 것 역시 편하고 쉬우니, 이 뒤로는 이 예(例)에 따라서 만들고, 모름지기 물고기의 기름으로 살깃[翎]을 붙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나무 역시 습기나 부패에 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옻칠을 하여 그 대안을 삼았다. 그 갈래에는 크기에 따라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등이 있다. 그 밖에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도 있긴 하지만 대신기전과 같은 크기로 보면 된다. 그런데 이 같은 화약무기를 최초의 로켓 형 발사포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하여 풀이한 것일 수 있다. 우선 중국에서는 1232년 등장하는 비화창(나는 불창)을 최초의 로켓무기로 주장하고 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비화창은 발사하면 200m정도 날아가 떨어져 사방 6~7m 정도를 불바다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금나라 군대가 몽고군에 저항하기 위해 사용한 신무기로 중국이 개발한 무기라고 볼 수 없다. 더구나 이 비화창에 로켓 무기가 적용되었다고 확인할만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그리고 서양 최초의 로켓 발사포는, 인도군이 사용하던 것을 모방하여 영국의 콩그레브가 1805년 제작한 것이다. 물론 콩그레브의 개발품은 살상력이나 효율성면에서 대신기전보다 앞선다. 이는 상당히 늦은 19세기의 발명품이며 무게도 가벼운 편이다. 평균 길이는 1m, 평균 지름은 10cm, 무게는 1~2.8kg정도이며, 최대 사정 거리는 2천 7백m 정도였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 신기전의 경우, 성종 5년(1474)에 편찬된 『국조오례의』 〈병기도설〉에 그 설명 및 설계도까지 정밀하게 나와 있어, 로켓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하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선 대신기전은 1448년 제작된 것으로 시기적으로 서양의 로켓무기보다 147년이나 앞설 뿐만 아니다. 길이는 무려 5m가 넘는 17자(521cm)이고 무게는 7~8kg이나 된다. 윗부분에 원통형의 종이통(로켓엔진)이 부착된 형태로 이 속에 화약을 채우며, 아래에는 연소가스 배출을 위해 지름 1치 2푼(36.8밀리)의 구멍을 내게 된다. 바로 신기전에 최초의 로켓원리가 적용되었다고 보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대신기전의 경우, 사정거리 역시 1천보(800~900m)가량 되어, 19세기 이전까지의 어떠한 로켓형 무기보다도 가장 무거운 중량을 가장 멀리까지 보낼 수 있었다. 여기에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은 대신기전과 같은 규격이지만 발화통 내에 철편(鐵片)을 포함하고 있어 살상 효과를 극대화 하였다. 대신기전의 사거리가 2km 이상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압록강이나 두만강 너머까지 적을 요격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사거리를 확보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중신기전은 길이 4자 5치(137.9cm)로 역시 휴대하기 어려웠지만 소신기전은 길이 3자 3치(101.1cm)로 병사 개인 화기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소신기전의 경우 대·중신기전과는 달리 폭발물이 부착되지 않았다. 중신기전은 150m, 소신기전은 100m쯤으로 추측된다. 그림처럼 개인화기로서의 신기전은 발화통에 붙인 뒤 병사가 직접 활을 쏘아야 한다. 물론 정면으로 맞으면 충분한 살상력을 가지겠지만, 지휘 장교가 신호를 보내거나 적을 혼란시킬 목적으로 많이 쓰였다. 이렇게 개발된 무기를 최전방인 4군 6진에 배치시켰음은 물론이다. 보다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화기를 다루는 훈련까지 실시하였다. 다만 화약무기 제조가 어려워 원활하게 이루어지진 못하였다. 따라서 총통 및 신기전의 연습은 매우 제한적이고 엄격하게 실시되었는데, 중소 신기전의 경우 국경지대인 함경도와 평안도에서만 매년 1회씩 실시하였으며, 대신기전은 2년에 1회씩 실시하였다. 마침내 이 신기전을 실전에 시험할 때가 왔다. 문종 1년(1451) 정월 김종서(金宗瑞) 장군이 지키던 압록강 방면에는, 북방유목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데 북방유목민들의 주력은 기마병으로, 조선의 단순한 보기병만으로는 그들의 움직임을 막을 수가 없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에 얼음이 얼었다. 기마병으로도 자유자재로 넘어 올 수 있게 되면, 조선으로서는 맞서기가 매우 어려운 위기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김종서 장군은 조정에 최대한 많은 양의 신기전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도 사태의 긴박함을 인식하고 중 신기 3천과 소 신기전 4천을 평안도로 보내도록 하였다. 이렇게 김종서 장군과 조정의 신속한 화기 충원으로 인해 야인들의 적극적인 공세를 원천봉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징옥(李澄玉) 등의 변방무장 역시 북방야인들을 견제할 무기로 신기전보다 더 뛰어난 것이 없다고 평가할 만큼 유용한 무기였다. 다만 소신기전의 경우 실용성과 화력에 문제가 되어 생산이 1451년 이후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후 신기전은 중신기전을 주축으로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