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火車)주004) 화차(火車):화거(火車). 일종의 장갑차로서 조선시대에 만들어 쓰던 기갑용 공격병기. 조선시대에 만든 일종의 장갑차. 태종 9년(1409)에 군기소감(軍器少監) 이도(李蹈)와 군기감승(軍器監丞) 최해산(崔海山) 등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이 화차는 쇠로 만든 화살인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를 장탄한 통을 작은 차에 싣고 달리면서 화약으로 발포했다. 그러나 이때의 화차는 실전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그림). 이후 문종 1년(1451) 2월 문종의 창안에 따라 임영대군(臨瀛大君)이 화차를 다시 만들었다. 이 화차는 차 위에 시렁 같은 가자(架子)를 만들어 그 안에 중신기전(中神機箭) 100개 또는 사전총통(四箭銃筒) 50개를 설치하고 심지에 불을 붙여 차례로 쏘게 한 것으로, 평시에는 가자의 화기장치만 내려놓고 수레차로 쓸 수 있으며 전시에는 가자의 화포를 싣고 화차로 쓸 수 있어 매우 편리한 것이었다. 이후 이 화차 뒤에 장갑장치를 부설하는 것도 고안되었으나 기동성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이 안은 폐기되었다. 문종이 창안했던 화차는 서울에 50량(輛), 변경에 80량이 비치되었고 1451년 말까지는 전국적으로 수백 량이 비치되었다. 이 화차는 임진왜란 때 변이중(邊以中)에 의해 실전에서 크게 활용되었다.
〈화차〉
변이중(邊以中) : 변이중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으며, 임진왜란 때 군기(軍器)와 군량 조달에 이바지한 바가 매우 크다. 본관은 황주. 자는 언시(彦時), 호는 망암(望庵). 아버지는 택(澤)이다. 선조 6년(1573)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소모어사(全羅道召募御使)가 되어 병마와 군기를 모아 적의 공격에 미리 대비했으며, 1593년 정월에는 양호지방(兩湖地方)의 군사를 모집해 천안군과 양성현 일원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때 새로운 소를 활용하여 우차(牛車)를 제작, 죽산성 전투에서 활용하여 처음에는 성공한 듯했으나, 적이 쏘는 불화살에 맞고 불타버림으로써 실패했다. 이어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순찰사 권율(權慄)을 따라갔다. 그해 2월 12일 행주산성 전투 때 자신이 쓴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의 내용에 따라 화차를 만들어 화차 300량을 권율에게 보내어 승리를 거두는 데 큰 도움이 되게 했으며, 자신은 양천산(陽川山)에 출전하여 도왔다. 그 뒤 조도사와 독운사 등을 지내며 군량미 수십만 석을 명나라 군대에 보급했다. 1603년 함안군수가 되었다가 1605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저서로는 『망암집』이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장성 봉암서원(鳳巖書院)에서 제향을 모신다.
는 수레의 법제와 항상 같으며 널판에 구멍을 뚫고 나무를 박아 화통의 자루에 구멍을 들게 하되 한 층에 각각 열이니 다섯 층을 합하면 모두 쉰 개다. 또 나무 베개 다섯 줄을 써서 매 줄에 다섯 군데 깎아서 박은 나무로 다 같이 하고 주자총통(宙字銃筒) 쉰 자루를 써라. 〈주자총통에는〉 매 한 자루마다 작은 심지 반 오리요, 화약이 두 돈이다. 화약을 다지는 흙이 다섯 푼이니 가죽 깃이 달린 나무화살을 쏴라. 먼저 다섯 자루를 베개 할 나무 하나를 깎은 곳에 벌여 화통 자루 구멍을 박은 나무에 씌우라. 중간 치 심지 다섯 사리
(원문은 ‘三沙里’임)
를 써서 화통의 심지에 이어 차차 모아 새끼를 꼬아 다섯 층에 모두 그치고 임시로 심지에 불을 붙이라.
Ⓒ 역자 | 정호완 / 2013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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