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척계광이 왜구와 싸울 때 사용했던 대포.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습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621년에 모원의(茅元儀)가 쓴 『무비지(武備志)』에 보면 호준포를 만들게 된 동기에 대해 “국초에 변방에는 삼장군영자포(三將軍纓子砲)라는 것이 있었고, 근자에는 독호포(毒虎炮)가 있는데, 유용한 무기이기는 하지만 중량이 가벼워 매번 발사 시에 포신(砲身)이 20~30보를 뒤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호준포는 중량이 있어 보병이 사용하기에 적합하였다. 조총의 위력은 작아서 큰 부대를 방어할 수 없다. 불랑기포(佛狼機砲)는 위력은 강하지만 중량이 무거워 운반하기에 불편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호준포를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불랑기포를 개량한 포가 호준포인 것이다. 명나라의 척계광이 왜구와 싸웠던 지역은 산악지대나 숲이 울창한 곳 또는 논밭이 있는 곳이어서 포를 옮기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더욱이 왜구는 불랑기와 같은 무거운 포를 끌고 다니면서 맞대응하기가 상당히 곤란했다. 이에 무거운 포를 사용할 수 없는 지역에서 조총을 사용하는 왜구를 화력으로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운반이 쉬운 이 포가 사용되었다. 그 뒤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의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이를 사용하여 효과를 보았다. 조선은 명나라의 군사들이 들여온 화기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호준포에 대한 논의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선조실록』 선조 26년(1593) 2월 20일의 기록이다.
〈호준포〉
애 中듕藥약線션이 半반 오리오 火화藥약이 엿 兩냥이오 土토隔격이 두 치라 鈆연丸환을 면 닐흔 낫이니 每 丸환 므긔 두 돈이오 或혹 鐵텰丸환을 면 셜흔 낫이니 每丸환 므긔 두 돈이라 노흘제 다 큰 鉛연子 낫으로 筒통 가은 녀흐라 큰 鈆연子 므긔 닷 兩냥이라
Ⓒ 언해 | 이서 / 1635년(인조 13)
호준포(虎蹲砲)에는 가운데 치 심지가 반 오리요. 화약이 여섯 냥이다. 화약 다지는 흙이 두 치이어니와 납탄알을 쓰면 일흔 개니 매 한 알의 무게가 두 돈이다. 달리 쇠탄알을 쓰면 서른 개이니 매 탄환의 무게는 두 돈이다. 포를 놓을 때에는 다 큰 연자(납탄알) 한 개를 통 가운데 넣어라. 큰 납탄알의 무게가 다섯 냥이다.
호준포(虎蹲砲):명나라의 척계광이 왜구와 싸울 때 사용했던 대포.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습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621년에 모원의(茅元儀)가 쓴 『무비지(武備志)』에 보면 호준포를 만들게 된 동기에 대해 “국초에 변방에는 삼장군영자포(三將軍纓子砲)라는 것이 있었고, 근자에는 독호포(毒虎炮)가 있는데, 유용한 무기이기는 하지만 중량이 가벼워 매번 발사 시에 포신(砲身)이 20~30보를 뒤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호준포는 중량이 있어 보병이 사용하기에 적합하였다. 조총의 위력은 작아서 큰 부대를 방어할 수 없다. 불랑기포(佛狼機砲)는 위력은 강하지만 중량이 무거워 운반하기에 불편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호준포를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불랑기포를 개량한 포가 호준포인 것이다. 명나라의 척계광이 왜구와 싸웠던 지역은 산악지대나 숲이 울창한 곳 또는 논밭이 있는 곳이어서 포를 옮기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더욱이 왜구는 불랑기와 같은 무거운 포를 끌고 다니면서 맞대응하기가 상당히 곤란했다. 이에 무거운 포를 사용할 수 없는 지역에서 조총을 사용하는 왜구를 화력으로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운반이 쉬운 이 포가 사용되었다. 그 뒤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의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이를 사용하여 효과를 보았다. 조선은 명나라의 군사들이 들여온 화기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호준포에 대한 논의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선조실록』 선조 26년(1593) 2월 20일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