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언해 학조 발문[學祖跋]
이종찬(李鍾燦,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역
우리 부처 여래께서 가르침을 내리신 것은, 만화(萬化)를 가져다 일심(一心)으로 묶고, 일심(一心)에 나아가 자성(自性)을 밝히심이다. 자성(自性)의 본체(本體) 됨됨이는 담적(湛寂)하고 허현(虛玄)해서 이름이나 형상을 아득히 초절(超絶)한 것이지만, 큰 자비이기 때문에 사리의 올바른 기틀에 따라 이름을 붙여 밝히게 되니, 혹은 진여(眞如)라 하고, 혹은 적상(寂相)이라 하고, 혹은 반야(般若)라 하고, 혹은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니, 하나의 법체(法體)에 천(千)의 이름이 인연 따라 불려 지게 된 실상은 모두가 한 진리[道]이다.
성인으로서 깨달은 것을 보리(菩提)라 하고, 군생(群生)으로서 어두운 것을 번뇌라 하니, 성인은 깨달은 것으로 어두움을 열어주시니, 이에 형상이 없으면서도 백천(百千)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말씀이 없으면서도 대천의 경권(經卷) 말씀으로 설하셨다. 기미[機]는 종류에 따라 나뉘고, 말씀도 길에 따라 다르지만, 귀결되는 요점은 삼장(三藏)을 초월하지 않고, 수행(修行) 방편으로 제시하심도 계(戒)·정(定)·혜(慧)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계(戒)는 몸이나 입에 대한 규범이요, 정(定)·혜(慧)는 성정(性情)을 다스리는 것으로 가까운 곳이거나, 먼 것이거나 어느 것인들 이 길로 가지 않음이 있겠는가.
성종 25년 갑인년(1494년, 홍치 7년), 성종대왕(成宗大王)이 융성히 정치하시다가 갑자기 신민(臣民)을 버리시고 떠나니, 한 나라가 황황(遑遑)하여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았습니다. 우리 왕대비전(王大妃殿)께서도 울부짖고 몸부림쳐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시니, 추원(追遠)이 되고 천복(薦福)이 되는 것이라며 극진한 정성을 쓰시지 않음이 없으시어, 이에 경(經)·율(律)·논(論) 중에 사람의 눈을 띄울 수 있는 것을 가리어 번역 출간하게 하셨으니, 법화경(法華經)·능엄경(楞嚴經) 각각 50건, 금강경 육조해(金剛經 六祖解), 심경(心經), 영가집(永嘉集) 각각 60건, 석보상절(釋譜詳節) 20건이었다. 또 한자(漢字)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50건도 인출(印出)하게 하니 여섯 경전[經] 합해서 300건이었다.
명복을 비는 자량(資糧)으로 삼아 연상기(鍊祥期)에 이르러 33인의 정려(淨侶)를 모아 돌려 읽게 하여 낙성하고, 임천(林泉)에 있는 승도(僧徒)에게도 두루 나누어, 누구나 그 뜻을 연구할 수 있게 하여 무언(無言)의 밀지(密旨)를 널리 펴내고, 누구나 볼 수 있는 경전을 열어 주셨다. 불이(不二)의 문이 널리 열려 길을 몰라 우는 나그네를 인도하고, 법성(法性)의 바다 넘실대어 물 밑의 달을 더듬는 어리석은 원숭이를 구제하셨다. 사생(四生)·십류(十類)를 몰아 항상 즐거운 고향에 이르게 하셨도다.
우리 선왕(先王)의 하늘에 계신 영체(靈體)도 이 넓고 큰 인연을 타시어 위(爲) 없는 위(爲)가 있어, 일천 계단으로 나아가 신령의 원천을 밟으시고, 이룸 없이 이루어져서 온갖 사물을 당하셔도 암암리에 이 크고 큰 대방(大方)의 불계[佛]를 밟으시어, 하나의 미진(微塵)을 여의지 않고도 여래의 광대한 찰토(刹土)를 활보하신다면, 우리 대비전하(大妃殿下)께서도 추모하시고 천복하시는 모든 일이 다할 것입니다.
아! 지극하도다. 만약 사람마다 원래 간직한 한 권의 경전을 한갓 문자(文字) 언어(言語) 사이에서만 찾고 마음으로 터득하지 못하면,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거나, 손가락 끝으로 달을 지적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우리 대비전하(大妃殿下)께서 이 특수한 인연을 지어 법려(法侶)들에게 널리 보시하시고, 대적멸(大寂滅)의 바다에 노니시도록 복을 비셨으니, 원왕(願王)이 되게 하심이 어찌 언어와 문구에만 있겠는가. 원대(遠大)한 뜻이 포함되어 있음은 진실로 생각도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뒷날 배우는 이는 의당 이것으로 경책(警策)을 삼게 되면 황엽(黃葉)은 끝내 돈이 아님을 결단코 알 것이다.
연산군 원년(1495년, 홍치 8년) 추8월 하한(下澣) 황악산인(黃岳山人) 학조(學祖) 공손히 발(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