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미 이 사람이. 문맥으로 보면, ‘이 사람’이 가리키는 것은 여망(呂望), 제갈(諸葛), 주공(周公), 공자(孔子)이다. 이들은 그들이 살던 당시 세상을 구원하려고 노력한 인물들이다. 두보가 살던 당시의 장호(張鎬), 방관(房琯), 엄무(嚴武) 등과 같은 인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일도 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서로 세상을 구원하기로 기약한 벗들이다(한성무 외(1997) 참조). ‘마른 무덤이 되었다’고 하는 싯구에서 보면 앞의 인물들이 너무 오래 전의 사람들이라는 것이 지적될 수 있다.
여망(呂望)은 속칭 강태공(姜太公)의 씨명(氏名)이다. 씨(氏)가 여(呂), 이름이 상(尙)이어서 여상(呂尙)인데, 본성이 강(姜)이었다고 한다. 자는 자아(子牙) 혹은 단호아(單呼牙). 다른 이름으로 ‘망(望)’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망(呂望)으로도 불린다. 기원전 1156년에 나서 1017년에 139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전후 주나라의 6왕을 보좌하고, 제(齊)나라의 시조가 되어 ‘태공망(太公望)’으로 칭하였다.
제갈(諸葛)은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말한다. 제갈량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 전략가였다.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다음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와 익주(益州)를 차지하였다. 그 후도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워, 장무(章武) 1년(221)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두산백과 참조〉.
주공(周公)은 중국 주나라의 정치가(?~?). 문왕의 아들로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 중국 주(周)나라의 정치가. 이름은 단(旦). 주왕조를 세운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무왕(武王)의 동생. 무왕과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을 도와 주왕조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은족(殷族)의 대표자 무경(武庚)과 녹부(祿夫), 그리고 주공의 동생 관숙(管叔), 채숙(蔡叔) 등이 동이(東夷)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켰는데, 주공은 소공(召公)과 협력하여 이 난을 진압하였다. 은을 회유하기 위하여 주초(周初) 대봉건제(大封建制)를 실시하여 주왕실의 수비를 공고히 하였다. 유교학자에 의해 성인으로 존숭되고 있다. 예악 제도(禮樂製度)를 정비하였으며, 《주례(週禮)》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두산백과 참조〉.
공자(孔子)는 세계 4대 성인의 하나.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 학자(B.C.551~B.C.479).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나라 사람으로 여러 나라를 주유하면서 인(仁)을 정치와 윤리의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설파하여 덕치 정치를 강조하였다. 만년에는 교육에 전념하여 3,000여 명의 제자를 길러 내고, 《시경》과 《서경》 등의 중국 고전을 정리하였다.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하여 놓은 《논어》 7권이 있다.〈표준국어대사전 참조〉.
장호(張鎬, ?~764)는 당나라 때의 중신(重臣)으로, 자는 종주(從周)이고 지금의 요성시(聊城市)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첨보(天宝) 말년에 좌습유(左拾遗)의 벼슬을 하였고, 현종(玄宗)을 극진히 따랐고, 숙종(肃宗)이 즉위하자 보필하여 간의대부(谏议大夫)가 되고, 중서(中書)로 옮겨 시랑(侍郞)이 되고 중서문하(中書门下)에서 평장사(平章事)가 되고, 숙종 때에는 ‘안양창생(安养苍生,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는 것)’을 권하기도 하도 불사(佛事)를 믿지 말 것을 권하였다. 그는 봉명(奉命) 겸 하남 절도사가 되어 회남(淮南) 등의 제군(诸軍)을 통솔하였다. 안사의 난을 토벌한 인물로, 군기를 엄히 세워 군대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매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방관(房琯, 697~763)은 당나라 현종(玄宗)과 숙종(肅宗) 때의 재상. 하남(河南)의 구씨(缑氏, 지금의 언사구씨진(偃师缑氏镇) 사람으로, 자는 차율(次律), 부친은 융(融)이었다. 무즉천(武则天, 624~705) 시에는 정간대부(正谏大夫), 봉각만대(鳳閣蠻臺)의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방관은 어려서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성품이 침착하고 조용하여, 동평여향(東平呂向)과 함께 육혼이양산(陸浑伊陽山) 속에서 책을 읽으며 지냈다. 개원(開元) 12년(726) 불과 10여세에 『봉선서(封禪書)』 1편과 전(箋)과 계(啓)를 지어 바쳤는데, 그것이 당시의 중서령(中書令) 장열(張說)의 마음에 들었다. 장열은 그를 뛰어난 인재로 보아, 비서성(秘書省)의 교서랑(校書郞)으로 추천하였다. 그후 당 조정은 두보의 후원자였던 방관(房琯, 697~763)을 재상의 직에서 파면하였다. 패전의 책임을 그에게 물은 것이다. 이에 두보도 좌습유의 벼슬을 내놓게 되었다.
엄무(嚴武)는 개원(開元) 13년(725) 생으로, 두보의 절친한 친구이고 후원자였던 인물. 궁중의 문서나 조칙 따위를 맡아보았던 중서(中書)의 시랑이었던 정(珽)의 아들. 신동의 기운을 가지고, 견문을 널리 쌓았으며, 어렸을 때에도 어른의 풍모를 풍겼다고 한다. 용우(隴右) 절도사 가서한(哥敍翰)의 진언으로 판관(判官)이 되고 다시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광덕 2년(764)에는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다. 엄무는 두보를 천거해서 절도참모(節度參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삼았다. 두보가 53세(영태(永泰) 1, 765)로 관직을 사퇴하였을 때 성도 근교 완화계(浣花溪) 부근에 초당을 마련하여 평온한 나날을 보내게 하였다. 4월에 엄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두보는 그의 유일한 후원자를 잃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