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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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4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4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모아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조선 성종의 명을 받은 유윤겸(柳允謙), 유휴복(柳休復),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언해하여 성종 12년(1481)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언해 시집이다. 모두 25권 17책으로 을해자본이며 이 책은 보통 줄여서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임홍빈(任洪彬)

1944년 경기도 개성 출생, 아호 학여(學如).

송도국민학교. 용강국민학교. 숭문중학교. 숭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석사과정), 문학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박사과정). 문학박사(1987)

해군사관학교 국어교관,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 조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농과대학 시간강사,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전임강사, 조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교수(현),

한국언어학회 회장 엮임.

대한민국 학술원상 수상.

저서와 논문

≪국어문법론(공저)≫(1983),

≪국어의 재귀사 연구≫(1987),

≪뉘앙스풀이를 겸한 우리말 사전≫(1993),

≪국어 문법론 I(공저)≫(1995),

≪북한의 문법론 연구≫(1997),

≪국어 문법의 심층≫(1998),

≪우리말에 대한 성찰≫(2005),

≪한국어의 주제와 통사 분석≫(2007)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2011)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1≫(2012) 외 10여편

"국어의 주제화 연구",

"On the Real Nature of Scrambling in Korean"

외 100여편

역주위원

  •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4 : 임홍빈
  • 교열·윤문·색인위원

  •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4 : 박종국, 홍현보
  • 편집위원

  • 위원장 : 박종국
  • 위 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 김석득 김영배 노원복
  • 리의도 박병천 오명준
  • 이창림 이해철 임홍빈
  • 전상운 정태섭 조오현
  • 차재경 최홍식 한무희
  • 홍민표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를 내면서

우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68년 1월부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을 국역하기 시작하여 447책을 펴내 실록을 완역하였고, 『증보문헌비고』 40책 완간 등 수많은 국학 자료의 번역사업을 벌여 오고 있다. 아울러 1990년 6월부터는 “한글고전 역주 사업”의 첫발을 내디디어, 『석보상절』 권6․9․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그 성과물을 간행하여 왔다. 이제 우리 회는 올해로써 한글고전 역주 사업을 추진한 지 21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를 맞게 되었고, 600책이 넘는 국역 학술 간행물이 말해 주듯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 국역‧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국역 사업을 벌이는 뜻은 바로 백성과의 소통을 통하여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까지 역주하여 간행한 문헌과 책 수는 『석보상절』 4책, 『월인석보』 17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남명집언해』 2책,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1책, 『구급방언해』 2책, 『금강경삼가해』 5책, 『선종영가집언해』 2책, 『육조법보단경언해』 3책, 『구급간이방언해』 5책, 『진언권공, 삼단시식문언해』 1책, 『불설아미타경언해, 불정심다라니경언해』 1책,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 1책, 『목우자수심결․사법어 언해』 1책, 『신선태을자금단․간이벽온방․벽온신방』 1책,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1책, 『언해두창집요』 1책, 『언해태산집요』 1책, 『삼강행실도』 1책, 『이륜행실도』 1책, 『정속언해‧경민편』 1책, 『상원사중창권선문‧영험약초‧오대진언』 1책,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1책, 『두시언해』(권10, 11) 2책, 『여씨향약언해』 1책, 『번역소학』(권6ㆍ7ㆍ8ㆍ9ㆍ10) 1책, 『소학언해』 4책, 『논어언해』 2책, 『대학언해』 1책, 『중용언해』 1책, 『맹자언해』(권1ㆍ2ㆍ3ㆍ4ㆍ5) 1책, 『연병지남』 1책 등 모두 90책이다.

이제 우리가 추진한 “한글고전 역주 사업”은 15세기 문헌을 대부분 역주하고 16세기 이후 문헌까지 역주하는 데 이르렀다. 올해는 『분류두공부시언해』・『병학지남』 등 15~16세기 문헌을 중점적으로 역주할 예정이다.

이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는,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모아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조선 성종의 명을 받은 유윤겸(柳允謙), 유휴복(柳休復),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언해하여 성종 12년(1481)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언해 시집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모두 25권 17책으로 을해자본이다.(후대에는 19책, 20책도 있음) 이 책은 보통 줄여서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두시언해』는 다른 언해서와는 달리 입겿(토)이 없고, 한글과 한문 혼용인 언해문의 한자에도 한글 독음이 달리지 않았다. 두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 때부터 행하여졌다고 하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처음 이루어진 것이다. 이 책의 책이름에 보이는 공부(工部)는 두보의 관명(官名)이고, 분류(分類)는 시를 기행, 술회, 질병, 회고, 시사(時事) 등과 같이 내용에 따라 분류하였다는 뜻이다. 두시는 71문(門)에 총 1,467수와 다른 사람 작품 16수로서, 그 소재는 세상사에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라를 사랑하는 충정과 같은 인간애가 담겨 있으며, 당시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면밀하게 비판한 사실적인 서사(敍事)인 데서 시사(詩史)라 일컬어지는 위대한 작품이다.

이번에 이 『두시언해』 권14을 역주함에 있어서, 그 저본으로는 우리 회가 1978년에 초간본을 원척(原尺) 영인한 한지 장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이 귀중한 『두시언해』를 우리 회에서 역주 간행함에 있어, 역주를 위해 애써 주신 서울대학교 임홍빈 명예교수님과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준 교육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3년 10월 30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과 한글 관계 문헌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15~17세기의 우리말을 연구하는 전문학자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이를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며 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본 『분류두공부시언해』의 저본으로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78년에 초간본을 원척(原尺)으로 영인한 한지 장본을 사용하였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한문 원문․언해 원문․현대어 풀이․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는데, 특별히 한시를 언해하였으므로 그 운율을 알기 쉽도록 시 제목과 한시 원문은 그대로 음을 달고 풀이를 이어붙였다. 원전과 비교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장(張)․앞[ㄱ]․뒤[ㄴ] 쪽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제2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倚薄 2ㄱ附著也ㅣ라

제3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이 조 서르 보3ㄴ미녀

(3) 현대말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4) 원문 내용(한문 원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 풀이문․주석과 구별하였으며, 원문 가운데 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다.

(5) 현대말 풀이에서, 옛글의 구문(構文)과 다른 곳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충한 말은 〈 〉 안에 넣었다.

(6) 찾아보기 배열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초성순 : ㄱ ㄲ ㄴ ㅥ ㄷ ㄸ ㄹ ㅁ ㅱ ㅂ ㅲ ㅳ ㅃ ㅄ ㅴ ㅵ ㅷ ㅸ ㅅ ㅺ ㅻ ㅼ ㅽ ㅆ ㅾ ㅿ ㅇ ㆀ ㆁ ᅙ ㅈ ㅉ ㅊ ㅋ ㅌ ㅍ ㅎ ㆅ

② 중성순 :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ㆉ ㅜ ㅝ ㅞ ㅟ ㅠ ㆌ ㅡ ㅢ ㅣ ㆍ ㆎ

③ 종성순 : ㄱ ㄴ ㄴㅅ ㄴㅈ ㄴㅎ ㄷ ㄹ ㄹㄱ ㄹㄷ ㄹㅁ ㄹㅂ ㄹㅅ ㅀ ㅁ ㅁㄱ ㅯ ㅰ ㅂ ㅄ ㅅ ㅺ ㅼ ㅿ ㆁ ㅈ ㅊ ㅋ ㅌ ㅍ ㅎ

3. 역주자 일러두기

(1) 역주는 가능한 한, 자세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처음에 나온 것도 뒤에 나오면 다시 역주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지나치게 앞의 부분을 참조하게 하면, 역주의 효용이 반감되는 것이란 생각에 의한다.

(2) ‘이다’ 즉 ‘이-’를 학교 문법에서는 ‘서술격 조사’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정 형용사’란 이름으로 ‘이-’를 가리키기로 한다. ‘이-’는 형용사임이 분명한데, 종래에는 이를 형용사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 활용의 양상이 형용사와 동일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 어미 ‘-으니, -으려, -으면, -은, -을’ 등과 같이 흔히 ‘으’를 앞에 가지는 어미를 일반적으로 하나의 어미로 취급하나, 여기서는 ‘으’와 후행하는 ‘-니, -려, -면, -ㄴ, -ㄹ’ 등을 구별하여 ‘으’를 조음소로 분석하는 방식을 취한다. 어미와 달리 조사에 대해서는 조음소를 설정하지 않는다.

(4) 미래 관형사형 어미 ‘-ㄹ’ 혹은 미래 동명사 어미 ‘-ㄹ’은 ‘-ㅭ’으로 분석한다. 예를 들면, 〈훈민정음〉 세종 서문에 나타나는 ‘니르고져  배’의 ‘’이 ‘[爲]-+-오(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ㅭ(미래 관형사형 어미)’과 같이 분석되는 것과 같이, ‘가-[去]’의 미래 관형사형 ‘갈’에 대해서도 ‘가-+-ㅭ(미래 관형사형 어미)’과 같이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15세기 문헌에 실제로 미래 관형사형 어미나 동명사 어미가 ‘-ㅭ’으로 나타나는 예도 있고, 단순히 ‘-ㄹ’로 나타나는 예도 있는데 이를 ‘-ㅭ’과 같이 통일하여 나타내로 한다.

(5) 중세어의 ‘-오, -우, -옴, -움’에 대해서 필자는 이들이 ‘-오-+-, -우-+-, -오-+-ㅁ. -우-+ㅁ’과 같이 분석하고, 때로 ‘-오, -우, -옴, -움’과 같이 분석되는 것을 재구조화된 형식으로 제시하기로 한다. ‘-샤-’를 ‘-시-’의 이형태로 분석하는 것을 지양하여, ‘-시(주체 높임 선어말 어미)-+-아(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로 분석한다. 이는 중세어의 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 ‘-오/우-’가 ‘-아-’라는 제3의 이형태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6) 중세어의 선어말 어미 ‘-오/우-’는 위에서 암시한 바와 같이 ‘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와 같이 주를 달기로 한다. ‘-오/우’에 대해서는 허웅(1963)의 인칭․대상 활용설이 있고, 이숭녕(1964)의 의도법설이 있는 것이지만, 어느 것이나 현상의 설명력에는 한계를 가진다. 임홍빈(1981)에 따라 ‘-오/우/아-’를 확실성의 양태를 나타내는 요소로 보기로 한다.

(7) ‘처격 조사, 조격 조사’ 등은 학교 문법에서 ‘부사격 조사’이므로, 대부분의 예에 대하여 ‘에(부사격 조사, 처격 조사)’와 같이 두 가지 술어를 병기하기로 한다. 그 기능에 따라 가령 ‘창문을 나무로 만들었다’와 같은 예의 ‘나무로’의 ‘로’와 같으면 ‘로(부사격 조사, 조격 조사)’와 같이 주석하기로 한다.

(8) 형태소 분석에서 ‘+’ 기호는 대체로 용언의 어간과 어미 사이, 체언과 조사 사이 및 어미와 어미, 조사와 조사 사이에 쓰고, ‘#’ 기호는 어기와 어기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에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그 결합이 긴밀한 합성어의 두 어기 사이에는 ‘+’ 기호를 쓰기로 한다. 때로 어원적인 분석을 보인 일이 있는데, 이때에는 어원적인 단어 사이에 ‘#’ 기호를 쓰기로 한다. 용언의 어간, 어미, 선어말 어미, 접미사 등에는 관례에 따라 그 앞이나 뒤에 하이픈 ‘-’을 표시하기로 한다.

(9) ‘ㅎ’ 종성 체언은 가령 ‘[地]’와 같으면, ‘’와 같이 표시하는 방법도 있으나, 여기서는 ‘ㅎ’과 같이 ‘ㅎ’을 선행 음절에서 따로 분리하여 표시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15세기 어형이 현대어형과 이질적인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다.

(10) 언해본에서 두시의 원문은 대체로 대구(對句)의 두 구가 한 행으로 중간에 띄어짐이 없이 인쇄되어 있다. 5언 시와 같으면 10자가 한 행이 되고 7언 시와 같으면 14자가 한 행이 된다. 여기서는 이를 의미의 단위에 따라 한 행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제시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한다.

(11) 한시 원문에 대해서는 행 단위로 우리의 전통 한자음을 한글로 표시하여 원문과 나란히 제시하기로 한다. 이는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이 부분의 한자음에 대해서는 우리말의 구개음화 규칙이나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12) 주해의 표제어는 언해 원문에 나타난 단어나 구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한자어는 그 한자음을 표제어로 하고 해당 한자를 괄호 속에 넣어 표시하는 방법을 취하기로 한다. 한자음은 현대 우리말의 한자음을 취한다.

(13) 두시 가운데는 같은 제목이나 형식을 가진 시가 연작시와 같이 나열된 시가 있다. 언해에서는 그들 각각의 시를 단지 별행으로 시작하고 있다. 본 주해는 행 단위로 된 것이기 때문에, 시들이 어디서 나누어지는지 알기 어렵다. 이를 고려하여 본 역주에서는 단위 시가 끝나는 위치에 그 순서를 ‘여기까지가 첫째 수이다’와 같이 괄호 속에 나타내 보이기로 한다.

(14) 주해에서는 형태소 분석과 함께 각 형태소의 기능을 괄호 속에 표시하기로 한다. 그러나 제시형이 형태소를 엄격하게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제시형은 이형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한다. 가령 연결 어미 ‘아/어’와 같으면, ‘-아(연결 어미)’나 ‘-어(연결 어미)’와 같이 표시하였다. 그러나 ‘-야’는 ‘j(조음소)+아’와 같이 분석해 보이기로 한다. 형태소의 개념을 적용한 것은 의문형 어미 ‘-가, -고’ 및 대상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 ‘-거-’ 등과 같은 예의 표시에 국한된다. 이들에 대해서는 가령 나타난 형태가 ‘-아’ 또는 ‘-오’라고 하여도 그 형대소를 ‘-가’ 또는 ‘-고’와 같이 밝혀 나타내기로 한다.

(15) 역주와 용례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이미 세상에 펴낸 역주본을 많이 참고하였다. 이미 많은 중세어 자료들이 역주된 상태이므로, 거기서 풍부한 자료와 해석을 접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이전 역주본의 역주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 및 한자 성어 고사를 다룬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혹 일일이 그 출처를 밝히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 일일이 그 출처를 밝히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넓은 혜량 있으시기 바란다.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4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두보의 일생

두보(杜甫, 712~770)는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성당시대의 위대한 시인으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이다. 두보의 조상은 대대로 양양(襄陽)에서 살아왔으나, 두보는 호남성 공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두보는 『좌씨경전집해(左氏經傳集解)』의 저자인 두예(杜預, 222~284)의 13대손이며, 당나라 초기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의 손자이다. 부인 양(揚) 씨와의 사이에는 종문(宗文), 종무(宗武) 두 아들을 두었고 딸도 몇 있었다고 한다.

두보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낙양(洛陽)의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일곱 살 때에 시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하고, 아홉 살 때에는 이미 지은 시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조숙하였고, 자부심이 강하였다. 14, 5세 때 이미 문단에 나아가 자기보다 나이가 월등하게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20대에 접어들어 진(晉, 산서성), 오(吳, 강소성), 월(越, 절강성) 등을 유랑하고 23세 때에는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24세 때에 경조(京兆, 서안 즉 장안과 그 부근)로 돌아와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다시 산동성(山東省)과 하북성(河北省) 등을 유랑하였다. 이때 이백(李白, 699~762)과 낙양에서 만났다. 이백은 천보(天寶) 3년(744, 두보 32세) 조정에서 추방되어 산동성으로 가고 있었다. 이 유랑의 길에서 고적(高適, ?~765), 이옹(李邕, 678~747) 등과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다.

천보 5년(746, 두보 34세), 두보는 장안으로 갔다. 장안에서 그는 거의 10년 동안 과거시험에 들지도 못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보내야 했다. 그는 자기의 실력을 알리기 위해 38세 때 현종에게 〈조부(鵰賦)〉를 지어 바쳤고, 천보 10년(751, 두보 39세)에는 〈삼대예부(三大禮賦)〉를 지어 바쳤다. 〈삼대예부〉를 지어 바친 것이 주효하여 집현원(集賢院)에 대제(待制)하게 되었고, 이듬해에 선서(選序, 관리임용 후보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임용되지 못하였다. 장안에서의 두보의 생활은 불우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두보의 눈은 차츰 사회의 불합리와 모순으로 향하게 되었다. 천보 10년, 당나라는 전쟁에서 남조(南詔), 대식(大食), 거란(契丹)에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는 병사를 보충하기 위하여 농민을 끌어가고 조세도 무겁게 부과했다. 개원 연간에는 농사도 풍년이 들었으나 천보 연간에 들어오면서 기근이 잇달았다. 천보 13년(754, 두보 42세)에는 장마가 계속되어 기근이 심해지고 생활이 어려워졌다. 두보는 처자를 한때 봉선현(奉先縣)에서 농사를 짓는 친척집에 맡기기도 하였다. 천보 14년(755, 두보 43세)에는 우위솔부(右衛率府)의 주조참군(冑曹參軍) 즉 금위군(禁衛軍)의 무기고 관리라는 아주 낮은 관직을 얻었다. 이 소직(小職)이 자기 포부를 실현하기에는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아, 자신을 비웃는 심정을 피력한 일도 있었으나, 소직이나마 얻은 것이 기뻐 처자를 만나러 장안을 출발해서 봉선현으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 두보는 여산(驪山) 온천에서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된다. 두보는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큰 세상에 커다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선현에 도착해 보니 처자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고 어린 자식은 굶어죽은 상태였다.

천보 14년(755, 두보 43세) 11월 9일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 조정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였고, 수도 장안까지 반란군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현종은 모든 영화를 버리고 촉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위도 아들 숙종(肅宗)한테 넘어가 버렸다. 두보는 난을 피하여 가족들을 이끌고 섬서성(陝西省) 백수현(白水縣) 부주(鄜州) 등지로 옮겨 다녔다.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하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을 부주 교외의 강촌(羌村)에 남겨 두고, 영하성(寧夏省)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숙종 휘하로 가던 도중 두보는 반란군에 잡혀 도로 장안(長安)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수도는 황폐해졌고 반란군이 거리에서 활개치고 다녔다. 두보는 장안에서 겨우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생활을 하면서 망국의 비애를 시로 옮기면서 가족의 안부를 염려했다.

지덕(至德) 2년(757, 두보 45세) 반란군의 내분으로 안녹산이 살해되었다. 두보는 4월에 장안을 탈출하여 남루한 몰골로 섬서성의 봉상 행재(行在)에서 숙종을 알현하였다. 황제는 그 해 5월 두보를 간관(諫官)인 좌습유(左拾遺)에 임명하였다. 그 해 말에 장안이 관군에 의해 탈환되자, 두보는 장안의 궁정에서 좌습유의 관료생활을 하게 되었다. 건원(乾元) 1년(758, 두보 46세) 5월까지 두보는 장안의 조정에 있었으나, 당나라 조정은 두보의 후원자였던 방관(房琯, 697~763)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를 재상의 직에서 파면하였다. 이에 두보도 죄습유의 벼슬을 내놓게 되었다.

건원 1년, 낙양으로 가는 길이 뚫려 두보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해 반란군 사사명(史思明)과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顔慶緖)에게 관군이 크게 패하여 낙양이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자, 두보는 다시 화주로 돌아왔다. 건원 2년(759, 두보 47세)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국경에 있는 진주(秦州, 감숙성 천수현)로 옮겼다. 진주에서 겨우 4개월간 머물렀지만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동곡(同谷, 감숙성 성현) 땅이 기후도 좋고 식량도 구하기 쉽다는 소리를 듣고 10월에 동곡을 향하였다. 그곳에서 1개월을 지냈지만 생활은 더욱더 곤궁해져서 12월 초에 사천(四川) 지방의 성도(成都)로 갔다.

성도에서 두보는 성도윤(成都尹) 겸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인 옛 친구 엄무(嚴武)를 만났다. 엄무는 두보에게 누구보다도 큰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엄무는 두보보다 10년이나 연하였으나, 세교(世交)도 있는 터여서, 성도의 교외 완화계(浣花溪) 부근에 초당을 마련해 주었다. 두보는 거기에서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보응(寶應) 1년(762, 두보 50세) 엄무가 서울로 소환되고, 성도 근처에서 서지도(徐知道)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다시 난을 피해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광덕(廣德) 1년(763, 두보 51세) 1월, 9년에 걸친 안사의 난이 끝났으나 위구르족과 토번(吐番)의 침입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천 지방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에 엄무가 다시 성도에 돌아오게 되어, 두보도 광덕 2년(764, 두보 52세)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다. 엄무는 두보를 천거해서 절도참모(節度參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삼았다. 그러나 엄무의 막중(幕中)에서의 생활은 두보에게 맞지 않았다. 폐병 및 중풍 등의 병도 있어 영태(永泰) 1년(765, 두보 53세) 1월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초당의 생활로 돌아왔다.

영태 1년 4월에 엄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두보는 유일한 후원자를 잃고 5월에 처자를 이끌고 배로 양자강(揚子江)을 내려와서 다시 표류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8월 15일 추석이 지난 후에는 운안(雲安, 지금의 운양)으로 내려왔다. 폐병과 중풍 때문에 여행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져서 대략 반년 동안 거기서 요양생활을 했다. 이때 사천 지방에서는 내란이 일어났고 북방에서는 티베트족과 위구르족 침입으로 시국은 점점 더 험악하여졌다. 이듬해 대력(大曆) 1년(766, 두보 54세) 늦은 봄 두보는 병이 얼마간 나아지자 다시 강을 따라 내려가서 기주(夔州, 사천성 봉절현)로 갔다. 대력 1년 늦은 봄부터 대력 3년 봄까지 약 2년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기주에 온 이래로 2년 동안 두보는 430여 수에 이르는 많은 시를 지었다.

대력 2년(767, 두보 55세) 봄에 서각(西閣)에서 적갑산(赤甲山) 기슭으로 옮겼고, 3월에는 양서(瀼西)의 초당으로 옮겼다. 이 무렵의 생활은 기주의 도독(都督) 백무림(柏茂林)의 도움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두보의 건강은 쇠약해져서 폐병, 중풍, 학질에다 당뇨까지 겹치고 가을이 되면서 왼쪽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대력 4년(769, 두보 57세) 1월 두보는 악주(鄂州)에서 배를 타고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1년 수개월간 두보 일가는 동정호를 떠돌아다녔다. 그 후 두보는 담주(潭州)로 가서 거적으로 위를 가린 배를 집 삼아 지내며 부자유스런 몸으로 약초를 캐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그 해 4월 담주에서 난이 일어나자 두보 일가는 다시 난을 피해 상강(湘江)을 거슬러 올라가 침주(郴州)에 있는 외가쪽 숙부를 찾아가는 도중에 뇌양(耒陽)에서 홍수를 만나 방전역(方田驛)에 정박했는데 5일간 먹을 것이 없었다고 한다. 대력 5년(770, 두보 58세) 가을과 겨울 사이 두보는 담주에서 악양(岳陽)으로 가는 배 안에서 객사하였다고 한다.

뇌양에서 홍수에 막혀 여러 날 굶고 있었는데, 뇌양 현령이 그것을 알고 전해 준 우적(牛炙, 소고기 구이)과 백주(白酒, 소주의 일종, 흰술)를 먹고 그날로 죽었다고 한다. 가족은 그의 관을 향리로 운반할 돈이 없어 오랫동안 악주(鄂州)에 두었는데, 그 후 40여 년이 지난 뒤 두보의 손자 두사업(杜嗣業)이 낙양 언사현(偃師縣)으로 운반하여 수양산(首陽山) 기슭에 있는 선조 두예(杜預)의 묘 근처인 조부 두심언(杜審言)의 묘 옆에 묻었다고 한다.

2. 『두시언해』의 해제

2.1. 『두시언해』의 성격

『두시언해』는 중국 성당시대의 시성(詩聖)인 두보의 시를 언해한 책으로, 조선조 8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명으로, 성종 12년(1481, 성화(成化) 신축년) 가을에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제(原題)는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이며, 25권 17책(혹은 19책)의 을해자 활자본이다. 이를 흔히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 부른다. 『두시언해(杜詩諺解)』는 그 약칭이다.

제목에 들어 있는 ‘두공부(杜工部)’의 ‘두’는 ‘두보(杜甫)’의 성이며, ‘공부(工部)’는 두보가 52세(광덕 2, 764)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을 때, 엄무의 천거에 의하여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 되었는데, 바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공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식의 관직명대로 한다면 ‘공부원외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원외랑’을 생략하고 그냥 ‘공부’라고만 부른 것이다.

제목에 들어 있는 ‘분류’란 말은 두보의 시를 내용별로 분류하였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원나라 때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편찬되었는데, 조선조 때에도 세종 때 『찬주분류두시』가 편찬되었다. 『두시언해』는 이를 기초로 두보의 시 1,46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언해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는 가령 권10에 실려 있는 정국공(鄭國公) 엄무(嚴武)가 지은 〈군성조추(軍城早秋)〉와 같은 시를 말한다. 14권에도 이옹(李邕)의 〈등력하고성원외손(登歷下古城 員外孫) 신정(新亭)호니 정(亭)이 대작호(對鵲湖)니라 시(時)예 이지방(李之芳)이 자상서랑(自尙書郞)로 출제주(出齊州)야 제차정(製此亭)니라〉와 같은 긴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22권에도 〈수별두이(酬別杜二)〉라는 제목을 가진 엄무의 시가 실려 있고, 22권에는 〈증두이습유(贈杜二拾遺)〉라는 고적(高適)의 시도 있다.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를 『분류두공부시언해』라 부르는 것은 한문으로 된 두시 원문과 두시를 우리말로 언해한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편의상 붙인 명칭이다. 『두시언해』 각권의 권두제나 권말제에는 어느 곳에도 ‘언해(諺解)’라는 이름이 쓰인 것이 없다.

2.2.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

이미 나와 있는 『두시언해』에 대한 해제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2년, 즉 1481년으로 보고 있다. 『두시언해』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그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 이를 따르고 있으므로,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1481년으로 보는 것이 매우 일반화되어 지금은 우리의 상식이 되고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간행을 1481년 가을에 성종이 명하고 그 전(全) 25권이 1481년 12월 상순(上旬)에 완간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와 반치음의 변화를 토대로 추측하면, 『두시언해』 초간본의 완간은 1489년 즈음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역주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의 해제를 참조하기 바란다.

2.3. 『두시언해』의 편찬자

『두시언해』의 편찬에 유윤겸, 조위, 의침, 유휴복 등이 언해에 참여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의침이나 유휴복은 두시를 주석하는 일에는 참여하였으나, 두시를 언해하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성종의 명을 받은 것이 유윤겸이므로, 『두시언해』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 문신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위(曺偉)는 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벼슬을 많이 하였으나,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성종 11년(1480) 당시 김흔과 조위가 홍문관의 관원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는 두시 언해 참여자가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의 문신들이었음을 말해 준다.

2.4. 『두시언해』의 저본

세종은 25년(1443) 4월 21일에 집현전 학사들에게 중외(中外)에 두시(杜詩)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를 구입(購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세종은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이다.

이 편찬 작업을 맡은 것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신석조(辛碩祖) 등 6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회주본(會註本)이 세종대에 간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485년(성종 16)에 간행된 갑진자본(甲辰字本)과 병자자본(丙子字本)이다.

『두시언해』가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하여 편찬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해를 모으고 그것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서 이미 주석본이 만들어졌다면, 언해를 할 때에 그것을 참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책의 권차, 시를 분류한 문목(門目), 시의 제목과 본문 등에 있어서 『두시언해』의 체재는 대체로 『찬주분류두시』의 체재와 일치한다. 『찬주분류두시』는 언해본이 아니므로 당연히 언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 언해본에도 협주가 있으나 그 양은 『찬주분류두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찬주분류두시』는 회주본(會註本)이나 회전(會箋)의 성격을 가지므로, 주석의 양이 많다.

이 외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행을 나누는 방식의 차이이다. 『두시언해』는 거의 예외 없이 두시에서 대가 되는 2행씩을 한 행으로 잡은 데 대하여, 『찬주분류두시』에서는 행의 길이가 들쑥날쑥하여 일정하지 않다.

문제는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 판본이 전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전하는 『찬주분류두시』 판본에는 갑진자본(1485년), 병자자본(1523년 추정), 갑인자본(1524년), 훈련도감자본(1615년) 등이 있으나, 『두시언해』의 편찬이 시작된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가 있을 것으로 가정되고 있을 뿐이다.

2.5. 『두시언해』 권14의 판식

이제 역주하는 저본은 을해자로 된 활자본으로,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반광곽(半匡郭)은 가로 14.6cm, 세로 21.5cm, 유계(有界) 8행 17자, 번역문 및 협주는 쌍행 17자이며, 판심은 상하 내향 2엽 흑어미이다.

여기에 보인 사진은 1978년 1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초간본을 복원(復元)하여 영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해는, 한문 원문에 구결을 달고,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표시하고, 또 한문 원문의 이해에 필요한 주석을 부가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통상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두시 원문에 구결이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다른 언해본과는 눈에 띄게 다른 점이다. 『찬주분류두시』에도 두시 원문에는 어떠한 종류의 구결도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불경 언해와 차이지는 점이다. 『두시언해』가 일반 대중이나 초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자, 한문에 능숙한 지배 계층을 위한 책이므로, 한자에 한자음을 적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주석에는 구결이 달려 있어, 『찬주분류두시』와 다르다. 『찬주분류두시』의 주석과 『두시언해』의 주석은 같은 것이 아니다. 『찬주분류두시』는 우리말 번역을 가지지 않는 회주본이므로 자연히 주석의 양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두시언해』에는 『찬주분류두시』의 한문 주석의 내용이 상당 부분 번역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주석의 양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언해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내용을 주석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두시언해』 14권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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