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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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冬)
  • 동지 후[至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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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후[至後]


至後 주001)
지후(至後)
이른 후. 지나간 후. 동지가 지나간 후. 광덕(廣德) 2년(764) 겨울 엄무(嚴武)의 막중에서 지은 시라고 한다.

지후
(동지 후)

冬至至後日初長 遠在劒南思洛陽

冬至 니른 주002)
니른
니르[至]-+-ㄴ(관형사형 어미). 이른. ¶嫉妬 諂誑으로 아래 戱論 諸法에 니르린 다 意地옛 微細 邪行일 모로매 正오샤미라(질투와 첨광으로 아래의 희론 제법에 이른 것은 다 의지의 미세한 사행이므로 모름지기 바르게 하심이다.)〈법화 5:43ㄴ〉.
後에  처 기니 머리 주003)
머리
멀[遠]-+-이(부사 파생 접미사). 멀리.
劒南애 주004)
검남(劒南)애
검남(劍南)+애(처격 조사, 부사격 조사). 검남(劍南)에. 검각의 남쪽 지방. 당(唐)나라 때 10도(道) 가운데 하나.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에 있었음. 검각(劒閣)은 중국 장안에서 촉으로 가는 길에 있는 요새로, 당의 현종이 안녹산의 난을 피해 피난 갔던 곳이다.
와 이셔셔 주005)
와 이셔셔
오[來]-+-아(연결 어미)#이시[有]-+-어(연결 어미)+셔(보조사). 와 있어서. 와서.
洛陽 주006)
낙양(洛陽)
낙양(洛陽)+(대격 조사). 낙양(洛陽)을. 낙양은 중국 하남의 옛 이름. 중국 하남성(河南省) 북서부에 있는 도시. 9개 나라의 수도이자 불교 중심지로 중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이다. 주나라(BC 12세기말) 초기에 낙읍(洛邑:낙양의 옛 이름)은 오늘날의 서시 근처에 왕들의 주거지로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BC 771년에 주나라의 수도가 되었고, 그후 북동쪽으로 이전하여 오늘날의 위치로 옮겼다. 이 도시가 낙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낙수(洛水)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남아 있는 유적은 오늘날 낙양 고성(古城) 유적지로 유명하다. 한대(漢代:BC 206~AD 220)의 시가지는 대체로 옛 낙읍의 자리에 있었지만 낙양이라 불렸으며, 이 이름은 근대까지 하남부라는 이름과 함께 쓰였다. 낙양은 후한(後漢) 초기인 1세기에 이르러서야 국도(國都)가 되었지만, 이 도시의 경제적 중요성은 그 전부터 인정받고 있었다. AD 68년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원 가운데 하나인 백마사(白馬寺)가 오늘날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14㎞ 떨어진 곳에 건설되었다. 4세기에 낙양은 동진(東晉)·후조(後趙)·연(燕)의 통치자들이 번갈아 차지했고, 494년에 북위(北魏:386~534)의 효문제(孝文帝)가 재건할 때까지는 번영을 누리지 못했다. 그후 남쪽 용문(龍門)에는 북위 황제들의 명령에 의해 석굴사원이 건설되었다. 이 석굴사원은 중국 불교의 가장 큰 중심지가 되었으며, 오늘날 남아 있는 석굴사원의 조각품들은 중국 예술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뤄양은 당(唐)나라의 동쪽 수도(東京)로서 규모가 커졌고, 오늘날의 부분이 새로 건설되었다.〈두산백과 참조〉.
노라 주007)
노라
[思]-+-(현재 시제 선어말 어미)-+-오(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라(종결 어미). 생각하노라.

【한자음】 동지지후일초장 원재검남사락양
【언해역】 동지(冬至) 이른 후에 해 처음 기니, 멀리 검남(劒南)에 와서 낙양(洛陽)을 생각하노라.

靑袍白馬有何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44ㄱ

意 金谷銅駝非故鄕【靑袍白馬 그젯 叛亂을 니니 叛亂이 욀 주008)
욀
외[加害, 妨害, 加虐]-+-ㄹ(연결 어미). 가래므로. 횡행하므로.
故鄕애 가디 몯호라 니라】

靑袍와 白馬 주009)
청포 백마(靑袍白馬)
당시의 반란을 가리킨다는 것이 언해자의 협주이다. 당시의 반란군들이 청포(푸른 도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다녔던 것으로 여겨진다.
므슷 주010)
므슷
므슥[何]+ㅅ(관형격 조사). 무슨. ‘므스’도 관형사적 기능을 가지는 것이지만, ‘므슷’은 ‘므스’에 ‘ㅅ’이 통합된 것이라기보다는 체언형인 ‘므슥’에 사이시옷이 통합되고 ‘ㄱ’이 탈락한 것이다.
디 잇뇨 金谷 주011)
금곡(金谷)
금곡원(金谷园)을 말한다. 금곡원은 낙양 8대경의 하나이다. 서진(西晋)의 석숭(石崇)이라는 사람의 별장 농막의 유지(遗址)이다. 지금은 낙양 노성(老城) 동북 7리 되는 곳의 금곡동 안에 있다. 〈백도백과 참조〉
銅駝 주012)
동타(銅駝)
낙양 팔대경 중 최후의 하나. 동타의 저녁비[銅駝暮雨]로 알려져 있다. 성동(城東)의 요새 바깥으로 통하는 항구로, 수, 당, 송나라 때에는 ‘동타백(銅駝陌)’으로 불리었다. 낙양에서 수, 당 성의 동북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통타의 서쪽 옆구리에는 낙하(洛河)가 흐르고,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가 우거지고, 높은 누각에 기와집이 있고, 따뜻한 봄날이면 복사꽃이 점점이 피고, 나비가 편편히 날고, 제비가 푸른 물결을 차고, 그 경치가 석숭(石崇)의 금곡원(金谷園)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수당 시대에는 인구가 조밀하여 저녁이면 집집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하늘로 솟았다고 한다. 동타의 저녁비[銅駝暮雨]란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다고 한다. 〈백도백과 참조〉
와 故鄕이 아니가 주013)
아니가
아니[非]+가(의문 첨사). 아닌가? 중세어의 ‘아니’를 명사로 보는 일도 있으나, 명사적인 성분으로 재구조화된 것일 뿐이다. 이것은 ‘그가 온 것은 벌써가 아니다.’와 같은 예에서 ‘벌써’가 부사이면서 명사가 쓰이는 위치에 쓰였기 때문에, 명사처럼 기능할 수 있는 것과 같다.

【한자음】 청포백마유하의 금곡동타비고향【청포 백마(靑袍白馬)는 그때의 반란을 이르니, 반란이 횡행하므로 고향에 가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언해역】 청포(靑袍)와 백마(白馬)는 무슨 뜻이 있는가? 금곡(金谷)과 동타(銅駝)는 고향이 아닌가?

梅花欲開不自覺 棣萼一別永相望【棣萼 兄弟 니니라】

梅花ㅣ 프고져 주014)
프고져
프[開]-+-고져(연결 어미). 피고자. ¶ 날  바 蓮華ㅣ 프거든 닐웻 內예 부텨를 보 한 相好 明白히 몰랫다가 세 닐웨 後에 다 보며(한 날(낮), 한 밤에 연꽃이 피거든 이레 안에 부처님을 보압되, 많은 상호를 명백히 몰랐다가 세 이레 뒤에야 다 보오며)〈월석 8:54ㄱ〉.
커 주015)
커
[爲]-+-거(연결 어미). 하거늘. ‘’의 아래아가 탈락하고 ‘ㅎ’이 ‘거늘’의 ‘ㄱ’과 축약된 것이다. ¶窮子ㅣ 듣고 깃거 조차 와 爲야  처 여러 房舍 조케 커늘(가난한 아들이 듣고 기뻐하여 좇아 와서 위하여 똥 치우고 여러 방을 깨끗하게 하거늘)〈법화 241ㄱ~ㄴ〉.
슬퍼 내 아디 주016)
아디
알[知]-+-디(연결 어미). 알지. ‘ㄷ’ 앞에서 어간 ‘알-’의 ‘ㄹ’ 받침이 탈락한 것이다.
몯호니 주017)
몯호니
몯[不能]-+-오(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니(연결 어미). 못하니.
棣萼 주018)
체악(棣萼)
문자 그대로는 ‘산앵두꽃받침’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것이나, 여기서는 바유적으로 형제를 가리킨다.
을 번 여희오 주019)
여희오
여희[別]-+-고(연결 어미). 여희고. 연결 어미 ‘-고’의 ‘ㄱ’이 탈락한 것은 이중 모음의 활음 /j/ 뒤에 쓰였기 때문이다.
기리 주020)
기리
길[永]-+-이(부사 파생 접미사). 길이. 명사 ‘길이’는 중세어에서 ‘기’로 쓰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기리’와 같이도 많이 쓰였다. ¶이 기리 다샤미 곧 如如佛이시니라(이에 길이 다하심이 곧 여여불(如如佛)이신 것이다.)〈법화 2:81ㄱ〉. 므레셔 나 큰 고기 기 사 니(물에서 나는 큰 고기 길이 사람 같으니)〈두시(초) 17:26ㄱ〉. 甘蔗 프리니 시믄 두  자히 나 대 고 기리 열자 남니 그 汁으로 粆糖 니라(감자는 풀이니 심은 두어 해째에 나되 대 같고 길이 열자 남직하니 그 즙으로 사탕을 만드는 것이다.)〈월석 1:6ㄱ〉.
서르 주021)
서르
서로.
라노라 주022)
라노라
라[望]-+-(현재 시제 선어말 어미)-+-오(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라(종결 어미). 바라노라. 바란다.

【한자음】 매화욕개부자각 체악일별영상망【체악(棣萼)은 형제를 말하는 것이다.】
【언해역】 매화(梅花)가 피고자 하거늘 슬퍼 내 알지 못하니, 산앵두 꽃받침을 한번 여희고 길이 서로 바라노라.

愁極本憑詩遣興 詩成吟詠轉凄凉
Ⓒ 편찬 | 유윤겸, 유휴복, 조위, 의침 등 / 1481년(성종 12)

시르미  주023)

가장. 제일. 여기에 사용된 예인 ‘ 오매’와 같은 예는 중세어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현대어와 다른 특성을 가지는 예라 할 것이다. 현대어로는 ‘그가 가장 온다.’와 같은 표현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세어에서도 ‘’은 상태 표현에 잘 쓰였다. ‘’은 원문에서 ‘극(極)’에 해당되는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극한으로’와 같은 정도의 뜻을 가진다. ‘시르미  오매’는 ‘시름이 극한으로 오매’와 같은 뜻이다. 이는 ‘시름이  크게 오매’와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오매 주024)
오매
오[來]-+-오(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ㅁ(명사형 어미)+애(처격 조사, 부사격 조사). 옴애. 오매.
本來ㅣ 주025)
본래(本來)ㅣ
본래(本來)+ㅣ(주격 조사). 본래가.
그를 브터 주026)
그를 브터
글[詩, 文]+을(대격 조사)#븥[附, 憑]+어(연결 어미). 글을 붙어. 글을 빌어. 글에 의지하여. 글에 기대어. 시에 의지하여. 이 구절은 ‘빙시(憑詩)’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글부터’와 같이 해석하지 않는다.
興을 펴다니 주027)
흥(興)을 펴다니
흥(興)+을(대격 조사)#펴[展]-+-더(과거 시제 선어말 어미)-+-아(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니(연결 어미). 폈는데. 원시에서 이에 해당하는 구절은 ‘견흥(遣興)’이다. ‘흥을 보낸다’와 같은 뜻이다. 이는 시를 씀으로써 정서가 정화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詩句ㅣ 일어 주028)
일어
일[成]-+-거(연결 어미). 일거늘.
이푸니 주029)
이푸니
잎[吟]-+-우(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니(연결 어미). 읊으니. ¶名花와 香果 벌와 새왜 므러 오며 나 람 기리 이푸믈 遠近이 다 듣거든 호 머리로 벼개 삼고 細草로 시욱 삼노니 物의  녜 다며 나 닷고미 俗애 다도다(이름난 꽃과 향기로운 과일을 벌과 새가 물어 오며 원숭이의 되파람 길이 읊음을 원근이 다 듣는데, 호미 머리로 베개 삼고 가는 풀로 깔개 삼으니 사물의 모습이 늘 다르며 나아 닦는 것이 속세와 다르도다.)〈선종영가집언해 하:106ㄱ~ㄴ〉.
도로  슬프도다
Ⓒ 편찬 | 유윤겸, 유휴복, 조위, 의침 등 / 1481년(성종 12)

【한자음】 수극본빙시견흥 시성음영전처량
【언해역】 시름이 가장 크게 오매 본래 글에 의지하여 흥을 폈는데, 시구(詩句)가 완성되어 읊으니 도로 가장 슬프도다.
Ⓒ 역자 | 임홍빈 / 2011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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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지후(至後) : 이른 후. 지나간 후. 동지가 지나간 후. 광덕(廣德) 2년(764) 겨울 엄무(嚴武)의 막중에서 지은 시라고 한다.
주002)
니른 : 니르[至]-+-ㄴ(관형사형 어미). 이른. ¶嫉妬 諂誑으로 아래 戱論 諸法에 니르린 다 意地옛 微細 邪行일 모로매 正오샤미라(질투와 첨광으로 아래의 희론 제법에 이른 것은 다 의지의 미세한 사행이므로 모름지기 바르게 하심이다.)〈법화 5:43ㄴ〉.
주003)
머리 : 멀[遠]-+-이(부사 파생 접미사). 멀리.
주004)
검남(劒南)애 : 검남(劍南)+애(처격 조사, 부사격 조사). 검남(劍南)에. 검각의 남쪽 지방. 당(唐)나라 때 10도(道) 가운데 하나.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에 있었음. 검각(劒閣)은 중국 장안에서 촉으로 가는 길에 있는 요새로, 당의 현종이 안녹산의 난을 피해 피난 갔던 곳이다.
주005)
와 이셔셔 : 오[來]-+-아(연결 어미)#이시[有]-+-어(연결 어미)+셔(보조사). 와 있어서. 와서.
주006)
낙양(洛陽) : 낙양(洛陽)+(대격 조사). 낙양(洛陽)을. 낙양은 중국 하남의 옛 이름. 중국 하남성(河南省) 북서부에 있는 도시. 9개 나라의 수도이자 불교 중심지로 중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이다. 주나라(BC 12세기말) 초기에 낙읍(洛邑:낙양의 옛 이름)은 오늘날의 서시 근처에 왕들의 주거지로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BC 771년에 주나라의 수도가 되었고, 그후 북동쪽으로 이전하여 오늘날의 위치로 옮겼다. 이 도시가 낙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낙수(洛水)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남아 있는 유적은 오늘날 낙양 고성(古城) 유적지로 유명하다. 한대(漢代:BC 206~AD 220)의 시가지는 대체로 옛 낙읍의 자리에 있었지만 낙양이라 불렸으며, 이 이름은 근대까지 하남부라는 이름과 함께 쓰였다. 낙양은 후한(後漢) 초기인 1세기에 이르러서야 국도(國都)가 되었지만, 이 도시의 경제적 중요성은 그 전부터 인정받고 있었다. AD 68년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원 가운데 하나인 백마사(白馬寺)가 오늘날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14㎞ 떨어진 곳에 건설되었다. 4세기에 낙양은 동진(東晉)·후조(後趙)·연(燕)의 통치자들이 번갈아 차지했고, 494년에 북위(北魏:386~534)의 효문제(孝文帝)가 재건할 때까지는 번영을 누리지 못했다. 그후 남쪽 용문(龍門)에는 북위 황제들의 명령에 의해 석굴사원이 건설되었다. 이 석굴사원은 중국 불교의 가장 큰 중심지가 되었으며, 오늘날 남아 있는 석굴사원의 조각품들은 중국 예술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뤄양은 당(唐)나라의 동쪽 수도(東京)로서 규모가 커졌고, 오늘날의 부분이 새로 건설되었다.〈두산백과 참조〉.
주007)
노라 : [思]-+-(현재 시제 선어말 어미)-+-오(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라(종결 어미). 생각하노라.
주008)
욀 : 외[加害, 妨害, 加虐]-+-ㄹ(연결 어미). 가래므로. 횡행하므로.
주009)
청포 백마(靑袍白馬) : 당시의 반란을 가리킨다는 것이 언해자의 협주이다. 당시의 반란군들이 청포(푸른 도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다녔던 것으로 여겨진다.
주010)
므슷 : 므슥[何]+ㅅ(관형격 조사). 무슨. ‘므스’도 관형사적 기능을 가지는 것이지만, ‘므슷’은 ‘므스’에 ‘ㅅ’이 통합된 것이라기보다는 체언형인 ‘므슥’에 사이시옷이 통합되고 ‘ㄱ’이 탈락한 것이다.
주011)
금곡(金谷) : 금곡원(金谷园)을 말한다. 금곡원은 낙양 8대경의 하나이다. 서진(西晋)의 석숭(石崇)이라는 사람의 별장 농막의 유지(遗址)이다. 지금은 낙양 노성(老城) 동북 7리 되는 곳의 금곡동 안에 있다. 〈백도백과 참조〉
주012)
동타(銅駝) : 낙양 팔대경 중 최후의 하나. 동타의 저녁비[銅駝暮雨]로 알려져 있다. 성동(城東)의 요새 바깥으로 통하는 항구로, 수, 당, 송나라 때에는 ‘동타백(銅駝陌)’으로 불리었다. 낙양에서 수, 당 성의 동북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통타의 서쪽 옆구리에는 낙하(洛河)가 흐르고,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가 우거지고, 높은 누각에 기와집이 있고, 따뜻한 봄날이면 복사꽃이 점점이 피고, 나비가 편편히 날고, 제비가 푸른 물결을 차고, 그 경치가 석숭(石崇)의 금곡원(金谷園)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수당 시대에는 인구가 조밀하여 저녁이면 집집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하늘로 솟았다고 한다. 동타의 저녁비[銅駝暮雨]란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다고 한다. 〈백도백과 참조〉
주013)
아니가 : 아니[非]+가(의문 첨사). 아닌가? 중세어의 ‘아니’를 명사로 보는 일도 있으나, 명사적인 성분으로 재구조화된 것일 뿐이다. 이것은 ‘그가 온 것은 벌써가 아니다.’와 같은 예에서 ‘벌써’가 부사이면서 명사가 쓰이는 위치에 쓰였기 때문에, 명사처럼 기능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주014)
프고져 : 프[開]-+-고져(연결 어미). 피고자. ¶ 날  바 蓮華ㅣ 프거든 닐웻 內예 부텨를 보 한 相好 明白히 몰랫다가 세 닐웨 後에 다 보며(한 날(낮), 한 밤에 연꽃이 피거든 이레 안에 부처님을 보압되, 많은 상호를 명백히 몰랐다가 세 이레 뒤에야 다 보오며)〈월석 8:54ㄱ〉.
주015)
커 : [爲]-+-거(연결 어미). 하거늘. ‘’의 아래아가 탈락하고 ‘ㅎ’이 ‘거늘’의 ‘ㄱ’과 축약된 것이다. ¶窮子ㅣ 듣고 깃거 조차 와 爲야  처 여러 房舍 조케 커늘(가난한 아들이 듣고 기뻐하여 좇아 와서 위하여 똥 치우고 여러 방을 깨끗하게 하거늘)〈법화 241ㄱ~ㄴ〉.
주016)
아디 : 알[知]-+-디(연결 어미). 알지. ‘ㄷ’ 앞에서 어간 ‘알-’의 ‘ㄹ’ 받침이 탈락한 것이다.
주017)
몯호니 : 몯[不能]-+-오(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니(연결 어미). 못하니.
주018)
체악(棣萼) : 문자 그대로는 ‘산앵두꽃받침’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것이나, 여기서는 바유적으로 형제를 가리킨다.
주019)
여희오 : 여희[別]-+-고(연결 어미). 여희고. 연결 어미 ‘-고’의 ‘ㄱ’이 탈락한 것은 이중 모음의 활음 /j/ 뒤에 쓰였기 때문이다.
주020)
기리 : 길[永]-+-이(부사 파생 접미사). 길이. 명사 ‘길이’는 중세어에서 ‘기’로 쓰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기리’와 같이도 많이 쓰였다. ¶이 기리 다샤미 곧 如如佛이시니라(이에 길이 다하심이 곧 여여불(如如佛)이신 것이다.)〈법화 2:81ㄱ〉. 므레셔 나 큰 고기 기 사 니(물에서 나는 큰 고기 길이 사람 같으니)〈두시(초) 17:26ㄱ〉. 甘蔗 프리니 시믄 두  자히 나 대 고 기리 열자 남니 그 汁으로 粆糖 니라(감자는 풀이니 심은 두어 해째에 나되 대 같고 길이 열자 남직하니 그 즙으로 사탕을 만드는 것이다.)〈월석 1:6ㄱ〉.
주021)
서르 : 서로.
주022)
라노라 : 라[望]-+-(현재 시제 선어말 어미)-+-오(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라(종결 어미). 바라노라. 바란다.
주023)
 : 가장. 제일. 여기에 사용된 예인 ‘ 오매’와 같은 예는 중세어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현대어와 다른 특성을 가지는 예라 할 것이다. 현대어로는 ‘그가 가장 온다.’와 같은 표현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세어에서도 ‘’은 상태 표현에 잘 쓰였다. ‘’은 원문에서 ‘극(極)’에 해당되는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극한으로’와 같은 정도의 뜻을 가진다. ‘시르미  오매’는 ‘시름이 극한으로 오매’와 같은 뜻이다. 이는 ‘시름이  크게 오매’와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주024)
오매 : 오[來]-+-오(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ㅁ(명사형 어미)+애(처격 조사, 부사격 조사). 옴애. 오매.
주025)
본래(本來)ㅣ : 본래(本來)+ㅣ(주격 조사). 본래가.
주026)
그를 브터 : 글[詩, 文]+을(대격 조사)#븥[附, 憑]+어(연결 어미). 글을 붙어. 글을 빌어. 글에 의지하여. 글에 기대어. 시에 의지하여. 이 구절은 ‘빙시(憑詩)’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글부터’와 같이 해석하지 않는다.
주027)
흥(興)을 펴다니 : 흥(興)+을(대격 조사)#펴[展]-+-더(과거 시제 선어말 어미)-+-아(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니(연결 어미). 폈는데. 원시에서 이에 해당하는 구절은 ‘견흥(遣興)’이다. ‘흥을 보낸다’와 같은 뜻이다. 이는 시를 씀으로써 정서가 정화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주028)
일어 : 일[成]-+-거(연결 어미). 일거늘.
주029)
이푸니 : 잎[吟]-+-우(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니(연결 어미). 읊으니. ¶名花와 香果 벌와 새왜 므러 오며 나 람 기리 이푸믈 遠近이 다 듣거든 호 머리로 벼개 삼고 細草로 시욱 삼노니 物의  녜 다며 나 닷고미 俗애 다도다(이름난 꽃과 향기로운 과일을 벌과 새가 물어 오며 원숭이의 되파람 길이 읊음을 원근이 다 듣는데, 호미 머리로 베개 삼고 가는 풀로 깔개 삼으니 사물의 모습이 늘 다르며 나아 닦는 것이 속세와 다르도다.)〈선종영가집언해 하:106ㄱ~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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