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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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7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7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모아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조선 성종의 명을 받은 유윤겸(柳允謙), 유휴복(柳休復),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언해하여 성종 12년(1481)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언해 시집이다. 모두 25권 17책으로 을해자본이며 이 책은 보통 줄여서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김영배

1931년 평북 영변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문학석사, 문학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명예교수.

저서 : 『석보상절 제23ㆍ24주해」, 『평안방언의 음운체계연구』, 『국어사자료연구 1·2』, 『증보 평안방언연구』, 『평안방언연구 자료편』 외

역주 : 『역주 석보상절』, 『역주 능엄경언해』, 『역주 월인석보』, 『역주 법화경언해』, 『역주 금강경삼가해』, 『역주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등 다수.

김성주

1965년 경남 통영 출생,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석사, 문학박사.

1999-2002 터키 국립앙카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외국인교수.

2003-2007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2008-2011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문리각 연구교수.

2015년 현재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초빙교수.

저서 : 『한국어의 사동』, 『Korece Dilbilgisi』(공저), 『각필구결의 해독과 번역 1~5』(공저), 『고대한일양국의 한자․한문독법과 자국적 수용양상』(공저), 『황룡사 표원의 화엄문의요결문답연구 1·2』(공저), 『사토본 ≪화엄문의요결문답≫의 부호구결과 자형에 대한 연구』(공저)

역주 : 『금강경언해』(공역), 『역주 석보상절 제21』(공역)

역주위원

  •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7 : 김영배, 김성주
  • 교열·윤문·색인위원

  •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7 : 박종국, 홍현보
  • 편집위원

  • 위원장 : 박종국
  • 위 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 김석득 김승곤 김영배
  • 나일성 리의도 박병천
  • 박충순 성낙수 심우섭
  • 이해철 임홍빈 전상운
  • 정태섭 조오현 차재경
  • 최홍식 한무희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7을 내면서

우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68년 1월부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을 국역하기 시작하여 실록의 한문 원문 901권을 완역하였고, 『증보문헌비고』, 『국조인물고』, 『매월당집』, 『동국통감』 등 수많은 국학 자료의 번역사업을 벌여 오고 있다. 아울러 1990년 6월부터는 ‘한글고전 역주 사업’의 첫발을 내디디어, 『석보상절』 권6ㆍ9ㆍ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그 성과물을 간행하여 왔다. 이제 우리 회는 올해로써 한글고전 역주 사업을 추진한 지 24주년이 되었다. 그동안 600책이 넘는 국역, 학술 간행물이 말해주듯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 국역ㆍ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고전 국역 사업을 수행하는 목적은 우리 고전을 알기 쉬운 현대어로써 한글로 번역하여, 우리 조상의 문화를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새 겨레문화 건설에 이바지함에 있으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회는 2013년 말까지 역주하여 간행한 정음 문헌과 책 수는 다음과 같다. 『석보상절』 4책, 『월인석보』 17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남명집언해』 2책,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1책, 『구급방언해』 2책, 『금강경삼가해』 5책, 『선종영가집언해』 2책, 『육조법보단경언해』 3책, 『구급간이방언해』 5책, 『진언권공, 삼단시식문언해』 1책, 『불설아미타경언해, 불정심다라니경언해』 1책, 『반야심경언해』 1책, 『목우자수심결ㆍ사법어 언해』 1책, 『신선태을자금단․간이벽온방․벽온신방』 1책,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1책, 『언해두창집요』 1책, 『언해태산집요』 1책, 『삼강행실도』 1책, 『이륜행실도』 1책, 『정속언해‧경민편』 1책, 『상원사중창권선문‧영험약초‧오대진언』 1책,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1책, 『두시언해』(권10, 11, 14) 3책, 『여씨향약언해』 1책, 『번역소학』(권6ㆍ7ㆍ8ㆍ9ㆍ10) 1책, 『소학언해』 4책, 『논어언해』 2책, 『대학언해』 1책, 『중용언해』 1책, 『맹자언해』 3책, 『연병지남』 1책, 『병학지남』 1책, 『화포식언해․신전자취염소방언해』 1책,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 1책, 『사리영응기』 1책, 『백련초해』 1책, 『칠대만법ㆍ권념요록』 1책 등 모두 99책에 달한다.

이제 우리가 추진한 ‘한글고전 역주 사업’은 15세기 문헌을 대부분 역주하고 16세기 이후 문헌까지 역주하는 데 이르렀다. 올해는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5, 권16과, 『여사서언해』 등 지난해에 이어 16세기~18세기 문헌을 역주할 예정이다.

이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는,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모아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조선 성종의 명을 받은 유윤겸(柳允謙), 유휴복(柳休復),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언해하여 성종 12년(1481)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언해 시집으로 알려져 있다. 모두 25권 17책으로 을해자본이다(후대에는 19책, 20책도 있음). 이 책은 보통 줄여서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두시언해』는 다른 언해서와는 달리 원문에 입겿(토)이 없고, 한글과 한문 혼용인 언해문의 한자에도 한글 독음이 달리지 않았다. 두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 때부터 행하여졌다고 하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처음 이루어진 것이다. 이 책의 책이름에 보이는 공부(工部)는 두보의 관명(官名)이고, 분류(分類)는 시를 기행, 술회, 질병, 회고, 시사(時事) 등과 같이 내용에 따라 분류하였다는 뜻이다. 두시는 71문(門)에 총 1,467수와 다른 사람 작품 16수로서, 그 소재는 세상사에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라를 사랑하는 충정과 같은 인간애가 담겨 있으며, 당시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면밀하게 비판한 사실적인 서사(敍事)인 데서 시사(詩史)라 일컬어지는 위대한 작품이다.

이번에 이 『두시언해』 권17을 역주함에 있어서, 그 저본으로는 『한국어연구』 2(한국어연구회, 2004)에 실린 것과 1985년 홍문각 영인 초간본을 이용하였다.

우리 회에서 15세기 문헌인 『두시언해』 권17을 역주 간행함에 있어, 역주를 위해 애써 주신 동국대학교 김영배 명예교수님과 김성주 교수, 그리고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준 교육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5년 11월 25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최홍식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 등 한글 관계 문헌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옛 우리말을 연구하는 전문학자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이를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며 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7의 저본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인 초간본(교정본)으로서 『한국어연구』 2에서 2004년에 영인한 것과, 홍문각에서 1985년에 영인한 통문관 소장 초간본을 사용하였고, 통문관본을 축소 영인하여 부록으로 실었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한문 원문․언해 원문․현대어 풀이․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는데, 특별히 한시를 언해하였으므로 그 운율을 알기 쉽도록 시 제목과 한시 원문은 그대로 음을 달고 풀이를 이어붙였다. 원전과 비교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장(張)․앞 『ㄱ』․뒤 『ㄴ』 쪽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제1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1ㄱ分類杜工部詩 卷之十五

제3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諸侯3ㄴ舊上計 厥貢傾千林

(3) 현대어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4) 원문 내용(한문 원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 풀이문․주석과 구별하였으며, 원문 가운데 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다.

(5) 현대어 풀이에서, 옛글의 구문(構文)과 다른 곳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충한 말은 〈 〉 안에 넣었다.

(6) 찾아보기 배열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초성순 : ㄱ ㄲ ㄴ ㅥ ㄷ ㄸ ㄹ ㅁ ㅱ ㅂ ㅲ ㅳ ㅃ ㅄ ㅴ ㅵ ㅷ ㅸ ㅅ ㅺ ㅻ ㅼ ㅽ ㅆ ㅾ ㅿ ㅇ ㆀ ㆁ ㆆ ㅈ ㅉ ㅊ ㅋ ㅌ ㅍ ㅎ ㆅ

② 중성순 :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ㆉ ㅜ ㅝ ㅞ ㅟ ㅠ ㆌ ㅡ ㅢ ㅣ ㆍ ㆎ

③ 종성순 : ㄱ ㄴ ㄴㅅ ㄴㅈ ㄴㅎ ㄷ ㄹ ㄹㄱ ㄹㄷ ㄹㅁ ㄹㅂ ㄹㅅ ㅀ ㅁ ㅁㄱ ㅯ ㅰ ㅂ ㅄ ㅅ ㅺ ㅼ ㅿ ㆁ ㅈ ㅊ ㅋ ㅌ ㅍ ㅎ

3. 역주자 일러두기

1. 본문에서 두시의 제시는 『두시언해』에 있는 대로 하였다. 현대역은 가급적 『두시언해』의 표현을 살리는 방향으로 하였으며, 뜻이 잘 통하지 않을 수 있는 경우에는 주석에서 다시 해석을 보충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2. 한시 원문에 대해서는 『두시언해』에 제시되어 있는 대로 우리의 전통 한자음을 한글로 표시하여 원문과 나란히 제시하였다. 이때 두음법칙은 한자음에 반영하지 않았다.

3. 주석을 달 때 주로 한 부분에서 자세한 주석을 달고 동일한 단어가 뒤에 나올 때에는 간단한 주석을 실고 나머지 부분은 자세한 주석을 단 부분을 참고하도록 하였다.

예) 맨 마지막 시인 「백소」의 ‘白小ㅣ 무리 목수믈 호아 잇니’의 ‘무리’에 대해서, “‘물, 믈, 무리’에 대해서는 「봉황대(鳳凰臺)」의 ‘물 盜賊이 어느 머므러시리오(群盜何淹留)’ 구절 참조.”라 제시하였다.

4. 주석의 표제어는 단어는 물론 2개 이상의 단어도 해석이 어려운 경우나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는 제시하였다. 한자어의 경우 한자음을 표제어로 한자를 괄호에 묶어 제시하였으며, 주석에 제시된 단어나 표현에 대해서는 분석을 하되 특별한 경우나 분석이 어려운 경우에만 문법적 설명을 하였다.

5. 형태소 분석에서 ‘+’ 기호는 대체로 체언과 조사 사이, 조사와 조사 사이, 용언의 어간과 어미 사이, 어미와 어미 사이에 쓰고, ‘#’는 어기와 어기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에 썼으며 기원적인 정보도 일부 반영하였다.

6. ‘-오, -옴’ 등은 ‘오+, 오+ㅁ’ 등으로 분석하였으나, ‘-샤-’는 ‘-시-’의 이형태로 보았고, 문법 용어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으나 필요한 경우 ‘처소의 부사격 조사’ 등으로 표현하였다.

7. 주석에 사용한 예문은 가급적 『두시언해』 이전의 예문 1개와 『두시언해』에 실린 예문 1개를 들었다. 『두시언해』에 나오는 예가 유일례이거나 『두시언해』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중요한 단어일 경우 예문을 2개 이상을 들었고 용례 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경우 예문을 전부 실었고, 예문의 표시 ‘〈두시 17:1ㄴ〉’은 관례에 따라서 ‘서명, 권차, 면차’를 제시하였으며 ‘ㄱ, ㄴ’은 전후면을 나타낸다.

8. 예문의 한문 원문이 있는 경우 가급적 한문 원문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석보상절』이나 『월인석보』와 같이 한문 원문이 원문에 제시되지 않은 경우에도 적극적으로 한문 원문을 찾아 제시하였다.

9. 『두시언해』 권17에서 낙장이거나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중간본 『두시언해』 권17을 참고하였다. 또한 나머지 부분도 중간본을 참조하여 ‘ㅿ, ㆁ, 주격조사 -이’를 제외하고 초간본과 중간본이 다른 부분은 해당 구절의 주석 가장 아래 부분에 그 내용을 밝혔다. 『두시』의 판본에 따라 두시 원문의 한자가 다른 경우에도 해당 구절 주석의 아래 부분에 밝혔다.

10. 역주와 용례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에서 펴낸 역주본들을 많이 참고하였다. 많은 중세어 자료들이 역주되었으므로 풍부한 해석과 자료가 제시되어 있다. 이 자리를 빌어 예전에 역주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뜻을 표한다. 그리고 국어사전은 『표준국어대사전』을 주로 참고하였고 특별한 경우에는 다른 사전을 참조하였으며, 이 경우 출처를 밝혔다.

11. ‘두시’에 대해서는 중국,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그리고 깊이 있는 주석서들이 존재한다. 폭넓고 깊이 있는 주석을 참고할 수 있어서 선학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일부 반영하지 못하였거나 잘못 해석한 부분이 있음을 밝혀 둔다.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7 해제

김영배·김성주

1. 서론

두보(杜甫, 712~770)는 중국의 성당(盛唐) 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성당 시기는 우리의 신라시대에 해당하는 때이며, 이 시기의 신라와 당의 관계를 생각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두시가 전래되었을 것이나, 이에 대한 내용은 문헌의 산실로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송나라 채몽필(蔡夢弼)이 찬한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원나라 고초방(高楚芳)이 찬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元版) 등 두시에 관한 서적들이 많이 복각 간행되었으며, 이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두시언해』는 두시를 중시하는 이런 분위기 속에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기풍이 더해져서 이루어졌다.

『두시언해』의 원래 이름은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이다. ‘두’는 ‘두보’의 성이며, ‘공부(工部)’는 두보가 한때 지냈던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에서 따온 것이고, ‘분류(分類)’는 두시를 연대별로 실은 것이 아니라 내용별로 분류하여 실었음을 뜻한다.

성종 조에 『두시언해』가 언해되기 전에 이미 세종 조에 『찬주분류두시』가 편찬 간행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찬주분류두시』는 조선시대에 활자본과 복각본이 여러 차례 간행되어 보급되었다. 현재 갑진자(甲辰字)본, 갑인자(甲寅字)본, 병자자(丙子字)본, 훈련도감(訓練都監) 목활자본, 이들의 복각본 등이 남아 있는데 갑진자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며, 혹 세종 대에 갑인자본으로 간행했을 가능성도 있다(안병희 1998). 『두시언해』는 이 『찬주분류두시』를 바탕으로 고려 때부터 발달해 온 금속활자 기술로 만들어졌다.

『두시언해』에는 두보의 시 전편(全篇)인 1,46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 등 1,483편이 기행·술회·회고·우설(雨雪)·산악·강하(江河)·문장·서화·음악·송별·경하(慶賀) 등 54부로 분류되어 있다(임홍빈 2011).

2. 『두시언해』 권17의 서지

‘두시’와 『두시언해』에 대한 많은 선학들의 연구가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두시언해』 전체에 대해서는 간략히 말하고 주로 권17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한다.

『두시언해』의 간행 시기에 대해서는 1481년 9월에 간행의 명령이 내려져 그 해 12월에 완성되었다고 보는 설(이병주 1958, 안병희 1998), 1482년이거나 그 이후일 것이라는 설(김일근 1964, 임홍빈 2011, 스기야마 유타카 2012)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후자의 견해가 우세한 듯하다. 이 글에서는 현재로서는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고 보고, 두 견해가 모두 옳을 수 있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두시언해』가 1481년 12월에 간행이 되었다는 설은, 안병희(1998)에서 소상히 언급되었는데, 『두시언해』와 같은 거질이 3~4개월 만에 완성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이러한 전례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최근 스기야마(2012)에서 제시한 장서각 소장 『두시언해』 권10의 지배문서의 존재는 『두시언해』의 간행에 대한 유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지만,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두시언해』의 인출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두시언해』의 작업에 승려 의침(義砧)이나 유휴복 등이 참여하였다는 이전의 견해는 그 잘못이 이미 안병희(1998)에 소상히 지적되어 있다. 나이로 보아 이들이 『두시언해』의 작업에 직접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없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두시언해』에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한 홍문관 관원들이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인다.

『두시언해』는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된 전25권, 17책의 거질(巨帙)로 초간본은 현재 제1, 2, 4권을 제외한 22권이 현재 전하고 있다. 이 글의 대상인 『두시언해』 권17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동경대 소창문고, 통문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중 국립중앙박물관본은 교정본이다.

『두시언해』의 중간본은 초간본 발간 이후 150여년 뒤인 1632년(인조 10)에 경상감사 오숙(吳䎘, 1592~1634)의 주관 하에 대구부사 김상복(金尙宓)의 주역으로 영남의 각읍에서 분간하여 간행되었다. 중간본 『두시언해』는 초간본을 그대로 복각(覆刻)한 것이 아니라 교정(校正)하여 중간(重刊)한 것이므로, 초간본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17세기 국어의 특징을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사적인 가치를 지닌다.

『두시언해』의 중간본도 수 종의 판이 현전한다. 『두시언해』의 초간본과 중간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다. 이 글에서는 여기에 대한 내용은 생략하였으며, 단지 주석을 달면서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해당 시구의 아래에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3. 『두시언해』 권17의 문법과 어휘

이 글에서는 중세국어의 문법과 어휘 관련 사항 가운데 『두시언해』 권17에만 집중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두시언해』 권17에는 사동과 부정에 대한 특이한 현상이 있다. 먼저 중세국어의 장형 사동 구문을 살펴본다. 중세국어 언해문은 대개 한문 원문이 유표적 사동문일 때는 ‘令, 使, 敎, 遣’에 해당하는 번역어가 있으며, 사동문의 원동사는 사동사, 장형 사동 ‘-게/긔 ᄒᆞ다’, 명령형 등의 다양한 표현이 있다.

(1) 가. -로 ᄒᆡ여 ~ 게 ᄒᆞ다 : 闕에 가 춤 츠고 雄豪호  五陵ㅅ 사로 여 알에 다 (意氣卽歸雙闕舞 雄豪復遣五陵知)〈두시 5:25ㄱ〉.

나. -로 여 ~ 단형사동 : 한 사 中에  번 보매 날로 여 마니 넉슬 뮈우다(衆中每一見 使我潛動魄)〈두시 8:19ㄴ〉.

다. -로 여 ~ 명령형 : 님굼이 高允으로 여 太子를 글 치라 더니(帝使允으로 授太子經더시니)〈번소 9:44ㄱ〉.

라. 여곰 ~ -게 ᄒᆞ다 : 詔命을 바다 여곰 幕府엣  參預케 도다(奉詔令參謀)〈두시 22:37ㄱ〉.

마. 여곰 ~ 단형사동 : 픐 서리예 길히 업슬 여곰 이고져 노라(草茅無徑欲教鋤)〈두시 22:14ㄱ〉.

‘令, 使’ 등은 ‘-로/ᄅᆞᆯ ᄒᆡ여(곰)’으로 해석될 경우 원동사 부분이 (1가)는 ‘-게/긔 ᄒᆞ다’ 장형 사동, (1나)는 단형사동, (1다)는 명령형, (1라)는 ‘令, 使’ 등이 ‘ᄒᆡ여곰’으로 번역되는 경우이다. (1라,마)와 같이 ‘令, 使’ 등이 ‘ᄒᆡ여곰’으로 번역되는 경우에도 사동문의 원동사에 해당하는 것은 장형사동, 단형사동의 예가 있다.

그런데 ‘令, 使’ 등에 해당하는 형식이 ‘-로 ᄒᆡ여’인 것은 『두시언해』에서 처음 등장한다. ‘令, 使’ 등 고대중국어의 사동사들이 ‘-로/ᄅᆞᆯ ᄒᆡ여곰’으로 번역되는 경우는 『두시언해』에서는 아래의 (2)와 같이 2개만 있고, 나머지의 경우 모두 ‘-로 ᄒᆡ여’로 모두 50개 이상이 있다. 『두시언해』에서는 ‘-로/ᄅᆞᆯ ᄒᆡ여곰’이 2회, ‘-로/ᄅᆞᆯ ᄒᆡ여’가 50회 이상으로 나타나므로, 상대적으로 ‘-로 ᄒᆡ여’가 월등히 많은 수치이며, 무엇보다도 ‘-로/ᄅᆞᆯ ᄒᆡ여’가 중세국어 문헌에서 처음 나타난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하다. 아래의 (3)은 『두시언해』 권17에 나오는 ‘-로 여’ 사동문의 예이다.

(2) 가. 집 와 보콰로 여곰 것게 디 말오라(莫使棟梁摧)〈두시 3:10ㄴ〉

나. 各各 蒼生로 여곰 環堵 두게 고(各使蒼生有環堵)〈두시 7:29ㄴ〉

(3) 가. 다 鴟梟로 여 서르 怒야 우르게 야리아(盡使鴟梟相怒號)〈두시 17:3ㄱ〉

나. 東녃 햇 여윈 리 날로 여 슬케 니(東郊瘦馬使我傷)〈두시 17:27ㄱ〉

다. 엇뎨 麒麟로 여 地上애셔 니게 리오(肯使麒麟地上行)〈두시 17:29ㄴ〉

다음은 부정 구문에 쓰이는 ‘-디웨’이다.

(4) 가. 오직 壯健야 쇠甲 이긔리 얻디웨 엇뎨 사호 因야셔 龍의 삿기 求리오(祗收壯健勝鐵甲 豈因格鬭求龍駒)〈두시 17:32ㄱ〉

나. 오직 노 놀애여 鬼神 잇 호 아디웨 므스므라 주려 주거 굴허 몃귀욜 이 알리오(但覺高歌有鬼神 焉知餓死填溝壑)〈두시 15:37ㄴ〉

다. 文翁 能히 時俗 敎化호 오직 보디웨 李廣의 諸侯 封이디 몯호 어느 알리오(但見文翁能化俗 焉知李廣未封侯)〈두시 21:16ㄴ〉

라. 여희엿다가 다시 서르 맛보니 偶然히 그리 디웨 어느 足히 期約리오(離別重相逢 偶然豈定期)〈두시 22:22ㄴ〉

마. 매 君臣이 相合호 取리라 디웨 엇뎨 品命의 달오 議論료(會取君臣合 寧銓品命殊)〈두시 24:59ㄴ〉

(4)는 장형부정문의 선행문 어미가 ‘-디웨’가 쓰인 부정문의 예이다. 중세국어에서 장형부정문의 선행문은 주로 ‘-디’와 ‘-ᄃᆞᆯ’이 쓰이지만, 좀 더 이른 시기의 문헌인 『석보상절』 등에서는 ‘-디ᄫᅵ’가 쓰였다. ‘-디ᄫᅵ’는 좀 더 뒤의 문헌에서는 ‘-디위’로 나오는데, ‘-디웨’는 ‘-디위’의 다른 표기로 보인다. ‘-디웨’는 『두시언해』에서만 5회 쓰였으며 그 중에 (4가)는 『두시언해』 권17의 예이다.

『두시언해』는 중세국어의 불경 언해 문헌, 의학서 자료, 역학서 자료 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풍부한 어휘를 보인다. 여기서는 『두시언해』에서 자주 볼 수 있거나, 『두시언해』에서만 볼 수 있는 어휘를 대상으로 살펴본다.

■ 디나들다

(5) 가. 톳기 세  굼긔 디나드러실 기피 시름 아니놋다(兔經三窟莫深憂)〈두시 17:12ㄱ〉

나. 아히 돈 삼만 모도아 주니 길 나가다가 아븨 벋 려옹의 집븨 디나드니(裒錢三萬遣之 道出滑州 過父友呂翁家)〈이륜 40ㄱ〉

‘디나들다’는 이 책의 아홉 번째 시인 ‘見王監兵馬使호니 ~ 請余賦詩二首다’에 나오는 단어로 뜻은 ‘지나가다가 들어가다’로 보인다. (5가)에서는 ‘經’에, (5나)에서는 ‘過’에 해당된다. 이 단어는 ‘디나다’와 ‘들다’의 합성어인데, 고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지나다’의 뜻인 ‘디나다’의 합성동사로 기존의 고어사전류에서 등재된 단어는 ‘디나가다’와 ‘디나오다’뿐이다.

■ 바라

(6) 가. 모로매 主人을 바라 리라(會傍主人飛)〈두시 17:16ㄱ〉

나. 비  차 수프를 바라 微微도다(帶雨傍林微)〈두시 17:38ㄱ〉

(6)의 ‘바라’는 ‘傍’에 대응하는 번역어로 ‘곁에 두다’ 정도의 의미로 보인다. 중세국어 문헌에서 ‘바라’의 예는 모두 22개가 검색되는데, 그 중 17개가 『두시언해』에 나온다. 그런데 『두시언해』 이외에 나오는 ‘바라’를 살펴보면, 모두 『두시언해』에 나오는 ‘바라’와는 관련이 없는 단어가 대부분이다. 『두시언해』 이외에 ‘바라’의 형태로 검색되는 예 5개를 제시하면 아래의 (7)과 같다. 주001)

『두시언해』에 출현하는 17개의 ‘바라’ 중 16개가 ‘傍’의 번역어로 쓰였고, 1개는 ‘緣’의 번역어로 쓰였다. 이 예는 「樂遊園歌」에 나오는 구절로 그 예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예) 구루믈 바라 淸切 놀앳 소리 오놋다(緣雲清切歌聲上)〈두시 15:1ㄴ〉

(7) 가. 눈므리 눈 바라 사 글 적시놋다〈순천 3:26〉

나. 鈸 바라 발〈훈몽중 8ㄴ〉

다. 處 바라 쳐〈광천 31ㄴ〉

라. 내 모매 죄이 산과 바라  주 아라〈초발-계초9ㄱ〉

마. 海 바라 〈석천3b〉

(7가)의 ‘바라’는 정확한 의미를 제시하기가 주저되는 부분이 있으나, ‘바로’의 이표기로 생각되며, (7나)는 악기 이름인 ‘바라’이다. (7라,마)의 ‘바라’는 ‘바다’의 다른 표기이다. (7)에 제시된 단어 중 유일하게 (7다)에 제시된 ‘바라’가 (6)에 제시된 『두시언해』의 ‘바라’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7다)의 ‘바라’는 ‘處’의 새김으로 제시된 만큼 ‘곳, 장소’를 뜻하는 우리말인 것으로 보아왔다. 이렇게 보면 (7)에 제시된 ‘바라’는 적어도 ‘傍’에 대응되는 우리말 번역어로 쓰인 것은 아니다. 하나하나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傍’의 번역어로 쓰인 ‘바라’는 『두시언해』에만 나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으며, 『두시언해』에 출현하는 17개의 ‘바라’ 중에서 2 예가 『두시언해』 권17에 나온다.

■ 하숫그리다

(8) 가. 님 겨틔 하숫그릴 사미 잇니라(君側有讒人)〈두시 17:18ㄴ〉

나. 주우린 라민 藤草애 뎌셔 하숫그리놋다(饑鼯訴落藤)〈두시 20:24ㄱ〉

(8)의 ‘하숫그리다’는 (8가)에서 ‘讒’, (8나)에서 ‘訴’에 대응되는 번역어로 ‘讒訴, 譖訴’ 등의 의미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8나)의 ‘하숫그리놋다’가 비록 대응하는 『두시언해』의 원문은 ‘讒’이거나 ‘訴’이기는 하지만, 문맥에서의 의미는 주린 다람쥐가 수풀 속에서 ‘재잘거리는’ 또는 ‘소곤거리는’ 장면을 묘사한 것도 보인다. 『훈몽자회』에 ‘하솟그릴’의 형태로 ‘讒’과 ‘譖’의 훈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분명히 ‘讒訴, 譖訴’의 의미를 가진 것은 분명하고 이러한 용법은 『두시언해』의 용례인 (8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원래의 의미는 약간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뭐라고 재잘거리다’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15세기 문헌에서 ‘하숫그리다’는 2개의 예가 발견되는데, 이것이 모두 『두시언해』의 예인 점과 그 중 한 예는 『두시언해』 권17의 예라는 점을 밝혀둔다. 주002)

<풀이>그 외에도 근대국어 문헌에서 ‘하솟거리다. 하쇼리다. 하쇽거리다’ 등의 용례를 참조할 수 있다.

■ 붑괴다

(9) 가. 굴에 눌러 야슈메 바리 갓 붑괴얫도소니(頓轡海徒湧)〈두시 17:24ㄱ〉

나. 하콰  예 사미 붑괴야 우르니라(乾坤沸嗷嗷)〈두시 8:56ㄴ〉

다. 豺狼이 붑괴여 서르 너흐놋다(豺狼沸相噬)〈두시 22:32ㄱ〉

라. 버러 드러온 므리 붑괴니(羅落沸百泓)〈두시 25:12ㄱ〉

(9)의 ‘붑괴다’는 『두시언해』에서만 보이는 단어이다. (9가)의 경우 ‘湧’의 번역어로, (9나~라)의 경우 ‘沸’의 번역어로 쓰였다. ‘涌’과 ‘沸’는 모두 ‘물이 끓는다’는 뜻이므로 ‘붑괴다’의 의미를 ‘물이 끓듯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정도로 볼 수 있다. (9나)는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켜 ‘부글부글 끓어올라 우는’ 것이고, (9다)는 범과 이리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서로 싸우는 장면이며, (9라)는 가뭄이 들어 교룡(蛟龍)을 놀라게 하여 비를 오게 하려는 의도로 불을 질러 물이 끓는 장면이다. 모두 ‘부글부글 끓는다’는 의미에 부합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이미 박진호(2000)에서 ‘*봎-/*붚-’과 ‘괴-’의 합성어로 본 적이 있다. 중세국어의 ‘붑괴다’의 용례 4개가 모두 『두시언해』에 실려 있으며, 그 중 한 예는 『두시언해』 권17에 나온다.

■ 멀험

(10) 가. 멀허메 굽슬며 해 이셔 쇽졀업시 키 잇도다(伏櫪在空坰大存)〈두시 17:26ㄱ〉

나. 雄壯  멀허메 굽스러셔 恩惠 디 아니리로소니(雄姿未受伏櫪恩)〈두시 17:30ㄱ〉

다. 리 우러셔 녯 멀허믈 고(馬嘶思故櫪)〈두시 9:17ㄱ〉

라. 簪纓 사미 모니 멀허멧 리 우르고(盍簪喧櫪馬)〈두시 11:37ㄴ〉

마. 閑 멀험 한〈훈몽 하:4ㄴ〉

(10)의 ‘멀험’은 ‘마판(馬板)’을 가리킨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마판’은 ‘마구간의 바닥에 깔아 놓은 널빤지’ 또는 ‘마소를 매어 두는 바깥의 터’로 뜻풀이 되어 있다. 중세국어 문헌에서 검색되는 ‘마판’의 용례 5개 중 4개가 『두시언해』에 있으며, 그 중 2개가 『두시언해』 권17에 나온다. ‘멀험’은 ‘말’과 관계되는 단어이고, 『두시언해』 권17은 ‘말’에 대한 시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보인다.

■ 다ᄆᆞᆺᄒᆞ다

(11) 가. 八駿으로 다야  가디 아니고 몬져 울리로라(不與八駿俱先鳴)〈두시 17:29ㄱ〉

나. 그듸와 다야 기리 서르 라리로다(與君永相望)〈두시 8:68ㄱ〉

다. 齊梁ㅅ 사로 다야도 뒤헷 드트리 욀가 전노라(恐與齊梁作後塵)〈두시 16:12ㄴ~13ㄱ〉

‘다ᄆᆞᆺᄒᆞ다’는 ‘함께 하다’의 뜻이다. ‘與’의 번역어로 ‘다ᄆᆞᆺ’이 쓰이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인데, ‘다ᄆᆞᆺᄒᆞ다’즉 ‘다ᄆᆞᆺ’과 ‘ᄒᆞ다’가 결합된 복합어의 형태로 쓰이는 것은, 『두시언해』에만 39개의 용례가 검색되며, 나머지 문헌에서는 검색되지 않는다.

■ 믄드시

(12) 가. 소리와 빋괘 믄드시 오 東로 向도다(聲價欻然來向東)〈두시 17:29ㄴ〉

나. 믄드시 서르 맛보니 이 여희 돗기로다(忽漫相逢是別筵)〈두시 23:23ㄱ〉

(12)의 ‘믄드시’는 ‘믄득, 믄드기’ 등으로로 쓰이며 대응되는 한자가 ‘훌연(欻然), 홀(忽)’인데서 알 수 있듯이 ‘갑자기’의 뜻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믄드시’의 형태는 『두시언해』에서만 목격된다.

■ ᄀᆞ리티다

(13) 가. 리티 번게를 디나 로 城中이 기울에 모다 아다(走過掣電傾城知)〈두시 17:30ㄴ〉

나.   벌어질 잡노라 사 리티다(更接飛蟲打著人)〈두시 10:7ㄴ〉

다. 볼 사미  리티고 라가 貪히 시름니(觀者貪愁掣臂飛)〈두시 16:35ㄴ〉

(13)의 ‘ᄀᆞ리티다’는 (13가)에서 ‘掣’, (13나)에서 ‘打’, (13다)에서 ‘掣’의 번역어로 쓰였다. 이들을 참고하면 ‘ᄀᆞ리티다’의 의미는 (13가~다)의 문맥을 보면 ‘치다’ 또는 ‘강하게 잡아 끌다’로 해석된다. 대당 한자어의 의미와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ᄀᆞ리티다’는 ‘갑자기 강하게 끌거나 치다’ 정도의 의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중세국어 문헌에서 ‘ᄀᆞ리티다’ 쓰인 용례가 (13)의 3개뿐인데 이 용례들은 모두 『두시언해』의 용례들이다.

■ 브티들이다

(14) 가. 病야 브티들여셔 長沙ㅅ 驛에 와 서르 아노라(扶病相識長沙驛)〈두시 17:33ㄴ〉

나. 사 브티들이여쇼 늘근 노미 붓그리노라(提攜愧老夫)〈두시 23:35ㄴ〉

다. 아 브티들여 고기 낛 돌해 셔쇼라(兒扶立釣磯)〈두시 24:50ㄱ〉

‘브티들이다’는 ‘븥-’와 ‘들이-’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단어인데, ‘들이-’는 ‘들-’에 피동접미사 ‘-이-’가 붙어 파생된 단어이다. 즉 ‘브티들이다’는 ‘의지해 들리다’ 정도의 의미이다. (14가)는 두보 자신이 병이 들어, 부축을 받고 장사역(長沙驛)에 와 있음을 서술하고 있고, (14나)는 두보 자신이 늙어 힘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이며, (14다)는 두보 자신이 강가의 낚시를 할 수 있는 바위 위에 아이의 부축을 받고 서 있다는 내용이다. 모두 남으로부터 부축을 받는다는 피동의 뜻이 들어 있다. ‘브티들이다’는 『두시언해』에 나오는 (14가~다)가 중세국어 용례의 전부이다.

■ ᄯᅴ차다

(15) 가. 비 차 수프를 바라 微微도다(帶雨傍林微)〈두시 17:38ㄴ〉

나.  벼른 새지븨 찻도다(春星帶草堂)〈두시 15:55ㄱ〉

다.  城이   찻거(江城帶素月)〈두시 16:49ㄱ-ㄴ〉

(15)는 ‘ᄯᅴ차다’의 용례로 ‘ᄯᅴ’와 ‘차다’로 분석되며 ‘대(帶)’에 대한 번역어로 쓰였다. (15가~다)에서 각각 ‘비 차, 새지븨 찻도다,   찻거’을 보면, ‘ 차다’의 구 구성이 아닌 ‘ᄯᅴ차다’의 복합어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5가)와 (15다)를 보면 ‘ᄯᅴ차다’는 전형적인 ‘주어+목적어+ᄯᅴ차다’로 구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 간략 두보 평전

두보(杜甫)는 712년 낙양 근처 공현 요만촌에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 태어나 770년 장사(長沙)에서 죽었다. 두보의 선조로는 『좌씨경전집해(左氏經典集解)』를 찬한 두예(杜預, 220~284), 초당의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이 있었고, 부인 양씨와의 사이에는 종문, 종무 두 아들과 딸도 몇 명이 있었다. 어머니가 어려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숙모 아래에서 자랐으며, 14~5세에는 이미 시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두보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경제적 지원자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제적 어려움으로 평생을 가난하게 지냈다. 안사의 난 등 여러 난을 겪으면서, 낙양(洛陽), 장안(長安), 진주(秦州), 성도(成都), 재주(梓州), 낭주(閬州), 운안(雲安), 기주(夔州), 장사(長沙) 등을 돌아다녔지만, 시작(詩作)은 계속 이어졌다. 두시의 위대함 중에는 이렇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백성의 생활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를 시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두보가 교류한 이로는 이백(李白), 소원명(蘇源明), 정건(鄭虔), 고적(高適), 잠삼(岑參), 이옹(李邕), 방관(房琯), 엄무(嚴武) 등이 있으며 특히 방관과 엄무는 두보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이었다. 두보가 성도를 떠난 것도 엄무의 죽음이 큰 원인이 되었다.

아래에 두보의 간략한 연대기를 제시한다.

712년(太極 원년, 1세) : 정월. 하남 공현(鞏縣) 요만촌(瑤灣村)에서 출생. 현종 즉위.

717년(開元 5년, 6세) :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劍舞)를 구경.

718년(開元 6년, 7세) : 봉황을 읊은 시 지음.

725년(開元 13년, 14세) : 시단에 두각을 나타냄. 문인들이 모인 장소에 출입함(정주자사 최상, 예주자사 위계심, 기왕 이범, 비서감 최척, 가수 이구년 등)

730년(開元 18년, 19세) : 순하(郇瑕, 산서 의씨현) 여행.

731년(開元 19년, 20세) : 제1차 여행 ; 오월(吳越, 강소와 절강 지역) 여행.

735년(開元 23년, 24세) : 진사 시험 낙방

736년(開元 24년, 25세) : 제2차 여행 ; 제조(齊趙, 산동과 하북 남부) 지역, 소원명(蘇源明)을 만남.

741년(開元 28년, 30세) : 은자 장개 방문. 낙양으로 돌아와 낙양 동편 두예(杜預)와 두심언(杜審言)의 묘가 있는 수양산(首陽山) 아래에 토실(土室)을 짓고 삶.

742년(天寶 원년, 31세) : 낙양 거주. 둘째 고모의 묘지명을 지음.

744년(天寶 3년, 33세) : 제2차 여행 ; 이백을 따라 양송 지역을 유람하며 선도를 익히고 선약을 캐리라 마음 먹음.

746년(天寶 5년, 35세) 장안 거주. 장안(西安)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 지원자이었던 부친 두한(杜閑)의 사망으로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함. 어떤 때에는 장안성 남쪽 종남산에서 약초를 캐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음. 이 시기 두보와 가깝게 지내던 글벗은 소원명(蘇源明)과 광문관 박사 정건(鄭虔)이었음.

747년(天寶 6년, 36세) : 과거 시험 낙방.

748년(天寶 7년, 37세) : 장안 거주.

751년(天寶 10, 40세) : 현종에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바침. 현종은 두보의 재능을 알아보고 두보의 문장을 시험해 볼 것을 재상에게 명함. 이임보가 출제하고 집현원의 학생들이 모두 와서 감독함. 두보는 이 일을 시에서 자주 언급함. 선우중통이 남조 토벌.

754년(天寶 13, 43세) : 아들 종무 출생.

755년(천보 14, 44세) : 하서 현위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우위솔부병조참군으로 전임되어 취임. 11월 봉선으로 가족 방문. 안녹산의 난 발발.

755년(천寶 14, 44세) : 11월, 우위솔부병조참군의 직책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잘 것 없는 봉급을 가지고 가족들이 있는 봉선현으로 향하였으나 어린 아들은 굶어 죽어 있었음.

756년(天寶 15, 45세) : 2월, 봉선현에서 장안으로 돌아와 솔부의 직책을 계속 수행. 여름으로 접어들어 반군이 진격해오자, 봉선현에 살고 있는 가족을 걱정하여 백수(白水, 섬서 백수)로 피난. 부주(鄜州, 섬서 부현)의 강촌(羌村) 도착. 6월 현종이 촉으로 피난. 양씨 일가 멸족. 7월 숙종 영무(靈武)에서 즉위. 두보는 숙종의 행재소가 있던 영무로 가다가 반군에 잡혀 장안에 억류.

757년(至德 2, 46세) : 4월,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이 머물던 봉상(鳳翔)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 5월 좌습유(左拾遺) 임명. 8월 휴가를 얻어 강촌(羌村)으로 감.

758년(乾元 원년, 47세) : 두보는 방관을 변호하다가 좌습유의 직위를 박탈 당하고 화주(華州, 섬서 화현)의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나가 지방의 문교 업무를 맡게 됨. 화주의 사공참군 시절 몇 수의 영물시를 지었는데, 모두 동물을 빌려 자신이 신세를 한탄한 작품.

759년(乾元 2, 48세) : 3월, 낙양에서 화주로 돌아옴. 7월 사공참군 사직. 늦은 봄 화주를 떠나 머나먼 진주(秦州, 감숙 천수) 10월 다시 동곡(同谷, 감숙 성현)으로 감. 12월 1일에 성도로 향함.

760년(上元 원년, 49세) : 성도의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세움. 신진현 1차 여행.

761년(上元 2, 50세) : 신진현 2차 여행. 12월 엄무 성도윤으로 부임.

762년(寶應 원년, 51세) : 4월 현종(玄宗)과 숙종(肅宗) 붕어. 대종(代宗) 등극. 이백 사망. 6월 경성으로 돌아가는 엄무 전송. 위구르와 토번의 침입으로 사천 지역을 떠돌다 성도로 돌아감. 늦가을에 가족을 재주(梓州)로 이사시킴.

763년(廣德 원년, 52세) : 봄에 낭주(閬州, 사천 낭중), 염정(鹽亭, 사천 지역), 한주(漢州, 사천 광한) 여행. 봄에 재주(梓州)로 돌아옴. 8월, 방관이 낭주에서 죽음. 낭주로 이사. 안사의 난 종결. 토번이 장안을 함락. 대종이 섬주로 피난.

764년(廣德 2, 53세) : 3월, 성도 초당으로 돌아감. 6월 엄무에 의해 검교공부원외랑으로 추천됨. 소원명(蘇源明)과 정건(鄭虔) 죽음.

765년(永泰 元年, 54세) : 정월, 막부의 직책을 사직하고 초당으로 돌아옴. 4월 엄무 돌연 병사. 5월 성도를 떠남. 민강(岷江)을 통해 유주(楡州, 사천 중경), 충주(忠州, 사천 충현), 운안(雲雁, 사천 운양)을 떠돎.

766년(大曆 元年, 55세) : 늦은 봄, 기주(夔州, 四川 奉節) 도착. 이 무렵 두보는 오골계 고기로 중풍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오골계를 몇 마리 길렀다.(이 책의「催宗文樹雞柵」10 참조)

767년(56세) : 적갑(赤甲)으로 이사. 기주(夔州) 도독(都督)인 백무림(栢茂林)이 만련해 준 양서 초당에서 삶.

768년(大曆 3, 57세) : 동생 두관에게서 편지를 받음. 정월 기주(夔州, 사천 봉절현) 출발하여 협주(峽州, 호북 宜昌) 하뢰(下牢)에 도착함으로써 삼협(三峽)을 완전히 벗어남. 3월 강릉(江陵) 도착. 가을 공안(公安, 호북성) 이사. 늦겨울 공안 출발 악주(岳州, 호북 岳陽) 도착.

768년(57세) : 설을 악양(岳陽)에서 보냄.

769년(大曆 4, 58세) : 정월 악양 출발. 형산(衡山), 상담(湘潭), 담주(潭州, 장사)에 도착.(이 책의 「백부행白鳧行」18 참조)

770년(大曆 5, 59세) : 늦봄 담주(潭州)에서 이구년(李龜年)과 재회. 4월 군벌의 반란을 피해 형주(衡州)로 피난. 침주(郴州)로 가는 도중 뇌양(耒陽)에 이르러 방전역(方田驛)에서 섭현령이 보내준 음식을 받음(일설에는 두보가 방전역에서 죽었다고 하나 그 이후에 지은 시가 있으므로 받아들이지 않음). 양양으로 가다가 장사에서 머룲. 겨울 고향으로 향하는 상강 기슭에서 세상을 떠남. 두보가 죽은 뒤에 두보의 영구는 43년 후 손자 두사업(杜嗣業)에 의해 언사(偃師, 낙양 부근) 서북의 수양산(首陽山) 밑으로 이장.

〈참고문헌〉

김만원 외5인 역해(2004), 『두보 위관 시기시 역해』,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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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01)
: 『두시언해』에 출현하는 17개의 ‘바라’ 중 16개가 ‘傍’의 번역어로 쓰였고, 1개는 ‘緣’의 번역어로 쓰였다. 이 예는 「樂遊園歌」에 나오는 구절로 그 예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예) 구루믈 바라 淸切 놀앳 소리 오놋다(緣雲清切歌聲上)〈두시 15:1ㄴ〉
주002)
: <풀이>그 외에도 근대국어 문헌에서 ‘하솟거리다. 하쇼리다. 하쇽거리다’ 등의 용례를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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