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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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역주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본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역주본은 아산시 세심사(洗心寺)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신심사 판본)을 인출한 것으로 약 40종의 언해본 〈부모은중경〉 중에서 가장 오래된 귀중한 판본이다. 어머니의 은혜가 큼을 적은 이 책은 우리나라에 널리 유포된 위경(僞經)의 하나인데, 순 한문으로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 목판으로 인쇄되었고, 조선시대에도 단종, 성종 때의 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가 있고, 신심사 판본이 발견되기 전 최고본으로 알려진 1553년(명종 8) 경기 장단 화장사(華藏寺)판본은 현재 볼 수 없다. 본 역주본을 위해 인출하게 된 세심사 소장 신심사 판본은 명종 18년(1563)에 판각된 귀중한 판본이다.

김영배(金英培)

1931년 평안북도 영변군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석사, 박사과정 수료)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1977)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학교), 상명여자사범대학 조교수,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교수 역임

현재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저서〉

「석보상절 제23·24권 주해」 일조각 1972

「평안방언의 음운체계 연구」 동국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77

「증보 평안방언연구」 태학사 1997

「평안방언연구 자료편」 태학사 1997

「국어사 자료 연구」 도서출판월인 2000

「석보상절 제23·24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9

「한국언어지도집」(공동연구) 학술원 1993

「석보상절 제6·9·11」 공역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1

「석보상절 제13·19」공역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1

「역주 능엄경언해 제1·2」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

「역주 능엄경언해 제3·4」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

「역주 능엄경언해 제7·8」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8

「역주 능엄경언해 제9·1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역주 월인석보 제11·12」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역주 법화경언해 권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역주 법화경언해 권2」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역주 법화경언해 권3」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2

「역주 법화경언해 권4」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2

「역주 법화경언해 권6」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3

「역주 월인석보 제2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4

「역주 금강경삼가해 제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6

「역주 금강경삼가해 제2」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7

「역주 월인석보 제4」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0

역주위원

  •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 김영배
  • 교열·윤문·색인위원

  •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 박종국, 홍현보
  • 편집위원

  • 위원장 : 박종국
  • 위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 김석득 김영배 나일성
  • 노원복 박병천 오명준
  • 이창림 이해철 전상운
  • 정태섭 차재경 최기호
  • 최홍식 한무희 홍민표

〈역주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를 내면서

우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68년 1월부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을 국역하기 시작하여 447책을 펴내 실록을 완역하였고, ≪증보문헌비고≫ 40책 완간 등 수많은 국학 자료의 번역사업을 벌여 오고 있다. 아울러 1990년 6월부터는 “한글고전 역주 사업”의 첫발을 내디디어, ≪석보상절≫ 권6·9·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그 성과물을 간행하여 왔다. 이제 우리 회는 올해로써 한글고전 역주 사업을 추진한 지 21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를 맞게 되었고, 600책이 넘는 국역 학술 간행물이 말해 주듯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 국역‧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국역 사업을 벌이는 뜻은 바로 백성과의 소통을 통하여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까지 역주하여 간행한 문헌과 책 수는 ≪석보상절≫ 2책, ≪월인석보≫ 17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남명집언해≫ 2책,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1책, ≪구급방언해≫ 2책, ≪금강경삼가해≫ 5책, ≪선종영가집언해≫ 2책, ≪육조법보단경언해≫ 3책, ≪구급간이방언해≫ 5책, ≪진언권공, 삼단시식문언해≫ 1책, ≪불설아미타경언해, 불정심다라니경언해≫ 1책, ≪반야심경언해≫ 1책, ≪목우자수심결·사법어언해≫ 1책, ≪신선태을자금단·간이벽온방·벽온신방≫ 1책,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1책, ≪언해 두창집요≫ 1책, ≪언해 태산집요≫ 1책, ≪삼강행실도≫ 1책, ≪이륜행실도≫ 1책, ≪정속언해‧경민편≫ 1책, ≪상원사중창권선문‧영험약초‧오대진언≫ 1책 등 모두 73책이다.

이제 우리가 추진한 “한글고전 역주 사업”은 15세기 문헌을 대부분 역주하고 16세기 이후 문헌까지 역주하는 데 이르렀다. 올해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논어언해≫ 등 16세기와 17세기 문헌을 중점적으로 역주할 예정이다.

이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佛說大報父母恩重經諺解)≫는 부모 특히 어머니의 은혜가 큼을 적은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널리 유포된 위경(僞經)의 하나인데, 순 한문으로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나, 조선 단종, 성종 때의 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가 있고, 언해된 것은 근래 2001년경에 발견된 인종 원년(1545) 오응성(吳應星) 발문이 붙은 본이 현재까지 알려진 최고본(最古本)이다. 이 책에는 반치음[ㅿ], 아음[ㆍ]은 혼란되지만 쓰이고 있다.

이 책이 발견되기 전 최고본으로 명종 8년(1553) 경기 장단 화장사(華藏寺)판이라 하였으나, 이 판본은 현재 볼 수 없고, 그 뒤에 명종 18년(1563) 송광사(松廣寺) 간본의 책이 서울대학교 일사문고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번 쇄출하여 영인하게 된 세심사 소장 신심사 판본은 명종 18년(1563)에 판각된 귀중한 판본이다.

이번에 우리 회가 펴내는 역주본은 2001년경에 발견되어 현재 (주)화봉문고(대표 여승구)에 소장되어 있는 오응성 초역본(1545년)을 저본으로 삼았으나, 부록으로 영인하여 실은 것은 명종 18년(1563) 목판으로 판각된 충남 아산시 염치읍 세심사(洗心寺) 소장 신심사(神心寺) 판본이다. 이 영인본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 목판본을 직접 쇄출 인경(印經)한 것으로서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귀중한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를 우리 회에서 역주 간행함에 있어, 이 역주를 위해 판본을 흔쾌히 출납하여 주신 신심사 주지이신 지성(智性) 스님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며, 역주해 주신 동국대학교 김영배 명예교수님과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준 교육과학기술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1년 11월 5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과 한글 관계 문헌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15~17세기의 우리말을 연구하는 전문학자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이를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며 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본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의 저본으로는, (주)화봉문고 소장본을 역주하였고, 신심사(神心寺)판본(현재 충남 아산 소재 세심사(洗心寺) 소장 목판본)을 인출하여 그 영인본을 부록으로 실었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한문 원문·언해 원문·현대어 풀이·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으며, 원전과 비교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장(張)·앞[ㄱ]·뒤[ㄴ] 쪽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제2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言언語어애 2ㄱ 宰我아와

제3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子의 車거 3ㄴ를 請야

(3) 현대말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4) 원문 내용(한문 원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 풀이문·주석과 구별하였으며, 원문 가운데 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다.

(5) 이 역주본의 저본인 오응성 발본(초역본)과, 인출하여 영인한 신심사판본의 표기가 다른 경우는 원문 내용 밑에 “※ 신심사본 대교”라는 난을 만들었으며, 해당 어휘를 ‘초역본-신심사본’으로 이어 밝혔다.

(6) 현대말 풀이에서, 옛글의 구문(構文)과 다른 곳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충한 말은 〈 〉 안에 넣었다.

(7) 찾아보기 배열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초성순 : ㄱ ㄲ ㄴ ᄔ ㄷ ㄸ ㄹ ㅁ ᄝ ㅂ ㅲ ㅳ ㅃ ㅄ ᄢ ᄣ ᄩ ㅸ ㅅ ㅺ ᄮ ㅼ ㅽ ㅆ ㅾ ㅿ ㅇ ᅇ ㆁ ᅙ ㅈ ㅉ ㅊ ㅋ ㅌ ㅍ ㅎ ㆅ

② 중성순 :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ㆉ ㅜ ㅝ ㅞ ㅟ ㅠ ㆌ ㅡ ㅢ ㅣ ㆍ ㆎ

③ 종성순 : ㄱ ㄴ ㄴㅅ ㄴㅈ ㄴㅎ ㄷ ㄹ ㄹㄱ ㄹㄷ ㄹㅁ ㄹㅂ ㄹㅅ ᄚ ㅁ ㅁㄱ ㅯ ㅰ ㅂ ㅄ ㅅ ㅺ ㅼ ㅿ ㆁ ㅈ ㅊ ㅋ ㅌ ㅍ ㅎ

답사 보고서

1. 이 답사는 답사자들이 지난 2011년 6월 7일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번지 세심사(洗心寺) 주지스님 지성(智性) 스님을 뵙고 공문을 전달한 뒤, 방문 목적을 말씀드리고 협조를 부탁드린바, 스님께서 흔쾌히 승낙하시어 이루어졌다. 이때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67호인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을 열람할 수 있었고, 아울러 이 신심사(神心寺) 판본을 2005년 사재동 교수 팀이 인출하고 엮어 펴낸 〈불설대보부모은중경 - 원전과 불교문화학적 연구〉라는 책을 받아보고, 그 영인본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세심사에 전하는 신심사 목판본을 인출하여 영인하였을 뿐, 여기에 올린 해제는 계룡산 갑사 장판에 대한 해제였고, 신심사 판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우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는 2011년 계획한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역주를 위해 신심사 판본을 인경(印經)하여 역주본에 부록으로 영인코자 세 차례에 걸쳐 답사하였으며, 이 판본을 인경하여 책으로 제본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비교 분석하여 역주하고, 영인하여 역주본을 출판하게 되었다.

1차 답사는, 2011년 6월 7일 동국대학교 김영배 명예교수님,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김성주 연구교수님, 홍현보(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연구원)가 다녀왔는데, 여기에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목판본을 출납하여 전체 판면을 면밀히 검토하니, 부분적으로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것이 있었고, 윗부분이 깨진 것도 있었지만 판면 상태가 매우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판은 모두 앞뒤판 두 장 1판으로 마지막 판 26장까지 13판이었고, 그 뒤에 이어지는 시주질이 1판(단면) 있었다. 본디 14판이어야 완질인데, 2장과 12장을 앞뒤로 하는 한 판이 유실되어 13판만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밝히면, 1장(張)과 3장(張), 4장과 16장, 5장과 13장, 6장과 14장, 7장과 8장, 9장과 10장, 11장과 15장, 17장과 18장, 19장과 20장, 21장과 22장, 23장과 24장, 25장과 26장, 시주질이 각각 1판, 이렇게 13판이다. 이를 정리하면, 1, 3, 4, 5, 6, 7, 8, 9, 10, 11,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장과 시주질이 전하고, 2장과 12장이 유실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목판을 다시 인경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고, 세심사의 사정에 따라 3개월 후에 재방문하여 판본을 찍기로 하였다.

2. 2차 답사는 2011년 11월 8일에 있었으며, 김영배(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안재응(세종대왕기념사업회 총무부장), 홍현보 연구원이 방문하여 인쇄를 실시하였는데,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목판본을 출납하여 준비물을 벌여놓고 먹을 발라 첫 장 인쇄를 시작했지만 실패하였다. 이에 목판의 상태를 잘 알지 못하고 섣불리 인쇄할 수 없다는 지해(智海) 스님의 말씀을 듣고, 전문가를 대동하여 인쇄할 것을 약속한 뒤 돌아왔다.

3. 3차 답사는 2011년 11월 11일에 있었으며, 전문가인 안준영(이산각연구소장, 용비어천가 목판복원 판각자) 님을 대동하여, 안재응 부장과 홍현보 연구원이 다녀왔다. 지성(智性) 스님과 지해(智海) 스님의 참관 아래 인경(印經)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물은 세심사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안준영 님이 각각 소장키로 하였다. 지성 스님과 지해 스님께서 이번 목판 인쇄가 매우 잘 이루어져서 감사하다는 평을 내려주시었고, 아울러 책의 제본까지 안준영 님께 부탁하여 맡기었다.

4. 신심사 판본에는 간기(刊記)와 시주질(施主秩)이 있는데, 그곳에는 ‘嘉靖四二年 癸亥 暮春 旣望 漕溪 訥菴 書于神心丈室’(가정 42년(명종 18, 1563) 계해년 3월 기망(16일) 조계 눌암이 신심사 방장실에서 썼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심사에서 눌암 스님이 글을 썼음을 알 수 있고, 또 ‘淸洪道 牙山地 桐林山 神心寺 留板’(청홍도(충청도) 아산 땅 동림산 신심사에 책판을 두었다.)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판본이 지금은 영인산 세심사에 전하는 것일까?

지금 세심사에는 대웅전 앞에 제작 때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탑이 있는데 이 탑을 ‘세심사다층석탑’이라 부르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으니, 이 세심사가 매우 오래된 사찰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세종실록〉(1454) 지리지를 보면, 아산현 편에 동림산과 함께 ‘영인(寧仁)은 아산현의 별호이다.’라는 기록만 있을 뿐 영인산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제20권 아산현 편에도, 영인산은 없이, ‘신성산(新城山): 본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동림산(桐林山) : 본현 남쪽 7리 지점에 있다.’라는 기록만 있으니, 이 신성산 위치가 바로 영인산의 위치다. 또 동림산에는 ‘동림사(桐林寺), 신심사(神心寺), 축봉사(縮鳳寺), 보림사(寶林寺), 현암사(懸巖寺)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으니 분명히 동림산은 이곳과 다른데 신심사 판본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가? 주지 스님 말씀은 1968년 해인사 일타 스님과 도견 스님이 이곳을 찾아와 사찰 어귀에 있던 ‘세심당부도’를 보고 절 이름을 ‘세심사’로 지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 절이 신심사라는 것을 모르고 오랜 세월이 지났다는 것과, 그동안 분명한 이름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지도서〉 아산현 편 : 영인산이라고도 한다는 신성산을 그려놓고도, 신심사가 있는 동림산을 영인산이라고 표기하였다.

또한 영조 때 펴낸 〈여지도서〉(1757~65)에는 ‘신성산(新城山)을 영인산이라고도 한다’고만 설명하였고, 지도에는 신성산 옆에 동림산이 아닌 영인산을 기록하여 그곳에 신심사를 그려놓았으니 당시 두 산을 혼동하여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여지승람처럼 동림산의 다섯 절을 설명하면서 신심사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대동여지도〉 아산현 부분 : 동림산과 영인산이 아산현 아래에 나란히 이어져 있다.

나아가 〈대동여지도〉(1861)에서는 아산현 아래 영인산과 동림산이 나란히 기록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한국땅이름큰사전〉(1991, 한글학회)에도 두 산이 다 올려져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정리해 보면, 아산현 가까이에 본디부터 영인산(신성산)과 동림산이 나란히 있었고, 신심사는 동림산에 있었으나, 두 산을 후대에 서로 혼동하여 부르게 되었고, 심지어는 동림산이 영인산으로 불리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신심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동림산과 영인산이 매우 가깝게 붙어 있어서 혼동되게 불리어짐으로써 지금의 위치가 영인산이 된 것이라고 본다.

5. 결국 본디 동림산과 신성산은 나란히 있었는데 신성산이 영인산으로 불리면서 두 산을 혼동하다가 영인산이 확장되어 두 산을 아우르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동림산 신심사에서 판각하여 보유하던 이 〈부모은중경판〉은, 어떠한 연유로 신심사가 없어지면서 그 자리에 있던 부도와 불상, 다층석탑과 함께 보존되어 오다가, 이 절이 새롭게 세심사라는 이름을 얻게 됨으로써 세심사 소장본이 된 것이다. 만약 불상이나 탑이 신심사의 유물이라면, 이 세심사는 본디 신심사였음이 분명해지지만 아직 그러한 사실은 밝혀진 것이 없다.(작성자 : 홍현보)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해제 *
이 역주본이 이루어지기까지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던 여러분들을 여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직접적으로는 평생의 동료인 외우(畏友)로, 이번엔 ‘이 문헌’의 초서로 된 발문을 해서(楷書)로 옮기고 번역한 이종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원고의 일부를 도와준 정우영 동국대학교 교수, 여러 가지 자료를 챙겨 준 김무봉 동국대학교 교수, 교정을 보아 준 김성주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연구교수, 입력과 교정을 맡은 하정수 동국대학교 강사, 필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자료검색 프로그램 UniConc를 설치해준 김지오 동국대학교 강사에게 도움을 받았다. 간접적으로는 10년 전 ‘이 문헌’의 복사본을 보내주신 송일기 중앙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 지난 6월 용정사본 복사본을 마련해 주신 이호권 한국방송대학교 교수, 신심사 방문을 주선해 주신 이성수 불교신문사 편집국장, 귀한 문화재 책판을 보여주신 신심사 지성(智性) 스님, 이 책의 출판을 직접 담당한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홍현보 선생 이상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사의를 여기에 적어둔다.

김영배(동국대학교 명예교수)

Ⅰ. 머리말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권두 서명 아래는 한글로 “부모의 은 갑 경이라”라고 적혀 있다. 서명의 첫 부분 ‘불설(佛說)’은, 흔히 불교의 모든 경전(經典) 처음에 쓰여 ‘부처님의 말씀(가르침)’을 뜻하며 나머지 제목과 합치면 “소중한 부모님의 은덕 갚을 길을 일러 주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주002)

이와 같이 해당 문헌의 서명(書名)을 한자 아래 이어서 정음으로 적은 것으로는, 1541년 『우마양저염역치료방(牛馬羊猪染疫治療方)』, ‘쇠며 이며 이며 도티며 서 뎐염  고티 방문’과 1542년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 ‘시긔 덥단 고틸 일 분류야 수이 알에  방문’과 같은 책이 있다. 이들 책은 원간본은 아니고 복각본(覆刻本)들이지만, 원간본도 이와 같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 역주의 저본으로 이용할 오응성 발문이 붙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는 인종 1년(1545)에 간행되었다(이하 ‘이 문헌’이라 부른다.). ‘이 문헌’은, 그동안 훈민정음 창제에서 120년 되는 해에 이루어진 16세기 중엽의 국내 소장본 중 최고본(最古本)으로 알려졌던 1563년의 송광사판보다 18년이나 앞서 간행된 것이다. 이 문헌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부모은중경언해〉로서는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세상에 알려지면서(송일기·유재균:2000ㄴ) 국어사 연구에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문헌’은 첫머리에 서명을 간단히 언급하였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때, 부처님이 사위성에서 여러 제자와 대중들을 데리고 남행하시다가, 길가에 있는 마른 뼈에 절하셨는데, 그것은 그 뼈에 대한 전세의 인연 때문이라 하셨다. 그 뼈를 흑백과 경중으로 남녀를 구별하라 하시고, 가볍고 검은 뼈가 여인의 것인데, 세상의 어머니들이 회임 10개월 동안의 고생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고, 그에 따른 부모님의 열 가지 은혜를 노래[게송(偈頌)]로 기렸다. 이어서 자식이 성장하면서 저지르는 불효의 열 가지 사례를 들고, 그 막중한 은혜에 보답함에 있어서 어려운 일을 여덟 가지로 이르시고 불효한 자식은 이 경전을 읽고 쓰며, 과거에 지은 죄를 참회하고 복을 닦으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나, 그렇지 않으면 불타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경계하셨다. 또한 제자들이 부모님 은혜를 갚을 길은 이 경전을 많이 말할수록 부모는 지옥을 여의고 천상에 나게 된다고 이르셨다. 이에 모든 대중이 발원하면서 부처님 가르치심을 결코 어기지 않기를 서원하고, 이 경전의 이름을 여쭈어 인정받아 봉행했다.

‘이 문헌’의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인종 1년(1545)에 간행한 것이다.

‘이 문헌’의 판식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삽화를 두었는데,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세주>(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다음에 적은 바와 같이 조금씩 달라진다.

첫 장 앞면(1ㄱ, 이하 숫자는 장의 차례를 나타내며, ‘ㄱ·ㄴ’은 각각 그 장의 ‘전·후’ 면을 나타냄.) 서명 다음의 2~7행은 원문, 8~10행과 1ㄴ 3행까지 언해문, 나머지 7행분 지면에 변상도(1. 여래정례도)가 배치되었다. 2ㄱ에서 6ㄱ까지는 원문과 언해문이 단락에 따라 계속되고, 다음 내용은 부모에 대한 열 가지 은혜를 노래[게송(偈頌)]로 지은 것인데, 6ㄴ의 첫 행은 제1, 제2… 형식의 제목과 그 풀이, 나머지 지면을 대략 상하로 반분하여 위에는 변상도, 아래에는 오른쪽에 5언율시(律詩)로 역시 1자를 내려서 언해문을 1행에 두 줄씩, 작은 글자로 배치하였다. 이렇게 11ㄱ까지 열 가지 은혜를 그린 그림[십은변상도(十恩變相圖)]이 끝나고, 11ㄴ~17ㄴ까지 원문, 그리고 언해문이 되풀이되며, 18ㄱ부터 21ㄴ까지는 8비유도(譬喩圖)로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변상도가 반 면뿐이면서도 세로로 배치되었고, 22ㄱ에서 26ㄴ까지는 원문에 따라 언해문과 변상도[삼보공양도(三寶供養圖)] 22ㄴ, 다음은 다시 원문과 언해문에 아비무간지옥도(阿鼻無間地獄圖) 25ㄱ 8행 분이 배치되고, 주003)

이 변상도에 관해서는 박도화(2004:111~121)에 그 제목과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25ㄱ 9, 10행부터 원문, 언해문 두 단락이 이어지며 26ㄴ 끝 5행에 ‘보부모은중진언(報父母恩重眞言)’과 ‘왕생진언(往生眞言)’으로 끝난다. 27ㄱ~ㄴ은 간행자의 한문 초서로 된 발문과 시주기(施主記)가 두 면에 걸쳐 있다.

이 발문을 근거로 하여 ‘이 문헌’을 〈부모은중경언해〉의 최고본(最古本)으로 보는 것이다. 주004)

‘초역본-오응성본’과, 이 역주본에 영인으로 붙인 ‘신심사 판본’의 형태서지를 보인다. ‘초역본’은 송일기(2001:192)를 따랐고, ‘신심사 판본’은 2011. 11. 11. 직접 세심사를 방문하여 실측하고, 책판을 인출(印出)한 것을 대본으로 하였는데, 이는 안준영(이산각연구소장, 용비어천가 목판복원 판각자) 님이 인출하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홍현보 선생이 답사를 담당하였다.

가. 초역본(初譯本) - 오응성(吳應星)본

ㄱ) 수제(首題) : 佛說大報父母恩重經 부모의 은 갑 경이라

ㄴ) 단권(單卷) 1책, 27장, 목판본, 28.5×19.5cm.

ㄷ) 4주(周) 단변(單邊), 반엽(半葉) 광곽(匡郭) : 19×15cm,

ㄹ) 유계(有界), 10행(行), 주(注) 쌍행(双行).

ㅁ) 판심제 : 恩.

ㅂ) 판심 : 상하(上下) 대흑구(大黑口), 내향(內向) 흑어미(黑魚尾).

ㅅ) 권말[跋文] : 가정(嘉靖) 기원지을사(紀元之乙巳)(1545) 월(月) 일(日) 보성후학(寶城後學) 오응성(吳應星) 근지(謹誌).

ㅇ) 소장처 : 화봉문고(華峰文庫) 여승구 님.

나. 신심사(神心寺) 판본

ㄱ) 수제(首題) : 佛說大報父母恩重經 부모의 은 갑 이라

ㄴ) 단권 : 1책(후쇄 인출본), 27장, 목판본, 29.5×20.9cm.

ㄷ) 4주 단변, 반엽 광곽 : 19.0×14.5cm.

ㄹ) 유계, 반엽 10행, 한자 18자, 정음 17자. 변상도면(6ㄴ~11ㄱ) 하단 한자 10자, 정음은 작은 글자로 쌍행 9자.

ㅁ) 판심제 : 恩.

ㅂ) 판심 : 상하 대흑구, 내향 흑어미(간혹 2~3엽도 있음).

ㅅ) 권말 간기 : 가정(嘉靖) 42년(1563) 계해(癸亥) 모춘(暮春) 기망(旣望) 조계(漕溪) 눌암(訥菴) 서우신심장실(書于神心丈室). … 축원 … 청홍도(淸洪道) 아산지(牙山地) 동림산(桐林山) 신심사(神心寺) 유판(留板). (신심사는 사명(寺名)이 세심사(洗心寺)로 바뀌고, 책판은 현재 전함.)

ㅇ) 소장처 :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세심사(洗心寺).

이 ‘신심사 판본’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책판의 상태에 대해 좀더 살펴보면, 현재 책판 수는 모두 13판으로, 그 내용은 1-3장, 4-16장, 5-13장, 6-14장, 7-8장, 9-10장, 11-15장, 17-18장, 19-20장, 21-22장, 23-24장, 25-26장, 27장(간기와 시주질)이 각각 1판씩 계 13판이다. 그런데 여기에 빠진 장차가 있으니, 2장과 12장의 한 판이 유실된 셈이다. 그리하여 영인에 있어서는 오응성본의 복사로 해당 장차를 보충하였다.

‘이 문헌’의 서지와 관련해서 덧붙일 것은 책판의 각수(刻手)에 대해서인데, 발문에 기록된 ‘쌍순(双淳), 혜식(惠湜)’ 두 분의 각자(刻字) 중 특히 종성 ‘ㆁ’의 각자에서 차이가 나는 것으로 파악했다. 자세한 것은 ‘Ⅳ.1.4. ㆁ 표기’에서 논의키로 한다.

Ⅱ. 줄거리와 분단

부처님께서 사위국 왕사성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다가 제자들과 남방으로 가시던 중에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보시고 절하시었다. 아난과 대중이 부처님께 그 까닭을 여쭈니, ‘그 뼈는 부처님 전생의 조상이거나 누대의 부모님 뼈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절하는 것이다.’라고 하시었다. 부처님께서는 그 마른 뼈를 둘로 나누라 하시고, 빛이 희고 무거운 것은 남자의 뼈이고, 빛이 검고 가벼운 것은 여자의 뼈라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이 뼈를 보고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남자는 절에 가서 강설도 듣고 경도 외우며 부처님께 예배도 하고 염불을 하므로 그 뼈가 희고 무겁지만, 여자는 자식을 낳음에 피를 서 말 서 되 쏟고, 아이 기르는 데 젖을 여덟 섬 너 말이나 먹이므로 그 뼈가 검고 가벼워졌다고 말씀하셨다.

아난이 이 말씀에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하면 어머니의 은덕을 보답할 수 있는지 여쭈었다. 부처님은 어머니가 아기를 잉태하면 열 달 동안 고생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고, 어머니가 아기를 낳은 열 가지 은혜를 게송(偈頌)으로 지어 이르셨다. 첫째: 아이를 배어서 열 달 동안 길러주신 은혜, 둘째: 해산할 때 고통받으신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으신 은혜, 넷째: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어서라도 먹여주신 은혜, 다섯째: 마른자리 진자리 갈아주신 은혜, 여섯째: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 일곱째: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주신 은혜, 여덟째: 고향 떠난 자식을 염려해 주신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해 힘든 일도 마다 아니하시는 은혜, 열째: 백세가 되어서도 팔십인 자식을 사랑하시는 은혜가 그것이다.

중생들은 이러한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고 불효를 일삼으니, 그 열 가지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부모님의 은덕을 듣고, 모든 대중들이 엎어져 스스로 몸을 치며 피를 흘리고 기절하여 오래 있다가 깨어나서 이제야 죄인인 줄 알았사오니, 어떻게 해야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지 일러주시기를 청하였다.

부처님은 대중들에게 여덟 가지 비유를 들어 어머니의 은혜를 갚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말씀하셨다.

이때 대중들이 부모님의 은덕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면서, 어떻게 하면 부모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지 여쭈니, 부처님께서 부모의 은혜를 갚으려거든 부모를 위해 이 경을 쓰고, 읽고, 외우고, 죄를 참회하고, 공양하고, 재계를 받고, 보시를 하고, 복을 지어야 한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불효한 자식은 아비무간지옥에 떨어져 온갖 고초를 여러 겁이 지나도록 계속 겪게 되니, 부모의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부모를 위하여 거듭 경(經)을 펴내 참으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때 모든 대중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각기 원을 내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길이 어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경의 이름을 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대보부모은중경’이라 하시고 항상 받들어 지니라고 하셨다.

이상의 내용을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때 부처님이 왕사성에서 대비구와 보살 대중을 데리고 남행하시다가, 어느 길가의 마른 뼈 무더기에 예배한다.(여래정례도(1))〈1ㄱ1~2ㄱ7〉.

(2) 부처님이 마른 뼈에 예배한 까닭과 그 뼈 중에서 검고 가벼운 것이 여인(어머니)의 것인데, 그 원인은 해산에서 겪은 고통이라 하니, 아난이 그 은혜의 보답 방법을 여쭙는다.〈2ㄱ8~3ㄴ5〉.

(3) 부처님이, 세상 어머니들이 잉태하여 해산에 이르는 열 달 동안의 과정을 낱낱이 구체적으로 들어 설한다.〈3ㄴ6~5ㄴ〉.

(4) 모든 어머니들이 잉태하여 해산에 이르는 열 가지 은혜를 한시로 읊는다.(부모10은도(10))〈6ㄱ~11ㄱ10〉.

(5) 자식이 성장하면서 여러 가지 불효를 저지르는 사례를 이르고 참회와 보은할 것을 설한다.〈11ㄴ~17ㄱ4〉.

(6) 부모님 은덕을 갚기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들어서 설한다.(8비유도(8))〈17ㄱ5~21ㄴ〉.

(7) 부모님에 대한 보은의 방법은, 참회하며 불경을 서사 독송하고 덕을 닦으라고 경계한다.(삼보공양도(1))〈22ㄱ~22ㄴ〉.

(8) 불효자가 아비지옥에 떨어져 받는 무서운 고통을 이른다.〈23ㄱ~24ㄱ3〉.

(9) 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경을 이룸에 따라 부처를 보며 그 덕에 따라 천상에 나서, 영영 지옥을 여의게 된다고 하셨다.〈24ㄱ4~ㄴ〉.

(10) 이에 제자들은 보은을 위한 굳은 서원을 하고 이 경전의 이름을 부처님께 여쭈어 인정받아 물러난다.(아비지옥도(1))〈25ㄱ~26ㄴ〉.

Ⅲ. 간략한 연구사를 위하여

여기서는 순전히 국어사적 연구를 중심으로 다룬 것으로, 나머지 서지학적, 불교 미술사학적인 연구는 해당 분야 연구로 미룬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의 언해본이 문헌상으로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40년대로 보인다. 최현배(1946:141~143)에서 ‘이 문헌’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그 앞부분에 “… 여기에는 언해한 책에 대해서만 小倉進平의 기술과 나의 본 것을 아울러 다음과 같이 간단히 벌려든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여기 ‘이 기술이란’은 오쿠라신페이(小倉進平)(1940:268~271)의 〈朝鮮語學史(日文)〉(增訂版)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소개가 학계의 고찰로는 처음인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는 가정(嘉靖) 32년(1553) 경기도 장단(長端)의 화장사(華藏寺) 판본을 시작으로 정조(正祖) 때 화성 용주사본에 이르기까지 연대와 간행지를 간략히 적은 것으로, 10종의 이본이 소개되어 있다.

그 후에는 안병희(1979)의 “중세국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 고찰”에 한 쪽 정도의 소개가 있고, 전광현(1986:1~12)에서는 〈부모은중경언해〉 영인(태학사)에서 ‘송광사본, 남고사본, 용주사본, 강재희본’과 간기 없는 1종을 합해 6종의 이본을 영인하고, 거기에 붙인 “해제”에 모두 25종의 이본을 고찰한 것이 있다.

위와 같은 연구의 환경 조성으로 그동안 드물게나마, 방옥산(1976), 황홍주(1989), 최홍렬(1990)의 석사논문이 나왔으며, 1990년대 후반에 신중진(1996), 유필재(1997)의 연구가 있었는데, 차례로 간단히 언급해 둔다.

방옥산(1976)은 발표된 지 30여 년이 지났고 지방에서 간행된 것이어서 미처 자료를 얻어 볼 수가 없어 논하기 어렵다. 추후라도 찾으면 보고할 것을 약속드린다.

황홍주(1989)에서는 당시까지 국내 소장 자료 중에서는 최고본인 송광사본(1563)을 기준으로 17세기의 고방사본(1668), 18세기의 금산사본(1720)을 주로 비교하여 그 통시적이 변천에 따른 표기, 음운, 통사 부분의 현상을 고찰하였다. 그 중 음운 부분의 ‘ㄱ, ㄷ, ㅅ’이 비자음(鼻子音)의 동화현상에 의해 변동한 모습이라든가, 통사 부분에서 15세기에는 판정의문과 설명의문이 구별되는 의문사(疑問詞) 통합 여부가 여기서는 구별 없이 쓰였다는 점 등을 지적한 것은 황홍주(1989: 41, 64)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이 아닌가 한다.

최홍렬(1990)에서는 2세기의 시대차가 있는 16세기 중엽의 송광사본과 18세기 전반의 남고사본(1741?, 1794?)을 비교 대상으로 표기와 문자, 음운론적, 형태론적, 어휘론적 특징에 대한 차이를 언급했다.

신중진(1996)에서는 당시로 보아서는 비교적 새로 알려진 율사본(栗寺本)을 중심으로 송광사본, 희방사본, 간기 미상본(태학사 영인본의 이본)과 이들 사이의 공통점을 정리하여 간기 미상본은 율사본의 복각본임을 밝히고, ‘국어사적 특징’ 중에서 율사본의 ‘됴케〈12ㄴ〉, 이슥게〈17ㄴ〉’를 설명함에 이현희(1995:565)를 인용하여 ‘-거〉(-것)〉-게()〉-거야~-게야’의 변천상을 방증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먹니〈5ㄴ〉, 몽라도〈16ㄴ〉, 잇〈5ㄴ〉, 니다가〈14ㄴ〉’ 등의 예는 종래에도 언급된 것이지만, 이는 16·17세기에 이미 후부변자음의 조음방식동화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초역본이 나타난 현재로는 16세기부터 나타났다고 고쳐져야 할 것이다. ‘문법적 특징’으로는 이승희(1996:76)에 따라 감동법 선어말어미 ‘-옷-(돗)’이 포함된 ‘-놋다’에 ‘-도-’가 더 통합된 ‘-놋도다’가 15세기에 드물게 나타났는데, 율사본에는 ‘-놋다’, ‘-놋도다’, ‘-도다’가 쓰여 이를 이중감동법으로 보았다. 또한 ‘상 표시’에 있어서 ‘단장여 이실 ’〈2ㄴ〉와 ‘ 오 훠 신고 이실 ’〈2ㄴ〉에서, 전자는 15세기의 완료 상태 지속의 상 표시인데, 후자는 15세기에는 잘 볼 수 없는 완료 상태 지속의 예이므로, 이는 그 쓰임이 확대되어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

유필재(1997)에서는 ‘이 문헌’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부모은중경언해〉의 최고본(最古本)으로 알려졌던 일본 동경대학 문학부의 소창문고(小倉文庫) 소장의 화장사본을 현지에서 확인하고, 이 책이 국내의 송광사 판본에 없는 성조(聲調) 표기가 많음에 착안하여 이 책의 성조 표기는 “…하나의 어절에 대해서 한 음절에 거성 혹은 상성만이 표기되는바, 그 위치는 중세국어 성조 표기에서 각 어절에 나타나는 최초의 거성 혹은 상성의 위치와 일치한다.” 하고, 이를 화장사본이 간행된 16세기 경기지역어의 성조 자료로 보고, 종래의 방점 자료에 추가할 수 있게 된 것에 이 자료의 의의를 두었다. 그러나 뒤에 보는 바와 같이 ‘이 문헌’의 초역본(1545)으로 알려진 오응성 발문본이 학계에 소개되어 비교해본 결과, 화장사 판본에 대한 연구 결과에는 재고할 점이 있어 보인다.

이호권(2000)에서는 종래에도 알려진 것이지만, 좀 더 자세하게, ‘용주사판 부모은중경(언해)’은 서명이 같은 ‘부모은중경’이라도 종래의 초역본 계통의 이본과는 전혀 다른 판본으로서, 이는 정조(正祖)의 명에 따라 백성들에게 ‘효(孝)’를 교화하기 위해 간행된 것이며, 책판은 주자소(鑄字所)에서 정조 20년(1796)에 판각하여 인출하고, 그 보관은 생부 사도세자의 능사(陵寺)인 용주사에 보관토록 한 것으로 보았다. 이 용주사 판본을 용주사 간행으로 보는 것은 에타토시오(江田俊雄 1934:155)부터이며, 편찬자 추정은 조선총독부(1932:32)가 처음이나, 그 근거가 제시되지 않아서, 오쿠라신페이(1940:271)도 같았으며, 여러 정황으로 보아 정조가 창설한 규장각으로 추정하였다. 적극적인 증거는 없으나 지나친 추정을 삼갔다.

이 용주사판의 구성과 체재는 다 알려진 것이나, 책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변상도에 대해서 사찰판본의 변상도와 다른 것은, 유교적 관념에 어긋나는 장면을 제외하고 새로 구성한 것이고, 그림은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이 그렸다고 보고, 이는 종래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소작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당시의 사적인 배경으로 보아서 확실하지 않다고 하였다. 번역 양식도 초역(抄譯)인 사찰 판본에 대하여 용주사 판본은 완역(完譯)이며 직역(直譯)이어서 그 체재가 불경언해서보다는 유경언해서에 가깝고, 초역판계의 복각본, 후대에 개간한 이본은 모두 서남방언의 영향을 받은 자료인데 반해서, 이 용주사판은 그 국어학적 여러 특징으로 보아 18세기 말 중앙어(경기지역어)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위의 논문과 같은 해에, 서지학계의 연구로 송일기·유재균(2000ㄴ)은 종래의 ‘이 문헌’의 최고본(最古本)으로 알려진 화장사 판본(1553)보다 앞선 판본을 발굴 소개하면서, 언해본 31종 및 한글본 4종 등 모두 35종에 대한 개판 및 형태적 특징들을 고찰하였다(별표1 참조). 송일기(2001)는 초역본 출현 시기는 ‘이 문헌’의 한문본이 18종 이상 개판(開板)되었으며, 불가서(佛家書), 유가서(儒家書), 의가서(醫家書) 등 언해본이 간행되던 시대 배경에서 전주, 완산(完山)의 서방산(西方山) 근방에 살았던 민간인 오응성(吳應星)이 부모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축원할 목적으로 번역 간행하였다는 것을 밝혀내었으니, 이는 학계의 낭보(朗報)였다. 곧, ‘가정(嘉靖) 기원지을사(紀元之乙巳) 월일(月日) 보성(寶城) 후학(後學) 오응성(吳應星) 근지(謹誌)’의 발문이 있는 초역본(初譯本)(여승구(呂承九) 님 소장본)인데, 여기 ‘가정(嘉靖) 기원지을사(紀元之乙巳)’는 명나라, 가정 24년으로 인종(仁宗) 1년(1545)이다. 이 발문으로 해서 ‘이 문헌’이 여러 학문 분야에서 〈부모은중경〉의 최고본이라는 구실을 하게 되는 셈이다.

이 초역본(오응성 발문본)이 소개된 후, 종래 각지에서 간행된 복각본에 대한 본격적인 국어학계의 연구로 이호권(2005)이 있다. 여기서는 번역 양식에 따라 ‘이 문헌’의 한문본을 초역(抄譯)한 이본(異本)들과 완역(完譯)한 용주사 판본으로 나누어, 송일기·유재균(2000ㄴ)의 연구를 정밀화하고, 초역판계의 이본들로 간기(刊記)가 있는 30종을 대조하여 이들 사이의 복각 관계와(별표2 참조) 초역 판본의 언어 사실과 후대 판본의 그것을 비교하여 국어사 자료로서의 특징을 밝혔다.

〈별표1〉 부모은중경 언해본의 계통도 주005)

이 ‘부모은중경 언해본’의 계통도는 송일기·박민희(2010:125)를 따랐다.

(*표시는 새로 추가된 판본임)


〈별표2〉 은중경언해 초역판계 유간기 판본의 계통 주006)

이 계통 표는 이호권(2005:80)을 따랐다.

오응성판(1545) → 화장사판(1553) ⇢ 송광사판(1563) ⇢ 징광사판(1580)

        → 심신사판(1563)

        → 패엽사판(1564)

        → 쌍계사판(1567) → 율사판(1618) → 영자암판(1676)=안심사판(1806)

        → 흥복사판(1573)

       ―⇢ 희방사판(1592) ⇢ 동화사판(1609) → 통도사판(1648)

                        → 고방사판(1668)=조계암판?(1686)

                        ⇢ 수암사판?(1680)

                        → 청룡사판(1686)

       ………………………⇢ 최연판(1635) → 불암사판(1687)

       ………………………⇢ 신흥사판(1658)

위 표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2) 조원암판계, 3) 금산사판계, 4) 진정사판계로 정리하여 이본들 사이의 복각 관계를 밝히고, 초역판의 언어 사실과 후대 판본의 그것을 비교하여 국어사 자료로서의 특징을 밝혔다.

위의 논문이 나온 다음 해에 정재영(2006)은 불갑사(佛岬寺)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1441)에다가 후대에 필서(筆書)로 기입된 차자(借字)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이 문헌’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 논문의 부제에 보인 것처럼 주제는 구결과 언해문(번역문)에 대한 고찰이지만, 여기서는 언해문 관계만을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화암사판의 ‘은중경’ 번역문은 “전체 변상도의 수나, 그림 양식과 원문의 내용 등에서 완전히 일치한다. 다만, 변상도 삽입 순서가 바뀌어 잘못된 것과 각 변상도에서 표현상 차이를 보일 뿐이다. … 언해본의 변상도는 그림 내용이 같지만 화암사판에 비해 단순하게 선으로 처리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송일기(2001)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번역문의 특징적인 언어 사실을 음운, 한자음 표기, 문법, 어휘 등 여러 면에서 고찰하고, 이 자료는 16세기 후반 전라도 방언의 반영으로 보았으며, 여승구 님의 소장본(초역본)보다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없고, 또한 초역본의 복각본들이 간행지의 방언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도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필자는 이른바 초역본을 대상으로 역주 작업을 시작하면서, 그 영인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를 초역본을 발굴·소개한 송일기 교수께 문의한 바 있다. 그때 소장자인 여승구 님께 직접 연락하여 청해볼 일이라고 해서,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담당자인 홍현보 선생과 같이 공문을 작성해서 지난 5월 하순에 (주)화봉문고 사무실에서 여승구 사장님을 면담한 바 있다. 주007)

여승구 사장님은 앞으로 영인본을 간행할 예정이어서 영인을 승낙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에 따라 현전하는 복각본 중에서 영인본 자료를 정해야 할 형편이 되어, 〈부모은중경언해〉 해제, ‘3. 현전 이본과 소장처’〈100대 한글문화유산 정비사업, 2004〉에서 ‘1563년(명종 18) 충청도 아산 신심사판 : 책판 세심사(洗心寺) 현전’이 있어서 이를 영인 후보로 정하고, 조계종 총무원을 통해 ‘세심사’ 주지스님을 소개 받아 지난 6월 7일 오후에 방문한바, 책판을 준비해 놓으셨으나, 그보다도 직접 인출한 이본이라도 있는지를 알아보니, 뜻밖에도 이미 6년 전에 충남대학교의 사재동 교수가 정년 후 ‘백제불교문화대학장’으로 활발한 연구를 계속하면서 2005년 11월에 발원자(史在東, 盧泰朝, 朱亨喆, 史眞實)들의 법보시(法布施), 비매품으로 하여 〈불설대보부모은중경〉-원전과 불교문화학적 연구- 사륙배판(311면)으로 간행한 책을 받아 보게 되었다.

각주에 보고한 바와 같이, 뒤늦게 알게 된 사재동(2005)에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의 해제와 ‘세심사본’ 영인, 부모은중경 현대역과 연구논문들이 실렸는데, 논문으로는 송일기(2000) ‘한국판 〈부모은중경: 언해 한글〉의 판본 및 한글서체에 관한 연구’, 박도화(2004)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변상도의 도상 형성 과정’, 노태조(2005) ‘〈은중경〉과 〈孝經〉의 대비 고찰’, 이렇게 세 논문이다. 또 부록으로 1) 돈황본 부모은중경, 2) 돈황본 부모은중경 강경문, 3)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용주사판본을 실었다.

이렇게 사재동(2005)의 연구 결과가 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관련 논문에 소개된 적이 없기 때문에 필자는 새삼스럽게 이런 정보가 부족했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물론, 일반 출판물이 아니고, 주로 불교 신도를 대상으로 한 법보시라는 점과 그에 따라 비매품이고, 간행이 서울이 아닌 대전이어서 연구자들 눈에 잘 뜨이지 않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연대적으로는 앞서지만, 필자의 작업 절차로는 중간에 이 영인본(세심사본)의 해제에 대해 언급해 두어야겠기에, 송일기(2000ㄱ, 2001)을 참고하여 집필한 사재동(2006)의 ‘Ⅱ-2 〈부모은중경〉의 불교문헌적 실태와 전개’에서 서지관계 부분을 간단히 인용하여 그 논의 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사재동(2006)에서는 지금까지 발견된 오응성 간본(1545)을 비롯하여 화장사 장본(1553), 세심사 장본(1563), 갑사 장본(1567, 이는 쌍계사본 유판 갑사 장본임-필자) 등 16세기 판본들의 공통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다음 항목의 번호를 필자의 관점에 따라 붙인 것이다.

① 역대 목판의 복각, 중간의 관례는 그 초간본과 최소한 100년 가까이 시대 차가 요구됨.

② 16세기 판본들의 국문에는 16세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15세기적 요소가 잔존되어 있음.

③ 이들 판본의 방점은 당시 현실적 성음의 요건이 아니라 15세기적 성음의 복각적 보수 현상임.

④ 이 밖에도 음운, 어휘, 어법 등이 15세기의 잔영을 보이는 의고적 성향이 있음.

⑤ 여기에 오응성 발문 중의 “余故手傳本…以通其覽焉”을 통해 ‘오래된 은중경을 경문 사이사이에 언해했다’는 것과 또한 ‘금아중간(今我重刊)’이라는 대목은 중간본임을 스스로 밝힌 것으로 보아서, 결과적으로 이 ‘부모은중경’은 15세기에 초간되거나 그 수준에 달하는 시대적 특성을 갖춘 선행 모본이 간행된 것으로 추정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학계에서는 처음이어서 필자 자신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나, 불가불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붙이기로 한다. 주008)

실은 이 초역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01년 5월 초순, 송일기 교수의 호의로 그 복사본 1책을 받은 때였다. 서가에 둔 채,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가, 10년이 지난 금년 3월에야 ‘이 문헌’의 역주를 맡으면서 비로소 고구(考究)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위 ①은 초간본과 복각본 혹은 중간본이 반드시 그런 시간이 지나야 이루어진다기보다 필요에 따라서 간행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②, ③, ④는 이미 학계에서 다루어진 사항이므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는데, 결국 문제의 초점은 ⑤의 오응성 발문의 문제다. 주009)

이 발문은 ‘언해본’의 순서에 따라 역주의 끝 부분에 옮겼다.

무릇 발문에는, 그 책의 내용의 대강과 간행에 관련된 일을 적어 남겨 놓게 마련인데, 이 한문으로 된 글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함축성이 많은 한문 문장이기에) 다른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문제되는 “여고수전본경 간이언해(余故手傳本經 間以諺解 : 내가 그런 이유로 손수 이 경전을 전하되 사이사이 언문으로 풀고)…”를 그대로 풀이하여, 필자는 초역본의 간행자인 오응성이 적극적으로 이를 처음으로 언해한 것으로 보려고 한다. 만일 15세기에 이루어진 ‘은중경언해’가 당시까지 전해졌다면, 과연 ‘내가 손수 풀이했다’고 쓸 수 있었을까. 또한 그동안에 소실됐다고 해도 아무런 전고(典故)도 남기지 않고 일실(逸失)됐다고는 이해가되지 않아서, 사재동 교수의 견해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금아중간(今我重刊)”이란 ‘중간본임을 스스로 밝힌’ 것이라 판단한 것도 ‘중간’을 글자 그대로 ‘재간(再刊), 거듭 간행함’의 뜻으로 보는데, 이는 그 대상을 무엇으로 보느냐, 곧 위에서 추정한 15세기의 <서명>〈은중경〉 초간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우리 증조부가 이룬 은중경[乃吾曾祖所成恩重經]’으로 보느냐 할 때, 필자는 이를 후자로 볼 수도 있다고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 붙임1 - 이본(異本)과 그 소장처

연대간행지판본소장처
1545(명종 1)전라도 완주오응성(吳應星) 발문본화봉문고(여승구님).
1553(명종 8)경기도 장단화장사(華藏寺)판일본 동경대 소창문고(小倉文庫).
1563(명종 18)충청도 아산신심사(神心寺)판책판(冊版) 세심사 현전.
1563(명종 18)전라도 순천송광사(松廣寺)판서울대 일사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보림사, 산기문고?
1564(명종 19)황해도 문화패엽사(貝葉寺)판일본 동경대 소창문고
1567(명종 22)충청도 은진쌍계사(双溪寺)판서울대 가람문고, 연세대, 보림사
1573(선조 6)전라도 김제흥복사(興福寺)판보림사.
1580(선조 13)전라도 낙안징광사(澄光寺)판한국학중앙연구원, 보림사.
1582(선조 15)경상도 의령보리사(菩提寺)판일본 吉澤義則 님.
1592(선조 24)경상도 풍기희방사(喜方寺)판서울대가람문고, 연세대, 동국대.
1609(광해 1)경상도 대구동화사(桐華寺)판화봉문고(여승구 님)
1618(광해 10)충청도 공주율사(栗寺)판남권희님, 고려대 육당문고.
1635(인조 13)미상최연(崔衍) 발문본연세대.
1648(인조 26)경상도 양산통도사(通度寺)판범우사.
1658(효종 9)강원도 양양신흥사(神興寺)판책판 신흥사 현전, 산기문고?
1668(현종 9)경상도 개령고방사(敲防寺)판연세대, 영남대, 고려대 화산문고, 책판 운흥사 현전.
1676(숙종 2)전라도 고산영자암(影子庵)판동경대 소창문고(小倉文庫).
1680(숙종 6)경상도 청도수암사(水岩寺)판적천사.
1686(숙종 12)경상도 양산조계암(曹溪菴)판고려대 만송문고, 계명대.
1686(숙종 12)경상도 경주천룡사(天龍寺)판계명대, 영남대.
1687(숙종 13)경기도 양주불암사(佛巖寺)판고려대, 연세대, 계명대, 한국학중앙연구원, 산기문고?, 미국 하버드대 옌칭, 책판 불암사 현전.
1689(숙종 15)평안도 향산조원암(祖院庵)판동국대.
1692(숙종 18)강원도 고성건봉사(乾鳳寺)판간송문고.
1705(숙종 31)평안도 정주용장사(龍藏寺)판구 이겸로님(산기문고).
1717(숙종 43)경기도 개성용천사(龍泉寺)판일본 동경대 소창문고.
1720(숙종 46)전라도 금구금산사(金山寺)판서울대 가람문고, 성암문고, 일본 동경대 소창문고.
1731(영조 7)함경도 영흥진정사(鎭靜寺)판소장처 미상.
1760(영조 36)전라도 고창문수사(文殊寺)판여승구 님, 책판 문수사 현전.
1794(정조 18)전라도 전주남고사(南高寺)판일본 동경대 소창문고.
1796(정조 20)경기도 화성용주사(龍珠寺)판서울대 규장각 외 다수, 책판 용주사 현전.
1801(순조 1)전라도 전주남고사(南高寺)판서울대 규장각.
1806(순조 6)전라도 고산안심사(安心寺)판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 성암문고, 장서각.
1912(경성) 서울강재희(姜在喜)판국립중앙도서관.
1925(경성) 서울권상로(權相老)판신문관(新文館) 인쇄.

※ 기타 국도본(國圖本, 16세기), 우천각본(宇天刻本, 17세기), 아단본(雅丹本, 17세기) 등 간기 미상(未詳)본 다수.

Ⅳ. 어학적 고찰

‘이 문헌’의 간행은,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반포한 시기(1446년)로부터 꼭 100년(<세주>발문의 ‘가정(嘉靖)’ 을사(乙巳)년은 인종 1년, 서기 1545년임)이 되는 해에 이루어졌다. 관점에 따라서는 ‘길다, 짧다’ 할 수도 있겠지만,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았을 때에 3세대의 시기는 그리 짧은 세월이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동안, 사람들의 말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고 하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음성언어의 차원이고, 문헌에 나타난 문자언어는 표기의 보수성으로 인해서 음성언어만큼 그 변화를 표기에, 당대의 언어에 맞게 반영하지는 못했다고 본다. 곧, 우리가 문헌을 통해서 그 시대의 언어를 연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므로, 이 글도 말하자면 16세기 중엽의 언어 현상을, ‘이 문헌’에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서 고찰해 보려는 것이 이 장의 목표이다.

1. 표기와 음운

1.1. 모음의 변동

1.1.1. ‘ㆍ’의 변동

우선 모음 ‘ㆍ’의 표기를 통해서 이 시대의 ‘ㆍ’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보자. 통설에 따른다면, 16세기 후반에는 비어두음절에서 ‘ㆍ〉ㅡ’의 변화가 완성된다고 보는데, ‘이 문헌’에서의 실상은 어떤가?

다음에 보이는 것은, ‘이 문헌’에 ‘ㆍ’가 쓰인 총 235개 어절 중에서 잘못 쓰인 것만을 추려 내어 ( ) 안에 바른 표기를 나타낸 것이다.

〈 〉 안의 표기는, 오응성본의 장차와 ‘전면-ㄱ, 후면-ㄴ’을, ( ) 안 숫자는, 같은 면에 2회 이상 나타난 것임.

(는)〈2ㄴ〉  가븨()여우니라〈3ㄴ〉

드(르)라〈3ㄴ〉  람믈()〈6ㄴ〉

믈()〈7ㄱ, 10ㄴ〉  시(름)〈7ㄴ, 11ㄱ〉

다믄()〈8ㄴ〉  편안호믈()〈8ㄴ〉

흐(르)놋다〈10ㄴ〉  믄()〈11ㄴ〉

은(늘)〈11ㄴ〉  더위(를)〈12ㄴ〉

말솜()과〈13ㄴ〉  사믈()〈13ㄴ〉

그(르)〈14ㄴ〉  부모의()〈14ㄴ, 15ㄴ〉

흐(르)고〈17ㄱ〉  은(늘)〈17ㄱ, 24ㄱ〉

모믈()〈17ㄱ(2)〉  여(듧)〈17ㄴ〉

운(늘)〈18ㄴ〉  은혜(를)〈20ㄱ〉

우리(는)〈22ㄱ〉  오을()〈23ㄴ〉

사믜()〈24ㄱ〉  교슈(를)〈26ㄱ(3)〉

일호믈()〈26ㄱ, ㄴ〉  말솜()〈26ㄴ〉

      합계 36회

이 잘못 쓰인 횟수 36을 총 235개 어절에 대한 비율로 계산한다면 약 6.5%가 된다. 한 세기 동안에 변화한 비율로만 본다면 아주 적은 분량이라고 하겠다. 여기에는 앞서도 말한 ‘표기의 보수성’이란 성격을 감안해도, ‘ㆍ’의 비어두음절에서의 소멸이 16세기 후반에 완성된다는 설에 따른다면, ‘이 문헌’의 ‘ㆍ’ 표기는 중세국어 문헌의 표기의 전통을 그런대로 잘 지킨 것으로 본다.

1.1.2. 모음조화로 본 ‘야:여’

다음은 모음조화의 적용 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한 방편으로 ‘-’ 용언의 활용형 ‘야:여’의 표기를 대상으로 하였는데, 여기서도 숫자가 적은 ‘여’ 쪽을 모두 적어 둔다.

단여〈2ㄴ〉, 엿고〈5ㄴ〉, 토여〈8ㄱ〉, 신고여도〈10ㄴ〉,

미가여서〈16ㄴ〉, 노여〈16ㄴ〉, 긔절여〈17ㄴ〉, 엇뎨여〈17ㄴ〉

      합계 8회

‘야 : 여’의 표기 수는 총 31회인데, 이 중 위의 8회만이 모음조화를 어긴 것으로 나타났다. 이 ‘31:8’을 백분율로 계산하면, 약 26%가 모음조화를 어긴 표기가 되는데,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가 초점이다. 이 26%란 결코 적은 비율이 아니라고 보는데, 이는 10곳 중에 4곳이 모음조화를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 방언에 중앙방언적인 ‘야’와 함께 ‘여’형이 공존하였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1.2. 병서

1.2.1. 각자병서 ‘ㅆ’

각자병서 중 ‘ㅆ, ㆅ’은 훈민정음 제정 초기에 있어서 나머지 ‘ㄲ, ㄸ, ㅃ, ㅉ’과 달리 국어의 어두음에 ‘경음/된소리’로 쓰이다가, 1465년 『원각경언해』 이후 각자병서의 전면적 표기가 지양되면서, 이 ‘ㅆ, ㆅ’도 쓰이지 않는다. 그러나 ‘ㅆ’만은 『원각경언해』 이후 문헌에도 간헐적으로 쓰이다가 16세기에 들어 이런 표기가 활발히 나타나지만, ‘ㆅ’은 17세기에 ‘ᄻ’으로 다시 쓰이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문헌’은 ‘ㅆ’ 표기가 아래 예문에 든 것처럼 단 2개이지만,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싸홈며〈은중 15ㄱ〉   닐그며〈은중 22ㄴ〉

*싸호샤〈용가 52〉  * 글와리라〈석상 서: 4ㄴ〉

*사홈도 닐와며〈번소 8:10〉  *스디 아니시니라〈원각 하2-2:7ㄱ〉

*싸호매〈속삼 충:1ㄱ〉  * 뵌대〈속삼 열:7ㄱ〉

1.2.2. 합용병서 ‘ㅅ’계와 ‘ㅂ’계

훈민정음 창제 초기에서부터 ‘ㅅ’계의 ‘ㅺ, ㅼ, ㅽ’은 된소리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문헌’에 쓰인 용례를 실사와 허사로 나누어 그 쓰인 횟수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ㅺ: (잠) 3, / 2,  1, 지럼 1,  1, - 1, - 1, - 2.  계 12회

ㅼ:  2,  7회,  2,  1.  계 12회

ㅽ: 디- 1, 이- 1.  계 2회

  합계 26회

ㅳ: [意] 4, (셜)다[悲] 1.  계 5회

ㅄ: -[苦] 2, -[掃] 1, -[包] 1, 긔-[嚬] 1  계 5회

ㅶ: -[曝] 1.  계 1회

  합계 11회

‘ㅺ’ 표기에서, ‘간’은 첫음절 받침 ‘ㅅ’이 그대로 쓰인 경우와 둘째 음절 초성에 병서되기도 했으니, 『석보상절』에서도 두 가지 표기가 보인다.

간 머리 수기거나〈석상 13:53ㄴ〉,

耶輸ㅣ 잠도 듣디 아니〈석상 6:6ㄱ〉.

다음으로, ‘/’의 ‘ㅺ’은 본래 ‘곳/곶’에 사잇소리가 굳어져 ‘(년), (블)’으로 표기된 것으로 16세기의 ‘이 문헌’에 처음 보인다.

‘지람’은 ‘구지라’〈월석 17:84ㄴ〉, ‘구지럼’〈석상 19:30ㄴ〉, ‘지람’〈노걸 상:34ㄱ〉, ‘지럼’〈은중 16ㄱ〉으로 쓰여 ‘이 문헌’의 예가 고어사전의 표제어에 유일한 예로 되어 있다.

‘[末]’은 이미 ‘리 틀’〈우마역 1541, 15ㄴ〉에도 보이므로 ‘이 문헌’의 예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라 하겠다.

나머지 ‘[謀], -(조사), -[覺], -[挾]’ 등은 이미 15세기 중엽에도 쓰인 전통적인 표기이다.

‘ㅼ’ 표기에서는 ‘[地], (부사), -[帶], [女息]’ 등은 모두 전통적 표기이다.

‘ㅽ’ 표기에서는 ‘디-[沒]’는 ‘므레 디여’〈석상 9:37ㄱ〉에도 보이는 전통적인 표기이다. 그러나 ‘이-[抽]’는 ‘혀 여내여’〈은중 26ㄱ〉로 쓰여 ‘拔出’의 풀이로 쓰였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쓰인 ‘-’와 강조의 ‘--/-혀-’의 결합인 ‘-/혀-’에 ‘내-[出]’(←나-+ㅣ(사동))가 통합한 ‘혀내-’가 ‘-’에서 활음 ‘j’ 탈락과 모음 사이에서 ‘ㅎ→ㅇ[ɦ]’으로 약화하여 ‘여내-’의 구성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은 “龍 자바 머구믈 데 足 씨라”〈석상 13:11ㄱ주〉와 같이 전통적으로 쓰이던 것이나, ‘셜다’는 어중에 쓰인 ‘ㅳ’이 문제인데, 이는 형용사 ‘셟-+도+다’로 분석되는 어간말자음의 ‘ㅂ’이 제2음절 초성으로 합용한 병서로서 ‘ㅳ’ 등의 형성 기원에 어떤 시사점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신중진(1996:250)에서는 표기에서 특이한 것을 다루는 중, 초역본 ‘여듧’의 ‘’이 ‘ㄹ+ㅂ’으로 세로로 연서(連書)한 예에 대하여 율사본과 율사본의 복각본인 간기 미상본에는 ‘여듧(3ㄴ)/여듦(5ㄱ)’로 ‘’이 ‘’처럼 표기된 것을 자음군단순화의 표기를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호권(2005:68)에서는 초역본에 4회 나타나는 ‘여듧/여’의 ‘’이 병서되지 않고 연서된 것은, 편찬자가 그 합자법을 몰라서 그런 표기가 된 것으로 보고, 이는 당시 ‘ㄹ’을 앞세운 경우 세 자음의 발음이 가능했음을(이기문 1959/1978:32-33) 방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필자는 앞의 ‘자음군단순화의 표기 반영’이라는 데 대하여, 이는 ‘’이 ‘’처럼 보이는 것은 각수에 의한 각자의 미숙(?)에 기인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초역본에는 ‘’이 세로로 적힌 것은 4회로 모두 같이 표기되었다.

다음 ‘ㅄ’의 ‘-[苦], -[掃], -[包], 긔-[嚬]’와 ‘ㅶ’의 ‘-[曝]’는 다 같이 사전에도 실려 있고, 전통적인 표기를 그대로 따라 사용하였으므로 더 부연할 것이 없다.

ㅅ계ㅂ계
예〈14ㄴ〉〈2ㄴ(2)〉디〈3ㄱ, 10ㄱ, 11ㄱ〉
지럼믄〈16ㄱ〉〈2ㄴ, 21ㄱ〉드로〈13ㄴ〉
(년)〈9ㄴ〉〈2ㄱ, 3ㄱ, 14ㄴ〉셜다〈10ㄱ〉
틔〈4ㄱ〉()〈9ㄱ〉 것〈8ㄱ(2)〉
(잠)〈10ㄴ, 12ㄱ, 16ㄴ〉해〈19ㄴ〉디〈16ㄱ〉
여〈17ㄴ〉시기〈16ㄴ〉다가[包]〈16ㄱ〉
(세존)〈22ㄱ〉〈14ㄴ, 15ㄱ,ㄴ, 16ㄴ, 23ㄴ〉긔디〈8ㄱ〉
(블) 〈23ㄴ〉〈2ㄴ〉며〈14ㄴ〉
락〈24ㄱ〉디니〈23ㄴ〉 
 〈1ㄱ,ㄴ, 5ㄱ〉 
 여〈26ㄱ〉 

1.2.3. ‘ㅿ’ 표기

‘ㅿ’은 정음 창제 후인 15세기 중엽에서조차 특정한 환경에만 쓰이다가 16세기에 들면서 소실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15세기 후반의 『두시언해(1481)』에 이르면, ‘[間]’와 ‘이’가 같이 쓰이기 시작하는 것이 이를테면 ‘ㅿ’의 소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 문헌’에서는 위의 ‘ㅿ’ 소실 초기에서 반세기나 지난 후인데도, 3-1)과 같이 ‘ㅿ’ 유지 어형이, 3-2)에서는 ‘ㅅ’으로 표기된 어형이 나타나고, 3-3)에서는 ‘ㅿ’ 소실된 어형이 나타난다. 3-1)은 15세기 중엽에도 쓰인 어휘들로서, 어형이 조금 바뀐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ㅿ’의 쓰임을 유지해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복되는 숫자를 제외하면 이 ‘ㅿ’ 유지형 어휘는 7종이 된다(강세접미사 ‘-’ 제외). 3-2)는 ( ) 안에 보인 바와 같이 ‘ㅿ→ㅅ’으로 반영된 모습을 보여준다(중복된 횟수를 제외하면 어휘 수는 위와 같은 7개이다). 그런데 이 어휘들은 ‘어버시’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늘날 이 지역에서는 ‘ㅅ’ 유지형이며, 이들 예는 대체로 ‘이 문헌’이 간행된 당시의 전주, 완주 지방의 방언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1.2.3.1. ‘ㅿ’ 유지

엇뎨야〈3ㄴ, 22ㄱ〉  처〈6ㄴ〉

미〈7ㄴ(2), 9ㄱ, 11ㄱ〉  아과〈14ㄴ〉

〈15ㄱ〉  〈17ㄱ〉

이슥게〈17ㄴ〉  이제〈17ㄴ〉

가미〈17ㄴ〉  엇뎨여〈17ㄴ〉

가〈19ㄴ〉  브텨〈21ㄴ〉

엇뎌야〈24ㄴ〉  텨〈26ㄱ〉  합계 19례

1.2.3.2. ‘ㅿ→ㅅ’ 표기

니섯()도다〈9ㄱ〉  지서()〈15ㄱ〉

어버시()〈16ㄱ〉  어버시()〈17ㄱ〉

시()업고〈17ㄱ〉  사()디〈17ㄴ〉

사()내며〈18ㄴ〉  눈()〈19ㄱ〉

지슨()〈22ㄴ, 23ㄴ〉    합계 10례

1.2.3.3. ‘ㅿ→ㅇ’ 표기

이예〈5ㄴ, 3ㄴ, 12ㄱ(2), 12ㄴ, 24ㄱ〉  합계 6례

1.2.4. ‘ㆁ’ 표기

‘ㆁ(옛이응)’ 자는 알려진 바와 같이 15세기 중엽에는 초성으로도 제법 쓰이다가 16세기 초엽에는 초성으로 거의 쓰이지 않게 되고 받침으로만 쓰이게 되었는데, 16세기 중반의 ‘이 문헌’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에 역주한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1542)』 역주에서 임홍빈(2009:16)의 해설을 따르면, 『분문온역이해방』은 “받침의 옛이응(ㆁ)은 철저하게 ‘ㆁ’ 자가 쓰이고 있으나 극히 예외적으로 유모(ㅇ) 형태의 ‘이응’이 쓰이는 일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아음(牙音)의 불청불탁음인 ‘ㆁ’는 훈민정음의 초성(자음) 17자 중에서 소실된 문자로는 좀 이질적인 면이 있다. 곧, 자형(字形)은 후(喉)음의 불청불탁음인 ‘ㅇ’으로 통합되었지만, 그 음가는 아음의 ‘ㅇ’[ŋ]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ㆁ’은 고유어에서 제한적인 분포에 쓰이는, 곧 어두(語頭)의 초성에는 쓰이지 못하고 종성으로만 쓰이고, 어중에서는 연철 표기에 따라 후행음절의 초성에도 쓰이는 글자였다. 정음 창제 초기문헌인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 『월인석보』, 그리고 15세기 후반의 『능엄경언해』 등에는 그런대로 쓰였으나, 『두시언해(1481)』 초간본에만 와도 그 쓰임이 적어지고, 16세기로 넘어가면 『번역박통사(1517)』 이전에 ‘-다’(고려호로 가노다)만이 예외적으로 쓰일 뿐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이 문헌’에서 종성 ‘ㆁ’ 표기는 다음에 제시하는 바와 같다. 곧, 자료 4-1)에서 종성 ‘ㆁ’이 제대로 쓰인 예는 총 69개 예(중복 출현 포함)이고, 이 중에서 고유어는 한 단어가 3회(-) 쓰인 것이 유일하다.

한편, 4-2)는 종성 ‘ㆁ’의 자형이 사라진 것을 반영한 것으로, 여기서는 한자어 11개, 고유어 7개 예로 앞의 비율보다는 많이 다르다.

여기서 덧붙여 둘 것은, 이 책을 판각한 각수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앞의 ‘Ⅰ. 머리말’ 끝에 언급한 바를 여기서 자세하게 다룬다.

‘이 문헌’의 서체(書體)에 대해서는 전문가에 미루고(송일기·유재근 2000ㄴ:41-42), 필자는 상식적인 관점만으로도 글씨의 같음과 다름을 사람들 나름대로 어느 정도 가름할 수 있다고 보고, 이런 관점에 따라서 ‘이 문헌’의 글씨체[혹은 각자(刻字)]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물론 이는 발문에 나타난 ‘각수(刻手) 쌍순(双淳), 혜식(惠湜)’ 두 분의 글씨[刻字]라고도 하겠는데, 문제는 어느 분이 어느 면을 판각했느냐 하는 점이다. 처음에는 ‘ㆁ’ 자의 쓰임에만 관심을 가지고 보다가, 나중에는 ‘이 문헌’ 전체를 생각해 보았는데, 두 분을 A, B로 하여, A, B가 판각한 면을 필자 나름대로 구별하여 그 전부를 보인 것이 다음 표이다.

A 1ㄱ ~4ㄴ (8면)

B 5ㄱ~8ㄴ(8면)

A 9ㄱ~20ㄴ(24면)

B 21ㄱ~24ㄴ(8면?)

A 25ㄱ~26ㄴ(4면)

※ A-36면, B-16면, 계 52면.

이 결과는 숫자가 다른 만큼 두 분이 작업한 양이 달랐다고 보는 것이고, 그 근거를 두 가지만을 들어둔다. 첫째는 무엇보다 글씨체로서 A는 한자나, 한글이나 모두 가능한 대로 정자(正字)체로 바른 고딕체 글씨라면, B는 고딕체이면서도 A에 대하여는 상대적으로 글씨가 좀 왼쪽으로 좀 치우친(?) 구부정하며 바르지 못한 느낌이 든다. 이를 ‘이 문헌’의 4장 후면(4ㄴ)과 5장 전면(5ㄱ)의 두 면을 대비해 보면 필자의 위의 말이 어떤 뜻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ㆁ’ 자의 판각 차이점으로서 다음 표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적기로 한다. 주010)

종래 이런 비슷한 논의로는 신중진(1996:231)이 있는데, 자형의 특징으로 ‘ㅇ’ 판각이 다른 자형과 달리 굵기가 가늘어서 이것으로 다른 이본(異本)과의 관계를 밝히는 하나의 방법(기준)으로 소개한 바 있다.

A 1ㄱ~ㆁ 4  B 5ㄱ~x 0

  1ㄴ~ㆁ 5   5ㄴ~ㅇ 7(ㆁx)

  2ㄱ~ㆁ 1   6ㄱ~ㅇ 0

  2ㄴ~ㆁ 3   6ㄴ~ㅇ 3(ㆁx)

  3ㄱ~ㆁ 1   7ㄱ~ㆁ 3

  3ㄴ~ㆁ 1   7ㄴ~ㆁ 4

  4ㄱ~x 0   8ㄱ~ㅇ 7(ㆁx)

  4ㄴ~x 0   8ㄴ~ㅇ 0

위의 왼편 ‘1ㄱ’ 등은 장차(張次), 오른편 ‘ㆁ’ 다음의 숫자는 종성이 쓰인 횟수, (ㆁx)는 ‘ㆁ’이 아닌 ‘ㅇ’을 나타낸 것이다. A, B를 대비해 보면 A는 종성 ‘ㆁ’을 제대로 쓴 데 비해서, B는 우선 ‘7ㄱ, 7ㄴ’에서만 제대로 종성 ‘ㆁ’을 쓰고, ‘5ㄴ’에서 7회, ‘6ㄴ’에서 3회, ‘8ㄱ’에서 7회를 종성 ‘ㅇ’을 쓴 결과인데, 환언하면 A는 종성 ‘ㆁ’을 제대로 판각한 데 대해서, B는 종성 ‘ㅇ’으로 판각한 것이 많으나, ‘ㆁ’으로 판각한 것도 일부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나머지 36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판각의 차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언어 현실에 종성 ‘ㆁ’(옛이응)은 이미 자형(字形)으로서는 쓰이지 않게 되고 그 자리에 ‘○’으로 대체가 진행 중임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1.2.4.1. 종성 ‘ㆁ’ 표기

샤의〈1ㄱ〉  대이〈1ㄴ〉  이〈12ㄴ〉  족도〈13ㄴ〉

거든〈1ㄴ〉  사의〈1ㄴ〉  도〈13ㄴ〉  스의〈13ㄴ〉

의〈2ㄴ〉  샤〈2ㄴ〉  교도〈13ㄴ〉  의티〈13ㄴ〉

단여〈2ㄴ〉  도〈3ㄱ〉  뎨의〈13ㄴ〉  시리〈13ㄴ〉

음니〈3ㄱ〉  님도다〈7ㄱ〉  셕〈13ㄴ〉  습이〈13ㄴ〉

〈7ㄱ〉  권려〈7ㄱ〉  타의〈14ㄴ(2)〉  야〈14ㄴ〉

 다힌〈7ㄴ〉  고〈7ㄴ〉  오이〈14ㄴ〉  심이〈14ㄴ〉

간의〈7ㄴ〉  〈9ㄱ(2)〉  호니〈14ㄴ〉  심케〈15ㄱ〉

노라〈9ㄴ〉  얏()〈9ㄴ〉  〈14ㄴ,15ㄱ〉  좌의〈15ㄴ〉

타의〈10ㄱ〉  홈〈10ㄱ〉  싀권으란〈16ㄴ〉  을〈22ㄴ〉

산티〈10ㄴ〉  하니〈10ㄴ,11ㄱ〉  〈23ㄴ〉  〈23ㄴ〉

내을〈11ㄱ〉  각고〈11ㄱ〉  젼의〈24ㄱ〉  을〈24ㄴ〉

해〈11ㄱ〉  이〈11ㄱ〉  〈24ㄴ〉  호야〈24ㄴ〉

티〈11ㄴ〉  〈11ㄴ〉  〈24ㄴ(2)〉  대과〈26ㄱ〉

〈12ㄱ〉  돋〈12ㄴ〉  의〈26ㄴ〉    니라〈26ㄴ(2)〉

내의〈12ㄴ〉  면〈12ㄴ〉  대보부모은〈26ㄴ(2)〉

     합계 69례(중복 출현 포함)

1.2.4.2. ㆁ → o

멍니〈5ㄴ〉  복와〈5ㄴ〉

장〈5ㄴ(2)〉  향엿고〈5ㄴ〉

향여〈5ㄴ〉  사근장〈5ㄴ〉

듕니〈6ㄴ, 8ㄱ〉  오장이〈6ㄴ〉

졍이〈6ㄴ〉  랑이〈8ㄱ(2)〉

긔디〈8ㄱ〉  졍을〈8ㄱ〉

양〈8ㄱ〉  갑리잇고〈24ㄴ〉

아니호리이다〈26ㄱ(2)〉  엇뎨니잇가〈26ㄱ〉

     합계 20례(중복 출현 포함)

1.2.5. 비자동적 교체의 체언

체언에 조사가 통합될 때, 그 체언이 자동적인 교체를 보이는 경우와 비자동적 교체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 중의 한 가지로 이른바 ‘ㅎ종성(말음)체언’이 ‘이 문헌’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둘희〈2ㄴ〉  안셔〈5ㄴ〉  안〈5ㄴ〉

뫼히〈5ㄴ(2), 6ㄴ〉  (피)뫼히라도〈5ㄴ〉  뫼히라〈5ㄴ〉

〈12ㄴ〉  〈15ㄱ〉  골〈16ㄴ〉

해〈19ㄴ〉  (한도)갈히〈23ㄴ〉  히〈24ㄱ〉

우희〈24ㄴ〉  내히〈26ㄱ〉  -계 16개

cf. 갈로[以刀]〈6ㄱ, 19ㄱ-ㄴ, 20ㄱ〉

여기서 중복된 것을 제외하면, 둟[二](1), 않[內](2), 묗[山](5), [地](2), (한도)갏[刀](1), [村](1), 곯[郡](1), [肉](1), 웋[上](1), 냏[川](1) 등으로 10개 단어이다. 이 중에서 ‘(한도)갈히’ 1례는 말음이 유지된 것이지만, 예외적인 경우는 본시 ‘갈로’ 쓰일 것이 ‘갈로’로 쓰였기 때문에 ‘ㅎ’이 탈락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단어의 경우 ‘한도+갈히’와 같이 합성어에서는 ‘ㅎ’유지형도 쓰여서 ‘ㅎ’ 탈락이 진행 중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ㅎ’탈락은 15세기 중엽에서조차, ‘하리〈석상 6:35ㄴ〉, 하〈석상 6:35ㄴ〉, 하〈석상 9:25ㄱ〉, () 갈로 쇼 다효〈원각 하2-2:10ㄱ〉’ 등에서와 같이 ‘ㅎ’ 탈락형이 사용된 예를 찾아볼 수 있어 흥미롭다.

또한 ‘곻[鼻]’는 ‘ㅎ’종성체언으로 쓰인 것이지만, ‘이 문헌’에서 ‘눈과 귀와 고와 입과’〈4ㄴ〉에서는 ‘고’로 나타나며, 16세기 말엽 〈소학언해(1588)〉에는 ‘귀와 눈과 코와 입과’〈소언 3:7ㄱ〉와 같이 초성의 ‘ㄱ’이 유기음화한 예도 나타난다. 초성 유기음화의 예로 ‘이 문헌’에 쓰인 것은 없지만, ‘[臂]’은 ‘ 면’〈온역 7ㄱ〉, ‘와’〈구간 1:60ㄴ〉 등이 있는데, 앞의 ‘’는 초성 ‘ㅂ’이 유기음화되었으면서도 종성에 ‘ㅎ’도 쓰인 예이고, 뒤의 ‘와’는 종성 ‘ㅎ’은 탈락하고, 초성 ‘ㄱ’을 유기음화한 예도 있다.

또 하나의 비자동적인 교체를 보이는 것으로 ‘구무/’이 세 번 쓰인 예가 있다. ‘(털)굼기〈5ㄱ〉, 굼기〈5ㄱ〉, (털)구무마다〈17ㄴ〉’인데, 앞 2예는 7)항에 언급되는 비음동화의 예인데, 이는 모음 조사와 결합하면 ‘굼기, 굼글, 굼그로...’와 같이 ㄱ곡용으로 쓰이나, 자음 조사와 결합하거나, 체언 단독형으로 쓰이면 ‘구무도, 구무와 구무’로 쓰인다. 같은 유형의 체언으로 ‘나모[木]/, 녀느[他]/, 불무[冶]/’ 등이 있다.

1.2.6. ㄱ 약화 표기

‘ㄱ’ 약화 현상은, 두 형태소의 결합에서 앞 형태소의 말음이 ‘ㄹ’[l]이나, 부모음 ‘ㅣ[j]’ 또는 서술격조사 ‘ㅣ[i]’일 때 다음에 오는 형태소의 두음이 ‘ㄱ[k]’이면 약화되어 ‘ㅇ[ɦ]’로 바뀌는 현상이다. ‘이 문헌’에서도 다음과 같은 보기가 나타난다.

뎨오〈2ㄱ〉  하나비어나〈2ㄱ〉

부뫼어나〈2ㄱ〉  희오〈2ㄴ, 3ㄱ〉

오〈2ㄴ〉  알오〈2ㄴ〉

알어니와〈2ㄴ〉  가지어든〈3ㄴ〉

하젼되오〈3ㄱ,ㄴ〉  사오나이 되오〈9ㄴ〉

알오쟈〈11ㄱ〉  여희오〈14ㄱ〉

메오〈18ㄱ〉  합계 15례

이 현상은 〈석보상절〉 이래 15세기 말의 문헌에 이르기까지 잘 지켜졌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위의 보기에 들어가야 할 ‘말고’〈5ㄴ〉가 ‘ㄱ’약화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ㄱ’을 유지한 채로 쓰이고 있다. 이런 ‘ㄱ’ 복구의 예들이 언제부터 나타난 것인지 국어사 문헌자료에서 검색해 보았다. 아래에 제시한 것처럼 ‘이 문헌’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속삼강행실도(1514)』가 있고, 16세기 초엽의 〈순천김씨언간〉과 좀 뒤의 『장수경언해(16세기 중엽)』, 『선가귀감(1569)』, 그리고 『초발심자경문언해(1577)』에서 사용된 예가 있었다. 이들은, 이를테면 ‘말오’ 표기에서 ‘말고’ 표기로 복구되는 이른 시기의 예로 보인다. 이렇게 16세기 후반에 시작된 이 표기는 그대로 근대국어로 이어져 현대국어에 이른다.

한편 ‘말오’ 표기는 그 예가 많지는 않으나, 17세기에도 이어지다가 다음 보기의 끝 두 예문처럼, 18세기 중엽 『맹자율곡언해(1749)』, 『지장경언해(1752)』의 예가 마지막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ㄱ’ 약화 현상은 오래 전에 없어지고 그 흔적만이 남았던 보수적, 의고적인 표기로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 너비 알고 의론을 잘더니〈속삼 충:1ㄱ〉

아려나  누겨 잡녀 말고〈순천 13:10〉

내 디 엇엇더니 샹덕도 말고 쳐블 렷거니〈순천 80:1〉

복숑와  마늘 과실 먹디 말고〈은중 5ㄴ〉

미 어  업시 훤츠리 다 알고〈장수 30ㄴ〉

 迷 가져 아롬 기드리디 말고 〈선가 16ㄴ〉

다시 엇디려뇨 구러 묻디 말고 부리 박디 몯 고대 목숨 리고〈선가 17ㄱ〉

을 알고 약을 노니〈초발 야운:44ㄴ〉

來年을 기린 後에 말오려 홈이로다〈맹율 3:65ㄱ〉

불승 받디 몯야셔 몬져 먹니 말오리니〈지장 중:19ㄱ〉

1.2.7. 비음동화(鼻音同化)

이 비음동화는 주지하는바와 같이 『훈민정음언해』 치두음의 협주에 “이 소리 우리나랏 소리예셔 열니 혓그티 웃 닛머리예 다니라”〈훈언 15ㄱ주〉에 쓰였는데, ‘다니라’는 ‘닿-++니+라’로 분석되어, 어간 ‘닿-’이 ‘닫-(불파의 폐쇄음)’으로, 여기에 선어말어미 ‘’의 ‘ㄴ’이 역행동화로 ‘닫-→단-’이 된 것을 제2음절 초성 ‘’에 각자병서로 표기한 것이다. 그 다른 예로 초기문헌에 많이 나타나는 ‘니-’는 본시 『석보상절』,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에서는 동화되기 전의 ‘니-’가 쓰이다가, 『월인석보』에 오면 ‘니-/니-’ 양형이 공통으로 쓰이나, 비음동화형은 뒤의 용례에 보다시피 단 5례에 불과하고, 전자가 압도적인 빈도로 쓰였다. 한편 불경언해 중에서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영가집언해』를 이어, 15세기 중엽의 『구급방언해(1466)』, 『내훈(1475)』, 특히 권수가 많은 『두시언해(1481)』에 이르면 ‘니-’의 용례가 아주 많아지고, 이는 그대로 16세기에까지 이어져 16세기 말엽의 『소학언해(1588)』까지도 이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은 표기법의 전통으로 예측해 볼 때 16세기 중엽의 ‘이 문헌’은 그 동화 현상을 예상할 수 있으며 그 예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ㄱ)의 보기는 앞에 든 ‘니-’와 같은 동화의 보기이다. 그런데 다음 두 예는 필자가 본 바로는 처음 보는 것으로서, ㄴ)은 앞 형태소 말음 ‘ㄱ’이 후행 형태소의 두음인 비음 ‘ㄴ’과 ‘ㅁ’의 영향을 받아 같은 ‘ㄱ’과 동일 서열의 연구개비음 ‘ㆁ’으로 변동된 것이고, ㄷ)은 앞 형태소 말음 ‘ㅂ’이 뒷 형태소 두음 ‘ㄴ’의 영향으로 ‘ㅂ’과 동일 서열의 양순비음 ‘ㅁ’으로 변동된 것이다. 16세기 말엽 『논어언해(1590)』예는 아래 *7이다. 그런데 최근에 영인·역주한 『정속언해(1517)』에도 아래 인용한 예(*6)는 이미 16세기 초엽에도 이런 동화현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16세기 초엽의 『정속언해』(*6), 중엽의 ‘이 문헌’(*7), 말엽의 『논어언해』(*8)에 나타나는 현상들은 16세기를 통틀어 보편적으로 쓰인 것으로서, 이 동화 현상의 발생을 17세기까지 거론할 것이 못된다(신중진 1996:245). 예(*6)에 대해 홍윤표(1984)에서는 그 표기(‘잠’)가 오기(誤記)일지도 모른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주를 달고 이를 인용하였다(김문웅 2010:42).

1: 前生애 니 다가 後生애 다시 난 모미 後身이라〈월석 1:45ㄴ주〉

2:   그려기 츄 長常 더브러 니더니〈월석 22:61ㄱ〉

3: 므레 니 中에 龍의 히미  크고〈월석 20:8ㄴ주〉

4: 무틔 니 中에 象의 히미 크니라〈월석 20:8ㄴ주〉

5: 더 호아 가져 니니라〈월석 25:24ㄱ〉

*6: 어버이 빗 내요미 다 글 호로브터 잠 거시니(以顯父母 皆由學以基之也)〈정속 8ㄱ〉

*7: 아기란   누이고 즌  눔 은〈은중 8ㄴ〉

*8: 富를 可히 求 꺼신댄 비록 채를 잠 士ㅣ라도〈논어 2:18ㄱ〉

ㄱ) ㄴ+ㄴ⟵ㄷ+ㄴ(괄호 안은 참고로 적은 것임.)

인(잇)*〈5ㄴ〉

()니믜()〈6ㄴ〉

진(짓)〈10ㄴ〉

인(잇)니〈2ㄴ〉

()니다가〈14ㄴ〉

()니라〈26ㄴ〉  계 6례

ㄴ) ㆁ+ㄴ⟵ㄱ+ㄴ, ㆁ+ㅁ⟵ㄱ+ㅁ

멍(먹)니〈5ㄴ〉

(목)라도〈16ㄱ〉

(목)〈17ㄱ〉  계 3례

ㄷ) ㅁ+ㄴ⟵ㅂ+ㄴ

눔(눕)〈8ㄴ〉  계 1례

1.2.8. 종성 ‘ㅅ-ㄷ’의 표기

15세기 국어에서는 8종성으로, 특히 음절말 위치에서 ‘ㅅ’과 ‘ㄷ’이 대립된 점이 현대국어와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이것은 16세기 초엽에 들어 음절말 종성의 ‘ㅅ’과 ‘ㄷ’이 [t]로 중화됨으로써 15세기의 8종성이 17세기에는 7종성 ‘ㄱ, ㆁ, ㄴ, ㄷ, ㅁ, ㅂ, ㄹ’으로 된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ㅅ’과 ‘ㄷ’이 그런대로 다음에 보이는 것과 같이 구별되어 쓰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표기의 보수성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그 음가는 연철된 경우 ‘드로〈13ㄴ〉’를 제외하면 나머지 16례는 모두 불파음의 ‘ㄷ’으로 발음되었다고 본다.

(아홉) 가짓 5ㄴ, 6ㄱ~ㄴ, 12ㄴ, 24ㄴ.  오역긧 6ㄱ.

졋어미 9ㄱ. (졎+어미)  고 6ㄴ, 9ㄱ~ㄴ.

몯고 8ㄱ.  더니라 9ㄴ.

드로 13ㄴ.  듣글도 15ㄴ.

몯야 17ㄴ.  돋 (다힌) 12ㄴ.

닛디 14ㄴ. (닞+디)  합계 17례

1.2.9. 연철·분철·중철

1.2.9.1. 연철 표기

‘이 문헌’의 표기는 전통적인 연철로, 아래 보이는 분철과 중철을 제외한 전부이다. 이 연철 표기(용례 116례 줄이기로 함.)된 자음은 다음과 같았다.

ㄱ: 16,  ㄴ: 12,  ㄷ: 3,  ㄹ: 28,  ㅁ: 32,  ㅂ: 4,

ㅅ: 10,  ㅈ: 5,  ㅊ: 1,  ㅌ: 2,  ㅍ: 1,  ㅎ: 2.

  합계 116회

1.2.9.2. 분철 표기

이 몸이 6ㄱ.  은덕을  22ㄱ.  계 2례.

1.2.9.3. 중철 표기

이 중철 표기는 앞 형태소의 말음을 그대로 두고서 그 말음을 다시 모음으로 시작하는 후행 형태소의 초성으로 쓰는 표기이다. 이를테면 연철에서 분철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표기라 할 만하니, 이는 실질형태소와 형식형태소를 분리하고자 하는 문법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예에서 중철된 자음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좀 다른 점은 이 중 ‘ㅍ’이 용언이고, 나머지는 체언이다. (이 자음 중, 유성자음은 32회이고, 무성자음은 10회이다.)

ㄱ : 8,  ㄴ : 29,  ㅁ : 3,  ㅅ : 1,  ㅍ : 1.

  합계 42회

사미 1ㄴ.  슈미산니라도 5ㄴ.

업산니라도 5ㄴ.  오역긧 6ㄱ.

간 6ㄱ.  은니라 6ㄱ~ㄴ, 7ㄱ~ㄴ.

인연니 6ㄴ.  믈 6ㄴ.

은니 8ㄱ, 9ㄴ, 11ㄱ.  은니라 9ㄱ.

은 10ㄴ, 11ㄴ, 12ㄴ.  여니언 11ㄱ.

얼운니 13ㄴ.  옥긔 14ㄴ.

지럼믄 15ㄱ.  덕기 17ㄱ.

은 17ㄱ, 18ㄱ~ㄴ, 19ㄱ~ㄴ,  슈미산 18ㄱ.

  20ㄴ, 21ㄴ, 24ㄴ(2).  죄인니라 22ㄱ.

복글 22ㄴ.  디옥긔 22ㄴ, 23ㄴ, 24ㄱ~ㄴ.

면 23ㄴ.  갑리잇고 24ㄴ.

  합계 42례

1.2.10. 한자음의 표기

‘이 문헌’의 한자음 표기는 당시의 전통적인 조선한자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표기의 특징은 언해문 전체는 한글로만 되어 있으며, 따라서 한자는 표기되지 않고 해당 한자의 음만 노출되어 있다. 현대식으로 표현한다면 ‘이 문헌’의 언해문은 ‘한글전용체’의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 이르기까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석보상절(1447)〉 - 한자와 고유어(정음) 글자를 큰 글자로 같게 표기하고, 모든 한자는 밑에 작은 글자로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하였음.

〈월인천강지곡(1447)〉 -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큰 글자(정음)로 앞세우되 후음 ‘ㅇ’을 쓰지 않았고, 그 밑에 한자를 작은 글자로 표기하였으며, 고유어(정음)도 한자와 같은 크기로 이어 표기하였음. 이런 표기는 후대에 계승되지 못했음.

〈월인석보(1459)〉 - ‘석보상절’식 표기를 따름. 여기에서 표기한 〈월인천강지곡〉 가사도 석보상절식으로 바꾸어 표기하였음. 즉 모든 한자를 크게 키우고, 그 밑에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작게 표기함. 단, 협주는 2행으로 작은 글씨이므로 동국정운식 표기를 나란히 같은 크기로 적었음.

〈능엄경언해(1461)〉 - ‘석보상절’식 표기와 같이 한자와 고유어(정음)를 나란히 표기하였으나, 한자 뒤에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도 같은 크기로 아래에 적었음.

15세기 말,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지양하고 전통한자음을 쓰기 시작한 『육조법보단경언해』, 『진언권공』, 『삼단시식문언해』에서도 예문에서처럼 석보상절식 표기가 이어지다가, 『속삼강행실도(1514)』는 대체로 한자와 전통한자음 표기를 나란히 하면서도 글자 크기는 같아졌고, 『이륜행실도(1518)』에 이르면 한자를 전혀 적지 않으면서 모두 전통한자음으로 적는 것은 물론 글자 크기도 같아지게 되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 후 문장 표기의 한 혁신이라 할 만하다. ‘이 문헌’은 바로 그런 배경에서 지어진 것으로서, 언해문에 한자는 전혀 쓰지 않은 정음체의 문장으로서 당시로서는 돋보이는 점이다.

世솅尊존이 象頭山산애 겨샤〈석상 6:1ㄱ〉

셰世존尊ㅅ 일 리니 먼萬리里 外 ㅅ 일이시나...〈월인 상:1ㄱ〉

世솅尊존ㅅ 일 리니 萬먼里링ㅅ 外ㅅ 일이시나 눈에 보논가 너기쇼셔[萬먼里링外 萬먼里링 밧기라]〈월석 1:1ㄴ〉

如來ㅅ 果광體톙 그 體톙 本본來 그러커시니〈능엄 1:8ㄱ〉

그  大대師ㅣ 寶보林림에 니를어시〈육조 상:1ㄱ〉

仙션間간 고로 供養노니〈진권 4:ㄱ〉

(王)中이 登封 (사)미라〈속삼 효:1ㄱ〉

윗나랏  슈 션공의 아리니(衛 公子壽者 宣公之子)〈이륜 형:1ㄱ〉

1.2.11. 초역본의 방점 표기

〈부모은중경언해〉는 중세국어 정음 문헌 중에서 방점(傍點)이 표시되지 않은 문헌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주011)

중세국어 성조(聲調)를 연구한 김성규(1994:129)에 의하면, 방점이 찍히지 않은 문헌의 사례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었다. 『부모은중경언해』 화장사판(1553년)과 송광사판(1563년), 그리고 희방사판 『칠대만법(1569)』, 서봉사판 『계초심학인문(1583)』 등.
그러나 그 양상이 매우 불규칙하여 기능이 과연 무엇인지 규정하기가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이 문헌’에 방점이 사용된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번거롭지만, 이 문헌에 나타난 방점을 이해하기 위해 『훈민정음』 해례본에 규정한 방점 표기의 원칙과 기능, 그리고 이 문헌에 이르는 동안의 방점 표기법의 역사를 간략히 기술하기로 한다.

방점 표기는, 1446년 음력 9월에 완성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예의(例義)’에 제시된 가점법(加點法)과, ‘훈민정음 해례’ 합자해(合字解)의 원칙 해설, 그리고 용자례(用字例)의 구체적인 용례들을 통해 문자화하는 방법이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그것은 ‘훈민정음’ 즉 ‘한글’로 한국어나 외래어 음운을 표기할 때, 어절 단위로 해당 음절의 글자 왼쪽에 점을 찍어 표시하였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방점(傍點/旁點)’이라 부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성조(聲調. toneme)의 높낮이[고저]를 나타내는 표지로서, 그 종류는 0점(점 없음), 1점, 2점의 세 가지 종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0점(무점)은 가장 낮은 소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평성(平聲)’이라 하였으며, 1점은 가장 높은 소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거성(去聲)’이라 하였고, 2점은 처음이 낮고 끝이 높은 소리로서 ‘상성(上聲)’이라 하였다.

이 방점 표기의 원칙은 1446년 『훈민정음』 해례본의 ‘예의’와 ‘해례’ 합자해에 제시되었다. 구체적인 용례는 주로 ‘합자해’와 ‘용자례’에 여러 차원으로 제시되었다. ‘·’[地], ‘·’[酉時], ‘:별’[星]과 같은 단어 차원의 예들과, ‘합자해’의 ‘괴·여’[我愛人], ‘소·다’[覆物] 등의 어절 차원의 예, 그리고 “孔子ㅣ魯ㅅ:사”과 같은 절(節) 차원의 예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온전한 문장 종결형식을 갖춘 용례는 해례본에 제시되지 않았다.

단어를 포함하여 완전한 문장 종결형식의 성조 실현을 방점으로 반영한 첫 문헌은 훈민정음 교과서 구실을 한 『훈민정음』 언해본에서부터라 할 수 있다. 주012)

정우영(2005: 82-94)에 따르면, 제1차 〈훈민정음〉 언해본은 1446년 12월 말까지, 또는 늦어도 1447년 4월 이전까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예의’편만을 우리말로 번역·간행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에 이어서 훈민정음 초기문헌인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에서도 방점을 적극적으로 표기에 반영함으로써 방점 표기가 국어 표기법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주013)
현재 전하는 15세기 정음문헌 중에서 방점 표기가 반영되지 않은 문헌도 있다. 예를 들면, 『금양잡록(1492)』, 『악학궤범(1493)』에 실린 정음가사, 이종준의 『신선태을자금단(1497)』 등인데, 이는 거의 예외적인 문헌이라 할 수 있다.
15세기 관판(官版)의 정음문헌에는 방점 표기가 철저하게 반영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방점 표기가 우리말 소리의 고저(高低)를 반영한 표지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훈민정음 창제 후 문헌 편찬자들은 당시 한국어의 음소(音素)와 운소(韻素)를 모두 문자화함으로써 ‘정음(正音)’ 즉 ‘표준화한 말소리[語音]’를 독자들(백성)에게 널리 가르쳐 펼칠 목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5세기 말기 이후로는 방점 표기가 점차 소홀해져서 대체로 16세기 말기 임진란 이후의 한글문헌에 이르러서는 소멸·폐지되기에 이른다. 주014)
17세기에도 방점이 표기된 문헌으로, 1610년 송광사판 『선가귀감언해』가 있다. 이것은 원간본인 1569년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판에 방점 표기가 있는 자료를 저본으로 하여 복각한 데 원인이 있다.

15세기 중기 정음문헌에서부터 16세기 말기 문헌까지 방점이 반영된 한글문헌을 살펴보면, 방점 표기의 원칙에 몇 차례 변화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방점 표기 원칙의 제1차 변화는 1464년 『선종영가집언해』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원각경언해(1465)』를 거치면서 일반화하기에 이른다. 대체로 그 변화는 문장에서 어절의 말음절을 거성(=높은 음조)으로 표기(=발음)하던 것을 평성(=낮은 음조)으로 표기(=발음)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역주본의 저본인 ‘이 문헌’ 1545년 오응성 발문이 붙은 『부모은중경(언해)』에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방점이 사용되었다. 그 경향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015)

이 초역본(1545)이 발견·소개되기 전에, 유필재(1997)에서 화장사판(1553) 『부모은중경언해』의 방점을 조사·분석한 바 있다. 이 오응성 발문이 붙은 초역본(1545)도 화장사판의 경향과 다르지 않다.

첫째, 방점은 5장 이후부터 간헐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전체 27장 중에서 전반부는 방점 표기가 적게 나타나고, 후반부로 갈수록 많이 나타난다. 비교적 내용이 많은 장을 조사해 보아도 1면에 20어절을 넘지는 않는다. 방점이 많이 나타난 면을 조사한 결과를 보이면 (1)과 같다.

(1) 12ㄴ(16개 어절) 13ㄴ(10개 어절) 14ㄴ(10개 어절)

 23ㄴ(19개 어절) 26ㄴ(13개 어절)

둘째, 고유어의 경우에는 대체로 하나의 어절에는 하나의 음절에만 방점 표시가 되어 있으나, 한자어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나타난다.

(2) 가. ·올 ·피주리 되여 :아긔 이븨 흘러 ·드니라〈5ㄴ〉

 나. 믄 :: 렴야〈14ㄴ〉.  다 :디·오긔 다시 드러〈23ㄴ〉

(2나)는 예외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은 한자 구성요소 ‘永+永’으로 된 첩어이고, ‘:디·오긔’는 ‘地+獄+의’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들은 한자의 기본성조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므로 고유어와는 달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셋째, 체언의 곡용형 또는 용언의 활용형에서는 어간에만 방점을 찍으며, 어절의 말음절에는 방점을 표시하지 않는 것이 대세이다.

(3) 가. 닐곱 ·리면 회 아기 삼여슌 와 팔만쳔 털굼기 나니라〈5ㄱ〉

 나. 다 리면/여 리면〈4ㄴ〉. 여ㅂ 리면〈5ㄱ〉. 아홉 리면〈5ㄴ〉

 다. 일·후·미 ·모미·면 鼻 아·니·오〈능엄 3:44ㄱ〉. cf. ·몸[身]

 라. ·어미 ·식 ·여 ·열 ·이예 안·나 니·나 편·티 아니여〈12ㄱ〉

(3가)는 이 문헌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방점 표기의 예이다. ‘·리면’은 ‘거성-평성-평성’형이지만, 같은 문헌의 앞·뒷장에 나오는 (3나)의 ‘리면’에서는 방점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이 문헌이 어말 평성화 이후의 것이기는 하지만, 체언의 어간 ‘·’[月]이 거성이므로 모두 ‘평-평-평’으로 실현되었다고 해석할 수 없다. 아예 같은 면의 다른 문장에서 방점이 쓰인 예가 없기 때문이다. ‘月[달]’을 뜻하는 []은 중세국어 문헌에서 ‘거성’이며, ‘+이면’으로 통합되면 15세기 율동규칙에 따라 ‘·리·면’(거-평-거)으로 실현되는 것이 정상이다. 중세국어 문헌에서 곡용형 ‘리면’이나 ‘이면’으로 나타나는 예를 찾지 못하였으나, 체언의 기본성조가 거성인 (3다) ‘·몸’의 곡용형이 ‘·모미·면’(거-평-거)으로 실현되는 예를 볼 때, (3가)의 ‘·리면’에 표시된 1점은 방점 ‘거성’을 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절말의 평성화가 반영된 문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문헌 전체에 이 같은 경향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지만, (3라)에서 ‘·여, 안·나, 니·나, 편·티’와 같은 예는 이 문헌에서 거의 유일하게 집중적으로 나타난 문장으로 극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넷째, 방점 표기가 매우 불규칙하며, 15~16세기 한양에서 간행한 관판 정음문헌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도 있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다. 1음절어의 경우만 〈표〉로 정리해 대체적인 경향을 알아본다.

〈표1〉은 1음절 한자어 및 고유어로서, 방점이 표기된 경우를 몇 개 모아본 것이다. 한자어의 경우는 15~16세기 문헌들과 같이 나타나지만, 고유어인 ‘다’[皆]와 ‘피’[血]의 경우는 중세국어 방점 표기 문헌의 것과 다른 것도 나타난다. 이 예들을 보면 15세기 국어 성조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표1〉 ‘이 문헌’의 방점 표기 경향(1음절어)

음절대상(횟수)15세기 문헌16세기 전기
1음절어·겁(劫)〈26ㄱ2〉같음. 〈육조 중70ㄴ〉같음
:다[皆.상성]〈7ㄴ7〉(4회)같음. 〈남명 상4ㄴ〉같음
·다[皆.상성]〈16ㄴ5〉(2회)다름다름
·이[此.거성]〈5ㄴ8〉(3회)같음. 〈시식 4ㄱ〉같음
·피[血.거성]〈7ㄴ7〉(6회)같음. 〈월석 1:7ㄴ〉같음
:피[血.상성]〈5ㄴ9〉(1회)다름다름
·혹(或)〈14ㄴ7〉(3회)같음. 〈권공 23ㄴ〉같음

그러나 15세기 문헌에서 ‘거성’이나 ‘상성’으로 나타난 체언이나 용언 어간이 이 문헌에서는 방점으로 반영되지 않은 예를 감안하면, 성조의 계승과 변화의 와중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섯째, 거성과 상성의 혼란을 보여준다. 〈표2〉는 15세기와 16세기 초기 정음문헌에서 ‘상성’이던 것을 이 문헌에서 ‘거성’으로 표기한 예이다.

〈표2〉 상성(15~16세기 문헌) ⇒ 거성(‘이 문헌’의) 경향

15~16세기 문헌‘이 문헌’
가(상-거)〈박초 상10ㄴ〉가(거-평, 假使)〈18ㄱ3〉(7회)
녜(상-거)〈월석 17:79ㄴ〉녜(거-평, 昔)〈9ㄴ6〉
다(상-거)〈석상 13:48ㄴ〉다믄(거-평, 但)〈8ㄴ9〉
父母ㅣ(상-상)〈석상 6:7ㄱ〉부뫼(거-평)〈10ㄴ6, 12ㄴ8〉
간(상-평)〈석상 9:12ㄴ〉잠(거-평)〈10ㄴ9〉
漸쪔漸쪔(상-상)〈석상 9:15ㄱ〉졈졈(거-거)〈13ㄴ7〉
賤히(상-거)〈영가 상:26ㄴ〉쳔히(거-평)〈14ㄴ3〉
내애(상-평-거)〈능엄 1:20ㄱ〉내의(거-평-평)〈12ㄴ7〉
父母도(상-상-거)〈월석 10:24ㄴ〉부모도(거-평-평)〈14ㄱ1〉
어엿버(상-평-거)〈월석 25:4ㄱ〉어엿버(거-평-평)〈9ㄱ9〉
얼우(상-평-평)〈두초 21:6ㄴ〉얼우(거-평-평)〈13ㄱ10〉
五臟(상-거-거)〈월석 4:7ㄱ〉오을(거-평-평)〈23ㄴ10〉
우다가(상-평-거)〈월석 23:78ㄴ〉우다가(거-평-평)〈14ㄴ7〉

〈표2〉에서는 15~16세기 정음문헌에서 제1음절 어간이 ‘상성’으로 표기되던 것이, ‘이 문헌’에 와서 ‘거성’으로 표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어절의 말음절 성조도 15세기에는 ‘거성’으로 실현되던 어형이 ‘거성→평성’으로 표기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다음으로, 〈표3〉은 15세기 정음문헌에서 ‘거성’으로 표기되던 것을 ‘이 문헌’에 와서 ‘상성’으로 표기한 경우이다. 주016)

이 같은 경향에 대하여는 유필재(1997:231-234)에서 구체적인 예와 해석이 갖추어져 있다.

〈표3〉 거성(15~16세기 문헌) ⇒ 상성(‘이 문헌’의) 경향

15~16세기 문헌‘이 문헌’
各各(거-거)〈육조 중:28ㄱ〉각각(상-상, 各各)〈26ㄱ1〉
아(거-거)〈월석 8:83ㄱ〉아긔(상-거)〈5ㄴ9〉
어믜(거-거)〈능엄 5:40ㄴ〉어믜(상-거)〈9ㄴ10〉
獄애(거-거)〈석상 9:8ㄴ〉옥긔(상-평, 獄)〈14ㄴ2〉
고(거-거)〈구방 하:3ㄱ〉고(상-평)〈16ㄴ7〉
디(거-거)〈능엄 9:74ㄴ〉디(상-거)〈8ㄱ8〉
그리(거-평-거)〈월석 17:15ㄱ〉그리운(상-평-평)〈16ㄴ10〉
地獄이(거-거-거)〈영가 상:53ㄱ〉디오기(상-거-평, 地獄)〈23ㄴ2〉

〈표3〉에는 15~16세기 문헌에서 제1음절 어간이 ‘거성’으로 표기되던 것이, ‘이 문헌’에 와서 ‘상성’으로 표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표2〉와 〈표3〉을 비교해 볼 때, ‘거성⇒상성’으로 표기하는 예가 더 많다. 유필재(1997: 232~233)에서도 지적된바 있지만, 이와 같은 경향은 1553년 화장사판에서도 같은 경향으로 나타난다. 이는 화장사판이 앞 시기에 간행된 자료를 저본으로 하여 복각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오쿠라문고(小倉文庫)에 소장된 화장사판(1553)이 오응성 발문의 ‘이 문헌’(1545)을 복각한 자료라면, 화장사판을 당시 경기도 지역의 성조를 반영하는 문헌자료로 본 것은 잘못된 판단이 될 개연성이 크다. 특히 ‘이 문헌’처럼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판을 거듭하여 간행한 문헌일수록 어떤 자료를 최초(最初) 또는 최고(最古)의 자료라고 확정하고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문헌에 나타난 언어 사실을 면밀히 조사·분석하여 충실히 보고하는 것이 후속 연구를 위해 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2.1. 조사

조사의 쓰임도 초기문헌 이래의 용법과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으나, 음운의 변동으로 일어난 차이나, 표기상의 차이 등을 중심으로 문제될 만한 것만 언급하기로 한다.

2.1.1. 주격조사

주격조사의 이형태는 그 표기대로 ‘-이/-ㅣ/-∅’와 같은데, ‘이 문헌’에는 한자어라도 모두 정음으로 표기하였으므로, 한자로 표기할 때와는 조사의 표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辛苦ㅣ’→‘신괴’와 같은데, 이 예는 많지 않아서 해당 한자와 아울러 아래에 예를 보인다. 자음으로 끝난 체언 아래서 그 자음이 연철되는 것은 15세기 국어 표기법과 같다. ‘ 子息이→시기’ 또한 체언의 종성이 ‘ㆁ’인 경우는 초기문헌에서도 ‘ㆁ’이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음절 초성으로 쓰이지 않았으므로 여기서도 ‘大衆이→대이〈1ㄴ, 22ㄱ〉’와 같이 나타난다. 다음으로 영형태(零形態)인 ‘-∅’ 주격의 예도 많지 않아서 그 예들을 다 옮긴다.

‘-ㅣ’

신괴(辛苦)〈3ㄴ〉 (樣姿)〈9ㄱ~ㄴ, 15ㄴ〉

부뫼(父母)〈10ㄱ, 12ㄴ, 13ㄴ, 15ㄱ〉 슈괴(受苦)〈12ㄱ(2)〉

녜되(禮度)〈13ㄴ〉 뎨(弟子)〈17ㄱ, 24ㄴ, 26ㄴ〉

‘-∅’

집 나건 오라도〈2ㄱ〉 흐로미〈7ㄴ〉

어미 식 여〈3ㄴ, 4ㄱ, 12ㄱ〉회태 플 틔 이슬티〈4ㄱ외 9회〉

(나) 님도다〈7ㄱ〉어미 편티 아녀 놋다〈10ㄴ〉

어미 바   누웟도다〈10ㄴ〉 흐고〈17ㄴ〉

은혜 부모와 가지로다〈9ㄱ〉쇠가히  블 토야〈23ㄴ〉

이 일호믈 너희 져 니라〈26ㄴ〉

2.1.2. 목적격조사

‘이 문헌’에 쓰인 목적격조사는 ‘-/-을/-’의 세 형태이고, 초기문헌에 쓰였던 ‘-ㄹ/를’의 두 형태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은 ‘이 문헌’에 쓰인 목적격조사의 예이다.

마〈5ㄴ〉  은〈10ㄴ, 11ㄴ, 12ㄴ, 17ㄱ·ㄴ, 18ㄱ·ㄴ, 19ㄱ·ㄴ, 20ㄴ, 21ㄴ, 22ㄱ·ㄴ, 24ㄴ〉

대을〈1ㄱ〉  

〈2ㄴ, 21ㄱ〉  모믈〈17ㄴ〉

어미〈6ㄱ〉  너희〈17ㄴ〉

〈6ㄱ〉  슈미산〈18ㄱ〉

간〈6ㄱ〉  모믈〈18ㄴ, 26ㄱ〉

람믈〈6ㄴ〉  눈〈19ㄱ〉

깁오〈6ㄴ〉  가믈〈19ㄴ〉

〈7ㄱ, 10ㄴ, 11ㄴ〉  은혜〈20ㄱ, 21ㄱ〉

아기〈8ㄱ·ㄴ〉  을〈20ㄴ〉

시글〈9ㄴ, 11ㄱ〉  쇠무저글〈21ㄴ〉

이[事]〈10ㄴ(2)〉  은덕을〈22ㄱ〉

그츠믈〈11ㄱ〉  을〈22ㄴ, 24ㄴ〉

은더글〈11ㄴ〉  죄〈22ㄴ〉

믈〈12ㄴ〉  블〈23ㄴ〉

더위〈12ㄴ〉  어〈23ㄴ〉

치위〈12ㄴ〉  오을〈23ㄴ〉

마(言)〈13ㄱ〉  부텨〈24ㄴ(3)〉

버블〈13ㄴ〉  슈고〈24ㄴ〉

사믈〈13ㄴ〉  모〈26ㄱ〉

머기〈16ㄱ〉  교슈〈26ㄱ(3)〉

이(事)〈15ㄱ(2)〉  혀〈26ㄱ〉

호믈〈17ㄱ〉  일호믈〈26ㄱ, 26ㄴ(2)〉

부모〈16ㄴ, 18ㄱ~ㄴ, 20ㄴ, 24ㄴ〉

위 예를 모음조화 적용 여부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어 제시한다.

모음조화가 적용된 표기모음조화가 적용되지 않은 표기
-10회- → -을16회
-을8회-을 → -14회
-14회- → -를없음
-를없음-를 → -17회
소계32회소계47회
합계79회

합계 79회를 모음조화가 적용이 된 것(32회)과 그렇지 않은 것(47회)으로 나누어 보면, 제대로 표기되지 않은 후자가 많아서, 이를 백분율로 환산하면 전자가 40.50%, 후자는 59.49%로서 약 60%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이 문헌’에 쓰인 이 조사의 세 이형태 ‘-/을/’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가 주목된다.

곧, 그동안 중세국어에서 근대국어로, 다시 현대국어로 이어진 조사의 간소화는, 결국 체언 말음이 자음이냐 모음이냐에 따른 음운론적 이형태 ‘-을/를’ 두 가지로 귀결된다. ‘이 문헌’에서는 ‘-를’이 쓰일 환경인데도 전혀 쓰이지 않고 그 자리에 ‘-’을 썼다.

이 밖에 ‘-(으/)란’이 목적격으로 쓰인 예가 7례가 빠졌는데 이를 다음에 참고로 추가한다.

아기란〈8ㄴ(2)〉, 버드란〈13ㄴ〉, 효도란〈15ㄱ〉, 말란〈16ㄱ〉, 싀권으란〈16ㄴ〉, 권으란〈16ㄴ〉.

2.1.3. 관형격조사

‘이 문헌’에 쓰인 관형격조사는 초기문헌에 쓰이던 그대로 ‘-/의/ㅣ/ㅅ’의 네 이형태가 나타난다. 다음에 그 예를 모두 제시한다.

사〈1ㄱ, 4ㄱ〉  좌의〈15ㄴ〉

의〈1ㄴ〉  겨지븨〈16ㄱ〉

나의〈2ㄱ〉  제 (녁)〈16ㄴ〉

젼의〈2ㄱ〉  제 (모)〈17ㄴ〉

남의〈2ㄴ〉  브효의〈17ㄱ〉

녀이〈2ㄴ〉  부텨의〈17ㄱ, 26ㄱ~ㄴ〉

어믜〈3ㄴ, 5ㄴ, 6ㄱ(3), 6ㄴ, 9ㄱ(2), 10ㄱ, 11ㄱ, 12ㄴ〉  부모의〈18ㄱ~ㄴ, 19ㄱ~ㄴ, 20ㄱ~ㄴ, 21ㄱ·ㄴ, 22ㄴ, 24ㄴ(2)〉

안〈5ㄴ〉  브모의〈20ㄴ〉

아긔(이븨)〈5ㄴ〉  제 ()〈21ㄱ〉

어〈6ㄱ〉  죄이〈23ㄴ〉

부모의〈8ㄱ, 11ㄱ~ㄴ, 13ㄴ, 14ㄴ, 15ㄱ, 17ㄱ~ㄴ〉  젼의〈24ㄱ〉

나〈10ㄱ〉  사믜〈24ㄴ〉

시긔〈10ㄴ〉  의〈26ㄱ·ㄴ〉

인뉴의〈11ㄴ〉  (주근) 후 ()〈2ㄴ~3ㄱ〉

얼우〈13ㄱ, 16ㄱ〉  (아홉)가짓 (굼기)〈5ㄱ〉

스의〈13ㄴ〉  (열) 가짓 은니라〈6ㄱ〉

형뎨의〈13ㄴ〉  (여러) 가짓 (일)〈12ㄴ〉

부텨의〈22ㄱ(2), 26ㄱ(2)〉  블〈23ㄴ〉

효옛〈6ㄱ〉  제 (녁)〈16ㄴ〉

〈14ㄴ〉  제 (모믈)〈17ㄴ〉

  제 ()〈21ㄱ〉

여기서도 앞의 목적격조사의 경우와 같이 모음조화 적용 여부로 나누어 제시한다.

모음조화가 적용된 표기모음조화가 적용되지 않은 표기
-8회- → -의31회
-의21회-의 → -4회
29회35회
합계64회

위 자료의 끝 4례는 ‘-ㅅ’이 쓰인 경우와, ‘-/의’의 준 것으로 보는 ‘-ㅣ’의 3회 쓰임은 모음조화와 관련되지 않으므로 따로 보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모음조화가 적용이 된 21회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적었고, 적용되지 않은 경우가 조금 많았다. 이를 백분율로 환산하면, 전자가 45.31%, 후자가 54.69%로 나타난다. 이 수치는 앞으로 후자가 많아질 가능성을 보이는 정도로 예측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적용된 것 중 ‘-의’가 ‘-’보다 3배 가까이 많고, 적용되지 않은 것 중 ‘-의’ 표기가 31회로 ‘-’ 표기보다 8배 가깝다는 것이다. 또, 합계 64회 중 ‘-의’ 표기가 52회, ‘-’ 표기가 12회라는 것은, 앞으로 이 관형격조사 표기는 ‘-의’로 단일화될 조짐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끝 4례와 관련해서, ‘이 문헌’의 ‘부텨의 교수’〈26ㄱ(2)〉 경우, 15세기 문헌에서였다면 ‘부텻 敎授를’ 정도로 쓰였을 것으로 본다. 이 ‘-ㅅ’의 사용이 ‘이 문헌’ 정도면 조사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사잇소리’로 쓰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2.1.4. 대조의 보조사 ‘-ㄴ//은/’

‘이 문헌’에서는 ‘-’에 대응되는 ‘-는’이 전혀 쓰이지 않아서 용례가 없다. 아래에 제시된 자료를 목적격조사의 경우와 같이, 사용 빈도수를 계산하여 다음에 제시한다.

모음조화가 적용된 것모음조화가 적용되지 않은 것
-7회- → -은2회
-은4회-은 → -1회
-9회-는 → -15회
-ㄴ1회
21회18회
합계39회

위에서 모음조화가 적용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횟수는 3회 차이로 별로 문제될 만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총 39회 중, 모음조화 적용 여부를 떠나 그 쓰인 횟수로만 보면 ‘-’이 24회로 그 중 많이 쓰인 것이 주목된다. 이는 나머지 ‘-/은/’의 쓰인 횟수를 합한 14회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이〈2ㄱ〉  어미〈8ㄱ, 8ㄴ(2), 9ㄱ〉  아홉채〈10ㄴ〉

〈2ㄴ〉  다채〈8ㄴ〉  어미〈10ㄴ〉

남〈2ㄴ〉  여슷채〈9ㄱ〉  열채〈11ㄱ〉

녀이〈2ㄴ, 3ㄱ〉  아비〈9ㄱ〉  〈16ㄱ〉

이제〈2ㄴ〉  닐곱채〈9ㄴ〉  지럼믄〈16ㄱ〉

남〈3ㄱ〉  녜〈9ㄴ〉  부모〈16ㄴ〉

장은〈5ㄴ〉  눈서븐〈9ㄴ〉  남지〈16ㄴ〉

아〈6ㄱ(2)〉  귀미튼〈9ㄴ〉  어버시〈17ㄱ〉

(둘)채〈7ㄱ〉  여(*)채〈9ㄴ〉  우리〈17ㄴ, 22ㄱ〉

(세)채〈7ㄴ〉  눈므〈10ㄱ〉  다힌(屠)〈12ㄴ〉

네채〈8ㄱ〉  여희믄〈10ㄱ〉  믄〈11ㄴ, 14ㄴ〉

2.1.5. 처소의 부사격조사

15세기에서 일부 체언에 관형격조사와 같은 형태인 ‘-/의-’가 쓰인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이 문헌’에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쓰인 이형태는 ‘-애/예//의’ 네 가지이고, ‘-애’와 상대되는 ‘-에’는 전혀 쓰이지 않았다. 뒤의 자료를 그 형태별로 사용 횟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애 3회, - 10회, -의 21회, -예 13회, 합계 47회.

그 쓰인 현상을 보면, 양성모음계 ‘-애, -’의 합계보다는 ‘-의’ 한 형태가 배나 되는 빈도로 나타나는 것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이 네 가지를 빈도수로 보면 ‘-예’가 제일 많은데, 여기에는 ‘이’ 한 단어가 5회가 들어 있고, 그 쓰인 환경도 ‘-i/j’로 별 문제가 없다. 이로 보아서 이형태 ‘-예’의 쓰임은 전통적인 방법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본다. 다만, 예외로 ‘-예’가 쓰일 환경이 아닌, 체언 말음 ‘오’에 ‘-예’가 통합된 ‘거우로예’〈6〉는 특이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하나 검토할 것은, 15세기에 쓰이던 ‘특이 처소의 부사격조사’ 혹 ‘특이처격어’로 불리는 ‘-/의’가 ‘이 문헌’에 쓰인 양상에 대해서이다. 이 두 이형태의 쓰인 용례는 전자가 10회, 후자가 21회로 합계 31회인데, 이 형태와 통합된 체언이 이른바 특이한 체언에 속하는가, 아닌가를 가려보기로 한다.

○전통적으로 ‘-/의’가 통합되던 체언 :

둘ㅎ[二], 낮[晝], 안ㅎ[內], 입[口], 가[胸], 날[日], 밧ㄱ[外], 밤[夜](2), 옥[獄], 집[家](2), 디옥(地獄)(5).

합계 11단어(괄호 안 숫자는 빈도수로 제외).

○전통적으로 ‘-/의’가 통합되지 않던 체언 :

사(王舍城), (生), 뎔[寺], [終], 남[他], 타(他鄕)(3), 일야(日夜), 렴(思念)홈, 후(後), 젼(前)(2), 사면(四面).

합계 11단어.

위의 숫자를 보면 공교롭게도 두 가지 체언의 수가 같이 나왔다. 이 예들 중에서 후자의 ‘왕사셩’은 전자로 분류할 수도 있으나, ‘-城의/城에’ 만의 용례를 검색해 보면,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의 두 문헌 만에서도 후자 ‘-城에’가 빈도수로는 약 3배가 넘게 나타났기 때문에 후자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양상은 ‘처소의 부사격조사’에 ‘-의/에’가 구별 없이 쓰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문헌’에서는 ‘특이 처소의 부사격조사’라는 용어를 더 이상 쓸 형편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이 문헌’에 쓰인 네 가지 이형태 ‘-애//의/예’에서 ‘-예’는 그 쓰임으로 보아 당분간 전통적인 표기법을 따른 것이 예상되나, 나머지 세 이형태 중 ‘-애/에’의 용례 수를 합한 13회보다 ‘-의’가 쓰인 용례가 21회라는 경향은 앞으로 이 ‘-의’가 더 세력을 넓혀 나갈 것인가가 주목된다. 주017)

15세기에는 일부 체언에 관형격조사와 같은 형태인 ‘-/의-’가 쓰이는 경우가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그런 체언은 ‘신체, 방위, 지리, 광물, 천문, 절기, 식물, 음식, 가옥, 기구, 수’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애/에’와 ‘-/의’는 그 형태만으로는 처소의 부사격조사인지, 관형격조사인지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 구별은 선행체언이 유정체언(사람, 동물 등)이면 ‘-/의’를 관형격조사로, 그 밖에 무정체언이면 ‘-애/에’를 처소의 부사격조사로 보는 것이다.

일시예〈1ㄱ〉  거우로예〈6ㄴ〉  지븨〈15ㄴ(2)〉

샤의〈1ㄱ〉  가믜〈7ㄱ〉  후의〈16ㄴ〉

삼계예〈1ㄴ〉  나〈7ㄴ〉  져〈17ㄴ, 22ㄴ〉

둘희〈2ㄴ〉  밧긔〈10ㄱ〉  바〈17ㄴ〉

이 의〈2ㄴ〉  타의(잇도다)〈10ㄱ〉  엇게예〈18ㄱ〉

뎌〈3ㄱ〉  일야의〈10ㄱ〉  모매〈20ㄱ〉

이예〈3ㄴ,5ㄴ,12ㄱ~ㄴ(2),24ㄱ〉  렴호〈10ㄱ〉  디옥긔〈22ㄴ, 23ㄴ, 24ㄱ·ㄴ〉

(플) 틔〈4ㄱ〉  예〈14ㄴ〉  디옥의〈23ㄴ〉

나〈4ㄱ〉  바〈10ㄴ〉  면〈23ㄴ〉

안셔〈5ㄴ〉  타의〈14ㄴ(2)〉  머리예〈23ㄴ〉

(아긔) 이븨〈5ㄴ〉  옥긔〈14ㄴ〉  나호매〈3ㄴ〉

나믜〈6ㄱ〉  거리예〈14ㄴ〉  매〈3ㄴ〉

예〈6ㄴ〉  〈14ㄴ〉

2.1.6. 도구의 부사격조사

‘이 문헌’에 쓰인 이 조사는 ‘-로/으로/오로/’의 세 형태이고, ‘-로’는 전혀 쓰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새로운 이형태인 ‘-오로’로 대체된 결과로 판단된다. 그 자료는 아래와 같으며, 그 쓰인 환경을 정리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체언 말음의 모음 아래 : -로(5회) 남녁+오로, 웋+오로

체언 말음의 모음 아래 : -으로(1회) 말솜+오로, +오로

체언 말음의 -ㄹ 아래 : -로(5회) 덕+오로, 머금+오로

체언 말음의 자음 아래 : -오로(7회) +오로

합계 14회(체언말 자음 ㄱ, ㅁ, ㄷ, ㅎ, ㆁ).

여기서는 ‘-오로’의 빈도가 전체 14회의 꼭 반을 차지한다. 종래 이것의 형성에 대해서는 “순자음 아래서 ‘-로’의 ‘’가 원순모음화한 것”으로 설명한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위의 자료에 제시하는 바와 같이, 여기에 쓰인 7회의 예를 체언과 조사로 분석한 결과(위 자료의 오른 편) 선행 체언의 끝 자음이 연구개자음 ‘ㄱ’과 순자음 ‘ㅁ’이 각각 2회이고, 순자음 아닌 경우가 네 가지나 된다. 따라서 이는 ‘순자음’에 의한 ‘원순모음화’라는 견해가 여기서는 적용될 수가 없고, 격조사 ‘-로’ 자체에서 제2음절 모음 ‘ㅗ’에 의한 역행동화로 형성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경우도 모두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겠다.

남녀고로〈1ㄱ〉  쇠로〈23ㄴ〉

아래로〈5ㄴ〉  그믈로〈23ㄴ〉

우호로〈5ㄴ〉  오로〈23ㄴ〉

소매로〈8ㄴ〉  쇠술위로〈23ㄴ〉

드로〈13ㄴ〉  죄로〈24ㄱ〉

말소모로〈17ㄴ〉  덕고로〈24ㄴ〉

갈로〈6ㄱ, 19ㄴ, 20ㄱ〉  잠기로〈26ㄱ〉

모므로〈20ㄴ〉  쇠그믈로〈26ㄱ〉

2.1.7. 접속조사 ‘-와/과’

접속조사 ‘-와/과’는 체언(N1…N3)이 나열·접속할 경우에, “‘N1’과/와 ‘N2’과/와 ‘N3’과/와”와 같은 형식으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15세기 쓰이던, 이른바 집단곡용의 쓰임이 훨씬 줄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다음에 그 예를 든다.

세존하 어믜 은과 덕과 엇뎨야 가리잇고〈3ㄴ〉

눈과 귀와 고와 입과 혀와 과 여니라〈4ㄴ〉

엇계와 두 무룹과 이니라〈4ㄴ〉

아란과 대이 부텨 오〈1ㄴ〉

쇠젹곳과 쇠마치와 한도갈히 비오시 오로 려〈23ㄴ〉

와 히 타디여〈23ㄴ〉

이 집단곡용은 둘 이상의 체언이 이 조사로 연결될 경우 끝에 오는 체언에도 ‘-와/과’를 통합한 다음에 이 어절의 성분에 알맞은 격조사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15세기 국어 형식과 동일한 쓰임을 보인 경우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예문의 반 정도는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1.8. 선어말어미

여기서는 ‘이 문헌’에 나타난 선어말어미에 쓰인 기능에 따라 그 용례만 보이기로 한다.

2.1.8.1. 주체높임 ‘-시-’

영속샤〈1ㄱ〉  가시다가〈1ㄱ〉  보시고〈1ㄱ〉

절시거〈1ㄱ〉  스이시고〈1ㄴ〉  아비시니〈1ㄴ〉

절시니잇고〈1ㄴ〉  니샤  〈2ㄱ~ㄴ, 3ㄴ, 11ㄴ, 17ㄴ, 22ㄴ, 23ㄴ, 24ㄴ, 26ㄴ〉

사실 제〈3ㄱ〉  니시〈17ㄱ, 22ㄱ〉

합계 19례(중복 어절수 제외 10례)

2.1.8.2. 객체높임 ‘--’

‘이 문헌’에서는 ‘--’과 ‘--’은 그 변천된 형태가 각 1례씩, ‘--’은 2례, 합계 4례가 전부이다.

갑소오리잇고〈17ㄴ〉  아오니〈17ㄴ〉

받고〈19ㄱ〉  듣고〈26ㄴ〉  합계 4례.

2.1.8.3. 상대높임 ‘-/-’

이 이형태의 두자음(頭子音)이 ‘ㆁ’(옛이응)인 ‘--’는 후음의 ‘ㅇ’으로 대체된 ‘-이/잇-’형이 아래와 같이 쓰였다.

절시니잇고〈1ㄴ〉  알리잇가〈3ㄱ〉  가리잇고〈3ㄴ, 24ㄴ〉

죄인니로소이다〈17ㄴ〉  갑소오리잇고〈17ㄴ〉  갑오리잇고〈22ㄱ〉

엇뎌니잇가〈26ㄱ〉  아니호리이다〈26ㄱ(3)〉

-계 11례(‘-이-’ 4례, ‘-잇-’ 7례)

이 글에서 어말어미를 따로 논한 부분이 없어서, 여기 선어말어미 ‘-잇-’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종결어미 ‘-가/고’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다. 위에 보인 바와 같이 ‘이 문헌’에 쓰인 ‘-가/고’는 모두 7회 쓰인바, 모두가 의문사와 호응되는 ‘-고’가 쓰일 자리에 ‘-가’가 2회 쓰인 것을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다. 이미 15세기 중엽에도 드물긴 하지만, 설명의문에 판정의문의 ‘-가’가 있다. ‘世尊하 내 어미 五百僧齋호 화락천에 엇더 업스니가’〈월석 23:68ㄴ〉. ‘이 문헌’에서도 그런 드문 예외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달리 보아야 할 것인가를 짚고 가야겠다. 그런데, 근대국어에서는 문제의 ‘-가/고-’를 그 변별적 기능이 소실된 것으로 보고 있다(류성기 1997:84). 따라서 ‘이 문헌’에 쓰인 ‘의문사’ ‘-가’는 ‘-고’와 구별되어 쓰인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그 소실과정의 한 단면을 보인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2.1.8.4. 의도법 ‘-오/우-’

이 선어말어미로 목적격 활용으로서 관형사형에 개입되는 경우는 나타나지 않고, 다음 예문에서처럼 서술어에 쓰인 것만 나타나는데 주어 1인칭 활용어미로서 ‘-오/우-’가 나타난다.

졀노라〈2ㄱ〉  닐오리라〈3ㄴ, 17ㄴ〉

(저허)노라〈7ㄱ〉  괴노라〈8ㄴ〉

싯노라〈9ㄴ(2)〉  노라〈9ㄴ〉

아니호리이다〈26ㄱ(3)〉  경이라 노니〈26ㄴ〉

-계 12례

선어말어미에 속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명사형어미 ‘-옴/움’에 개입하는 ‘-오/우-’의 예를 간단히 정리하기로 한다. ‘이 문헌’에 쓰인 명사형 어미는 ‘-ㅁ/음/옴/움’의 네 가지 이형태인데, 그 쓰인 횟수는, ‘-ㅁ’(12개), ‘-음’(1개), ‘-옴’(9개), ‘-움’(1개)이다. 전통적인 용법의 ‘-옴/움’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 ‘-(으)ㅁ’으로 정리되는 것의 용례는 13례이므로, 그만큼 15세기 국어의 활용 형태로부터 새로운 형태로 동요되어 가는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한 가지 더 언급해 둘 것으로 명사형 어미 ‘-디’가 있다. 이는 15세기 당시에도 드물게 쓰인 것으로 ‘이 문헌’에서는 꼭 한 번의 용례가 있다. 다음 인용 끝줄에 *표를 한 것이다. 여기 ‘ 뵈디 붓그려’는 ‘남에게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또는 ‘남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명사형 어미 ‘-옴/움’과 ‘-디’를 정리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나호매〈3ㄴ〉  머그모로〈3ㄴ〉  (이 몸이) 나〈6ㄱ〉  니믜〈7ㄱ〉

드리우미〈7ㄱ〉  머굼고〈7ㄱ〉  흘로미〈7ㄴ〉  깃브미〈7ㄴ〉

셜우미〈7ㄴ,8ㄱ〉  편안호믈〈8ㄴ〉  여희믄〈10ㄱ〉  여희미〈10ㄱ〉

홈〈10ㄱ〉 가미〈10ㄴ〉  그초믈〈11ㄱ〉  구조미〈12ㄱ〉

믈〈12ㄴ〉 노로미〈14ㄴ〉  싸홈며〈15ㄱ〉  머기믄〈16ㄱ〉

보고자 호믈〈17ㄱ〉 셜오미〈23ㄴ〉  합계(중복 포함) 23례.

* 뵈디 붓그려 구짓고 소기니라〈15ㄴ〉

2.1.8.5. 감동법 ‘-도/돗/옷/ㅅ-’

‘이 문헌’의 선어말어미 중에서 같은 기능의 선어말어미가 겹쳐 통합되는 경우에 대하여 살펴본다. ‘-()ㅅ도-/-()옷도-’ 용례들을 ‘이중감동법’이라 하는데(이승희 1996:76), 그 예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와 ‘-돗-’은 서술격조사 ‘이-’나 선어말어미 ‘-리-’ 뒤에서 ‘-로-’와 ‘-롯-’으로 변동된 것으로, ‘-도-’와 ‘-로-’는 합해서 14회, ‘-롯-’ 1회이다. 이것은 결국 단일 형태의 감동법 선어말어미는 15회 쓰인 셈이고, ‘-ㅅ도-’와 ‘-옷도-’의 이중 형태 감동법 선어말어미는 18회 쓰인 것이다. 단일 형태와 이중 형태의 선어말어미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그 감동의 세기가 더한 것인가는 좀 더 고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도 이중 형태의 선어말어미가 근대국어에서 계승되지 못한 것을 보면, 한 기능의 같은 형태가 여럿 쓰인다는 것은 복잡성을 더하는 것으로 합리적이지 못한 면이 있으므로, 가능하면 ‘한 기능:한 형태’의 대응이 되도록 쓰이는 방향으로 단순화 되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16세기 중엽의 감동의 선어말어미 ‘-ㅅ도-, -옷도-’의 이중 형태는 ‘-도-’로 단일화가 되기 전의 일시적 현상으로 보인다. 참고로 근대국어에서는 ‘-도-’만이 감동법의 선어말어미로 쓰였다(류성기 1997:84).

-도-13회-ㅅ도-10회
-로-1회-옷도-8회
-롯-1회
15회18회

※‘-도-’와 ‘셜다’를 제외한 이중 형태의 분석만을 해당 예의 오른편에 보인 것임.

드도다〈6ㄴ〉  니섯도다〈9ㄱ〉  -ㅅ도-

여도다〈6ㄴ〉  ()-ㅅ도-  놋도다〈9ㄱ〉  ()-옷도-

도다〈6ㄴ〉  ()-ㅅ도-  손놋도다〈9ㄴ〉  ()-옷도-

잇도다〈6ㄴ〉  셜다〈10ㄱ〉  *(셟-)-도-

엿도다〈7ㄱ〉  -ㅅ도-  잇도다〈10ㄱ〉

듯도다〈7ㄱ(2), 7ㄴ〉  흐놋다〈10ㄱ〉  ()-옷도-

여럿도다〈7ㄴ〉  -ㅅ도-  애긋도다〈10ㄱ〉  ()-ㅅ도-

도다〈7ㄴ, 8ㄱ〉  어렵도다〈10ㄴ〉

놋도다〈7ㄴ〉  ()-옷도-  아녀놋다〈10ㄴ〉  ()-옷-

그지업도다〈8ㄱ〉  누웟도다〈10ㄴ〉  -ㅅ도-

아니도다〈8ㄱ〉  -ㅅ도-  구치도다〈10ㄴ〉  ()-ㅅ도-

누이놋도다〈8ㄴ〉  ()-옷도-  업도다〈11ㄱ〉

둡놋도다〈8ㄴ〉  ()-옷도-  조차갓도다〈11ㄱ〉  -ㅅ도-

즐겁도다〈8ㄴ〉  아니놋다〈13ㄴ〉  ()-옷-

가지로다〈9ㄱ〉  죄인니로쇠이다〈17ㄴ〉  -롯-

2.1.8.6. 현재 시상 ‘-/ㄴ-’

이 선어말어미 ‘-/ㄴ-’은 ‘이 문헌’에서 유일하게 쓰인 것이다. ‘--’에서 ‘ㆍ’가 준 것으로는 16세기 초엽의 〈번역박통사, 1517〉, 〈번역소학, 1519〉 등에서 내포문에서 이 ‘-ㄴ-’이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는 아래 예문과 같다. 한 장의 앞뒤를 두고 같은 형식의 서술어에 ‘다’와 ‘다’가 공존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전자의 ‘--’가 후자의 ‘-ㄴ-’으로 변화하리라는 조짐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구형 속에 개신형이 이미 ‘이 문헌’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라 하겠다.

어미 주려도 양 아니다〈8ㄱ〉

어미 편안호믈 구티 아니다〈8ㄴ〉

2.1.9. 사동접미사

여기 나타난 사동접미사는 모두 6례로 ‘-이-’ 한가지만이 쓰였다. 특별히 논의할 만한 것이 없지만 용례를 다음에 제시한다.

누이놋도다〈8ㄴ〉  -이-

머기〈8ㄱ〉  -이-

머기고〈8ㄴ〉  -이-

거스려〈13ㄴ〉  -이-

더러이며〈15ㄱ〉  -이-

머기〈16ㄱ〉  -이-  합계 6례

2.1.10. 피동접미사

이와 관련된 예는 모두 3개가 나온다. 어간 ‘감기-’는 ‘감-+-기-’로, ‘가티-’는 ‘갇-+-히-’로, ‘불이-’는 ‘불-+-이-’로 분석된다.

감겨〈14ㄴ〉  -기-

가티며〈14ㄴ〉  -히-

(람)불여〈14ㄴ〉  -이-

※ 피동접미사 ‘-이-’ 1, ‘-히-’ 1, ‘-기-’ 1.  합계 3례.

Ⅴ. 어휘

여기서는 ‘이 문헌’에 나타난 어휘에 대하여 조사해 제시하고자 한다. 문헌의 본문이라고 해 보았자 26장밖에 되지 않으며, 특수 지식인층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반 독자들을 전제로 한 내용이므로 거론할 것이 많지 않다. 거론할 어휘 자료는 고어사전에 표제어로 실리지 않았거나, 실렸다 해도 그 예문이 좀 드문 것 등을 조사·보고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어휘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 해당 단어가 들어있는 한문 대목을 옮기고, 다음으로 ‘이 문헌’의 한문 완역본인 용주사판본(1796)의 해당 부분을 대응되게 인용하여 참고토록 하였다. 이와 함께 한글로 표기된 언해문의 단어 1~17) 항이 끝난 뒤에 ‘이 문헌’에 쓰인 한자어 전부를 제시하였다. 표제어가 동사(동작·상태)일 경우는 ‘Vstem+-다’ 형으로 제시하고, 품사범주와 단어의 의미 순서로 제시한다. 이때 의미는 해당 출처의 한문과 언해문의 문맥, 그리고 국어 문헌 자료에 나타난 다른 용례들을 참고하여 추정하였다.

1. 하젼되다 : (형) 방자하다.

녀이 디 하젼되오 미 음니(女人在世 恣情婬欲)〈은중 3ㄱ〉

계집은 셰샹의 이실 에 음난 욕심에 을 방이 며〈용주 은중 5ㄴ〉

이 형용사는 〈이조어사전〉과 〈교학 고어사전〉에만 실려 있는데, 이 대목의 용례 외에 다른 것은 실려 있지 않다. 언해문의 대본인 한문에 한자 ‘恣’ 자와 〈용주사본 은중경언해〉에서 “방이 며”가 있으므로, 그 문맥을 참고하여 뜻을 ‘방자하다’[恣] 정도로 파악하였다. 그 구성은 ‘어근+되-(접미사)’의 형식으로 분석되지만, 그 어근인 ‘하젼’의 어원이 분명치 않다. 혹 16세기 전기의 ‘하뎐(下典)’과 관계가 있고, 그것이 구개음화를 겪어 ‘하젼’이 되고, 거기에 ‘되-’(〈-외다)가 결합한 형용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만 확인된다면, “하인(=종)처럼 제멋대로 노는 태도가 있다” 정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뎐(下典)〉하젼’으로 ‘典’이 구개음화한 한자어임을 증명해야 하는데, 주018)

仇音方은 禮賓寺 하뎐이라〈1514, 속삼, 열:16ㄱ〉. 구음방이 례빙시 하뎐이라〈1617. 동국신속_삼강, 열녀:8ㄴ〉
16세기 전라도 방언 한자음 자료가 적어 그것을 증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

2. 님다: (동) 임당(臨當)하다. 임박하다.

여 열  디나니 나 시 님도다(懷經十箇月 産難欲將臨)〈은중 7ㄱ〉

식 연지 열 만에 산 어려오미 쟝 님고〈용주 은중 13ㄱ〉

이 동사는 고어사전들에 모두 실려 있으며, 1항과 같이 유일한 예로 실었다. 한문의 ‘임(臨)’ 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 중에 ‘맞다’[迎], ‘그 일에 당하다’도 있고 문맥도 그러하므로 ‘임당하다, 임박하다’로 푼 것이다. 다만 어근 ‘님’은 한자어 ‘림(臨當)’에서 당시 국어의 두음규칙에 따라 ‘ㄹ→ㄴ’으로 반영된 것이다. 이에 대한 〈용주사본〉은 한문을 그대로 옮겨 ‘장 님고’로 한 것도 무방하다고 본다.

3. ?다: (형) ‘?친하다’에 대한 방언 이형태.

셜운 믈 머굼고 ?호온  권려 닐오 주글가 너겨 저허노라(含悲告親族 惟懼死來侵)〈은중 7ㄴ〉

ㄱ) 화장사판본(1553) 온  권려 닐오〈7ㄴ〉

ㄴ) 세심사판본(1563) 칭호온  권당려 닐오〈 ʺ 〉

ㄷ) 송광사판본(1563) ? ?은  ? ? 려 닐오〈 ʺ 〉

ㄹ) 기방사판본(1592) 친호온  권당려 닐오〈 ʺ 〉

ㅁ) 용주사판본(1796) 친족[결네라]의게 고니〈13ㄴ6〉

ㅂ) 화암사판본(1441) 칭혼  권당려 닐오(필사본)〈6장〉

이 부분은 복사본으로 보아서 글자 모양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표를 해 놓았다. 필자가 이용할 수 있었던 후대의 복각본이나 자료는 ㄱ)-ㅂ)과 같은데, ㅁ)을 제외한 그 밖의 판본은 각각 ‘온, 호온, 호온, 혼’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하면 불가불 ‘친-’를 상정할 수밖에 없어 ‘-’로 복원하고, 이는 간행지인 전라도 전주·완주 지방의 방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다: (동) 배(倍)하다. 갑절이 되다.

나코 아기 건실타 니 깃브미 더옥 도다(生已聞兒健 歡喜倍加常)〈은중 7ㄴ〉

은니 기프니 다시 슬프고 셜우미 도다(恩深復倍悲)〈은중 8ㄱ〉

나키 다매 아 건장믈 듯고 즐거우며 깃브기 샹시에셔 나 도다〈용주 은중 8ㄱ〉

은혜 깁프매 다시 나 슬퍼도다〈용주 은중 15ㄱ-ㄴ〉

어근이 한자어 ‘倍’로 된 이 동사는 고어사전에는 한글로 된 자료는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예문에서 보듯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 문헌’에 나온 예가 정음 표기로는 가장 오랜 것으로 보이며, 15세기 자료 및 17세기 『가례언해(1632)』에서도 ‘倍-’를 비롯하여 파생부사 ‘倍히’ 등 한자로 표기된 예가 여러 개 발견된다. 따라서 새로 엮을 고어사전에서는 한자 표기는 물론이고 ‘이 문헌’과 같은 정음 표기도 표제어로 등재해야 할 것이다.

*녜 고매셔 倍터니 諸梵天王이 各各 너교…〈월석 14:19ㄱ〉

*東 녀긔   바리 이쇼 그 苦ㅣ  倍니…〈월석 21:26ㄴ〉

*戒 닐오 比丘戒 二百五十이니 尼 倍니라 律을 니시고…〈능엄 6:19ㄱ〉

*보로 寰中에 布施호미 福이 녜 예셔 倍니 고지 錦 우희 開니…〈금삼 4:32ㄱ〉

*이긔 일 히 잇니 네 갑 倍히 주리라 라〈월석 13:19ㄴ-20ㄱ〉

* 자 여 치 되니 이 닐온 바  倍다  者ㅣ이라〈가례 6:7ㄴ〉

5. 손다: (동) 손상(損傷)하다. 상해 가다.

식 기 은니 기프니 고온  사오나이 되오 싯노라 니 반룡이 손도다(恩深摧玉貌 洗濁損盤龍)〈은중 9ㄴ〉

은혜 깁허 옥 얼골이 것거지니 가싀여 반룡이 샹도다〈용주 은중 18ㄱ〉

이 동사는 〈교학 고어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그런데 표제어를 ‘:손〮다〮’로 하고 예문은 모두 한자로 쓰인 것을 올려놓았고, 정음으로 표기된 예로는 『박통사 하(1677)』가 있다. 이것은 현재 발견되지 않은 1517년 이전의 『번역박통사 하』에도 17세기 자료와 마찬가지로 정음 표기로 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방점을 재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방점은 확인할 수 없지만, ‘이 문헌’의 예로써 16세기 중엽에도 정음 표기로 쓰인 예가 있었다는 증거는 확보된 셈이다.

*衆生이 常住를 侵勞야 損커나[常住는 뎘 거시라] 僧尼 더러거나〈월석 21:39ㄴ〉

*뎌 觀音 念혼 히므로 능히  터럭도 損티 몯며〈법화 7:88ㄱ〉

*시혹 酒色애 잇버 損커나〈구급 상:59ㄴ〉

*사 一萬을 죽이면 스스로 三千을 손다 니라 뎌 구 리아〈박통, 1677, 하:25ㄱ〉

6. 브효다: (동) 불효(不孝)하다.

 믈 아니며 은 리며 더글 더디고 브효니라(不生恭敬 棄恩背德 無有仁慈 不孝不義)〈은중 11ㄱ~12ㄱ〉

공경믈 지 아니여 은혜 리고 은혜 반며 인미 업서 불효고 불의니〈용주 은중 25 ㄱ-ㄴ〉

불효믈〈용주 은중 43ㄱ〉

‘브효’는 한자어 ‘不孝’의 정음 표기로서, 15세기 정음문헌에는 한자에 동국정운 한자음을 달아 ‘不·孝·’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문헌에 나오는 ‘不孝’에 대한 정음 표기는 아래 예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브효’ 또는 ‘븨효’〈장수경언해 75ㄱ~ㄴ〉로 반영되어 있어 특이하다. 16세기 당시 현실음은 ‘不블’이 본음이지만, 16세기 중엽 〈장수경언해〉의 경우에서는 ‘孝효’를 비롯하여 ‘能릉, 調됴’와 결합한 한자어에 한해서는 ‘不 블〉브’로 ‘ㄹ’이 탈락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주019)

참고로 〈장수경언해〉의 예를 제시한다. 不惜身命(블셕신, 27ㄱ3), 不能轉讀(브뎐독, 72ㄱ1)/終不能變(블변, 21ㄱ4), 不孝(븨효, 75ㄱ~ㄴ)/不行(블, 16ㄴ7), 水旱不調(슈한브됴, 63ㄱ6), 終不至死(블지, 44ㄴ2) 등. 〈장수경언해〉의 ‘븨효’는 ‘브효’에 대한 변이음으로서 활음 ‘j’가 제1음절에 첨가되어 ‘ㅣ’하향중모음화한 것을 표기에 반영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심은주(2003) 참조.
이것은 현대 한자음에서 ‘不불’이 ‘ㄷ, ㅈ’ 위에서 ‘부’로 실현되는 것과는 환경이 다르며 규칙화하기도 어렵다. ‘이 문헌’에서 ‘브효’(12ㄱ)로 나타나고, 그 밖에 1518년 『번역소학』과 『정속언해』에도 ‘브효’로 표기되었다. 이것은 ‘不孝’에 대한 16세기 전반기 조선 한자음이 ‘브효’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18세기 『어제경세문답, 1761』에는 다시 ‘블효’로, 한편에서는 원순모음화한 ‘불효’도 『지장경언해, 1752?』 쓰여 현재에 이른다.

*다가 有情히 不孝 거나〈석상 9:38ㄱ〉.

감히  마 내여 브효앳 이를 아니니〈번소 7:42ㄱ〉

그 죄 브효만 크니 업스니라〈정속 2ㄴ〉

어믜 녀글 듕히 아니 너기면 그 어미를 브효 디오〈정속 11ㄴ〉

그 삼강의 효험이 업니 진실로 나의 블효미오 진실로 나의 블쵸미라〈경문 3ㄱ〉

*다가 즁이 부모 불효며 혹 살해호매 니로면 반시 무간옥애 러뎌〈지장 상:18ㄱ〉

*질병을 근심치 아님도 불효요 형졔 친쳑을 박게 도 불효라 야〈계녀서〉

7. 셕: (명) 성정(性情). 성. 노기(怒氣).

부뫼 치고 얼운니 뒤덥거든 졈졈 라면 거스려 화동티 아니여 도혀 셕내니라 친 버드란 리고〈은중 13ㄴ〉

父母訓罰 伯叔語非 童幼憐愍 尊人護 漸漸長成 狼戾不調 不伏虧爲 返生嗔恨 棄諸親友朋 부뫼 치며 벌고 아자비 그르다 니 거시어 어린 거시라 야 어엿버며 블샹이 넉여 어룬이 둣덥허 뎜뎜 라매 모질고 패려고 슌차 아니여 그르믈 항복지 아니고 도로혀 분을 내여 모든 결네와 벗을 리고〈용주 은중 27ㄴ~28ㄱ〉

이 명사는 고어사전에 실린 유일한 예인데, 뜻은 『이조어사전』에는 성정(性情)으로, 『교학 고어사전』과 『우리말큰사전』은 같으면서도 전자는 ‘성. 노기(怒氣)’로, 후자는 ‘성. 노기’로 표기한 것이 다르다. 『17세기국어사전』에도 다루지 않았으며, 그 당시 문헌을 검색해 보아도 다른 예는 보이지 않는다.

8. 겨집다: (동) 혼인하다.

타의 나가 부모도 리며 집도 여희오 여러  디나면 겨집야 오래 드러오디 아니니라(被人誘進 逃竄他鄕 違背爺孃 離家別貫 或因經紀 或爲征行 荏苒因循 便爲婚娶 由斯留碍 久不還家〈은중 14ㄱ〉

사의 이물 닙어 타향에 도망여 아비와 어미 반고 집을 나고 고향을 니별며 혹 쟝질도 고 혹 길 가기도 며 그리저리  이에 문득 혼인고 댱가드러 일노 말믜아마 머물고 걸리여 오래 집의 도라오지 아니며〈용주 은중 28ㄴ〉

이 동사는 흔히 볼 수 있는 용례는 아니다. 시대적으로 빠른 것은 16세기 초반 ‘겨집야도’〈이륜 9〉, ‘겨집야’〈번역소 9:67〉이고, 그 다음이 ‘이 문헌’의 예이며, 그 후로는 17세기의 〈현풍곽씨언간, 16세기 중엽〉 정도에 보인다. 이는 고유어로서 그 쓰임의 세력을 넓히지 못하여, 정음 창제 초기문헌의 『석보상절』 이래 한자어 ‘婚姻다’가 우세하게 쓰이다가 현대국어에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석보상절』의 ‘주’는 ‘혼인(婚姻)’이라는 글자의 뜻을 풀이해 놓고 있어 참고할 만한다.

*須達이  무로 婚姻 위야 아미 오나....〈석상 6:16ㄴ〉

*사회녀긔셔 며느리녁 지블 婚이라 니고 며느리녀긔셔 사회녁 집을 姻이라 니니 가들며 셔 마조 婚姻이라 니니 가들며 셔 마조 다 婚姻다 니라〈석상 6:16ㄴ주〉

아바님게 유무니 풍난의 겨집여 이라 여 겨시니〈곽씨 86-6〉

9. 간슈다: (동) 간수(看守)하다. 보살펴 지키다.

被人謀点橫事勾牽 枉被刑責牢獄 枷鎖或遭病患厄難縈纏 困苦飢嬴? 無人看侍被他嫌賤倚棄街衢 죄 니버 옥긔 가티며 야 주려도 간슈리 업스면 미 쳔히 너겨 거리예 더디니〈은중14ㄱ~ㄴ〉

사의 물 닙어  일에 걸니이여 원통이 형별을 닙어 옥의 칼 여 기이여 혹 병이 드러 과 어려오미 얼키이여 곤고 괴롭고 주리고 여위여 사이 보펴 주리 업스며 남의게 나모라고 천히 넉이물 닙어 길거리에 려〈용주 은중 29ㄱ〉

藥과 病 간슈리 업거나 醫 맛나고도 왼 藥 머겨 아니〈석상 9:36ㄱ〉

保 간슈씨라〈삼강 열:1〉

攝衛 몸 간슈씨라 (주 줄임) 내 뎌 알 婆羅門 모...〈능엄 6:16ㄴ〉

攝衛 자바 간슈씨라 (주 줄임) 比丘 比丘尼 優婆塞...〈법화 7:77ㄴ〉

念念에 녜 제 精進야 一心으로 간슈야〈금강 83ㄱ〉

젼로  내야 經營야 得을 求며 간슈야 몸과  이디 아니호미〈원각 상2-2:117ㄱ〉

保 간슈씨라〈삼강 런던 열:1〉

형뎨 서르 내 죽거지라 토온대 도기 갈 간슈고 닐우 두 분니 어딘 사미어〈이륜 옥산:9ㄱ〉

이는 고어사전들에 모두 표제어로 올라 있다. 그 음으로만 본다면 한자어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나, 『석보상절』에서부터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금강경(언해)』, 『원각경(언해)』 등의 불경언해와 『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등에 이르기까지 정음으로만 표기되어 현대어에 이르게 된 것이다. 『17세기국어사전』에도 실리고, 근래의 『한국어대사전, 2009』에는 ‘간수(看守)하다’로 올려놓았다.

위 예문의 쓰임을 본다면, 대체로 “보살펴 잘 지키다” 정도의 뜻으로 이해한다.

10. 구의다: (동) 구하여 치료하다. 구원하다.

被他嫌賤倚棄街衢 因此命終無人救療 쳔히 너겨 거리예 더디니 인야 주거도 구의리 업서 오장이 서거 볃 며〈은중 14ㄴ〉

남의게 나모라고 쳔히 넉이물 닙어 길거리에 려 일노 인여 목숨이 매 사이 구리 업서〈용주 은중 29ㄱ〉

이 ‘구의다’는 ‘구의리’[←구의-+ㄹ#이+Ø]에서 분석된 동사로서, 한문의 ‘구료(救療)’에 대응된다. 이 단어의 뜻은 『이조어사전』과 『교학 고어사전』에서는 ‘치료하다’로, 『우리말큰사전』에서는 ‘구원하다’로 한 것이 다르다. 『17세기국어사전』에는 표제어에 올라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계승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단순한 ‘치료보다’는 한자 뜻대로 “구하여 치료하다”가 적합하다.

11. : (부) 영영(永永). 영원히.

부모의 믄  렴야 혹 우다가 눈 멀며(父母心隨 永懷憂念 或因啼泣眼闇目盲)〈은중 14ㄴ〉

*부뫼 이 라가 기리 근심과 년려 품어 혹 피 나록 우러 눈이 어두어 멀며 혹...〈용주 은중29ㄴ〉

여기 ‘영영’은 한자어로 현대어에도 쓰이는 것이나, 굳이 들어 놓는 것은 『이조어사전』, 『교학 고어사전』에 표제어로 실려 있어도 그 용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초역본은 원문의 ‘永’ 자를 ‘’으로 풀이했으나, 용주사본은 고유어 ‘기리’로 한 것이 다르다. 15·16세기 국어에서 이 부사는 ‘이 문헌’의 이 대목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접미사 ‘-히’를 결합하여 ‘永히, 永永히’ 또는 ‘영영히’로 쓴 용례는 15·16세기 문헌에서는 물론이고, 17세기에도 보인다. 『17세기국어사전』에는 표제어로 ‘영영’과 ‘영영히’를 따로 올려놓았다.

*오로브터 永永히 너와 원슈디 아니호리라 니고〈관음경(1485) 11ㄴ〉

*滅相은 生死ㅣ 永히 다씨니 〈월석 13:54ㄱ〉

아 영을 닐러 시병라코 드듸여 영영 니별코 가니 드 사이 감탄더라〈동신충(1617) 1:23ㄴ〉

히 긴 슈고 마 좌 긔약야 히 욕낙 져룔 디니라〈초발(1577) 발심34ㄱ〉

히 그 집 나 구실을 더르시다(永蠲其家丁役)〈선조소학(1588) 6:61〉

희두탕은 아기를 모욕 기면 히 역 아니 니라 〈두창(1608) 상:6ㄴ〉

12. 슈히: (부) 수상(殊常)히.

머글 것 다가 어버시 머기 붓그레 너기니  슈샹히 너겨 웃니라 쳐식 머기믄 더럽고 바도〈은중 16ㄱ〉

應賫(=齎)饌物 供養尊親 每詐羞慙 異人恠笑〈은중 15ㄴ〉

응당 음식을  가져 어버이 공양기 양 븟그려 야 다른 사이 괴이히 녁이고 우슬가 며〈용주 은중 31ㄴ〉

이 부사는 고어사전에 형용사 ‘슈다’와 같이 다 실렸는데, 이 두 단어가 모두 유일한 예문으로 실려 있어 드문 용례로 판단해 예로 든다. 그 밖에도 아래에 제시한 것과 같이 16세기의 〈순천김씨언간〉에도 발견된다. 이것도 어근 ‘슈’이 한자어일 가능성이 있어 그 뜻을 고려하여 “보통과는 달리 이상하여 의심스럽다”를 뜻하는 ‘殊常-’ 또는 그 파생부사 ‘殊常히’를 15세기 국어문헌에서 찾아보았으나 발견되지 않는다. 문헌상으로는 16세기부터 20세기 초기 문헌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나며, 한자로 표기된 ‘殊常’은 용례가 거의 없다. 따라서 이를 보기 드문 것으로 보아 제시한다. 주020)

<용례>以鎌閉目이라 殊常매 左道 긔별이 이신 후 믿처 오오리〈인어대방(1790) 6:5ㄴ〉.

제 지 더뎌 두리라 고 누의 슈샹히 맛당이 아니 너기고 〈순천 28:6〉

13. 감심히: (부) 마음에 달게(=기꺼이) 여겨.

남지 티고 구지저도 고 감심히 너기니[夫婿打罵 忍受甘心] 〈은중 16ㄴ〉

지아비 치고 짓 거 참고 바다 에 달게 넉이며〈용주 은중 32ㄱ〉

*시운이 이에 니니 주거도 실로 감심노니(時運至此 死實甘心)〈동신삼 열:78ㄴ〉

이 부사도 『교학 고어사전』에만 유일한 용례로 실려 있으며, 이에 앞서는 15세기의 한자 용례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 부사를 파생시킨 용례가 ‘이 문헌’보다 시대가 늦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617』에도 나와 예문으로 들어 놓았다. ‘감심(甘心)’의 뜻은 『한한대사전』에는 “① 마음으로 항상 생각하는 일. ② 뜻대로 함. ③ 그런대로 만족함.” 등으로 풀이했는데, 여기서는 직역한 용주사판본과 같이 “마음에 달게 여겨, 마음으로 기꺼이 여겨”로 풀이한다.

14. 미가다: (동) (아직) 시집가지 아니하다.

 시기 미가여셔 다 효도다가 혼인 후의 브효니 〈은중 16ㄴ〉

或復是女 通配他人 未嫁之時 咸皆孝順 婚嫁已訖 不孝遂增〈은중 16ㄱ〉

혹 다시 이 다른 사의게 필되면 혼인 아니하여실 에 다 효도롭고 공슌다가 임의 혼인매 불효기 드여 더야〈용주 은중 32ㄱ〉

이 ‘미가-’는 한문의 “未嫁之時”의 ‘未嫁(미가)’에 대응되는 번역으로서, 어근은 한자어 ‘未嫁(미가)’이지만, 15-16세기 국어의 언해문에는 ‘未嫁’는 발견되지 않는다. 고어사전에는 전혀 표제어로 싣지도 않았고, 정음 표기로는 ‘이 문헌’의 이 대목이 가장 빠른 셈이다. 또한 현대의 국어사전에도 명사 ‘미가녀(未嫁女)’는 나와 있으나, ‘미가하다’는 실려 있지 않다. 16세기 중기에 전주·완주 지역에 살던 언해자에게는 한자어로 인식되어 사용했다면, 결국 국어 어휘사에서 이 단어는 사어(死語)가 된 셈이다. 『17세기국어사전』에 실려 있으며, 앞으로 고어사전을 만들 때에는 표제어로 올려야 할 것이다.

15. 교슈: (명) 교수(敎授). 학문이나 기예(技藝) 등을 가르침.

뎨 대과 모 사미 다 각각 발원호 이 모 텨 듣글민(만) 너겨 쳔 겁 디나도 부텨의 교슈 닛디 아니호리이다 혀 여 내여 잠기로 가라 피 흘러 내히 되어도 부텨의 교슈 닛디 아니호리이다〈은중 26ㄱ〉

是諸大衆 聞佛所說 各發願言 我等 盡未來際 寧碎此身 猶如微塵 經百千劫 誓不違於如來聖敎 寧以百千劫 拔出其舌 長 百由旬鐵犂耕之血流 成河誓不違於如來聖敎 〈은중 25ㄴ〉

여 치믈 어긔지 말으리이다〈용주 은중 46ㄴ〉, 치시믈〈47ㄱ(2), 47ㄴ〉, 치시물〈47ㄴ〉

*부텻 敎授 듣[敎授는 쳐 심길씨라] 各各 큰 盟誓야〈석상 6:47ㄴ〉

‘교슈’는 이 한문 ‘如來聖敎(여래성교)’의 언해문인 ‘부텨의 교슈’에 나오는 단어이다. ‘교슈’가 한자어임은 『석보상절(1447)』의 용례 ‘부텻 敎授’와 ‘敎授’에 대한 협주 “敎授는 쳐 심길씨라”를 통해 확인된다. 오늘날에는 보통 “① 학문이나 기예를 가르침, ② 대학에서, 전문 학술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내는데 『표준국어대사전』, 여기서는 ①과 관련된 뜻으로 풀이된다. 위 본문의 ‘교슈’는 한문에 5번이나 되풀이되나, ‘이 문헌’은 ‘초역’이므로 세 번만 옮겼으며, ‘완역’인 용주사판본은 다섯 번 중에서 ‘가르치심’(4회) 또는 ‘가르침’(1회)으로 풀이하였다. 따라서 위의 ‘교슈’는 ‘가르치는 사람’보다는 ‘가르침’ 그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

16. 녜도다: (동) 예의(禮儀)와 법도(法度)를 표하다. 절하다.

뎨 다 부텨의 말솜 듣고 깃거 녜도고 믈러 와 니라(尒時 大衆天人阿修羅等 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 作禮而退)〈은중 26ㄴ〉

이 모든 뎨와 하 사과 인간 사과 아슈라 등이 부쳐의 말 바 듯고 다 크게 즐기고 깃거야 미더 바다 밧들어 여 녜를 베프고 믈러나다〈용주 은중 48ㄴ-49ㄱ〉

*유덕 일와 례도로 슝더니 이 복야 좃더라(專尙德禮 夷民懷眼)〈속삼 충:3ㄱ〉

싀어버이 셤기미 졔하며 손 졉호미 다 녜도 잇니 샤득이 사롬 몯 이긔여〈삼강 중간, 동경:열19ㄱ〉

‘녜도다’는 한문 ‘작례이퇴(作禮而退)’에서 ‘작례(作禮)’에 대한 번역으로, 『이조어사전』과 『교학 고어사전』에는 표제어 ‘녜도’를 싣고, 〈속삼강행실도〉의 예문을 보인 다음 참조로 → ‘례도(禮度)’를 표제어로 삼아 이를 부연했다.

여기 ‘녜도’의 ‘녜’는 16세기 전통한자음 ‘禮례’가 두음 제약 현상으로 ‘례→녜’로 변동한 것이다. ‘이 문헌’보다 앞선 『속삼강행실도, 1514』에서는 한자도 제시하지 않고 ‘례도’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녜도다’는 한문 원문 ‘작례(作禮)’의 번역으로서, 15세기 정음문헌에서는 일반적으로 ‘저다’로 번역되었다. 주021)

예를 들어 〈법화경언해〉에서 구결문 ‘頭面禮足고’〈4:3ㄴ〉에 대하여 언해에서는 “頭面으로 바래 저고”〈4:4ㄱ〉로 대역되어 있다.
따라서 ‘녜도다’는 “예의와 법도를 표하다” 또는 “절하다” 정도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생각된다.

17. 아니다: (조동)(조형) 아니하다.

이 항목은 새로 나타난 희귀어도 아니고 고어사전에 실리지 않은 단어도 아니다. 이 어휘가 드물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사전 이용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 ‘아니다’에 대해서 처음 설명한 글은, 필자가 알기로는 『남명천계송언해』를 다룬 김영신(1988:212)이 아닌가 싶다. 간단하게 예문을 들고 ‘아니니라’와 ‘아니며’는 ‘아니니라:아니니라’와 ‘아니며:아니며’의 수의변동으로 파악하였다. 주022) 김영신(1988:212-3)에 제시된 예문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여기에 바른 예문으로 고쳐 둔다. 문제는 212쪽의 끝에서 둘째 줄 예문이다. “✩ 眞求티 아니니라(⟵ 아니니라) 3”로 되어 있는데 영인본을 찾아보니 ‘아니니라’는 ‘아니니’로 되어 있어서 여기에 맞는 예문이 될 수 없는 것임을 밝혀 둔다.

위에 밝힌 품사에 따라서 ‘이 문헌’의 예문도 아울러 제시한다.

ㄱ) 아니다 (보조동사) : 올매 올모매 이 道애 여희디 아니니〈법화 2:20ㄱ〉

ㄴ) 아니다 (보조형용사) : 至極디 아니  업거시〈능엄 1:3ㄱ〉

‘ㄱ’) 아닣다 (보조동사) : 엇뎨 모 觸디 아닌뇨〈능엄 2:114ㄱ〉

‘ㄴ’) 아닣다 (보조형용사) : 文勢ㅣ 그러티 아니타〈법화 5:213ㄴ〉

ㄷ) 아니다 (보조동사) : 부모의 은덕을 티 아니며〈은중 11ㄴ〉

  僧堂 여희디 아냐 節介 디니다〈선가 상:20ㄴ〉

ㄹ) 아니다 (보조형용사) : 阿難이 對答오 아니다〈능엄 1:54ㄱ〉

  븐 이 어미 편티 아녀 놋다〈은중 10ㄴ〉

이 예문을 보면, 굳이 이렇게 따로 설정할 것이 무어냐고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ㄱ’)와 ‘ㄴ’)은 ‘아니-’의 어간 말모음 ‘ㆍ’가 준 이형태 ‘아닣-’이 된 것이라 설명하고, ㄷ)과 ㄹ)도 ‘아니-’에서 어간의 ‘’가 준 이형태로 설명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ㄱ, ㄴ)만 표제어로 설정하고 나머지는 이형태로 처리하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관점으로는 거꾸로 ㄷ, ㄹ)에서 ㄱ, ㄴ)이 파생되고, ‘ㄱ’, ‘ㄴ’)은 여기서 어간 말모음이 준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15세기 당시에도 ㄷ, ㄹ)은 드물게 쓰여서 ㄱ, ㄴ)을 근거로 나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필자로서는 위 예문을 좀 간단히 하여 ㄱ)과 ㄴ), ㄷ)과 ㄹ)을 표제어로 두고 ‘ㄱ’)과 ‘ㄴ’)은 줄이자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한 것 이외에 역주에서 언급한 어휘에도, ㉠ 고어사전의 표제어로 제안 하는 것, ㉡ 일부 사전에만 표제어로 실려 있는 것, ㉢ 이미 고어사전에 실려 있으나, 정음 표기로 그 예가 문헌상 유일한 것 등을 다음에 들어 둔다.

 ㉠ 놋다(다)〈9ㄴ〉  심〈14ㄴ〉

 골코(곯다)〈16ㄱ〉  의종고(의다)〈16ㄱ〉

 말솜과〈13ㄴ〉  말소모로(말솜)〈17ㄴ〉  계 5개

 ㉡ 신고여도(신고다)〈10ㄴ〉  쳔히(賤히)〈14ㄴ〉

  이슥게(이슥다)〈17ㄴ〉  눔〈19ㄴ〉  계 4개

 ㉢ 싀권〈16ㄱ〉  우(運)〈18ㄴ〉

  우레[雷]〈23ㄴ〉  호야(호다)〈24ㄴ〉

  잠기로〈26ㄱ〉        계 5개

합계 14개

■ 붙임2 - 정음으로 표기된 한자어

‘이 문헌’의 언해 양식상의 특징은 한문 원문에 구결이 표시되지 않았으며, 언해문은 고유어든 한자어든 정음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전주·완주 지역의 한자음을 연구할 기초를 마련하고자 한자어로 분석되는 단어를 어절 단위로 장차에 따라 조사, 제시한다.

솔샤〈1ㄱ〉  인뉴의〈11ㄴ〉  젼혀(全)〈16ㄱ〉

아란과〈1ㄱ〉  〈11ㄴ〉  미가여서〈16ㄴ〉

아라니〈2ㄴ, 3ㄴ, 26ㄱ〉  은〈11ㄴ, 12ㄴ〉  효도다가〈16ㄴ〉

념불도〈3ㄱ〉  브효니라〈11ㄴ〉  혼인〈16ㄴ〉

녀이〈2ㄴ, 3ㄱ〉  식〈12ㄱ〉  후의〈16ㄴ〉

?하젼되오〈3ㄴ〉  슈괴〈12ㄱ〉  브효니〈16ㄴ〉

음니〈3ㄴ〉  탄티〈12ㄴ〉  부모〈16ㄴ〉

회티〈4ㄱ(3), 4ㄴ(3), 5ㄱ(2), 6ㄱ〉  슈고뢰여도〈12ㄴ〉  노여〈16ㄴ〉

녜도〈12ㄴ〉  감심히〈16ㄴ〉

한삼〈2ㄴ〉  혼인며〈12ㄴ〉  싀권으란〈16ㄴ〉

남의〈2ㄴ〉  신고호〈12ㄴ〉  소(疏)히〈16ㄴ〉

단하여〈2ㄴ〉  면〈12ㄴ〉  남진(조차)〈16ㄴ〉

뎨〈1ㄱ〉  부모도〈12ㄴ〉  부모〈16ㄴ〉  졉하고〈16ㄴ〉

샤의〈1ㄱ〉  편니라〈12ㄴ〉  문안〈17ㄱ〉

분(粉)〈2ㄴ〉  원니라〈12ㄴ〉  은(恩)과〈17ㄱ〉

샤〈2ㄴ〉  브효니〈13ㄱ〉  죄(罪)도〈17ㄱ〉

디혜〈5ㄱ〉  답며〈13ㄴ〉  뎨〈17ㄱ〉

졈졈〈4ㄴ〉  도〈13ㄴ〉  부모〈17ㄱ〉

효옛〈6ㄱ〉  슈욕야〈13ㄴ〉  은〈17ㄱ〉

간슈〈6ㄴ〉  버블〈13ㄴ〉  긔졀여〈17ㄴ〉

인연니〈6ㄴ〉  부모의〈13ㄴ〉  죄인니로소이다〈17ㄴ〉

오장이〈6ㄴ〉  교도〈13ㄴ〉  져(前)〈17ㄴ〉

님도다〈7ㄱ〉  형뎨의〈13ㄴ〉  셰존하〈17ㄴ〉

혼팀〈7ㄱ〉  시리〈13ㄴ〉  위야〈17ㄴ〉

긔졀고〈7ㄴ〉  부뫼〈13ㄴ〉  부모〈18ㄱ·ㄴ〉

건실타〈7ㄴ〉  화티〈13ㄴ〉  슈미산〈18ㄱ〉

도다〈7ㄴ〉  친〈13ㄴ〉  우〈18ㄴ〉

고〈7ㄴ〉  습이〈13ㄴ〉  은혜〈20ㄱ〉

간의〈7ㄴ〉  계고니라〈13ㄴ〉  브모의〈20ㄴ〉

양〈8ㄱ〉  타의〈14ㄱ〉  은덕을〈22ㄱ〉

은혜〈9ㄱ〉  부모도〈14ㄱ, 15ㄱ〉  죄인니라〈22ㄱ〉

혐의론〈9ㄱ〉  죄(니버)〈14ㄴ〉  부모〈22ㄱ〉

시글〈9ㄴ〉  야〈14ㄴ〉  을〈22ㄱ〉

반룡이〈9ㄴ〉  간슈리〈14ㄴ〉  져늬(前)〈22ㄴ〉

손도다〈9ㄴ〉  쳔히〈14ㄴ〉  죄〈22ㄴ〉

기()(改)놋도다〈9ㄴ〉  인야〈14ㄴ〉  복글〈22ㄴ〉

렴〈10ㄱ〉  오이〈14ㄴ〉  브효〈23ㄴ〉

진실로〈10ㄱ〉  타의〈14ㄴ〉  면〈23ㄴ〉

관산(밧긔)〈10ㄱ〉  〈14ㄴ〉  ()〈23ㄴ〉

일야의〈10ㄱ〉  렴야〈14ㄴ〉  죄이〈23ㄴ〉

일쳔〈10ㄱ〉  혹〈14ㄴ(3)〉  어〈23ㄴ〉

렴호〈10ㄱ〉  심이〈14ㄴ〉  오을〈23ㄴ〉

부뫼〈10ㄴ〉  효도란〈15ㄱ〉  젼의〈24ㄱ〉

산티〈10ㄴ〉  심케〈15ㄱ〉  브효던〈24ㄱ〉

은〈10ㄴ〉  좌의〈15ㄴ〉  경〈24ㄴ〉

내을〈11ㄱ〉  안부도〈15ㄴ〉  (城)〈23ㄴ〉

각고〈11ㄱ〉  탄니〈16ㄱ〉  디옥긔〈22ㄴ,23ㄴ,24ㄴ(2)〉

셰라도〈11ㄱ〉  슈히〈16ㄱ〉  슈고〈24ㄴ〉

이〈11ㄱ〉  쳐식〈16ㄱ〉  뎨〈26ㄱ〉

진야〈11ㄱ〉  의고〈16ㄱ〉  대과〈26ㄱ〉

각각〈26ㄱ〉  발원호〈26ㄱ〉  쳔〈26ㄱ(2)〉

겁〈26ㄱ(2)〉  교슈〈26ㄴ(3)〉  아라니〈26ㄴ〉

경〈26ㄴ(2)〉  아란〈26ㄴ〉  뎨〈26ㄴ〉

녜도고〈26ㄴ〉  봉니라〈26ㄴ〉

Ⅵ. 맺음말

1. 거듭 밝히지만, 이 역주본의 대본은 여승구님 소장의 ‘초역본-오응성 발문본(1545)’이고, 영인본의 저본(底本)은 신심사판(1563)의 인출(印出)본이다.[이 작업은 2011년 11월 11일, 안준영 선생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홍현보 선생, 안재응 총무부장의 수고가 컸음을 밝혀 두며, 신심사판의 결판(缺板)인 2장과 12장은 오응성 발문본 복사본으로 보충했음도 밝힌다.]

2. ‘이 문헌’은 언해본이면서도 한자 표기는 전혀 없이 정음으로만 이루어진 문장인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현재까지는 최초의 정음체 문장은 『이륜행실도(1518)』로 보고 있는데, ‘이 문헌’은 그보다는 뒤지지만 그나름의 자료적 가치가 있다.

3. ‘Ⅳ. 국어학적인 고찰’에서 본 바와 같이 16세기 중엽의 전주·완주 지역의 언어사실을 그런대로(방언 포함)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정음 창제 후 100년이 지났으면서도, 중세국어 문법의 전통적인 용법을, 음운적인 변천을 고려해도 그런대로 계승해온 것도 무시할 수 없다.

4. ‘방점 표기’에 대해서는 ‘이 문헌’의 전반부보다 후반부에 더 나타나며, 고유어는 대체로 한 어절에 한 음절에만 표기되나, 한자어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곡용과 활용형에서는 어간에만 표기되고, 말음절에는 표기하지 않은 것이 대세이며, 전체적으로 표기는 매우 불규칙하며, 거성과 상성의 혼란, 15·16세기 중앙의 관판 문헌과 일치하지 않음이 많다.

5. 어휘 면에 있어도 1)~16) 외에, 17) ‘아니다’ 뒤에 보충한 ㄱ) 고어사전의 표제어로 제안하는 것 : 5개, ㄴ) 일부 사전에 표제어로 올려 있는 것 : 4개, ㄷ) 사전에 실려 있어도 그 예가 귀한 것 : 5개를 다 합치면 약 30단어 정도가 ‘이 문헌’에 나타난 귀한 자료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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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02)
이와 같이 해당 문헌의 서명(書名)을 한자 아래 이어서 정음으로 적은 것으로는, 1541년 『우마양저염역치료방(牛馬羊猪染疫治療方)』, ‘쇠며 이며 이며 도티며 서 뎐염  고티 방문’과 1542년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 ‘시긔 덥단 고틸 일 분류야 수이 알에  방문’과 같은 책이 있다. 이들 책은 원간본은 아니고 복각본(覆刻本)들이지만, 원간본도 이와 같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주003)
이 변상도에 관해서는 박도화(2004:111~121)에 그 제목과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주004)
‘초역본-오응성본’과, 이 역주본에 영인으로 붙인 ‘신심사 판본’의 형태서지를 보인다. ‘초역본’은 송일기(2001:192)를 따랐고, ‘신심사 판본’은 2011. 11. 11. 직접 세심사를 방문하여 실측하고, 책판을 인출(印出)한 것을 대본으로 하였는데, 이는 안준영(이산각연구소장, 용비어천가 목판복원 판각자) 님이 인출하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홍현보 선생이 답사를 담당하였다.
주005)
이 ‘부모은중경 언해본’의 계통도는 송일기·박민희(2010:125)를 따랐다.
주006)
이 계통 표는 이호권(2005:80)을 따랐다.
주007)
여승구 사장님은 앞으로 영인본을 간행할 예정이어서 영인을 승낙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에 따라 현전하는 복각본 중에서 영인본 자료를 정해야 할 형편이 되어, 〈부모은중경언해〉 해제, ‘3. 현전 이본과 소장처’〈100대 한글문화유산 정비사업, 2004〉에서 ‘1563년(명종 18) 충청도 아산 신심사판 : 책판 세심사(洗心寺) 현전’이 있어서 이를 영인 후보로 정하고, 조계종 총무원을 통해 ‘세심사’ 주지스님을 소개 받아 지난 6월 7일 오후에 방문한바, 책판을 준비해 놓으셨으나, 그보다도 직접 인출한 이본이라도 있는지를 알아보니, 뜻밖에도 이미 6년 전에 충남대학교의 사재동 교수가 정년 후 ‘백제불교문화대학장’으로 활발한 연구를 계속하면서 2005년 11월에 발원자(史在東, 盧泰朝, 朱亨喆, 史眞實)들의 법보시(法布施), 비매품으로 하여 〈불설대보부모은중경〉-원전과 불교문화학적 연구- 사륙배판(311면)으로 간행한 책을 받아 보게 되었다.
주008)
실은 이 초역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01년 5월 초순, 송일기 교수의 호의로 그 복사본 1책을 받은 때였다. 서가에 둔 채,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가, 10년이 지난 금년 3월에야 ‘이 문헌’의 역주를 맡으면서 비로소 고구(考究)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주009)
이 발문은 ‘언해본’의 순서에 따라 역주의 끝 부분에 옮겼다.
주010)
종래 이런 비슷한 논의로는 신중진(1996:231)이 있는데, 자형의 특징으로 ‘ㅇ’ 판각이 다른 자형과 달리 굵기가 가늘어서 이것으로 다른 이본(異本)과의 관계를 밝히는 하나의 방법(기준)으로 소개한 바 있다.
주011)
중세국어 성조(聲調)를 연구한 김성규(1994:129)에 의하면, 방점이 찍히지 않은 문헌의 사례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었다. 『부모은중경언해』 화장사판(1553년)과 송광사판(1563년), 그리고 희방사판 『칠대만법(1569)』, 서봉사판 『계초심학인문(1583)』 등.
주012)
정우영(2005: 82-94)에 따르면, 제1차 〈훈민정음〉 언해본은 1446년 12월 말까지, 또는 늦어도 1447년 4월 이전까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예의’편만을 우리말로 번역·간행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주013)
현재 전하는 15세기 정음문헌 중에서 방점 표기가 반영되지 않은 문헌도 있다. 예를 들면, 『금양잡록(1492)』, 『악학궤범(1493)』에 실린 정음가사, 이종준의 『신선태을자금단(1497)』 등인데, 이는 거의 예외적인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주014)
17세기에도 방점이 표기된 문헌으로, 1610년 송광사판 『선가귀감언해』가 있다. 이것은 원간본인 1569년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판에 방점 표기가 있는 자료를 저본으로 하여 복각한 데 원인이 있다.
주015)
이 초역본(1545)이 발견·소개되기 전에, 유필재(1997)에서 화장사판(1553) 『부모은중경언해』의 방점을 조사·분석한 바 있다. 이 오응성 발문이 붙은 초역본(1545)도 화장사판의 경향과 다르지 않다.
주016)
이 같은 경향에 대하여는 유필재(1997:231-234)에서 구체적인 예와 해석이 갖추어져 있다.
주017)
15세기에는 일부 체언에 관형격조사와 같은 형태인 ‘-/의-’가 쓰이는 경우가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그런 체언은 ‘신체, 방위, 지리, 광물, 천문, 절기, 식물, 음식, 가옥, 기구, 수’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애/에’와 ‘-/의’는 그 형태만으로는 처소의 부사격조사인지, 관형격조사인지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 구별은 선행체언이 유정체언(사람, 동물 등)이면 ‘-/의’를 관형격조사로, 그 밖에 무정체언이면 ‘-애/에’를 처소의 부사격조사로 보는 것이다.
주018)
仇音方은 禮賓寺 하뎐이라〈1514, 속삼, 열:16ㄱ〉. 구음방이 례빙시 하뎐이라〈1617. 동국신속_삼강, 열녀:8ㄴ〉
주019)
참고로 〈장수경언해〉의 예를 제시한다. 不惜身命(블셕신, 27ㄱ3), 不能轉讀(브뎐독, 72ㄱ1)/終不能變(블변, 21ㄱ4), 不孝(븨효, 75ㄱ~ㄴ)/不行(블, 16ㄴ7), 水旱不調(슈한브됴, 63ㄱ6), 終不至死(블지, 44ㄴ2) 등. 〈장수경언해〉의 ‘븨효’는 ‘브효’에 대한 변이음으로서 활음 ‘j’가 제1음절에 첨가되어 ‘ㅣ’하향중모음화한 것을 표기에 반영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심은주(2003) 참조.
주020)
<용례>以鎌閉目이라 殊常매 左道 긔별이 이신 후 믿처 오오리〈인어대방(1790) 6:5ㄴ〉.
주021)
예를 들어 〈법화경언해〉에서 구결문 ‘頭面禮足고’〈4:3ㄴ〉에 대하여 언해에서는 “頭面으로 바래 저고”〈4:4ㄱ〉로 대역되어 있다.
주022)
김영신(1988:212-3)에 제시된 예문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여기에 바른 예문으로 고쳐 둔다. 문제는 212쪽의 끝에서 둘째 줄 예문이다. “✩ 眞求티 아니니라(⟵ 아니니라) 3”로 되어 있는데 영인본을 찾아보니 ‘아니니라’는 ‘아니니’로 되어 있어서 여기에 맞는 예문이 될 수 없는 것임을 밝혀 둔다.
주001)
*이 역주본이 이루어지기까지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던 여러분들을 여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직접적으로는 평생의 동료인 외우(畏友)로, 이번엔 ‘이 문헌’의 초서로 된 발문을 해서(楷書)로 옮기고 번역한 이종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원고의 일부를 도와준 정우영 동국대학교 교수, 여러 가지 자료를 챙겨 준 김무봉 동국대학교 교수, 교정을 보아 준 김성주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연구교수, 입력과 교정을 맡은 하정수 동국대학교 강사, 필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자료검색 프로그램 UniConc를 설치해준 김지오 동국대학교 강사에게 도움을 받았다. 간접적으로는 10년 전 ‘이 문헌’의 복사본을 보내주신 송일기 중앙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 지난 6월 용정사본 복사본을 마련해 주신 이호권 한국방송대학교 교수, 신심사 방문을 주선해 주신 이성수 불교신문사 편집국장, 귀한 문화재 책판을 보여주신 신심사 지성(智性) 스님, 이 책의 출판을 직접 담당한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홍현보 선생 이상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사의를 여기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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