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五男兒志 三千弟子行 曾參與游夏 達者得升堂
【論語에 十有五而志于學이니라 史記에 孔子ㅅ 弟子ㅣ 三千이라 論語에 由也 升堂 주034) 승당(升堂) 집에 오르다. 학문이나 기예(技藝)가 이미 입문하였음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논어 선진편에는 공자가 이르기를, 유(由, 자로)가 집에는 올랐으나, 방에는 들지 못하였다고 하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집에 올랐다는 것에만 주의를 모으고 있다. #자로(子路) :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의 유학자(BC543~BC480). 성은 중(仲). 이름은 유(由). 자로는 그의 자이다. 산동성(山東省) 출신으로, 공자(孔子)의 문하생이었다. 공자보다 9세 아래였고, 제자 중에서는 최연장자로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하나. 성미는 거칠었으나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으로 가르침을 받으면 실천에 옮기는 인물이었다. 정사(政事)에 뛰어났으며 공자를 제일 잘 섬겼다고 한다. 공자도 그를 매우 사랑한 듯하며, 〈논어〉에 그 친분이 잘 표현되어 있다. 뒤에 위(衛)나라에서 벼슬했는데, 내란이 일어났을 때 스스로 도의적 입장에서 전사(戰死)를 택하였다. 내란 소식을 들었을 때 공자는 그의 죽음을 예언하였다고 한다.〈두산백과 참조〉.
矣 라 니 喩入道다 此 望宗武 志學而如游夏之得升堂也ㅣ라】
Ⓒ 편찬 | 유윤겸, 유휴복, 조위, 의침 등 / 1481년(성종 12)
열다새 주035) 열다새 열[十]#다[五]+애(처격 조사, 부사격 조사). 열다섯에. 논어에 나오는 말로, 공자는 논어에서 ‘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유오이지우학) 三十而立(삼시이립)’이라고 하고 있다. 15세에 배음에 뜻을 두고, 30에 섰다(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배우게 되는 경지)고 한다.
男兒 주036) 남아(男兒) 남아(男兒)+(관형격 조사). 남아의. 남자의.
과 주037) 과 [志]+과(접속 조사). 뜻과. ¶그를 이프며 안자셔 머리 도혀 라고 들 조차 葛巾을 기 노라(글을 읊으며 앉아서 머리를 돌려 바라보고 뜻을 좇아 갈건(葛巾)을 나직이 하노라.)〈두시(초) 15:17ㄴ〉.
三千 弟子ㅅ 行列에 주038) 삼천(三千) 제자(弟子)ㅅ 행렬(行列)에 3천 제자의 행렬에. 공자의 제자가 3천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한다. 〈사기〉에는 공자가 시(詩), 서(書), 예(禮), 악(樂)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수가 대략 3천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曾參 주039) 증삼(曾參) 증자(曾子, BC 506~BC 436)의 이름.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유학자. 자는 자여 (子輿). 이름은 삼(參). 산둥성[山東省] 출생. 증점(曾點)의 아들이다. 공자의 고제(高弟)로 효심이 두텁고 내성궁행(內省躬行)에 힘썼으며, 노(魯)나라 지방에서 제자들의 교육에 주력하였다.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나의 도는 하나로써 일관한다(吾道一以貫之)’고 말했을 때 다른 제자들은 그 말의 참뜻을 몰라 생각에 잠겼으나, 증자는 선뜻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뿐’이라고 해설하여 다른 제자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증자의 사상은 효(孝)와 신(信)을 도덕행위의 근본으로 한다. 그는 공자의 도(道)를 계승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를 거쳐 맹자(孟子)에게 전해져 유교사상사(儒敎思想史)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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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游 주040) 자유(子游) 춘추 시대 오(吳)나라 사람(BC506~?). 공자(孔子)의 제자로, 성은 언(言)이고, 이름은 언(偃). 자가 자유(子游)이다. 공자보다 45살 연하로, 20여세부터 관직 생활을 하였다. 무성(武城)의 재상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정치를 펼쳤다.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하나. 안연(顔淵), 자하(子夏)와 함께 공자가 가장 아낀 제자였으며, 학문에 밝았다고 한다. 공자가 무성을 지나갈 때 현가(弦歌)를 듣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논어〉와 〈예기〉에 그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2년(1009) 단양공(丹陽公)에 추봉되었다.〈중국역대인명사전 참고〉.
子夏 주041) 자하(子夏) 중국 전국시대의 학자(BC507~BC420?). 성명은 복상(卜商). 산서성(山西省) 출생. 이에 대해서는 이설도 있다. 공자의 제자로 공문 10철(孔門十哲)의 하나. 공자가 죽은 뒤에 서하(西河)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며, 위나라 문후(文侯)에게 초빙되어 스승이 되었다. 자하는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여읜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다가 실명(失明)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학문은 시와 예에 통하였으며, 주관적 내면성을 존중하는 증자(曾子) 등과 달리, 예(禮)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하는 것이 특색이다.〈두산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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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러곰 주042) 시러곰 싣[得]-+-어(연결 어미)+곰(보조사). 능히.
지븨 오니라 주043) 지븨 오니라 집[堂]+의(처격 조사, 부사격 조사)#오[升]-+-ㄴ(동명사 어미)#이(지정 형용사)-+-라(어말 어미). 집에 오른 것이다. 도(道)에 들어선 것이다.
Ⓒ 편찬 | 유윤겸, 유휴복, 조위, 의침 등 / 1481년(성종 12)
【한자음】 십오남아지 삼천제자행 증참여유하 달자득승당【논어에 15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고 한 것이다. 〈사기〉에 공자의 제자가 삼천이라 하였다. 논어에 자로(子路)는 집에 오르다 하니 도에 들어선 것을 비유한다. 이는 종무가 배움에 뜻을 두고 자유(子游), 자하(子夏)와 같이 집에 오르기를 바란 것이다.】
【언해역】 열다섯에 남아의 뜻과 3천 제자의 행렬에, 증삼(曾參)과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능히 집에 오른 것이다.
Ⓒ 역자 | 임홍빈 / 2016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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