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죽(苦竹) 화본과(禾本科), 대명죽속(大明竹属), 북미전죽족(北美箭竹族), 고죽종(苦竹種)의 대나무. 별명은 산병죽(傘柄竹), 라틴학명은 Pleioblastus amarus (Keng) keng이다. 줄기는 높이 3~5m, 지름 1.5~2cm, 줄기의 두께는 6mm 정도이다. 중국 원산으로, 중국에서는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복건성, 호남성, 호북성, 사천성, 운남성 등에 분포한다. 어려서는 담록색이고, 늙은 뒤에는 점점 황록색으로 바뀐다. 껍질은 회백색 가루반점이 있다. 줄기는 흩어져 나기도 하고, 뭉쳐 나기도 한다. 맛은 쓰다고 하는데, 어린 잎과 어린 싹은 모두 약용이 가능하고, 여름과 가을에 따는 것이 좋다고 한다. 잎과 순, 뿌리와 줄기, 고죽술[苦竹瀝] 등이 모두 해열, 해독 작용을 하고, 피를 맑게 하며, 염증 치료 작용을 한다고 한다.
이 시 ‘고죽’은 숙종(肅宗) 건원(乾元) 2년(759) 가을에 지은 것이라 한다. 758년(건원 1) 5월까지 두보는 장안의 조정에 있었으나, 조정은 두보의 후원자였던 방관(房琯, 697~763)을 재상의 직에서 파면하였다. 패전의 책임을 그에게 물은 것이다. 이에 두보도 좌습유의 벼슬을 내놓게 되었다. 759년 반란군 사사명(史思明)과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에게 관군이 크게 패하여 낙양이 다시 위험하게 되자, 759년 봄에 두보는 동도(東都)에서 화주(華州: 섬서성 화현(華縣))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吏), 석호리(石壕吏)의 ‘삼리(三吏)’와, 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의 ‘삼별(三別)’의 시 6수를 지었다. 두보는 47세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국경에 있는 진주(秦州, 감숙성 천수현)로 옮겨갔다. 진주에서 4개월간 머물렀지만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동곡(同谷, 감숙성 성현) 땅이 기후도 좋고 식량도 구하기 쉽다는 소리를 듣고 10월에 동곡을 향하였다. 그곳에서 1개월을 지냈지만 생활은 더욱더 곤궁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