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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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8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8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모아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조선 성종의 명을 받은 유윤겸(柳允謙), 유휴복(柳休復),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언해하여 성종 12년(1481)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언해 시집이다. 모두 25권 17책으로 을해자본이며 이 책은 보통 줄여서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임홍빈(任洪彬)

1944년 경기도 개성 출생, 아호 학여(學如).

송도국민학교. 용강국민학교. 숭문중학교. 숭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석사과정), 문학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박사과정). 문학박사(1987)

해군사관학교 국어교관,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 조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농과대학 시간강사,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전임강사, 조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교수(현),

한국언어학회 회장 엮임.

대한민국 학술원상 수상.

저서와 논문

『국어문법론(공저)』(1983),

『국어의 재귀사 연구』(1987),

『뉘앙스풀이를 겸한 우리말 사전』(1993),

『국어 문법론 I(공저)』(1995),

『북한의 문법론 연구』(1997),

『국어 문법의 심층』(1998),

『우리말에 대한 성찰』(2005),

『한국어의 주제와 통사 분석』(2007)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2011)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1』(2012)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4』(2013)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5』(2014)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8(상)』(2015) 외 10여 권

"국어의 주제화 연구", "On the Real Nature of Scrambling in Korean" 외 100여 편

역주위원

  •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8 :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교열·윤문·색인위원

  •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8 : 박종국 홍현보
  • 고전국역 편집위원회

  • 위원장 : 박종국
  • 위원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김석득
  • 김승곤 김영배 나일성 남문현
  • 리의도 박충순 성낙수 심우섭
  • 이 해 철 임홍빈 전 상 운 최홍식
  • 한무희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8을 내면서

우리 회는 1956년 10월 9일 창립 후 세종대왕기념사업의 중심 전당인 세종대왕기념관을 건립 세종문화진열실과 연구실을 마련 운영 관리하며, 세종성왕의 정신과 위업의 연구 사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 한글 전용과 국학 진흥을 위하여 「한문고전국역사업」과 「한글고전역주사업」을 1967년에 기획하여 1968년부터 계속 수행하고 있다.

「한문고전국역사업」은 1968년 1월부터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을 국역 간행하기 시작하여 실록의 한문 원문 901권을 완역 발간하였고, 일반 한문고전으로 『증보문헌비고』, 『매월당집』, 『국조인물고』, 『동국통감』, 『승정원일기』(순종), 『육일재총서』 등 수많은 국학자료를 국역 발간하였으며, 계속하여 『치평요람』, 『각사등록』, 『연행록』 등 문헌의 국역 사업을 벌여 오고 있다.

「한글고전역주사업」은 1990년 6월에 첫발을 내디디어, 『석보상절』 권6, 9, 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바, 2015년 12월까지 역주 발행한 문헌은 『석보상절』 4책, 『월인석보』(훈민정음언해본 포함) 17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금강경삼가해』 5책, 『구급방언해』 2책, 『삼강행실도』 1책, 『두시언해』 8책, 『소학언해』 4책, 『사서언해』(논어, 대학, 중용, 맹자) 6책, 『이륜행실도』 1책, 『동국신속삼강행실도』 5책, 『시경언해』 3책, 『서경언해』 1책, 『가례언해』 4책, 『여소학연해』 2책 등 124책을 발간하였고, 2016년 금년에도 『오륜행실도』, 『두시언해』(초간본) 등 15책을 역주 간행할 예정이다.

우리 회 창립 60돌이자 한글 반포 570돌이 되는 올해는 우리 회가 「한문고전국역사업」을 착수한 지 49돌이 되었고, 「한글고전역주사업」을 추진한 지 26돌이 되었다. 그 동안 우리 회가 낸 700여 책의 국역 학술 간행물이 말해 주듯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이래 최고의 한글 국역, 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이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그 결과 고전의 대중화를 통한 지식 개발 사회의 문화 자본 구축과 역사 의식 및 한국학 연구 활성화에 기여는 물론, 새 겨레문화 창조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는,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모아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조선 성종의 명을 받은 유윤겸(柳允謙), 유휴복(柳休復),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언해하여 성종 12년(1481)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언해 시집으로 알려져 있다. 모두 25권 17책으로 을해자본이다(후대에는 19책, 20책도 있음). 이 책은 보통 줄여서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두시언해』는 다른 언해서와는 달리 원문에 입겿(토)이 없고, 한글과 한문 혼용인 언해문의 한자에도 한글 독음이 달리지 않았다. 두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 때부터 행하여졌다고 하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처음 이루어진 것이다. 이 책의 책이름에 보이는 공부(工部)는 두보의 관명(官名)이고, 분류(分類)는 시를 기행, 술회, 질병, 회고, 시사(時事) 등과 같이 내용에 따라 분류하였다는 뜻이다. 두보 시는 71문(門)에 총 1,467수와 다른 사람 작품 16수로서, 그 소재는 세상사에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라를 사랑하는 충정과 같은 인간애가 담겨 있으며, 당시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면밀하게 비판한 사실적인 서사(敍事)인 데서 시사(詩史)라 일컬어지는 위대한 작품이다.

이번에 이 『두시언해』 권18을 역주함에 있어서, 그 저본으로는 통문관에서 1956년에 초간본을 축쇄 영인한 양장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우리 회에서 15세기 문헌인 『두시언해』 권18을 역주 간행함에 있어, 역주를 위해 애써 주신 서울대학교 임홍빈 명예교수님과,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준 교육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6년 11월 25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최홍식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 등 한글 관계 문헌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옛 우리말을 연구하는 전문학자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이를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며 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8의 저본으로는, 통문관에서 1956년에 초간본을 축쇄 영인한 양장본을 사용하였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한문 원문 ․ 언해 원문 ․ 현대어 풀이 ․ 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는데, 특별히 한시를 언해하였으므로 그 운율을 알기 쉽도록 시 제목과 한시 원문은 그대로 음을 달고 풀이를 이어붙였다. 원전과 비교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장(張) ․ 앞〈ㄱ〉 ․ 뒤〈ㄴ〉 쪽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제1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1ㄱ分類杜工部詩 卷之十五

제3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諸侯3ㄴ舊上計 厥貢傾千林

(3) 현대어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4) 원문 내용(한문 원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 풀이문 ․ 주석과 구별하였으며, 원문 가운데 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다.

(5) 현대어 풀이에서, 옛글의 구문(構文)과 다른 곳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충한 말은 〈 〉 안에 넣었다.

(6) 찾아보기 배열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초성순 : ㄱ ㄲ ㄴ ㅥ ㄷ ㄸ ㄹ ㅁ ㅱ ㅂ ㅲ ㅳ ㅃ ㅄ ㅴ ㅵ ㅷ ㅸ ㅅ ㅺ ㅻ ㅼ ㅽ ㅆ ㅾ ㅿ ㅇ ㆀ ㆁ ㆆ ㅈ ㅉ ㅊ ㅋ ㅌ ㅍ ㅎ ㆅ

② 중성순 :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ㆉ ㅜ ㅝ ㅞ ㅟ ㅠ ㆌ ㅡ ㅢ ㅣ ㆍ ㆎ

③ 종성순 : ㄱ ㄴ ㄴㅅ ㄴㅈ ㄴㅎ ㄷ ㄹ ㄹㄱ ㄹㄷ ㄹㅁ ㄹㅂ ㄹㅅ ㅀ ㅁ ㅁㄱ ㅯ ㅰ ㅂ ㅄ ㅅ ㅺ ㅼ ㅿ ㆁ ㅈ ㅊ ㅋ ㅌ ㅍ ㅎ

3. 역주자 일러두기

(1) 역주는 가능한 한, 자세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처음에 나온 것도 뒤에 나오면 다시 역주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지나치게 앞의 부분을 참조하도록 하면, 역주의 효용이 반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2) ‘이다’ 즉 ‘이-’를 학교 문법에서는 ‘서술격 조사’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정 형용사’란 이름으로 ‘이-’를 가리키기로 한다. ‘이-’는 형용사임이 분명한데, 종래에는 이를 형용사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 활용의 양상이 형용사와 동일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 어미 ‘-으니, -으려, -으면, -은, -을’ 등과 같이 흔히 ‘으’를 앞에 가지는 어미를 일반적으로 하나의 어미로 취급하나, 여기서는 ‘으’와 후행하는 ‘-니, -려, -면, -ㄴ, -ㄹ’ 등을 구별하여 ‘으’를 조음소로 분석하는 방식을 취한다. 어미와 달리 조사에 대해서는 조음소를 설정하지 않는다.

(4) 미래 관형사형 어미나 동명사 어미 ‘-ㄹ’이나 ‘-ㅭ’은 이전의 14권 및 15권 역주에서는 모두 ‘-ㅭ’으로 분석하였으나, 지나치게 번거롭고 실제 표기형과 이질적인 것이 되는 흠이 있다. 미래 관형사형 어미나 동명사 어미가 ‘-ㅭ’으로 나타나는 예도 있고, 단순히 ‘-ㄹ’로 나타나는 예도 있는데, 옛 문헌에 실제로 ‘-ㅭ’으로 나타나는 것은 ‘-ㅭ’로 분석하고, ‘-ㄹ’로 나타나는 것은 그대로 ‘-ㄹ’로 분석해 보이기로 한다.

(5) 중세어의 ‘-오, -우, -옴, -움’에 대해서 역주자는 이들을 ‘-오-+-, -우-+-, -오-+-ㅁ, -우-+ㅁ’과 같이 분석하고, 때로 ‘-오, -우, -옴, -움’과 같이 분석되는 것을 재구조화된 형식으로 제시하기로 한다. ‘-샤-’를 ‘-시-’의 이형태로 분석하는 것을 지양하여, ‘-시(주체 높임 선어말 어미)-+-아(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로 분석한다. 이는 중세어의 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 ‘-오/우-’가 ‘-아-’ 또는 ‘-어-’라는 또 다른 이형태를 가지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6) 중세어의 선어말 어미 ‘-오/우-’는 위에서 암시한 바와 같이 ‘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와 같이 주를 달기로 한다. ‘-오/우’에 대해서는 허웅(1963)의 인칭 ․대상 활용설이 있고, 이숭녕(1964)의 의도법설이 있는 것이지만, 어느 것이나 현상의 설명력에는 한계를 가진다. 임홍빈(1981)에 따라 ‘-오/우/아/어-’를 확실성의 양태를 나타내는 선어말 어미로 보기로 한다.

(7) ‘처격 조사, 조격 조사’ 등은 학교 문법에서 ‘부사격 조사’이므로, 대부분의 예에 대하여 ‘에(처격 조사, 부사격 조사)’와 같이 두 가지 술어를 병기하기로 한다. 그 기능에 따라 가령 ‘창문을 나무로 만들었다’와 같은 예의 ‘나무로’의 ‘로’와 같으면 ‘로(조격 조사, 부사격 조사)’와 같이 주석하기로 한다.

(8) 형태소 분석에서 ‘+’ 기호는 대체로 용언의 어간과 어미 사이, 체언과 조사 사이 및 어미와 어미, 조사와 조사 사이에 쓰고, ‘#’ 기호는 어기와 어기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에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그 결합이 긴밀한 합성어의 두 어기 사이에는 ‘+’ 기호를 쓰기로 한다. 때로 어원적인 분석을 보인 일이 있는데, 이때에는 어원적인 단어 사이에 ‘#’ 기호를 쓰기로 한다. 용언의 어간, 어미, 선어말 어미, 접미사 등에는 관례에 따라 그 앞이나 뒤에 하이픈 ‘-’을 표시하기로 한다.

(9) ‘ㅎ’ 종성 체언은 가령 ‘[地]’와 같으면, ‘’와 같이 표시하는 방법도 있으나, 여기서는 ‘ㅎ’과 같이 ‘ㅎ’을 선행 음절에서 따로 분리하여 표시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과거의 어형이 현대어형과 이질적으로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다.

(10) 언해본에서 두시의 원문은 대체로 대구(對句)의 두 구가 한 행으로 중간에 띄어짐이 없이 인쇄되어 있다. 5언 시와 같으면 10자가 한 행이 되고 7언 시와 같으면 14자가 한 행이 된다. 여기서는 이를 의미의 단위에 따라 한 행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제시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한다.

(11) 한시 원문에 대해서는 행 단위로 우리의 전통 한자음을 한글로 표시하여 원문과 나란히 제시하기로 한다. 이는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이 부분의 한자음에 대해서는 우리말의 구개음화 규칙이나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12) 주해의 표제어는 언해 원문에 나타난 단어나 구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한자어에 대해서는 그 한자음을 표제어로 하고 해당 한자를 괄호 속에 넣어 표시하는 방법을 취하기로 한다. 한자음은 현대 우리말의 한자음을 취한다.

(13) 두시 가운데는 같은 제목이나 형식을 가진 시가 연작시와 같이 나열된 시가 있다. 언해에서는 그들 각각의 시를 단지 별행으로 시작하고 있다. 본 주해는 행 단위로 된 것이기 때문에, 시들이 어디서 나누어지는지 알기 어렵다. 이를 고려하여 본 역주에서는 단위 시가 끝나는 위치에 그 순서를 ‘여기까지가 첫째 수이다’와 같이 괄호 속에 나타내 보이기로 한다.

(14) 주해에서는 형태소 분석과 함께 각 형태소의 기능을 괄호 속에 표시하기로 한다. 그러나 제시형이 형태소를 엄격하게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제시형은 이형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한다. 가령 연결 어미 ‘-아/어’와 같으면, ‘-아(연결 어미)’나 ‘-어(연결 어미)’와 같이 표시하였다. 그러나 ‘-야’는 ‘y(조음소)+아’와 같이 분석해 보이기로 한다. 문법 형태소의 개념을 적용한 것은 의문형 어미 ‘-가, -고’ 및 대상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 ‘-거-’ 등과 같은 몇 가지 예의 표시에 국한된다. 이들에 대해서는 가령 나타난 형태가 ‘-아’ 또는 ‘-오’라고 하여도 그 형대소를 ‘-가’ 또는 ‘-고’와 같이 밝혀 나타내기로 한다.

(15) 역주와 용례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이미 세상에 펴낸 역주본을 많이 참고하였다. 이미 많은 중세어 자료들이 역주된 상태이므로, 거기서 풍부한 자료와 해석을 접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이전 역주본의 역주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 및 한자 성어 고사를 다룬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혹 일일이 그 출처를 밝히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 일일이 그 출처를 밝히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넓은 혜량 있으시기 바란다.

『분류두공부시언해』의 배경과 권18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두보의 삶과 시대 배경

두보(杜甫, 712~770)는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성당시대의 위대한 시인으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성(詩聖)이란 시에 있어서 성인(聖人)이란 뜻으로 그의 시가 가장 높은 경지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이다. 두보의 조상은 대대로 양양(襄陽)에서 살았으나, 그가 태어난 것은 호남성 공현(鞏縣)이다. 두보는 『좌씨경전집해(左氏經傳集解)』의 저자인 두예(杜預, 222~284)의 13대손이며, 당나라 초기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의 손자이다. 부인 양(楊) 씨와의 사이에는 종문(宗文), 종무(宗武) 두 아들을 두었고, 딸도 몇 명 있었다고 한다.

두보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낙양(洛陽)의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만 7세 때에 시를 지었다고 하고, 만 9세 때에는 이미 지은 시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조숙하였고 자부심이 강하였는데, 만 14~5세(이후 두보의 나이는 만으로 표시한다) 때 이미 문단에 나아가 자기보다 나이가 월등히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20대에 접어들어 진(晉, 산서성(山西省)), 오(吳, 강소성(江蘇省)) 월(越, 절강성(浙江省)) 등을 유랑하고, 23세 때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24세 때에 경조(京兆, 장안현 서북쪽에 있었다고 함)로 돌아와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다시 유랑 길에 나서서 산동성(山東省)과 하북성(河北省) 등을 유랑하였다. 이때 두보는, 32세(744)로 조정에서 추방되어 산동성으로 가고 있던 이백(李白, 699~762)과 낙양에서 만났다. 고적(高適, ?~765), 이옹(李邕, 678~747) 등과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34세(746)에 두보는 장안으로 갔다. 그 곳에서 10여년 동안 과거시험에 들지 못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보내야 했다. 두보는 자기의 실력을 알리기 위해 38세(750) 때 현종에게 〈조부(鵰賦)〉를 지어 바쳤고, 39세 때에는 〈삼대예부(三大禮賦)〉를 지어 바쳤다고 한다. 〈삼대예부〉를 바친 것이 주효하여 집현원(集賢院)에 대제(待制)하게 되었고, 이듬해에 선서(選序, 관리임용 후보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임용되지 못하였다. 장안에서의 두보의 생활은 실로 불우한 것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두보의 눈은 차츰 사회의 불합리와 모순으로 향하게 되었다. 39세(751) 때, 당나라는 전쟁에서 남조(南詔), 대식(大食), 거란에 크게 패하였는데, 병사를 보충하기 위해 농민을 끌어가고 조세도 무겁게 부과하였다. 42세(754) 때에는 장마가 계속되고 기근이 심하여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는 한때 처자를 봉선현(奉先縣)에서 농사를 짓는 친척집에 맡기기도 하였다. 43세(755)에는 우위솔부(右衛率府)의 주조참군(冑曹參軍) 즉 금위군(禁衛軍)의 무기고 관리직을 얻었다. 그 낮은 관직이 자기 포부를 실현하기에는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자신을 비웃는 심정을 피력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나마 얻은 것이 기뻐 처자를 만나러 장안을 출발해서 봉선현(奉先縣)으로 가는 도중, 여산(驪山) 온천에서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된다. 두보는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큰 세상에 커다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선현에 도착해 보니, 처자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어린 자식은 굶어죽은 상태였다.

43세(755) 때, 11월 9일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 조정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였고, 수도 장안까지 반란군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현종은 촉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황제의 자리도 아들 숙종(肅宗)한테 넘어갔다. 두보는 가족들을 이끌고 섬서성(陝西省) 백수현(白水縣) 부주(鄜州) 등지로 난을 피해 옮겨 다녔다.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하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을 부주 교외의 강촌(羌村)에 남겨 두고, 자신은 영하성(寧夏省)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숙종 휘하로 가던 도중, 반란군에 잡혀 도로 장안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수도는 황폐해졌고 거리에는 반란군이 활개를 쳤다. 두보는 장안에서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 망국의 비애를 애도하고 가족의 안부를 염려했다.

45세(757, 숙종 지덕(至德) 2) 때, 반란군의 내분으로 안녹산이 죽음을 당하였다. 두보는 그 해 4월 장안을 탈출하여 남루한 몰골로 섬서성 봉상 행재(行在)에서 숙종을 알현하였다. 황제는 그 해 5월 두보의 공을 가상히 여겨 그를 간관(諫官)인 좌습유(左拾遺)에 임명했다. 그 해 말에 장안이 관군에 의해 탈환되고 숙종과 상황(上皇, 현종)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두보도 장안의 궁정에서 좌습유의 관료 생활을 하게 되었다. 46세(숙종 건원(乾元) 1, 758) 때, 5월까지 그는 장안의 조정에 있었으나 당 조정은 두보의 후원자였던 방관(房琯, 697~763)을 재상의 직에서 파면하였다. 패전의 책임을 그에게 물은 것이다. 이에 두보도 좌습유의 벼슬을 내놓게 되었다. 6월에는 화주 사공(華州司功)의 벼슬을 하게 되었다. 화주는 섬서성 화주현이고, 사공은 6참군의 하나로 주부(州府)의 좌리(佐吏) 벼슬이었다. 그러다가 낙양으로 가는 길이 뚫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해 반란군 사사명(史思明)과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顔慶緖)에게 관군이 크게 패하여 낙양이 다시 위험하게 되자, 다시 화주로 돌아왔다. 두보는 47세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국경에 있는 진주(秦州, 감숙성 천수현)로 옮겨갔다. 진주에서 겨우 4개월간 머물렀지만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동곡(同谷, 감숙성 성현) 땅이 기후도 좋고 식량도 구하기 쉽다는 소리를 듣고 10월에 동곡을 향하였다.

그곳에서 1개월을 지냈지만 생활은 더욱더 곤궁해져서 12월 초에 사천(四川) 지방의 성도(成都)로 갔다. 성도에서 두보는 성도 윤(成都尹) 겸 검남서천절도사 엄무(嚴武)를 만났다. 엄무는 두보의 옛 친구로, 두보에게 누구보다도 큰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엄무는 두보보다 10년이나 연하인데다, 세교(世交)도 있는 터였는데, 두보가 아무런 실권도 없으면서 엄무를 업신여기는 투로 취중에 비위를 건드렸다가 그를 격노케 하여 그의 손에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두보는 성도 근교 완화계(浣花溪) 부근에 초당을 마련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50세(보응(寶應) 1, 762) 때, 엄무가 서울로 소환되고, 성도 근처에서 서지도(徐知道)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다시 난을 피해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51세(대종 광덕(廣德) 1, 763) 1월, 9년에 걸친 안사의 난이 끝났으나 위구르족과 토번(吐番)의 침입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천 지방을 전전하였다. 그러던 중에 엄무가 다시 성도에 돌아오게 되어, 두보도 다음해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다. 엄무는 두보를 천거해서 절도참모(節度參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삼았다. 그러나 엄무의 막중(幕中)에서의 생활은 두보에게 편안한 것이 아니었다. 동료들과 마음도 맞지 않았고, 관료 생활도 불편하였다. 폐병, 중풍병도 있어 53세(대종 영태(永泰) 1, 765) 때 1월,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초당의 생활로 돌아왔다. 4월에 엄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유일한 후원자를 잃은 두보는 5월에 처자를 이끌고 배로 양자강을 내려와서 다시 표류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8월 15일 추석이 지난 후에는 운안(雲安, 지금의 운양)으로 내려왔다. 폐병과 중풍 때문에 여행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져서 약 반년 동안 거기서 요양생활을 했다. 이때 사천 지방에 내란이 일어났고 북방에서는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의 침입으로 시국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 이듬해(대종 대력(大曆) 1, 766) 늦은 봄에 병이 조금 낫자 다시 강을 따라 기주(夔州, 사천성 봉절현)로 내려갔다. 55세가 되는 해의 늦은 봄부터 56세 봄까지 약 2년 동안 기주에서 지내며 430여 수에 이르는 많은 시를 지었다.

55세(767) 봄에 서각(西閣)에서 적갑산(赤甲山) 기슭으로 옮겼고, 3월에는 양서(瀼西)의 초당으로 옮겼다. 이 무렵의 생활은 기주의 도독(都督) 백무림(柏茂琳)의 도움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두보의 건강은 쇠약해져서 폐병, 중풍, 학질에다 당뇨병까지 겹치고, 가을이 되면서 왼쪽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57세(769) 1월 악주(鄂州)에서 배를 타고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1년 수개월간 두보 일가는 동정호를 떠돌아다녔다. 그 후 두보는 담주(潭州)로 가서 거적으로 지붕을 가린 배를 집삼아 지내며 부자유스런 몸으로 약초를 캐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그 해 4월 담주에서 난이 일어나자 두보 일가는 다시 상강(湘江)을 거슬러 올라가 침주(郴州)에 있는 외가쪽 숙부를 찾아가는 도중에 뇌양(耒陽)에서 홍수를 만나 방전역(方田驛)에 정박했는데, 5일간 먹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두보는 58세(대력 5, 770)가 되는 해의, 가을과 겨울 사이에 담주에서 악양(岳陽)으로 가는 배 안에서 객사하였다고 한다.

뇌양에서 홍수에 막혀 여러 날 굶고 있었는데, 뇌양 현령이 그것을 알고 전해 준 우적(牛炙, 쇠고기 구이)과 백주(白酒, 소주의 일종, 흰술)를 먹고 그날로 죽었다고 한다. 시인의 죽음이 어처구니없어 그것을 부인하는 설도 생기게 되었다.

가족은 그의 관을 향리로 운반할 돈이 없어 오랫동안 악주(鄂州)에 두었는데, 그 후 40여 년이 지난 뒤 두보의 손자 두사업(杜嗣業)이 낙양 언사현(偃師縣)으로 운반하여 수양산(首陽山) 기슭에 있는 선조 두예(杜預)의 묘 근처, 조부 두심언(杜審言)의 묘 옆에 묻었다고 한다. (두보의 생애에 대해서는 차석찬의 역사 창고 홈페이지, 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위키백과 및 차상원(1981) 등을 많이 참고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혹 참고한 것을 일일이 밝히지 못한 것도 있을지 모른다.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2.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관련된 문제

2.1. 『두시언해』의 성격

『두시언해』는 중국 성당시대의 시성(詩聖)인 두보의 시를 언해한 책으로, 조선조 8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명으로, 성종 12년(1481, 성화(成化) 신축년) 가을에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제(原題)는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이며, 25권 17책(혹은 19책)의 을해자 활자본이다. 이를 흔히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고 하며, 약하여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제목에 들어 있는 ‘두공부(杜工部)’의 ‘두’는 ‘두보(杜甫)’를 가리키는 말이며, ‘공부(工部)’는 두보가 52세(대종 광덕 2, 764)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을 때, 엄무의 천거에 의하여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 되었는데, 바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공부’를 가리킨다. 정식의 관직명대로 한다면 ‘공부원외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원외랑’을 약하고 그냥 ‘공부’라고만 부른 것이다. 두보를 그의 이름이나 자(字) ‘자미(子美)’ 혹은 호(號) ‘소릉(少陵)’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두공부’라 부르는 것이 두보를 높이는 의미를 가진다.

제목에 들어 있는 ‘분류’란 말은 두보의 시를 제재별로 분류하였다는 의미를 가진다. 원나라 때에 편찬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기초로 두보의 시 1,46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언해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를 몇 가지 예를 보이면, 권10에 실려 있는 정국공(鄭國公) 엄무(嚴武)가 지은 〈군성조추(軍城早秋)〉와 같은 시가 그러한 예이다. 22권에도 〈수별두이(酬別杜二)〉라는 제목을 가진 엄무의 시가 실려 있고, 23권에도 〈기제두이금강야정(寄題杜二錦江野亭))〉이라는 엄무의 시가 실려 있다. 22권에는 〈증두이습유(贈杜二拾遺)〉라는 고적(高適)의 시도 있다.

『두시언해(杜詩諺解)』는 이들 시를 그 제재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이 목록은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의 해제를 수정한 것이다.

(1) 『두시언해(杜詩諺解)』의 대분류 및 중분류 제목

[1] 기행(紀行), [2] 기행 하(紀行下), [3] 술회 상(述懷上), [4] 술회 하(述懷下), [5] 질병(疾病), [6] 회고(懷古), [7] 시사 상(時事上), [8] 시사 하(時事下), [9] 변새(邊塞), [10] 장수(將帥), [11] 군려(軍旅), [12] 궁전(宮殿), [13] 성수(省守), [14] 능묘(陵廟), [15] 거실 상(居室上), [16] 거실 하(居室下), [17] 인리(隣里), [18] 제인거벽(題人居壁), [19] 전원(田園), [20] 황족(皇族), [21] 세주(世胄), [22] 종족(宗族), [23] 외족(外族), [24] 혼인(婚姻), [25] 선도(仙道), [26] 은일(隱逸), [27] 석로(釋老, 寺觀附), [28] 사관(寺觀), [29] 사시(四時), [30] 하(夏), [31] 추(秋), [32] 동(冬), [33] 절서(節序), [34] 주야(晝夜), [35] 몽(夢), [36] 월(月), [37] 우설운뢰부(雨雪雲雷附), [38] 운뢰(雲雷), [39] 산악(山嶽), [40] 강하(江河), [41] 도읍(都邑), [42] 누각(樓閣), [43] 조망(眺望), [44] 정사(亭榭), [45] 원림(園林), [46] 과실(果實), [47] 지소(池沼), [48] 주즙(舟楫), [49] 교량(橋梁), [50] 연음(燕飮), [51] 문장(文章), [52] 서화(書畫), [53] 음악(音樂), [54] 기용(器用), [55] 식물(食物), [56] 조(鳥), [57] 수(獸), [58] 충(蟲), [59] 어(魚), [60] 화(花), [61] 강두오영(江頭五詠), [62] 초(草), [63] 죽(竹), [64] 목(木), [65] 투증(投贈), [66] 기간 상(寄簡上), [67] 기간 중(寄簡中), [68] 기간 하(寄簡下), [69] 회구(懷舊), [70] 수기(酬寄), [71] 송별 상(送別上), [72] 송별 하(送別下), [73] 경하(慶賀), [74] 상도(傷悼), [75] 잡부(雜賦)

(1)은 개별 시의 제목이 아닌, 상위 분류의 제목을 일단 모두 제시한 것이다. 이들 중 [36]의 ‘월(月)’은 대분류 제목이 누락된 것으로 판단되어, 역주자가 만들어 넣은 것이다. 상위 분류의 제목에는 대분류의 제목이 대부분이지만, 중분류의 성격을 가진 것이 있다. [61]의 ‘강두오영(江頭五詠)’과 같은 제목이 그 하나이다. 18권에서 ‘강두오영’에 포함된 시는 3수인데, 2수는 이미 ‘조(鳥)’ 대분류에서 보았음을 말하고 있다. [61]의 ‘강두오영(江頭五詠)’ 뒤에는 별다른 표시 없이 12수의 시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대분류 ‘화(花)’에 속한다. ‘강두오영’에는 ‘화(花)’에 속하는 16수의 시 가운데 단지 3수만이 속하는 것이다. 이는 대분류 속의 일부가 중분류에 속하고 있음을 보이는 예이다.

[29]의 ‘사시(四時)’는 [30]의 ‘하(夏)’, [31]의 ‘추(秋)’, [32]의 ‘동(冬)’과 동렬에 서 있으나, ‘사시’는 ‘춘, 하, 추, 동’을 아우르는 상위 범주이다. ‘사시’가 ‘춘(春)’의 자리에 있고, ‘춘’이 빠져 있다. ‘사시’를 초대분류 제목으로, 그 아래에 ‘춘(春)’을 보충하여, ‘춘, 하, 추, 동’을 대분류 제목으로 보기로 한다. 이는 [30]의 ‘하(夏)’, [31]의 ‘추(秋)’, [32]의 ‘동(冬)’이란 제목이 고시 몇 수, 율시 몇 수와 같은 할주를 가지고 있는 점을 중시한 결과이고, 춘하추동의 계절이 시에서는 매우 중요한 소재와 제재를 제공하는 대상이라는 점을 중시한 결과이다.

(1)의 분류 중 대분류의 일부에 포함되는 중분류를 제외하고, ‘기행’, ‘기행 하’를 의미 부류가 같은 것으로 보고, 다시 ‘상중하’나 ‘상하’로 되어 있는 것을 성격이 같은 것으로 보고, ‘석로 사관부(釋老寺觀附)’ 뒤에 오는 ‘사관(寺觀)’ 혹은 ‘우설 운뢰부(雨雪雲雷附)’ 뒤에 오는 ‘운뢰(雲雷)’를 합치지 않고 따로 독립시키고, 대분류 제목이 빠진 것으로 보이는 ‘월(月)’을 독립된 분류로 세우고, ‘사시’를 제외하고, ‘춘, 하, 추, 동’을 독립된 대분류로 취급하면, 전체가 64대분류가 된다.

이 숫자는 『중간 두시언해』 영인본을 가지고 검토한 것이다. 흔히 두시의 내용은 52부로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위에 보인 바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초간본 전질이 발견되면 혹 그 정확한 편수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대분류와 중분류 또는 초분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서도 분류의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우선은 위에 같은 분류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두시에 대한 이해가 더 심화되어 더 정확하게 부류가 나누어질 날이 오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언해된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를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 부르는 것은 두보의 원시와 두시를 언해한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편의상 붙인 것이다. 『두시언해』 각권의 권두제나 권말제에는 모두 ‘언해(諺解)’라는 말이 없이 그 권수가 밝혀져 있다.

2.2. 『두시언해』 편찬의 목적

『두시언해』를 편찬한 목적은 중간본에 게재된 조위(曺偉)의 서문에 의하면, 그 첫째 이유는 두시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시가 어렵기 때문에 이를 쉽게 풀이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이를 다음과 같이 보인다.

(2) 『두시언해』 편찬의 첫째 목적

가. 시(詩)는 ‘국풍(國風, 『시경』의 한 체로 『시경』을 가리킴)’과 ‘이소(離騷,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부(賦)의 제목으로 『초사(楚辭)』를 가리킴)’에서 내려와 성하여 이백과 두보를 일컫는다(시선과 시성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본래의 기운이 흐리고 아득한(渾茫한) 상태이다. 단어와 문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난삽(難澁)하여, 주석을 많이 해 놓았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조차 알기 어렵다.

나. 성화 신축년 가을[成化辛丑秋]에 임금께서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 신 유윤겸(柳允謙)에게 명하시었다. 그 내용은 두시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의 주석이 비록 상세하지만 주해 모음[會箋]은 번거로워 갈피를 못잡을 염려가 있고, 수계(須溪) 유진옹(劉辰翁)의 핵심 정리는 간단하나 누락의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의 설이 어지럽고 이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것을 다스려 불가불 핵심을 하나로 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너희들이 책을 편찬하여 보라 하였다.

다. 이에 널리 주석을 수집하고, 불필요한 것을 베어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지리, 인물, 글자의 뜻이 어려운 것은 간략하고 간소하게 하여 그 의미를 생각하고 읽는 데 편하게 하였으며, 또 우리 글로 그 뜻을 번역하였다.

라. 임금이 뜻하신 바의 이른바 난삽한 것은 일목요연하게 글을 이루고 정서하여 임금께 올렸더니, 나에게 서문을 쓰라고 명하시었다.

(2가)는 두시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고, (2나)는 성종이 『두시언해』 편찬을 명하게 된 동기를 말한 부분이다. 동기는 (2가)와 거의 같다. (2다)는 편찬의 과정과 결과를 말한 것이고, (2라)는 난삽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원고를 임금께 보인 것을 말한 것이다.

『두시언해』 편찬의 둘째 목적은 세교(世敎)에 있었다. 세상에서 악한 것을 몰아내고 선한 것을 권장하는 데, 즉 세상을 교화하는 데 시의 큰 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두시언해』도 그러한 목적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3) 『두시언해』 편찬의 둘째 목적

가. 공효의 측면을 생각하면, 시도(詩道)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을 교화하는 데에 있다.

나. 큰 것은, 위로는 종묘(宗廟)의 노래를 지어 성덕을 찬양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민속의 노래로 당대의 정치가를 찬미하고 자극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 악을 징벌하고 새로운 것이 되도록 마음속 깊이 느껴 촉발시키는 것[감발징창(感發懲創)]으로 족하다.

다. 사람의 선과 악, 이것이 공자가 시 삼백 편을 산정(刪定)하여 사악함이 없는 교훈이 있게 한 까닭이다.

라. 시는 중국의 육조(六朝)에 이르러 극히 부미(浮靡, 헛되고 중심이 없음)하여 시 삼백 편의 메시지가 땅에 떨어졌다. 자미(子美), 즉 두보는 성당 시대에 태어나 막힌 것을 척결하고, 퇴풍(頹風), 침울(沈鬱), 돈좌(頓挫, 넘어지고 꺾이는 것)를 떨치고 일어나, 고운 것, 화려하고 왜곡된 것만을 찾는 풍습을 적극 물리쳤다. 난리가 일어나 쥐새끼처럼 도망다니는 때에, 두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아파하고 지성(至誠)과 충성으로 임금을 생각하는 시를 썼다. 충분(忠憤)의 격렬함이 백세를 용동시키기에 족하였다. 그 까닭은 사람을 감발징창(感發懲創)하게 하는 것은 실로 시 삼백 편과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고, 또 세상의 일을 말하고 실제를 진술하는 것은 시사(詩史)라고 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후세의 사람들이 풍월을 읊는다고 비웃을 수 있겠느냐? 성정(性情, 정서)을 새기고 깎는 일은 가히 본받을 만하고 의논할 만하다.

(3가)는 시의 궁극적인 효용이 세상을 교화하는 세교(世敎)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시가 인간을 일부러 퇴폐하게 하고 세상을 더럽게 하고 악에 물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너무나 당연한 기술이다. 얼른 보면 이는 당연한 기술로 보이지만, 여기서는 조금 각도를 달리하여 보기로 한다. 이는 아마도 조위의 개인적인 생각을 적은 것일 가능성이 많다. (3나)는 종묘의 노래이든 백성의 노래이든 감발징창(感發懲創:악을 징벌하고 새로운 것이 되도록 마음속 깊이 느껴 촉발시키는 것)의 공효를 가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3다)는 공자가 시경을 편찬한 것은 사악하지 않게 하기 위함임을 말한 것이다. (3라)는 두시가 역사적 사실을 내용으로 사람을 감발징창케 하는 힘을 가져, 시 자체를 시사(詩史)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자의 시 삼백 편과 표리가 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성종이 두보의 시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이나, 공자가 시 삼백 편에 뜻을 두고 있는 것, 그 아름다운 은혜와 배움을 부르는 것이 시도(詩道)를 만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고, 공자에 있어서의 시 삼백 편의 산정(刪定)과 주자집주(朱子集註)에서의 큰 밝힘이 이제는 두보의 시인데, 그것은 바로 당시 성상(聖上)인 성종에 기인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조위의 서문에 의하면 『두시언해』의 편찬의 목적은 단어와 문장의 난삽함을 덜기 위한 목적이 하나이며, 세상을 교화시키려는 목적이 다른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위의 서에서 잘 언급되지 않은 것은 번역에 관한 것이다. 이는 뒤에서 다시 보기로 한다.

2.3. 『두시언해』 간행 연대의 문제

『두시언해』에 대한 기존의 해제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2년, 즉 1481년으로 보고 있다. 『두시언해』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그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 이를 따르고 있으므로,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1481년으로 보는 것이 매우 일반화되어 지금은 우리 국민 전체의 상식이 되고 있다. 몇 가지 사전이나 해제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다음과 같이 가져와 보기로 한다.

(4) 초간본 간행 연대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

가. 이병주(1958:123) : 『두시언해』의 간행은 성화 17년 신축(성종 12년, 1481년) 12월 상한 성종의 봉명으로 찬하여 강희안 서체의 ‘을해자’로 상재된 최초의 역시서다.

나. 서울대 민족문화연구소 편(1973) 『국어국문학사전』의 ‘두시언해’ 항 : 성종 12년(1481) 간행. 활자본. 25권 19책. 본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번역한 것.

다. 안병희(1971)의 『분류두공부시언해』 해제 : 간행 연대는 중간본에 실린 조위의 서문 등에 의하여 성종 12년(성화 17)임이 확실하다.

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두시언해’ 항 : 초간본은 세종·성종대에 걸쳐 왕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의 문신들과 승려 의침(義砧)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1481년(성종 12)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있는 조위(曺偉)의 서문에 의하면 간행 목적이 세교(世敎)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 이호권(n.d.), 한글디지탈박물관 『두시언해』 전문가 해제 : 1481년(성종 12)에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柳允謙, 1420~?) 등이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언해하여 을해자로 간행한 책이다.

위의 (4가-마)에 보인 바와 같이, 어느 것이나 한결같이 그 간행 연대를 1481년(성종 12)으로 보고 있다. 이 연대는 조위의 서문에 나타난 시기를 기초로 한 것이지만, 이 연도는 분명히 조위가 서문을 작성한 시기로 보아야 한다. 그동안은 서문을 작성한 시기와 간행 연대를 같이 보았다. 조위의 서문에서 관련 사항을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필요한 사항을 부가하여, (2나)를 다시 (5가, 나)와 같이 나누어 가져오고, 서문을 쓴 날짜 관련 사항을 (5다)에 보이기로 한다.

(5) 조위의 두시 서의 편찬 시기 관련 사항

가. 성화 신축년 가을[成化辛丑秋]에 임금께서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 신 유윤겸(柳允謙) 등에게 명하시었다.

나. 그 내용은 두시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의 주석이 비록 상세하지만 주해 모음[會箋]은 번거로워 갈피를 못잡을 염려가 있고, 수계(須溪) 유진옹(劉辰翁)의 핵심 정리는 간단하나 누락의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의 설이 어지럽고 이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것을 다스려 불가불 핵심을 하나로 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너희들이 책을 편찬하여 보라 하였다.

다. 성화 17년 12월 상한(上澣). 승훈랑(承訓郞), 홍문관 수찬(修撰), 지제교(知制敎) 겸 경연 검토관(檢討官), 춘추관 기사관(記事官), 승문원 교검(校檢) 신(臣) 조위(曺偉) 근서(謹書).

(5가)에 의하면, 성종이 유윤겸 등에게 이른바 『두시언해』 편찬의 명을 내린 것이 “성화 신축년 가을[成化辛丑秋]”이다. ‘성화(成化)’는 중국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로 그 신축년(辛丑年)은 1481년에 해당한다. 이 해를 성화(成化) 연호로 말하면 성화(成化) 17년이다. 그런데 (5다)와 같이 조위(曺偉)가 서문을 쓴 것도 ‘성화(成化) 17년’이다. 조위의 서문이 책의 간행과 때를 맞추어 쓴 것이라면, 책의 편찬을 명한 것과 책이 간행된 것이, 많아야 다섯 달밖에 되지 않는다. 음력으로 가을에 해당되는 기간을 7, 8, 9월이라 하고, 그 8월에 성종의 명이 있었다고 했을 때의 계산이 그러하다. 성종의 명이 9월이나 10월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기간은 더 짧아진다. 석 달이 될 가능성도 있고, 성종의 명이 10월 말에 있었다면, 조위의 서문이 12월 상한에 된 것이므로, 그 기간은 두 달이 되든가 그 기간이 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전 25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다.

그 기간 동안에 두보의 시와 같이 난해한 시를 완성도 높은 번역과 정확한 주석을 갖추어 간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만약, 두시의 시구 하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을 때, 그 하나의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문으로 주석이 되어 있다고 하여도 이러한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번역이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섯 달에 25권을 만들려면 한 달에 5권을 완성해야 하고, 한 권을 6일에 완성해야 한다. 단지 번역만이 아니라 번역과 조판과 교정과 인쇄와 제본을 합하여 모두 6일만에 끝내야 한다. 세 달이 걸렸다면, 한 달에 적어도 8권을 완성해야 하고, 한 권을 4일만에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로 한다.

(6) 편찬과 간행 사이의 불가사의한 시간

조위(曺偉)의 서문이 간행시에 쓰여진 것이라면, 전 25권이나 되는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걸린 시간은 많아야 다섯 달, 적으면 두서너 달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두보의 시와 같이 난해한 시를 완성도 높은 번역과 정확한 주석으로 언해하여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간행한다는 것은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래에는 이를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부분과 관련되는 몇 가지 언급을 다음과 같이 가져오기로 한다.

(7)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대한 견해(밑줄 필자)

가. 이병주(1966) : 두시를 주석하는 국가적인 서업(緖業)은 진작 세종 25년(1443) 4월에 비롯하여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은 무론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까지 총동원된 대업으로, 무려 40년만에 결정, 상재(上梓)를 본 아방(我邦) 최초의 역시집임을 재삼 밝혀 둔다.

나. 안병희(1971)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조부터 행해졌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義砧) 등이 성종 12년(1491)에 완성한 것이다.

다. 안병희(1979)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 때부터 행해져 왔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義砧) 등이 1481년(성종 12년)에 완성하여 이 책으로 출판된 것이다.

라. 안병희(1997:18) : 『두시언해』도 서너 달만에 언해가 끝난 것이므로 원고에 잘못이 나타나고, 책이 인출된 뒤에 교정될 수밖에 없었다고 추정된다. 이 교정도 언해가 1481년에 끝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 안병희(1997:20) : 『두시언해』는 언해에 착수한 바로 1481년(성종12) 연말에 전질 25권이 완성되어 을해자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바. 김일근(1964:142) :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조위의 서문 일자에 의하여 성종 12년 12월일로 인정하고 있으나, 그것은 제1권이 선성(先成)된 시기이며, 그 완성 간행은 적어도 근 2년후 성종 14년 7월(실록) 『황산곡시언해(黃山谷詩諺解)』의 하명 직전까지 지연되지 않으면 안 된다.

(7가)에 의하면 『두시언해』 편찬은 세종 25년(1443) 4월에 시작된 것이다. 조위의 서문이 1481년에 쓰여진 것이므로, 그 기간은 39년이나 된다. 『두시언해』 25권을 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간이다. 그러나 세종 25년(1443) 4월에 두시언해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때는 두시 주석서를 모으도록 하였고, 두시에 대한 여러 주석을 참고하여 교감본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세종실록』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8) 세종 25년(1443) 4월 21일 기사

중외(中外)에 두시(杜詩)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를 구입(購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으므로 구입하도록 한 것이었다.

두시 주석서를 모으는 것이 언해 작업의 기초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선은 두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한 것은 교감본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또한 번역을 위한 기초 작업의 성격을 가지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이루어진 것이 『찬주분류두시』와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7가)와 같이, 언해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7나)에서는 성종 12년을 괄호에 1491년으로 적고 있다. 이것이 바로잡힌 것은 (7다)에 와서이다. 1491년이 1481년로 바뀌었다. (7라, 마)에서는 이것이 다시 확인된다. (7라)에서는 두시언해가 “서너 달만에 언해가 끝난 것”으로 보고 있고, (7마)에서는 두시언해가 언해를 시작한 바로 그 해 연말에 전질 25권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6)에 제시한 것과 같이 25권이나 되는 거질의 책을 단 서너 달만에 완성한다는 것은 컴퓨터 조판과 고도의 인쇄술이 발달한 21세기인 지금에도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된 상태라고 하더라도, 조판, 교정, 인쇄, 제본에 드는 시간만도 서너 달은 걸릴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라고 볼 수 없다. (5나)에 보는 바와 같이, 주석만 하더라도 그것을 통일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은 『찬주분류두시』의 것을 좇는다고 하여도, 번역이 남아 있다. 산문이 아닌, 시의 번역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책의 간행이 번역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활자를 만들어야 하고, 조판을 해야 하고, 교정을 보아야 하고, 인쇄를 해야 하고, 제본을 해야 한다. 종이가 부족하면 그것을 조달해야 한다. 단기간에 책의 간행이 끝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7바)에서는 특이하게 『두시언해』 초간본의 간행 시기를 성종 14년(1483) 7월로 보고 있다. 김흔의 ‘번역두시서’에 의하면 성종 12년은 『두시언해』 제1권이 먼저 이루어진 시기이기 때문이다. 성종 12년에 『두시언해』의 간행이 끝난 것은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성종 14년 7월에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黃山谷詩)』를 언해하라는 명을 받게 되는데, 그 이전에 『두시언해』의 간행이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의강(2006:76-77)에서는 유윤겸의 품계와 전보를 중시하고 있다. 유윤겸은 조위의 서문에 의하면 성종 12년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있었다. 그 후 약 1년 동안 홍문관에서 봉직하다가 당상관인 통정대부로 품계가 승진되고 부제학에 임명된다. 성종 14년(1483) 2월 11일에는 통정대부 공조(工曹) 참의(參議)로 전보된다. 이를 이의강(2006:77)에서는 『두시언해』의 일이 끝났기 때문에 홍문관보다는 업무가 수월한 공조에 전보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문과의 사람이 공조에 전보된다는 것을 휴식을 취하도록 한 것이라는 해석은 온당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휴식을 취하게 하려면 그냥 쉬게 하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유윤겸을 공조에 전보한 것은 공조에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활자를 만들고, 조판을 하고, 인쇄를 하는 작업이 이때에야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록에는 성종 16년에도 유윤겸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지칭하고 있다. 성종 19년(1488)에는 호조 참의가 되기도 한다. 이는 1484년(성종 15) 유윤겸은 홍문관 부제학의 자리를 내놓고 공조 참의로 간 것이 아니라, 홍문관 부제학의 직을 가지고 공조 참의로 발령을 받은 것이라 할 것이다. 겸직을 한 것을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둘째, 성종 13년(1482)년의 실록 기사에는 홍문관 부제학 유윤겸 등이 흉년의 때를 맞아 출판 사업의 정지를 청하는 기록과 임금이 그것을 윤허하는 기록이 나온다. 중단을 요청하는 사업에 『두시』에 관한 사업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9) 성종 13년(1482) 7월 6일 셋째 기사

해마다 흉년이 드는 것이 근고(近古)에 없는 바로서, 바야흐로 흉년을 구제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사전(四傳)과 춘추(春秋), 강목신증(綱目新增), 문한류선(文翰類選), 두시(杜詩), 이백시(李白詩), 용학구결(庸學口訣)과 같은 것을 모두 국(局)을 설치하여 공억(供億)이 따르게 되니, 만약 하루의 비용을 논하면 작으나, 날짜를 합하여 계산하면 굶주린 백성을 살리는 약간의 자본이 됩니다. 생각건대 오늘날의 급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9)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나라 살림이 어려우므로, 출판 사업을 중단하자는 제안을 유윤겸 등이 하고 있는 장면이다. 여기에 『두시(杜詩)』가 포함되어 있다. 이미 성종 12년에 『두시언해』가 완성되었다면, 성종 13년에 따로 국(局)을 두어 예산을 써 가면서 또 『두시』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두시언해』는 성종 13년(1482)에도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혹 이때의 일은 『두시언해』가 아닌 한문본을 말하는 것이란 지적도 있으나 그 근거를 발견하기 어렵다.

셋째, (7라, 마)에 의하면, 『두시언해』를 서너 달 동안에 전 25권을 한꺼번에 간행하려면, 모든 주석 전문가, 번역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야 하고, 또 나라의 모든 행정력과 출판 관련 물자가 총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두시언해』를 출판하는 일이 그렇게 급한 일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9)에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성종 12년에도 흉년이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시기에 『두시언해』 출판에 모든 행정력과 출판 물자를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9)는 하던 일도 중지하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두시에 대해서는 세종 15년에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다. 예조 좌참판 권도(權蹈)가 상언하는 내용이다.

(10) 세종 15년(1433) 계축 둘째 기사

우리 태종 대왕께서 전에 두시(杜詩)를 읽어 보시려고 하시므로, 신의 선친 권근(權近)이 ‘그것은 임금으로서 배울 만한 것이 못되오니, 청컨대 『주역(周易)』을 강습하옵소서.’ 하여, 태종께서 그대로 좇으셨으니, 두시도 오히려 불가하다 하옵거늘, 그 이단의 황당한 글을 경연의 석상에서 강론하심이 옳겠습니까?

두시(杜詩)와 같은 것은 임금으로서 배울 만한 것이 못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신 『주역(周易)』을 강습하도록 청하여 태종이 그대로 좇았다는 것이다. 성종 15년(1484)에도 거의 유사한 내용을 좌승지(左承旨) 권건(權健)이 아뢰는 내용이 나온다.

(11) 성종 15년(1484) 갑진(甲辰) 첫째 기사

예전 태종(太宗)께서 두시(杜詩)를 진강하고자 하시니, 두시는 시사(詩史)로서 모두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말이지만, 신의 조부(祖父) 권근(權近)이 오히려 진강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이 『문한유선』이겠습니까?

이를 보면, 『두시언해』 전권을 서너 달만에 완간하기 위하여 나라의 모든 연구 인력과 행정력을 총동원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모든 것을 무릅쓰고 두시의 번역에 국가의 총력을 기울였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넷째, 김흔(金訢)의 문집인 『안락당집(顔樂堂集)』 권2에 실려 있는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에는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는 언급이 있다.

(12)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

몇 달 간 문서를 견주고 교감하여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凡閱幾月 第一卷先成]. 이를 정서하여 전하께 나아가 성상의 재가를 품의하니 성상께서 보시고 가하다고 하시고 일을 끝낼 것을 명하시었다(上賜覽曰可 令卒事). 이어 신에게 서문을 쓸 것을 명하시었다.

조위의 ‘두시서’와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흔의 서문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 있고(이병주 1965, 1966), 『두시언해』가 두 개의 서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김일근(1964, 1966)의 입장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김흔의 ‘번역두시서’의 내용이 더 자세하다. 조위의 ‘두시서’에는 서문을 쓴 날짜가 명기되어 있어 김흔의 서문과 구별된다.

김흔의 서에서 자세한 것의 하나가 ‘제1권이 먼저 이루어져 재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병주(1966)에서는, 김일근(1964)이 말하는 것과 같은 ‘권1’이 아니라 “진상(進上)인 견본(見本)의 1권”으로 해석하였다. “진상(進上)인 견본(見本)의 1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안병희(1997)에서 보면 그것은 『두시언해』 전 25권 1질(帙)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석이고 번역이고 판식이고 인쇄고 제본이고 간에 모든 일이 다 끝난 뒤에 재가를 받는 것이란 뜻이다.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임금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김일근(1964)의 해석과 같이 여기서는 제1권의 원고가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12)의 밑줄 친 부분도 이해가 된다. ‘가하다고 하시고 일을 끝낼 것을 명하시었다’고 하는 것은 제1권을 제외한 나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편찬에 걸린 시간도 적합하게 되고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제1권의 원고를 만드는 데만 서너 달이 걸렸다는 것이므로 그 기간도 무리가 없게 된다.

다섯째,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서문 작성이 곧 그 책의 간행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서문을 맨 나중에 쓰고 서문을 쓴 뒤에는 곧 출판이 되기 때문에 서문 연도와 출판 연도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간기(刊記)가 있으면 그에 적시된 날짜가 간행 연도가 되는 것이고, 내사기가 있는 것은 내사 연도를 흔히 그 책의 간행 연대로 본다. 서문이 쓰여진 연대와 내사 연도가 다를 경우, 당연히 내사 연도가 간행 연도가 되는 것이다. 25권이나 되는 전질이 여러 해에 걸쳐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서문이 제1권에만 있다면, 서문이 쓰여진 시기는 당연히 간행 시기보다 몇 년이나 앞서게 된다.

『두시언해』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책의 간행이 끝난 뒤에 그 한 질을 임금에게 진상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하여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와 같은 언급은 실제로 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여섯째, 김일근(1964)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4년(1483) 7월로 잡고 있다. 이것은 성종이 『황산곡시집언해(黃山谷詩集諺解)』를 명한 시기를 참고하여 그 전에 『두시언해』가 끝난 것으로 보아 그 연대를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일근(1966)에서는 “물론 성종 14년 7월이란 절대 숫자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될 수 있는 것의 하나는 반치음 ‘ㅿ’의 소실과 관련된사실이다. 이기문(1972a, 1972b)에 의하면, 반치음 소실을 가장 먼저 보이는 문헌이 『두시언해』이다. 또 이기문(1972b: 37)에는 『두시언해』에 ‘’와 함께 ‘이’가 나타나는 것이 반치음이 소실된 가장 이른 시기의 예이다. 그 뒤에 언급되는 것이 『번역박통사』이다. 중세어 자료를 검색해 보면, ‘’의 반치음이 소실되어 ‘이’로 처음 나타나는 것이 1481년의 『두시언해』이다. 그 다음이 『구급간이방』(1489년)이고, 그 다음이 『삼강행실도』(동경대본)이고, 그 다음이 ‘순천김씨언간’이고, 그 다음이 『속삼강행실도』(1514년)이고, 그 다음이 『번역노걸대』(1517년)이다.

『두시언해』를 제외하면, 의서(醫書)나 구어적 특성을 많이 가지거나 일반에게 널리 읽힐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에 ‘이’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과 비교하면, 『두시언해』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두시언해』는 구어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책도 아니고 일반에게 널리 읽힐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가 가장 먼저 나타난다. 이 이유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가 늦은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초간본에 ‘’와 함께 ‘이’가 나타나는 것은 책의 편찬이 꽤 오래 지속되었으며, 편찬 도중에 반치음 소실의 싹이 반영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구급간이방』(1489년)과 연대를 맞추면 『두시언해』 초간본이 완간되는 것은 아마도 1489년경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것을 1481년부터 따지면 8년 뒤가 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로 한다.

(13) 『두시언해』 간행 연도

『두시언해』의 간행을 1481년 가을에 성종이 명하고 그 전(全) 25권이 1481년 12월 상순(上旬)에 완간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와 반치음의 변화를 토대로 추측하면 『두시언해』 초간본의 완간은 1489년 즈음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2.4.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인물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인물은 위에서 간행 연대를 논의하는 자리에 이미 등장하였다. 편찬 관여자의 이름이 등장한 예를 (4)와 (7)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가져오기로 한다.

(14) 『두시언해』 편찬자에 대한 언급

가. 서울대 민족문화연구소 편(1973) 『국어국문학사전』의 ‘두시언해’ 항 : 성종 12년(1481) 간행. 활자본. 25권 19책. 본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번역한 것.(=4가)

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두시언해’ 항 : 초간본은 세종·성종대에 걸쳐 왕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의 문신들과 승려 의침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1481년(성종 12)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있는 조위(曺偉)의 서문에 의하면 간행 목적이 세교(世敎)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4다)

다. 이병주(1966) : 두시를 주석하는 국가적인 서업(緖業)은 진작 세종 25년(1443) 4월에 비롯하여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은 무론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까지 총동원된 대업으로, 무려 40년만에 결정, 상재(上梓)를 본 아방(我邦) 최초의 역시집임을 재삼 밝혀 둔다.(=7가)

라. 안병희(1971)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조부터 행해졌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 등이 성종 12년(1491)에 완성한 것이다.(=7나)

마. 최현배(1940/1976:122) : 『증보문헌비고』(권245, 장15)에 기대면, 성종이 여러 선비를 명하여 두시를 주석할 새 유윤겸이 백의(白衣)로서 뽑혔다 하며, 그 주석된 것을 언해하여서 두시언해를 역은 이는 성종조의 조위요, 의침도 언해에 협력하였다.

바. 안병희(1997) : 언해에 참여한 사람은 유윤겸을 중심한 홍문관의 문신들이다. 이때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의침은 훨씬 전에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세종 때의 두시 주해에는 승려와 백의(白衣)가 참여하였다는 당대의 기록이 있으나, 언해에 대하여는 그러한 기록이 썩 후대에 나타날 뿐이다.

(14가)에서는 조위(曺偉), 의침(義砧)이 언급되고, (14나)에서는 유윤겸(柳允謙), 의침이 언급되고, (14다)에서는 구체적인 이름의 명기 없이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이 언급되고, (14라)에서는 유윤겸, 의침이 언급되고, (14마)에서는 조위, 의침이 언급되나, (14바)에서는 의침이 제외되고 있다.

이 문제에 깃들인 가장 큰 혼동의 하나는 두시에 대한 주석과 언해를 선명하게 구별하지 않은 것이다. (14다)가 전형적인 예이다. 두시에 대한 언해가 40년 동안 행해진 국가적인 대업이라고 한 것은 주석과 언해를 다 합해서 한 말임에 틀림이 없다. 조위의 서문에 등장하는 두시언해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유윤겸이다. 그러나 (14마)에 의하면, 유윤겸은 주석과 관련되는 인물이다. 조위의 서문에서도 주석과 관련되는 문맥에 유윤겸이 등장한다.

실록 세조 1년(1455) 8월 26일 다섯 번째 기사에는 유윤겸과 함께 유휴복(柳休復)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기를 청원하는 상소를 하고 있다. 이를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15) 세조 1년(1455) 8월 26일 유윤겸과 유휴복의 상소

유기(柳沂)의 손자인 유휴복(柳休復), 유윤겸(柳允謙)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할아버지 유기가 죄를 입을 때에, 아버지 유방선(柳方善)·유방경(柳方敬) 등이 이에 연좌되어 모두 신몰(身沒)하여 관노로 되었는데, 을미년에 사유(赦宥)를 받았으나, 언관(言官)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환속(還屬)되었다가, 정미년에 외방에서의 임의로운 거주가 허용되고, 무신년에는 경외(京外)에서의 임의로운 거주가 허용되었습니다. 또 할아버지 유기는 민무구(閔無咎) 형제의 죄에는 간여하지 않았는데, 단지 어떤 사람이 민무구 등은 가련한 사람이라고 한 말을 유기와 더불어 같이 들었다고 말하여 이로써 죄를 입었고, 신의 아버지도 역시 오래지 않아서 사유하심을 입어 평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더욱이 이 일은 신 등(等)이 출생하기 전에 입었던 것이니, 빌건대 홍은(鴻恩)을 내리시어 특별히 부시(赴試)를 허가하여 주소서.

유휴복, 유윤겸이 이로써 부시를 허락받아 유휴복은 1460년에, 유윤겸은 146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유윤겸이 두시에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은 성종 11년 기사에서 알 수 있다.

(16) 성종 11년(1480) 10월 26일(임신), 시독관(侍讀官) 이창신(李昌臣)의 주청

“두시(杜詩)는 시가(詩家)의 근본인데, 전 사성(司成) 유윤겸이 그 아비 유방선(柳方善)에게 전수(傳受)하여 자못 정통하고 능숙하니, 청컨대 연소(年少)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수업(受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고 하였다.

유윤겸이 이때 자신에게 수업을 받은 문신들과 함께 언해에 착수한 것으로 본 것이 안병희(1997:7)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누가 언해를 진행하였는지는 적어도 실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유윤겸이 두시에 능숙하고 정통하였다고 하니, 그가 관여하였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유휴복도 두시에 깊이 있는 지식을 가져 세종 때 백의로, 승 만우(卍雨)와 함께 두시의 주해 작업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유휴복은 성현의 중씨(仲氏)인 성간(成侃)에게 두시를 가르쳐 문리를 크게 깨치게 하였다고도 한다(안병희 1997 참조). 그러나 유휴복은 성종 때의 두시 언해와 관련하여 특별히 언급되지 않고 있다. 유휴복은, 당시 62세인 유윤겸의 종형으로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도 안병희(1997)이다.

조위(曺偉)는 성종이 유윤겸에게 두시언해를 명하였을 때(1481), 28세로 정6품의 직위에 있었다. 조위는 성종 6년(1475) 예문관 검열로 있었으나, 금주령을 어겨 처벌을 받기도 한다. 같은 해 10월 사헌부에서는 조위를 경상도 개령현(開寧縣)에 부처(付處, 조선시대의 형벌. 유형의 하나. 서울과 고향의 중간 지점에서 거처하게 하는 것)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특별히 원에 의하여 가족이 살고 있는 금산군(金山郡)에서 부처하게 하였다. 성종 7년(1476)에는 진도에 부처된 박증(朴增)과 함께 금산에 부처되었던 조위가 방면된다.

성종은 12년 10월 18일 권건, 김흔, 조위 등에게 “이단(異端)을 막지 않으면 성인(聖人)의 도(道)가 유행(流行)할 수 없으며 이단을 금지시키지 않으면 성인의 도가 시행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논문을 지어 바치게 한다. 성종 138권, 13년(1482) 2월 22일(신유) 기사에는 조위가 시독관(侍讀官)으로 ‘매’를 기르는 일에 관하여 진언하는 기사가 나온다. 성종 22년(1491) 5월 28일에는 조위가 동부승지로 임금에게 다른 관직에 임명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본직(本職)에 겸무(兼務)하여 학업을 익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주청을 올린다. 성종 23년(1492) 10월 1일에는 조위가 좌승지로 전답의 부세 외에 요역(徭役)이 심히 번거로우니 이것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원망을 가질 듯하다는 진언도 한다. 조위는 성종 12년 이후 시독관, 동부승지, 좌승지와 같이 승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연산군 10년(1504) 12월 23일에는 다음과 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

(17) 연산군, 10년(1504) 12월 23일 기사

『분류두시(分類杜詩)』를 내리며 이르기를, “서문은 바로 죄인 조위(曺偉)가 지은 것이니 삭제하고, 또 죄인 성현(成俔) 같은 사람이 지은 서문이나 발문도 아울러 삭제하라.”

여기서 『분류두시(分類杜詩)』는 『두시언해』를 가리킨다. 연산군 때 조위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실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17)에 의하면 연산군 10년(1504)에 『두시언해』에서 조위 서문이 삭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17)의 기사는 처음 『두시언해』에 실린 서문이 조위의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17)의 일이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7)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미 배포된 모든 『두시언해』를 수거하여 그 서문을 수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각 개인에게 배포된 책을 다 수거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더구나 연산군의 재위는 10년으로 끝나므로, (17)의 왕명은 적어도 완전히는 수행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혹시 김흔(金訢)의 서문이 지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초간본에서 조위의 서문을 제거한 뒤에 그 빈칸을 메우기 위하여 김흔의 서문이 쓰여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김흔의 서문에 그것을 쓴 날짜가 없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조위는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것일까? 서문을 쓴 것이 편찬에 참여하였다는 정말로 확실한 증거가 되는가? 유윤겸에 대한 기록과 같이 조위도 두시에 정통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안병희(1997)에 의하면, 두시 언해에 참여한 사람은 유윤겸을 중심으로 한 홍문관 문신들이다. 조위는 시독관, 동부승지, 좌승지와 같은 벼슬을 하였다. 그것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자리이다. 조위는 홍문관의 문신이라고 할 수 없다. 홍문관 문신들만이 언해에 참여한 것이라면, 조위는 서문만을 쓰고 언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반대의 증거도 찾아지지 않으므로, 조위를 편찬에 관여한 인물로 보기로 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로 한다.

(18) 『두시언해』의 편찬에 관여한 인물

가. 종래에는 유윤겸, 조위, 의침, 유휴복 등이 언해에 참여한 것으로 보았으나, 의침이나 유휴복은 두시를 주석하는 일에는 참여하였으나, 두시를 언해하는 일에 참여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나. 성종의 명을 받은 것이 유윤겸이므로, 『두시언해』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 문신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이다.

다. 조위는 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벼슬을 하였다. 연산군 10년에는 『분류두시』에서 조위의 서문을 삭제하라는 명이 떨어진다. 이는 역설적으로 『두시언해』에 조위의 서문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그가 두시 언해에 참여하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서문만 쓰고 편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러우므로, 그 반대의 증거나 나오지 않는 한, 조위를 편찬 참여자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언해 참여자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과의 문신들과 조위로 그 범위가 좁혀진다.

2.5. 『두시언해』의 저본(底本)

위의 (8)에 보인 바와 같이 세종 25년(1443)에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중외(中外)에 두시(杜詩)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를 구입(購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세종은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이다.

이 편찬 작업을 맡은 것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신석조(辛碩祖) 등 6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주본(會註本)이 세종대에 간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485년(성종 16)에 간행된 갑진자본(甲辰字本)과 병자자본(丙子字本)이다.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는 송나라 서거인(徐居仁)이 편한 『집천가주분류두공부시집(集千家註分類杜工部詩集)』에 의거하여 편차와 분류식을 따르고, 원나라 고숭란(高崇蘭)이 편한 『집천가주비점분류두공부시집(集千家註批點分類杜工部詩集)』에 따라서 유진옹(劉辰翁)의 비점을 인쇄해 넣은 것이라 한다.

『두시언해』가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하여 편찬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해를 모으고 그것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서 이미 주석본이 만들어졌다면, 언해를 할 때에 그것을 참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찬주분류두시』가 25권인 것과 『두시언해』가 25권인 것이 일치한다(김정은(n.d.), “『찬주분류두시』해제” 참조). 다만 책수는 『찬주분류두시』가 21책인 데 대하여 두시언해는 17책(혹은 19책)이어서 차이를 가진다.

책의 권차, 시를 분류한 문목(門目), 시의 제목과 본문 등에 있어서 『두시언해』의 체재는 대체로 『찬주분류두시』의 체재와 일치한다. 『찬주분류두시』는 언해본이 아니므로 당연히 언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 언해본에도 협주가 있으나 그 양은 『찬주분류두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찬주분류두시』는 회주본(會註本)이나 회전(會箋)의 성격을 가지므로, 주석의 양이 많다.

언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 외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행을 나누는 방식의 차이이다. 『두시언해』는 거의 예외 없이 두시에서 대가 되는 2행씩을 한 행으로 잡은 데 대하여, 『찬주분류두시』에서는 행의 길이가 들쑥날쑥하여 일정하지 않다. 『찬주분류두시』는 왜 행의 길이에, 같은 시에서도 차이를 두고 있는가? 이는 주석의 양을 고려한 조치로 여겨진다. 행이 길어지면 주석의 양이 많아질 수 있다. 따라서 주석이 많아져 주석만 계속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행의 길이를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조정한 것이다. 그러나 언해에서는 주석을 극히 절제하였기 때문에, 주석의 양을 고려하여 행의 길이를 조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 판본이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전하는 『찬주분류두시』 판본에는 갑진자본(1485년), 병자자본(1523년 추정), 갑인자본(1524년), 훈련도감자본(1615년) 등이 있으나, 『두시언해』의 편찬이 시작된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가 있을 것으로 가정되고 있을 뿐이다.

2.6. 『두시언해』 중간본과 언어적 특징

중간본은, 장유(張維)의 서문에 의하면 인조 10년(1632)에 『두시언해』 초간본이 보기 힘들어지자, 경상감사 오숙(吳䎘)이 대구부사 김상복(金相宓)의 도움을 받아 목판본으로 간행한 책이다. 오숙은 한 질을 얻어 베끼고 교정하여 영남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시켰다고 한다.

이 중간본은 초간본을 복각(覆刻)한 것이 아니라 개간(改刊)한 것이므로, 15세기 국어를 보여 주는 초간본과는 달리 17세기 국어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국어사적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중간본은 초간본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도 있고, 이와는 달리 오각(誤刻)에 의한 잘못도 있다. 중간본은 전권이 전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하여 초간본은 1, 2, 4권이 전하지 않고, 5권은 공개를 하지 않고 있는 상태로 알려져 있다.

중간본과 비교하면, 초간본에는 반치음 ‘ㅿ’이 쓰인 것이 특징이고,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음(牙音) 표기에 ‘ㆁ(옛이응, 꼭지 달린 이응)’이 사용된 것도 초간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어느 경우에나 모두 반치음이 쓰인 것은 아니다. 초간본이라도 ‘’[間]는 ‘하  예  몰애옛 며기로다(하늘 땅 사이에 한 모래의 갈매기로다)〈두시(초) 3:35ㄱ〉’와 같이 반치음 ‘ㅿ’이 쓰인 것이 일반적이나, ‘虛空 밧긘  매 잇고  이옌 두 며기로다(허공 밖에는 한 매 있고, 강 사이에는 두 갈매기로다.)〈두시(초) 3:26ㄴ〉와 같이 ‘이’로 쓰인 것이 나타난다. 유니콩크 자료에 ‘ 故園에 가고져 논 미로다〈두시(초) 10:33ㄴ〉’ 및 ‘ 어느  시러곰 됴히 열려뇨〈두시(초) 10:39ㄴ〉’와 같이 ‘’이 ‘’과 같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입력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영인본에는 이 자리에 반치음이 그대로 있다.

초간본에도 반치음이 소실된 예가 나타나는 것은 초간본의 간행이 늦어져 후대의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는 두시언해가 1481년말 몇 달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초간본에도 ‘상구(上句)’과 같은 표기가 나타나고 ‘구름’과 같은 표기도 나타난다. 이는 초간본에 모음조화가 약화되어 가는 현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깃[羽]’에 대하여 ‘짓’과 같은 표기가 초간본에 나타나기도 한다. 15세기에는 ‘짓’이란 어형이 잘 나타나지 않고 ‘깃’이 더 일반적인데, 『두시언해』에는 ‘깃’도 나타나고 ‘짓’도 나타난다. ‘안자셔 鴛鴦 다딜어 닐에 호니 기시 기우니 翡翠ㅣ 도다(앉아서 원앙을 다구쳐 일어나게 하니 깃이 기우니 물총새가가 나직하도다.)〈두시(초) 15:26ㄴ〉’에서와 같이 당시의 일반적인 어형인 ‘깃’이 나타나는 반면, ‘時節이 바라온 제 사 이리 急促니 미 거스리 부니 짓과 터리왜 야디놋다(시절이 위태로운 때 사람의 일이 촉급한데, 바람이 거슬려 부니 깃과 털이 해어지는구나.)〈두시(초) 7:15ㄴ〉’에서와 같이 ‘짓’이 쓰여, 구개음화가 적용된 예가 있음을 보인다. 두시언해가 1481년 말 몇 달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같은 차이가 나타나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3. 『두시언해』 권18 해제

3.1. 『두시언해』 권18의 서지 사항

본 역주은 통문관(通文館)에서 영인한 『두시언해』 권지 17, 18 에서 85쪽~130쪽에 영인된 권지 18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판식은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반광곽(半匡郭)은 유계(有界) 8행 17자, 번역문 및 협주는 쌍행 17자이며, 판심은 상하 내향 2엽 흑어미이다. 서명은 ‘분류두공부시 권지십팔(分類杜工部詩 卷之十八)’이며, 판심제는 ‘두시 십팔(杜詩十八)’이다.

『두시언해』 권18은 전체가 23장으로, 언해된 시는 대분류로 ‘화(花), 초(草), 죽(竹), 목(木)’의 4부가 있으며, 특이하게 중분류라 할 수 있는 강두오영(江頭五詠)이 있다.

각 부에는 ‘화(花)’에 9편(16수), 강두오영(江頭五詠)에 3편, 초(草)에 3편, 죽(竹)에 3편, 목(木)에 14편 등 총 30편의 시가 언해되어 있다. 여기서 ‘편’은 제목을 중심으로 그 편수를 센 것이다. 하나의 제목에도 여러 수(首)의 시가 포함될 수 있다.

형식상으로만 보면, 대분류 제목 ‘화(花)’에 ‘탄정전감국화(歎庭前甘菊花)’ 1편만이 언해되어 있는 것과 같이 되어 있다. 대분류 제목 ‘화(花)’의 할주에는 ‘고시(古詩) 3수, 율시(律詩) 13수’와 같이 되어 있기 때문에, ‘화(花)’에는 16수의 시가 언해되어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되는 다른 특이점은 형식상 ‘강두오영(江頭五詠)’에 9편의 시가 언해되어 있는 것이다. ‘강두오영’의 할주에는 ‘이수(二首)는 견조문(見鳥門)다(2수는 ‘새’부에서 보았다)’와 같이 되어 있으므로, ‘강두오영’에 속할 수 있는 것은 3수뿐이다. 그러나 ‘강두오영’에는 6편의 시가 더 있다. ‘강두오영’에 넷째 수로 포함된 ‘풍우간주전락화의위신구(風雨看舟前落花戱爲新句)’는 ‘배 앞’이 드러나 있으므로, 내용상 ‘강두’에 속하지 않는다. 이 제목에는 ‘낙화’가 들어 있어, 이 시는 대분류 ‘화(花)’에는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분류 ‘화(花)’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탄정전감국화’ 1수를 포함하여, ‘강두오영’의 3수 및 나머지 5수와 ‘강반독보심화칠절구(江畔獨步尋花七絶句)’가 포함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끝의 제목에는 ‘칠절구(七絶句)’가 들어 있다. 이를 7수의 시로 보면, ‘화’에는 16수의 시가 포함되는 것이 된다. 대분류 ‘화(花)’에 포함되는 시를 ‘고시(古詩) 3수, 율시(律詩) 13수’라 한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강두오영’이 ‘중분류 제목’이라는 것인데, 형식상 대분류 제목과 위계에 차이가 없이 제시되어 혼동의 염려가 있다. ‘강두오영’에는 ‘고시 몇 수’ 혹은 ‘율시 몇 수’와 같은 할주가 달려 있지 않다. 대분류 제목에 이러한 할주가 빠지는 일이 없는 것과 큰 대조를 이룬다. 이는 ‘강두오영’이 대분류 제목이 아님을 말해 주는 하나의 징표가 될 수 있다.

『두시언해』 권18, 제1장 앞면

다음 쪽의 오른쪽에 보인 사진은 1955년 통문관에서 영인 간행한 두시언해 권18의 제1면을 보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해는, 한문 원문에 구결을 달고,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표시하고, 또 한문 원문의 이해에 필요한 주석을 부가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통상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두시 원문에 구결이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다른 언해본과는 눈에 띄게 차이지는 점이다. 『찬주분류두시』에도 두시 원문에는 어떠한 종류의 구결도 달려 있지 않다. 두시 원문의 각 한자에 한자음이 달려 있지 않은 것이 불경 언해와 차이지는 점이다. 『두시언해』가 일반 대중이나 초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자, 한문에 능숙한 지배 계층을 위한 책이기 때문에, 그 한자에 한자음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두시언해』의 주석에는 구결이 달려 있어, 『찬주분류두시』와 차이를 보인다. 『찬주분류두시』는 우리말 번역을 가지지 않는 회주본이므로 자연히 주석의 양이 많아지게 되었다. 『두시언해』에는 ‘언해’에 『찬주분류두시』의 한문 주석의 내용이 상당 부분 흡수되었기 때문에 주석의 양이 상당히 줄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언해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내용을 주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자세한 주석이나 주변적인 내용도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3.2. 『두시언해』 권18의 오자, 탈자, 희귀어 등

3.2.1. 언해, 할주 및 원문의 탈자, 오자 등

(1) (2ㄱ) 원문의 ‘서근유인점(庶近幽人占)’이 ‘幽隱 사 占得호매 거 갓갑도다’와 같이 번역되었다. 언해자는 원문의 ‘서(庶)’를 ‘거(거의)’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그 언해가 ‘幽隱 사 占得호매 거 갓갑도다(숨은 사람의 차지함에 거의 가깝도다)’와 같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서(庶)’는 ‘바라다’로 번역되었어야 한다. 이를 반영하면, 원문의 해당 구절은 ‘숨은 사람의 차지가 되기를 바란다’와 같이 된다.

(2) (7ㄴ) 원문의 ‘보답춘광지유처(報荅春光知有處)’의 한자 ‘답(答)’이 ‘답(荅)’으로 되어 있고, 할주의 ‘수를 머거 人生 보내요미 春光報荅논 이리라’에서도 ‘답(答)’이 ‘답(荅)’으로 되어 있다. 『두시언해』 전체에서 한자 ‘답(答)’이 ‘답(荅)’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두시언해』 필사자의 개인적인 습관이나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답(荅)’은 ‘좀콩, 팥, 마름쇠, 당하다’를 뜻하고, ‘답(答)’은 ‘대답하다, 맞다, 맞추다’를 뜻하는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구별했어야 한다.

(3) (7ㄴ~8ㄱ) 원문의 ‘류련희접시시무(留連戱蝶時時舞)’에 대한 언해문이 ‘머므□셔 노 □ 時時예 춤츠고’와 같이 네모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머므□셔’는 ‘류(留)’에 대한 번역이므로, 네모 부분은 ‘러’인 것이 분명하고, ‘□’ 부분은 원문의 ‘접(蝶)’에 대한 번역이므로, 네모 부분은 ‘나’인 것이 분명하다.

(4) (13ㄱ) 언해문 ‘큰 지비 다가 기울면 梁棟 오져 조로이 너기리니(큰 집이 만약 기울면 들보와 기둥 만들고자(만들려고) 중요하게 여길 것이니)’에서 ‘조로이’는 ‘종요로이, 종요롭게, 중요하게’를 뜻하는 말로, ‘조[宗要]+-(형용사 파생 접미사)-+-이(부사 파생 접미사)’에서 ‘--’의 ‘ㅂ’이 연철되어 ‘비’가 되고, ‘ㅂ’이 약화되어 ‘-’가 되고, 다시 ‘ㅸ’이 [w]로 약화됨에 따라, ‘’가 ‘로’로 되고, 다시 ‘’가 ‘’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표기는 음운 법칙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 할 수 있으나, 표기법상으로는 불규칙한 것, 혹은 일탈형(逸脫形)이라 할 수 있다.

(5) (16ㄴ) 언해문 ‘혀니 다 벌어지로소니 호매 맛호 일흐리로다(깨뜨리니 다 벌레인 것이니, 따거나 줍는 것에 마땅함을 잃을 것이로다(따거나 줍는 것은 온당한 것이 아니다)’에서 ‘호매’는 ‘[摘, 采]-+-오(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ㅁ(명사형 어미)+애(처격 조사, 부사격 조사)’와 같이 분석되는 것이지만, ‘-’는 ‘-’의 잘못이다. ‘다’의 어간을 ‘다’로 잘못 인식한 것이다. 현대의 우리가 ‘따다’를 ‘땋다’로 잘못 아는 것과 흡사한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어간이 ‘-’라면, 거기에 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 ‘-오-’를 가진 명사형 어미 ‘-ㅁ’과 처격의 부사격 조사 ‘애’가 연결 되면, ‘매’가 된다.

(6) (16ㄴ) 원문 ‘분연불적구(紛然不適口) 기지존기피(豈止存其皮)’에 대한 할주문 ‘이 히 업서 거플 이실  아니라 이베 맛디 몯디 니 시라(이는 살이 없어 껍질만 있을 뿐 아니라, 입에 맞지 못하다 이르는 것이다)’에서 ‘몯디’는 ‘몯다’의 잘못이다.

(7) (19ㄱ) 원문의 ‘천계위수사(天雞爲愁思)’의 ‘천(天)’이 언해문에서는 ‘대(大)’와 같이 ‘천(天)’의 상부 ‘한 일 획’이 사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 아주 짧은 가로획과 같은 것이 보이는 듯도 하나, 분명하지 않다.

(8) (21ㄴ) 원문 ‘이근방이첨(移根方爾瞻)’을 언해에서는 ‘옮겨 심군 불휘 뵈야로 너를 보노라(옮겨 심은 뿌리를 바야흐로 너를 보노라)’에서 ‘불휘를’의 ‘를’은 ‘는’의 잘못인 것으로 보인다. ‘옮겨 심은 뿌리’는 두보가 막부에 와서 제공받은 직책을 가리킨다. 그것은 두보의 직책이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엄무(嚴武)이다. 엄무는 ‘너’로 되어 있다.

(9) (22ㄱ) 원문 ‘위멱상근수촌재(爲覔霜根數寸栽)’를 언해자는 ‘서리옛 불휘 두 寸만 栽種을 爲야 얻노라’와 같이 번역하였다. ‘위멱(爲覔)’의 ‘위(爲)’를 부사적인 성분인 ‘위하여’와 같이 번역한 것이다. ‘위멱(爲覔)’은 ‘찾는 것을 하다’의 뜻이므로, ‘찾다, 얻다’의 뜻인데, 자수를 맞추기 위하여 한 글자를 더 쓴 것이거나, ‘찾는 것, 얻는 것’을 강조하는 효과를 가진 것인데, ‘위(爲)야’ 번역은 문맥에 맞는 것이라 볼 수 없다.

3.2.2. 언해 번역에 나타나는 특이한 문제의 해석

(1) (8ㄱ) 할주문의 ‘즉용사(卽欲死) 너모 얏 마리라’는 ‘곧 죽고자 하는 것은 너무 사랑하여라는 말이다’와 같이 풀이된다. ‘야’에 사이시옷 혹은 관형격 조사인 ‘ㅅ’이 쓰인 것이 특이하다. ‘곧 죽고자 하는 것은 사랑하여의 말이다’와 같이 ‘ㅅ’을 직접 ‘의’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그것은 현대어로는 자연스럽지 않다. ‘ㅅ’을 관형격 조사가 아닌 사이시옷으로 보는 방법도 가능하고, 관형격 조사 ‘ㅅ’이 가진 특수한 기능으로 해석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오 鶴 도라오 엇뎨 더듸니오(혼자의 학은 돌아옴을(이) 어찌 더딘 것인가’〈두시(초) 14:31ㄱ〉와 같이 부사 뒤에 ‘ㅅ’이 쓰인 예도 있다.

(2) (14ㄴ) 언해문 ‘時物을 보고 늘구믈 嗟歎다니 어긔 미처 와 凄凉호 慰勞노라’는 ‘제철 물건을 보고 늙음을 한탄하였는데, 여기까지 와서 처량함을 위로하노라’와 같이 풀이될 수 있다. ‘어긔 미처 와’는 우선 ‘여기 미쳐 와’와 같은 의미인데, ‘여기까지 와’의 뜻이다. 중세어에서 ‘급(及)’에 해당하는 말은 ‘및다’로 보아야 한다. 현대어와 같이 ‘미치다’였다면, 그 연결 어미 ‘-아/어’ 결합형은 ‘미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중세어에서 ‘미쳐’는 ‘광(狂)’의 의미로 쓰였다.

(3) (14ㄴ) 언해문 ‘예 사라셔 足히 곰 내 늘근  보내리로소니 기운 盖 폇호 기들오노라(여기 살아서 족히 그것으로써 내 늙은 모양을(내 늙음을) 보낼 것이니, 기운 덮개(지붕) 펴 있는 듯함을 기다리노라)’에서 ‘기운 개(盖)’의 ‘개(盖)’는 ‘덮개’의 뜻인데, 높이 자란 소나무의 윗부분이 지붕과 같이 양옆으로 퍼져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

(4) (15ㄱ) 언해문 ‘偃蹇야 龍과 버믜 얼굴 니 제 主意 과 구룸 모다 슈믈 當놋다(위엄을 가져 용과 범의 모습과 같으니, 저의 기상은 바람과 구름 합해 놓은 것을 감당하도다)’에서 ‘주의(主意)’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가 문제이다. ‘주된 뜻, 주된 의미, 주된 주장,주된 의지’와 같이 하여서는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주의(主意)’를 주관하다와 같이 풀이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기상(氣象)’으로 해석하였다.

(5) (16ㄴ) 언해문 ‘슬프다 여름 조미 져그니 싀오 워 棠梨ㅅ 맛 도다(슬프다, 열매 맺음이 적으니, 시고 떫어 산이스랏(산앵두) 맛 같도다)’에서 ‘당리(棠梨)’가 우리말로 어떤 식물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한국어 사전에서는 ‘당리(棠梨)’를 대부분 ‘팥배’로 풀이하고 있다. ‘당리(棠梨)’의 ‘리(梨)’가 배나무나 배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중시하면 ‘팥배’로 번역된다. 그러나 할주에는 ‘당자(棠子)’에 붉은 것과 흰 것의 둘이 있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당자(棠子)’에는 ‘리(梨)’자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당(棠)’에도 팥배의 뜻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산앵두’의 뜻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풀이를 중시하기로 한다. 할주에 ‘당자(棠子)’에 붉은 것과 흰 것의 둘이 있다는 기술이, 산이스랏꽃이 붉은 것과 흰 것의 둘이 있다는 것과 일치한다. 산이스랏의 열매는 모두 붉은 것으로 되어 있어, 흰색이 열매의 색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꽃의 색깔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6) (18ㄱ) 언해문의 ‘서르 빗기 도최 모면 러듀미 蒲柳ㅣ라와 몬제로다’에서 앞절 ‘서르 빗기 도최 모면’은 원문 ‘교횡집부근(交橫集斧斤)’에 대한 번역이다. 현대역으로 보이면, ‘서로 교차하여 도끼가 모이면’이 된다. 그러나 정작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문제이다. ‘도최 모면’은 ‘도끼를 든 사람이 모이면’의 뜻으로 이해된다. ‘교횡(交橫)’은 ‘여기저기서’의 뜻으로 이해된다.

(7) (18ㄴ) 할주문에 ‘莫記 이운  모 시라’가 있는데, 이 부분의 원문은 ‘ 향당개막기(鄕黨皆莫記)’이고, 이 부분의 언해문은 ‘鄕黨앳 사미 다 모놋다(시골 마을사람들이 다 모르는구나)’이다. ‘이운 ’는 ‘시든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가 ‘것’을 뜻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중세어 자료에서 ‘’가 소유물을 뜻하는 경우 외에 일반 문맥에서 ‘것’을 뜻하는 의존 명사로 쓰이는 일은 다른 예에서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8) (18ㄴ~19ㄱ) 언해문의 ‘아디 몯리로다 몃 즈믄 오 슬퍼 사롤 디 업도다’에서 ‘오’는 ‘[年]+고(의문 보조사) ’와 같이도 분석할 수 있고, ‘[年]#이(지정 형용사)-+-고(의문 어미)’와 같이도 분석될 수 있다.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한 것으로 본다.

(9) (19ㄱ)의 원문 ‘천계위수사(天雞爲愁思)’에 대한 언해가 ‘大〈天〉雞 爲야 시름놋다’와 같이 되어 있다. 원문 ‘천계위수사(天鷄爲愁思)’의 ‘위(爲)’를 언해자는 ‘위(爲)야’와 같이 부사적인 성분으로 해석하였다. 이 ‘위(爲)야’는 ‘천계(天鷄)’을 목적 대상으로 해석케 하는 효과를 가진다. 그러나 ‘위(爲)’는 본래 ‘되다’의 뜻을 가지는 서술어이므로, ‘천계위수사(天鷄爲愁思)’는 ‘천계가 시름이 되도다’와 같이 번역되어야 할 곳이다. 언해는 다소 의역에 치우친 것이거나 ‘위(爲)’를 ‘위하여’와 같이 해석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번역이라 할 수 있다.

3.2.3. 희귀어 또는 특이어 등

(1) (1ㄱ) ‘프른 곳부리라 重陽애  직디 아니도다(푸른 꽃부리라 중양절에 땀 직하지 아니하도다)’의 ‘곳부리’는 원문의 ‘청예(靑蘂)’를 번역한 것으로, 원문의 ‘예(蘂)’는 ‘꽃술’을 가리키는 것인데, 언해 담당자는 이를 ‘부리’로 번역하였다. ‘부리’는 꽃잎 전체를 가리킨다. 중세어에 ‘꽃술’을 뜻하는 ‘여희’라는 단어가 있었으나, ‘여희’의 용례가 단 하나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여희’ 대신 ‘부리’라는 단어가 다의적으로 ‘부리’와 ‘꽃술’을 가리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세어 자료에서 현대의 ‘꽃술’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곶술’과 같은 단어는 찾아지지 않는다. 정확하게 ‘꽃술’을 가리킬 때에는 ‘예(蘂)’를 그대로 한자로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두시언해 18권 5ㄴ에서의 ‘화저(花底)’에 그러한 예가 나온다. ¶ 蘂 여희 예〈훈몽 하 :2ㄴ〉. 블근 고 즈믄 예 扶持얏고 누른 입거우즌 만화 비취엿도다(붉은 꽃은 천의 꽃술을 떠받치고 있고, 누런 수염은 만의 꽃을 비추고 있도다.)〈두시(초) 18:5ㄴ〉.

(2) (3ㄴ) ‘불인 고지 이츠며 게을어  바니’의 ‘바니’는 원문 ‘취화곤라방주즙(吹花困懶旁舟楫)’의 ‘방(旁)’을 번역한 것이다. ‘바니’는 ‘발[旁]-+-(현재 시제 선어말 어미)-+-니(연결 어미)’와 같이 분석된다. 중세어에 ‘같이하다, 곁에 따르다, 옆을 스치다’와 같은 뜻을 가지는 ‘발다’라는 동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어로는 ‘바래다가 주다’와 같이 쓰이는 ‘바래다’가 중세어 ‘발다’에서 유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4ㄴ)의 언해문 ‘   남기 드리염 프니(江邊一樹垂垂發)’에서 ‘드리염’은 ‘드리[垂]-+-엄(부사 파생 접미사)’으로 ‘드리워. 늘어뜨려’의 뜻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드리-’는 현대어의 ‘드리우-’에 해당한다. ‘-염’은 ‘띄엄띄엄, 쉬엄쉬엄, 긔엄긔엄(기어서 기어서)’의 ‘-엄’과 그 성격이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매화나무가 드리운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한데, 가지가 늘어질 정도로 꽃이 많이 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4) (8ㄴ)의 언해문의 ‘서리와 눈괘 번 저져 얼외면’은 ‘상설일점응(霜雪一霑凝)’의 번역이다. 언해문의 ‘얼외면’이란 형식은 다른 중세어 자료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얼외-’가 원문의 ‘응(凝)’에 해당되므로, ‘얼-’은 ‘얼음이 얼다’의 ‘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중세어 자료에서 ‘얼외면’의 ‘-외-’와 같은 파생 접미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얼-’에 연결되는 일반적인 사동 접미사는 ‘-우-’이다. ‘얼외-’의 ‘-오-’는 모음조화에는 맞지 않으나, ‘-우-’에 대응되는 사동 접미사라 할 수 있다. ‘-외-’의 ‘-이-’는 피동 접미사인 것으로 본다. 그렇게 되면, 그 의미는 ‘얼리게 되면’과 같은 의미가 된다. 이를 간략화한 것이 ‘얼려지면, 얼게 되면’과 같은 풀이이다.

(5) (9ㄱ) 언해문 ‘모딘 불휘 수이 너추러 나니(모진 뿌리 쉽게 뻗어 나니)’에서 ‘수이’는 원문의 ‘이(易)’에 대한 번역으로, 시조 등을 통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부사이다. ‘수이 감을 자랑마라’와 같은 예의 ‘수이’가 그러한 예이다. 중세어에 ‘*숩-’이란 어형이 나타나면 ‘수이’의 형성은 비교적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숩-’이란 어형은 찾아지지 않는다. ‘쉽+이〉쉬〉수〉수이’와 같은 변화를 상정해 볼 수도 있고, ‘*숩-’과 같은 가상적 어간을 상정해볼 수도 있다.

(6) (10ㄱ~ㄴ) 언해문 ‘매셔 이에여 러듀미(강에서 흔들리어 떨어짐이)’에서 ‘이에여’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형식이다. ‘흔들다[搖]’를 뜻하는 타동사 ‘이어-’에 피동 접미사 ‘-이-’가 연결되고 다시 연결 어미 ‘-어’가 이어진 구성이다. ‘흔들리어’를 뜻하는 구성이나, ‘이에여’란 형식은 다른 데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7) (11ㄱ)의 언해문 ‘오직 여곰 버히디 마라 모로매 구루믈 이저 기로 볼디로다(但令無翦伐 會見拂雲長)’에나타나는 ‘이저’는 ‘[振, 拂]-+잊[虧(휴:이지러지다)]-+-어(연결 어미)’와 같이 분석되는 것으로. 기본형은 ‘잊다’가 된다. 이를 옛말 사전에서는 모두 ‘떨치다’와 같이 풀이하고 있으나, ‘펄렁펄렁 흔들다, 출렁출렁 물결치다’와 같이 풀이할 수 있다. 따라서, ‘구루믈 이저’는 ‘구름을 펄렁펄렁 흔들어’와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쪽의 ‘혀 프른 거슬 화 보내야 믓겨를 잇게 라(幸分蒼翠拂波濤)’는 ‘행여(혹시라도) 푸른 것을 나누어 보내어 물결을 출렁출렁 파도치게 하라’와 같이 풀이할 수 있다.

(8) (11ㄴ)의 언해문 ‘마시 니 녀르멧 벌어지 어여 가고(味苦夏蟲避)’의 ‘어여’는 원문의 ‘피(避)’에 해당하는 말로, ‘피하여’를 뜻한다. ‘어여’는 ‘어이다’란 동사가 있었음을 말한다. ‘어이다’는 ‘돌아가다’를 뜻하는 ‘에다’의 선대형이라 할 수 있다. 사전에서는 이를 ‘에다’에서 보라고 하고 있다. ‘어이다’에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닌가 한다.

(9) (12ㄴ) 언해문 ‘노 가지와 읏듬괘  두들게 녜외니 깁수윈 칠욘 戶牗ㅣ 뷔엿더라(높은 가지와 줄기가 벌판의 언덕에 예스러우니, 깊숙한(깊숙하게) 칠한 문과 창이 비어 있더라(열려 있더라)’에서 ‘녜외니’는 ‘예스러우니’를 뜻하는 말로, ‘녜[故]’에 접미사 ‘-외-’가 쓰였다. ‘깁수윈’의 ‘깁수위-’는 ‘깊숙하-’의 옛말로 풀이되고 있으나, ‘-수위-’의 어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10) (13ㄱ) 언해문 ‘큰 지비 다가 기울면 梁棟 오져 조로이 너기리니(큰 집이 만약 기울면 들보와 기둥 만들고자(만들려고) 중요하게 여길 것이니)’에서 ‘조로이’는 ‘종요로이, 종요롭게, 중요하게’를 뜻하는 말로, ‘조[宗要]+-(형용사 파생 접미사)-+-이(부사 파생 접미사)’에서 ‘--’의 ‘ㅂ’이 연철되어 ‘-비’가 되고, ‘ㅂ’이 약화되어 ‘-’가 되고, 다시 ‘ㅸ’이 [w]로 약화됨에 따라, 그 영향으로 ‘’가 ‘로’로 되고, 다시 ‘’가 ‘’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11) (13ㄴ~14ㄱ) 언해문의 ‘幽深 비치 幸혀 秀發니 드믄 가지  되오와닷도다(깊고 그윽한 빛이 다행히 뛰어나게 발하니, 드문 가지 또 위풍당당히 솟아올라 있도다)’에서 ‘되오와닷도다’의 ‘되오왇다’는 원문의 ‘앙장(昻藏)’을 번역한 말로, ‘위풍당당하다. 위풍당당히 솟아올라 있다’를 뜻하는 말로 볼 수 있다. 사전에서는 이것을 ‘되알지다’와 같이 풀이한 곳도 있고, ‘되게 해서 돋우다’와 같이 풀이한 곳도 있다. 나뭇가지에 대하여 ‘되알지다’는 어울리지 않고, ‘되게 해서 돋우다’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되오왇-’의 용례는 이 예와, 〈월인석보 2:67ㄴ〉의 ‘明帝 니샤 아래  두들기 절로 되오와니 바 奇異 光明이 이실 (명제 이르시되, 예전에 한 언덕이 저절로 위풍당당히 솟아올라 밤에 기이한 광명이 있기 때문에 )’의 두 예가 거의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12) (14ㄴ) 언해문 ‘내 불휘와 고고리 업수니 너를 야 슈미  아라도다(내가 뿌리와 꼭지가 없으니, 너를 짝하고 있었던 것이 또 아스라하도다)’에서 ‘고고리’는 ‘꼭지’를 뜻한다. 꼭지에 의하여 꽃이 가지에 붙어 있게 된다.

(13) (15ㄱ) 언해문 ‘즈믄  後에 慘憺히 하해 서려 슈믈 矜誇디 말라(천년 후에 장엄하게 조용히 하늘에 서려 있음을 자랑하지 말라)’의 ‘참담(慘憺)히’의 해석이 문제이다. ‘참담(慘澹)’은 ‘딱하고 슬픈 모양, 비참하고 아픈 모양, 얼굴에 독기가 있는 모양’ 등의 의미를 가진다. 천년 후의 잣나무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므로, ‘딱하고 슬픈 모양’은 적합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장엄하게 하늘을 뒤덮은 모양이 어울린다. ‘참(慘)’이 ‘비참하다’의 뜻을 가지는 것이 문제인데, 이는 장엄한 것을 보는 시인의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도달할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것을 보는 심정은 비참한 것일 수 있다.

(14) (18ㄴ) 언해문 ‘우르적시 黃雀이 딕주리니 서늘 다보 로 기우려 보놋다’의 ‘우르적시’은 원문의 ‘추추(啾啾)’에 해당하는 우리말이다. ‘추추(啾啾)’는 ‘여럿의 소리, 시끄러운 소리, 웅얼거리다’를 뜻한다. ‘우르적시’에서 ‘우르-’는 ‘울[啼]-+-으(조음소)-’와 같이 분석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 ‘적시’에서 ‘적시-’의 어원이 밝혀지지 않는다. ‘울부짖-’의 ‘짖[吠]-’과는 그 음성적인 거리가 상당하다. 옛 문헌 자료에 ‘우르적시-’가 나타나는 것도 여기뿐이다.

(18ㄴ)의 같은 예문에서 ‘딕주리니’의 ‘딕주리-’는 원문의 ‘탁(啄)’에 해당된다. ‘딕주리다’는 ‘거듭거듭 쪼다. 거듭거듭 찍다’와 같은 뜻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보면, ‘딕주리-’에서 ‘딕-’은 현대어의 ‘찍[啄(탁), 斧(부:찍다), 斫(작:찍다)]-’에 해당하는 말로 분석될 수 있다. 그러나 ‘주리-’의 어원이 불명하다.

(15) (19ㄱ) 언해문 ‘부  아다온 氣運을 앗놋다(꿰어 부는 바람은 아름다운 기운을 빼앗는구나)’에서 ‘부’은 ‘[徹]-+불[吹]-+-(현재 시제 선어말 어미)-+-ㄴ(관형사형 어미)’과 같은 구성으로, 현대어의 ‘꿰[徹]-’에 해당하는 ‘-’의 용례도 발견되고, ‘블[吹]-’의 용례도 다소 발견되나, 이 둘이 복합하여 나타나는 ‘불-’의 용례는 이 예가 유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살 머겨 쏘시니 그 사리 스믈 여듧 부플 다 여 해 차 가아 鐵圍山애 바니(살을 장전하여 쏘시니 그 살이 스믈여덟 북을 다 꿰어 땅을 통해 가 철위산에 박히니)〈석상 3:14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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