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효경언해

  • 역주 효경언해
  • 전(傳) 14장
  • 제2장(고문 제15장) 광요도(廣要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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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고문 제15장) 광요도(廣要道)


子ㅣ 曰왈 敎교民민親친愛 莫막善션於

8ㄴ

어孝효ㅣ오 敎교民민禮례順슌은 莫막善션於어悌뎨오 移이風풍易역俗쇽은 莫막善션於어樂악이오 安안上샹治티民민은 莫막善션於어禮례니

子ㅣ 샤 셩을 親친며 랑홈을 침은 孝효만 善션니 업고 셩을 례도과 공슌홈을 침은 悌뎨만 善션니 업고 주001)
제(悌)만 선(善)니 업고:
제(悌)보다 좋은 것이 없고. 『고문효경』에는 ‘悌’가 ‘弟’로 되어있다. ‘업고’의 기본형은 ‘업다’인데 부사형 어미 ‘-고’가 통합된 형임. 뒤로 오면서 ㅅ이 덧붙어 유착한 음운첨가로 ‘업다〉없다’로 형태변이가 일어났다. ‘업다’의 이형태로 ‘다’(번역소학9:103)가 있다. 이로 보면 ㅁ의 유기음화로 볼 수 있다. ‘제(悌)’의 본보기로서 이성만 형제 이야기가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따르면, 예산에 의좋은 형제로 알려진 대흥 이성만 형제가 조선시대 제(悌)의 거울이 됨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의 역사서와 도덕책을 보면 이성만 형제의 효애가 상세하게 올라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년(1420) 1월 21일의 자료를 보면, 세종이 즉위해 전국에 있는 효자, 절부, 의부, 순손이 있는 곳을 찾으라는 교서를 내린 결과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날 정승들과 상의하여 41명을 뽑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이성만 형제가 올라와 있다. 또 광해군 9년(1617)에 속부 1권을 합하여 18권 18책이 목판본으로 간행돼 도덕서로 활용됐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이성만 형제의 효애에 대한 사연이 그림과 함께 수록돼 있다. 이밖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의 읍지인 『여지도서』, 『호서읍지』에도 기록돼 있다.
風풍을 옴기며 俗쇽을 밧고기【우희셔 쳐 도왼 거시 風풍이오 아래셔 화 버릇도왼 거시 주002)
버릇도왼 거시:
버릇된 것이. ‘도왼’의 기본형은 ‘도외다’이고 여기에 관형사형 어미 ‘-ㄴ’이 통합된 형이다. 전단계의 전차형은 ‘다’(용가 10:1)이다. 순경음 ㅂ의 탈락으로 보아야 한다. 이로 보면 ‘다’를 재구성할 수 있다. 음운탈락이란 발음을 쉽게 내기 위하여 일어나는 소리의 달라짐이다. 발음을 쉽게 하기 위해서 말을 할 때, 어떤 소리가 줄어드는 현상을 음운탈락이라 한다. 이러한 음운에는 자음(ㄱ, ㄴ, ㄷ)과 모음(ㅏ, ㅑ, ㅓ)이 있다. 자음을 생략하면 자음탈락이고, 모음을 생략하면 모음탈락이 된다. 아드님(아들님), 하느님(하느님), 나날이(날날이) 같은 것이 자음탈락이다. 가라(가아라), 서라(서어라) 와 같은 현상이 모음탈락이다. 동음 생략은 넓은 의미에서 음운탈락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자음이 연속될 때 그 중에 하나를 생략하거나 같은 모음이 연속될 때 그 중에 하나를 생략하는 현상을 말한다.
俗쇽이라】
樂악만 善션니 업고 우흘 편안케 며 셩을 다림은 禮례만

9ㄱ

善션니 업니라

〈전(傳) 제2장 광요도(廣要道)〉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성에게 친하고 사랑함을 가르침에는 효도보다 좋은 것이 없고, 백성에게 예의와 공순함을 가르침에는 제(悌)보다 좋은 것이 없으며, 풍(風)을 옮기며 속(俗)을 바꾸기는【윗사람이 가르쳐 된 것이 풍이요, 아랫사람이 배워서 버릇된 것이 속이다.】악(樂)보다 좋은 것이 없고, 윗사람을 편안케 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예(禮)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禮례者쟈 敬경而이已이矣의라 故고로 敬경其기父부면 則즉子悅열고 敬경其기兄형면 則즉弟뎨悅열고 敬경其기君군면 則즉臣신悅열니 敬경一일人인애 而이千천萬만人인이 悅열이라 所소敬경者쟈ㅣ 寡과ㅣ오 而이悅열者쟈ㅣ 衆즁니 此之지謂위要요道도ㅣ니라

禮례란 거 공경 이라 주003)
례(禮)란 거 공경 이라:
예라 함은 공경할 뿐이다. ‘례’에서 뒤로 오면서 두음법칙을 따라서 ‘례〉예’로 소리가 변하였다. 두음법칙이란 어떤 소리가 단어의 첫머리나 음절의 첫소리에서 발음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른 소리로 바꾸어 발음하는 현상을 이른다. ‘ㅣ, ㅑ, ㅕ, ㅛ, ㅠ’ 앞에서의 ‘ㄹ’과 ‘ㄴ’이 ‘ㅇ’이 되고, ‘ㅏ, ㅓ, ㅗ, ㅜ, ㅡ, ㅐ, ㅔ, ㅚ’ 앞의 ‘ㄹ’은 ‘ㄴ’으로 변하는 것 따위이다. ‘녀자’가 ‘여자’로, ‘로인’이 ‘노인’으로 발음되는 일 따위를 말한다. 한편, ‘’의 기본형은 ‘다’인데 명사형 어미 ‘-ㅁ’이 통합되어 하나의 형태로 굳어진 보기다. 모음이화를 거치면서 ‘다〉르다’로 되었다가 다시 아래아 ‘ㆍ’의 변이와 합용병서의 변이로 ‘따르다’가 되어 오늘날에 쓰인다. 그 의미로 보아 누구를 따라 가다는 본디의 의미를 떠나서 ‘-뿐’이라는 단독 보조사의 구실을 맡게 되었다. 아래아 ‘ㆍ’는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쓰이던 모음의 기본자다. 단모음 중의 단모음이라는 훈민정음도해(訓民正音圖解)를 보면, 현재 사라진 ‘ㆍ’의 음가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소리값의 변천을 보면 두 단계로 갈래를 짓는다. 제 1단계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하여 제 2음절 이하에서 소리값이 ‘ㅏ,ㅓ,ㅗ,ㅡ’로 바뀐다. 제 2단계에서는 18세기의 『한청문감(漢淸文鑑)』에서는 제 1음절에서도 다른 소리로 변동하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제주도를 비롯한 영남 지역어에 그 잔재가 남아 있으며 표기상으로는 완전하게 사라진 음소가 되었다. 성조로 보면, 소리의 길이와 높낮이가 다르게 조사보고 되었다. 말(馬h)-말(斗m)-말(言L)로 변별적이나 차츰 그 성조적인 변별성이 약화되었다. ¶사마다 수 니겨 날로 메 便뼌安킈 고져 미니라[人人易習 便於日用耳] 〈훈민정음 서문〉.
故고로 그 아비 공경면 식이 깃거고 그 兄형을 공경면 아이 깃거고 주004)
아이 깃거고:
아우가 기뻐하고. ‘아이’는 ‘이〉아이’의 음운탈락 과정을 겪어 소리가 변한 형이다. ‘’에 주격조사 ‘-이’가 통합된 형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주격조사의 영형태로 볼 수 있다. ‘’의 전 단계 전차형은 ‘아’이다. 이를 다시 간추리면 ‘아〉아〉아〉아우’로 모음변이를 하면서 굳어져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경상도를 주로 하는 일부 방언을 살펴보면 아직도 ‘아수, 아시’ 같은 고어형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를 동아리하면 ‘아〉아〉아〉아우’로 소리가 단계적으로 변한 모습을 재구성할 수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자음 들을 중간 자음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 달리 중간 유성자음이라고도 부른다. 이른바 반치음의 음가와 관련하여 이를 유성음화로 풀이하고 있다. ㅅ이 유성음 사이에서 ㅿ음이 됨은 ㅅ이 유성음으로 변한 결과다. 요컨대, bi, gi, di의 b, g, d는 유성음으로 변했는데도 이에 따른 문자표기는 없고 유독 ㅅ이 유성음으로 변한 것에만 ㅿ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b, g, d는 탈락하지 않음에 비하여 ㅅ은 탈락형과 유지형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국어에서 ㅅ이 유성음간에서 유성음화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같은 유성음인 데도 ㅂ, ㄱ, ㄷ, ㅈ 등은 그대로 두고 ㅅ에 대해서만 ㅿ을 쓴 것은 확실히 ㅿ가 어떤 의도적인 표기라고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ㅿ을 사용한 낱말은 명사가 54, 동사가 34, 형용사가 8, 부사가 14, 특이예가 8, 합해서 118이나 된다. 이러한 분포는 15세기 어에서 ㅿ을 가진 어휘의 수가 다, 시서와 같이 ㅿ으로 표기하지 않고 그대로 ㅅ으로 유지되고 있는 어휘의 수보다 많다고 하는 말이다. [z]로 표기 발음되던 118의 어휘가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생겼다가 없어진다고 하는 풀이는 설득력이 없다. ㅿ으로 표기한 말에 특이한 보기로는 ‘가(월석)’을 들 수 있다. 이는 1572년간인 『부모은중경』에 ‘가’으로 나타난다. ㅿ음의 소실을 16세기 중엽으로 본다면 ㅿ[z]음이 소실된 뒤다. 당시 표기로 보아 ㅿ과 ㅅ의 넘나드는 표기라고 볼 수 있다. ‘지(월곡 73)’이 『부모은중경』에는 지슨, 눈가 눈, 어버가 어버시로 표기되고 있다. 이러한 보기들은 『부모은중경』의 표기하는 이들의 음운의식이 문제가 되겠지만, 역시 ㅅ과 ㅿ음의 시차성을 찾아볼 수 없다. 한편, ㅿ으로 표기되던 말이 현대어에서 탈락된 말과 ㅅ이 그대로 유지되는 형이 있다. ㅿ음이 개성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서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어에서 ㅿ이 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남부 지역의 말들을 찾을 수 있다(오종갑(2008) 참조).
그 님금을 공경면 신해

9ㄴ

깃거니  사을 공경홈애 千천萬만 사이 깃거디라 공경 배 젹고 깃거 이 만니 이 닐온 종요로온 道도ㅣ니라

예라는 것은 공경할 뿐이다. 따라서 그 아비를 공경하면 자식이 기뻐하고, 그 형을 공경하면 아우가 기뻐한다. 〈또한〉 그 임금을 공경하면 신하가 기뻐하고, 한 사람을 공경하여 천만 사람이 기뻐한다. 공경하는 이는 적고 기뻐하는 이가 많음이니 이것이 이른바 중요한 〈큰〉 도리가 된다.

右우 傳뎐之지二이章쟝이니 釋셕要요道도다
Ⓒ 필자 | 공안국 /

右우 傳뎐의 둘잿 章쟝이니 종요로온 道도를 사기다
Ⓒ 역자 | 홍문관 / 1589년(선조 22)

윗(오른쪽) 글은 〈성현이 지은〉 전의 둘째 장이니, 중요한 도리를 풀이한 것이다.
Ⓒ 역자 | 정호완 / 2014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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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제(悌)만 선(善)니 업고:제(悌)보다 좋은 것이 없고. 『고문효경』에는 ‘悌’가 ‘弟’로 되어있다. ‘업고’의 기본형은 ‘업다’인데 부사형 어미 ‘-고’가 통합된 형임. 뒤로 오면서 ㅅ이 덧붙어 유착한 음운첨가로 ‘업다〉없다’로 형태변이가 일어났다. ‘업다’의 이형태로 ‘다’(번역소학9:103)가 있다. 이로 보면 ㅁ의 유기음화로 볼 수 있다. ‘제(悌)’의 본보기로서 이성만 형제 이야기가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따르면, 예산에 의좋은 형제로 알려진 대흥 이성만 형제가 조선시대 제(悌)의 거울이 됨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의 역사서와 도덕책을 보면 이성만 형제의 효애가 상세하게 올라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년(1420) 1월 21일의 자료를 보면, 세종이 즉위해 전국에 있는 효자, 절부, 의부, 순손이 있는 곳을 찾으라는 교서를 내린 결과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날 정승들과 상의하여 41명을 뽑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이성만 형제가 올라와 있다. 또 광해군 9년(1617)에 속부 1권을 합하여 18권 18책이 목판본으로 간행돼 도덕서로 활용됐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이성만 형제의 효애에 대한 사연이 그림과 함께 수록돼 있다. 이밖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의 읍지인 『여지도서』, 『호서읍지』에도 기록돼 있다.
주002)
버릇도왼 거시:버릇된 것이. ‘도왼’의 기본형은 ‘도외다’이고 여기에 관형사형 어미 ‘-ㄴ’이 통합된 형이다. 전단계의 전차형은 ‘다’(용가 10:1)이다. 순경음 ㅂ의 탈락으로 보아야 한다. 이로 보면 ‘다’를 재구성할 수 있다. 음운탈락이란 발음을 쉽게 내기 위하여 일어나는 소리의 달라짐이다. 발음을 쉽게 하기 위해서 말을 할 때, 어떤 소리가 줄어드는 현상을 음운탈락이라 한다. 이러한 음운에는 자음(ㄱ, ㄴ, ㄷ)과 모음(ㅏ, ㅑ, ㅓ)이 있다. 자음을 생략하면 자음탈락이고, 모음을 생략하면 모음탈락이 된다. 아드님(아들님), 하느님(하느님), 나날이(날날이) 같은 것이 자음탈락이다. 가라(가아라), 서라(서어라) 와 같은 현상이 모음탈락이다. 동음 생략은 넓은 의미에서 음운탈락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자음이 연속될 때 그 중에 하나를 생략하거나 같은 모음이 연속될 때 그 중에 하나를 생략하는 현상을 말한다.
주003)
례(禮)란 거 공경 이라:예라 함은 공경할 뿐이다. ‘례’에서 뒤로 오면서 두음법칙을 따라서 ‘례〉예’로 소리가 변하였다. 두음법칙이란 어떤 소리가 단어의 첫머리나 음절의 첫소리에서 발음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른 소리로 바꾸어 발음하는 현상을 이른다. ‘ㅣ, ㅑ, ㅕ, ㅛ, ㅠ’ 앞에서의 ‘ㄹ’과 ‘ㄴ’이 ‘ㅇ’이 되고, ‘ㅏ, ㅓ, ㅗ, ㅜ, ㅡ, ㅐ, ㅔ, ㅚ’ 앞의 ‘ㄹ’은 ‘ㄴ’으로 변하는 것 따위이다. ‘녀자’가 ‘여자’로, ‘로인’이 ‘노인’으로 발음되는 일 따위를 말한다. 한편, ‘’의 기본형은 ‘다’인데 명사형 어미 ‘-ㅁ’이 통합되어 하나의 형태로 굳어진 보기다. 모음이화를 거치면서 ‘다〉르다’로 되었다가 다시 아래아 ‘ㆍ’의 변이와 합용병서의 변이로 ‘따르다’가 되어 오늘날에 쓰인다. 그 의미로 보아 누구를 따라 가다는 본디의 의미를 떠나서 ‘-뿐’이라는 단독 보조사의 구실을 맡게 되었다. 아래아 ‘ㆍ’는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쓰이던 모음의 기본자다. 단모음 중의 단모음이라는 훈민정음도해(訓民正音圖解)를 보면, 현재 사라진 ‘ㆍ’의 음가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소리값의 변천을 보면 두 단계로 갈래를 짓는다. 제 1단계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하여 제 2음절 이하에서 소리값이 ‘ㅏ,ㅓ,ㅗ,ㅡ’로 바뀐다. 제 2단계에서는 18세기의 『한청문감(漢淸文鑑)』에서는 제 1음절에서도 다른 소리로 변동하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제주도를 비롯한 영남 지역어에 그 잔재가 남아 있으며 표기상으로는 완전하게 사라진 음소가 되었다. 성조로 보면, 소리의 길이와 높낮이가 다르게 조사보고 되었다. 말(馬h)-말(斗m)-말(言L)로 변별적이나 차츰 그 성조적인 변별성이 약화되었다. ¶사마다 수 니겨 날로 메 便뼌安킈 고져 미니라[人人易習 便於日用耳] 〈훈민정음 서문〉.
주004)
아이 깃거고:아우가 기뻐하고. ‘아이’는 ‘이〉아이’의 음운탈락 과정을 겪어 소리가 변한 형이다. ‘’에 주격조사 ‘-이’가 통합된 형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주격조사의 영형태로 볼 수 있다. ‘’의 전 단계 전차형은 ‘아’이다. 이를 다시 간추리면 ‘아〉아〉아〉아우’로 모음변이를 하면서 굳어져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경상도를 주로 하는 일부 방언을 살펴보면 아직도 ‘아수, 아시’ 같은 고어형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를 동아리하면 ‘아〉아〉아〉아우’로 소리가 단계적으로 변한 모습을 재구성할 수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자음 들을 중간 자음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 달리 중간 유성자음이라고도 부른다. 이른바 반치음의 음가와 관련하여 이를 유성음화로 풀이하고 있다. ㅅ이 유성음 사이에서 ㅿ음이 됨은 ㅅ이 유성음으로 변한 결과다. 요컨대, bi, gi, di의 b, g, d는 유성음으로 변했는데도 이에 따른 문자표기는 없고 유독 ㅅ이 유성음으로 변한 것에만 ㅿ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b, g, d는 탈락하지 않음에 비하여 ㅅ은 탈락형과 유지형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국어에서 ㅅ이 유성음간에서 유성음화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같은 유성음인 데도 ㅂ, ㄱ, ㄷ, ㅈ 등은 그대로 두고 ㅅ에 대해서만 ㅿ을 쓴 것은 확실히 ㅿ가 어떤 의도적인 표기라고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ㅿ을 사용한 낱말은 명사가 54, 동사가 34, 형용사가 8, 부사가 14, 특이예가 8, 합해서 118이나 된다. 이러한 분포는 15세기 어에서 ㅿ을 가진 어휘의 수가 다, 시서와 같이 ㅿ으로 표기하지 않고 그대로 ㅅ으로 유지되고 있는 어휘의 수보다 많다고 하는 말이다. [z]로 표기 발음되던 118의 어휘가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생겼다가 없어진다고 하는 풀이는 설득력이 없다. ㅿ으로 표기한 말에 특이한 보기로는 ‘가(월석)’을 들 수 있다. 이는 1572년간인 『부모은중경』에 ‘가’으로 나타난다. ㅿ음의 소실을 16세기 중엽으로 본다면 ㅿ[z]음이 소실된 뒤다. 당시 표기로 보아 ㅿ과 ㅅ의 넘나드는 표기라고 볼 수 있다. ‘지(월곡 73)’이 『부모은중경』에는 지슨, 눈가 눈, 어버가 어버시로 표기되고 있다. 이러한 보기들은 『부모은중경』의 표기하는 이들의 음운의식이 문제가 되겠지만, 역시 ㅅ과 ㅿ음의 시차성을 찾아볼 수 없다. 한편, ㅿ으로 표기되던 말이 현대어에서 탈락된 말과 ㅅ이 그대로 유지되는 형이 있다. ㅿ음이 개성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서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어에서 ㅿ이 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남부 지역의 말들을 찾을 수 있다(오종갑(20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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