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촉구년(在蜀九年)이오 재초삼년(在楚三年)이라 두보는 48세 때인 759년(건원 2) 12월 1일에 성도로 향해서, 54세 때인 765년(영태 원년) 5월에 성도를 떠났다. 민강(岷江)을 통해 유주(楡州, 사천 重慶), 충주(忠州, 사천 忠縣), 운안(雲雁, 사천 雲陽)을 통하여 55세 때인 766년(대력 원년) 늦은 봄에 기주(夔州, 사천 奉節)에 도착하였고, 이후 적갑(赤甲), 양서초당(瀼西草堂), 동둔(東屯) 등으로 옮겨 지내다가, 57세 때인 768년(대력 3) 동생 두관에게서 편지를 받고 1월에 기주(夔州, 사천 奉節)를 출발하여 협주(峽州, 호북 宜昌) 하뢰(下牢)에 도착함으로써 삼협(三峽)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 해 3월에는 강릉(江陵, 湖北 江陵)에 도착하게 된다. 강릉 도착부터 초(楚) 지역이라 계산하면, 강릉 도착 후 가을 공안(公安, 湖北 公安)으로 거처를 옮겼고, 늦겨울 공안을 출발하여 악주(岳州, 호남 岳陽)에 도착하여 설을 악주, 즉 악양(岳陽)에서 보냈다. 58세 때인 769년(대력 4) 정월에 악양을 출발하여 형산(衡山), 상담(湘潭, 호남 湘潭), 담주(潭州, 호남 長沙)에 도착하여 59세 때인 770년(대력 5) 늦봄에 담주(潭州)에서 이구년(李龜年)과 재회를 하고, 4월에 군벌의 반란을 피해 형주(衡州)로 피난하였다가 침주(郴州, 호남 郴州)로 가다가 도중에 뇌양(耒陽, 호남 耒陽) 방전역(方田驛)에서 섭 현령이 보내준 음식을 받은 일이 있고, 이후 양양(襄陽, 호북 襄陽)으로 가다가 담주(潭州, 호남 長沙)에서 머문 것을 보이며 겨울에 고향으로 향하는 상강 기슭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시는 앞선 주석에서 한성무(1997)을 따라 두보가 57세 때인 768년(대력 3)에 쓴 작품으로 파악하였는데, 이렇게 보면 주석의 ‘재촉구년(在蜀九年)이오 재초삼년(在楚三年)이라’는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또한 ‘중풍이 들어 배에서 베개를 베고 누어 회포를 쓰면서 호남의 친구들에게 드리는 36운(風疾이어 舟中伏枕書懷야 呈湖南親友논 三十六韻이라)’의 ‘十暑岷山葛 三霜楚戶砧’ 구절의 주석은 ‘此 言十年 在岷已着葛고 三年 在楚而聞砧也ㅣ라’라 했으므로, 촉 지역에서 10년을 있었다고 말한 것이 되어 미세하지만 일치하지 않는 부분으로 간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