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5(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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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5(상)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5(상)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모아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조선 성종의 명을 받은 유윤겸(柳允謙), 유휴복(柳休復),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언해하여 성종 12년(1481)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언해 시집이다. 모두 25권 17책으로 을해자본이며 이 책은 보통 줄여서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김영배

1931년 평북 영변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문학석사, 문학박사.

1973 부산여자대학(신라대) 국어교육과 전임강사, 조교수.

1976 상명여자대학(상명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

1980~1997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교수.

1987.4~1988.3 일본 축파(筑波)대학 외국인교사,

현재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명예교수.

저서 : 석보상절 제23ㆍ24주해, 평안방언의 음운체계연구, 국어사자료연구 1·2, 증보 평안방언연구, 평안방언연구 자료편 외

역주 : 역주 석보상절 제6,9,11(공동), 역주 석보상절 제13,19(공동), 역주 능엄경언해 제1,2, 역주 능엄경언해 제3,4, 역주 능엄경언해 제7,8, 역주 능엄경언해 제9,10, 역주 월인석보 제11,12, 역주 법화경언해 제1, 역주 법화경언해 권2, 역주 법화경언해 권3, 역주 법화경언해 제4, 역주 법화경언해 제6, 역주 월인석보 제20, 역주 금강경삼가해 제1, 역주 금강경삼가해 제2, 역주 월인석보 제25(상), 역주 월인석보 제25(하권), 역주 월인석보 제4, 역주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역주 석보상절 제21(공역)

김성주

1965년 경남 통영 출생,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석사, 문학박사.

1999~2002 터키 국립앙카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외국인교수.

2003~2007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2008~2011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문리각 연구교수.

2012년 현재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강의전담교수.

저서 : 한국어의 사동, Korece Dilbilgisi(공저), 각필구결의 해독과 번역 1~5(공저), 고대한일양국의 한자․한문독법과 자국적 수용양상(공저), 황룡사 표원의 화엄문의요결문답연구 1·2(공저), 사토본 ≪화엄문의요결문답≫의 부호구결과 자형에 대한 연구(공저)

역주 : 금강경언해(공역), 역주 석보상절 제21(공역)

역주위원

  • 분류두공부시언해 권5(상) : 김영배(동국대학교 명예교수)

  • 김성주(동국대학교 교수)

  • 교열·윤문·색인위원

  • 분류두공부시언해 권5(상) : 성낙수 홍현보
  • 세종고전국역 편집위원회

  • 위원장 : 한무희
  • 위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남문현
  • 리의도 박종국 박충순 성낙수
  • 심우섭 임홍빈 최홍식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5를 내면서

우리 회는 1956년 10월 9일 창립 후 세종대왕기념사업의 중심 전당인 세종대왕기념관을 건립 세종문화진열실과 연구실을 마련 운영 관리하며, 세종성왕의 정신과 위업의 연구 사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 한글 전용과 국학 진흥을 위하여 「한문고전국역사업」과 「한글고전역주사업」을 1967년에 기획하여 1968년부터 계속 수행하고 있다.

「한문고전국역사업」은 1968년 1월부터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을 국역 간행하기 시작하여 실록의 한문 원문 901권을 완역 발간하였고, 일반 한문고전으로 『증보문헌비고』, 『매월당집』, 『국조인물고』, 『동국통감』, 『승정원일기』(순종), 『육일재총서』 등 수많은 국학자료를 국역 발간하였으며, 계속하여 『치평요람』, 『각사등록』, 『연행록』 등 문헌의 국역 사업을 벌여 오고 있다.

「한글고전역주사업」은 1990년 6월에 첫발을 내디디어, 『석보상절』 권6, 9, 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바, 2016년 12월까지 역주 발행한 문헌은 『석보상절』 4책, 『월인석보』(훈민정음언해본 포함) 17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금강경삼가해』 5책, 『구급방언해』 2책, 『삼강행실도』 1책, 『두시언해』 11책, 『소학언해』 4책, 『사서언해』(논어, 대학, 중용, 맹자) 6책, 『이륜행실도』 1책, 『동국신속삼강행실도』 5책, 『오륜행실도』 5책, 『시경언해』 4책, 『서경언해』 2책, 『가례언해』 4책, 『여소학언해』 2책, 『윤음언해』 1책, 『주역언해』 2책, 『마경초집언해』 2책 등 139책을 발간하였고, 2017년 금년에도 『종덕신편언해』, 『두시언해』(초간본) 등 14책을 역주 간행할 예정이다.

우리 회 창립 61돌이자 한글 반포 571돌이며, 세종 탄신 620돌이 되는 올해는 우리 회가 「한문고전국역사업」을 착수한 지 49돌이 되었고, 「한글고전역주사업」을 추진한 지 27돌이 되었다. 그 동안 우리 회가 낸 800여 책의 국역 학술 간행물이 말해 주듯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이래 최고의 한글 국역, 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이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그 결과 고전의 대중화를 통한 지식 개발 사회의 문화 자본 구축과 역사의식 및 한국학 연구 활성화에 기여는 물론, 새 겨레문화 창조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는,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모아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조선 성종의 명을 받은 유윤겸(柳允謙), 유휴복(柳休復),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언해하여 성종 12년(1481)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언해 시집으로 알려져 있다. 모두 25권 17책으로 을해자본이다(후대에는 19책, 20책도 있음). 이 책은 보통 줄여서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두시언해』는 다른 언해서와는 달리 원문에 입겿(토)이 없고, 한글과 한문 혼용인 언해문의 한자에도 한글 독음이 달리지 않았다. 두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 때부터 행하여졌다고 하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처음 이루어진 것이다. 이 책의 책이름에 보이는 공부(工部)는 두보의 관명(官名)이고, 분류(分類)는 시를 기행, 술회, 질병, 회고, 시사(時事) 등과 같이 내용에 따라 분류하였다는 뜻이다. 두시는 71문(門)에 총 1,467수와 다른 사람 작품 16수로서, 그 소재는 세상사에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라를 사랑하는 충정과 같은 인간애가 담겨 있으며, 당시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면밀하게 비판한 사실적인 서사(敍事)인 데서 시사(詩史)라 일컬어지는 위대한 작품이다.

이번에 이 『두시언해』 권5를 역주함에 있어서, 그 저본으로는 『한국어연구』 제11권(한국어연구회, 2014)에 수록된 축쇄 영인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우리 회에서 15세기 문헌인 『두시언해』 권5를 역주 간행함에 있어, 역주를 위해 애써 주신 동국대학교 김영배 명예교수님과 김성주 교수님,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준 교육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7년 11월 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최홍식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말 ․ 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 등 한글 관계 문헌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옛 우리말을 연구하는 전문 학자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이를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며 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5의 저본으로는, 『한국어연구』 제11권(한국어연구, 2014)에 수록된 축쇄 영인본을 저본으로 하였다.(이 영인본은 초간본인데 1쪽에서 4쪽은 낙장이어서 중간본으로 대체한 것이다.) 역주 편집상 내용이 많아 상권과 하권 2책으로 간행한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한문 원문 ․ 언해 원문 ․ 현대어 풀이 ․ 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는데, 특별히 한시를 언해하였으므로 그 운율을 알기 쉽도록 시 제목과 한시 원문은 그대로 음을 달고 풀이를 이어 붙였다. 원전과 비교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장(張) ․ 앞(ㄱ) ․ 뒤(ㄴ) 쪽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제1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1ㄱ分類杜工部詩 卷之十五

제3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諸侯3ㄴ舊上計 厥貢傾千林

(3) 현대어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4) 원문 내용(한문 원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 풀이문․주석과 구별하였으며, 원문 가운데 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다.

(5) 현대어 풀이에서, 옛글의 구문(構文)과 다른 곳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충한 말은 〈 〉 안에 넣었다.

(6) 찾아보기 배열순서는 맞춤법에 따랐다.

3. 역주자 일러두기

(1) 두시의 원문은 『두시언해』(초간본)을 바탕으로 하였고, 초간본이 낙장되었거나 훼손되었을 경우 중간본을 사용하였다.

(2) 현대역은 가급적 『두시언해』의 표현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하였으며, 해당 시구의 마지막 주석에서 내용을 설명하였다.

(3) 한시 원문에 대해서는 『두시언해』에 제시되어 있는 대로 우리의 전통 한자음을 한글로 표시하여 원문과 나란히 제시하였다. 두음법칙과 ‘不’에 대한 ‘불, 부’의 음 등을 한자음에 반영하였다.

(4) 주석을 달 때 주로 제일 먼저 나오는 곳에서 자세한 주석을 달고 뒤에서 동일한 단어가 나올 때에는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간단히 주석을 달고 더 자세한 것은 앞의 주석을 참고하도록 하였다.

(5) 주석의 표제어는 단어는 물론 필요한 경우에는 2개 이상의 단어로 이루어진 구도 제시하였다. 한자어의 경우 한자음을 표제어로 한자를 괄호에 묶어 제시하였다.

(6) 주석에 제시된 단어나 표현에 대해서는 분석은 가급적 상세히 하되 특별한 경우나 분석이 어려운 경우에만 문법적 설명을 가하였다.

(7) 단어를 분석할 때 ‘+’ 기호는 대체로 체언과 조사 사이, 조사와 조사 사이, 용언의 어간과 어미 사이, 어미와 어미 사이에 쓰고, ‘#’는 어기와 어기 사이, 어기와 ‘-’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에 썼으며, 기원적인 정보도 최대한 반영하고자 하였다.

(8) ‘-오, -옴’ 등은 ‘오+, 오+ㅁ’ 등으로 분석하였으며, 문법 용어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으나, 필요한 때 ‘피동접미사, 부사파생접미사’ 등으로 표현하였다.

(9) 주석에 사용한 예문은 가급적 『두시언해』 이외의 15세기 예문 1개와 『두시언해』에 실린 예문 1개를 들었다. 그러나 『두시언해』에 나오는 예가 유일례이거나, 『두시언해』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중요한 단어일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2개 이상의 예문을 든 경우도 있으며, 전체 용례 수가 많지 않은 경우 예문을 전부 실은 경우도 있다. 『두시언해』 권1, 권2, 권4는 초간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뽑은 예문은 당연히 중간본의 예문이다.

(10) 예문 표시는 ‘〈두시 5:1ㄱ〉’과 같이 관례에 따라서 ‘서명, 권차, 면차’를 제시하였으며, ‘ㄱ, ㄴ’은 전후면을 나타낸다.

(11) 『두시언해』 이외의 문헌에서 뽑은 예문은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될 경우 한문 원문을 가급적 제시하였으며, 『두시언해』의 예문은 주석을 제외한 모든 예문의 한문 원문을 괄호에 넣어 표시하였다.

(12) 초간본 『두시언해』 권5가 낙장이거나,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중간본 『두시언해』 권5를 참고하였다. 또한 초간본과 중간본이 다른 부분은 해당 구절에 표시하였다. 그러나 ‘ㆁ’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13) 두시의 판본에 따라 두시 원문의 한자가 다른 경우에도 해당 구절 주석의 아래 부분에 밝혔다.

(14) 역주와 용례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에서 펴낸 역주본들을 많이 참고하였다. 많은 중세어 자료들이 역주되었으므로 풍부한 해석과 자료가 제시되어 있다. 이 자리를 빌려 예전에 역주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뜻을 표한다. 그리고 국어사전은 『표준국어대사전』을 주로 참고하였고, 이 경우에는 출처를 따로 밝히지 않았다. 다른 사전을 참조하였을 경우에는 출처를 밝혔다.

(15) ‘두시’에 대해서는 중국,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그리고 깊이 있는 주석서들이 존재한다. 폭넓고 깊이 있는 주석을 참고할 수 있어서 선학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어려운 부분을 소화하지 못하여 이 책에 반영하지 못한 부분도 많다. ‘두시’에 깊은 조예가 있으신 선생님들의 질정(質定)을 바란다.

(16) 역주 작업을 하면서 『두시언해』 권5의 초간본과 중간본을 대교하였다. 아래에서 그 특징을 제시한다.

① 초간본의 ‘ㅿ, ㆁ’은 중간본에서 없어짐.

예 : 미 주그니 〈두시 5:5ㄱ〉 → 미 주그니 〈중간두시 5:5ㄱ〉

예 : 封疆이 녜 오랫디 몯놋다 〈두시 5:34ㄱ〉 → 封疆이 샹녜 오래디 몯놋다 〈중간두시 5:34ㄱ〉, / 西ㅅ 녀그로 岐陽앳 音信 호니 〈두시 5:5ㄱ〉 → 西ㅅ 녀그로 岐陽앳 音信을 니 〈중간두시 5:5ㄱ〉

② 초간본 ‘-, -, -로, -’는 대체로 중간본에서 주석문 및 언해문 모두 ‘-은, -을, -으로, -의’로 바뀜.

③ 초간본 ‘-거’은 중간본에서 ‘-거늘’로 바뀜.

④ 초간본보다 중간본에서 약체자를 쓰는 경향이 높음.

⑤ 초간본의 ‘여’는 중간본에서 ‘여’로 바뀜.

⑥ 초간본의 연철 표기는 중간본에서 중철 표기나 분철 표기로 바뀌기도 함.

⑦ 중간본에서 몇몇 부분은 구개음화가 반영됨.(-ㄹ션 → -ㄹ션졍)

예 : 眞實로 能히 侵勞닐 制馭션 엇뎨 해 주규메 이시리오〈두시 5:28ㄱ〉 → 真實로 能히 侵勞닐 制馭션졍 엇뎨 해 주규메 이시리오〈중간두시 5:28ㄱ〉

『두시언해』 권제5 해제

김성주(동국대학교 교수)

1. 서론

『두시언해』는 전25권으로 초간본은 제1, 2, 4권을 제외한 총 22권이 현존한다. 그러나 권5는 그 동안 연구자들 사이에 복사본이 돌아다녔을 뿐 영인본이 없어서, 국어학도나 일반 독자들이 쉽게 문면을 볼 수 없었다. 『한국어연구』 제11권(2014)에 영인이 됨으로써 이제는 연구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두시언해』는 선학들에 의해서, 오래 전부터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두시언해』는 쉽게 접근을 허락하는 문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원문인 두시가 일반적인 산문이 아닌, 어려운 한시로 되어 있는 문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번역한 『두시언해』도 불경 언해와 달리 『두시언해』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어휘와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불경언해류’에 친숙한 국어학도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두시언해』 권5는 다른 초간본 『두시언해』와 마찬가지로 이 문헌에만 쓰인 어휘나 표현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또한 이 문헌은 다른 권차(卷次)에 비해서,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가 많은 권차에 해당된다. 이 글에서는 『두시언해』 권5의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를 남풍현(2014)의 해제를 바탕으로 제시한다.

2. 『두시언해』 권 제5의 서지

『두시언해』 권5의 서지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보고되어 있는 것이 없다. 게다가 현재로서는 『한국어연구』 제11권에 영인된 것을 제외하면, 이 문헌을 실사하기도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에 자세한 형태 서지 연구는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원래 남풍현 선생이 통문관(通文館)의 고 이겸로(李謙魯) 선생으로부터 구입하였고, 남풍현 선생은 ‘박동섭본 능엄경’ 또는 ‘소곡본 능엄경’이라 불리는 고려시대 능엄경 구결 자료와 이 문헌을 박동섭 씨와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는 개인 소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행히 남풍현 선생은 이 문헌을 ‘소곡본 능엄경’과 바꾸기 전에 복사해 두었고, 훼손된 부분을 중간본에서 보충하여 『한국어연구』 제11권에 영인함으로서, 드디어 문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영인본을 통해 보면 이 책은 1481년(성종 12)에 간행된 을해자본(乙亥字本) 『두시언해(杜詩諺解)』 초간본들과 체재는 물론 판식도 모두 동일한 것으로 판단된다.

『두시언해』 권5는 시사(時事) 하 <원주>【율시 44수(律詩四十四首)】, 변새(邊塞) <원주>【고시 17수(古詩一十七首)】, 장수(將帥) <원주>【고시 4수(古詩四首) 율시 6수(律詩六首)】, 군려(軍旅) <원주>【고시 2수(古詩二首) 율시 7수(律詩七首)】로 분류되어 있다. 시 제목을 기준으로 하면 시사 하(時事下) 19수, 변새(邊塞) 3수, 장수(將帥) 6수, 군려(軍旅) 7수 등 총 35수가 실려 있다.

『두시언해』의 간행 시기와 관련해서는 1481년에 25권 전체가 간행되었다는 견해와 그 이후에 간행되었다는 견해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두시언해』 초간본을 면밀히 살펴보면 볼수록 『두시언해』 초간본의 간행을 지나치게 서둘렀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여러 군데에서 목격된다. 『두시언해』 권3의 분류 제목인 ‘회고(懷古)’가 빠진 것도 그러한 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호권(1998:194)은 『두시언해』 본문의 조판 과정에서의 오류도 지적하고 있다. 『두시언해』 초간본의 행관(行款)은 8행 17자인데, 권3의 24ㄴ면 제6행의 앞줄은 18자로 되어 있다. 다음 판을 이미 짜 놓은 상태에서 교정을 하면서, 고친 부분이라 볼 수 있다. 『두시언해』 초간본의 간행은 초간본의 판식을 흩뜨리지 않고, 기존의 판식을 어기면서까지 간행을 서둘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서둘러 간행하기 위해서 조판을 다시 짤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3. 『두시언해』 권 제5의 초간본과 중간본

『두시언해』는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로 인해, 15세기 국어와 17세기 국어 즉 후기 중세국어와 초기 근대국어의 변화를 확연히 알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국어사 자료이다. 『두시언해』 권5도 『두시언해』의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문헌 중의 하나인데, 여기서는 남풍현(2014)의 기술에 바탕을 두고, 좀 더 보충하여 기술하도록 한다.

3.1. 모음조화

『두시언해』의 초간본과 중간본의 대조에서 가장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모음조화 중에서도 ‘→으’의 변화인데, 이는 ‘ㆍ’의 음가가 변화하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의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초간본에서 양성모음으로 표기되던 것이 중간본에서 음성모음으로 표기되는 경향이 짙다.

. →을 : 音信을〈5ㄱ〉, 僚屬을〈5ㄴ〉, 功을〈9ㄴ〉, 城을〈10ㄱ〉, 이하 생략.

. →를 : 를〈5ㄱ〉, 車駕를〈7ㄱ〉, 글워를〈7ㄱ〉, 帝堯를〈7ㄴ〉, 이하 생략.

. →들 : 고들〈25ㄱ〉〈31ㄴ〉

. →믈 : 라오믈〈5ㄱ〉, 收復호믈〈9ㄴ〉, 도라오믈〈11ㄱ〉, 和親호믈〈11ㄴ〉, 호믈〈20ㄱ〉〈22ㄴ〉〈25ㄱ〉〈29ㄴ〉, 이하 생략.

. →글 : 돗글〈38ㄴ〉

. →슬 : 오슬〈38ㄱ〉〈40ㄱ〉, 이바돌 거슬〈46ㄱ〉, 셕슬〈50ㄴ〉

. →늘 : 소늘[手]〈26ㄴ〉, 소늘[客]〈48ㄱ〉, 차바늘〈51ㄴ〉

. →흘 : 안흘〈19ㄱ〉, 돌흘〈28ㄴ〉, 흘〈31ㄴ〉, 뫼흘〈48ㄱ〉, 이하 생략

. →의 : 盜賊의〈8ㄱ〉, 雜虜의〈8ㄴ〉, 臣下의〈8ㄴ〉, 使者의〈10ㄴ〉, 이하 생략

. →믜(속격) : 사믜게〈9ㄱ〉, 사믜〈52ㄴ〉, 사믜〈35ㄱ〉

. →믜(처격) : 보믜[春]〈14ㄱ〉〈35ㄱ〉, 바믜〈15ㄱ〉, 아믜〈30ㄴ〉

. →븨 : 나 소리→나븨 소리〈36ㄱ〉

. →픠 : 알→알픠〈33ㄴ〉

. 로→으로 : 萬方으로〈7ㄴ〉, 謀略으로〈11ㄴ〉, 使至尊으로〈13ㄱ〉, 關山으로〈18ㄱ〉, 이하 생략

. →은 : 廟略은〈7ㄱ〉, 犬戎은〈8ㄴ〉, 刻扈從은〈8ㄴ〉, 此編은〈18ㄴ〉, 이하 생략.

. →믄 : 샤믄〈23ㄴ〉〈25ㄴ〉, 뮈유믄〈29ㄱ〉, 사믄〈31ㄱ〉〈31ㄱ〉〈33ㄴ〉〈38ㄴ〉, 요믄〈33ㄱ〉, 이하 생략.

. 곤→군 : 두곤→두군〈46ㄴ〉

. →는 : 매 주으려는 사믜게 븓니라〈53ㄱ〉

. →들흔 : 諸將들흔〈44ㄴ〉

. 란→으란 : 右翼으란〈7ㄴ〉

. →흔 : 돌흔〈54ㄴ〉

. →근 : 근〈31ㄱ〉〈37ㄱ〉, 근〈47ㄱ〉

. 거→거늘 : 니거늘〈20ㄴ〉, 거늘〈33ㄴ〉, 叛커늘〈40ㄱ〉

. 나→나늘 : 오나늘〈16ㄴ〉

. 나→나든 : 오나든〈21ㄱ〉〈35ㄱ〉

. 어→어늘 : 侈其居第어늘〈15ㄱ〉, 乘龍上昇이어늘〈18ㄱ〉, 還京師ㅣ어시늘〈18ㄱ〉, 驕傲ㅣ어늘〈32ㄴ〉, 이하 생략.

. →므 : 너므며〈24ㄴ〉, 나므니〈29ㄴ〉

. →브 : 자브니라〈18ㄱ〉, 자브라〈50ㄴ〉

. →프 : 노프니〈32ㄴ〉, 노픈〈28ㄴ〉〈36ㄱ〉〈36ㄴ〉

. →듸 : 먼 →먼 듸〈42ㄱ〉, 뷘 듸[空]〈48ㄱ〉

. →르 : →르〈10ㄴ〉

. →으 : 여→여으〈50ㄴ〉

아래는 초간본의 음성모음이 중간본에서 양성모음으로 바뀐 경우이다. 이 예들은 ‘초간본’에서 선행 형태가 음성모음일 경우에도 양성모음이 표기되었다가 중간본에서 음성모음이 표기되는 예와 함께, 모음조화가 약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 르→ : 서르→서〈39ㄱ〉

. 수→소 : 비루수→비루소〈6ㄱ〉

. 들→ : 기들우니라→기우니라〈14ㄴ〉

. 훔→흠 : 일훔난→일훔난〈29ㄱ〉

. 욱→옥 : 더욱→더옥〈32ㄴ〉〈32ㄴ〉〈52ㄱ〉

3.2. ‘오/우’의 소실

화자 주어나 목적어 관계화를 나타내는 ‘오/우’는 16세기에 오면, 약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며, 근대국어 시기에서는 점점 사라지는데, 『두시언해』의 초간본과 중간본을 대조하면, 이러한 경향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랑호니→랑니〈5ㄱ〉, 롤디라→를디라〈7ㄱ〉, 어둘 히→어들 히〈13ㄴ〉, 사 뎬→사를 뎬〈28ㄱ〉, 자볼뎬→자블뎬〈28ㄱ〉, 자볼디니라→자블디니라〈28ㄱ〉, 맛듀라→밧디고〈29ㄱ〉, 위로홀 주리→慰勞 주리〈35ㄴ〉, 조보→조브믈〈45ㄱ〉, 미→미〈53ㄴ〉, 우 우셔→우음 우어셔〈53ㄴ〉

이와는 달리 ‘초간본’에서 ‘오/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중간본’에서 ‘오/우’를 추가한 예도 보인다.

이받니→이받노니〈51ㄴ〉

3.3. ㅿ의 소실

『두시언해』의 초간본에도 ㅿ의 소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초간본에서 ㅿ으로 표기되던 것이 중간본에서 ㅿ이 소실되는 경우가 많다.

가면[豊]〈34ㄴ〉, 겨[冬]〈50ㄱ〉, [邊]〈7ㄴ〉〈10ㄱ〉〈10ㄱ〉〈11ㄱ〉〈13ㄱ〉〈17ㄴ〉〈20ㄱ〉〈26ㄱ〉〈28ㄱ〉〈3 3ㄴ〉〈42ㄱ〉〈48ㄴ〉〈54ㄴ〉, [秋]〈10ㄴ〉〈17ㄴ〉〈35ㄱ〉〈35ㄱ〉〈38ㄴ〉〈47ㄱ〉, 나오다[進]〈30ㄴ〉, 나아가고〈30ㄴ〉〈48ㄴ〉, 니어[繼]〈31ㄴ〉〈32ㄱ〉, 두어[數]〈9ㄱ〉〈17ㄴ〉〈31ㄱ〉, 양〈41ㄴ〉, 〈5ㄱ〉〈6ㄴ〉〈16ㄴ〉〈19ㄱ〉〈23ㄴ〉〈37ㄱ〉〈42ㄴ〉, 〈25ㄴ〉〈30ㄱ〉〈33ㄱ〉, 바오미〈18ㄴ〉, 이〈28ㄴ〉〈35ㄱ〉〈43ㄴ〉〈49ㄴ〉, →아 : 어느 아〈28ㄱ〉, 鎭之라아〈47ㄴ〉, 倚仗야아〈47ㄴ〉, →아[奪]〈26ㄴ〉〈32ㄱ〉〈38ㄴ〉〈41ㄱ〉〈48ㄴ〉, 아[親]〈20ㄴ〉〈30ㄱ〉, 아라히〈12ㄴ〉〈34ㄴ〉, 우움[笑]〈30ㄴ〉〈53ㄴ〉, 즈음[隔]〈27ㄴ〉, 지우믈〈51ㄴ〉, 처엄〈6ㄱ〉〈7ㄴ〉〈17ㄱ〉〈18ㄱ〉〈42ㄴ〉〈43ㄱ〉〈48ㄱ〉, 헐므으닐〈16ㄱ〉, 오리로소니〈39ㄴ〉, -〈16ㄴ〉〈53ㄴ〉.

3.4. 강세첨사 ‘ㄱ’의 탈락

고려시대 석독구결에서도 활발하게 사용되었고, 15세기 국어에서도 비록 일부의 예이기는 하나, 사용례가 확인되었던 강세첨사 ‘-ㄱ’이 『두시언해』의 중간본에서는 완전히 없어졌다.

. 말옥→말오 : 〈초간본〉靑海ㅅ 녀글  삼가 말며 越裳ㅅ 녁 무롬도 잇비 말옥 님그미 몬져 사호 그쳐  華山 陽애 보내욜 디니라 → 〈중간본〉靑海ㅅ 녀글 믈 삼가 말며 越裳ㅅ 녁 무룸도 잇비 말오 님그미 몬져 사호믈 그쳐  華山 陽애 보내욜 디니라 / 〈초간본〉金湯티 구두믈 取디 말옥 기리 宇宙로 여 새롭게 홀 디니라 → 〈중간본〉金湯티 구두믈 取디 말오 기리 宇宙로 여 새롭게 홀 디니라

. 이옥→이오 : 〈초간본〉此 言當立功圖形이옥 死不足恤이니라 → 〈중간본〉此 言當立功圖形이오 死不足恤이니라

. 곡→고 : 〈초간본〉此 言翰이 出則鎭邊遠곡 入則受寵遇也ㅣ라 → 〈중간본〉此 言翰이 出則鎭邉遠고 入則受寵遇也ㅣ라

3.5. ‘다’의 사동사 ‘다’ → ‘다’ 변화

15세기에 확연하게 구분되던 사동사 ‘다’와 주동사 ‘다’가 『두시언해』의 중간본에 오면, ‘다’가 ‘다’로 변화하게 된다.

〈초간본〉내 머리 도라 라 로 여 셜워 우러 슬픈 미 닐에 디 마롤 디어다〈두시 5:9ㄱ〉

→ 〈중간본〉내 머리 도라 라 로 여 셜워 우러 슬픈 미 닐에 디 마롤 디어다

〈초간본〉채 텨 피 나게  로 여 다시 漢臣의 오 저지디 마롤 디어다〈두시 5:10ㄱ〉

→ 〈중간본〉채 텨 피 나게  로 여 다시 漢臣의 오 저지디 마롤 디어다

〈초간본〉金湯티 구두믈 取디 말옥 기리 宇宙로 여 새롭게 홀 디니라〈두시 5:14ㄴ〉

→ 〈중간본〉金湯티 구두믈 取디 말오 기리 宇宙로 여 새롭게 홀 디니라

〈초간본〉賛普ㅣ 해 使者 여 秦에 드려 보내니 조 和好호 通야 煙塵 그치놋다〈두시 5:20ㄱ〉

→ 〈중간본〉賛普ㅣ 해 使者를 여 秦에 드려 보내니 조 和好호믈 通야 煙塵을 그치놋다

〈초간본〉비르수 이 乾坤애 王室이 正도소니 도혀 江漢앳 客 넉스로 여 에 다〈두시 5:22ㄴ〉

→ 〈중간본〉비르수 이 乾坤애 王室이 正도소니 도혀 江漢앳 客의 넉스로 여 에 다

〈초간본〉諸公 表ㅣ 오디 아니호 니디 마롤 디니 茫然 여러 가짓 이리 사로 여 몯 믿게 다〈두시 5:22ㄴ〉

→ 〈중간본〉諸公의 表ㅣ 오디 아니호믈 니디 마롤 디니 茫然 여러 가짓 이리 사로 여 몯 밋게 다

〈초간본〉意氣로 곧 大闕에 가 춤 츠고 雄豪호  五陵ㅅ 사로 여 알에 다〈두시 5:25ㄴ〉

→ 〈중간본〉意氣로 곧 大闕에 가 춤 츠고 雄豪호믈  五陵ㅅ 사로 여 알게 다

〈초간본〉六合이 마  지비 외니 四夷ㅣ  외왼 軍이로다 그럴 貔虎  士로 여 모 니르와다 듣논 바애 勇猛히 호려 다〈두시 5:31ㄴ〉

→ 〈중간본〉六合이 마  지비 외니 四夷ㅣ  외왼 軍이로다 그럴 貔虎  士로 여 모 니르와다 듣논 바애 勇猛히 호려 다

〈초간본〉머리 롣 將軍 오미 엇뎨 더듸뇨 내 心中로 여곰 심히 快足디 아니케 다〈두시 5:35ㄴ〉

→ 〈중간본〉머리 롣 將軍은 오미 엇뎨 더듸뇨 내 心中으로 여곰 심히 快足디 아니케 다

〈초간본〉혼 녜 范增이 玉마 려 리니 吳國ㅅ 兵馬로 여  오 닙디 몯게 홀 디니라〈두시 5:37ㄱ〉

→ 〈중간본〉랑혼 녜 范增이 玉마를 려 리니 吳國ㅅ 兵馬로 여  오 닙디 몯게 홀 디니라

〈초간본〉올로 至尊로 여 社稷을 시름케 니 諸君 므스그로  升平호 報荅고〈두시 5:45ㄴ〉

→ 〈중간본〉올로 至尊으로 야 社稷을 시름케 니 諸君은 므스그로  升平호믈 報荅고

초간본의 ‘다’가 중간본에서 ‘이다’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초간본〉漢朝ㅣ 조 將軍을 시니 이 霍嫖姚 시리로다〈두시 5:52ㄴ〉

→ 〈중간본〉漢朝ㅣ 조 將軍을 시니 당당이 霍嫖姚를 이시리로다

초간본의 ‘여’가 중간본에서도 그대로 ‘여’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초간본〉意氣로 곧 大闕에 가 춤 츠고 雄豪호  五陵ㅅ 사로 여 알에 다〈두시 5:25ㄱ〉

→ 〈중간본〉意氣로 곧 大闕에 가 춤 츠고 雄豪호믈  五陵ㅅ 사로 여 알게 다

〈초간본〉男兒ㅣ 世閒애 나 壯호매 미처 반기 諸侯 封욜 디니라〈두시 5:30ㄱ〉

→ 〈중간본〉男兒ㅣ 世間애 나 壯호매 미처 반기 諸侯를 封욜 디니라

〈초간본〉마 世예 그처 업다 니거시니 天子 엇뎨 블러다가 京都 守이디 아니시뇨〈두시 5:40ㄴ〉

→ 〈중간본〉마 世예 그처 업다 니거시니 天子 엇뎨 블러다가 京都를 守이디 아니시뇨

그러나 초간본의 ‘다’가 중간본에서 오히려 ‘다’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중간본〉韓公이 세 城 손 本來ㅅ 든 天驕子의 漢ㅅ 㫌旗 혀믈 그츄리라 너기더니 엇뎨 回紇의 를 다 어즈러이 여아 도혀 朔方兵을 머리 救리라 너기리오〈두시 5:45ㄱ〉

→ 〈초간본〉韓公이 세 城 손 本來ㅅ 든 天驕子 漢ㅅ 旌旗 혀믈 그츄리라 너기더니 엇뎨 回紇의  다 어즈러이 야 도혀 朔方兵을 머리 救리라 너기리오

그런데 동일한 ‘다’가 ‘-여’ 앞에서는 ‘’로 바뀌지만, ‘-오’ 앞에서는 중간본에서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다’로 쓰인다.

〈초간본〉여가 어즈러운 世 平와 서르 뵈아  번  님 正히 답답신  훤케 려뇨〈두시 5:37ㄱ〉

→ 〈중간본〉여가 어즈러운 世를 平와 서르 뵈아 번 근 님 正히 답답신 믈 훤케 려뇨〈두시 5:37ㄱ〉

〈초간본〉緜州ㅅ 副使ㅣ 누른 오 니버늘 우리 花卿이 러 려 即日에 平오니라〈두시 5:40ㄱ〉

→ 〈중간본〉緜州ㅅ 副使ㅣ 누른 오슬 니버늘 우리 花卿이 러 려 即日에 平오니라

〈초간본〉材質은 몸 구부믈 다호매 가니 微妙호  아 平오 取얘로다〈두시 5:48ㄴ〉

→ 〈중간본〉材質은 몸 구부믈 다호매 가니 微妙호믄 흘 아아 平오믈 取얘로다

3.6. 구개음화

『두시언해』의 중간본에서는 ㄷ구개음화가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두시언해』 권5의 예는 아래와 같다.

텨→쳐〈27ㄱ〉, 션→션졍〈28ㄱ〉, 됴 비→죠 비〈34ㄴ〉, 것거듀→것거주믈〈36ㄱ〉

『두시언해』 권5의 중간본은 역구개음화(逆口蓋音化)의 예도 보여주고 있으므로, 중간본의 시기에는 ‘ㄷ구개음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녀름지→녀름디이〈46ㄱ〉, 비치→비티〈47ㄱ〉, 이그락 지락 니→이긔락 디락 니〈34ㄱ〉

3.7. 8종성법→7종성법

『두시언해』 초간본은 8종성법이므로, 받침 표기에 ‘ㄷ’이 쓰였지만, 중간본은 7종성법이므로 초간본에서 받침이 ‘ㄷ’으로 표기된 예들은 모두 ‘ㄷ’이 ‘ㅅ’으로 바뀌게 된다.

. ㄷ→ㅅ : 묻노라→뭇노라〈16ㄱ〉, 얻고져→엇고져〈22ㄱ〉, 몯 믿게→몯 밋게〈22ㄴ〉, 받오→밧오믈〈27ㄱ〉, 이문노라→뭇노라〈31ㄱ〉, 듣고져→듯고져〈34ㄴ〉, 듣노라→듯노라〈36ㄱ〉, 솓→솟〈50ㄱ〉.

3.8. 다→다

『두시언해』 초간본에서 ‘다’로 표기되던 단어들이 중간본에서 ‘다’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초간본 시기에는 언중들에게 ‘’의 의미가 인지되었다가, 중간본에 와서는 언중들에게 ‘’의 의미가 제대로 인지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 아래와 같다.

구룸→구룸〈32ㄱ〉, →〈36ㄱ〉, 닐〈36ㄴ〉, 닐〈38ㄱ〉, 〈38ㄴ〉.

중간본에서 ‘다’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니오〈37ㄴ〉, 가 붓그리노라〈29ㄴ〉

3.9. ‘ㄱ’의 복원

15세기 국어에서는 모음이나 ‘ㄹ’ 받침에 후행하는 ‘ㄱ’은 약화되어 표기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두시언해』 초간본도 이러한 표기법을 보여주는데, 중간본에서는 ‘ㄱ’이 복원되어 표기되었다. 예는 아래와 같다.

알에 다→알게 다〈25ㄱ〉

3.10. 경음화

『두시언해』 중간본에서는 경음화를 적극적으로 표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갑올고→갑옭고〈13ㄴ〉, 報答고→報答고〈45ㄴ〉, 엇더고→엇더고〈52ㄴ〉

3.11. ‘엣/앳’의 ‘ㅣ’ 탈락

『두시언해』 초간본에는 부동사 어미 ‘-어’에 ‘잇다’가 결합한 ‘-어 잇다’ 구문은, 선행모음에 따라 ‘-엣다/-앳다’로 표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중간본에서는 ‘ㅣ’가 탈락한 ‘-엇다/-앗다’로 표기된 예가 있다.

노팻더라→노팟더라〈38ㄱ〉, 옛도다→엿도다〈41ㄴ〉, 곳다온 프를→곧다온 프를〈35ㄱ〉

3.12. 중간본의 교정

『두시언해』 중간본에서는 초가본의 내용이 더러 교정되어 있는데, 올바른 교정보다는 초간본의 언어 사실을 잘못 이해해서 잘못 교정한 경우가 더 많다. 먼저 중간본에서 정당하게 교정된 예이다.

서→셔〈10ㄴ〉, 오 아 가막가치 깃비 우루믄→오 아 가막가치 깃비 우루믄〈두시 5:12ㄱ〉

위의 예에서 초간본의 ‘서’가 중간본에서 ‘셔’로 교정된 예인데 이는 올바른 교정이다. 그러나 중간본의 교정이 오히려 잘못된 경우가 더 많다.

사홈을 섯게로소니 → 섯겟도소니〈13ㄴ〉, 엇뎨 더듸니오 → 어뎨 더듸리오〈10ㄴ〉, 오랫디→오래디〈34ㄱ〉, 게 特出 材質을 倚仗야 리라〈두시 5:47ㄴ〉 → 〈중간본〉게 特出 材質을 倚仗야아 리라, 因→人 : 言因亂而道路ㅣ 不通也ㅣ라 → 言人亂而道路ㅣ 不通也ㅣ라〈16ㄴ〉, 羣臣이→群臣ㅣ〈18ㄱ〉, 하해→하해〈10ㄱ〉, 헐우도다→헐우로다〈26ㄴ〉, 서→셔〈10ㄴ〉, 大荒  가 텨→大荒 흘  텨〈31ㄴ〉, 霍嫖姚가→霍嫖姚인가

초간본에서 부동사 어미 ‘-어’ 뒤에 계사가 연결되는 구성을 중간본의 편집자들은 이해할 수 없거나 더 이상 이런 문법이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섯거+이로소니’ 구성을 ‘섯거#잇도소니’ 구성으로 교정하였다.

3.13. 연철과 분철

『두시언해』의 중간본에서는 초간본에서 연철 표기되었던 것이 분철로 표기된 경우가 많다. 예는 아래와 같다.

다→당당이〈8ㄱ〉, 시르미→시름이〈10ㄴ〉, 번드기→번득이〈17ㄴ〉, 처믜→처엄의〈18ㄱ〉, 미→이〈19ㄱ〉, 수를→술을[酒]〈30ㄴ〉, 사로→사으로〈41ㄱ〉, 사→사〈48ㄴ〉.

그러나 초간본에서 분철되었던 것이 중간본에서 연철된 경우도 있다.

믈읫 이리→므릣 이리〈29ㄴ〉, 닐오→니로〈40ㄴ〉

3.14. 중간본의 오각 내지 탈각

중간본에는 오각이나 탈각으로 볼 만한 것들이 있다. 예는 아래와 같다.

→ 〈5ㄴ〉, 긔→귀 〈9ㄱ〉, →귀 〈9ㄱ〉, 달애야→달애아 〈25ㄱ〉, 也ㅣ라→也ㅣ타 〈32ㄴ〉, 西ㅅ녁→西ㅅ덕 〈48ㄴ〉, 衆→象 〈53ㄴ〉

3.15. 기타

그 이외에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업스려마→어스려마〈29ㄴ〉, 遼海ㅅ 믌겨레 고래 버횰 디어다→遼海ㅅ 믌겨렛 고래 버횰 디어다〈52ㄴ〉, 黃金臺옌 賢俊 뎌 해 뒷도다→黃金䑓옌 賢俊을 두어 해 잇도다〈24ㄴ〉, 中에→듕에〈33ㄱ〉, 家門→가문〈38ㄴ〉,  치와→ 것과〈35ㄱ〉, 나 소리→나븨 소리〈36ㄱ〉, 洛陽ㅅ 宮殿이→洛陽애 宮殿이〈두시 5:45ㄴ〉, 리-→리-〈25ㄱ〉

4. 『두시언해』 권5의 어휘와 표현

『두시언해』는 어휘, 표현, 문법 등에서 다른 중세국어 문헌에 비해 독창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어, 국어학계에서는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그러나 연구의 역사에 비해, 연구의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분량이 많은데다가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쉽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남풍현(2014)에서 제시된 예를 중심으로 『두시언해』 권5에 쓰인 희귀어와 『두시언해』에서만 쓰이거나, 다른 중세국어 문헌에 비해 『두시언해』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쓰인 어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두시언해』 권5에는 『두시언해』에서만 사용된 많은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들 중 중요한 것은 예문을 통해 살펴보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 것들은 예만 제시하기로 한다. 주001)

<풀이>남풍현(2014)에는 즉 ‘샇-[築]+오+ㄴ’으로 분석되는 ‘손’도 제시되어 있으나, 이것은 경음을 가진 단어를 평음으로 표기한 『두시언해』의 표기적 특징을 반영한 단어이므로, 뒤에 따로 기술한다.

(1) 다[穿] : 누니 게 라오 디  當호니 미 주그니   노햇 도다(眼穿當落日 心死著寒灰)〈두시 5:5ㄱ〉

(2) 듧다 :

가. 해 구무 듧고  지여 온 모 무두매 當얀 어루 모미 외녀(方其穴地負土야 全體而坑之얀 爲可忍耶아)〈법화 6:154ㄴ〉

나. 祖師ㅅ 眞機 聖解 通호미 어려우며 凡情이 듧디 몯논 젼로 일후믈 關이라 니라〈금삼序二2ㄱ〉

다. 시 四明ㅅ 누네 듧고 주으려 楢溪옛 도토바 주니라(履穿四明雪 飢拾楢溪橡)〈두시 24:38ㄴ〉

(3) 들우다 :

가. 다가 이 量애 너믄 사미면 石火電光  번 자보매 곧 자며 銀山鐵壁을 번 들우메 곧 들우리니(若是過量漢이면 石火電光 一捉애 便捉며 銀山鐵壁을 一透에 便透리니)〈금삼 序2:5ㄴ〉

나. 精微호 溟涬을 들우리오(精微穿溟涬)〈두시 16:2ㄱ〉

(4) 들워디다 :

가.  우희 무롭 다핫던 히 다 들워디옛더라(其榻上當膝處ㅣ 皆穿니라)〈번소 10:22ㄴ〉

나. 그 평상 우희 무롭 단 고디 다 들워디니라(管寧이 嘗坐一木榻더니 積五十餘年이로 未嘗箕股니 其榻上當膝處ㅣ 皆穿니라)〈소학 6:121ㄱ〉

. 위에서 ‘다’는 자타동 양용동사로 ‘뚫다, 뚫리다’의 뜻이다. ‘다’는 그 용례가 『두시언해』의 여기서만 보이며 다른 문헌에서는 ‘듧다’가 쓰였다. (1)은 『두시언해』 권5에 쓰인 ‘다’의 예이며, (2가, 나)는 각각 다른 문헌과 『두시언해』에 쓰인 ‘듧다’의 용례이며, (3)은 ‘듧다’의 사동사인 ‘들우다’, (4)는 ‘들우다’의 ‘-어디-’ 파생동사인 ‘들우디다’의 예이다.

(5) 가. 버리도 매 모디로 머겟니 雷霆ㅅ 威嚴을 震動호미 可니라(蜂蠆終懷毒 雷霆可震威)〈두시 5:10ㄱ〉

나. 塵沙傍蜂蠆 江峽繞蛟螭(塵沙ㅅ 서리예 蜂蠆 바라 니고 江峽에 蛟螭 버므러 니노라)〈두시 16:10ㄱ〉.

. 버리[蜂]에서 ‘벌’의 의미인 ‘버리’는 ‘벌’에 동물 명칭 등에 결합하는 파생접미사 ‘-이’가 결합한 형태이다. (5가)에서 볼 수 있듯이 ‘버리’는 두시 원문의 ‘봉채(蜂蠆)’에 대응한다. 15세기 국어에는 현대국어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단어에 접미사 ‘-이’가 붙어 단어를 형성하는 현상이 있다. ‘벌’과 ‘버리’도 그런 관계를 가진 단어들 중 하나이다. (5나)에서와 같이 ‘봉채(蜂蠆)’는 『두시언해』의 다른 곳에서는 언해되지 않고 그대로 ‘蜂蠆’로 제시된 곳도 있다.

(6) 길헤셔 숫어 놀애 브르리 하니 河北엣 將軍이 다 入朝놋다(喧喧道路多謌謠 河北將軍盡入朝)〈두시 5:22ㄱ〉

(7) 가. 수다 : 近閒애 드로니 詔書ㅣ 려 都邑에셔 수니 엇뎨 麒麟로 여 地上애셔 니게 리오(近聞下詔喧都邑 肯使麒麟地上行)〈두시 17:29ㄴ〉

나. 수다 :  소리 수니 기리 조오로미 젹고 樓ㅣ 아라니 올로 時ㅣ 옮록 이쇼라(江喧長少睡 樓迥獨移時)〈두시 3:40ㄴ〉

다. 수다 : 나조히 도록 刀斗 티니 수 소리 萬方애 니도다(竟夕擊刁鬥 喧聲連萬方)〈두시 10:20ㄱ〉

라. 숫어리다 : 마 數 업슨 새 더으니 토아 沐浴야 짐즛 서르 숫어리다(已添無數鳥 爭浴故相喧)〈두시 10:6ㄴ〉

마. 숫워리다 : 다 西ㅅ 녁  서르 이디 아니호 치고 숫워려셔  가온  수를 업텨 머구라(共指西日不相貸 喧呼且覆杯中淥)〈두시 3:53ㄴ〉

바. 수어리다 : 靑女의 서리 온 싣남기 하니 黃牛ㅅ 峽엣 므리 수어리다(靑女霜楓重 黃牛峽水喧)〈두시 11:49ㄴ〉

사. 수어리다 : 매 蛟螭와 다 섯고니 엇뎨 져비 새 수어리미 업스리오(竟與蛟螭雜 空聞燕雀喧)〈두시 21:10ㄱ〉

아. 수워리다 : 먼 村애 가 사롤 이 다시 議論야 수워리  避야 모딘 범 잇  히 너기니(更議居遠村 避喧甘猛虎)〈두시 9:9ㄴ〉

자. 숫두워리다 : 潭州ㅅ 올 안히 甚히 淳朴며 녜로외니 員의  안핸 숫두워려 블로미 업도다(潭府邑中甚淳古 太守庭內不喧呼)〈두시 9:31ㄱ〉

. 숫다[喧]에서 ‘숫다’는 ‘떠들썩하게 말하다’의 의미로 두시 원문에서는 (6)에서 볼 수 있듯이 ‘훤훤(喧喧)’의 번역으로 쓰였다. ‘숫다’와 관련되는 단어가 비교적 많은데, 수다(7가), 수다(7나), 수다(7다), 숫어리다(7라), 숫워리다(7마), 수어리다(7바), 수어리다(7사), 수워리다(7아). 숫두워리다(7자) 등이 있다. ‘수다, 수다, 수다’는 ‘숫다’에 각각 사동접미사 ‘--, -으-, -우-’가 결합된 형태이며, ‘숫어리다, 숫워리다’는 각각 ‘숫다’에 ‘-어리-’와 ‘-워리-’가 결합된 단어이다. ‘수어리다, 수어리다, 수워리다’는 각각 ‘수다’나 ‘수다’에 ‘-어리-’나 ‘-워리-’가 결합된 단어이다. ‘숫두워리다’는 ‘숫다’와 ‘-워리-’ 사이에 ‘두’가 개입한 것으로 개입된 ‘두’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8) 가. 紫氣關 天地 어윈  臨야 잇고 黃金臺옌 賢俊 뎌 해 뒷도다(紫氣關臨天地闊 黃金臺貯俊賢多)〈두시 5:24ㄴ〉

나. 紫氣關은 天地 어윈  臨야 잇고 黃金䑓옌 賢俊을 두어 해 잇도다〈중간두시5:24ㄴ〉

. 디다[貯]에서 ‘디다’는 두시 원문의 ‘貯’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두시언해』는 물론 15세기 국어 전체 문헌 중에서도 (8가)에 제시된 『두시언해』 권5의 이 용례만 확인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중간본〉의 해당 번역이 (8나)와 같이 ‘두어’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중간본〉이 간행되던 시기인 17세기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9) 가. 히 뷘  여슷 리 드러오니 머리 이어고 旗旌을 드논놋다(庭空六馬入 駊騀揚旗旌)〈두시 5:48ㄱ〉

나. 오 요미 天下ㅣ 다니 래 긋어 微風에 드논놋다(曝衣遍天下 曳月揚微風)〈두시 11:24ㄱ〉

다. 녯 버듸 디 늘구매 뉘 너 리오 날로 여 손바리 가야와 드노코져 케다(故人情味晚誰似 令我手脚輕欲旋)〈두시 3:51ㄱ〉

. 드놋다(드놓다)[揚]에서 ‘드놋다’는 ‘들-[擧]’과 ‘놓-[放]’의 합성동사로서 두시 원문의 ‘揚’에 대응된다. 이 단어는 『두시언해』에서만 확인되는 단어인데, 『두시언해』에서는 감탄 표현인 ‘드논놋다’의 형태로 쓰였다. 선행동사인 ‘들-’의 받침 ‘ㄹ’은 탈락하였고 후행동사인 ‘놓-’은 후행하는 ‘놋’의 영향으로 비음화된 표기되어 ‘논’으로 표기되었다. 후행동사를 ‘놓-’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9다)의 ‘드노코져’에서 확인된다. ‘드논놋다’는 원시의 ‘揚’에 대한 번역으로 ‘드놓다’는 『두시언해』에서만 보이는 단어이다. (9가, 나)의 ‘드논놋다’는 두시 원문의 ‘揚’의 번역으로 쓰였는데 반해, (9다)의 ‘드노코져’는 두시 원문의 ‘旋’의 번역으로 쓰였다.

(10)가. 애 긋븐 소리를 므더니 너기고져 간마 미 어즈럽건디 마 오랄 니라(欲輕腸斷聲 心緒亂已久)〈두시 5:26ㄴ-27ㄱ〉

나. 閬中엣 됴 이리 어루 애 긋브니 閬州ㅅ 城 南녀근 天下애 드므도다(閬中勝事可腸斷 閬州城南天下稀)〈두시 13:32ㄴ〉

다. 애 긋다 : 나 식 랑홈 야 렴호 애 긋도다〈은중10ㄱ〉 /  뫼헤셔 뎌 부로매 과 왜 니 뉘 지븨셔 애 긋 소리 工巧히 짓니오(吹笛秋山風月清 誰家巧作斷腸聲)〈두시 16:50ㄴ〉

라. 애 긋다 : 細柳營에 金甲 흐로 듣디 몯리로소니 秦州에 흐린 涇水 흐르 〈두시 3:37ㄴ〉 해 애 긋노라(未聞細柳散金甲 腸斷秦州流濁涇)〈두시 3:37ㄱ-ㄴ〉

. 긋브다[斷] : ‘긋브다’는 ‘끊다, 그치다’의 의미인 동사 ‘긏-’에 형용사파생접미사 ‘-브-’가 결합되어 형성된 단어로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된다. (10가)는 『두시언해』 권5에서 쓰인 용례이고, (10나)는 그밖의 권차에서 쓰인 용례이다. 『두시언해』에 쓰인 ‘긋브다’는 모두 주어로 ‘애’를 가진다. 15세기 국어의 ‘긏다’는 자타동양용동사인데, 『두시언해』에는 (10다)와 같이 ‘애 긋다’의 표현도 쓰이고 (10라)와 같이 ‘애 긋다’의 표현도 쓰인다.

(11) 智慧와 예 님금 스치샤미 드롓니 나며 드로매 諸公의게 옛도다(智謀垂睿想 出入冠諸公)〈두시 5:41ㄴ〉

. 닐여듧[七八] : (12)의 ‘닐여듧’도 ‘닐곱’과 ‘여듧’의 합성어인데 15세기 국어에서도 『두시언해』 권5의 이 예만 확인된다.

(12) 禽獸ㅣ 마 열헤 닐여들비 주그니 주기 소리 디 예 하 두르혀 도다(禽獸已斃十七八 殺聲落日回蒼穹)〈두시 5:49ㄴ〉

. 이다[冠]에서 ‘이다’는 ‘다’의 피동사로 ‘-’에 피동접미사 ‘-이-’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동사이다. 『두시언해』에서도 (11)과 같이 권5의 용례만 확인된다.

(13) 네 鎭에 나니 하니 敵鋒을 摧陷요미 다 무레 혀 나니라(四鎭富精銳 摧鋒皆絕倫)〈두시 5:53ㄱ〉

(14) 가. 다 : 摝  씨라 拯은 거려낼 씨오 濟 걷날 씨라〈월석 1:월석序9ㄱ〉

나. 디다 : 자내 지믈 어마님 맛디시고 부러 디여 여슷 里 가시니〈석상 3:37ㄴ〉

다. 러디다 : 모딘 길헤 러디면 恩愛 머리 여희여 어즐코 아야〈석상 6:3ㄴ〉

. 히다[絶]에서 ‘히다’는 ‘떨다’의 뜻인 ‘-’에 피동접미사 ‘-히-’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동사이다. 15세기 국어의 ‘다’는 (14나, 다)와 같이 ‘디다’와 ‘러디다’와 같이 다른 피동사들도 있었다.

위에서 (1)의 ‘듧다’, (5)의 ‘버리’, (6)의 ‘숫다’, (8)의 ‘디다’, (9)의 ‘드놋다(드놓다)’, (10)의 ‘긋브다’, (11)의 ‘이다’, (12)의 ‘닐여듧’, (13)의 ‘히다’는 모두 남풍현(2014)에서 『두시언해』 권5에 쓰인 희귀어(稀貴語)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두시언해』 권5에는 위에서 제시된 단어 이외에도 『두시언해』에서만 쓰인 단어이거나, 15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는 잘 쓰이지 않은 단어들이 많다. 여기서는 『두시언해』에서만 쓰인 용례만 제시한다.

먼저 동사, 형용사의 예이다. 여기에는 동사의 예로 ‘시름외다, 에이다’가, 형용사의 예로 ‘구즉다, 비뉘다, 시드럽다, 죠고마다’를 제시하였다.

(15) 시름외다:

가. 시름왼 데 되 픗뎌 부 나조히여 서코 슬픈 漢苑ㅅ 보미로다($愁思胡笳夕 凄凉漢苑春)〈두시 5:5ㄴ〉

나. 시름왼 드로 구룸 髻髮을 리니 허리와 四支예 貴 오시 어위도다(秋思拋雲髻 腰支膡寶衣)〈두시 5:17ㄱ〉

다. 天子ㅣ 처믜 시름왼 들 시고 都邑ㅅ 사 여희  슬허니라(天子初愁思 都人慘別顏)〈두시 5:18ㄱ〉

라. 穹廬ㅣ 아라히 牢落니 우희 잇 녀 구루미 시름외도다(穹廬莽牢落 上有行雲愁)〈두시 5:34ㄱ〉

마.  부 수풄 소리 것고 시름왼 돌 양 改變놋다(颼颼林響交 慘慘石狀變)〈두시 1:23ㄱ〉

바. 셔울히 다시 블 븓디 아니야 涇渭옛 사미 시름왼 양 훤야(京都不再火 涇渭開愁容)〈두시 4:24ㄱ〉

(16) 시름다 :

가. 太子ㅣ 니샤 사 목수미 흐를 믈 야 머므디 몯놋다 시고 도라 드르샤 시름야 더시다〈석상 3:18ㄱ〉

나. 주려셔 집마다  빌오 시름얀 곧마다 숤盞 求노라(飢籍家家米 愁徵處處盃)〈두시 3:9ㄴ〉.

. 시름외다에서 ‘시름외다’는 ‘시름’과 ‘외다’가 결합한 된어로 ‘걱정되다, 근심되다’의 의미이다. 『두시언해』 이외의 문헌에서는 ‘시름다’가 쓰였다. (15)는 ‘시름외다’의 예이고, (16)은 ‘시름다’의 예이다. (15가~라)는 『두시언해』 권5에 쓰인 예이다.

(17) 가. 외로왼 구루미 殺伐ㅅ 氣運을 좃고  새 轅門을 에여가놋다(孤雲隨殺氣 飛鳥避轅門)〈두시 5:53ㄴ〉

나. 사 에여가 諫諍던 긄草 브레 오  타 나오니 기 기세 오고져 놋다(避人焚諫草 騎馬欲雞棲)〈두시 6:15ㄴ〉

다. 내 人生 일버어 기리 어려운  에여니고 먼  가매 다시 옷기 믈로 저지노라(偷生長避地 適遠更霑襟)〈두시 2:26ㄴ〉

라. 陶潛 世俗 에여니 한아비니 반기 能히 道理 아디 몯니라(陶潛避俗翁 未必能達道)〈두시 3:58ㄴ〉

. 에이다 : ‘피하다’의 의미이다.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되는 단어인데, 『두시언해』에서도 ‘에여니다’, ‘예여가다’와 같은 표현만 확인될 뿐 단독으로 쓰인 경우가 없어서 아마도 15세기 당시에 이미 세력이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7가, 나)는 ‘예여가다’의 예이고, (17다, 라)는 ‘에여니다’의 예이다.

(18) 가. 魏侯ㅣ 氣骨이 구즉고 精神이 니 華嶽ㅅ 묏부리예  매 보 도다(魏侯骨聳精爽緊 華嶽峯尖見秋隼)〈두시 5:38ㄴ〉

나. 아래로 어 가 坤軸 리티니 구즉 石壁 鏌鎁劒이 모댓 도다(下沖割坤軸 竦壁攢鏌鋣)〈두시 6:47ㄱ〉

다. 西嶽이 노파 구즉 히 尊니 여러 묏부리 버러 셔시? 兒孫이 도다(西嶽崚嶒竦處尊 諸峯羅立如兒孫)〈두시 13:4ㄱ〉

라. 빗나 后羿ㅣ 아홉  소아 디 고 구즉호 한 天帝ㅣ 龍 타 솟 고(爧如羿射九日落 嬌如群帝驂龍翔)〈두시 16:47ㄴ〉

마. 구즉 큰 賢人의 後에  秀骨이 고 보라(嶷然大賢後 復見秀骨清)〈두시 24:18ㄴ〉

바. 구즉 江海예 이숄 디 도로 雲路로 다 기도다(矯然江海思 復與雲路永)〈두시 24:40ㄴ〉.

(19) 가. 너 外曾孫이니 구즉구즉야 피 내  삿기 도다(爾惟外曾孫 倜儻汗血駒)〈두시 22:45ㄱ〉

다. 踔 구즉 셜 탁〈新類下55ㄴ〉

. 구즉다에서 ‘구즉’은 ‘우뚝’에 해당하는 부사로 보이며, ‘구즉다, 구즉구즉다’는 『두시언해』에만 쓰였다. (18)은 ‘구즉다’의 예이며, (19가)는 ‘구즉구즉다’, (19나)는 부사 ‘구즉’의 예이다.

(20) 가. 뉘 닐오 모딜에 소 거슬 기텨 두리라 리오 마 이 비뉘 거슬 시서 리놋다(誰云遺毒螫 已是沃腥臊)〈두시 5:4ㄱ〉

나. 주거미 답사효매 플와 나모왜 비뉘고 피 흘로매 내과 두들기 블겟도다(積屍草木腥 流血川原丹)〈두시 4:10ㄴ〉

다. 어젯 바 東녃 미 피 부러 비뉘니 東로셔 오 橐駝ㅣ 녯 都邑에 도다(昨夜東風吹血腥 東來橐駝滿舊都)〈두시 8:2ㄴ〉

라. 비와 아리 가진 비뉘 고기 본 먹디 아니니 나리 록 주류믈 마 西로 가락  東으로 오놋다(鱗介腥膻素不食 終日忍飢西復東)〈두시 17:19ㄱ〉

마. 햇 사미 비뉘 거슬 相對야셔 취바 長常 브르 먹디 몯호라(野人對膻腥 蔬食常不飽)〈두시 19:46ㄴ〉

바. 곧 이제 龍廐엣 므리 犬戎의 비뉘호  디 아니얫녀(卽今龍廄水 莫帶犬戎膻)〈두시 20:4ㄴ〉 / 中華와 夷狄괘 서르 섯거 모니 宇宙ㅣ  디위 비뉘도다(華夷相混合 宇宙一膻腥)〈두시 24:6ㄱ〉.

. (20)에서 비뉘다는 ‘비릿하다’의 뜻으로 두시 원문의 ‘腥, 膻, 腥膻’ 등에 대응된다. (20가)는 『두시언해』 권5에 나오는 예이고, 나머지는 그밖의 권차에 나오는 예이다.

(21) 시드럽다 :

가. 이 무리 恩惠를 感激야 오니 시드러운 俘獲은 엇뎨 足히 자브리오(此軰感恩至 羸俘何足操)〈두시 5:4ㄱ〉

나. 큰 올도 열 지비 업고 큰 族屬도 性命이 외외며 시드럽도다(大鄉無十家 大族命單贏)〈두시 25:36ㄴ〉

다. 山林에 시드러운 모 브툐니 반시 崎嶇히 어려이 뇨 免티 몯리로다(山林託疲薾 未必免崎嶇)〈두시 2:11ㄴ〉

(22) 시들다 :

가. 다 나래 窓牖中에셔 아 모미 여위오 시들며  기 듣글 무더 더러워 조티 몯  머리셔 보고〈법화 2:209ㄴ〉

나.  여위여 시들오  브르도다 사미 도라 보디 아니니〈남명上30ㄱ〉

. 시드럽다는 ‘시들다’에 형용사파생접미사 ‘-업-’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단어이다. ‘시드럽다’는 주로 『두시언해』에서만 쓰이고 나머지 15세기 문헌에서는 주로 ‘시들다’가 쓰였다. (21)은 ‘시드럽다’의 예이고 (22)는 ‘시들다’의 예이다.

. 죠고마다는 15세기에 ‘작다’의 뜻은 ‘쟉다, 젹다, 죡다, 횩다, 죠고마다, 져고마다’ 등이 있는데, 이 중 ‘죠고마다’와 ‘져고마다’는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된다. (23)은 ‘죠고마다’의 예이고, (24)는 ‘져고마다’의 예이다.

(23) 죠고마다 :

가. 邊塞ㅅ 우희 傳야 오 비치 죠고마고 구  디 點이 殘微도다(塞上傳光小 雲邊落點殘)〈두시 5:54ㄴ〉

나. 受苦로이 가 華蓋君을 보디 몯호니 艮岑앳  비치 슬피 죠고마더라(辛勤不見華蓋君 艮岑靑輝慘么麽)〈두시 9:5ㄱ〉

다. 매 거리  ?현이 죠고마가 식브고 누네 바라 양주ㅣ 뵈다(關心小剡縣 傍眼見揚州)〈두시 13:26ㄱ〉

라. 徐關 기픈 믌 기우리 외얏고 碣石 죠고마야  터리 도다(徐關深水府 碣石小秋毫)〈두시 13:30ㄱ〉

마. 뵈이 甚히 죠고마 거시로 슬픈 소리 모 사 感動다(促織甚微細 哀音何動人)〈두시 17:37ㄱ〉

(24) 져고마다 :  幕  건너 멀오 블근 幡은 무틔 올아 져고마도다(素幕渡江遠 朱幡登陸微)〈두시 24:48ㄱ〉

『두시언해』에는 ‘한자어 명사’와 ‘다’가 결합되어 합성동사나 합성형용사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두시언해』에 쓰인 ‘한자어+다’ 중에는 그밖의 문헌에서는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더러 있다. 『두시언해』 권5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단어로는 ‘疑畏다, 制馭다, 豪俠다’가 있다. ‘疑畏다’는 ‘의심하다’, ‘制馭다’는 ‘말을 제압하다’, ‘豪俠다’는 ‘호탕하고 재빨라 남의 위급함을 도와주다’의 뜻이다. ‘疑畏다’와 ‘豪俠다’의 예는 (25, 26)에서 각각 제시된다.

(25) 의외(疑畏)다 : 되 滅니 사미 도혀 亂니 兵事ㅣ 衰殘니 將軍이 제 疑畏놋다(胡滅人還亂 兵殘將自疑)〈두시 5:15ㄴ〉

(26) 호협(豪俠)다 : 漁陽 豪俠 히니 부플 티며 뎌 피리 부놋다(漁陽豪俠地 擊鼓吹笙竽)〈두시 5:32ㄱ〉

다음은 『두시언해』에만 쓰이는 명사들 중 『두시언해』 권5에 쓰인 예들이다. 여기에는 ‘가막가치, 구위, 다봇(다봊), 들굴, , 새집, 이랏, ㅎ, 픗뎌’ 등이 제시되어 있다. ‘가막가치’는 ‘까마귀와 까치’, ‘구위’는 ‘관청’, ‘다봇(다봊)’은 ‘다복쑥’, ‘들굴’은 ‘떼, 뗏목, 떨기’ 등 나무 줄기가 얽히고 설킨 것, ‘’은 ‘배의 돛대’, ‘새집’은 ‘띠집’, ‘이랏’은 ‘앵두’, ‘ㅎ’은 ‘근원’, ‘픗뎌’는 ‘풀피리’의 뜻이다.

‘가막가치’는 ‘가마괴’와 ‘가치’가 결합된 합성명사이다. (27)은 ‘가막가치’의 에이며, (28, 29)는 각각 ‘가마괴’와 ‘가치’의 예이다.

(27) 가막가치 :

가. 오 아 가막가치 깃비 우루믄 凱歌야 도라오 알외오져 놋다(今朝烏鵲喜 欲報凱歌歸)〈두시 5:11ㄱ〉

나. 關山애 티 비취유미 가지니 가막가치 제 해 놀라놋다(關山同一照 烏鵲自多驚)〈두시 12:7ㄴ〉

(28) 가마괴 :

가. 가마괴 本來 거므며 鵠이 本來 며(烏ㅣ 從來예 黑며 鵠이 從來예 白며)〈능엄 10:9ㄱ〉

나. 使者의 드트른 驛ㅅ 길흐로 오니 城에 비츤 가마괴 사굔 대 避놋다(使塵來驛道 城日避烏檣)〈두시 3:12ㄱ〉

(29) 가치 :

가. 녀르미여 겨리여  말도 아니코 안잿거시든 머리예 가치 삿기 치더니〈석상 3:38ㄴ〉

나. 너를 기들우노라 가마괴와 가치 믜여다니 글워 더뎌 鶺鴒을 뵈돗더라(待爾嗔烏鵲 拋書示鶺鴒)〈두시 8:39ㄴ〉.

. 15세기 국어에서 ‘관청’의 뜻으로는 ‘그위’가 일반적으로 쓰였는데 『두시언해』에서는 ‘그위’와 함께 ‘구위’도 쓰였다. (30)은 ‘구위’의 예이고, (31)은 ‘그위’의 예이다.

(30) 구위 :

가. 구윗 지비 期限이 잇니 亡命면 災禍ㅅ 그므레 버믈리라(公家有程期 亡命嬰禍羅)〈두시 5:26ㄱ〉

나. 구위예셔 지유미 마 限ㅣ 이실 소곰 굽노라 므레 잇도다(官作既有程 煮鹽烟在川)〈두시 1:18ㄱ〉

다. 구위로션  마래 돈 三百 받거든 옮겨 라  셔메 돈 六天 닐위니(自公斗三百 轉致斛六千)〈두시 1:18ㄱ〉

마. 구위 爲야 됴 삸대 採取야 다 梁과 齊예 바티놋다(爲官采美箭 五歲供梁齊)〈두시 1:23ㄱ〉

바.   草木ㅣ 니 닌 구윗 소곰 굽  비치로다(鹵中草木白 靑者官鹽烟)〈두시 1:18ㄱ〉

(31) 그위 :

가. 百官 온 그위니 한 臣下 니니라〈석상 3:7ㄱ〉

나. 須達이 닐오 太子ㅅ 法은 거즛마 아니시 거시니 구쳐 시리다 고 太子와 야 그위예 決라 가려 더니〈석상 6:24ㄴ〉

다. 니 기르미 흐르 고 조 니 그위와 아 倉廩이 다 豊實더니라(稻米流脂粟米白 公私倉廩俱豐實)〈두시 3:61ㄴ〉

라. 이 時節에 甚히 軍糧ㅣ 업서 一物이라도 그위예셔 다 아 슬노라(傷時苦軍乏 一物官盡取)〈두시 18:18ㄱ〉.

. 다봇(다봊)은 ‘다북쑥’의 의미이다.

(32) 가. 히미 能히 노피 디 몯고  다보 조차 니고 니(力不能高飛逐走蓬)〈두시 5:50ㄱ〉

나. 踈拙 몸 養호매 다보로 입 로니 아라니 〈두시 3:36ㄴ〉

다. 어느 고로 열리오(養拙蓬爲戶 茫茫何所開)〈두시 3:36ㄱ〉

라. 다봇 옮 호매 시르미 悄悄니 藥 行호매 病이 涔涔놋다(轉蓬憂悄悄 行藥病涔涔)〈두시 3:16ㄴ〉.

. ‘들굴’은 ‘떼. 뗏목. 등걸. 떨기’ 등의 의미를 가지는데, 일반적으로 ‘나뭇가지가 뭉쳐 있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로 보인다.

(33) 가. 들굴  사미 消息이 그츠니 張騫을 어둘 히 업도다(乘槎斷消息 無處覓張騫)〈두시 5:13ㄴ〉

나. 萬象 다  氣運엣 거시오 외로온 들구른 스스로 客星ㅣ 탓도다(萬象皆春氣 孤槎自客星)〈두시 2:21ㄱ〉

다. 새려 므렛 軒檻 더 라 낛 드리우메 供進고 부러  들구를 두어 라 예 드노라(新添水檻供垂釣 故著浮槎替入舟)〈두시 3:31ㄴ〉

라. 藥 다 날  거시 더러 잇고 고 니건  들구레 펫도다(黃落驚山樹 呼兒問朔風)〈두시 3:54ㄴ〉

마. 峓門이 예로브터 비릇니  조바 가 들구를 容納만 도다(峽門自此始 最窄容浮查)〈두시 6:47ㄱ〉

바. 나 듣고 세 소리예 眞實로 므를 디노니 奉命使者 八月ㅅ 들구를 虛히 조차 갯도다(聽猿實下三聲淚 奉使虛隨八月查)〈두시 10:34ㄱ〉

사. 됴 菜蔬ㅣ 더러운  뎟고 時節ㅅ 菊花ㅣ 나모 들굴 서리예 브어뎟도다(嘉蔬沒混濁 時菊碎榛叢)〈두시 12:17ㄴ-18ㄱ〉

아. 이운 들구른 혀 인 남 거두밀옛니 돌콰 다 充塞얏도다(枯查卷拔樹 礧磈共充塞)〈두시 13:7ㄴ〉

자. 내 衰老야  니 들굴와 토니 됴히 건너가 蟠桃 잇  스치노라(吾衰同泛梗 利涉想蟠桃) 梗 들구리라〈두시 13:30ㄱ〉

차. 눈 잇 두들게 들굴 梅花ㅣ 펫고   온 가짓 프리 낫도다(雪岸叢梅發 春泥百草生)〈두시 14:14ㄴ〉

타.  비치  가온 수레 뮈오 노피 바 우흿 들구를 좃놋다(清動杯中物 高隨海上查)〈두시 15:52ㄴ〉

파. 恩波ㅣ 隔絶야쇼 怪異히 너기디 말라 들굴 타 다  무러 하해 올아 가리라(莫怪恩波隔 乘槎與問津)〈두시 16:7ㄴ〉

하.  들구레 와 안자쇼미 됴니 仙人 늘그니 간 서르 디녯도다(浮查並坐得 仙老暫相將)〈두시 16:45ㄱ〉

거. 黃四娘의 지븨 고지 길헤 얏니 즈믄 들굴와 萬 들구리 가지 지즐워 얫도다(黃四娘家花滿蹊 千朶萬朶壓枝低)〈두시 18:7ㄴ〉

너. 저즌 藤蘿ㅅ 架子 고  엿 桂樹ㅅ 들구를 스치노라(露裛思藤架 煙霏想桂叢)〈두시 19:9ㄱ〉

더. 긼 가온대 阮籍이 아니오 들굴 우희 張騫이 도다(途中非阮籍 查上似張騫)〈두시 20:12ㄱ-ㄴ〉

러. 기에 굽스럿니 周史 듣노니 들굴  漢臣이 도다(伏柱聞周史 乘槎有漢臣)〈두시 20:27ㄴ〉

머. 起草호리라 몬져 길헤 우러 가고 들구를 타 조왼  뮈오도다(起草鳴先路 乘槎動要津)〈두시 20:39ㄴ〉.

. 은 ‘배의 돛대’의 뜻으로 『두시언해』에는 두시의 작자 두보의 인생 여정이 담겨 있으므로 다른 문헌에 비해 ‘말()’이나 ‘배()’에 대한 용어가 많다.

(34) 가. 구룸  돗기 遼海로 올마 오니 니리 東吳로셔 오놋다(雲帆轉遼海 粳稻來東吳)〈두시 5:32ㄱ〉

나. 일 녀매 흘 사미 게으르고 돗 로매 ㅣ 아니완히 부놋다(早行篙師怠 席掛風不正)〈두시 1:49ㄴ〉

다. 九江 봄픐 밧기오 三峽 나죗 돗 알피로다(九江春草外 三峽暮帆前)〈두시 2:2ㄴ〉.

. 새집은 ‘띠집’의 뜻으로 ‘띠’의 뜻인 ‘새’와 ‘집’이 결합한 합성명사이다.

(35) 가. 하 비 蕭蕭히 새지븨 오래 오니 뷘 뫼해 幽獨히 이쇼믈 곰 慰勞홀 주리 업도다(天雨蕭蕭滯茅屋 空山無以慰幽獨)〈두시 5:35ㄴ〉

나. 고사리 먹고 녀나 거슬 願티 아니호라니 내 새집을 眼中에 보노라(食蕨不願餘 茅茨眼中見)〈두시 1:24ㄴ〉

다. 巳公 새집 아래여 어루 곰 새 그롤 지리로다(巳公茅屋下 可以賦新詩)〈두시 9:25ㄴ〉.

. ‘이랏’은 ‘앵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두시언해』 권5에서만 확인되는 단어이다.

(36) 가. 賞功샤매 다 枤杜 브르리로소니 도라오샤 이랏 薦 저글 미츠시리로다(賞應歌枤杜 歸及薦櫻桃)〈두시 5:8ㄱ〉

나. 赤墀옛 이랏 가지 銀실로 론 籠애 비취엿거든(赤墀櫻桃枝 隐映銀絲籠)〈두시 4:23ㄴ〉

. ㅎ은 ‘근원’의 뜻이다. 『두시언해』 권5에서는 ‘믌 히’로 쓰였는데, 이는 ‘泉源’의 번역이다. 그런데 『두시언해』에서 ‘泉源’은 ‘믌 밑’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泉源’ 그대로 쓰이기도 하였다. ‘源’은 『두시언해』에서는 많은 경우 ‘ㅎ’으로 번역되었으나 ‘근원’으로 쓰인 경우도 있다. (37)은 ‘ㅎ’의 예이고, (38가)는 ‘源泉’이 ‘믈 밑’으로 번역된 예, (38나)는 ‘源泉’이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두시의 번역으로 쓰인 예이다.

(37) 가. 믌 히 니 나 소리 섯겟고 즌기 펴시니 鴻鵠이 주려 놋다(泉源泠泠雜猿狖 泥濘漠漠飢鴻鵠)〈두시 5:36ㄱ〉

나. 峽이 四千里 여렛니 므른 數百 해셔 모도 흐르놋다(峽開四千裏 水合數百源)〈두시 6:49ㄱ〉

다. 다시 묻노라 네 어드러 가니오 西ㅅ 녁그로 岷江ㅅ 로 올아가놋다(重問子何之 西上岷江源)〈두시 8:7ㄱ〉

라. 宋玉 지븨 와셔  슬코 武陵  길홀 일후라(悲秋宋玉宅 失路武陵源)〈두시 8:12ㄱ〉

마. 凄凉 부듸  오고 浩蕩 말  묻노라(凄凉憐筆勢 浩蕩問詞源)〈두시 8:25ㄱ〉

바. 긄  三峽 므를 갓故로 흘리리오 붇陣 올로 즈믄 사 軍 러 리리로다(詞源倒流三峽水 筆陣獨掃千人軍)〈두시 8:30ㄴ〉

사. 믌   구븨와 荊門ㅅ 이 길흘 疑心노라(江水清源曲 荊門此路疑)〈두시 11:27ㄱ〉

아. 녯  樊川엣 菊花로  滻水ㅅ 해 登高요라(故里樊川菊 登高素滻源)〈두시 11:29ㄴ〉

자.  미 서늘 後를 져기 기들워 白帝 노피 자 가 眞實ㅅ  무르리라(稍待西風涼冷後 高尋白帝問眞源)〈두시 13:4ㄴ〉

차.  해 뭀 고기 하고 먼 두들 노 ?기 하도다(清源多衆魚 遠岸富喬木)〈두시 13:15ㄴ〉

카.  자보 근원을 알 일기예 린 거시 젹도다(秉心識本源 於事少滯礙)〈두시 25:7ㄴ〉

(38) 가. 읏드미 雷雨 버리와다 불휘 믌 미틔 싯기여 그처디니 엇뎨 하 디시리오(幹排雷雨猶力爭 根斷泉源豈天意)〈두시 6:40ㄴ〉

나. 泉源의 미여 슈믈 보매 미처 도혀 江海ㅣ 업틸가 전노라(及觀泉源漲 反懼江海覆)〈두시 13:8ㄱ〉.

. 픗뎌는 ‘풀피리’의 뜻으로 ‘플’과 ‘뎌’의 합성어이다. ‘플’이 ‘픗’으로 표기된 것은 15세기 국어에서 속격조사 ‘ㅅ’이 연결되는 구성에서 선행어의 받침을 탈락시키고 속격조사 ‘ㅅ’이 받침의 자리에 쓰이는 현상으로, ‘집→짓’, ‘바→바’ 등이 이런 현상에 속한다. (39가-다)는 『두시언해』 권5에 쓰인 예이며, (39라-마)는 그밖의 권차에 쓰인 일부 예이다.

(39) 가. 시름왼 데 되 픗뎌 부 나조히여 서코 슬픈 漢苑ㅅ 보미로다(愁思胡笳夕 凄凉漢苑春)〈두시 5:5ㄴ〉

나.  픗뎌 부러 宮闕을 리시고 프른 盖ㅣ 關山로 나가시니라(清笳去宮闕 翠蓋出關山)〈두시 5:18ㄱ〉

다. 슬픈 픗뎌 두 소리 뮈니 壯士ㅣ 슬허 驕慢호 몯놋다(悲笳數聲動 壯士慘不驕)〈두시 5:31ㄱ〉

라. 슬픈 픗뎌 새배 그으기 수으놋다(哀笳曉幽咽)〈두시 4:13ㄴ〉

마. 시름왼 데 되 픗뎌 부 나조히여(愁思胡笳夕)〈두시 5:5ㄴ〉

바.  픗뎌 부러 宮闕을 리시고(清笳去宮闕)〈두시 5:18ㄱ〉.

아래는 『두시언해』에만 쓰인 부사들 중 『두시언해』 권5에 쓰인 예들이다.

. ‘새려’는 ‘새로’의 뜻으로 ‘새’에 부사파생접미사 ‘-려’가 결합된 것이다. ‘-려’가 부사파생접미사인 것은 ‘오히려’ 등에서 확인된다. (40가-라)는 『두시언해』 권5에 쓰인 ‘새려’의 용례이고, (40마, 바)는 그밖의 권차에 쓰인 용례의 일부이다.

(40) 가. 今朝 漢ㅅ 社稷을 다시 興起신 브터 새려 혜요리라(今朝漢社稷 新數中興年)〈두시 5:6ㄴ〉

나. 새려 블 브튼 棧道 서의얫고 녯 던 壇場 아라도다(牢落新燒棧 蒼茫舊築壇)〈두시 5:12ㄴ〉

다.   새려 사호 섯게로소니 雲臺예 녜  너피던 사미니라(白骨新交戰 雲臺舊拓邊)〈두시 5:13ㄴ〉

라. 河湟이 리여슈믈  앗겨 새려 節制 兼야 通히 가놋다(每惜河湟棄 新兼節制通)〈두시 5:41ㄴ〉

마. 새려 므렛 軒檻 더 라 낛 드리우메 供進고 부러  들구를 두어 라 예 드노라(新添水檻供垂釣 故著浮槎替入舟)〈두시 3:30ㄴ〉

바. 洛陽ㅅ 宮殿이 블 브터 다 업더니 宗廟 여 톳 굼긔 새려 짓놋다(洛陽宮殿燒焚盡 宗廟新除狐兔穴)〈두시 3:62ㄴ〉.

. 안직은 ‘가장’의 뜻으로 쓰인 단어로 두시 원문의 ‘최(最)’에 대응된다. 고려시대의 석독구결에도 ‘最[안직]’이 쓰였다. ‘안직’은 『번역노걸대』 등에서도 쓰였는데 이때의 ‘안직’은 ‘아직’의 뜻이다. (41)은 ‘最’의 뜻인 ‘안직’의 예이고, (42)는 ‘아직’의 뜻인 ‘안직’의 예이다.

(41) 안직[最]

가. 勃律天ㅅ 西ㅅ 녁 采玉河와 堅昆國엣 碧盌이 안직 오미 하더니라(勃律天西采玉河 堅昆碧盌最來多)〈두시 5:21ㄱ〉

나. 驥子아 안직 너를 憐愛노라(驥子最憐渠)〈두시 8:48ㄱ〉

다. 나그내 예 머리 안직 셰니(客間頭最白)〈두시 23:17ㄴ〉

(42) 안직(아직):

가. 우리 잡말 안직 니디 마져(咱們閑話且休說)〈번노상:17ㄱ〉

나. 오나라 오나라 안직 가디 말라 내 너려 말솜 무러지라(來來 且休去 我問伱些話)〈번노상:26ㄱ〉.

. 어득어드기는 두시 원문의 ‘昏昏’을 번역한 말로 ‘어득+어득+이’로 분석된다. 『두시언해』 권5 〈중간본〉은 해당 부분이 ‘이득이득기’로 되어 있으나 아마도 ‘어득어득기’의 잘못일 것으로 보인다.

(43) 어득어드기:

가. 어득어드기 閶闔애 妖怪왼 氣運이 다티옛니 十月에 荊州ㅅ 南녀긔셔 울에 怒야 우르다(昏昏閶闔閉氛祲 十月荊南雷怒號)〈두시 5:37ㄱ-ㄴ〉

나. 어득어드기 구룸  므레 阻隔야 가니 모 기우려 라고   슬노라(昏昏阻雲水 側望苦傷神)〈두시 8:62ㄴ〉

. 이믜셔는 15세기 국어에서 ‘이미, 벌써’의 뜻으로는 ‘마’가 일반적으로 쓰였는데 『두시언해』에서는 ‘이믜셔’가 쓰였다. 이 단어는 ‘이믜’와 ‘셔’로 분석되는데, 중간본인 『두시언해』 권1에는 ‘이믜’의 용례도 보인다. ‘이믜셔’는 두시 원문의 ‘既’의 번역으로 쓰였는데, ‘既’의 번역에는 ‘마’도 쓰였다. (44)는 ‘이믜셔’의 예들이며, (45)는 ‘이믜’의 예이다.

(44) 이믜셔 :

가. 徒衆 보내요매 이믜셔 長上이 잇고 머리 가 戍邊호매  모미 잇니라(送徒既有長 遠戍亦有身)〈두시 5:27ㄱ〉

나. 兵革ㅣ 이믜셔 긋디 몯니 나히 다 東 녀크로 征伐 가니라(兵革既未息 兒童盡東征)〈두시 2:67ㄴ〉

다. 사호  처 錦을 주시니 춤 츠 리 이믜셔 牀애 오니라(鬪雞初賜錦 舞馬既登床)〈두시 6:13ㄱ〉

라. 이믜셔 큰 지븨 기우롬과 다니 어루  남로 괴오리라(既殊大廈傾 可以一木支)〈두시 6:44ㄱ〉

마. 이믜셔 世閒애 얽여슈믈 免티 몯 時時예 예 와 던 모 쉬노라(既未免羈絆 時來憩奔走)〈두시 9:22ㄱ〉

바. 날로 다야 무르며 對答호미 이믜셔  호미 잇니 時節을 感歎며 이 자바셔 슬후믈 더으노라(與餘問答既有以 感時撫事增惋傷)〈두시 16:48ㄱ〉

사. 魴魚ㅣ 지고 됴호 第一인 디 아노니 이믜셔 브르 먹고 즐겨호니  슬프도다(魴魚肥美知第一 既飽歡娛亦蕭瑟)〈두시 16:62ㄴ〉

아. 이믜셔 비 오고 개어  집 아래 져고맛 받이러믈 다리고  두 돗 너븨만 부루 菜 즈야 심고니(旣雨已秋 堂下理小畦 隔種一兩席許萵苣)〈두시 16:65ㄱ〉

자. 됴 菜蔬ㅣ 이믜셔 가지 아니니 일훔과 數와 모 다 베프노라(嘉蔬既不一 名數頗具陳)〈두시 16:70ㄱ〉

차. 이믜셔 主人의 도라보 니버실 개 드러 외왼 亭子애 우놋다(既蒙主人顧 舉翮唳孤亭)〈두시 19:34ㄱ〉

(45) 이믜 : 이믜 뎌 비 리올 거시 업스니 길히 믯그럽고 오시  칩도다(既無禦雨備 徑滑衣又寒)〈두시 1:12ㄴ〉.

. ‘지즈로’는 ‘(어떤 것을) 말미암아’의 뜻으로 두시 원문의 ‘因, 仍, 遂’의 번역에 쓰인 단어이다.

나. 이제 니르록 메 스츄니 지즈로 左右에 잇 도다(至今夢想仍猶佐)〈두시 9:6ㄱ〉

다. 햇 興의 疎放호 지즈로 브르노라(因歌野興䟽)〈두시 15:16ㄴ〉.

『두시언해』 권5에는 문법 표현 중에서도 다른 문헌에 쓰이지 않은 것들이 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예를 제시했는데, 첫째는 ‘-ㄹ션’이다. ‘-ㄹ 션’은 ‘-ㄹ쎠’와 ‘-ㄴ’이 결합된 것으로 보이는데,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된다. 둘째는 종속적 연결어미 ‘-어’에 계사와 종결어미가 결합되어, 문장을 결합하는 경우이다.

. ‘ㄹ션’은 ‘-ㄹ쎠’와 ‘-ㄴ’이 결합된 형태로 보이는데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된다. 〈중간본〉에서도 ‘ㆁ’이 ‘ㅇ’으로 표기되었을 뿐이지 동일한 형태로 볼 수 있는 ‘制馭션졍’으로 되어 있다.

(46) 가. 眞實로 能히 侵勞닐 制馭션 엇뎨 해 주규메 이시리오(苟能制侵陵 豈在多殺傷)

나. 城中에셔  말 로 니브를 밧고니 서르 그리 쳐션 어느 두 것 비듸 서르 마조 議論리오(城中㪷米換衾裯 想許寧論兩相直)〈두시 12:16ㄱ〉

다. 오직 芝蘭로 여 됴케 션 엇뎨 구틔여 지블 이웃야 살라 리오(但使芝蘭秀 何煩棟宇鄰)〈두시 20:29ㄱ〉

라. 오직 閭閻으로 여 도로 揖讓션 구틔여 솔와 대왜 오래 거츠러슈믈 議論리아(但使閭閻還揖讓 敢論松竹久荒蕪)〈두시 21:3ㄱ〉

. ‘-어(종결어미)+계사의 종결형’은 『두시언해』에서는 종속적 연결어미에 ‘계사+종결어미’가 연결된 구성이 쓰이기도 한다.

(47)   새려 사호 섯게로소니 雲臺예 녜  너피던 사미니라(白骨新交戰 雲臺舊拓邊)〈두시 5:13ㄴ〉

5. 간략 두보 평전

두보(杜甫)는 712년 낙양 근처 공현(鞏縣) 요만촌(瑤灣村)에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 태어나 770년 장사(長沙) 근처의 상강(湘江) 가에서 죽었다. 두보의 먼 선조로 『좌씨경전집해(左氏經典集解)』를 찬한 두예(杜預, 220-284)가 있고, 초당(初唐)의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은 두보의 할아버지이다. 두보는 부인 양씨와의 사이에는 종문, 종무 두 아들과 딸도 몇 명이 있었다. 이외에도 일찍 죽은 어린 아들과 딸도 있다. 어머니가 어려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고모 아래에서 자랐으며, 14-5세에는 이미 시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두보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되었으며, 벼슬길로 진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고, 또 안녹산의 난 등의 전란 등으로 평생을 돌아다니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여러 난을 겪으면서, 낙양(洛陽), 장안(長安), 진주(秦州), 성도(成都), 재주(梓州, 사천 三台), 낭주(閬州, 사천 閬中), 운안(雲安, 사천 雲陽), 기주(夔州, 사천 奉節), 장사(長沙) 등을 돌아다녔지만, 시작(詩作)은 계속 이어갔다. 두시가 위대한 이유는 이렇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백성의 생활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를 시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두보가 교류한 이로는 이백(李白), 소원명(蘇源明), 정건(鄭虔), 고적(高適), 잠삼(岑參), 이옹(李邕), 방관(房琯), 엄무(嚴武) 등이며, 특히 방관과 엄무는 두보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이었다. 두보가 성도를 떠난 것도 엄무의 죽음이 큰 원인이 되었다.

아래에 두보의 간략한 연대기를 제시한다.

712년(太極 원년, 1세) 출생. 정월. 하남 공현(鞏縣) 요만촌(瑤灣村)에서 출생. 현종 즉위.

717년(開元 5년, 6세)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劍舞)를 구경(권16의 ‘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 참조).

718년(開元 6년, 7세) 봉황을 읊은 시 지음.

725년(開元 13년, 14세) 시단에 두각을 나타냄. 문인들이 모인 장소에 출입함(정주자사 최상, 예주자사 위계심, 기왕 이범, 비서감 최척, 가수 李龜年 등, 권16의 ‘江南逢李龜年’ 참조).

730년(開元 18년, 19세) 순하(郇瑕, 산서 臨猗) 여행.

731년(開元 19년, 20세) 제1차 여행 : 오월(吳越, 강소와 절강 지역) 여행.

735년(開元 23년, 24세) 진사 시험 낙방.

736년(開元 24년, 25세) 제2차 여행 : 제조(齊趙, 산동과 하북 남부) 여행, 소원명(蘇源明)을 만남. 현종이 이임보(李林甫)에게 재상 직을 맡김.

741년(開元 28년, 30세) 은자 장개 방문. 낙양으로 돌아와 낙양 동편 두예(杜預)와 두심언(杜審言)의 묘가 있는 수양산(首陽山) 아래에 토실(土室)을 짓고 삶. 이 무렵 「야연좌씨장(夜宴左氏莊)」을 지었다. 여름에 사농소경(司農少卿)의 딸 양이(楊怡)와 결혼.

742년(天寶 원년, 31세) 743년까지 낙양 거주. 둘째 고모의 묘지명을 지음.

744년(天寶 3년, 33세) 한림학사 이백이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황금을 받고 조정에서 쫓겨남. 두보는 이백을 낙양에서 만나 이후 이백을 따라 양송 지역을 유람하며, 선도를 익히고, 선약을 캐리라 마음먹음. 5월에 계조모 노씨 하직. 8월 언사로 돌아가 장례를 지내고, 묘지명을 지음. 장례가 끝난 후 양송 지역(양(梁)은 하남성 개봉, 송(宋)은 하남성 상구) 제3차 여행. 두보와 이백은 양송 지역에 살던 고적과 취대에 올라 넓은 평야를 보면서 옛 사람을 추모함. 이백과 함께 왕옥산으로 화개군을 찾아 떠남. 화개군이 죽은 것을 알자 이백은 제주(齊州) 제남(齊南)으로 가서 고천사(高天師)에게서 도가의 비록을 건네받아 연단의 길로 들어섰고, 두보는 제주(齊州)에서 이옹(李邕) 등과 교류함. 이옹의 손자 이지방이 새로 지은 정자의 준공식을 거행하면서, 당시 북해태수로 있던 이옹이 두보를 초대함. 이때 지은 두보의 「배이북해연역하정(陪李北海宴曆下亭)」(권14)의 “歷下亭은 제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고 제남에는 빼어난 선비도 많구나/바 右ㅅ 녀긘 이 亭子ㅣ 녜외니 濟水 南앤 일훔난 士ㅣ 하도다(海右此亭古 濟南名士多)” 구절은 지금도 회자됨. 가을에 연주(=노군)에서 이백과 재회(이백과의 마지막 만남).

746년(天寶 5년, 35세) 십여 년의 여행을 끝내고 장안으로 돌아옴. 장안(西安)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 지원자이었던 부친 두한(杜閑)의 사망으로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함. 어떤 때에는 장안성 남쪽 종남산(終南山)에서 약초를 캐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음. 이 시기 두보와 가깝게 지내던 글벗은 소원명(蘇源明)과 광문관 박사 정건(鄭虔).

747년(天寶 6년, 36세) 과거 시험 낙방.

748년(天寶 7년, 37세) 장안 거주.

751년(天寶 10, 40세) 현종에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바침. 현종은 두보의 재능을 알아보고, 두보의 문장을 시험해 볼 것을 재상에게 명함. 이임보가 출제하고, 집현원의 학생들이 모두 와서 감독함. 두보는 이 일을 시에서 자주 언급함. 선우중통이 남조 토벌.

754년(天寶 13, 43세) 아들 종무 출생(魏將軍歌·投贈哥舒開府二十韻 참조).

755년(天寶 14, 44세) 하서현위(河西縣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우위솔부병조참군(右衛率部兵曹參軍)으로 전임되어 취임. 안녹산의 난 발발. 11월 우위솔부병조참군의 직책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잘 것 없는 봉급을 가지고, 가족들이 있는 봉선(奉先)으로 향하였으나, 어린 아들은 굶어 죽어 있었음(後出塞五首 참조).

756년(天寶 15=至德 元年, 45세) 2월 봉선에서 장안으로 돌아와 솔부의 직책을 계속 수행. 여름으로 접어들어 반군이 진격해오자, 봉선에 살고 있는 가족을 걱정하여, 백수(白水, 섬서 白水)로 피난. 부주(鄜州, 섬서 富縣)의 강촌(羌村, 鄜州 西北 三十里) 도착. 6월 현종이 촉으로 피난. 양귀비, 양국충 등 양씨 일가 멸족. 7월 숙종 영무(靈武, 감숙 靈武)에서 즉위. 두보는 숙종의 행재소가 있던 영무로 가다가, 반군에 잡혀 장안에 억류(前出塞九首 참조).

757년(至德 2, 46세) 4월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이 머물던 봉상(鳳翔, 섬서 鳳翔)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喜達行在所三首 참조). 5월 16일 좌습유(左拾遺)에 임명. 좌습유의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못되어 두보가 방관을 옹호하는 ‘정쟁오지(廷諍忤旨)’ 사건 발생. 윤달 8월 휴가를 얻어, 강촌(羌村)으로 감〈「留別賈嚴二閣老兩院補闕」·「北征」·喜聞官軍已臨賊境二十韻·収京三首」참조〉.

758년(乾元 원년, 47세) 두보는 방관을 변호하다가, 좌습유의 직위를 박탈 당하고, 화주(華州, 섬서 渭南市 華州區)의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되어, 지방의 문교 업무를 맡게 됨. 겨울 업성의 안경서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지나가는 이사업(李嗣業) 장군을 지방관과 함께 영접함(이사업 장군은 다음 해 정월 업성 전투에서 사망)(觀兵·觀安西兵過赴關中待命二首 참조)

759년(乾元 2, 48세) 3월 낙양에서 화주로 돌아옴. 7월 사공참군(司功參軍) 사직. 늦은 봄 화주를 떠나, 진주(秦州, 감숙 天水)로 감(即事·遣興三首·夕烽 참조). 10월 적곡, 철당협, 한협, 청양협, 적초령을 지나 동곡(同谷, 감숙 成縣)으로 감. 목피령, 백사도, 비선각, 석거각, 검문을 지나 12월 1일에 성도로 향함.

760년(上元 원년, 49세) 성도의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세움(戲作花卿歌 참조). 신진현(新津縣) 1차 여행.

761년(上元 2, 50세) 신진현(新津縣) 2차 여행. 12월 엄무 성도윤으로 부임(寄贈王十將軍承俊 참조).

762년(寶應 원년, 51세) 4월 현종(玄宗)과 숙종(肅宗) 붕어. 대종(代宗) 등극. 이백 사망. 6월 경성으로 돌아가는 엄무를 면주(綿州, 四川 綿陽의 동쪽)까지 동행하며 전송. 때마침 위구르와 토번의 침입으로 사천 지역을 떠돌다, 성도로 돌아감. 늦가을에 가족을 재주(梓州, 사천 三台)로 이사시킴.

763년(廣德 원년, 52세) 낭주(閬州, 사천 閬中)(巴山 참조), 염정(鹽亭, 사천 盐亭 绵陽市東南部), 한주(漢州, 사천 廣漢 縣级市) 등을 여행하고 봄에 재주(梓州, 사천 绵陽市 三台縣)로 돌아옴. 8월, 방관이 낭주에서 죽음. 낭주로 이사(西山三首·警急·王命·冬狩行 참조). 안사의 난 종결. 토번이 장안을 함락(征夫 참조). 대종이 섬주(陝州)로 피난.

764년(廣德 2, 53세) 3월 성도 초당으로 돌아가서 촉지를 떠나는 길에 올랐다가(有感五首 참조) 도중에 엄무가 다시 성도로 부임한다는 소식에 계획을 수정하여 성도로 돌아옴(収京 참조). 6월 엄무에 의해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추천됨(揚旗 참조). 소원명(蘇源明)과 정건(鄭虔) 죽음.

765년(永泰 元年, 54세) 1월 정월 막부의 직책을 사직하고 초당으로 돌아옴. 4월 엄무 돌연 병사. 5월 성도를 떠남. 민강(岷江)을 통해, 유주(楡州, 사천 重慶), 충주(忠州, 사천 忠縣), 운안(雲雁, 사천 雲陽)(遣憤 참조)으로 감.

766년(大曆 元年, 55세) 늦은 봄, 기주(夔州, 사천 奉節) 도착(諸將五首·八陣圖 참조). 이 무렵 두보는 오골계 고기로 중풍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오골계를 몇 마리 길렀다(권17의 「催宗文樹雞柵」 ·陪栢中丞觀宴將士二首 참조). 겨울에 歷歷洛陽驪山提封등 작시.

767년(56세) 적갑(赤甲)으로 이사. 기주(夔州) 도독(都督)인 백무림(栢茂林)이 마련해 준 양서초당(瀼西草堂)에서 삶(柳司馬至·承聞河北諸節度入朝歡喜口號絕句十二首·久雨期王將軍不至 참조).

768년(大曆 3, 57세) 동생 두관에게서 편지를 받음. 정월 기주(夔州, 사천 奉節)(喜聞盜賊蕃寇揔退口號五首 참조)를 출발하여 협주(峽州, 호북 宜昌) 하뢰(下牢)에 도착함으로써 삼협(三峽)을 완전히 벗어남. 3월 강릉(江陵, 湖北 江陵) 도착. 가을 공안(公安, 湖北 公安)으로 이사. 늦겨울 공안 출발 악주(岳州, 호남 岳陽) 도착. 설을 악양(岳陽)에서 보냄.

769년(大曆 4, 58세) 정월 악양 출발. 형산(衡山), 상담(湘潭, 호남 湘潭), 담주(潭州, 호남 長沙)에 도착(권17 「백부행(白鳧行)」 참조).

770년(大曆 5, 59세) 늦봄 담주(潭州)에서 이구년(李龜年)과 재회. 4월 군벌의 반란을 피해 형주(衡州)로 피난. 침주(郴州, 호남 郴州)로 가는 도중 뇌양(耒陽, 호남 耒陽)에 이르러 방전역(方田驛)에서 섭 현령이 보내준 음식을 받음(일설에는 두보가 방전역에서 죽었다고 하나, 그 이후에 지은 시가 있음). 양양(襄陽, 호북 襄陽)으로 가다가 潭州(호남 長沙)에서 머묾. 겨울 고향으로 향하는 상강 기슭에서 세상을 떠남. 두보가 죽은 뒤에 두보의 영구는 43년 후 손자 두사업(杜嗣業)에 의해 언사(偃師, 하남 偃師) 서북의 수양산(首陽山) 밑으로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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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01)
<풀이>남풍현(2014)에는 즉 ‘샇-[築]+오+ㄴ’으로 분석되는 ‘손’도 제시되어 있으나, 이것은 경음을 가진 단어를 평음으로 표기한 『두시언해』의 표기적 특징을 반영한 단어이므로, 뒤에 따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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