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권념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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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념요록 서문


권념요록 서:1ㄱ

勸念要錄 懶庵 주001)
나암(懶庵):
조선 중기 승려 보우(普雨)의 호(미상~1565). 호는 허응당(虛應堂)이라고도 함. 1530년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에 입산, 참선과 경학 연구에 잠심하다가 1536년 하산하였다. 1548년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 주지가 되었고, 1550년 선교 양종(禪敎兩宗)을 부활시켰다. 1551년 선종판사(禪宗判事)가 되어 윤원형(尹元衡)·상진(尙震) 등과 함께 300여 사찰을 국가 공인의 정찰(淨刹)로 삼고,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2년간 4천여 명의 승려를 뽑는 한편, 승과(僧科)를 설치하게 하였다. 춘천 청평사 주지를 거쳐 1599년 다시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가 도대선사가 되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배불상소(排佛上疏)와 유림(儒林)들의 기세에 밀려 승적(僧籍)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귀양갔다가 참형을 당했다.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장하였고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주장하였다.
嗟夫人道也 疑多學寡 障重福輕如無開噵之文 豈解求生之法 是以援引古今善士緇素 名人感應之多 徃生非一之賢 錄以視末運 善男善女 或有念而未露 或無心而發起者也 方袍圓頂 주002)
방포 원정(方袍圓頂):
승려. 방포(方袍)는 비구(比丘)가 입는 가사(袈裟)가 방형(方形)인데서 나온 말이며, 원정(圓頂)은 둥근 머리란 뜻으로, 모두 승려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부터 이 서문에 인용한 것은 중국 금나라(1115~1234) 거사 왕자성(王子成)이 엮은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서문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 서문에는, ‘… 또 듣건대 고금의 훌륭한 선비나 승속의 명인이 감응함이 더욱 많고 왕생한 이가 한둘이 아니니, 가사·장삼을 수하고 삭발을 한 스님들은 마땅히 혜원스님의 높은 가풍을 뒤따라야 하고 유가와 도가의 무리들은 유민거사의 청아한 궤범을 흠모해야 합니다. 계방과 회옥은 수명이 다하자 화신 부처님께서 돌아갈 길을 영접하셨고, 장항과 오경은 목숨이 다하자 금빛 선인이 데리고 갔으며, 선화는 백정의 일을 했으나 오히려 옥 같은 연못에 태어났고, 중거는 목숨 해치는 원수를 맺고서도 상서로운 땅에 태어났나니, 자비한 광명이 비추는 곳에 지옥이 무너지고 거룩한 명호를 지닐 때에 하늘의 악마가 놀라서 겁을 냈습니다. 부사의한 부처님의 힘과 장애 없는 신통의 공덕은 외마디에 팔십억 겁의 죄업을 멸하고 한 번 염할 때 팔십억 겁의 공덕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저 국토의 인연이 이 세계의 유정에게 있음을 관찰하시고 특별히 태어나는 한 방편문을 여시어 염불삼매에 들게 하셨습니다. 날마다 잠깐씩 조그마한 선행이라도 하면 뒷날에는 만겁의 자량이 될 것이며, 현세에는 맑은 업이 늘어나고 나쁜 인연이 점점 쉴 것이며,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신들이 도우며 재앙이 물러가고 복이 올 것입니다. 양씨의 딸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밝아졌고, 풍씨 부인은 몸에 병이 났다가 다시 쾌차했고, 소희문은 정신이 나간 사이에 환난을 면했고, 유혜중은 꿈에 가위눌렸어도 놀라지 않았으니, 이는 살아서의 효험이며, 임종할 때에는 황천으로 가는 것을 면하고 다시는 나쁜 업이 없을 것이니, 덜 급하면 하루 내지 이레, 다급하면 열 마디 내지 한 마디라도 염하면, 뚜렷하게 백옥호(白玉毫)의 부처님을 마주한 자신이 자금좌(紫金座)에 앉았음을 볼 것이며, 염라왕이 감히 부르지 못하고, 화신 부처님이 몸소 오셔서 맞아 곧장 극락의 마을로 돌아가 영원히 어두운 길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범씨 노파는 거룩한 상이 문 밖에 계심을 보았고, 담감은 병 속에서 연꽃을 얻었고, 오장왕은 하늘 풍악이 허공에 가득함을 보았고, 수문후는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함을 보았으니 이는 모두가 왕생하는 조짐입니다. …’라는 글이 있다.
冝追 慧遠 주003)
혜원(慧遠):
중국 동진(東晉) 때의 승려(335~417)이다. 염불 결사 ‘백련사(白蓮社)’의 개조로 알려져 있다. 사령운(謝靈運)을 비롯한 123명의 도반(道伴)들과 ‘백련사’를 결성하고 운영하였다. ‘백련사’는 달리 ‘백련화사(白蓮華社)’라고도 한다. 중국 동진(東晋) 때 여산(廬山) 동림사에 염불 수행을 위해 설치한 결사(結社)이다. 중심이었던 혜원은 서기 390년 7월 28일 동림사 반야대의 아미타불 불상 앞에서 도반 123인과 함께 재회(齋會)를 베풀어 향과 꽃을 올리고, 일제히 정업(淨業)을 닦아 극락세계에 가서 나기를 기약하는 서원을 올렸다고 한다. 이로부터 20년간 산문을 나서지 않고 대중과 같이 고요히 염불만 했다고 전한다.
之高風 儒履道冠 可慕遺民 주004)
유유민(劉遺民):
중국 동진(東晉)의 혜원 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의 호계(虎溪) 동림사(東林寺)에서 백련사를 결성할 때 함께 했던 명유(名儒). 혜원 법사는 혜영(慧永)·혜지(慧持)·도생(道生) 등의 명덕(名德)을 비롯하여 유유민·종병(宗炳)·뇌차종(雷次宗) 등 명유(名儒)·치소(緇素:僧俗) 123명을 모아 아미타불상 앞에서 맹세를 세우고 서방 정업(淨業)을 닦게 하였다고 한다. 도연명(陶淵明), 주속지(周續之)처럼 은거생활을 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심양삼은(潯陽三隱)’이라고 불렀다.
之雅範 啓芳 주005)
계방(啓芳):
당(唐)나라 병주(幷州) 사람 승연(僧衍)이 미륵보살을 염하면서 도솔천에 올라가 태어날 것을 발원했으나 나이 90세에 가서야 도작선사(道綽禪師)를 만나 서방정토를 듣고 비로소 염불로 마음을 돌렸다. 그리하여 날마다 천 배의 절을 하며 일심으로 염불하였다. 나중에 병이 들어 제자들에게 고별하기를 아미타불이 나에게 향기로운 옷을 주시고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께서 나에게 보배의 손을 보여 주셨다 나는 이제 간다 하고는 죽었다. 그때 계방(啓芳)과 원과(圓果) 두 명의 법사(法師)가 이 사실을 목격하고 오진사에서 관음보살의 손에 들고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으며 “만약 정토와 인연이 있으면 7일 동안 시들지 마소서.” 하고 발원했더니 때가 지나도록 더욱 무성하였다. 계방과 원과는 뛸듯이 기뻐하며 밤낮으로 관념을쉬지 않았다. 어느날 홀연히 칠보로 된 못에 이르러 대보(大寶)의 장막 속으로 들어갔더니 부처님과 두 보살이 보화(寶華)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데 광명이 휘황하였다. 계방과 원과가 예배했더니 부처님이 나의 이름을 생각하는 자는 누구나 나의 국토에 왕생하리라 하시는 것을 보았고, 또한 석가세존과 문수보살이 하늘 음성으로 정토를 찬탄하시는 말씀도 들었다. 또 보니 세 길의 보배로 된 계단이 있는데 하나는 세속인이 있었고, 두번째는 스님과 세속인이 반반씩 섞여 있었으며, 세번째 것에는 스님들만 있었다. 부처님이 이들은 모두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했던 이들로서 이 국토에 왕생하였다고 하였다. 5일 후에 홀연히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는 종소리는 우리들을 위해서다 하고 함께 죽었다고 한다.
懷玉 주006)
회옥(懷玉):
당나라 때의 정토종(淨土宗) 승려. 단구(丹邱, 절강성 영해)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고(高)씨다. 태주(台州) 용천사(湧泉寺)에 머물면서 율법을 견지했는데, 명절(名節)이 우뚝했다. 『미타경(彌陀經)』을 30만 번이나 암송했고, 날마다 염불을 5만 차례 소리내어 외웠다. 어느날 꿈에서 서방의 성상(聖像)을 보고 명이 다했음을 알아 게송을 남겼다. “맑고 깨끗하여 티끌 한 점 없으니, 상품연대가 부모님이로다. 내 수도한 지 열 겁을 지났는데, 염부제를 보여주니 뭇 괴로움 물리는구나. 평생의 고행도 열 겁을 넘어갔고, 영원히 파사를 떠나 정토로 돌아가련다.” 군태수(郡太守) 단회연(段懷然)이 성대히 장례하였다고 한다.
壽終而化佛迎歸 張抏 주007)
장항(張抗):
송(宋)나라 사람. 부처님께 선행을 쌓고 대비다라니를 10만 번 외우면서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였다. 나이 60여 세가 되어 앓아누웠으면서도 일심으로 염불하더니 가족에게 말하기를 “서방정토는 다만 눈앞에 있을 뿐이다. 아미타불이 연꽃 속에 계시고 세 살 때 죽은 손자 옹아(翁兒)는 금지(金地)에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린다.”라고 말하고는 염불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吳瓊 주008)
오경(吳瓊):
송(宋)나라 임안(臨安) 사람. 본디 스님이었으나 도를 버리고 세속으로 돌아가 두 번 장가들어 아들 둘을 얻었다. 짐승을 잡고 술을 파는 등 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푸줏간에서 닭이나 오리 따위를 죽여 치켜들고는 ‘아미타불님! 이 몸 어서 데려가오.’ 하며, 연신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서 칼질을 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눈 위에 달걀같이 생긴 혹이 생기자 몹시 두렵고 걱정이 되어 초암(草庵)을 짓고 처자를 흩어버리고서는 염불과 예참으로 밤낮을 지냈다. 그가 스스로, 소홍(紹興) 23년(1153)에 ‘이젠 내일 술시(成時)에 떠나오.’ 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는데, 다음날 저녁 베옷으로 술을 바꾸어 마시고는 노래 한 수를 지어 부르면서, 단정히 앉아 합장 염불하다 ‘부처님이 오셨다.’라고 부르짖고는 죽었다고 한다.
命盡而金僊引去

권념요록 서:1ㄴ

善和 주009)
선화(善和):
이 책 『권념요록』 11번째 이야기 「도우선화십념전」에 나오는 사람이다.
具屠牛之業而尙徃玉池 仲擧 주010)
중거(仲擧):
『예념미타도량참법』에서만 나오는 사람이다.
負害命之㤪而亦生金地 慈光照處 地獄爲之崩隤 聖號持時 天魔爲之悚懼 不思議佛力 無障碍神通 一聲滅八十憶刼之罪愆 一念獲八十億刼之功德 現世則白業頓增 惡緣漸息 人敬而神佑禍去而福來 梁氏女 주011)
양씨녀(梁氏女):
이 책 9번째 이야기 「양씨자명전」에 나오는 사람이다.
目盲而重明 馮夫人 주012)
풍부인(馮夫人):
『예념미타도량참법』에서만 나오는 사람이다.
身病而復差 邵希文 주013)
소희문(邵希文):
『예념미타도량참법』에서만 나오는 사람이다.
神遊而脫難 劉惠仲 주014)
유혜중(劉惠仲):
『예념미타도량참법』에서만 나오는 사람이다.
夢魘而無驚 此乃身前之效也 臨終則免赴黃泉 更無黑業

권념요록 서:2ㄱ

緩則一日至于七日 急則十登至于一聲 面覩白毫光 身乘紫金座 閻王不敢召 化佛自來迎 直歸極樂之鄕 永別幽㝠之路□ □□□府而未久返魂人間宋氏囚㝠□□□□□□公主范婆 瞻聖像於戶外□□□□□□□□ 烏長王天樂盈空隋□□□□□□□□□生之徵也 過世則□□□□□□□□□□□□□白骨爲□□□□□□□□□□□□□年化生

권념요록 서:2ㄴ

□□□□□□□□□□□□□□□□□□□□□□□□□□□□□□□□□□□□□□□□□□□□□□□□□□□□□□□□□□□□□□此乃□□□□□□□□□□□□□而聊陳□□□□□□□□□□□□心之頑踈□□□□□□□□□□□□伏以同識勉……
Ⓒ 편찬 | 보우 / 1637년(인조 15) 7월 1일

권념요록 〈서문〉 주015)
*
* 이 서문은 원문의 훼손이 심해서 해독(解讀)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여기에는 해독이 가능한 부분만 옮겼다. 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의 양승목 군이 번역을 해 주었다. 여기에 적어서 고마운 뜻을 전한다.
- 나암(懶庵) 지음
아! 사람의 도(道)란, 의심되는 것은 많고, 배울 만한 것은 적으며, 번뇌는 거듭되고, 복은 적어, 참된 도를 열어주지 못하는 듯하니, 그 도의 글이 어찌 삶을 구하는 법을 풀어줄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고금의 선사(善士)와 승속(僧俗)의 명인들이 수없이 감응하고 왕생하였던 훌륭한 사례들을 끌어모아 기록함으로써, 말운(末運)에 처한 선남선녀들이 염불을 하여 〈그 말운에〉 노출되지 않거나 마음을 두지 않아 〈그 말운이〉 드러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승려[方袍 圓頂]들은 혜원(慧遠)의 높은 유풍(遺風)을 좇아야 하고, 유가[儒履]와 도가[道冠]는 유유민(劉遺民)의 고아한 전범(典範)을 사모해야 한다. 계방(啓芳)회옥(懷玉)은 목숨이 다하자 화불(化佛)이 영접하여 돌아갔고, 장항(張抗)오경(吳瓊)도 목숨이 다하자 신선[金僊]이 데리고 갔으며, 선화(善和)는 소를 잡는 업을 가지고도 오히려 옥지(玉池)에 갔고, 중거(仲擧)는 남을 죽인 원업(怨業)을 지고도 또한 금지(金地)에 태어났다. 자비의 빛이 비추는 곳에 지옥은 무너져 내리고, 부처를 되뇌는 것을 견지하고 있을 때 천마(天魔)는 벌벌 떠니, 불가사의한 불력(佛力)과 막힘이 없는 신통력으로, 한번 외치면 팔십억겁의 죄악이 사라지고 한 번 염불하면 팔십억겁의 공덕을 얻게 된다. 현세에서는 선업(善業)이 순식간에 늘어나고 악연은 점차 사라지며 사람들은 공경하고 신은 도와주며 재앙은 물러가고 복이 다가오게 된다. 〈때문에 염불을 열심히 했던〉 양씨녀(梁氏女)는 눈이 멀었으나 다시 볼 수 있었고, 풍부인(馮夫人)은 몸이 아팠으나 다시 차도가 있었으며, 소희문(邵希文)은 정신이 혼미해졌으나 어려움에서 벗어났고, 유혜중(劉惠仲)은 가위에 눌렸으나 놀라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들은 살아있는 동안 나타난 효험이고, 죽음에 이르면 지옥에 가는 것을 면하고 악업이 없어지며, 여유로우면 하루에 할 염불을 칠일 동안 하고 급하면 열 번 할 염불을 한 번만 하더라도 얼굴에 백호(白毫)의 부처님을 볼 수 있고, 몸은 자금좌(紫金座)를 타니, 염라왕도 감히 부르지 못하고 화불(化佛)이 스스로 오시어 영접하여 바로 극락으로 데려가 저승길과는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 …(결락)…〈왕랑은 명부(冥府)에 끌려갔으나〉 오래지 않아 인간세상으로 혼이 돌아왔고, 〈아내〉 송씨는 …(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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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나암(懶庵):조선 중기 승려 보우(普雨)의 호(미상~1565). 호는 허응당(虛應堂)이라고도 함. 1530년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에 입산, 참선과 경학 연구에 잠심하다가 1536년 하산하였다. 1548년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 주지가 되었고, 1550년 선교 양종(禪敎兩宗)을 부활시켰다. 1551년 선종판사(禪宗判事)가 되어 윤원형(尹元衡)·상진(尙震) 등과 함께 300여 사찰을 국가 공인의 정찰(淨刹)로 삼고,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2년간 4천여 명의 승려를 뽑는 한편, 승과(僧科)를 설치하게 하였다. 춘천 청평사 주지를 거쳐 1599년 다시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가 도대선사가 되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배불상소(排佛上疏)와 유림(儒林)들의 기세에 밀려 승적(僧籍)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귀양갔다가 참형을 당했다.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장하였고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주장하였다.
주002)
방포 원정(方袍圓頂):승려. 방포(方袍)는 비구(比丘)가 입는 가사(袈裟)가 방형(方形)인데서 나온 말이며, 원정(圓頂)은 둥근 머리란 뜻으로, 모두 승려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부터 이 서문에 인용한 것은 중국 금나라(1115~1234) 거사 왕자성(王子成)이 엮은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서문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 서문에는, ‘… 또 듣건대 고금의 훌륭한 선비나 승속의 명인이 감응함이 더욱 많고 왕생한 이가 한둘이 아니니, 가사·장삼을 수하고 삭발을 한 스님들은 마땅히 혜원스님의 높은 가풍을 뒤따라야 하고 유가와 도가의 무리들은 유민거사의 청아한 궤범을 흠모해야 합니다. 계방과 회옥은 수명이 다하자 화신 부처님께서 돌아갈 길을 영접하셨고, 장항과 오경은 목숨이 다하자 금빛 선인이 데리고 갔으며, 선화는 백정의 일을 했으나 오히려 옥 같은 연못에 태어났고, 중거는 목숨 해치는 원수를 맺고서도 상서로운 땅에 태어났나니, 자비한 광명이 비추는 곳에 지옥이 무너지고 거룩한 명호를 지닐 때에 하늘의 악마가 놀라서 겁을 냈습니다. 부사의한 부처님의 힘과 장애 없는 신통의 공덕은 외마디에 팔십억 겁의 죄업을 멸하고 한 번 염할 때 팔십억 겁의 공덕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저 국토의 인연이 이 세계의 유정에게 있음을 관찰하시고 특별히 태어나는 한 방편문을 여시어 염불삼매에 들게 하셨습니다. 날마다 잠깐씩 조그마한 선행이라도 하면 뒷날에는 만겁의 자량이 될 것이며, 현세에는 맑은 업이 늘어나고 나쁜 인연이 점점 쉴 것이며,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신들이 도우며 재앙이 물러가고 복이 올 것입니다. 양씨의 딸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밝아졌고, 풍씨 부인은 몸에 병이 났다가 다시 쾌차했고, 소희문은 정신이 나간 사이에 환난을 면했고, 유혜중은 꿈에 가위눌렸어도 놀라지 않았으니, 이는 살아서의 효험이며, 임종할 때에는 황천으로 가는 것을 면하고 다시는 나쁜 업이 없을 것이니, 덜 급하면 하루 내지 이레, 다급하면 열 마디 내지 한 마디라도 염하면, 뚜렷하게 백옥호(白玉毫)의 부처님을 마주한 자신이 자금좌(紫金座)에 앉았음을 볼 것이며, 염라왕이 감히 부르지 못하고, 화신 부처님이 몸소 오셔서 맞아 곧장 극락의 마을로 돌아가 영원히 어두운 길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범씨 노파는 거룩한 상이 문 밖에 계심을 보았고, 담감은 병 속에서 연꽃을 얻었고, 오장왕은 하늘 풍악이 허공에 가득함을 보았고, 수문후는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함을 보았으니 이는 모두가 왕생하는 조짐입니다. …’라는 글이 있다.
주003)
혜원(慧遠):중국 동진(東晉) 때의 승려(335~417)이다. 염불 결사 ‘백련사(白蓮社)’의 개조로 알려져 있다. 사령운(謝靈運)을 비롯한 123명의 도반(道伴)들과 ‘백련사’를 결성하고 운영하였다. ‘백련사’는 달리 ‘백련화사(白蓮華社)’라고도 한다. 중국 동진(東晋) 때 여산(廬山) 동림사에 염불 수행을 위해 설치한 결사(結社)이다. 중심이었던 혜원은 서기 390년 7월 28일 동림사 반야대의 아미타불 불상 앞에서 도반 123인과 함께 재회(齋會)를 베풀어 향과 꽃을 올리고, 일제히 정업(淨業)을 닦아 극락세계에 가서 나기를 기약하는 서원을 올렸다고 한다. 이로부터 20년간 산문을 나서지 않고 대중과 같이 고요히 염불만 했다고 전한다.
주004)
유유민(劉遺民):중국 동진(東晉)의 혜원 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의 호계(虎溪) 동림사(東林寺)에서 백련사를 결성할 때 함께 했던 명유(名儒). 혜원 법사는 혜영(慧永)·혜지(慧持)·도생(道生) 등의 명덕(名德)을 비롯하여 유유민·종병(宗炳)·뇌차종(雷次宗) 등 명유(名儒)·치소(緇素:僧俗) 123명을 모아 아미타불상 앞에서 맹세를 세우고 서방 정업(淨業)을 닦게 하였다고 한다. 도연명(陶淵明), 주속지(周續之)처럼 은거생활을 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심양삼은(潯陽三隱)’이라고 불렀다.
주005)
계방(啓芳):당(唐)나라 병주(幷州) 사람 승연(僧衍)이 미륵보살을 염하면서 도솔천에 올라가 태어날 것을 발원했으나 나이 90세에 가서야 도작선사(道綽禪師)를 만나 서방정토를 듣고 비로소 염불로 마음을 돌렸다. 그리하여 날마다 천 배의 절을 하며 일심으로 염불하였다. 나중에 병이 들어 제자들에게 고별하기를 아미타불이 나에게 향기로운 옷을 주시고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께서 나에게 보배의 손을 보여 주셨다 나는 이제 간다 하고는 죽었다. 그때 계방(啓芳)과 원과(圓果) 두 명의 법사(法師)가 이 사실을 목격하고 오진사에서 관음보살의 손에 들고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으며 “만약 정토와 인연이 있으면 7일 동안 시들지 마소서.” 하고 발원했더니 때가 지나도록 더욱 무성하였다. 계방과 원과는 뛸듯이 기뻐하며 밤낮으로 관념을쉬지 않았다. 어느날 홀연히 칠보로 된 못에 이르러 대보(大寶)의 장막 속으로 들어갔더니 부처님과 두 보살이 보화(寶華)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데 광명이 휘황하였다. 계방과 원과가 예배했더니 부처님이 나의 이름을 생각하는 자는 누구나 나의 국토에 왕생하리라 하시는 것을 보았고, 또한 석가세존과 문수보살이 하늘 음성으로 정토를 찬탄하시는 말씀도 들었다. 또 보니 세 길의 보배로 된 계단이 있는데 하나는 세속인이 있었고, 두번째는 스님과 세속인이 반반씩 섞여 있었으며, 세번째 것에는 스님들만 있었다. 부처님이 이들은 모두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했던 이들로서 이 국토에 왕생하였다고 하였다. 5일 후에 홀연히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는 종소리는 우리들을 위해서다 하고 함께 죽었다고 한다.
주006)
회옥(懷玉):당나라 때의 정토종(淨土宗) 승려. 단구(丹邱, 절강성 영해)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고(高)씨다. 태주(台州) 용천사(湧泉寺)에 머물면서 율법을 견지했는데, 명절(名節)이 우뚝했다. 『미타경(彌陀經)』을 30만 번이나 암송했고, 날마다 염불을 5만 차례 소리내어 외웠다. 어느날 꿈에서 서방의 성상(聖像)을 보고 명이 다했음을 알아 게송을 남겼다. “맑고 깨끗하여 티끌 한 점 없으니, 상품연대가 부모님이로다. 내 수도한 지 열 겁을 지났는데, 염부제를 보여주니 뭇 괴로움 물리는구나. 평생의 고행도 열 겁을 넘어갔고, 영원히 파사를 떠나 정토로 돌아가련다.” 군태수(郡太守) 단회연(段懷然)이 성대히 장례하였다고 한다.
주007)
장항(張抗):송(宋)나라 사람. 부처님께 선행을 쌓고 대비다라니를 10만 번 외우면서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였다. 나이 60여 세가 되어 앓아누웠으면서도 일심으로 염불하더니 가족에게 말하기를 “서방정토는 다만 눈앞에 있을 뿐이다. 아미타불이 연꽃 속에 계시고 세 살 때 죽은 손자 옹아(翁兒)는 금지(金地)에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린다.”라고 말하고는 염불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주008)
오경(吳瓊):송(宋)나라 임안(臨安) 사람. 본디 스님이었으나 도를 버리고 세속으로 돌아가 두 번 장가들어 아들 둘을 얻었다. 짐승을 잡고 술을 파는 등 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푸줏간에서 닭이나 오리 따위를 죽여 치켜들고는 ‘아미타불님! 이 몸 어서 데려가오.’ 하며, 연신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서 칼질을 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눈 위에 달걀같이 생긴 혹이 생기자 몹시 두렵고 걱정이 되어 초암(草庵)을 짓고 처자를 흩어버리고서는 염불과 예참으로 밤낮을 지냈다. 그가 스스로, 소홍(紹興) 23년(1153)에 ‘이젠 내일 술시(成時)에 떠나오.’ 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는데, 다음날 저녁 베옷으로 술을 바꾸어 마시고는 노래 한 수를 지어 부르면서, 단정히 앉아 합장 염불하다 ‘부처님이 오셨다.’라고 부르짖고는 죽었다고 한다.
주009)
선화(善和):이 책 『권념요록』 11번째 이야기 「도우선화십념전」에 나오는 사람이다.
주010)
중거(仲擧):『예념미타도량참법』에서만 나오는 사람이다.
주011)
양씨녀(梁氏女):이 책 9번째 이야기 「양씨자명전」에 나오는 사람이다.
주012)
풍부인(馮夫人):『예념미타도량참법』에서만 나오는 사람이다.
주013)
소희문(邵希文):『예념미타도량참법』에서만 나오는 사람이다.
주014)
유혜중(劉惠仲):『예념미타도량참법』에서만 나오는 사람이다.
주015)
** 이 서문은 원문의 훼손이 심해서 해독(解讀)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여기에는 해독이 가능한 부분만 옮겼다. 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의 양승목 군이 번역을 해 주었다. 여기에 적어서 고마운 뜻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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