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불의 팔만장경에 담긴 가르침은 넓고도 아득하여 광대하기가 끝이 없다. 때문에 근원을 바라보다 지류를 놓치는 자며 지류를 쳐다보다 근원을 놓치는 자들이 파다하다. 이 관음보살의 육자신주(六字神呪)는 그 공이 억겁의 세월을 넘어서고 그 덕이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많다. 하여 혹 하나를 생각하여 열을 아는 자, 혹 백을 외워 천을 깨닫는 자들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이 법문(法門)의 판본은 우리 동국에 일찍이 없었다.
호남의 후인(後人) 둔세당(遁世堂) 주002) 호남의 후인(後人) 둔세당(遁世堂): 이 발문에서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의 저본이거나 참고로 했던 책을 중국에서 구해 온 이로 되어 있을 뿐, 그에 대한 기록으로 전해지는 내용이 없어서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다.
이 중국에서 나온 본문을 우연히 얻어 목판에 길이 새겨 세상에 전하고자 한 것이 몇 해가 되었다. 관서
(關西; 평안도)
평원부(平原府)의
한천손(韓千孫), 주003) 한천손(韓千孫): 시주질에 알선(斡善) 한천손(韓千孫) 양주(兩主)라는 소개가 있다. 이 책의 간행을 위해 정재(淨財)를 보시하는 등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로 보인다.
김억근(金億斤), 주004) 김억근(金億斤): 시주질에도 나오는 이름이다. 이 책의 간행을 위해 정재를 보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로 보인다.
배만돌(裴萬乭) 주005) 배만돌(裴萬乭): 시주질에도 나오는 이름이다. 이 책의 간행을 위해 정재를 보시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로 보인다.
공 등이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큰 서원(誓願)을 일으켜 세 집안의 재화와 보물을 남김없이 내놓고, 사방의 승려와 속인을 널리 불러 모아 각수(刻手)에게 판각을 맡겼다. 그리하여 이 책을 찍어내 세상에 유통시키니, 이 세 공이야말로 참으로 관음보살이 지닌 본래의 서원을 훌륭하게 잇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환히 열어준 분이라고 하겠다.
이 불사는 가정(嘉靖) 경신년(1560)에 시작하여 같은 해 초여름에 마무리를 지었다. 이에 한 공 등이 나에게 뒤에 붙일 발문을 부탁하였으나 나는 이렇게 사양하였다.
“학문은
원안(遠安) 주006) 원안(遠安): 학덕이 높아 우러를 만한 업적이 있는 학자일 것으로 짐작될 뿐, 대상을 특정하기가 어렵다.
만 못하고, 문장은 이백·
두보 주007) 이두(李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와 나란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이 밀교(密敎)의 은미한 뜻은 허공의 뼈 속에 감추어져 있어 스승이라도 제자에게 전할 수 없고 제자도 스승으로부터 받을 수 없거늘, 내가 어찌 그 가운데 함부로 붓을 놀려 후세에 죄를 짓겠습니까? 다만 일을 이룬 해와 달을 기록하여 공들의 이름이 잊히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글씨 :
숙천(肅川) 주008) 숙천(肅川): 조선 때, 평안도의 지명. 진국(鎭國) 또는 평원(平原), 숙주(肅州)라고도 불렀다. 숙천도호부가 있었다.
영리(營吏) 주009) 영리 (營吏): 조선 때, 감영이나 군영, 수영에 딸려 있던 아전.
주010) : 이 발문(跋文) 등의 한글 번역은 동국대 국어국문학부의 양승목 박사가 해 주었다. 특별히 적어서 감사의 뜻을 새긴다.
김은정(金殷鼎). 주011) 김은정(金殷鼎): 숙천부의 영리(營吏)로 이 발문의 글씨를 쓴 사람이다. 발문의 원고 작성자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