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암 영응기
광평대군은 세종의 다섯째 아드님이고, 우리 주상전하와 같은 어머니의 아우이다. 나이 이미 성년이 되어 불행히 일찍 하세를 하였다. 부인 영가 신씨는 애통하기 그지없어 이미 장례를 치르고 나니 더욱 의지할 바가 없었다. 묘소의 곁에다 크게 절을 짓고 해마다 머무는 승려가 3, 4백 명이 되었다. 조석으로 광평대군의 영가를 천도하여 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으니, 이것이 견성암이 지어진 연유이다. 세조 10년(1464) 4월 14일 을묘(乙卯)에 부인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극락세계에 오르시고, 어머니 왕씨(王氏)와 광평대군이 모두 열반을 얻으시라는 소원으로 비구스님 50인을 초청하여 불당에 오르게 하고, 원통지(圓通智) 대사를 강주로 청하여 이 절에서 법화도량을 베풀었다.
이때의 큰 시주라면 정의공주, 임영대군과 부인, 영응대군과 부인 들이 수레를 끄는 시종들과 왔으니, 신도로서의 사부대중이 무려 1천여 명이었다. 이에 앞서서는 날씨가 가물더니 연회를 열어 법석을 편 저녁에는 번개 비가 크게 내려 사방의 들에 윤기가 흡족하여, 상서로운 바람이 사람을 엄습하며 화창한 기운이 널리 퍼졌다. 법회를 수행하는 날에는 맑았다 흐렸다 하여 기상이 자주 변하니 모두가 부인의 지성이 감동되어 부처님 하늘이 즐거이 납신 감응이라 하더라.
이날 정오 공양에 범패가 실행되어 사부대중이 정성을 기울여 경례하니, 홀연 부처님 앞 탁자 위에 광채가 휘날리며 찬란하게 사방으로 피어올랐고, 대중들이 길을 비키며 쫓아가 보니 사리가 이미 나뉘어 58잎이었다. 향수를 뿌리고 수습하여 소반에 담으니 영롱한 빛이 투철하고 광명이 밝아 사람들을 비추어 견줄 데가 없었다. 법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날뛰며 놀라 일찍이 없었던 일에 감탄하여 축원하는 소리가 산골까지 진동하였다. 어떤 이는 정수리를 태우고 손가락을 지져 기왕의 허물을 참회하고, 어떤 이는 옷을 풀어헤치고 패물을 풀어 지금의 결과를 바라기도 하였다. 소문이 장안에 퍼져 남녀노소 오고 가는 이가 길에 끊이지 않고 여러 날 계속되었다.
살피건대, 사리란 혹은 사리라(舍利羅)라 하기도 하고, 혹은 설리라(設利羅)라 하기도 하는데 모두 범어이니, 한역하면 영골(靈骨), 또는 영신(靈身)이라 하여 곧 부처 여래가 남기신 뼈를 이르는 것이다. 여래께서 일찍이 이르기를, “나는 참 마음 비고 고요하고 영험의 앎이 있으니, 이것이 나에게 있는 참 몸이 광대하고 원만한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는 법신의 몸체가 허공과 같아서 이미 나고 죽음의 모습이 없으니, 어찌 가고 오는 자취가 있겠는가? 달에다 견주면, 물이 맑으면 달이 드러나는데 달이 밝지 않음은 달의 잘못이 아니라 중생의 물이 흐린 것이다. 종에다 견주면, 치면 울리는데 종이 울림이 없다면 종의 잘못이 아니라 중생의 종채가 적기 때문이다.
지금 신씨 부인이 두 성상에게 축원하며 선왕, 선왕후와 광평대군과 어머니 왕씨를 추모하는 정성이 지극하기에, 감응이 깊고 깊기 때문에 쉽게 오셨으니, 이는 대체로 빠르지 않아도 빠르고, 기약이 없어도 스스로 이르니, 역시 부처님의 신통 묘용함이 불가사의한 도리이다. 부인의 정성 공경을 알려고 한다면 의당히 신령 경이로운 강림을 볼 것이고, 모든 부처님의 변화를 보려 하면 의당히 사리의 오묘함을 보아야 하니, 어쩌면 지극한 정성의 덕이 천지를 감동하기에 알맞아 여래의 공적한 법체가 법계에 충만한 것이었던가? 이것이 바로 이 기를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절을 지은 전말과 지난 날 법회를 열었던 성대함은 우리 주상전하가 동궁시절 이 절에 친히 오시어 쓰신 한 편의 시가 전각 기둥 사이에 밝히 빛나고 있음이, 또 실로 이 절 백년 무궁한 경사이리라.
세조 11년(을유년, 1465) 9월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