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간의에게 드리는 시 10운[敬贈鄭諫議十韻]
君見途窮哭 宣憂
阮步兵【阮籍 주095) 완적(阮籍) 210~263. 삼국시대 위(魏)나라 진류(陳留) 울지(尉氏) 사람. 자는 사종(嗣宗)이고, 아버지는 후한 말의 명사이자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완우(阮瑀)다. 보병교위(步兵校尉)를 지내 ‘완 보병’이라고도 하며, 혜강(嵇康)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중심인물이다. 제왕(齊王) 조방(曹芳) 때 상서랑(尙書郞)에 올랐고, 병으로 사직했다. 대장군 조상(曹爽)이 주륙(誅戮)된 뒤 산기상시(散騎常侍)와 보병교위를 지내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노장(老莊)을 좋아했고, 예교(禮敎)를 멸시했다. 술을 좋아하고 현언(玄言)을 즐겼는데, 남의 장단점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아 자신을 보전했다. 5언시를 잘 지었고, 풍격은 은회(隱晦)했다. 대표작 「영회시(詠懷詩)」 85수는 자기의 내면세계를 제재로 하여 철학적으로 진술한 연작이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이나 기성권력에 반항하는 자세를 노래한 몇 편의 부(賦) 작품 외에, 「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과 원초적인 노장사상을 추구하는 작품을 남겼다. 그밖에 「달장론(達莊論)」과 「통역론(通易論)」 등이 있다. 『문선(文選)』에 시문이 약간 실려 있고, 전기는 『삼국지(三國志)』 권21과 『진서(晉書)』 권49에 실려 있다. 저서에 후세 사람이 편집한 『완보병집(阮步兵集)』이 있다.
이 爲歩兵校尉 주096) 교위(校尉) 한나라 때 설치된 관직 이름으로, 군대의 부장(副將)에 해당한다. 직무에 따라 무기교위(戊己校尉), 중루교위(中壘校尉), 등의 명칭이 붙여졌다. 한나라 이후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의 장관을 일컫는 칭호로 쓰이기도 했다. 당나라 이후 지위가 점점 약해졌다.
니 車迹所窮이어든 慟哭而返더니라 甫ㅣ 以阮籍으로 自比其窮야 望諌議之救다】
Ⓒ 편찬 | 유윤겸, 유휴복, 조위, 의침 등 / 1481년(성종 12)
그듸 주097) 그듸 그대는. 그듸+. ‘그듸’는 2인칭대명사 ‘너’보다 상대방을 약간 대우하는 대명사이다. ‘그듸~보라(君見)’는 두시에서 상용하는 ‘그듸~보디 아니다(君不見)’의 긍정형이다. 『두시언해』에서 ‘그듸’와 ‘그’는 같이 쓰였다.
窮困
길헤셔 주098) 길헤셔 길에서. 길ㅎ+에+셔. ‘길ㅎ’은 ‘ㅎ말음체언’이다.
우루믈 주099) 우루믈 욺을. 우는 것을. 울-[泣]+우-+ㅁ+을.
보라
阮步兵
시름호미 주100) 맛니라 주101) 맛니라 마땅하다. 맛#-+니+라. 완적(阮籍)이 막다른 길에서 울었던 것처럼 지금의 두보 자신도 완적과 다를 바가 없으니 나를 걱정해 달라는 뜻이다. ‘-니라’는 화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진술할 때 쓰는 종결어미이다. 〈중간본〉에는 ‘맛당니라’로 되어 있다.
Ⓒ 편찬 | 유윤겸, 유휴복, 조위, 의침 등 / 1481년(성종 12)
【한자음】 군견도궁곡 선우완보병【완적(阮籍)이 보병교위가 되니 수레의 자국이 다한 곳에서 통곡하고 돌아왔다. 두보가 완적으로 자신의 곤궁함을 비유해 정 간의(鄭諌議)가 구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언해역】 그대는 궁곤(窮困)한 길에서 욺을 보라, 완 보병(阮步兵)을 걱정함이 마땅하네.
*시 구절 해석 : “그대는 궁곤한 길에서 우는 것을 보라, 완 보병을 위해 시름함이 마땅하다.”라는 뜻으로, 자신의 처지가 곤궁에 빠졌으니 나를 위해 선처해 달라는 당부의 말이다.
Ⓒ 역자 | 김영배, 김성주 / 2018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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