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9(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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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9(상)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9(상)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모아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조선 성종의 명을 받은 유윤겸(柳允謙), 유휴복(柳休復),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언해하여 성종 12년(1481)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언해 시집이다. 모두 25권 17책으로 을해자본이며 이 책은 보통 줄여서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김영배

1931년 평북 영변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문학석사, 문학박사.

1973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전임강사, 조교수.

1976 상명여자대학(현 상명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

1980~1997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교수.

1987.4-1988.3 일본 축파(筑波)대학 외국인교사

현재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명예교수.

저서 : 석보상절 제23ㆍ24주해, 평안방언의 음운체계연구, 국어사자료연구 1·2, 증보 평안방언연구, 평안방언연구 자료편 외

역주 : 역주 석보상절 제6,9,11(공동), 역주 석보상절 제13, 19(공동), 역주 능엄경언해 제1,2, 역주 능엄경언해 제3,4

역주 능엄경언해 제7,8, 역주 능엄경언해 제9,10

역주 : 역주 석보상절 제6,9,11(공동), 역주 석보상절 제13, 19(공동), 역주 능엄경언해 제1,2, 역주 능엄경언해 제3,4, 역주 능엄경언해 제7,8, 역주 능엄경언해 제9,10, 역주 월인석보 제11,12, 역주 법화경언해 제1, 역주 법화경언해 권2, 역주 법화경언해 권3, 역주 법화경언해 제4, 역주 법화경언해 제6, 역주 월인석보 제20, 역주 금강경삼가해 제1, 역주 금강경삼가해 제2, 역주 월인석보 제25(상), 역주 월인석보 제25(하권), 역주 월인석보 제4, 역주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역주 석보상절 제21(공역)

김성주

1965년 경남 통영 출생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석사, 문학박사.

1999-2002 터키 국립앙카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외국인교수.

2003-2007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2008-2011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문리각 연구교수.

2012년 이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초빙교수.

저서 : 한국어의 사동, Korece Dilbilgisi(공저), 각필구결의 해독과 번역 2~5(공저), 황룡사 표원의 화엄문의요결문답연구 1·2(공저)

역주 : 금강경언해(공역), 역주 석보상절 권3(공역), 역주 석보상절 권6(공역), 역주 석보상절 권11(공역), 역주 석보상절 권20(공역), 역주 석보상절 제21(공역), 역주 두시언해 권17(공역), 역주 두시언해 권3(상·하)(공역), 역주 두시언해 권5(상·하)(공역).

역주위원

  •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9(상) : 김영배, 김성주
  • 교열·윤문·색인위원

  •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9(상) : 박종국, 홍현보
  • 세종고전국역위원회

  • 위원장 : 한무희
  • 위 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 남문현 리의도 박충순
  • 심우섭 임홍빈 최홍식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9를 내면서

우리 회는 1956년 10월 9일 창립 후 세종대왕기념사업의 중심 전당인 세종대왕기념관을 건립하고 세종문화진열실과 연구실을 마련 운영 관리하며, 세종성왕의 정신과 위업의 연구 사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 한글 전용과 국학 진흥을 위하여 「한문고전국역사업」과 「한글고전역주사업」을 1967년에 기획하여 1968년부터 계속 수행하고 있다.

「한문고전국역사업」은 1968년 1월부터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을 국역 간행하기 시작하여 실록의 한문 원문 901권을 완역 발간하였고, 일반 한문고전으로 『증보문헌비고』, 『매월당집』, 『국조인물고』, 『동국통감』, 『승정원일기』(순종), 『육일재총서』, 『치평요람』 등 수많은 국학자료를 국역 발간하였으며, 계속하여 『각사등록』, 『연행록』, 『의방유취』 등 문헌의 국역 사업을 벌여 오고 있다.

「한글고전역주사업」은 1990년 6월에 첫발을 내디디어, 『석보상절』 권6, 9, 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 바, 2017년 12월까지 역주 발행한 문헌은 『석보상절』 4책, 『월인석보』(훈민정음언해본 포함) 17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금강경삼가해』 5책, 『구급방언해』 2책, 『삼강행실도』 1책, 『두시언해』 15책, 『소학언해』 4책, 『사서언해』(논어, 대학, 중용, 맹자) 6책, 『이륜행실도』 1책, 『동국신속삼강행실도』 5책, 『시경언해』 5책, 『서경언해』 2책, 『가례언해』 4책, 『여소학언해』 2책, 『오륜행실도』 5책, 『윤음언해』 2책, 『마경초집언해』 2책, 『주역언해』 3책, 『종덕신편언해』 3책, 『어제상훈언해』 1책, 『어제훈서언해』 1책, 『별행록절요언해』 1책, 『천주실의언해』 1책 등 153책을 발간하였고, 금년에도 『두시언해』 등 13책을 역주 간행할 예정이다.

우리 회 창립 62돌이자 한글 반포 572돌, 세종 즉위 600돌이 되는 올해는 우리 회가 「한문고전국역사업」을 착수한 지 50돌이 되었고, 「한글고전역주사업」을 추진한 지 28돌이 되었다. 그 동안 우리 회가 낸 800여 책의 국역 학술 간행물이 말해 주듯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이래 최고의 한글 국역, 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이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그 결과 고전의 대중화를 통한 지식 개발 사회의 문화 자본 구축과 역사 의식 및 한국학 연구 활성화에 기여는 물론, 새 겨레문화 창조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자부하는바,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는,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모아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조선 성종의 명을 받은 유윤겸(柳允謙), 유휴복(柳休復),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언해하여 성종 12년(1481)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언해 시집으로 알려져 있다. 모두 25권 17책으로 을해자본이다(후대에는 19책, 20책도 있음). 이 책은 보통 줄여서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두시언해』는 다른 언해서와는 달리 원문에 입겿(토)이 없고, 한글과 한문 혼용인 언해문의 한자에도 한글 독음이 달리지 않았다. 두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 때부터 행하여졌다고 하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처음 이루어진 것이다. 이 책의 책이름에 보이는 공부(工部)는 두보의 관명(官名)이고, 분류(分類)는 시를 기행, 술회, 질병, 회고, 시사(時事) 등과 같이 내용에 따라 분류하였다는 뜻이다. 두시는 71문(門)에 총 1,467수와 다른 사람 작품 16수로서, 그 소재는 세상사에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라를 사랑하는 충정과 같은 인간애가 담겨 있으며, 당시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면밀하게 비판한 사실적인 서사(敍事)인 데서 시사(詩史)라 일컬어지는 위대한 작품이다.

이번에 이 『두시언해』 권19를 역주함에 있어서, 그 저본으로는 교정본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두시언해』 권19를 대상으로 하였다.

우리 회에서 15세기 문헌인 『두시언해』 권19를 역주 간행함에 있어, 역주를 위해 애써 주신 동국대학교 김영배 명예교수, 김성주 교수님과,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준 교육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8년 11월 25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최홍식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 등 한글 관계 문헌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옛 우리말을 연구하는 전문학자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이를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며 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9의 저본으로는, 교정본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두시언해』 권19를 대상으로 주석과 역주를 하였으며, 부록으로 축소 영인하였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한문 원문․언해 원문․현대어 풀이․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는데, 특별히 한시를 언해하였으므로 그 운율을 알기 쉽도록 시 제목과 한시 원문은 그대로 음을 달고 풀이를 이어 붙였다. 원전과 비교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장(張)․앞[ㄱ]․뒤[ㄴ] 쪽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제1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1ㄱ分類杜工部詩 卷之十五

제3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諸侯3ㄴ舊上計 厥貢傾千林

(3) 현대어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기 때문에 때로는 뜻을 알기가 어려울 정도로 직역인 경우가 있다. 이 경우 각 구절의 끝에 있는 ‘*시 구절 해설’을 참조할 수 있다.

(4) 원문 내용(한문 원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 풀이문․주석과 구별하였으며, 원문 가운데 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다.

(5) 현대어 풀이에서, 옛글의 구문과 다른 곳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충한 말은 ‘〈 〉’ 안에 넣었다.

(6) 찾아보기 배열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초성순 : ㄱ ㄲ ㄴ ㅥ ㄷ ㄸ ㄹ ㅁ ㅱ ㅂ ㅲ ㅳ ㅃ ㅄ ㅴ ㅵ ㅷ ㅸ ㅅ ㅺ ㅻ ㅼ ㅽ ㅆ ㅾ ㅿ ㅇ ㆀ ㆁ ㆆ ㅈ ㅉ ㅊ ㅋ ㅌ ㅍ ㅎ ㆅ

② 중성순 :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ㆉ ㅜ ㅝ ㅞ ㅟ ㅠ ㆌ ㅡ ㅢ ㅣ ㆍ ㆎ

③ 종성순 : ㄱ ㄴ ㄴㅅ ㄴㅈ ㄴㅎ ㄷ ㄹ ㄹㄱ ㄹㄷ ㄹㅁ ㄹㅂ ㄹㅅ ㅀ ㅁ ㅁㄱ ㅯ ㅰ ㅂ ㅄ ㅅ ㅺ ㅼ ㅿ ㆁ ㅈ ㅊ ㅋ ㅌ ㅍ ㅎ

3. 역주자 일러두기

(1) 두시의 원문과 예문은 『두시언해』 초간본을 중심으로 하였고, 초간본이 없는 경우, 낙장되었거나 훼손되었을 경우는 중간본 또는 후쇄본을 참고하였다.

(2) 현대역은 가급적 『두시언해』의 표현을 최대한 살리는 방법으로 하였으며, 해당 시구의 마지막 주석에서 구절 내용을 설명하였다.

(3) 한시 원문에 대해서는 『두시언해』에 제시되어 있는 대로 우리의 전통 한자음을 한글로 표시하여 원문과 나란히 제시하였다. 두음법칙과 ‘不’에 대한 ‘불, 부’의 음 등을 한자음에 반영하였다.

(4) 주석을 달 때는 주로 동일한 주석일 경우 제일 먼저 나오는 곳에서 자세한 주석을 달고 뒤에서 동일한 낱맡이 나올 때에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간단히 주석을 달고 더 자세한 것은 앞의 주석을 참고하도록 하였으며, 상·하권의 안배를 위하여 주석을 중복하여 단 경우도 있다.

(5) 주석의 표제어는 낱맡은 물론 필요한 경우에는 2개 이상의 낱맡로 이루어진 구도 제시하였다. 한자어는 한자음을 표제어로 한자를 괄호에 묶어 제시하였다.

(6) 주석에 제시된 낱말이나 표현에 대해서는 분석은 가급적 상세히 하되 특별한 경우나 분석이 어려운 경우에만 문법적 설명을 가하였다.

(7) 낱맡을 분석할 때 ‘+’ 기호는 대체로 체언과 조사 사이, 조사와 조사 사이, 용언의 어간과 어미 사이, 어미와 어미 사이에 쓰고, ‘#’는 어기와 어기 사이, 어기와 ‘-’ 사이, 낱말과 낱말 사이에 썼으며 기원적인 정보도 최대한 반영하고자 하였다.

(8) ‘-오, -옴’ 등은 ‘오+, 오+ㅁ’ 등으로 분석하였으며, 문법 용어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으나 필요한 경우 ‘피동접미사, 부사파생접미사’ 등의 문법 용어를 제시하였다.

(9) 주석에 사용한 예문은 가급적 『두시언해』 이외의 15세기 예문 1개와 『두시언해』에 실린 예문 1개를 들었다. 그러나 『두시언해』에 나오는 예가 유일례이거나 『두시언해』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중요한 낱말일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2개 이상의 예문을 든 경우도 있으며, 전체 용례 수가 많지 않은 경우, 예문을 전부 실은 경우도 있다. 『두시언해』 권1, 권2, 권4는 초간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뽑은 예문은 당연히 중간본의 예문이다.

(10) 예문 표시는 ‘〈두시 19:1ㄱ〉’과 같이 관례에 따라서 ‘서명, 권차, 면차’를 제시하였으며 ‘ㄱ, ㄴ’은 전후면을 나타낸다. 『두시언해』의 특성상 해당 예문의 시제목도 추가하였다.

(11) 『두시언해』의 예문은 주석을 제외한 모든 예문의 한문 원문을 괄호에 넣어 표시하였다.

(12) 초간본 『두시언해』 권19에서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중간본을 참고하였다. 또한 초간본과 중간본이 다른 부분은 해당 구절에 표시하였다.

(13) 두시의 판본에 따라 두시 원문의 한자가 다른 경우에도 해당 구절 주석의 아랫부분에 밝혔다.

(14) 역주와 용례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에서 펴낸 역주본들을 많이 참고하였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역주본들은 많은 중세어 자료들이 역주되었으므로 풍부한 해석과 자료가 제시되어 있다. 이 자리를 빌려 예전에 역주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뜻을 표한다. 그리고 국어사전은 『표준국어대사전』을 주로 참고하였다.

(15) ‘두시’에 대해서는 중국,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그리고 깊이 있는 주석서들이 존재한다. 폭넓고 깊이 있는 주석을 참고할 수 있어서 선학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어려운 부분을 소화하지 못하여 이 책에 반영하지 못한 부분도 많다. ‘두시’에 깊은 조예가 있으신 님들의 질정(質定)을 바란다.

『두시언해』 권19 해제

김성주

1. 서론

이 책은 『두시언해』 권19에 대한 역주서이다. 『두시언해』 권19는 모두 3개의 초간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고, 둘째는 고 이인영 구장본으로 현재 통문관에 소장된 책이며, 셋째는 개인소장본이다. 이 중에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교정본으로 권17, 권18과 함께 한 책으로 묶여져 있다. 이 책에 대해서는 『한국어연구』 2에 영인이 있으며, 안병희 님의 간략한 해제도 있다. 이 글은 안병희(2004)에 기대어 작성한 것이다.

국어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두시언해』에 대해서 연구되어 왔다. 이병주(1959)와 전재호(1973)를 비롯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에는 ‘심경호, 안병희, 이종묵, 안대회, 정재영, 김성규, 조남호, 이현희’ 님이 서지, 한문학, 국어학적으로 두시와 『두시언해』에 대해 고찰하였다. 그러나 ‘두시언해’는 국어학도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원문인 두시가 어렵기 때문이고, 이를 번역한 ‘언해’도 다양한 어휘와 표현을 사용하여 직역 위주의 번역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시언해』를 이해하려면 역주서가 필요하다. 두시의 주석서 내지 번역서로는 중국의 경우 韓成武·張志民(1998)의 『두보시전역(杜甫詩全譯)』과 蕭滌非(2014)의 『두보전집교주(杜甫全集校注)』가 있고, 일본의 경우 鈴木虎雄(1928~31/1978)의 『두보전시집(杜甫全詩集) 1-4』과 吉川幸次郞의 원고를 제자인 興膳宏이 편집하여 2016년에 출판한 『두보시주(杜甫詩注)』 제1~10책, 그리고 일본의 한시 전공자들이 모여 전체 두보시를 번역한 下定雅弘·松原郞(2016)의 『두보전시역주(杜甫全詩譯註)』 1~4가 있다. 한국에서 나온 번역서나 주석서로는 일찍이 중요 두시에 대해서 이병주(1958/1970)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注)』가 있고, 중국 한시 전공자들이 모여서 전체 두시를 주석하고 번역할 목적으로 이영주 외(1999)의 『두보초기시역해』를 필두로, 최근의 김만원 외(2016)의 『정본완역 두보전집 제7권(성도 2차 시기)』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전체 두시에 대한 최초의 번역인 『두시언해』가 15세기에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는 아직 현대국어로 된 전체 두시에 대한 주석서나 번역서가 없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는 『두시언해』의 초간본을 대상으로 『두시언해』의 역주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책도 이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두시언해』 초간본은 국립중앙박물관본, 통문관본(고 이인영 구장본), 개인소장본 등 세 개가 있다. 이 중 국립중앙박물관본은 교정본으로서 『한국어연구』 2에 권17, 권18과 함께 영인되었고, 나머지 두 본은 영인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책은 교정본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두시언해』 권19를 대상으로 주석과 역주를 하였으며 해제도 이 책에 대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두시언해』 권19에 대해서는 일찍이 고 안병희 님께서 영인과 함께 간략한 해제를 제시하였다. 본인은 이 책을 실사하지 못하였으므로 안병희(2004)의 기술에 기대서 이 책의 서지 사항을 간략히 작성한다.

2. 『두시언해』 권 제19의 교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두시언해』 권19(초간본)는 교정본이다. 현재 초간본 중 교정본은 가람문고본 권6, 7과 국립중앙박물관본 권17, 18, 19가 있다. 그중 권19는 오자가 많아서 상당한 교정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병희(1998 : 126, 2004 : 100)는 『두시언해』 초간본 중 교정되지 않은 통문관 소장본과 교정되어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을 비교하여 『두시언해」 권17, 18, 19의 교정 내용을 제시하였다. 여기서는 이 글에서 권19에 해당하는 내용을 전제한다.

(1) 가. 思憶시(니라)(4ㄱ3뒤) ← 시놋다

나.  (鑑)(5ㄱ4앞) ←  보

다. (黃衣)書卷(8ㄱ7앞) ← 누른 書卷

라. (그저긔)(12ㄴ5앞) ←  모

마. 기(르)로(14ㄱ6뒤) ← 기로로

바. 璜(고)(16ㄱ4뒤) ← 璜니

사. 絹(이니 古)(20ㄱ2) ← 絹也ㅣ니

아. (훤)도다(26ㄱ5뒤) ← 어위도다

자. 喩(薛丈)ㅣ(34ㄴ5뒤) ← 喩李四ㅣ

차. 言(薛丈)ㅣ(35ㄱ1앞) ← 言李四ㅣ

카. (이 두이 나라셔)(36ㄴ4앞) ← 用神女與鶴事야

타. (굴근 모기)(40ㄴ5뒤) ← 모기 굵게

파. 먹(노라)(42ㄱ5뒤) ← 먹놋다

하. 애( 덥다노)라 ← 애 데요라

거. 夜(雨剪春)(43ㄱ1뒤) ← 夜剪春雨

너. 맛(나)놋다(47ㄱ6뒤) ← 맛낫놋다

더. (혀) 잇(47ㄱ8앞) ← 몃다 잇

(2) 가. 醉거(1ㄱ1앞) → 醉커

나. 喩薛丈ㅣ(34ㄴ5뒤) → 喩薛丈이

다. 言薛丈ㅣ(35ㄱ1앞) → 言薛丈이

라. 뷘 닶 빗(40ㄴ7앞) → 뷘  빗

(1)은 『두시언해』 권19 중 교정본이 아닌 통문관 소장본과 교정본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의 비교를 통해서 교정본인 국박본에 교정되어 있는 것들을 옮긴 것이고, (2)는 『두시언해』 중간본에서 교정본인 국박본의 내용이 수정된 것을 정리한 것이다. (1)과 (2)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국박본이 교정본임에도 불구하고 교정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두시언해』의 출판은 빨리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교정은 대부분 잘못된 글자를 오려내고 을해자로 새로 인쇄한 종이를 붙이는 방법으로 진행되었고 혹 글자의 획만 오려내고 붙인 것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교정의 대상이 된 오자는 원고에서 잘못된 것과 조판 과정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되는데 그중에서도 확실한 것으로는 (1)자, (1)차의 ‘李四’와 ‘薛丈’의 혼동, (1더)의 ‘몃다’와 ‘혀’는 원래부터 원고가 잘못되었음이 확실하다.

3. 『두시언해』 권19의 내용과 특징

주지하다시피 『두시언해』의 저본은 『찬주분류두시』이며, 『찬주분류두시』의 저본은 『집천가주분류두공부시』와 『집천가주비점두공부시집』이다. 전자는 두시를 주제별로 분류한 것이고, 후자는 두시를 연대순으로 나열해 놓은 것이다. 『두시언해』의 저본인 『찬주분류두시』는 시의 배열은 『집천가주분류두공부시』와 같이 하였고, 시의 주석은 『집천가주비점두공부시집』의 내용을 많이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두시언해』에서의 두시의 배열은 『집천가주비점두공부시집』의 그것과 동일하다.

『두시언해』 권19는 ‘투증(投贈)’과 ‘기간 상(寄簡上)’의 두 주제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자에는 ‘고시 1수’와 ‘율시 6수’가 후자에는 ‘고시 17수’가 들어 있다. 아래에서 ‘투증(投贈)’과 ‘기간 상(寄簡上)’에 들어 있는 시를 제시한다.

(3) 가. 投贈<원주>【古詩一首 律詩六首】 : 01「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오언고시), 02「上韋左相二十韻」(오언배율), 03「贈韋左丞丈濟」(오언배율), 04「遣悶奉呈嚴公二十韻」(오언배율), 05「奉贈鮮于京兆二十韻」(오언배율), 06「奉贈太常張卿垍二十韻」(오언배율), 07「敬贈鄭諫議十韻」(오언배율)

나. 寄簡上<원주>【古詩十七首】 : 08「寄韓諫議註」(칠언고시), 09「暮秋枉裴道州手札率爾遣興寄遞呈蘇渙侍御」(칠언고시), 10「蘇大侍御訪江浦賦八韻記異并序」(오언고시), 11「寄裴施州」(칠언고시), 12「鄭典設自施州歸」(오언고시), 13「寄薛三郞中璩」(오언고시), 14「奉贈射洪李四丈」(오언고시), 15「奉酬薛十二丈判官見贈」(오언고시), 16「貽華陽柳少府」(오언고시), 17「投簡咸華兩縣諸子」(칠언고시), 18「贈鄭十八賁」(오언고시), 19「贈衛八處士」(오언고시), 20「贈蘇徯」(오언고시), 21「君不見簡蘇徯」(칠언고시), 22「贈李白」(오언고시), 23「戲贈鄭廣文虔兼呈蘇司業源明」(오언고시), 24「戲贈二友」(오언고시)

‘투증’에는 ‘고시 1수’와 ‘율시 6수’가 있는데, (01)은 오언고시이며, 나머지는 모두 오언배율이다. 일반적으로 한시는 고체시와 근체시로 크게 구분하고, 근체시는 다시 절구와 율시로 나누는 것이 보통인데, 율시의 형식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장편으로 된 배율이 있다. 『찬주분류두시』와 『두시언해』는 율시와 배율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두시언해』에서 모든 배율은 율시로 분류되어 있다. 그런데 ‘투증’에 속한 7수 중 고시인 (01)을 제외한 나머지 6수가 모두 오언배율인데도 『두시언해』의 ‘투증’ 주제 아래 협주에는 ‘고시 1수 율시 6수’라 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두보는 중국의 근체시 중에서도 율시의 완성자로 보고 있으나, 이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두보의 율시는 여전히 오언율시가 작품수에 있어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두보는 칠언율시의 개척자이자 완성자이기도 하며 배율에 있어서도 두보의 배율은 이전의 배율에 비해서 주제의 다양화의 관점에서 개척자라 불린다. 그런데 『두시언해』 권19의 ‘투증’ 항목의 전체 7수 중 배율 그중에서도 오언배율이 6수나 되므로, 『두시언해』 권19는 두보의 오언배율을 살펴보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두시언해』 권19의 하반부 ‘기간 상(寄簡上)’에는 고시 17수가 들어 있다. 그중 (08, 09, 11, 17, 21)의 5수는 칠언고시이고, 나머지는 오언고시이다. 『두시언해』의 주제 분류에서 상하로 나누어질 때에는 고시가 먼저 배치하고, 절구와 율시를 뒤에 배치한다. ‘기간’은 비교적 많은 수의 시가 포함되어 있어 한 책으로 묶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상하로 나누어 상은 『두시언해』 권19에, 하는 『두시언해』 권20에 수록하였는데, 『두시언해』 권19에는 ‘기간’ 중에서 고시에 해당하는 시들이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시들에 대한 창작 시기와 배경 그리고 내용은 각각의 시들의 주석 앞부분에 붙어 있는 ‘역주자 해설’란을 참고하기 바란다.

4. 『두시언해』 권19의 어휘와 표현

『두시언해』는 어휘, 표현, 문법 등에서 다른 중세국어 문헌에 비해 독창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두시언해』의 성격을 정확하게 밝혔다고 보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있다. 『두시언해』의 분량도 많은데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아서 『두시언해』 전체를 대상으로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15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두시언해』에서만 사용된 많은 어휘를 『두시언해』 권19가 포함하고 있지만 이런 용례에 대해서는 이 책의 해당 주석을 참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두시언해』 권19에서만 사용된 어휘나 표현에 대해서만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두시언해』 권19에서만 사용된 어휘나 표현은 크게, 첫째 문법 형태 및 표기법, 둘째 동사, 셋째 명사, 넷째 한자어로 나눌 수 있다. 『두시언해』 권19에는 다른 문헌에서 볼 수 없고 『두시언해』의 다른 권에서도 볼 수 없는 문법 형태가 있다. 아래 (10)의 ‘賦러’이다. 먼저 『두시언해』 권19의 예를 보자.

(4) 가. 賦러 揚雄이 오리로다 혜오 詩란 子建이 親近리로다 보다라(賦料揚雄敵 詩看子建親)「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두시 19:1ㄴ〉.

나. 〈중간본〉賦라 楊雄이아 오리로다 혜오 詩란 子建이아 親近리로다 보다라

다. 如來ㅣ 이 두 그틀 두드려 두 소로 호아 브티시니라〈금삼 3:5ㄱ〉.

(4가)의 ‘賦러’이 ‘賦로’이라면 이 예는 ‘-로’이 ‘-러’으로 표기된 유일례이다. 〈중간본〉에는 (4나)와 같이 ‘賦라’으로 되어 있으며, 실제로 15세기 문헌에는 (4다)와 같이 ‘-로’이 사용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옛 문헌에서 유일례로 보이는 예가 오기(誤記)나 탈획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특히 『두시언해』와 같이 시급히 만들어진 책일 경우에는 이럴 가능성이 더 있다. 그런데 『두시언해』 권19는 교정본이 있기 때문에 교정이 되지 않은 채 유포된 비교정본(非校訂本) 즉 소위 『두시언해』의 유포본(流布本)에 비해서 좀 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교정본인 권17이나 권19 등도 교정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안병희(1972, 2004)에 의해서 지적되었다.

‘賦러’이 ‘賦로’의 이표기인지 아니면 오기인지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여야 한다. 여기서는 교정본인 『두시언해』 권19에 문법 형태인 복합조사 ‘-로’의 이표기 또는 오기로 볼 수 있는 (4가)의 ‘賦러’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 그친다.

(5) 가. 字 : 녯 사미 나날 마 머나 프른 史記예 字ㅣ 泯滅티 아니얫도다(故人日已遠 靑史字不泯)「贈鄭十八賁」〈두시 19:42ㄱ〉.

나. 녯 사미 나날 마 머나 프른 史記에 긄字ㅣ 泯滅티 아니얫도다

다. 긄字 : 苦縣ㅅ 光和ㅅ 저긧 그리 오히려  셧니 긄字 여위오 세요미 貴야 보야로 神妙호매 通니라(苦縣光和尙骨立 書貴瘦硬方通神)「李潮八分小篆歌」〈두시 16:15ㄴ〉.

(5가)의 ‘字’는 (5다)와 같이 『두시언해』의 다른 권에서는 모두 ‘긄字’로 쓰였다. 『두시언해』에는 〈중간본〉을 포함하여 모두 다섯 개의 ‘긄字’가 있다. 이 중에서 2개는 〈중간본〉의 예이고, 세 개는 〈초간본〉의 예이다. (5가)의 〈초간본〉 『두시언해』 권19의 〈중간본〉은 역시 ‘긄字’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두시언해』는 ‘ㆆ’이나 ‘각자병서’가 쓰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에 ‘ㆆ’이나 ‘각자병서’가 쓰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대부분 소위 유포본(流布本)을 대상으로 검토되어 주장된 것이다. 그러나 권6, 권7, 권17, 권18, 권19 등 『두시언해』의 교정본을 통해서도 ‘ㆆ’과 ‘각자병서’의 쓰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두시언해』에서도 ‘ㆆ’과 ‘각자병서’가 제한적이나마 쓰였다고 볼 가능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두시언해』가 ‘ㆆ’과 ‘각자병서’를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문헌인 이상 이전의 관습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라 볼 수 있다.

교정본인 『두시언해』 권17에도 ‘官ㆆ 字’와 같은 ‘ㆆ’ 표기가 있고, ‘칠꼬’와 같은 각자병서 표기가 있으므로 『두시언해』에서도 부분적이나마 ‘ㆆ’과 ‘각자병서’가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두시언해』 권19에서만 용례가 확인되는 동사로는 ‘갓고로혀-, 흐늘티-, 므여-’ 등이 있다.

(6) 聦明호 管輅ㆎ게 넘고 尺牘요 陳遵을 갓고로혀리로다(聦明過管輅 尺牘倒陳遵)「上韋左相二十韻」〈두시 19:5ㄴ〉.

(7) 가. 갓고로디- : 魔王이며 제 귓것히 다 갓고로디니라〈월석 4:14ㄴ〉.

나. 갓고로디- : 버미 갓고로딘 며 龍이 업더딘 야 가나모 서리예 롓니 믌 그제와 핏 點을 가매 드리우노라(虎倒龍顚委榛棘 淚痕血點垂胸臆)「柟木爲風雨所拔歎」〈두시 6:41ㄴ〉.

(8) 갓고로왇- : 文殊ㅣ 老維摩 다 딜어 갓고로와시니〈남명 상:43ㄴ〉.

(9) 갓고로와티- : 維摩 갓고로와툐 어루 分別야 붓그러움 시소미 어려울 시라〈남명 상:44ㄱ〉.

(6)의 ‘갓고로혀-’는 (7~9)의 ‘갓고로디-, 갓고로왇-, 갓고로와티-’ 등의 예로 미루어 보면 ‘갓고로’와 ‘혀-’로 분석할 수 있다. (6)의 ‘갓고로혀-’는 원문의 ‘倒’에 대응하는 번역이므로 현대국어로는 ‘거꾸러뜨리다’ 정도로 파악할 수 있다.

(10) 가. 갓- : 四倒 갓오미 외야〈월석 20:96ㄱ〉.

나. 顚倒 갓 씨라〈능엄 1:80ㄴ〉.

다. 웃 對答 갓오 이 對答 正니〈능엄 4:127ㄱ〉.

라. 일후미 筆受ㅣ니 天竺ㅅ 마리 이와 갓 버거 모로매 그를 두르혀고〈원각 하2-1:48ㄱ〉.

마. 倒 갓 시라〈육조 하:22ㄴ-1〉.

바. 어즈러이 폣 긴 소리 갓오(紛披長松倒)「九成宮」〈두시 6:2ㄴ〉.

사. 갓오- : 爛慢히 곳다온 酒樽을 갓오리로다(爛熳倒芳樽)「寄高適」〈두시 21:23ㄴ〉.

아. 갓로 :  닐오 옷 아래 조 야딜 갓로 닙고〈월석 25:22ㄴ〉.

자. 오 갓로 니버 도로 술위 머여 타 와(倒衣還命駕)「重過何氏五首」〈두시 15:11ㄴ〉.

(11) 가. 갓골- : 倒 갓골 도〈신유 하:17ㄱ〉.

나. 어즈러이 폣 긴 소리 갓골오(紛披長松倒)「九成宮」〈두시 6:2ㄴ〉.

다. 갓고로 : 어리여 迷惑야 邪曲 信야 갓고로 볼〈월석 9:57ㄴ〉.

라. 갓고로 : 긄  三峽 므를 갓고로 흘리리오(詞源倒流三峽水)「醉歌行」〈두시 8:30ㄴ〉.

‘갓고로혀-’가 ‘갓고로’와 ‘혀-’로 분석될 때, (11다, 라)의 ‘갓고로’는 현대국어의 ‘거꾸로’에 대응되는 것으로 (11가)와 같이 ‘갓골-’에서 부사화파생접미사 ‘-오’가 결합되어 형성된 부사로 볼 수 있다. ‘갓골-’은 (11나)와 같이 『두시언해』에서도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동사 ‘갓골-’은 원래 ‘갓-’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5세기 국어에서 로 표기되던 어휘들이 ‘ㅗ’로 변화하는 많은 경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추정은 타당한 것으로 보이며, 더욱이 (10)에서와 같이 15세기의 다양한 문헌에서 동사 ‘갓-’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아, 자)와 같이 ‘갓고로’와 같이 부사로 쓰인 ‘갓로’가 있고, 더군다나 ‘갓-’의 사동사인 ‘갓오-’를 (10사)에서 확인할 수도 있다. ‘갓오-’ 또한 『두시언해』에서만 용례를 확인할 수 있는 어휘이기도 하다.

한편 ‘갓고로혀-’가 부사 ‘갓고로’와 동사 ‘혀-/-[引]’의 구 구성일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도 『두시언해』 권19에 나오는 ‘갓고로혀-’가 유일례이기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 놓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할 듯하다.

(12) 가. 믌겨리 흐늘티니  이 디리로다 酒盃ㅣ 니 도기 곧 뷔도다(浪簸船應坼 杯乾甕即空)「遣悶奉呈嚴公二十韻」〈두시 19:9ㄴ〉.

나. 〈중간본〉 믌겨리 흔들티니  당당이 디리로다 酒盃ㅣ 니 도기 곧 뷔도다

다. 흐늘- : 노며 가온 峯頂에 막대 흐느러 녜 놀며〈영가 하:105ㄴ〉.

라. 흐늘- : 녜 永嘉ㅣ 六祖 보오매 막대 흐늘오셔 눈 다호매 道ㅣ 잇거늘〈남명 하:76ㄱ〉.

마. 흐늘- : 구루믄  므를 조차 디고  블근 뫼 흐느러 슬프도다(雲隨白水落 風振紫山悲)「人日兩篇」〈두시 11:8ㄱ〉.

(13) 가. 후늘- : 錫杖 세 번 후늘면 獄門이 절로 열이고〈월석 23:83ㄴ〉.

나. 후- : 鱍鱍 고기 리 후 라〈금삼 4:12ㄱ〉

다. 흔들- : 딕누리옛 대  여 가야이 옥을 흔들오〈백련 10ㄴ〉.

라. 搖 흔들 요〈신유 하:47ㄱ〉.

마. 攪 흔들 교〈신유 하:54ㄱ〉.

(12가)의 ‘흐늘티-’는 ‘흐늘-’과 ‘티’로 분석된다. ‘흐늘-’은 ‘흔들다’의 뜻이고, ‘티’는 강세접미사이다. ‘흐늘-’의 용례는 (12가~마)와 같이 『두시언해』를 포함한 15세기의 다양한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흐늘-’은 (12가)의 ‘후늘-’에서 변화하였거나 동시대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후늘-’은 (13나)와 같이 ‘후-’로도 쓰였으며 16세기 이후에는 (13다~마)에서 볼 수 있듯이 ‘흔들-’로 변화하였다.

(14) 가. 므여- :  토 사 扶持호 디 아니코 每常 扶持거든 반기 므여놋다(上馬不用扶 每扶必怒嗔)「寄薛三郞中璩」〈두시 19:31ㄴ〉.

나. 〈중간본〉  토 사 扶持호 디 아니코 每常 扶持거든 반기 므여놋다

다. 믜여- : 네 아리 목이 믜여거〈삼강동경 열:7ㄱ〉. 官吏의 怒야 믜여호 잇비 아니호리라(不勞吏怒嗔)「前出塞九首」〈두시 5:27ㄴ〉.

라. 믜- : 앗기며 貪며  믜며 새오로 됴티 몯 根源을 일울〈석상 13:56ㄴ〉.

마. 일의노 아 아니 환히 누워 안 와 믜여 리다(嬌兒惡臥踏裏裂)「茅屋爲秋風所破歌」〈두시 6:42ㄴ〉.

바. 믭- : 믜 사 일훔 쓰며〈석상 9:17ㄱ〉.

(14가)의 ‘므여-’는 ‘미워하다’의 뜻이다. 15세기의 동사 중에는 ‘동사, 동사+어-, 동사+ㅂ-, 동사+ㅂ+어-’의 관련형을 가지는 동사가 많은데 ‘미워하다’의 뜻인 ‘믜-’도 이런 동사 유형에 속한다. 즉 ‘믜-, 믜여-, 믭-, 미워-’ 등이다. 이 중 ‘미워-’ 형은 17세기에 들어서 활발하게 쓰이며 나머지 형태의 동사나 형용사는 15세기 당시에도 쓰이는데, ‘믜-, 믜여-, 믭-’도 (14다~바)와 마찬가지로 15세기의 문헌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14다)에 쓰인 ‘믜여-’의 ‘믜’는 하향중모음의 탈락으로 ‘므’로 쓰일 가능성이 있다. 15세기에 하향중모음을 가진 많은 어휘들이 하향중모음이 탈락한 형태로도 쓰이고 있음을 많은 용례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므여-’는 ‘믜여-’의 ‘믜’의 하향중모음이 탈락하여 생긴 형태로 규정할 수 있다.

『두시언해』 권19에만 쓰인 어휘로 명사에 해당하는 것은 ‘머귀나모’가 있다.

(15) 그듸 알 것드럿 머귀남글 보디 아니다(君不見前者摧折桐)「君不見簡蘇徯」〈두시 19:45ㄴ〉.

(15)에서 ‘머귀남글’을 확인할 수 있다. ‘머귀남글’의 ‘남글’은 ‘나무’의 의미인 ‘나모~’이 목적격 조사 ‘-/을’과 결합할 때 생기는 형태이다. 따라서 단독형은 ‘머귀나모’인데, 이는 ‘머귀’와 ‘나모’의 합성어이다.

(16) 가. 梧桐 머귀니 合歡樹ㅣ 梧桐 니라〈월석 7:54-1ㄱ〉.

나. 梧 머귀 오 桐 머귀 동〈광주판천자문 33ㄱ〉.

다. 머귀나모 여름만게 비여〈온역 16ㄴ〉.

(17) 가. 菩提樹는 부톄 그 나모 아래 안샤 菩提 일우실 菩提樹ㅣ라 니라〈석상 3:39ㄴ〉.

나. 王祥이 믄득 남글 안고 우니〈번소 9:25ㄱ〉.

‘머귀’는 (16가, 나)에서 볼 수 있듯이 ‘梧, 桐’ 등에 대응하므로 ‘오동나무’의 ‘오동’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온역이해방』에는 ‘머귀나모’라는 어휘도 등장한다. ‘나모’는 (17나)와 같이 목적격 조사와 결합하면 ‘남글’이 되며, ‘남글, 잣남글’ 등에서 복합조사로 쓰인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18) 健壯 미 마디 아니야 東 녀긔 가 다대 자보 얻고져 놋다(壯心不肯已 欲得東擒胡)「戲贈二友」〈두시 19:47ㄴ〉

(19) 가. 請 드른 다대와 노니샤 바 아니 마치시면 어비 아리 사시리가〈용가 52〉.

나. 匈奴 이젯 다대라〈삼강런던 충:6〉.

다. 韃 다대 달〈훈몽 중:2ㄴ〉.

(20) 가. 西郊胡正煩(西郊애 되 正히 어즈럽더라)「至德二載예 甫ㅣ 自京金光門로 出야 間道로 歸鳳翔호니 乾元初애 從左拾遺야 移華州掾야 與親故別고 因出此門야 有悲往事노라」〈두시 3:22ㄴ〉.

나. 此篇 言異域之物와 羌胡之人이 今在目中니 此ㅣ 甫之所以嘆喪亂之飽見也ㅣ라〈두시 3:23ㄱ-ㄴ〉.

(21) 가. 陰山驕子汗血馬 長驅東胡胡走藏(陰山엣 驕子ㅣ 피 나  타 東胡 기리 모니 되 라가 수므니라)「憶昔二首」〈두시 3:60ㄱ〉.

나. 胡人이 自謂天之驕子ㅣ라니 此 指回紇다 東胡 指安慶緖니 言回紇이 助唐야 討慶緖也ㅣ라

(18)의 ‘다대’는 원문의 ‘胡’에 대응하는 말로서 ‘Tartar’를 가리킨다. 이 낱맡은 주로 ‘달단(韃靼)’으로 음역되어 쓰였다. ‘다대’는 (19)에서 볼 수 있듯이 15세기의 다른 문헌에서 활발하게 쓰였다. (19가)와 같이 정음 초기 문헌인 『용비어천가』에서도 용례를 확인할 수 있고 (19나, 다)에서 ‘匈奴, 韃’ 등의 주석에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8)의 ‘다대’는 『두시언해』 권19에서만 쓰인 어휘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19)를 제시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두시언해』에서 ‘胡’에 대응되는 말은 (20가, 21가)와 같이 ‘되’인데 이상하게도 『두시언해』 권19의 해당 부분에서는 ‘다대’로 언해되어 있기 때문이다. (20가, 21가)의 주석에 해당하는 (20나, 21나)를 보면 각각 ‘羌胡之人’과 ‘胡人’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대’라는 어휘가 15세기에 두루 쓰였지만 『두시언해』에서 ‘胡’는 항상 ‘되’로 언해되는데 『두시언해』 권19의 예인 (18)에서만 이상하게도 ‘다대’로 언해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22) 가. 블근 옷 니븐 使者ㅣ 하딕고 命을 도로 가져 가니 故人 두 번 절야셔 아다온 政治 謝拜노라(紫衣使者辭復命 再拜故人謝佳政)「寄裴施州」〈두시 19:26ㄴ〉.

나. 블근 옷 니븐 使者ㅣ 하딕고 命을 도로 가져 가니 故人 두 번 절야셔 아다온 政治 謝拜노라

(23) 가. 迦葉이 雞足山애  제 가 저 下直니라〈월석 25:14ㄱ〉.

나. 내 그  부텻긔 下直고 宴晦야 淸齋다니〈능엄 5:35ㄴ〉.

다. 會通禪師ㅣ 鳥窠禪師 가 머리 갓가 侍者 외얫다가  下直호〈남명 상:14ㄱ〉.

(24) 考功의 等第에 거슯저디여 올로 京尹의 堂애 가 下直호롸(忤下考功第 獨辭京尹堂)「壯遊」〈두시 2:40ㄴ〉.

(12가)의 ‘하딕-’는 한자어 ‘하직(下直)-’이 한글로 표기된 것인데 ‘하딕-’라는 표기법은 『두시언해』는 물론 15세기 전체 문헌에서도 이 예가 유일례이다. (22나)에서 볼 수 있듯이 〈중간본〉에서도 동일하게 ‘하딕고’로 언해되어 있다. ‘下直’이 동사로 쓰여 언해될 때는 (23가~다)와 같이 모두 ‘下直-’로 표기되는 것이 15세기의 일반적인 질서이고, 비록 〈중간본〉의 예이기는 하지만 (24)와 같이 『두시언해』에서도 ‘下直-’가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두시언해』 권19의 ‘하딕고’는 한자어 ‘下直’이 한글로 표기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두시언해』 권19에서는 ‘福외-’의 용례도 확인된다.

(25) 가. 勸 그듸 嘆恨디 말라 반개 福 외디 아니홀 줄 아니니라(勸君休嘆恨 未必不爲福)「戲贈二友」〈두시 19:48ㄱ-ㄴ〉.

나. 鬼神은 盈을 害코 謙을 福고 人道 盈을 惡코 謙을 好니〈주역 2:10ㄴ〉.

(25가)에서 ‘福외-’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福’이 동사로 쓰였다면 (25나)와 같이 ‘福-’로 언해되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25나)는 『주역언해』의 예이고, 『주역언해』를 포함한 16세기의 경서 언해들은 전형적인 언해라기보다는 한문 원문에 음독구결을 현토한 한글구결문의 성격이 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동사로 쓰인 ‘福’을 언해한다면 역시 ‘福-’가 가장 일반적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25가)의 ‘福외-’는 상당히 특이한 예에 속하는데 (25가)의 ‘福외디’는 대응되는 원문을 상세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즉 (25가)의 ‘福외디’에 대응하는 원문은 단순히 ‘福’이 아니라 ‘爲福’임에 주목하여야 한다. (25가)의 ‘福외디’는 한자어 ‘福’이 동사로 쓰여 ‘福외-’로 언해된 것이 아니라 원문의 ‘爲福’을 언해한 것이어서 ‘福외디’는 ‘福’이 ‘福’으로 ‘爲’가 ‘외디’로 언해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 따라서 (25가)의 ‘福외디’는 ‘福’이 동사로 쓰였을 때의 언해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25가)는 ‘福외-’라는 동사로 파악할 수 없고 ‘福’을 주어로 ‘외-’를 동사로 파악하여야 한다.

5. 간략 두보 평전

여기서는 『두시언해』의 중요한 시들과 『두시언해』 권19에 나오는 시를 대상으로 두보의 일생을 간략히 살펴본다.

두보(杜甫)는 712년 낙양 근처 공현(鞏縣) 요만촌(瑤灣村)에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 태어나 770년 장사(長沙)에서 악양(岳陽)으로 가는 상강(湘江) 가에서 죽었다. 두보의 먼 선조로 『좌씨경전집해(左氏經典集解)』를 찬한 두예(杜預, 220~284)가 있고 초당(初唐)의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은 두보의 할아버지이다. 두보는 부인 양 씨와의 사이에 종문, 종무 두 아들과 딸도 몇 명이 있었다. 어머니가 어려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고모 아래에서 자랐으며 14~15세 때에는 이미 시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두보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되었으며 벼슬길로 진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고, 또 안녹산의 난 등의 전란 등으로 평생을 돌아다니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여러 난을 겪으면서 낙양(洛陽), 장안(長安), 진주(秦州), 성도(成都), 재주(梓州, 사천 三台), 낭주(閬州, 사천 閬中), 운안(雲安, 사천 雲陽), 기주(夔州, 사천 奉節), 장사(長沙) 등을 돌아다녔지만 시작(詩作)은 계속 이어갔다.

두보가 교류한 이로는 이백(李白), 소원명(蘇源明), 정건(鄭虔), 고적(高適), 잠삼(岑參), 이옹(李邕), 방관(房琯), 엄무(嚴武) 등이며, 특히 엄무는 두보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이었다. 두보가 성도를 떠난 것도 엄무의 죽음이 큰 원인이 되었다.

아래에 두보의 간략한 연대기를 제시한다.

712년(태극 원년, 1세) 출생

정월. 하남 공현(鞏縣) 요만촌(瑤灣村)에서 출생. 현종 즉위.

717년(개원 5년, 6세)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劍舞)를 구경함(「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 권16).

718년(개원 6년, 7세) 봉황을 읊은 시 지음.

725년(개원 13년, 14세) 시단에 두각을 나타냄. 문인들이 모인 장소에 출입함(정주자사 최상, 예주자사 위계심, 기왕 이범, 비서감 최척, 가수 이구년 등, 「江南逢李龜年」 권16 참조).

730년(개원 18년, 19세) 순하(郇瑕, 산서 臨猗) 여행.

731년(개원 19년, 20세) 제1차 여행 : 오월(吳越, 강소와 절강 지역) 여행.

735년(개원 23년, 24세) 진사 시험 낙방.

736년(개원 24년, 25세) 제2차 여행 : 제조(齊趙, 산동과 하북 남부) 여행, 소원명(蘇源明)을 만남. 현종이 이임보(李林甫)에게 재상 직을 맡김.

741년(개원 28년, 30세) 은자 장개 방문. 낙양으로 돌아와 낙양 동편 두예(杜預)와 두심언(杜審言)의 묘가 있는 수양산(首陽山) 아래에 토실(土室)을 짓고 삶. 「야연좌씨장(夜宴左氏莊) 권15」을 지음. 여름에 사농소경(司農少卿)의 딸 양이(楊怡)와 결혼.

742년(천보 원년, 31세) 743년까지 낙양 거주. 둘째 고모의 묘지명을 지음.

744년(천보 3년, 33세) 낙양에서 장안 조정에서 쫓겨난 이백과 만난 이후 이백을 따라 양송 지역을 유람하며 선도를 익히고 선약을 캐리라 마음먹음. 5월에 계조모 노씨 하직. 8월 언사(偃師)로 돌아가 장례를 지내고 묘지명을 지음. 장례가 끝난 후 양송 지역(梁은 하남성 개봉, 宋은 하남성 상구) 제3차 여행. 두보와 이백은 양송 지역에 살던 고적(高適)과 취대에 올라 넓은 평야를 보면서 옛 사람을 추모함. 이백과 함께 왕옥산으로 화개군을 찾아 떠남(22「贈李白」). 화개군이 죽은 것을 알자 이백은 재주(齊州, 산동 齊南)로 가서 고천사(高天師)에게서 도가의 비록을 건네받아 연단의 길로 들어섰고, 두보는 제주에서 이옹(李邕) 등과 교류함. 이옹의 손자 이지방이 새로 지은 정자의 준공식을 거행하면서 당시 북해태수로 있던 이옹이 두보를 초대함. 「배이북해연역하정(陪李北海宴曆下亭)」(권14)의 “歷下亭은 제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고 제남에는 빼어난 선비도 많구나/바 右ㅅ 녀긘 이 亭子ㅣ 녜외니 濟水 南앤 일훔난 士ㅣ 하도다(海右此亭古 濟南名士多)” 구절은 지금도 회자됨. 가을에 연주(=노군)에서 이백과 재회(이백과의 마지막 만남).

746년(천보 5년, 35세) 십여 년의 여행을 끝내고 장안으로 돌아옴. 장안(西安)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 지원자이었던 부친 두한(杜閑)의 사망으로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함. 어떤 때에는 장안성 남쪽 종남산(終南山)에서 약초를 캐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음. 이 시기 두보와 가깝게 지내던 글벗은 소원명(蘇源明)과 광문관 박사 정건(鄭虔).

747년(천보 6년, 36세) 과거 시험 낙방.

748년(천보 7년, 37세) 장안 거주(01「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03「贈韋左丞丈濟」지음).

751년(천보 10, 40세) 현종에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바침. 현종은 두보의 재능을 알아보고 두보의 문장을 시험해 볼 것을 재상에게 명함. 이임보가 출제하고 집현원의 학생들이 모두 와서 감독함. 두보는 이 일을 시에서 자주 언급함. 선우중통이 남조 토벌.

752년(천보 11, 41세) (07「敬贈鄭諫議十韻」)

753년(천보 12, 42세) (05「奉贈鮮于京兆二十韻」)

754년(천보 13, 43세) 아들 종무 출생(06「奉贈太常張卿垍二十韻」17「投簡咸華兩縣諸子」).

755년(천보 14, 44세) 하서현위(河西縣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우위솔부병조참군(右衛率部兵曹參軍)으로 전임되어 취임(02「上韋左相二十韻」). 안녹산의 난 발발. 11월 우위솔부병조참군의 직책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잘 것 없는 봉급을 가지고 가족들이 있는 봉선(奉先)으로 향하였으나 어린 아들은 굶어 죽어 있었음(「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권2, 23「戲贈鄭廣文虔兼呈蘇司業源明」).

756년(천보 15, 지덕 원년, 45세) 2월 봉선에서 장안으로 돌아와 솔부의 직책을 계속 수행. 여름으로 접어들어 반군이 진격해 오자, 봉선에 살고 있는 가족을 걱정하여 백수(白水, 섬서 白水)로 피난. 부주(鄜州, 섬서 富縣)의 강촌(羌村, 鄜州 西北 三十里) 도착. 6월 현종이 촉으로 피난. 양귀비, 양국충 등 양씨 일가 멸족. 7월 숙종 영무(靈武, 감숙 靈武)에서 즉위. 두보는 숙종의 행재소가 있던 영무로 가다가 반군에 잡혀 장안에 억류.

757년(지덕 2, 46세) 4월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이 머물던 봉상(鳳翔, 섬서 鳳翔)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 5월 16일 좌습유(左拾遺)에 임명. 좌습유의 일을 시작한지 한 달이 못되어 두보가 방관을 옹호하는 ‘정쟁오지(廷諍忤旨)’ 사건 발생. 윤달 8월 휴가를 얻어 강촌(羌村)으로 감(「北征」 권1).

758년(건원 원년, 47세) 두보는 방관(房琯)을 변호하다가 좌습유의 직위를 박탈 당하고 화주(華州, 섬서 渭南市 華州區)의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되어 지방의 문교 업무를 맡게 됨. 겨울 업성의 안경서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지나가는 이사업(李嗣業) 장군을 지방관과 함께 영접함(19「贈衛八處士」).

759년(건원 2, 48세) 3월 낙양에서 화주로 돌아옴. 7월 사공참군(司功參軍) 사직. 늦은 봄 화주를 떠나 진주(秦州, 감숙 天水)로 감. 10월 적곡, 철당협, 한협, 청양협, 적초령을 지나 동곡(同谷, 감숙 成縣)으로 감. 목피령, 백사도, 비선각, 석거각, 검문을 지나 12월 1일에 성도로 향함.

760년(상원 원년, 49세) 성도의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세움(「戲作花卿歌」). 신진현(新津縣) 1차 여행.

761년(상원 2, 50세) 신진현(新津縣) 2차 여행. 12월 엄무 성도윤으로 부임(「寄贈王十將軍承俊」).

762년(보응 원년, 51세) 4월 현종(玄宗)과 숙종(肅宗) 붕어. 대종(代宗) 등극. 이백 사망. 6월 경성으로 돌아가는 엄무를 면주(綿州, 四川 綿陽의 동쪽)까지 동행하며 전송. 때마침 위구르와 토번의 침입으로 사천 지역을 떠돌다 성도로 돌아감. 늦가을에 가족을 재주(梓州, 사천 三台)로 이사시킴(14「奉贈射洪李四丈」24「戲贈二友」).

763년(광덕 원년, 52세) 낭주(閬州, 사천 閬中), 염정(鹽亭, 사천 盐亭 绵陽市東南部), 한주(漢州, 사천 廣漢 縣级市) 등을 여행하고 봄에 재주(梓州, 사천 绵陽市 三台縣)로 돌아옴. 8월, 방관이 낭주에서 죽음. 낭주로 이사. 안사의 난 종결. 토번이 장안을 함락(「征夫」). 대종이 섬주(陝州)로 피난.

764년(광덕 2, 53세) 3월 성도 초당으로 돌아가서 촉지를 떠나는 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엄무가 다시 성도로 부임한다는 소식에 계획을 수정하여 성도로 돌아옴. 6월 엄무에 의해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추천됨(「揚旗」). 소원명(蘇源明)과 정건(鄭虔) 죽음(04「遣悶奉呈嚴公二十韻」).

765년(영태 원년, 54세) 1월 정월 막부의 직책을 사직하고 초당으로 돌아옴. 4월 엄무 돌연 병사. 5월 성도를 떠남. 민강(岷江)을 통해 유주(楡州, 사천 重慶), 충주(忠州, 사천 忠縣), 운안(雲雁, 사천 雲陽)으로 감.

766년(대력 원년, 55세) 늦은 봄, 기주(夔州, 사천 奉節) 도착. 이 무렵 두보는 오골계 고기로 중풍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오골계를 몇 마리 길렀다(「催宗文樹雞柵」 권17, 08%「寄韓諫議註」16「貽華陽柳少府」18「贈鄭十八賁」20「贈蘇徯」21「君不見簡蘇徯」).

767년(56세) 적갑(赤甲)으로 이사. 기주(夔州) 도독(都督)인 백무림(栢茂林)이 마련해 준 양서초당(瀼西草堂)에서 삶(11「寄裴施州」12「鄭典設自施州歸」13「寄薛三郞中璩」15「奉酬薛十二丈判官見贈」).

768년(대력 3, 57세) 동생 두관에게서 편지를 받음. 정월 기주(夔州, 사천 奉節)를 출발하여 협주(峽州, 호북 宜昌) 하뢰(下牢)에 도착함으로써 삼협(三峽)을 완전히 벗어남. 3월 강릉(江陵, 湖北 江陵) 도착. 가을 공안(公安, 湖北 公安)으로 이사. 늦겨울 공안 출발 악주(岳州, 호남 岳陽) 도착. 설을 악양(岳陽)에서 보냄.

769년(대력 4, 58세) 정월 악양 출발. 형산(衡山), 상담(湘潭, 호남 湘潭), 담주(潭州, 호남 長沙)에 도착(09「暮秋枉裴道州手札率爾遣興寄遞呈蘇渙侍御」10「蘇大侍御訪江浦賦八韻記異并序」).

770년(대력 5, 59세) 늦봄 담주(潭州)에서 이구년(李龜年)과 재회. 4월 군벌의 반란을 피해 형주(衡州)로 피난. 침주(郴州, 호남 郴州)로 가는 도중 뇌양(耒陽, 호남 耒陽)에 이르러 방전역(方田驛)에서 섭 현령이 보내준 음식을 받음(일설에는 두보가 방전역에서 죽었다고 하나 그 이후에 지은 시가 있음). 양양(襄陽, 호북 襄陽)으로 가다가 담주(潭州, 호남 長沙)에서 머묾. 겨울 고향으로 향하는 상강 기슭에서 세상을 떠남. 두보가 죽은 뒤에 두보의 영구는 43년 후 손자 두사업(杜嗣業)에 의해 언사(偃師, 하남 언사) 서북의 수양산(首陽山) 밑으로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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鈴木虎雄(1978) 『杜甫全詩集 1-4(續國譯漢文大成)』 東京 : 日本圖書センタ(=鈴木虎雄(1928~31) 『杜少陵詩集』 續國譯漢文大成, 國民文庫刊行會.).

目加田誠(1972) 『漢詩大系 9 : 杜甫』 集英社.

下定雅弘·松原郞(2016) 『杜甫全詩譯註 一~四』, 株式會社 講談社.

黑川洋一(1966/1987) 『杜甫』 角川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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