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9(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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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좌상에게 올리며 20운[上韋左相二十韻]


韋左相二十韻 주001)
상위좌상이십운(上韋左相二十韻)
이 작품은 천보(天寶) 14년(755년) 초봄에 지어졌는데, 두보 44세 때이다. 당시 두보는 장안(長安)에 머물고 있었다. 위 좌상(韋左相)은 위견소(韋見素)를 말한다. 천보 13년(754년) 8월 가을 장마 때문에 진희열(陳希烈)을 재상 직위에서 파면하고 위견소를 좌상(左相)에 임명했다. 위견소는 천보 5년(746년)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오른 뒤 여러 해 동안 관리를 임명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임명이 공명정대하여 호평을 받았다. 두보는 벼슬길에 대한 희망을 품고서 이 시를 지어 올린 것이다. 시에서 그는 위견소가 재상에 오르고 품계가 높은 사실을 칭송하면서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말해 도움을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위견소가 좌상이 된 것은 지덕 2년(757)이므로 제목의 ‘左相’은 뒤에 소급하여 적은 것이다.
【韋見素ㅣ라】

상위좌상 이십운
(위 좌상에게 올리며 20운)
위 좌상위견소(韋見素)이다.】

鳳曆軒轅紀 龍飛四十春軒轅 주002)
헌원(軒轅)
?~?. 전설 속의 고대 천자(天子). 성은 공손(公孫) 또는 희(姬)다. 헌원의 언덕에서 낳았기 때문에 헌원씨라고 하고, 유웅(有雄)에 국도(國都)를 정한 까닭으로 유웅씨라 일컫는다. 배와 수레를 창조하여 교통을 편리하게 했다. 당시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탁록(涿鹿)의 벌판에서 포학작란(暴虐作亂)하던 치우(蚩尤)를 쳐서 평정하니, 제후가 천자로 받들어 신농씨(神農氏) 뒤를 잇게 되었다. 또한 토덕(土德)의 서기(瑞氣)가 있다고 하여 황제(黃帝)로도 불린다.
時예 鳯鳥 至커 以名曆正 주003)
역정(曆正)
옛날에 천문역법(天文曆法)을 주관한 관리.
之官니 鳯曆 주004)
봉력(鳳曆)
①보령(寶齡). ②책력(冊曆). 옛날에 역정(曆正)을 봉조씨(鳳鳥氏)라 불렀다. ③후량(後梁) 시대에 쓰였던 연호. 연대는 912. 여기서는 ②의 뜻으로 쓰였다.
으로 借言唐曆 주005)
당력(唐曆)
중국의 역서(曆書).
니 玄宗 주006)
현종(玄宗)
685~762. 당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712-756). 본명은 이융기(李隆基)고, 예종(睿宗)의 셋째 아들이다. 명황(明皇)이라고도 부른다. 조모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낙양(洛陽)에서 태어났고, 9살 때 임치왕(臨淄王)으로 봉해졌다. 26살 때 위후(韋后)가 딸 안락공주(安樂公主)와 짜고 중종(中宗, 현종의 백부)을 암살, 중종의 아들 온왕(溫王)을 제위(帝位)에 앉히고 정권을 농단(壟斷)하기 위해 현종의 아버지 상왕(相王)까지도 해치려 하였다. 심복 장병을 인솔, 위후와 안락공주 일당을 공격한 뒤 아버지를 제위에 옹립하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잡았고, 28살 때 마침내 아버지의 양위로 즉위했다. 당시 권세를 누린 태평공주(太平公主) 일파를 타도하여 측천무후 이래 반세기에 걸친 부인의 정권 개입을 근절시킨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초기에는 정치를 잘해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시대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했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자 정치를 등한시하고, 도교(道敎)에 빠져 막대한 국비를 소비했으며, 35살이나 연하인 양귀비(楊貴妃)를 궁내(宮內)로 끌어들인 뒤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여 권신 이임보(李林甫)가 국정을 대신 맡아보았다. 천보 14년(755)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사천(四川)으로 난을 피해 가던 도중에 양귀비는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이듬해 아들 숙종(肅宗)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 은거했는데,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뒤 죽었다. 특히 음악에 뛰어나 스스로 작곡까지 하면서, 이원(梨園)의 자제 남녀를 양성했다. 서예에도 능해 명필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시호는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다.
ㅅ 即位 至天寳 주007)
천보(天寶)
①당(唐)나라 시대에 쓰였던 연호. 연대는 742~756. ②오월(吳越) 시대에 쓰였던 연호. 연대는 908-923. ③남한(南漢) 시대에 쓰였던 연호. 연대는 958. 여기서는 ①의 뜻으로 쓰였다.
十一載야 四十年也ㅣ라】

<용어 realname="" type="">鳳曆軒轅紀錄엿니 주008)
기록(紀錄)엿니
기록하고 있으니. 紀錄#-+여#잇-++니. 15세기의 ‘-어 잇-’은 ‘-아/어#잇-’형, ‘-앳/엣-’형, ‘-앗/엇-’형이 공존했는데 여기서는 세 번째 유형이 쓰였다. ¶-어 잇- : 오 안자 잇더시니 도 五百이 그윗 거슬 일버 精舍ㅅ 겨로 디나가니〈월석 1:6ㄱ〉. 기튼 치위예 곳과 플왜 디어 잇니(餘寒折花卉)「送大~遂停니라」〈두시 8:70ㄱ-ㄴ〉. -앳/엣- : 阿僧祗前世劫에 님금 位ㄹ 리샤 精舍애 안잿더시니〈월석 1:2ㄱ〉. 戎事 惣執니 다 侍中의 貂 고잿도다(惣戎皆插侍中貂)「諸將五首」〈두시 5:44ㄱ〉. -앗/엇- : 곧 미 두려이 가 너비 國土 머것다 시니〈능엄 2:63ㄱ〉. 노 臺  부 믌  구벗도다(曾臺俯風渚)「雨三首」〈두시 12:13ㄴ〉.
龍이 언 디 주009)
언 디
난지. -[飛]+어+ㄴ +이. ¶ 悅帝利罪女ㅣ 하해 나건 디 오 사리 디나니〈월석 21:28ㄴ〉. 아리 宰相 외언 디 三年이로 祿이 이티 하디 몯더니〈내훈 3:24ㄴ〉. 健壯 미 러디건 디 오라니 셴 머리로 人間애 브텟노라(壯心久零落 白首寄人間)「有歎」〈두시 3:43ㄴ〉.
마  주010)
마 
마흔 해의. 마 +ㅅ. 〈중간본〉에는 ‘마’으로 되어 있다.
보미니라 주011)
보미니라
봄이니라. 봄이다. 봄+이+니+라. ‘-니라’는 화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진술할 때 쓰는 종결어미이다.

【한자음】 봉력헌원기 용비사십춘헌원씨(軒轅氏) 때 봉황새가 날아오자 역정(曆正)의 관직으로 이름을 삼았는데, <용어 realname="" type="">봉력(鳯曆)으로 당력(唐曆)의 이름을 차용했고, 현종(玄宗) 주012)
당 현종
생몰년(685~762년) 재위 기간(712~756년), 천보(天寶) 742년~756년 천보 11년=752년, 당 현종 즉위년은 712년이고 천보 11년은 752년이어서 그 기간은 40년이다.
이 즉위해서 천보 11년에 이르기까지 40년이었다.】
【언해역】 <용어 realname="" type="">봉력(鳳曆)헌원(軒轅)을 기록(紀錄)하고 있으니, 용이 난 지 마흔 해의 봄이라.
*시 구절 해석 : “<용어 realname="">봉력헌원을 기록하였으니, 용이 날아오른 지 마흔 번 봄이 지났다.”라는 뜻으로, 현종이 제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었다는 말이다.

八荒 주013)
팔황(八荒)
팔방(八方)의 멀고 넓은 범위. 곧 온 세상. 일명 팔굉(八紘), 팔방(八方), 팔극(八極)이라고도 한다.
壽域 주014)
수역(壽域)
①사람마다 하늘이 정한 천수를 다 누리는 태평성대. ②무덤. 여기서는 ①의 뜻으로 쓰였다.
一氣轉洪鈞 주015)
홍균(洪鈞)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는 신(神). 균(鈞)은 도기(陶器)를 만드는 녹로(轆轤)로, 조물자(造物者)를 말한다.
【言左相 주016)
좌상(左相)
①좌승상(左丞相)의 약칭(簡稱). ②좌의정(左議政)의 약칭. 여기서는 ①의 뜻으로 쓰였다.
이 調和元氣야 陶成萬物야 使八方 주017)
팔방(八方)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四方)과 그 사이의 네 방향.
荒逺 주018)
황원(荒遠)
①요원(遙遠). 아주 멀고 멂. ②아주 멀고 먼 지역을 가리키는 말. 여기서는 ②의 뜻으로 쓰였다.
之民로 咸躋仁夀之域也ㅣ라】

八荒애 목숨 긴 주019)
목숨 긴
목숨이 긴. 즉 장수(長壽)하는.
 주020)

가가. 변경이. +이. 〈중간본〉에는 ‘이’로 되어 있다.
여럿고 주021)
여럿고
열려 있고. 열-[開]+어#잇-+고. ‘열다’는 자타동 양용동사의 자동사 용법으로 쓰였다. 15세기의 ‘-어 잇-’은 ‘-아/어#잇-’형, ‘-앳/엣-’형, ‘-앗/엇-’형이 공존했는데 여기서는 세 번째 유형이 쓰였다. ¶열다(자동사) : 자논 두 相이 모 열며 어우로 좃논 디라〈능엄 3:17ㄱ〉. 구루미 의 리예 올니 宮扇이 열오(雲移雉尾開宮扇)「秋興五首」〈두시 6:8ㄴ〉 /열다(타동사) : 네 見은 方便品엣 부텻 知見을 열며 뵈며 알며 드로미라〈월석 13:58ㄴ〉. 제 거르디 아니얏 수를 열리로다(相迎自醱醅)「晩晴 ··· 北舍」〈두시 12:38ㄱ〉. -어 잇- : 比丘ㅣ 蓮ㅅ 곳 우희 안자 잇거늘〈석상 24:16ㄱ〉. 모미 라가고져 나 病야 床애 누어 잇노라(身欲奮飛病在床)「寄韓諫議註」〈두시 19:18ㄱ〉. -앳/엣- : 녀르미여 겨리여  말도 아니코 안잿거시든〈석상 3:38ㄴ〉. 鵁鶄과 鸂鶒괘 갠 몰애예 기 안잿도다(鵁鶄鸂鶒滿晴沙)「曲江 ··· 史飲」〈두시 11:21ㄴ〉. -앗/엇- : 金剛이 門 밧긔 오히려 怒 머것도다〈남명 상:8ㄱ〉. 서릿 虛空애 萬嶺이 머것도다(霜空萬嶺含)「朝二首」〈두시 11:41ㄱ〉.
 氣運은 큰 붊긔 주022)
붊긔
풀무에. (불무/풀무)+의. ¶爐 붊기라〈금삼 2:28ㄱ〉. 風塵ㅅ  이긔요 決고 造化ㅅ 붊긔 功名을 호리라 더니라(決勝風塵際 功名造化爐)「哭台州鄭司戶蘇少監」〈두시 24:59ㄴ〉.
올맛도다 주023)
올맛도다
옮아 있도다. 옮-[移]+아#잇-+도+다. ¶옮- : 文殊師利여 내 이 이셔 년 듸 옮디 아니호리니〈석상 11:29ㄴ〉. 다봇 옮 호매 시르미 悄悄니 藥 行호매 病이 涔涔놋다(轉蓬憂悄悄 行藥病涔涔)「風疾이어~三十六韻이라」〈두시 3:16ㄴ〉. 옮기- : 주를 다  옮겨 터 되더니〈석상 6:36ㄴ〉. 늘근 나해 기로 술 비주믈 뵈아고  비옌 가야 橙子 옮겨 심고라(衰年催釀黍 細雨更移橙)「遣意二首」〈두시 3:25ㄴ-26ㄱ〉. -어 잇- : 오 안자 잇더시니 도 五百이 그윗 거슬 일버 精舍ㅅ 겨로 디나가니〈월석 1:6ㄱ〉. 모미 라가고져 나 病야 床애 누어 잇노라(身欲奮飛病在床)「寄韓諫議註」〈두시 19:18ㄱ〉. -앳/엣- : 阿僧祗前世劫에 님금 位ㄹ 리샤 精舍애 안잿더시니〈월석 1:2ㄱ〉. 무트로 올아가매 프렛 이스리 저젯고(登陸草露滋)「送殿 ··· 相公」〈두시 22:22ㄴ〉. -앗/엇- : 곧 미 두려이 가 너비 國土 머것다 시니〈능엄 2:63ㄱ〉. 어그르처 騏驎馬ㅣ 늘것도다(蹭蹬騏驎老)「奉贈射洪李四丈」〈두시 19:33ㄴ〉.

【한자음】 팔황개수역 일기전홍균【좌상(左相)이 원기를 조화롭게 만들어 만물을 잘 길러 팔방의 거칠고 먼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모두 어질고 장수하는 지역에서 걷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언해역】 팔황(八荒)에 목숨 긴 변경이 열렸고, 한 기운(氣運)은 큰 풀무에 옮아 있도다!
【구절풀이】 *뒤에는 ‘沙汰’ 구부터 ‘還順’까지를 위견소(韋見素)를 미화하는 구절로 주석해 놓고, 여기를 ‘左相~’으로 주석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구절이 좌상이 된 위견소의 업적을 칭송한 말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타당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도 있고, 작품 해설에 보면, 위견소가 좌상이 된 것은 지덕 2년(757)이므로 제목의 ‘左相’은 뒤에 소급하여 적은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위견소와 좌상은 같은 인물이 되니까 꼭, 모순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는 견해도 있다.
*시 구절 해석 : “팔황에 장수하는 지역을 열었으니, 한 기운이 큰 조물주에게 옮겼다.”라는 뜻으로, 좌상의 치적이 천하에 두루 미쳐 성덕(聖德)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9:4ㄱ

霖雨思賢佐 丹靑憶老臣髙宗 주024)
고종(高宗)
무정(武丁, ?~?). 상(商; 殷)나라의 20대 국군(國君). 소을(小乙)의 아들이다.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59년 동안 재위했다. 전하는 말로 어릴 때 민간에서 성장하여 농사의 어려움을 잘 알았고, 국세(國勢)가 기울어가는 상나라를 부흥시키고자 애썼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재상감을 구하지 못하자 3년 동안 정령(政令)을 선포하지 않는 등 철저하게 현명한 재상에게 정치를 맡겼다. 탕왕(湯王)을 제사할 때 꿩이 정(鼎)의 귀에 올라가서 우는 이상한 일이 발생하자 현신(賢臣) 조기(祖己)의 충고를 받아들여 정치를 고치고 덕을 행하여 온 나라를 기쁘게 했다는 등 재상과 신하를 존중하고 신뢰한 것으로 유명하다. 부열(傅說)을 얻어 재상으로 삼아 대치(大治)를 이루었다. 서북쪽으로 병사를 움직여 귀방(鬼方)과 3년 동안 전투를 벌여 물리쳤다.
이 命傅說 주025)
부열(傅說)
?~?. 이름은 태(兌)로도 쓴다. 은고종(殷高宗; 武丁) 때 사람. 현상(賢相). 부암(傅巖)에서 담장을 쌓는 노예였다고 한다. 고종이 꿈에서 성인(聖人)을 보았는데, 이름이 열이라고 했다. 기억을 더듬어 인상을 그리게 하고 부암의 들판에서 찾았다고 한다. 고종이 부열에게 “가물 때라면 너를 소낙비로 삼겠다.”라고 하였다.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曰若嵗大旱애 用汝야 作霖雨 주026)
임우(霖雨)
가뭄을 푸는 사흘 이상 오는 비.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킬 인재에 대한 비유로 쓰인다. 『서경(書經)』 열명(說命)편에 “큰 가뭄이 들면 내가 그대를 소낙비[단비]로 삼으리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라고 했다.
호리라 塩鐵論 주027)
염철론(鹽鐵論)
책이름. 전한(前漢)의 환관(桓寬)이 지었다. 10권 60편. 한소제(漢昭帝) 때 조정 내에서 염철에 관하여 회의한 내용을 기록한 책. 당시 어사대부 상홍양(桑弘羊)이 주장한 염철․주류의 관영 전매와 균수(均輸)․평준(平準) 등의 문제에 관하여 지방 현량(賢良)들과 상홍양간에 갑론을박하던 내용을 담았다. 상홍양의 사상과 당시 염철의 수급 문제를 연구하는 좋은 자료이다.
애 曰公𡖖者 神化之丹青 주028)
단청(丹靑)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 등 다섯 가지 색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대궐, 절, 비각 따위 건물 등의 벽, 기둥, 천장 같은 데에 여러 가지 그림이나 무늬를 그린 채색. 옛날부터 임금이 공훈과 덕행이 있는 신하를 포장하고 높여서 형상을 채색으로 그리는 것을 일컫는 말. 단청의 색이 아름답고 쉽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이라다】

霖雨  주029)

같은. -++ㄴ. 참조; -. ¶- : 射ㅣ 志ㅣ 이숌 니〈서전 2:42ㄱ〉. - : 겨지븨 德을 쓰샤 이 야 妃子 사모리라〈석상 3:11ㄱ〉. 이귀여 興復호미 진실로 이 니(克復誠如此 扶持在數公)「收京」〈두시 5:9ㄱ〉.
어딘 주030)
어딘
어진. 어딜-[賢]+ㄴ. ¶어딜- : 모다  毗奢波 蜜多羅ㅣ  어디니다〈석상3:7a〉. 맛볼 사 묻노라 몃 어디니오(逢人問幾賢)「題郪 ··· 屋壁」〈두시 7:32ㄱ〉.
도오리 주031)
도오리
도울 이를. 돕-[助]+을#이+. 초기 문헌이었으면 ‘도리’로 표기된다.
시고 주032)
시고
생각하시고. 사#-+시+고. 15세기에 ‘-’는 주로 ‘생각하다’의 의미로 쓰인다. 〈중간본〉에는 ‘랑시고’로 되어 있다.
丹靑 늘근 주033)
늘근
늙은. 늙-[老]+은. ¶늙- : 이 衆生이 다 늘거 마 주그리니〈석상 19:3ㄴ〉. 사랫 데 늘거 셰요 히 너기노니(生意甘衰白)「收京三首」〈두시 5:7ㄴ〉.
臣下 思憶시니라 주034)
사억(思憶)시니라
사억하시니라. 思憶#-+시+니+라. 원래의 ‘思憶시놋다’에서 교정된 것이다. ‘-니라’는 화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진술할 때 쓰는 종결어미이다.

【한자음】 임우사현좌 단청억로신【고종(髙宗)이 부열(傅說)에게 명해 말하기를, “만약 세상에 큰 가뭄이 들거든 너를 소낙비로 삼으리라”라고 했고, 『염철론(鹽鐵論)』에서 말하기를, “공경에 있는 사람은 신화(神化)의 단청이다.”라고 했다.】
【언해역】 임우(霖雨)같은 어진 이를 도울 생각 하시고, 단청한 늙은 신하를 사억(思憶)하시니라.
*시 구절 해석 : “소낙비 같은 어진 신하를 생각하고, 단청할 늙은 신하를 생각한다.”라는 뜻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는 훌륭한 신하를 발탁해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應圖求駿馬 驚代得騏驎 주035)
기린(麒麟)
고대 전설에 나오는 상서로운 동물. 기(騏)는 수컷, 인(麟)은 암컷이다. 모양은 사슴과 같고 머리엔 뿔이 있으며 온 몸에 갑옷처럼 비늘이 있고 꼬리는 소꼬리 모양이라고 한다. 기린이 출현하면 세상에 성왕(聖王) 또는 성인(聖人)이 나올 징조로 여겼다. 애공(哀公) 14년(기원전 481) 봄 사냥에서 괴상한 짐승을 잡았는데, 공자가 이를 보고 기린이라고 한 일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공자가 태어났을 때 기린이 나타났는데, 공자의 어머니인 안징재(顔徵在)가 기린의 뿔에 수건을 매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자가 늙어서 다시 만난 기린은 그때까지도 그 수건이 뿔에 매어져 있었다고 한다.
梅福 주036)
매복(梅福)
?~?. 전한 구강(九江) 수춘(壽春) 사람. 자는 자진(子眞)이다. 젊어서 장안(長安)에서 배웠는데, 『상서(尙書)』와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밝았다. 명경(明經)으로 군문학(郡文學)이 되어 남창위(南昌尉)를 지냈다. 나중에 사직하고 고향 수춘으로 돌아왔다. 성제(成帝) 때 대장군(大將軍) 왕봉(王鳳)이 권력을 쥐었다. 경조윤(京兆尹) 왕장(王章)이 왕봉을 비난하다가 살해당하자 신하들 가운데 감히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만이 상서하여 간언했다. 평제(平帝) 원시(元始) 중에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자 처자들과 이별하고 구강을 떠났다. 이후 회계(會稽)에 나타났는데, 성명을 바꾸어 살다가 오시문(吳市門)에서 죽었다. 수화(綏和) 원년(기원전 8년) 『춘추좌씨전』과 『춘추곡량전』, 『예기』, 『세본(世本)』 등을 참고해 공자(孔子)의 자취를 밝혀, 은(殷)나라 소가공(紹嘉公)에 추봉(追封)하게 했다.
曰 以伯樂 주037)
백락(伯樂)
?~?. 춘추시대 때 사람. 상마가(相馬家). 또는 성이 손(孫)이고, 이름은 양(陽)이라고도 하여 양자(陽子)로도 불린다. 진목공(秦穆公)의 신하로 있으면서 말을 감정하는 일을 맡았다. 일설에 천리마가 소금 수레를 끌고 태행산(太行山)을 오르다가 그를 보고 크게 울자 백락이 수레에서 내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에 말이 땅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다가 하늘을 우러러 울었는데, 그 소리가 하늘 끝까지 퍼졌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자 목공에게 구방인(九方堙)을 천거했다. 구방인은 말을 감정하면서 말의 암수나 안색 따위는 살피지 않아 목공이 언짢게 여겼다. 이에 백락은 천리마란 “뛰어난 것을 얻으면 조잡한 것은 잊고, 그 안을 얻었으면 밖은 잊는(得其精而忘其粗 得其內而忘其外)” 데 있다고 해명했다. 말을 감별하는 뛰어난 안목이 인재를 등용하는 능력으로 비유되곤 한다. 『열자(列子)』 설부(說符)편과 『회남자(淮南子)』 도응(道應)편에 나온다.
之圖로 騏𩦸 주038)
기기(騏驥)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알려진 준마(駿馬). 『장자(莊子)』 17권 추수편(秋水篇)에 따르면, 화류(驊騮)와 함께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다고 한다.
扵市라 니
*〈중간본〉에는 ‘求騏驎扵市라 니’로 되어 있다. 此 言像古賢而得見素也ㅣ라】

그리메 주039)
그리메
그림에. 그리-+ㅁ+에. ‘그림자’를 뜻하는 ‘그리메’와는 다르다. 후자는 15세기 문헌에는 ‘그르메, 그리메, 그림제’ 등이 나타나고, 16세기 문헌에는 ‘그림재, 그름제, 그르메’ 등이 나타난다. 『두시언해』에서는 ‘그리메’와 ‘그르메’가 쓰였다. ¶그르메(곡 15) : 믈 미틧 그르메 보고 서르 닐오〈석상 11:36ㄱ〉. 鴻鴈의 그르메와 峽內예 니니(鴻鴈影來連峽內)「舍弟 ··· 三首」〈두시 8:41ㄱ〉. 그리메(법화 5:165) : 六塵의 그리메 像 브투믈 아라〈월석 9:21ㄱ〉. 孔子 보옴으로브터 발애 의 그르메 디 아니며〈소학 4:42ㄱ〉. 그림제(월 2:55) :  그림제 眞實ㅅ  아니로미 니라〈월석 2:55ㄴ〉. 그림재(초발심 9ㄴ) : 모매 그림재와 소리예 이 서 좃  기피 신호리라〈초발 계초:9ㄴ〉. 그름제(백련초해 3) : 그름제 영 影〈백련 4ㄴ〉.
마초와 주040)
마초와
맞추어. 맞-[應]+호+오+아. ¶마초- :  비 時節에 마초 야 녀르미 외야〈석상 9:34ㄱ〉. 시우레 마초 업더뎌 프른 뫼 노포미 리오디 몯도다(應弦不礙蒼山高)「久雨期王將軍不至」〈두시 5:36ㄴ〉.
駿馬 求더시니 주041)
구(求)더시니
구하시더니. 求+-+더+시+니. 15세기 국어에서는 선어말어미 ‘-더-’와 ‘-시-’가 연결될 때 ‘-더시-’의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나 ‘-시더-’도 있었다. 15세기 선어말어미의 연결 순서는 일반적으로 ‘객체높임-과거-확인-주체높임-현재-의도-미래-감동-원칙-상대높임’이다. ‘-더시-’와 ‘-시더-’가 공존하듯이 ‘-거시-’도 ‘-시거-’와 공존하였다. 16세기 후반부터 ‘-시-’가 앞서는 순서로 통일되어 갔다. ¶-더시- : 淨飯王이 相  사 五百 大寶殿에 뫼호아 太子 뵈더시니〈석상 3:1ㄱ〉. 鄴城의 두위힐후믄 足히 妖怪ㅣ롭디 아니니 關中엣 죠고맛 아 紀綱 허러 리며 張后ㅣ 즐기디 아니커든 님그미 爲야 驚忙더시니라(鄴城反覆不足怪 關中小兒壞紀綱 張后不樂上爲忙)「憶昔二首」〈두시 3:60ㄴ〉 /-시더- : 太子ㅣ 아 더브러 겨샤 글왌 根源을 子細히 니시고 無上正眞道理 勸시더라〈석상 3:10ㄱ〉. 사리   셗 안해셔 나거든 님그미  翠麟 도로혀 보시더라(箭出飛鞚內 上又回翠麟)「贈太 ··· 王璡」〈두시 24:24ㄱ〉.
一代예셔 주042)
일대(一代)예셔
일대에서. 一代+예+셔.
놀랄 騏驎을 어드시도다 주043)
어드시도다
얻으시도다. 얻-[得]+으시+도+다.

【한자음】 응도구준마 경대득기린매복(梅福)이 말하기를, “백락(伯樂)의 그림으로 천리마를 시장에서 구하니, 이것은 옛 현인의 형상을 바탕으로 위견소(韋見素)를 얻었다는 말이다.】
【언해역】 그림에 맞추어 준마를 구하시더니, 일대(一代)에서 놀랄 기린을 얻으시도다!
*시 구절 해석 : “그림에 맞춰서 준마를 찾으시더니, 일대를 놀라게 할 기린을 얻었다.”라는 뜻으로, 백락의 그림으로 준마를 샀듯이 옛 성현의 풍모를 따라 위견소를 발탁했다는 말이다.

沙汰 주044)
사태(沙汰)
쌀에 섞인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선(善)과 악(惡)을 구별함. 쌀 안에 섞여 있는 모래나 돌 따위를 걸러낸다는 뜻인데, 이것에서 선악을 구별해 없앤다는 뜻으로 확대되었다.
江河 주045)
강하(江河)
강(江)은 양자강(揚子江)을, 하(河)는 황하(黃河)를 가리킴.
濁 調和鼎鼐 주046)
정내(鼎鼐)
①솥과 가마솥. 옛날에 이 둘은 음식물을 삶아 익히는 도구로 쓰였다. ②재상의 자리를 비유하는 말. 여기서는 ①의 뜻으로 쓰였다.
【上句 言左相의 去貪汚也ㅣ라 書에 若作和羹애 爾惟塩梅라니 言左相의 夑理治化다 此下로 至風俗還淳은 皆羙左相다】

江河ㅣ 흐리니 주047)
흐리니
흐린 것을. 흐리-[混]+ㄴ#이+.
시서 주048)
시서
씻어. 싯-[洗]+어. 15세기에는 ‘싯-’만 쓰이다가 근대국어부터 ‘씻-’이 쓰이며, 각자병서와 합용병서의 혼동으로 ‘-’ 표기도 보인다. 사동사와 피동사는 ‘싯기-’로 같은 형태이다. ¶/ 싯- : 옷 며 발 싯고 니거늘〈석상 11:25ㄱ〉. 東海 기우려 乾坤 싯고져 노라(欲傾東海洗乾坤)「追酬 ··· 見寄」〈두시 11:7ㄱ〉. 싯기-(사동사) : 그  王과 上座와 比丘히 香湯로 菩提樹를 싯기니〈석상 24:48ㄱ〉. 믈 데여 내 발 싯기고(煖湯濯我足)「彭衙行」〈두시 1:13ㄱ〉. 싯기-(피동사) : 溫水 冷水로 左右에 리와 九龍이 모다 싯기니〈월천 8ㄱ〉. 불휘 믌 미틔 싯기여 그처디니 엇뎨 하 디시리오(根斷泉源豈天意)「柟木爲風雨所拔歎」〈두시 6:41ㄱ〉. - : 악명을 고져 아니랴마〈서궁 28ㄴ〉. 씻- : 내  씻쟈〈청노 4:13ㄴ〉.
리고 주049)
리고
버리고. 리-[棄]+고. 선행하는 ‘-어’와 함께 ‘-어 리다’ 보조동사 구문을 이룬다. ¶-어 리- : 즐급 드리워 온 들 몯 러 리니〈석상 6:6ㄴ〉.  城에 盜賊 城壕 갓가 리도다(春城鏟賊壕)「收京三首」〈두시 5:8ㄱ〉.
소 주050)
소
솥의. 솥[鼎]++ㅅ. 〈중간본〉에는 ‘소’로 되어 있다.
새로왼 주051)
새로왼
새로운. 새+롭-+ㄴ. ‘새롭다’는 15세기 문헌 중에서 『두시언해』에서만 사용되었다. 『두시언해』에는 ‘새롭다’와 함께 ‘새다’도 쓰였다. ¶새롭- : 赤甲애 사롤  占卜야 올마 사로미 새로외니 巫山과 楚水ㅅ 보 두 번 보과라(卜居赤甲遷居新 兩見巫山楚水春)「赤甲」〈두시 7:13ㄱ〉. 구룸 소개 두 그려긔 디나가 듣디 몯고 바 가온  구스릐 새로외요 貪히 보놋다(雲裏不聞雙鴈過 掌中貪見一珠新)「戱作寄上漢中王二首」〈두시 8:14ㄴ〉 /새- : 묏 지븨  바미 덥고 해셔 밥 머구메 소아 자본 사미 새외도다(山家蒸栗暖 野飯射麋新)「從驛次草堂復至東屯二首」〈두시 7:18ㄱ〉. 三月三日에 하 氣運이 새외니(三月 三日에 하 氣運이 새외니 長安ㅅ 믌 고온 사미 하도다)「麗人行」〈두시 11:17ㄱ〉.
거슬 주052)
거슬
것을. 것+을.
調和놋다 주053)
조화(調和)놋다
조화하는구나! 助化#-++오+ㅅ+다.

【한자음】 사태강하탁 조화정내신【앞 시구는 좌상(左相)에게 탐욕스런 마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서경(書經)』 주054)
## 서경(書經)
오경(五經) 중의 하나로,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정치를 기록한 책이다. 고대에는 제도상으로 사관(史官)이 있어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 변동, 문물제도 등을 낱낱이 문자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옛날에는 그저 서(書)라 일컬었으며 때로는 왕조(王朝)의 이름을 위에 얹어 『우서(虞書)』 또는 『하서(夏書)』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공자(孔子)는 이 서를 대단히 중히 여겨 번잡한 것을 정리해 다시 편찬했다는 설이 있으며, 시(詩)와 더불어 제자들의 교육에 핵심적인 교과 과정으로 삼았다. 한(漢)나라 이후 『상서(尙書)』라 일컬었는데, 상(尙)은 상(上)과 통하여 ‘상대(上代)의 서(書)’라는 뜻이라고 한다. 송나라 때 와서는 다시 『서경』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경(經)은 경전(經典)이라는 말로 성인이 산정(刪定)한 책이라는 존중의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은 『상서』 또는 『서경』 두 명칭이 통용되고 있으며, 고증이 어렵고 난해한 글로 알려져 있다.
에서 말하기를 “만약 국의 맛을 맞춘다면 너는 염매(塩梅)가 될 것이다.”라고 했으니, 좌상이 이치를 잘 적용시켜 훌륭하게 다스렸던 일을 말했다. 이 아래로 ‘풍속진환순(風俗盡還淳)’ 구절까지는 모두 좌상 위견소를 찬미한 것이다.】
【언해역】 강하(江河)가 흐린 것을 씻어 버리고, 솥의 새로운 것을 조화(調和)하는구나!
*시 구절 해석 : “강하가 흐려진 것을 깨끗이 씻어냈고, 솥에 든 음식의 맛을 조절해 새롭게 했다.”라는 뜻으로, 위견소가 사욕이 없고 재상으로서 훌륭하게 일을 처리했음을 칭송한 것이다.

韋賢 주055)
위현(韋賢)
기원전 144~기원전 62. 전한 노국(魯國) 추현(鄒縣) 사람. 자는 장유(長孺)고, 시호는 절후(節侯)다. 사람됨이 질박하고 욕심이 없었으며, 학문에 뜻을 두었다. 무제(武帝) 때 경학박사(經學博士)에 임명되고, 급사중(給事中)에 올랐다. 광록대부첨사(光祿大夫僉事)로 옮기고, 대홍려(大鴻臚)에 올라 소제(昭帝)에게 『시경(詩經)』을 강의했다. 일찍이 곽광(霍光) 등과 함께 선제(宣帝)의 옹립을 논의해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선제 본시(本始) 중에 승상(丞相)을 지냈고, 부양후(扶陽侯)에 봉해졌다. 노시위씨학(魯詩韋氏學)의 개창자로, 『시경』과 『상서(尙書)』에 두루 통해 ‘추로대유(鄒魯大儒)’로 불렸다.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9:4ㄴ

初相漢 范叔 주056)
범숙(范叔)
범저(范雎, ?~기원전 255). 범저(范且)라고도 하고, 범저(范睢)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위(魏)나라 사람. 자는 숙(叔)이다. 변설에 능했는데, 위상(魏相) 위제(魏齊)를 위해 일하다가 모함으로 태형을 당해 허리뼈가 부러진 뒤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고치고, 왕계(王稽)와 정안평(鄭安平)의 도움으로 진(秦)나라로 달아나 소양왕(昭陽王)을 섬기며 상국(相國)을 지냈다.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을 제안해 큰 성공을 거뒀는데, 이것이 나중에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통일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명장 백기(白起)와 함께 명성이 높아지자 그를 자살하게 만든 뒤 정안평을 장군에 앉혔다. 응(應)에 봉해져 응후(應侯)라고도 부른다. 나중에 조(趙)나라를 공격했다가 정안평이 전투에서 지고 조나라에 항복하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일설에는 진왕에게 논죄를 당해 처형당했다고도 한다.
巳歸秦【韋賢 漢宣帝 주057)
선제(宣帝)
기원전 91~기원전 49. 유순(劉詢). 전한의 제9대 황제. 초명은 병이(病已)고, 자는 차경(次卿)이다. 할아버지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가 무고(巫蠱)의 일에 걸려 자살하고 부모가 모두 해를 당하자 민간에서 길러졌다. 이 때문에 민심의 동정을 잘 알았다. 소제(昭帝)가 죽자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영입했지만 얼마 뒤 황음(荒淫)하다는 이유로 폐위하고 그를 맞아 옹립했다. 즉위한 뒤 통치를 마음을 쏟아 현능(賢能)한 사람을 기용하고 이치(吏治)를 중시하여 패도(覇道)와 왕도(王道)를 적절하게 사용해 명실상부한 정치를 꾀했다. 또 서역도위(西域徒尉)를 두어 변방의 방위를 강화하고, 서역 지방의 생산을 발전시키도록 했다. 감로(甘露) 2년(기원전 52) 남흉노(南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항복하자 장안(長安)에서 접견했다. 25년 동안 재위했다.
丞相 주058)
승상(丞相)
옛날에 군주를 보좌했던 최고위 행정장관(行政長官). 전국(戰國)시대 진도무왕(秦悼武王) 2년에 처음으로 좌우승상(左右丞相)이 설치되었다. 진나라 이후 각 왕조에서 때로는 존립하기도 했고, 때로는 없애기도 했다. 명나라 홍무(洪武) 13년(1380) 중서성(中書省)을 없애고 권한을 육부(六部)에 귀속시켰는데, 이로부터 승상의 제도는 없어졌다.
이라 魏ㅅ 范睢의 字叔이니 入秦이어 昭王 주059)
소왕(昭王)
기원전 324~기원전 251). 진소왕(秦昭王). 전국시대 진나라의 국군(國君). 이름은 직(稷) 또는 칙(則)이다. 진무왕(秦武王)의 이복동생이다. 왕위를 이은 뒤 처음에는 어머니 선태후(宣太后)가 섭정을 했는데, 내란을 평정한 뒤 왕권을 강화시켰다. 친정(親政)을 하면서 위염(魏冉)과 범저(范雎) 등을 기용하여 재상으로 삼고, 사마착(司馬錯)과 백기(白起) 등을 장수로 삼아 동진(東進) 정책을 펼쳐 한(韓)나라와 조(趙)나라, 위(魏)나라, 초(楚)나라 등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주난왕(周赧王)의 항복을 받고, 산동(山東)의 여섯 나라가 맺은 합종책(合縱策)을 와해시키면서 세력이 더욱 커졌다. 진나라가 이후 전국을 통일하는 데 기초를 닦았다. 56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소양(昭襄)이다.
이 封應侯다】

韋賢이 처 주060)
처
처음. 〈중간본〉에는 ‘처엄’으로 되어 있다.
漢을 돕 고 주061)
고
듯하고. 듯#-+고.
范叔이 마 주062)
마
이미. 벌써[已]. 16세기 후반에는 ‘이믜(소언 5:43ㄴ), 이믯(소언 5:43ㄴ)’ 등과 동의 관계를 이루기도 하고 ‘장차’를 뜻하기도 한다. ¶(장차) : 머리 셰오 치 디드러 아니 오라 마 주그리니〈월석 17:47ㄴ〉.
秦의 주063)
진(秦)의
진(秦)에. 秦+의.
갓 주064)
갓
가 있는. 가-[去]+∅#잇-+. 15세기의 ‘-어 잇-’은 ‘-아/어#잇-’형, ‘-앳/엣-’형, ‘-앗/엇-’형이 공존했는데 여기서는 세 번째 유형이 쓰였다. ¶-어 잇- : 比丘ㅣ 蓮ㅅ 곳 우희 안자 잇거늘〈석상 24:16ㄱ〉. 기튼 치위예 곳과 플왜 디어 잇니(餘寒折花卉)「送大~遂停니라」〈두시 8:70ㄱ-ㄴ〉. -앳/엣- : 阿僧祗前世劫에 님금 位ㄹ 리샤 精舍애 안잿더시니〈월석 1:2ㄱ〉. 戎事 惣執니 다 侍中의 貂 고잿도다(惣戎皆插侍中貂)「諸將五首」〈두시 5:44ㄱ〉. -앗/엇- : 곧 미 두려이 가 너비 國土 머것다 시니〈능엄 2:63ㄱ〉. 노 臺  부 믌  구벗도다(曾臺俯風渚)「雨三首」〈두시 12:13ㄴ〉.
도다 주065)
도다
듯하도다. #-+도+다.

【한자음】 위현초상한 범숙사귀진【위현(韋賢)은 한나라 선제(宣帝) 때의 승상이다. 위나라 범저(范睢)의 자가 ‘숙(叔)’인데, 진(秦)나라에 들어가자 소왕(昭王)이 응후(應侯)에 봉했다.】
【언해역】 위현(韋賢)이 처음 한(漢)을 돕는 듯하고, 범숙(范叔)이 이미 진(秦)에 가 있는 듯하도다!
*시 구절 해석 : “위현이 처음에 한나라를 돕는 듯하고, 범숙이 이미 진나라로 귀의한 듯하네.”라는 뜻으로, 위견소가 재상이 되어 황제를 보좌한 성과가 위현과 범숙의 그것과 같다는 칭송이다.

盛業今如此 傳經固絕倫 주066)
절륜(絶倫)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 여러 면에 있어서 매우 두드러지게 뛰어남.

盛 功業이 이제 이 니 주067)
이 니
이와 같으니. 이 -+-+니. 또는 -+으니.
經術을 傳요 주068)
전(傳)요
전함은. 傳#-+오+ㅁ+.
여 주069)
여
진실로. ‘여’은 『두시언해』에서만 쓰였으며, 그밖의 15세기 문헌에서는 ‘여믓’이 쓰였다. ¶여 : 냇 거시 여 너추러 가니 靜一케 호 막오 資賴홀 디니라(有生固蔓延 靜一資隄防)「秋行 ··· 往問」〈두시 7:35ㄱ〉.  門을 지여셔 여 라오미 이실 옷깃 녀오 길 녀매 나가놋다(倚閭固有望 歛衽就行役)「送李校書二十六韻」〈두시 8:19ㄴ〉. 우리 宗族이 여 神秀니 物을 體야  펴믈 됴히 얫도다(吾宗固神秀 體物寫謀良)「登歷下古城員外孫~制此亭다」〈두시 14:33ㄴ〉. 곧 이른 이젯 이리 아니며  녯 이리 아니가 긴 놀앳 소리 激越야 수프를 리텨 가더니 니 지븨 豪華호 여 혜요미 어렵더니(卽事非今亦非古 長歌激越梢林莽 比屋豪華固難數)「曲江三章章五句」〈두시 25:14ㄱ〉. 葵藿  向야 기우리 物性 여 앗디 몯 거시라(葵藿傾太陽 物性固莫奪)「自京 ··· 五百字」〈중간두시 2:33ㄱ〉. 내 事迹 져 본 오히려 슬프도소니 샹녜 사 여 騷屑리로다(撫迹猶酸辛 平人固騷屑)「自京 ··· 五百字」〈중간두시 2:37ㄴ〉. 참조; 여믓 : 녜 두 나 일워 모도온 後에 글워 내니 여믓 시혹 그리 아니면 사미 토와 외다 야 더러우며 앗기다 〈내훈 3:56ㄴ〉.
무레 그츠리로다 주070)
무레 그츠리로다
무리에서 끊어질 것이도다. 즉 뛰어나기 때문에 무리로부터 떨어져 돋보일 것이라는 뜻이다. 물[群]+에 긏-[斷]+으리+도+다. 원문의 ‘絶倫’에 대한 번역이다. 『두시언해』에서 ‘絶倫’에 대한 번역은 ‘무레 絶等-, 뭀 사게 絶等-, 等倫에 그츠리-, 무레 그츠리, 무레 혀나-’ 등으로 나타난다. ‘긏-’이 자음어미를 만나면 ‘긋디’와 같이 8종성법의 제약으로 치음인 ‘ㅊ’과 동일 서열의 전청자 ‘ㅅ’으로 받침이 표기된다. 이때 ‘ㅅ’의 음가는 [t]이다. ‘衆’의 의미의 낱맡은 ‘물, 믈, 므리’가 있다. 〈선가귀감〉(1579)에 ‘무리’가 처음으로 목격된다. ‘물’은 ‘무리’의 뜻으로 15세기에서는 ‘물, 믈, 무리, 므리’의 형태로 쓰였다. ‘믈, 므리, 물, 무리’에 대해서는「贈鄭十八賁」의 ‘靈 芝草ㅣ 뭀 곳다온 거긔 위두 니(靈芝冠衆芳)’〈두시 19:41ㄱ〉 구절의 ‘뭀’ 항목 참조. ¶물 : 楮公의 글스기  무레 絶等니라(褚公書絕倫)「發潭州」〈중간두시 2:24ㄱ〉. 先生은 죄 뭀 사게 絶等도다(先生藝絶倫)「寄張 ··· 三十韻」〈두시 16:22ㄱ〉. 소 면 어루 더울  權勢ㅣ 무레 그츠니(炙手可熱勢絶倫)「麗人行」〈두시 11:18ㄴ〉. 賊鋒을 摧陷요미 다 무레 혀나리라(摧鋒皆絕倫)〈금삼 서安 ··· 待命二首」〈두시 5:53ㄱ〉.

【한자음】 성업금여차 전경고절륜
【언해역】 성한 공업(功業)이 이제 이 같으니, 경술(經術)을 전함은 진실로 무리에서 뛰어날 것이도다!
*시 구절 해석 : “풍성한 공업이 이제 이와 같으니, 경술을 전함은 진실로 뛰어났다.”라는 뜻으로, 위견소가 이룬 업적과 경술(經術)이 비할 바 없이 풍성하다는 칭송이다.

豫樟 주071)
예장(豫樟)
①나무 이름. 옥나무를 일컫는 말. 예장(豫章). ②유능한 인재를 비유하는 말. ③회남(淮南)과 강북(江北)의 경계에 있는 땅 이름. ④누대(樓臺) 이름. 여기서는 ①과 ②의 뜻으로 쓰였다.
深出地 滄海𤄃無津【上句 言資質이 峻㧞 주072)
준발(峻拔)
높이 우뚝하게 솟아올라 있음.
고 下句 言度量 주073)
도량(度量)
너그러운 마음과 깊은 생각, 또는 일을 잘 알아 경영할 성품.
이 宏深다】

豫樟남기 주074)
예장(豫樟)남기
예장나무가. 나모/+이. 15세기 국어에서 ‘나모’[木]. 음운환경에 따라 두 가지 어형으로 나타난다. 첫째 ‘’으로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통합될 때 쓰인다. 둘째, ‘나모’로 공동격조사 ‘와’와 자음으로 시작하는 조사(관형격 ‘ㅅ’ 등), 그리고 휴지가 올 때 쓰인다. 전자는 ‘남, 남, 남, 남로, 남기, 남기라’ 등의 형태로 쓰이고, 후자는 ‘나모와, 나못그티, 나모, 나모 아래’ 등의 형태로 쓰인다.
기피 주075)
기피
깊이. 깊-[深]+이. 파생명사는 ‘기픠’이다. ¶기픠 : 光音天이 한 비 리와 므리 下界예 야 기픠 十一億二萬由旬이러니〈월석 1:39ㄴ〉. 시냇 믌 기픠 아야라 자남즉 더니라(溪水纔尺餘)「漲溪」〈두시 13:19ㄴ〉. 기피 : 禪定을 기피 다 五神通 得리도 보며〈석상 13:20ㄴ〉. 님 혜아리샤 기피 머믈워 시놋다(聖慮窅裴佪)「秋日 ··· 三十韻」〈두시 3:10ㄴ〉.
해셔 주076)
해셔
땅에서. 땅으로부터. ㅎ+애+셔. ‘ㅎ’은 ‘ㅎ말음체언’이다.
냇 주077)
냇
나 있는. 나-[出]+∅#잇-+. ‘나-’[生]. 부사형 ‘-아’와 결합한 ‘나’에 ‘-’이 통합된 어형이다. 이때 ‘나#잇-’이 ‘냇-’으로 모음 축약되었다. 15세기의 ‘-어 잇-’은 ‘-아/어#잇-’형, ‘-앳/엣-’형, ‘-앗/엇-’형이 공존했는데 여기서는 세 번째 유형이 쓰였다.
고 주078)
고
듯하고. (의존명사)#-+고.
滄海 어위여 주079)
어위여
넓어. 어위-[廣]+어. ¶어위- : 그 東山애 열 가짓 祥瑞 나니 좁던 東山이 어위며〈월석 2:28ㄴ〉. 그믈 비루 오직 어위에 시면(祝網但恢恢)「秋日 ··· 三十韻」〈두시 3:11ㄱ〉.
 주080)

가가. [邊]+이. 〈중간본〉에는 ‘이’로 되어 있다.
업슨 주081)
업슨
없은. 없-[無]+은.
도다 주082)
도다
듯하도다. (의존명사)#-+도+다.

【한자음】 예장심출지 창해활무진【위 시구는 자질이 아주 뛰어난 것을 말했고, 아래 시구는 도량이 넓고 깊음을 말했다.】
【언해역】 예장(豫樟)나무가 깊이 땅에서 나 있는 듯하고, 창해(滄海) 넓어 가가 없는 듯하도다!
*시 구절 해석 : “예장 나무는 깊이 땅에서 나온 듯하고, 푸른 바다는 드넓어 끝이 없는 듯하다.”라는 뜻으로, 역시 위견소의 자질과 도량이 깊고 넓다는 칭송이다.

北斗 주083)
북두(北斗)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줄인 말. 초제(醮祭)의 대상(對象)이었다.
喉舌 주084)
후설(後舌)
①목구멍과 혀. ②임금의 말을 아랫사람에게 전하고, 신하의 말을 임금에게 전하는 벼슬아치를 비유하는 말. ③요해지(要害地)나 요충지를 비유한다. ④말재주. 또는 언사(言辭). ⑤조선시대 때 왕명 출납의 일을 맡은, 승지(承旨) 또는 승정원(承政院)의 다른 이름. ⑥『용재총화』 1권 제 17항과 3권 제 22항에 의하면 승정원의 승지를 부르는 말인데 그것은 임금의 지시를 아래로 전달하고 다른 관리들의 말을 임금에게 전달하는 것이 그들의 직책이기 때문에 목구멍과 혀를 써먹는 직책이란 의미로 그렇게 써온 것이다. 여기서는 ①과 ②의 뜻으로 쓰였다.
東方領搢紳 주085)
진신(搢紳)
벼슬아치의 총칭. 진(縉, 搢)은 백관(百官)들의 관복(官服)과 제복(祭服)에 갖추는 홀(笏)을 허리띠에 꽂는다는 뜻이고, 신(紳)은 관복을 입을 때 매는 큰 띠를 말하는데, 곧 허리띠를 매면서 홀을 끼운다는 의미에서 모든 벼슬아치들을 아우르는 말로 쓰인다.
【李固曰陛下ㅣ 有尙書 주086)
상서(尙書)
관직(官職) 이름. 처음 전국戰國)시대 때 설치되었는데, 장서(掌書)라고도 불렀다.
ㅣ 猶天에 有北斗니 北斗ㅣ 爲天喉舌이오 尙書ㅣ 爲陛下喉舌이라니 此 羙左相之辭ㅣ라】

北斗에 喉舌을 알오 주087)
알오
주관하고. #알-+고. ‘알다’는 기원적으로 ‘’과 ‘알다’가 결합된 낱맡로 보이며, 뜻은 ‘주관하다, 관장하다’이다. 『두시언해』에서는 ‘알-’, ‘말-’로 표기된다. ‘알오’의 ‘오’는 ‘고’로 16세기 중반까지 간행된 문헌에서는 ‘ㄹ’말음이나 모음으로 끝나는 형태에 ‘ㄱ’으로 시작하는 형태(-게, -고 등)가 결합할 때에는 ‘ㄱ’ 대신에 후음 ‘ㅇ’로 표기된다. 〈중간본〉에는 ‘알오’로 되어 있다. ¶알- : 大千世界 다 아라 四生 濟渡야〈석상 3:23ㄴ〉. 群公이 各各 마 아랏도다(群公各典司)「夔府書懷四十韻」〈두시 3:4ㄴ〉. 말- : 黃閣애 기리 諫爭호 말리로소니(黃閣長司諫)「送司馬入京」〈두시 23:42ㄱ〉.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9:5ㄱ

方앳 搢紳을 거느롓도다 주088)
거느롓도다
거느러 있도다! 거느리-[領]+어#잇-+도+다. ‘열-’은 자타동 양용동사이다. 15세기의 ‘-어 잇-’은 ‘-아/어#잇-’형, ‘-앳/엣-’형, ‘-앗/엇-’형이 공존했는데 여기서는 세 번째 유형이 쓰였다. ¶열-(자동사) : 諸經論 븓건댄 乘이 열며 어울우미 잇니〈원각 상1-1:17ㄴ〉. 구루미 의 리예 올니 宮扇이 열오(雲移雉尾開宮扇)「秋興五首」〈두시 6:8ㄴ〉 /열-(타동사) : 녯 누느로 色 對호 부텻 知見을 열며〈석상 19:10ㄴ〉. 구기 시서 새 수를 열오(洗杓開新醞)「歸來」〈두시 3:30ㄴ〉. -어 잇- : 比丘ㅣ 蓮ㅅ 곳 우희 안자 잇거늘〈석상 24:16ㄱ〉. 기튼 치위예 곳과 플왜 디어 잇니(餘寒折花卉)「送大~遂停니라」〈두시 8:70ㄱ-ㄴ〉. -앳/엣- : 녀르미여 겨리여  말도 아니코 안잿거시든〈석상 3:38ㄴ〉. 戎事 惣執니 다 侍中의 貂 고잿도다(惣戎皆插侍中貂)「諸將五首」〈두시 5:44ㄱ〉. -앗/엇- : 장 며늘의 道 어덧더니〈소학언해 6:59ㄱ〉. 微妙호 발와 자최와 료 어덧도소니(妙取筌蹄棄)「寄劉 ··· 四十韻」〈두시 20:23ㄱ〉.

【한자음】 배두사후설 동방령진신【이고(李固)가 말하기를, “상서가 있는 것은 하늘에 북두가 있는 것과 같으니, 북두는 하늘의 목구멍과 혀가 된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좌상(左相)의 말을 찬미한 것이다.】
【언해역】 북두(北斗)에 후설(喉舌)을 관장하고 동방(東方)의 진신(搢紳)을 거느리었도다!
*시 구절 해석 : “북두는 후설을 맡았고, 동방에는 진신을 거느렸다.”라는 뜻으로, 조정의 입장을 대변하고 벼슬아치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칭송이다.

持衡 주089)
지형(持衡)
저울을 들고 물건의 무게를 잼. 공명정대하게 인재를 품평(品評)하는 것을 비유한다.
藻鑑 주090)
조감(藻鑑)
사람이나 사물의 겉만 보고도 그 인품이나 호오(好惡)를 분별하는 식견(識見)이나 안목.
성신(星辰)
성수(星宿). 성관직(星官職) 이름. 28수(宿)의 하나. 주조칠수(朱鳥七宿)의 네 번째 별자리로 공두 일곱 개의 별로 구성되어 있다. *〈중간본〉에는 ‘聴’으로 되어 있다.
履上星辰 주091)
정숭(鄭崇)
?~기원전 3?. 전한 부풍(扶風) 평릉(平陵) 사람. 자는 자유(子游)다. 집안은 본래 고밀(高密)의 거족이었는데 할아버지 때 평릉(平陵)으로 옮겼다. 젊어서 군문학사(郡文學史)가 되고 승상대거속(丞相大車屬)까지 이르렀다. 애제(哀帝) 때 대사마(大司馬) 부희(傅喜)가 추천해서 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었다. 여러 차례 직간했다. 부태후(傅太后)의 동생 부상(傅尙)과 애제의 총신 동현(董賢)에 대한 총애가 과도하다고 간언해 죄를 얻었다. 상서령(尙書令) 조창(趙昌)이 무고해 그가 종족들과 내통해 간사스럽다고 고했다. 황제가 묻기를 “그대의 집 문 앞이 시장 같다던데 어떻게 나에게는 끊으려고 하는가?(君門如市 何以欲禁切主上)”고 질책하니, “신의 집 앞은 시장과 같지는 제 마음은 물과 같습니다(臣門如市 臣心如水)”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분노하여 하옥하고 엄단하라 하니, 옥중에서 죽었다. 성신(星辰) : 성수(星宿). 성관직(星官職) 이름. 28수(宿)의 하나. 주조칠수(朱鳥七宿)의 네 번째 별자리로 공두 일곱 개의 별로 구성되어 있다.
鄭崇 주092)
애제(哀帝)
기원전 26~기원전 1. 유흔(劉欣). 전한의 제12대 황제. 원제(元帝)의 손자다. 문사(文辭)와 법률을 좋아했다. 즉위 초 외척 왕씨(王氏)의 권력을 박탈하고 왕망(王莽)과 왕근(王根)을 대사마(大司馬) 직에서 파직했으며, 왕황(王況)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공광(孔光)과 사단(師丹), 하무(何武) 등을 등용해 한전(限田)과 한노비(限奴婢) 제도를 실행에 옮겼다. 얼마 뒤 외척 부씨(傅氏)와 정씨(丁氏)를 기용해 정치를 보좌하도록 하고, 방사(方士)의 말을 들어 진성유태평황제(陳聖劉太平皇帝)로 이름을 고쳤다. 나중에 동현(董賢)을 총애해 포상을 끝도 없이 내려 조정이 날로 쇠퇴해 갔다. 7년 동안 재위했다. 정숭(鄭崇) : ?~기원전 3?. 전한 부풍(扶風) 평릉(平陵) 사람. 자는 자유(子游)다. 집안은 본래 고밀(高密)의 거족이었는데 할아버지 때 평릉(平陵)으로 옮겼다. 젊어서 군문학사(郡文學史)가 되고 승상대거속(丞相大車屬)까지 이르렀다. 애제(哀帝) 때 대사마(大司馬) 부희(傅喜)가 추천해서 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었다. 여러 차례 직간했다. 부태후(傅太后)의 동생 부상(傅尙)과 애제의 총신 동현(董賢)에 대한 총애가 과도하다고 간언해 죄를 얻었다. 상서령(尙書令) 조창(趙昌)이 무고해 그가 종족들과 내통해 간사스럽다고 고했다. 황제가 묻기를 “그대의 집 문 앞이 시장 같다던데 어떻게 나에게는 끊으려고 하는가?(君門如市 何以欲禁切主上)”고 질책하니, “신의 집 앞은 시장과 같지는 제 마음은 물과 같습니다(臣門如市 臣心如水)”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분노하여 하옥하고 엄단하라 하니, 옥중에서 죽었다.
哀帝 주093)
전선(銓選)
인물을 전형(銓衡)하여 골라 뽑음. 애제(哀帝) : 기원전 26~기원전 1. 유흔(劉欣). 전한의 제12대 황제. 원제(元帝)의 손자다. 문사(文辭)와 법률을 좋아했다. 즉위 초 외척 왕씨(王氏)의 권력을 박탈하고 왕망(王莽)과 왕근(王根)을 대사마(大司馬) 직에서 파직했으며, 왕황(王況)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공광(孔光)과 사단(師丹), 하무(何武) 등을 등용해 한전(限田)과 한노비(限奴婢) 제도를 실행에 옮겼다. 얼마 뒤 외척 부씨(傅氏)와 정씨(丁氏)를 기용해 정치를 보좌하도록 하고, 방사(方士)의 말을 들어 진성유태평황제(陳聖劉太平皇帝)로 이름을 고쳤다. 나중에 동현(董賢)을 총애해 포상을 끝도 없이 내려 조정이 날로 쇠퇴해 갔다. 7년 동안 재위했다.
時예 爲尙書야 數進見諌諍호 每曵革履어든 上曰我ㅣ 識鄭尙書의 履聲이라 니 此 言見素ㅣ 爲吏部侍郞야 銓選 주094)
평윤(平允)
①공평(公平)하고 정당(正當)함. ②성정(性情)이 평이(平易)한 것을 이르는 말. 여기서는 ①의 뜻으로 쓰였다. 전선(銓選) : 인물을 전형(銓衡)하여 골라 뽑음.
平允 주095)
권대(眷待)
사람을 대접하는 태도가 애정이 크고 관대(寬待)함. 평윤(平允) : ①공평(公平)하고 정당(正當)함. ②성정(性情)이 평이(平易)한 것을 이르는 말. 여기서는 ①의 뜻으로 쓰였다.
고 被上眷待 주096) 권대(眷待) : 사람을 대접하는 태도가 애정이 크고 관대(寬待)함.
也ㅣ라】

저울 가져셔 주097)
가져셔
가져서. 가지-[持]+∅+셔. 〈중간본〉에는 ‘가져서’로 되어 있다. ¶가지- : 後에 아뫼나  보라 가지던 사토 다 마 佛道 일우며〈석상 13:51ㄱ〉. 님 恩惠로 몬져 와 後에 세 번 鐵節을 가지니(主恩前後三持節)「諸將五首」〈두시 5:47ㄱ〉.
 鑑 주098)
 감(鑑)
맑은 거울을. 맑은 귀감을. -[淡]+ 鑑+. 원래의 ‘ 보’에서 교정된 것이다.
머믈우고 주099)
머믈우고
머물게 하고. 머믈-[停]+우+고. ¶머믈우- : 소 가매 다혀 겨샤 목수믈 머믈우들 몯시니〈월석 10:15ㄴ〉. 群公이 모다 힘니 님 혜아리샤 기피 머믈워 시놋다(群公紛戮力 聖慮窅裴佪)「秋日 ··· 三十韻」〈두시 3:10ㄴ〉.
신 소리 들여 주100)
들여
들려. 듣-[聞]+이+어. ‘들이-’는 ‘듣-’의 사동사이다. ‘들이-’는 사동사와 피동사가 같은 형태인 동사이다. ¶들이-(사동) : 일후믈 간 들이시면〈석상 9:15ㄱ〉. 약 야 먹곡 내 將 늘거셔 아 여곰 들이디 아니호리라(採藥吾將老 童兒未遣聞)「秦州雜詩十七首」〈두시 13:41ㄴ〉 들이-(피동) : 시울  소리 잣 안히 다 들이더라〈석상 3:14ㄱ〉. 能 이리 重譯 해 들이니(能事聞重譯)「奉贈太 ··· 二十韻」〈두시 19:14ㄱ-15ㄱ〉.
주101)
별의. ‘볈’의 잘못이다. 〈중간본〉은 ‘볈’로 되어 있다.
서리예 주102)
서리예
사이에. 서리+예. ‘서리’는 일반적으로 ‘사이’로 해석하나 원래는 ‘사물이 뭉쳐있는 틈 사이’의 의미이다. 즉 ‘’는 ‘둘 가운데’, ‘서리’는 ‘여럿 가운데’의 뜻이다. ‘-예’는 ‘ㅣ’나 ‘ㅣ’계 하향 중모음 뒤에 붙는 처소의 부사격조사이다. ¶狄人ㅅ 서리예 가샤 狄人이 외어늘〈용가 4〉. 差池히 組冕 화 니 다봇 서리예셔 니러나니(差池分組冕 合沓起蒿萊)「秋日 ··· 三十韻」〈두시 3:10ㄱ〉.
올아 주103)
올아
올라. 오-[登]+아. ‘오다’는 모음어미와 연결될 때 ‘ㄹ’이 덧생기는 용언에 해당한다. ¶즉자히 神通力으로 樓 우희 라 올아 耶輸ㅅ 알 가 셔니〈석상 6:3ㄱ〉. 나조 河陽ㅅ 리예 올아가라(暮上河陽橋)「後出塞五首」〈두시 5:30ㄴ〉.
가놋다 주104)
가놋다
가는구나. 가-[去]++오+ㅅ+다.

【한자음】 지형류조감 청리상성신【정숭(鄭崇)이 애제(哀帝) 때 상서(尙書)가 되어 여러 차례 나아가 간쟁(諫諍)했는데, 항상 가죽신을 끌고 나왔다. 군주가 말하기를, “내가 정 상서(鄭尙書)의 신발 소리를 알겠도다.”라고 했다. 이것은 위견소(韋見素)가 이부 시랑(吏部侍郞)이 되어 전선(銓選)이 공평정대하여 임금으로부터 환대를 받은 일을 말한 것이다.】
【언해역】 저울 가져서 맑은 거울을 머물게 하고, 신 소리를 들려 별 사이에 올라가는구나!
*시 구절 해석 : “저울을 가져서 맑은 거울을 머물게 했고, 신발 소리를 들리며 별자리에 올랐다.”라는 뜻으로, 관리를 뽑을 때도 공평정대했고, 항상 충간을 드려 게으름이 없었다는 칭송이다.

獨步才超古 餘波德照鄰

오 주105)
오
혼자. 혼자. 홀로. 다른 사람과 어울리거나 함께 하지 않고 홀로인 상태. 정음 초기 문헌 중에서도 〈용비어천가〉(1445~1447)에는 ‘’로 쓰였던 것이 〈석상 〉(1447)부터는 ‘오’로 쓰였다. 16세기 문헌에는 ‘호, 호은자, 호온자’ 형도 나타난다. 〈중간본〉에는 ‘오아’로 되어 있다. ¶ : 셔 긔벼를 알  나가샤 모딘 도 믈리시니다〈용가35〉. 오 : 뫼 사 믈리시고 오 기픈 道理 더시니〈석상 3:19ㄴ〉. 天機ㅣ 사 이레 갓가오니 오 셔셔 여러 가짓 시름노라(天機近人事 獨立萬端憂)「獨立」〈두시 3:26ㄴ〉/ 호 : 叔咸이 호셔 侍病며 어 大便을 맛보니 더니〈속삼, 효22ㄱ〉. 호은자 : 내 호은자 아도 이긔요리라〈飜朴55ㄱ〉. 호온자 :  하  호온자 가  보내놋다〈백련 3ㄴ〉.
건 주106)
건
걷는. 걷-[步]+. 여기서는 ‘나아가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죄 주107)
죄
재주.
주108)
옛.
사게 超越니 주109)
사게 초월(超越)니
사람을 초월하니. 『두시언해』에서 ‘초월(超越)다’는 여기와 같이 그대로 쓰인 경우와 ‘건나가다’로 번역된 경우가 있다. ¶건나가- : 긴 개 갈 니 人寰을 可히 건나가리로다(長翮如刀劍 人寰可超越)「畵鶻行」〈두시 16:37ㄴ〉.
나 주110)
나
남은. 남-[餘]+.
恩波ㅅ 德이 주111)
은파(恩波)ㅅ 덕(德)이
은혜의 물결의 덕이. 恩波+ㅅ 德+이. 〈중간본〉에는 ‘㤙波ㅅ 德이’로 되어 있다.
이우제 주112)
이우제
이웃에. 이웆[隣]+에. ¶네 識은 오 잇도소니 오면 이우지 업거니 界 므스글 브터 셔리오〈능엄 3:37ㄱ〉. 武侯의 祠堂이 기리 이우제 갓가오니  體옛 님금과 臣下 祭祀 가지로 놋다(武侯祠屋長鄰近 一體君臣祭祀同)「詠懷古跡二首」〈두시 6:32ㄱ〉.
비취옛도다 주113)
비취옛도다
비추고 있도다. 비취-[照]+어#잇-+도+다. ‘비취-’는 “빛을 내는 대상이 다른 대상에 빛을 보내어 밝게 하다”라는 뜻의 타동사로 오늘날의 ‘비추-’에 대응된다. 15세기 국어의 ‘비취-’는 자타동 양용동사이다. ¶비취-(자동사) : 世尊하 如來 甚히 쉽디 몯야 功德 智慧ㅅ 젼로 頂上肉髻옛 光明이 빗내 비취시며(世尊하 如來ㅣ 甚希有샤 以功德智慧故로 頂上肉髻ㅣ 光明이 顯照시며)〈석상 21:46ㄴ〉. 峽엣 구루믄 長常 바 비취옛고(峽雲常照夜)〈두시 3:42ㄱ〉. 비취-(타동사) : 放光샤 四天王과 淨居天에 니르리 비취시니(便放身光照四天王 乃至淨居不令人見)〈석상 3:25ㄱ〉. 바 거두니 도로 나그내 비취오(捲簾還照客)「七月夜對月」〈두시 12:7ㄱ〉.

【한자음】 독보재초고 여파덕조린
【언해역】 혼자 걷는 재주가 옛 사람을 초월하니, 남은 은파(恩波)의 덕이 이웃에 비추고 있도다!
*시 구절 해석 : “홀로 나가는 재능은 옛사람을 넘어섰고, 남은 은혜의 물결은 덕이 이웃에까지 비췄다.”라는 뜻으로, 뛰어난 재주와 남을 배려하는 덕을 칭송했다.

주113_1)
*〈중간본〉에는 ‘聦’으로 되어 있다.
明過管輅 주114)
관로(管輅)
209~256. 삼국시대 위(魏)나라 평원(平原) 사람. 술사(術士). 자는 공명(公明)이다. 어릴 때부터 별자리 살피기를 좋아했다. 성장하자 풍각(風角)과 점상(占相)에 더욱 정통해졌다. 점을 치면 대개 적중했다고 한다. 청하태수(淸河太守) 화표(華表)가 불러 문학연(文學掾)을 삼았다. 기주자사(冀州刺史) 배휘(裵徽) 아래에서 문학종사(文學從事)로 있었다. 제왕(齊王) 조방(曹芳) 정시(正始) 9년(248) 수재(秀才)로 천거되었다. 일찍이 이부상서 하안(何晏), 위군태수(魏郡太守) 종육(鍾毓)과 『역(易)』에 대해 논쟁했는데, 하안이 “요점만 말해 번거롭지 않다.”라고 칭찬했다. 고귀향공(高貴鄕公) 정원(正元) 2년(255) 소부승(少府丞)에 이르렀다. 용모가 추하고 술을 좋아해서 언행에 거친 면이 있었지만, 『주역』과 수학에 정통하고 관상술에 능했다. 조조(曹操)가 태사로 봉하려 했지만 사양했다. 신출귀몰하게 앞날을 알아맞히어 노숙(魯肅)과 하후연(夏侯淵), 조상(曹爽)의 죽음과 허도(許都)의 대화재를 예언했다. 자신이 48살에 죽을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 나이에 죽었다. 재주는 높지만 장수하지 못하고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尺牘倒陳遵 주115)
진준(陳遵)
?~?. 전한 말기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 자는 맹공(孟公)이다. 젊어서는 방종해 얽매임이 없었고, 서법에도 뛰어났다. 애제(哀帝) 말에 처음으로 경조사(京兆史)와 울이령(鬱夷令)에 올랐다.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자 교위(校尉)가 되었는데, 조붕(趙朋), 곽홍(霍鴻) 등의 위세를 진압해 가위후(嘉威侯)에 봉해졌다. 왕망이 그의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하남태수(河南太守)에 임명했다. 경시(更始) 때 대사마호군(大司馬護軍)이 되었는데, 흉노(匈奴)에 사신을 갔을 때 마침 경시가 패망하자 삭방(朔方)에서 머물러 관망하다가 피살당했다.
【魏ㅅ 管輅ㅣ 善天文地理야 無不精微니라 漢ㅅ 陳遵이 贍扵文辭야 善與人尺牘 주116)
척독(尺牘)
서간(書簡)으로, 길이가 한 자 가량되는 글을 적은 널빤지를 말한다. 척서(尺書). 척소(尺素). 척저(尺楮).
더라 尺牘 書板이니 長一尺이라】

聦明호 주117)
총명(聦明)호
총명함은. 聰明#-+오+ㅁ+.
管輅ㆎ게 넘고 주118)
관로(管輅)ㆎ게 넘고
관로를 능가하고. 管輅+게 넘-[超]+고. ¶行이 俗애 넘디 아니며〈영가 상:20ㄴ〉. 彦昭 玉ㅅ 갑시라와 넘고 郭振 通泉로셔 니러나니라(彥昭超玉價 郭振起通泉)「陳拾遺故宅」〈두시 3:64ㄴ〉.
尺牘요 주119)
척독(尺牘)요
척독함은. 尺牘#-+오+ㅁ+.
陳遵을 갓고로혀리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9:5ㄴ

로다
주120)
갓고로혀리로다
거꾸러뜨릴 것이도다. 거꾸로 당길 것이다. 갓골-[倒]+오(부사화파생접미사)#혀-+리+도+다. 또는 갓고로 혀-[引]+리+도+다. ‘갓골-’에서 파생한 파생부사 ‘갓고로’는 ‘디다, 혀다, -왇-, -와티-’ 등과 결합하여 동사로도 쓰인다. ‘갓골-’은 원래 ‘갓-(갓-)’인데. 이 형태는 『두시언해』는 물론 15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용례를 더러 확인할 수 있다. ‘갓-’의 사동사 ‘갓오-’는 『두시언해』만에서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갓고로혀다’의 ‘혀’는 접미사일 가능성과 동사 ‘-’일 가능성이 모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전자로 보는데 ‘갓고로혀다’는 『두시언해』의 이 용례만 보인다. ‘혀-’는 초기 문헌에는 일반적으로 ‘-’가 쓰였으나 ‘혀-’와 혼기되다가 〈원각경언해〉(1465)부터 ‘혀-’로 통일되어 쓰인다. ¶갓- : 四倒 갓오미 외야〈월석 20:96ㄱ〉. 顚倒 갓 씨라〈능엄 1:80ㄴ〉. 웃 對答 갓오 이 對答 正니〈능엄 4:127ㄱ〉. 일후미 筆受ㅣ니 天竺ㅅ 마리 이와 갓 버거 모로매 그를 두르혀고〈원각 하2-1:48ㄱ〉. 倒 갓 시라〈육조 하:22ㄴ-1〉. 어즈러이 폣 긴 소리 갓오(紛披長松倒)「九成宮」〈두시 6:2ㄴ〉. 갓오- : 爛慢히 곳다온 酒樽을 갓오리로다(爛熳倒芳樽)「寄高適」〈두시 21:23ㄴ〉. 갓로 :  닐오 옷 아래 조 야딜 갓로 닙고〈월석 25:22ㄴ〉. 오 갓로 니버 도로 술위 머여 타 와(倒衣還命駕)「重過何氏五首」〈두시 15:11ㄴ〉. 갓골- : 倒 갓골 도〈신류 하:17ㄱ〉. 어즈러이 폣 긴 소리 갓골오(紛披長松倒)「九成宮」〈두시 6:2ㄴ〉. 갓고로 : 어리여 迷惑야 邪曲 信야 갓고로 볼〈월석 9:57ㄴ〉. 긄  三峽 므를 갓고로 흘리리오(詞源倒流三峽水)「醉歌行」〈두시 8:30ㄴ〉. 갓고로디- : 魔王이며 제 귓것히 다 갓고로디니라〈월석 4:14ㄴ〉. 버미 갓고로딘 며 龍이 업더딘 야 가나모 서리예 롓니 믌 그제와 핏 點을 가매 드리우노라(虎倒龍顚委榛棘 淚痕血點垂胸臆)「柟木 ··· 拔歎」〈두시 6:41ㄴ〉. 갓고로왇- : 文殊ㅣ 老維摩 다 딜어 갓고로와시니〈남명 상:43ㄴ〉. 갓고로와티- : 維摩 갓고로와툐 어루 分別야 붓그러움 시소미 어려울 시라〈남명 상:44ㄱ〉.

【한자음】 총명과관로 척독도진준【위나라의 관로(管輅)가 천문지리에 뛰어나 정밀하지 않음이 없었다. 한나라의 진준(陳遵)이 문장에 뛰어나서 사람들과 편지를 잘 주고받았다. ‘척독(尺牘)’은 서판이니 길이가 1척이다.】
【언해역】 총명(聦明)함은 관로(管輅)를 넘고 척독(尺牘)함은 진준(陳遵)을 거꾸로 당길 것이도다!
*시 구절 해석 : “총명함은 관로를 넘었고, 편지 쓰는 능력은 진준을 능가했다.”라는 뜻으로, 총명함과 서간(書簡)을 쓰는 능력이 아주 훌륭했음을 칭송했다.

豈是池中物 由來席上珍【周瑜ㅣ 曰蛟龍 주121)
교룡(蛟龍)
고대 전설상에 나오는 물속에 사는 두 종류의 동물. 전설에 따르면 교는 능히 홍수를 일으키고 용은 능히 비구름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이 得雲雨면 終非池中物이니라 禮記 주122)
예기(禮記)
책이름. 49편. 유가의 5경(經) 중 하나. 전한(前漢) 대성(戴聖)이 편집하고, 후한(後漢) 마융(馬融)이 보집(補輯)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이 예에 관하여 논한 내용을 수록했다. 「곡례(曲禮)」 「단궁(檀弓)」 「왕제(王制)」 「월령(月令)」 「예운(禮運)」 「예기(禮器)」 「내칙(內則)」 「학기(學記)」 「악기(樂記)」 「대학(大學)」 「중용(中庸)」 「투호(投壺)」 등의 편이 유명하다. 교육, 예절, 음악, 농사, 관혼상제 등 고대의 문화 전반에 관하여 유가의 입장에서 기록함으로써 유가의 중요한 경전이 되었다. 『주례(周禮)』, 『의례(儀禮)』와 더불어 삼례(三禮)로 불리었다. 특히 「대학」과 「중용」편은 따로 분리되어 송대 주희(朱熹)에 의해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함께 사서(四書)에 편입되었다.
예 儒有席上之珍이니라】

엇뎨 주123)
엇뎨
어찌. 후행하는 ‘物이리오’와 호응한다. 『두시언해』에서 ‘엇뎨’와 비슷한 의문사로 ‘엇디’도 쓰였는데 전자는 ‘何, 豈, 寧, 焉, 曷, 安, 胡’ 등의 번역으로 쓰였고 후자는 주로 ‘那, 豈, 奈何’ 등의 번역으로 쓰였다. 이와 관련된 낱맡로 ‘엇디’로 『두시언해』에서 보인다.
주124)
연못.
가온 주125)
가온
가운데의. 가온+ㅅ.
物이리오 주126)
물(物)이리오
물이겠는가? 物+이+리+오. ‘-오’는 선행하는 ‘엇뎨’와 호응한다. 『두시언해』에서 ‘-리오’는 주로 수사의문문에 쓰인다.
녜록브터 오매 주127)
녜록브터 오매
예로부터 옴에. 옛날부터. 녜+로+ㄱ#븥-+어 오+오+ㅁ+애. ¶븓-(仗) : 길히 窮迫야 버들 븓노라(途窮仗友生)「客夜」〈중간두시 2:28ㄱ〉. (著) : 프른 매 주으려 사게 븓니라(蒼鷹飢著人)〈금삼 서安 ··· 待命二首」〈두시 5:53ㄱ〉. (憑) :  節制使ㅅ 尊嚴을 븓고져 놋다(亦憑節制尊)「客居」〈두시 6:49ㄴ〉. (依) : 本來 스싀로 迦葉을 븓노니(本自依迦葉)「秋日 ··· 一百韻」〈두시 20:13ㄱ〉. (傍) : 모미 주글 니언 權要 븓니라(殺身傍權要)「三韻三篇」〈두시 25:15ㄴ〉. (火) : 셔울히 다시 블 븓디 아니야(京都不再火)「徃在」〈중간두시 4:24ㄱ〉. (燃) : 뫼히 퍼러니 곳비치 블 븓 도다(山靑花欲燃)〈중간두시 10:17ㄱ〉. (着) : 그윗 것과 아 거시 제이곰 해 브터셔(公私各地著)「行官 ··· 水歸」〈두시 7:36ㄴ〉.
주128)
자리. 돇[席]. 현대국어의 ‘돗자리’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우흿 주129)
우흿
위의. 우ㅎ+의+ㅅ. ‘우ㅎ’은 ‘ㅎ’말음체언이고, ‘의’는 속격조사이다. 〈중간본〉에는 ‘우’으로 되어 있다.
珍寶ㅣ니라 주130)
진보(珍寶)ㅣ니라
진보이니라. 진보이다. 珍寶+이+니+라. ‘-니라’는 화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진술할 때 쓰는 종결어미이다.

【한자음】 기시지중물 유래석상진【주유가 말하기를, “교룡이 운우(雲雨)를 얻으면 마침내 연못 속 동물이 아니다.”라고 했다. 『예기』에, “선비는 자리 위의 진귀한 보배다.”라고 말했다.】
【언해역】 어찌 이 못 가운데의 물(物)이겠는가? 예로부터 옴에 자리 위의 진보(珍寶)이니라.
*시 구절 해석 : “어찌 이 연못 가운데 동물이리요, 이로부터 자리 위의 진귀한 보배로다.”라는 뜻으로, 재능이 탁월해 두각을 드러내어 좌중의 중요한 인물이라는 칭송이다.

廟堂知至理 風俗盡還淳

廟堂 주131)
묘당(廟堂)
①태묘(太廟)의 전당(殿堂). ②조정(朝廷). 임금이 조례(朝禮)를 받고 정사(政事)를 논의하는 전당(殿堂). ③조정(朝廷). 군주를 수장으로 삼은 중앙정부(中央政府)를 가리키는 말. ④조정(朝廷). 제왕(帝王)을 대신하는 칭호. ⑤태묘(太廟)와 명당(明堂). 여기서는 ③의 뜻이다.
애셔
주132)
묘당(廟堂)애셔
묘당에서. 廟堂+애+셔.
至極히 주133)
지극(至極)히
지극히. 아주 잘. 至極+히.
다료 주134)
다료
다스림을. 다리-[理]+오+ㅁ+. ¶네 다 轉輪聖王이 외야 七寶千子 가져 四天下 다리리어늘 엇뎨 마리 갓고 즐기다〈석상 3:23ㄱ〉. 社稷 다리 콰 과 구룸 몬 期會예(社稷經綸地 風雲際會期)「夔府書懷四十韻」〈두시 3:2ㄴ〉.
아노니 주135)
아노니
아니. 알-[知]++오+니.
風俗이 다 도로 淳厚 주136)
순후(淳厚)
돈후(敦厚)하고 질박(質朴)함.
리로다
주137)
순후(淳厚)리로다
순후할 것이도다. 淳厚#-+리+도+다.

【한자음】 묘당지지리 풍속진환순
【언해역】 묘당(廟堂)에서 지극(至極)히 다스림을 아니, 풍속이 다 도로 순후(淳厚)할 것이도다!
*시 구절 해석 : “묘당에서 지극히 다스림을 아노니, 풍속이 모두 순후함으로 돌아온다”라는 뜻으로, 조정이 정치를 잘해 세상의 여론과 인심이 돈독하고 질박하게 바뀌고 있다는 말이다.

才傑俱登用 愚蒙 주138)
우몽(愚蒙)
우몽(愚矇). 어리석고 몽매(蒙昧)해 분명하지 않음.
隱淪 주139)
은륜(隱淪)
①신인(神人) 등급(等級)의 하나. 보통 신선(神仙)을 가리킨다. ②은거(隱居)함. 자의 타의로 세상을 등지고 숨어서 지낸다는 말이다. ③은자(隱者)를 가리키는 말. ④몸을 감추어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함. 여기서는 ②의 뜻이다.
【此下 皆ㅣ 自叙ㅣ라】

才傑 주140)
재걸(才傑)
재주가 걸출한. 才傑#-+ㄴ.
사 주141)
사
사람은. 사+.
다 올아 이거늘 주142)
이거늘
쓰이거늘. -[用]+이-+거+늘. 15세기에 ‘-’는 ‘사용하다[用], (맛이) 쓰다[苦]’, ‘쓰-’는 ‘(글을) 쓰다[書], (갓을) 쓰다[冠]’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사용하다) : 俱夷 묻샤 므스게 시리〈월석 1:10ㄴ〉. 朝廷이 忽然히 哥舒翰 將軍을 시니(朝廷忽用哥舒將)「喜聞 ··· 五首」〈두시 5:20ㄱ〉. -(맛이 쓰다) : 게으르며  업시워 法엣 마 디 아니야〈월석 23:6ㄴ〉. 뉘 엿귀 다 니뇨 로미 나 도다(誰謂荼苦甘如薺)「寄狄明府博濟」〈두시 8:18ㄱ〉. 쓰-(글을 쓰다) : ㅇ 입시울쏘리 아래 니 쓰면 입시울가야소리 외니라〈훈언 12ㄱ〉. 나히 아호배 굴근 字 스니(九齡書大字)「壯遊」〈중간두시 2:38ㄱ〉. 쓰-(갓을 쓰다) : 冠 쓰 거시니〈석상 3:5ㄴ〉.  조초 葛巾애 빈혀 고자 스고(隨意簪葛巾)「早發」〈중간두시 1:50ㄱ〉.
어린 주143)
어린
어리석은. 어리-[愚]+ㄴ. 15세기에 명사형은 ‘어룜’과 ‘어륨’이 공존하였다. ¶乃終내 得디 몯니 어리여 미혹야 邪曲 보 信〈석상 9:36ㄴ〉. 小臣 어리고 鈍야 能 배 업소니 朝廷이 아라 시 祿秩 닙오라(小臣魯鈍無所能 朝廷記識蒙祿秩)「憶昔二首」〈두시 3:62ㄴ〉.
사 주144)
사
사람은. 사+.
오직 수머 주145)
수머
숨어. 숨-[隱]+어.
뎻노라 주146)
뎻노라
꺼져 있노라. -[淪]+디+어#잇-++오+라. ‘디다’는 ‘다’에 ‘디다’가 결합된 동사로 볼 수 있다. ¶다(자동사) : 브리 香樓에 다라 고 아니 브틀〈석상 23:38ㄴ〉. 낟 불휘 져기 요 아니 환 氣運은 매 디 아니다(穀根小蘇息 沴氣終不滅)「喜雨」〈두시 12:10ㄴ〉. 다(타동사) : 내 香水로 브를 고〈석상 23:46ㄱ〉. 뫼햇 귓거슨 브를 부러 거 브어븨 사 바미 다도록 말놋다(山鬼吹燈滅 廚人語夜闌)「山館」〈중간두시 2:12ㄴ〉. 디- : 帝釋이와 金甁엣 므를 븟니 브리 디거늘〈석상 23:47ㄱ〉. 一生애 서르 뎻노니 時節ㅅ 物은 제 蕭森얏도다(生涯相汩沒 時物自蕭森)「風疾이어~三十六韻이라」〈두시 3:14ㄴ〉.

【한자음】 재걸구등용 우몽단은륜【이 이하는 모두 두보가 자신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언해역】 재걸(才傑)한 사람은 다 올라가 쓰이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오직 숨어 꺼져 있노라.
*시 구절 해석 : “재주 있는 인걸(人傑)은 모두 등용되었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단지 숨어 지낸다.”라는 뜻으로, 자신의 재주가 부족해 등용되지 못하고 지낸다는 말이다.

長𡖖多病久 子夏索居頻司馬相如 주147)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기원전 117. 전한 촉군(蜀郡) 성도(成都) 사람. 자는 장경(長卿)이고, 사부(辭賦)를 잘 지었다. 어렸을 때 독서와 검술을 좋아했으며, 전국시대의 인상여(藺相如)를 사모하여 자기의 이름을 상여로 바꾸었다. 임공(臨邛) 땅에서 탁왕손(卓王孫)의 딸인 탁문군(卓文君)과 만나 성도(成都)로 달아나 혼인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처음에 경제(景帝)를 섬겨 무기상시(武騎常侍)가 되었는데, 병으로 사직했다. 양(梁)으로 와서 매승(枚乘)과 교유했다. 무제(武帝)에게 〈상림부(上林賦)〉를 지어 바쳤다. 이것을 읽고 재능이 있다고 여겨 불러 낭(郞)으로 삼았다. 나중에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사신으로 서남이(西南夷)와 교섭하여 공을 세웠다. 효문원령(孝文園令)에 임명되었지만 병으로 사임했다. 작품의 풍격이 다양하고 사조(詞藻)가 아름다웠으며, 한부(漢賦)의 제재와 묘사 방법을 보다 풍부하게 하여 부체(賦體)를 한나라의 대표적 문학 형태로 자리하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 밖에 「대인부(大人賦)」가 있다.
의 字長𡖖이니 有消渴病 주148)
소갈병(消渴病)
한의학(韓醫學)에서의 병(病) 이름. 목이 마르고 소변이 자주 나오며 수척해지는 증상을 보인다. 당뇨병과 누붕증(尿崩症) 등을 포함한다.
다 禮記子夏 주149)
자하(子夏)
기원전 507~기원전 420?. 전국시대 위(衛)나라 사람. 진(晉)나라 온(溫) 사람이라고도 한다. 성명은 복상(卜商)이다. 공자(孔子)의 제자로, 공자보다 44살 연하였다.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이다. 공자가 죽은 뒤에 위나라 문후(文侯)에게 초빙되어 스승이 되었지만 공자의 죽음을 슬퍼하여 실명(失明)했다고 한다(또는 아들의 죽음 때문에 슬피 울어 실명했다고도 한다.) 서하(西河)에서 강학(講學)했다. 이극(李克)과 오기(吳起),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 등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배웠다. 위문후(魏文侯)가 그를 스승으로 섬겨 예(藝)를 배웠다. 학문은 시와 예에 통했고, 공자의 『춘추(春秋)』를 전공하여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의 원류를 이루었다. 주관적 내면성을 존중하는 증자(曾子) 등과 달리 예(禮)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하는 것이 특색이다. 『논어(論語)』에 그의 말이 적지 않게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 공문(孔門)에서의 위치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시서(詩序)』를 썼다고 전한다.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2년(1009) 동아공(東阿公)에 추증되었다.
ㅣ 曰吾ㅣ 離群索居 주150)
삭거(索居)
친구와 사귀지 않고 떨어져 있음. 쓸쓸하게 홀로 있음.
ㅣ 乆矣로라】

長𡖖 주151)
장경(長𡖖)의
장경이. 長𡖖+의. ‘-의’는 내포문의 의미상 주어를 가리키는 속격조사이다.
주152)
많은. 하-[多]+ㄴ.
病이 오라고 주153)
오라고
오래고. 오라-+고.
子夏 주154)
자하(子夏)의
자하가. 子夏+의. ‘-의’는 내포문의 의미상 주어를 가리키는 속격조사이다.
흐러 주155)
흐러
흩어져. 흗-[散]+어. ‘흩-→흗-’은 8종성법의 제약 때문이다. ¶五百 比丘 리고 흐러 나가니〈석상 21:31ㄴ〉. 不散 흗디 아니 씨라〈월석 10:63ㄴ〉.  타 忽然히 져믄  이 야  발 흐러 瞿塘엣 돌 소사디게 호라(騎馬忽憶少年時 散蹄迸落瞿塘石)「醉爲 ··· 相看」〈두시 3:52ㄱ〉. 손 흗거든 層層인 城ㅅ 나조 여 글 네게 엇뎨려뇨(客散層城暮 狐狸奈若何)「舟前小鵝兒」〈두시 17:22ㄱ〉.
사로미 주156)
사로미
사는 것이. 삶이. 살-[居]+오+ㅁ+이.
조라 주157)
조라
자주이다. 자조[數]+이+라.

【한자음】 장경다병구 자하색거빈【사마상여의 자가 장경이니, 소갈병이 있었다. 『예기』에서, “자하가 말하기를 ‘내가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산 것이 오래되었다.’”고 말했다.】
【언해역】 장경(長卿)이 많은 병이 오래 되고, 자하(子夏)가 흩어져 사는 것이 자주이다.
*시 구절 해석 : “사마상여는 오랫동안 많은 병을 앓았고, 자하는 홀로 사는 것이 자주였었네.”라는 뜻으로, 사마상여가 병이 많았고 자하가 자주 홀로 산 것처럼 두보 자신의 처지도 비슷하다는 말이다.

주157_1)
*〈중간본〉에는 ‘囬’로 되어 있다.
首驅流俗 生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9:6ㄱ

涯似衆人【似衆人은 ㅣ 言其貧賤이 與齊民 주158)
제민(齊民)
①평민(平民). ②백성(百姓)을 잘 다스림. 여기서는 ①의 뜻이다.
으로 同也ㅣ라】

流俗애 몰여뇨 주159)
몰여뇨
몰려다님을. 몰리-[驅]+어#-+니-+오+ㅁ+. ¶目連이 노대 그 어미 몰여 드러가며 블러 닐오〈월석 23:87ㄴ〉. 며  秦人 兵士 受苦왼 사호 모 몰여뇨미 가히와 괘 다디 아니도다(况復秦兵耐苦戰 被驅不異犬與鷄)「兵車行」〈중간두시 4:2ㄴ〉.
머리 주160)
머리
머리. 15세기 국어에서 ‘머리[頭], 머리털[髮]’을 뜻하는 ‘머리’와 ‘멀리’를 뜻하는 ‘머리’는 동음이의어의 관계에 있었다. ¶머리(頭) : 頭는 머리라〈훈언 14ㄴ〉. 내 머리 도라 라 로 여(莫令回首地)「收京」〈두시 5:9ㄱ〉. 이웃 짓 사미 담머리예 야셔(隣人滿墻頭)「羌村三首」〈두시 2:66ㄱ〉. 머리(髮) : 부톄 阿難일 시기샤 羅睺羅 머리 갓기시니〈석상 6:10ㄱ〉. 도라오매 미천 머리 다 셰도다(及歸盡華髮)「北征」〈두시 1:5ㄱ〉. 머리(遠) : 그제 그 리 粥 가져 드러 머리 조 바다 좌시고〈석상 3:41ㄱ〉. 비록 나그내로 브터 머리 와슈미 셜우나(雖傷旅寓遠)「發秦州」〈두시 1:14ㄴ〉. 梁國ㅅ 江揔ㅣ 지븨 도라오니 오히려 머리 거믄 고 머리 붓그려노라(遠愧梁江揔 還家尙黑頭)「晩行口號」〈두시 2:29ㄱ〉.
도로혀 주161)
도로혀
돌려. 돌-+오+혀-+어. ‘도로혀’는 ‘돌리다’의 뜻과 ‘도리어’의 뜻이 있다. 이에 반해 ‘도혀’는 ‘도리어’의 뜻으로만 쓰인다. 그러나 『두시언해』 번각본에서는 전부 ‘도로혀’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다. ¶도로혀(돌려) :   디 나래 마 모 기우려 디나 그려기와 가 가마괴예 외오 머리 도로혀 보놋다(清秋落日已側身 過鴈歸鴉錯回首)「呀鶻行」〈두시 17:9ㄱ〉. 도로혀(도리어) : 집 안해셔 기 벌어지와 가야미와 머구믈 아쳗고 기 여 도로혀 모 맛날 고 아디 몯호라(家中厭雞食蟲蟻 不知雞賣還遭烹)「縛雞行」〈두시 17:14ㄴ〉. 도혀(도리어) : 다가 變며 變티 아니호로 商量면  도혀 올티 몯리라〈금삼 1:17ㄴ〉. 져근 미 도혀 믌겨리 답사니  주를  긴 두들게 요라(小江還積浪 弱纜且長堤)「水宿 ··· 群公」〈두시 3:19ㄴ〉.
보니 生涯ㅣ 주162)
무리의. 뭇. 물[群]+ㅅ. ‘물’은 ‘무리’의 뜻으로 15세기에서는 ‘물, 믈, 무리, 므리’의 형태로 쓰였다. ‘믈, 므리, 물, 무리’에 대해서는「贈鄭十八賁」의 ‘靈 芝草ㅣ 뭀 곳다온 거긔 위두 니(靈芝冠衆芳)’〈두시 19:41ㄱ〉 구절의 ‘뭀’ 항목 참조.
사미 주163)
사미
사람이. 사+이.
토라 주164)
토라
같구나. #-+오+라. 선행하는 ‘사미’와 함께 ‘사람과 같구나’의 의미로 쓰인다.

【한자음】 회수구류속 생애사중인【뭇 사람들과 같다는 것은, 두보가 자신의 가난하고 비천(卑賤)한 처지가 백성들과 같다는 것을 말했다.】
【언해역】 유속(流俗)에 몰려다님을 머리 돌려 보니, 생애가 뭇 사람과 같구나!
*시 구절 해석 : “세속에 쓸려 다니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생애가 뭇 사람들과 같다.”라는 뜻으로, 두보 자신이 시류(時流)에 휩쓸리는 모습이 일반 평민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巫咸不可問 鄒魯莫容身列子 주165)
열자(列子)
①열어구(列御寇). 선진시대(先秦時代) 초기의 도가(道家)라 전한다. ②많은 사자(士子)를 가리키는 말. ③방언(方言). 군대가 나아가는 행렬(行列). ④책 이름. 『열자(列子)』는 『노자(老子)』, 『장자(莊子)』 등과 함께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담고 있는 중국의 고전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 열어구(列禦寇)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이다. 여기서는 ④의 뜻이다.
애 有神巫 曰季咸 주166)
계함(季咸)
?~?. 서주(西周) 정(鄭) 사람. 신무(神巫)로, 전하는 말로 사람의 생사와 길흉화복을 알았다고 한다.
이 知人의 死生禍福이니라 鄒魯 주167)
추로(鄒魯)
①추(鄒)는 맹자(孟子)의 출생지인 추나라. 노(魯)는 공자(孔子)의 출생지인 노나라를 일컫는 것으로, 곧 맹자와 공자를 일컫는 말. 또는 공자와 맹자가 주창한 유교(儒敎)를 말하기도 한다. ②추로지향(鄒魯之鄕). 여기서는 ①의 뜻이다.
ㅣ 自比孔孟之不容扵世也ㅣ라】

巫咸 주168)
무함(巫咸)
무당. 무함.
더브러 주169)
더브러
더불어. 함께.
可히 묻디 주170)
묻디
묻지. 묻-[問]+디.
몯리로소니 주171)
몯리로소니
못할 것이니. 몯#-+리+로+ㅅ+오+니. ¶지븨 겨시면 輪王이 외시리로소다〈석상 3:1ㄱ〉. 이 世界옌 千佛이 나시리로소니〈월석 1:40ㄱ〉. 녯 功業을  말리로소니  일후믄 어듸 잇뇨(素業行已矣 浮名安在哉)「秋日 ··· 三十韻」〈두시 3:8ㄴ〉.
鄒魯도 모 주172)
모
몸을. 몸+.
容納디 주173)
용납(容納)디
용납하지. 容納#-+디.
몯니라 주174)
몯니라
못한다. 몯#-+니+라. ‘-니라’는 화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진술할 때 쓰는 종결어미이다.

【한자음】 무함불가문 추로막용신【『열자(列子)』에, “신통한 무당이 있으니, 말하기를 ‘계함이 사람의 사생화복을 안다.’”고 했다. ‘추로’는 두보가 스스로 공자와 맹자가 세상에 용납되지 못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언해역】 무당에게 가히 묻지 못할 것이니, 추로(鄒魯)에서는 몸을 용납하지 못하는구나!
*시 구절 해석 : “무함에게 더불어 묻지 못하노니, 추로에서는 아무도 몸을 용납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신통한 무당인 계함에게 물어보지 않더라도 분명하지만, 공자와 맹자가 자신의 고향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感激時 주175_1)
*〈중간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滄茫 주175)
창망(滄茫)
①광활해서 끝이 없는 모양. ②모호해서 분명하지 않는 모습. ③몹시 바쁜 모양. 여기서는 ①의 뜻이다.
興有神蒼茫은 주175_2)
*〈중간본〉에는 ‘茫은’으로 되어 있다.
曠逺皃ㅣ라 주175_3)
*〈중간본〉에는 ‘曠逺ㅣ라’로 되어 있다.

感激고져 주176)
감격(感激)고져
감격하고자. 感激#-+고#지-+아. ¶-고져 : 欲 고져  씨라〈훈언 2ㄱ〉.  城에 소남긧 누늘 보고 도라갈  나고져 비르서 너기노라(春城見松雪 始擬進歸舟)「曉望白帝城鹽山」〈두시 14:30ㄱ〉.
나 주177)
나
하나. -+나. 〈중간본〉에는 ‘니’로 되어 있다.
時節이 將次ㅅ 주178)
장차(將次)ㅅ
장차. 將次+ㅅ. ‘ㅅ’은 부사화접미사이다. 『두시언해』에는 ‘, ’로도 표기되었다. 〈중간본〉에는 ‘將次ㅅ’로 되어 있다. ¶將次ㅅ : 몸 막  긴 갈 가지고 將次ㅅ 崆峒山 비곗고져 노라(防身一長劒 將欲倚崆峒)「投贈 ··· 二十韻」〈두시 5:43ㄴ〉. 녯 功業을  말리로소니  일후믄 어듸 잇뇨(素業行已矣 浮名安在哉)「夔府書懷四十韻」〈두시 3:8ㄴ〉. 수프렛 곳다온 남 여르믈 내야  업수메 다랏고 닙과 고고리 가지 여희여 다시 디 몯놋다(林香出實垂將盡 葉蔕辭枝不重蘇)「寒雨朝行視園樹」〈두시 15:15ㄱ〉.
느즈니 주179)
느즈니
늦으니. 늦-[遲]+으니.
훤츨 주180)
훤츨
훤칠한. 훤츨#-+ㄴ. 파생부사는 ‘훤츨히’이다. ‘훤츨-’는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되고, ‘훤츨히’는 다른 문헌에서도 쓰였다. ¶훤츨- : 녯 지블 本來 사 훤츨호 依藉호니 너를 빌여 올마 살에 코 宴遊요 停寢노라(古堂本買藉踈豁 借汝遷居停宴遊)「簡吳郞司直」〈두시 7:19ㄴ-20ㄱ〉. 훤츨히 : 臆度앳 議論업서 훤츨히 實로 十二部經엣 眼目이며〈원각 서:10ㄱ〉. 언제 世俗앳  러 리고 훤츨히 바래  타 가려뇨(何當擺俗累 浩蕩乘滄溟)「橋陵 ··· 諸官」〈두시 6:20ㄴ〉.
興곳 주181)
흥(興)곳
흥이. 興+곳. ‘곳’은 강세보조사이며 음운환경에 따라 ‘옷’으로도 쓰인다. ¶-곳 : 다가 곳 내 門 알 오나 매로 그우리 텨 리고〈월석 23:73ㄱ〉. 열 지븨 몃 사미 잇니오 즈믄 뫼콧 갓 :제 하도다(十室幾人在 千山空自多)「征夫」〈두시 5:12ㄴ〉.
神奇로외요미 주182)
신기(神奇)로외요미
신기함이. 神奇#롭-+오+ㅁ+이.
잇도다 주183)
잇도다
있도다. 있-+도+다.

【한자음】 감격시장만 창망흥유신【‘창망(蒼茫)’은 넓고 먼 모양이다.】
【언해역】 감격하고자 하나 시절이 장차 늦으니, 훤칠한 흥이 신기로움이 있도다!
*시 구절 해석 : “감격하고자 하지만 시절이 장차 늦어져 가고, 넓고 먼 흥취가 신기함이 있구나.”라는 뜻으로, 형편이 바뀌어 감격하려 하는데 때가 늦은 느낌이 들지만 크고 넓은 흥취가 일어 신령함이 있다는 말이다.

爲公歌此曲 涕淚 주184)
체루(涕淚)
①콧물과 눈물. 보통 눈물을 가리킨다. ②콧물과 눈물이 모두 흐름. 곡읍(哭泣)함. 여기서는 ②의 뜻이다.
衣巾 주185)
의건(衣巾)
①의복(衣服)과 패복(佩巾). ②의복(衣服)과 두건(頭巾). 여기서는 ②의 뜻이다.
Ⓒ 편찬 | 유윤겸, 유휴복, 조위, 의침 등 / 1481년(성종 12)

그듸 주186)
그듸
그대를. 그듸+. ‘그듸’는 ‘너’보다 상대방을 조금 높여 대우하는 2인칭 대명사이다. 15세기에 ‘그듸, 그디, 그’가 쓰였는데 점차 ‘그’로 통일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두시언해』에서 ‘그듸’와 ‘그’가 같이 쓰였다. ¶耶輸는 겨지비라 法을 모 즐급 드리워 온 들 몯 러 리니 그듸 가아 아라듣게 니르라〈석상 6:6ㄴ〉. 오직 그듸 醉야셔 기 어러온 客을 랑야셔 온 번 서르 디나오매 디 다디 아니다(唯吾醉愛清狂客 百遍相過意未闌)「遣悶 ··· 曹長」〈두시 3:48ㄱ〉. 그 爲야 波羅蜜 서 지시니라〈금삼 3:57ㄴ〉. 그 徐卿의 두 아리 나  奇異호 보디 아니다 됴 믈 感應야 서르 조차 나도다(君不見徐卿二子生絕奇 感應吉夢相追隨)「徐卿二子歌」〈두시 8:24ㄱ〉.
爲야 이 놀애 주187)
놀애
노래를. 놀애+.
블로니 주188)
블로니
부르니. 부르-[歌]+오+니.
므리 주189)
므리
눈물이. 눈+ㅅ+믈+이.
옷과 手巾에 잇도다
Ⓒ 편찬 | 유윤겸, 유휴복, 조위, 의침 등 / 1481년(성종 12)

【한자음】 위공가차곡 체루재의건
【언해역】 공을 위하여 이 노래를 부르니, 눈물이 옷과 수건에 있도다.
*시 구절 해석 : “그대를 위하여 이 노래를 부르노니, 눈물이 흘러 옷과 수건을 적신다.”라는 뜻으로, 위견소를 위해 이 시를 지으면서 감동하여 눈물이 흐른다는 말이다.
Ⓒ 역자 | 김영배, 김성주 / 2018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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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상위좌상이십운(上韋左相二十韻) : 이 작품은 천보(天寶) 14년(755년) 초봄에 지어졌는데, 두보 44세 때이다. 당시 두보는 장안(長安)에 머물고 있었다. 위 좌상(韋左相)은 위견소(韋見素)를 말한다. 천보 13년(754년) 8월 가을 장마 때문에 진희열(陳希烈)을 재상 직위에서 파면하고 위견소를 좌상(左相)에 임명했다. 위견소는 천보 5년(746년)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오른 뒤 여러 해 동안 관리를 임명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임명이 공명정대하여 호평을 받았다. 두보는 벼슬길에 대한 희망을 품고서 이 시를 지어 올린 것이다. 시에서 그는 위견소가 재상에 오르고 품계가 높은 사실을 칭송하면서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말해 도움을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위견소가 좌상이 된 것은 지덕 2년(757)이므로 제목의 ‘左相’은 뒤에 소급하여 적은 것이다.
주002)
헌원(軒轅) : ?~?. 전설 속의 고대 천자(天子). 성은 공손(公孫) 또는 희(姬)다. 헌원의 언덕에서 낳았기 때문에 헌원씨라고 하고, 유웅(有雄)에 국도(國都)를 정한 까닭으로 유웅씨라 일컫는다. 배와 수레를 창조하여 교통을 편리하게 했다. 당시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탁록(涿鹿)의 벌판에서 포학작란(暴虐作亂)하던 치우(蚩尤)를 쳐서 평정하니, 제후가 천자로 받들어 신농씨(神農氏) 뒤를 잇게 되었다. 또한 토덕(土德)의 서기(瑞氣)가 있다고 하여 황제(黃帝)로도 불린다.
주003)
역정(曆正) : 옛날에 천문역법(天文曆法)을 주관한 관리.
주004)
봉력(鳳曆) : ①보령(寶齡). ②책력(冊曆). 옛날에 역정(曆正)을 봉조씨(鳳鳥氏)라 불렀다. ③후량(後梁) 시대에 쓰였던 연호. 연대는 912. 여기서는 ②의 뜻으로 쓰였다.
주005)
당력(唐曆) : 중국의 역서(曆書).
주006)
현종(玄宗) : 685~762. 당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712-756). 본명은 이융기(李隆基)고, 예종(睿宗)의 셋째 아들이다. 명황(明皇)이라고도 부른다. 조모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낙양(洛陽)에서 태어났고, 9살 때 임치왕(臨淄王)으로 봉해졌다. 26살 때 위후(韋后)가 딸 안락공주(安樂公主)와 짜고 중종(中宗, 현종의 백부)을 암살, 중종의 아들 온왕(溫王)을 제위(帝位)에 앉히고 정권을 농단(壟斷)하기 위해 현종의 아버지 상왕(相王)까지도 해치려 하였다. 심복 장병을 인솔, 위후와 안락공주 일당을 공격한 뒤 아버지를 제위에 옹립하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잡았고, 28살 때 마침내 아버지의 양위로 즉위했다. 당시 권세를 누린 태평공주(太平公主) 일파를 타도하여 측천무후 이래 반세기에 걸친 부인의 정권 개입을 근절시킨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초기에는 정치를 잘해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시대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했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자 정치를 등한시하고, 도교(道敎)에 빠져 막대한 국비를 소비했으며, 35살이나 연하인 양귀비(楊貴妃)를 궁내(宮內)로 끌어들인 뒤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여 권신 이임보(李林甫)가 국정을 대신 맡아보았다. 천보 14년(755)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사천(四川)으로 난을 피해 가던 도중에 양귀비는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이듬해 아들 숙종(肅宗)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 은거했는데,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뒤 죽었다. 특히 음악에 뛰어나 스스로 작곡까지 하면서, 이원(梨園)의 자제 남녀를 양성했다. 서예에도 능해 명필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시호는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다.
주007)
천보(天寶) : ①당(唐)나라 시대에 쓰였던 연호. 연대는 742~756. ②오월(吳越) 시대에 쓰였던 연호. 연대는 908-923. ③남한(南漢) 시대에 쓰였던 연호. 연대는 958. 여기서는 ①의 뜻으로 쓰였다.
주008)
기록(紀錄)엿니 : 기록하고 있으니. 紀錄#-+여#잇-++니. 15세기의 ‘-어 잇-’은 ‘-아/어#잇-’형, ‘-앳/엣-’형, ‘-앗/엇-’형이 공존했는데 여기서는 세 번째 유형이 쓰였다. ¶-어 잇- : 오 안자 잇더시니 도 五百이 그윗 거슬 일버 精舍ㅅ 겨로 디나가니〈월석 1:6ㄱ〉. 기튼 치위예 곳과 플왜 디어 잇니(餘寒折花卉)「送大~遂停니라」〈두시 8:70ㄱ-ㄴ〉. -앳/엣- : 阿僧祗前世劫에 님금 位ㄹ 리샤 精舍애 안잿더시니〈월석 1:2ㄱ〉. 戎事 惣執니 다 侍中의 貂 고잿도다(惣戎皆插侍中貂)「諸將五首」〈두시 5:44ㄱ〉. -앗/엇- : 곧 미 두려이 가 너비 國土 머것다 시니〈능엄 2:63ㄱ〉. 노 臺  부 믌  구벗도다(曾臺俯風渚)「雨三首」〈두시 12:13ㄴ〉.
주009)
언 디 : 난지. -[飛]+어+ㄴ +이. ¶ 悅帝利罪女ㅣ 하해 나건 디 오 사리 디나니〈월석 21:28ㄴ〉. 아리 宰相 외언 디 三年이로 祿이 이티 하디 몯더니〈내훈 3:24ㄴ〉. 健壯 미 러디건 디 오라니 셴 머리로 人間애 브텟노라(壯心久零落 白首寄人間)「有歎」〈두시 3:43ㄴ〉.
주010)
마  : 마흔 해의. 마 +ㅅ. 〈중간본〉에는 ‘마’으로 되어 있다.
주011)
보미니라 : 봄이니라. 봄이다. 봄+이+니+라. ‘-니라’는 화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진술할 때 쓰는 종결어미이다.
주012)
당 현종 : 생몰년(685~762년) 재위 기간(712~756년), 천보(天寶) 742년~756년 천보 11년=752년, 당 현종 즉위년은 712년이고 천보 11년은 752년이어서 그 기간은 40년이다.
주013)
팔황(八荒) : 팔방(八方)의 멀고 넓은 범위. 곧 온 세상. 일명 팔굉(八紘), 팔방(八方), 팔극(八極)이라고도 한다.
주014)
수역(壽域) : ①사람마다 하늘이 정한 천수를 다 누리는 태평성대. ②무덤. 여기서는 ①의 뜻으로 쓰였다.
주015)
홍균(洪鈞) :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는 신(神). 균(鈞)은 도기(陶器)를 만드는 녹로(轆轤)로, 조물자(造物者)를 말한다.
주016)
좌상(左相) : ①좌승상(左丞相)의 약칭(簡稱). ②좌의정(左議政)의 약칭. 여기서는 ①의 뜻으로 쓰였다.
주017)
팔방(八方) :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四方)과 그 사이의 네 방향.
주018)
황원(荒遠) : ①요원(遙遠). 아주 멀고 멂. ②아주 멀고 먼 지역을 가리키는 말. 여기서는 ②의 뜻으로 쓰였다.
주019)
목숨 긴 : 목숨이 긴. 즉 장수(長壽)하는.
주020)
 : 가가. 변경이. +이. 〈중간본〉에는 ‘이’로 되어 있다.
주021)
여럿고 : 열려 있고. 열-[開]+어#잇-+고. ‘열다’는 자타동 양용동사의 자동사 용법으로 쓰였다. 15세기의 ‘-어 잇-’은 ‘-아/어#잇-’형, ‘-앳/엣-’형, ‘-앗/엇-’형이 공존했는데 여기서는 세 번째 유형이 쓰였다. ¶열다(자동사) : 자논 두 相이 모 열며 어우로 좃논 디라〈능엄 3:17ㄱ〉. 구루미 의 리예 올니 宮扇이 열오(雲移雉尾開宮扇)「秋興五首」〈두시 6:8ㄴ〉 /열다(타동사) : 네 見은 方便品엣 부텻 知見을 열며 뵈며 알며 드로미라〈월석 13:58ㄴ〉. 제 거르디 아니얏 수를 열리로다(相迎自醱醅)「晩晴 ··· 北舍」〈두시 12:38ㄱ〉. -어 잇- : 比丘ㅣ 蓮ㅅ 곳 우희 안자 잇거늘〈석상 24:16ㄱ〉. 모미 라가고져 나 病야 床애 누어 잇노라(身欲奮飛病在床)「寄韓諫議註」〈두시 19:18ㄱ〉. -앳/엣- : 녀르미여 겨리여  말도 아니코 안잿거시든〈석상 3:38ㄴ〉. 鵁鶄과 鸂鶒괘 갠 몰애예 기 안잿도다(鵁鶄鸂鶒滿晴沙)「曲江 ··· 史飲」〈두시 11:21ㄴ〉. -앗/엇- : 金剛이 門 밧긔 오히려 怒 머것도다〈남명 상:8ㄱ〉. 서릿 虛空애 萬嶺이 머것도다(霜空萬嶺含)「朝二首」〈두시 11:41ㄱ〉.
주022)
붊긔 : 풀무에. (불무/풀무)+의. ¶爐 붊기라〈금삼 2:28ㄱ〉. 風塵ㅅ  이긔요 決고 造化ㅅ 붊긔 功名을 호리라 더니라(決勝風塵際 功名造化爐)「哭台州鄭司戶蘇少監」〈두시 24:59ㄴ〉.
주023)
올맛도다 : 옮아 있도다. 옮-[移]+아#잇-+도+다. ¶옮- : 文殊師利여 내 이 이셔 년 듸 옮디 아니호리니〈석상 11:29ㄴ〉. 다봇 옮 호매 시르미 悄悄니 藥 行호매 病이 涔涔놋다(轉蓬憂悄悄 行藥病涔涔)「風疾이어~三十六韻이라」〈두시 3:16ㄴ〉. 옮기- : 주를 다  옮겨 터 되더니〈석상 6:36ㄴ〉. 늘근 나해 기로 술 비주믈 뵈아고  비옌 가야 橙子 옮겨 심고라(衰年催釀黍 細雨更移橙)「遣意二首」〈두시 3:25ㄴ-26ㄱ〉. -어 잇- : 오 안자 잇더시니 도 五百이 그윗 거슬 일버 精舍ㅅ 겨로 디나가니〈월석 1:6ㄱ〉. 모미 라가고져 나 病야 床애 누어 잇노라(身欲奮飛病在床)「寄韓諫議註」〈두시 19:18ㄱ〉. -앳/엣- : 阿僧祗前世劫에 님금 位ㄹ 리샤 精舍애 안잿더시니〈월석 1:2ㄱ〉. 무트로 올아가매 프렛 이스리 저젯고(登陸草露滋)「送殿 ··· 相公」〈두시 22:22ㄴ〉. -앗/엇- : 곧 미 두려이 가 너비 國土 머것다 시니〈능엄 2:63ㄱ〉. 어그르처 騏驎馬ㅣ 늘것도다(蹭蹬騏驎老)「奉贈射洪李四丈」〈두시 19:33ㄴ〉.
주024)
고종(高宗) : 무정(武丁, ?~?). 상(商; 殷)나라의 20대 국군(國君). 소을(小乙)의 아들이다.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59년 동안 재위했다. 전하는 말로 어릴 때 민간에서 성장하여 농사의 어려움을 잘 알았고, 국세(國勢)가 기울어가는 상나라를 부흥시키고자 애썼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재상감을 구하지 못하자 3년 동안 정령(政令)을 선포하지 않는 등 철저하게 현명한 재상에게 정치를 맡겼다. 탕왕(湯王)을 제사할 때 꿩이 정(鼎)의 귀에 올라가서 우는 이상한 일이 발생하자 현신(賢臣) 조기(祖己)의 충고를 받아들여 정치를 고치고 덕을 행하여 온 나라를 기쁘게 했다는 등 재상과 신하를 존중하고 신뢰한 것으로 유명하다. 부열(傅說)을 얻어 재상으로 삼아 대치(大治)를 이루었다. 서북쪽으로 병사를 움직여 귀방(鬼方)과 3년 동안 전투를 벌여 물리쳤다.
주025)
부열(傅說) : ?~?. 이름은 태(兌)로도 쓴다. 은고종(殷高宗; 武丁) 때 사람. 현상(賢相). 부암(傅巖)에서 담장을 쌓는 노예였다고 한다. 고종이 꿈에서 성인(聖人)을 보았는데, 이름이 열이라고 했다. 기억을 더듬어 인상을 그리게 하고 부암의 들판에서 찾았다고 한다. 고종이 부열에게 “가물 때라면 너를 소낙비로 삼겠다.”라고 하였다.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주026)
임우(霖雨) : 가뭄을 푸는 사흘 이상 오는 비.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킬 인재에 대한 비유로 쓰인다. 『서경(書經)』 열명(說命)편에 “큰 가뭄이 들면 내가 그대를 소낙비[단비]로 삼으리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라고 했다.
주027)
염철론(鹽鐵論) : 책이름. 전한(前漢)의 환관(桓寬)이 지었다. 10권 60편. 한소제(漢昭帝) 때 조정 내에서 염철에 관하여 회의한 내용을 기록한 책. 당시 어사대부 상홍양(桑弘羊)이 주장한 염철․주류의 관영 전매와 균수(均輸)․평준(平準) 등의 문제에 관하여 지방 현량(賢良)들과 상홍양간에 갑론을박하던 내용을 담았다. 상홍양의 사상과 당시 염철의 수급 문제를 연구하는 좋은 자료이다.
주028)
단청(丹靑) :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 등 다섯 가지 색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대궐, 절, 비각 따위 건물 등의 벽, 기둥, 천장 같은 데에 여러 가지 그림이나 무늬를 그린 채색. 옛날부터 임금이 공훈과 덕행이 있는 신하를 포장하고 높여서 형상을 채색으로 그리는 것을 일컫는 말. 단청의 색이 아름답고 쉽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주029)
 : 같은. -++ㄴ. 참조; -. ¶- : 射ㅣ 志ㅣ 이숌 니〈서전 2:42ㄱ〉. - : 겨지븨 德을 쓰샤 이 야 妃子 사모리라〈석상 3:11ㄱ〉. 이귀여 興復호미 진실로 이 니(克復誠如此 扶持在數公)「收京」〈두시 5:9ㄱ〉.
주030)
어딘 : 어진. 어딜-[賢]+ㄴ. ¶어딜- : 모다  毗奢波 蜜多羅ㅣ  어디니다〈석상3:7a〉. 맛볼 사 묻노라 몃 어디니오(逢人問幾賢)「題郪 ··· 屋壁」〈두시 7:32ㄱ〉.
주031)
도오리 : 도울 이를. 돕-[助]+을#이+. 초기 문헌이었으면 ‘도리’로 표기된다.
주032)
시고 : 생각하시고. 사#-+시+고. 15세기에 ‘-’는 주로 ‘생각하다’의 의미로 쓰인다. 〈중간본〉에는 ‘랑시고’로 되어 있다.
주033)
늘근 : 늙은. 늙-[老]+은. ¶늙- : 이 衆生이 다 늘거 마 주그리니〈석상 19:3ㄴ〉. 사랫 데 늘거 셰요 히 너기노니(生意甘衰白)「收京三首」〈두시 5:7ㄴ〉.
주034)
사억(思憶)시니라 : 사억하시니라. 思憶#-+시+니+라. 원래의 ‘思憶시놋다’에서 교정된 것이다. ‘-니라’는 화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진술할 때 쓰는 종결어미이다.
주035)
기린(麒麟) : 고대 전설에 나오는 상서로운 동물. 기(騏)는 수컷, 인(麟)은 암컷이다. 모양은 사슴과 같고 머리엔 뿔이 있으며 온 몸에 갑옷처럼 비늘이 있고 꼬리는 소꼬리 모양이라고 한다. 기린이 출현하면 세상에 성왕(聖王) 또는 성인(聖人)이 나올 징조로 여겼다. 애공(哀公) 14년(기원전 481) 봄 사냥에서 괴상한 짐승을 잡았는데, 공자가 이를 보고 기린이라고 한 일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공자가 태어났을 때 기린이 나타났는데, 공자의 어머니인 안징재(顔徵在)가 기린의 뿔에 수건을 매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자가 늙어서 다시 만난 기린은 그때까지도 그 수건이 뿔에 매어져 있었다고 한다.
주036)
매복(梅福) : ?~?. 전한 구강(九江) 수춘(壽春) 사람. 자는 자진(子眞)이다. 젊어서 장안(長安)에서 배웠는데, 『상서(尙書)』와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밝았다. 명경(明經)으로 군문학(郡文學)이 되어 남창위(南昌尉)를 지냈다. 나중에 사직하고 고향 수춘으로 돌아왔다. 성제(成帝) 때 대장군(大將軍) 왕봉(王鳳)이 권력을 쥐었다. 경조윤(京兆尹) 왕장(王章)이 왕봉을 비난하다가 살해당하자 신하들 가운데 감히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만이 상서하여 간언했다. 평제(平帝) 원시(元始) 중에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자 처자들과 이별하고 구강을 떠났다. 이후 회계(會稽)에 나타났는데, 성명을 바꾸어 살다가 오시문(吳市門)에서 죽었다. 수화(綏和) 원년(기원전 8년) 『춘추좌씨전』과 『춘추곡량전』, 『예기』, 『세본(世本)』 등을 참고해 공자(孔子)의 자취를 밝혀, 은(殷)나라 소가공(紹嘉公)에 추봉(追封)하게 했다.
주037)
백락(伯樂) : ?~?. 춘추시대 때 사람. 상마가(相馬家). 또는 성이 손(孫)이고, 이름은 양(陽)이라고도 하여 양자(陽子)로도 불린다. 진목공(秦穆公)의 신하로 있으면서 말을 감정하는 일을 맡았다. 일설에 천리마가 소금 수레를 끌고 태행산(太行山)을 오르다가 그를 보고 크게 울자 백락이 수레에서 내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에 말이 땅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다가 하늘을 우러러 울었는데, 그 소리가 하늘 끝까지 퍼졌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자 목공에게 구방인(九方堙)을 천거했다. 구방인은 말을 감정하면서 말의 암수나 안색 따위는 살피지 않아 목공이 언짢게 여겼다. 이에 백락은 천리마란 “뛰어난 것을 얻으면 조잡한 것은 잊고, 그 안을 얻었으면 밖은 잊는(得其精而忘其粗 得其內而忘其外)” 데 있다고 해명했다. 말을 감별하는 뛰어난 안목이 인재를 등용하는 능력으로 비유되곤 한다. 『열자(列子)』 설부(說符)편과 『회남자(淮南子)』 도응(道應)편에 나온다.
주038)
기기(騏驥) :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알려진 준마(駿馬). 『장자(莊子)』 17권 추수편(秋水篇)에 따르면, 화류(驊騮)와 함께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다고 한다.
주039)
그리메 : 그림에. 그리-+ㅁ+에. ‘그림자’를 뜻하는 ‘그리메’와는 다르다. 후자는 15세기 문헌에는 ‘그르메, 그리메, 그림제’ 등이 나타나고, 16세기 문헌에는 ‘그림재, 그름제, 그르메’ 등이 나타난다. 『두시언해』에서는 ‘그리메’와 ‘그르메’가 쓰였다. ¶그르메(곡 15) : 믈 미틧 그르메 보고 서르 닐오〈석상 11:36ㄱ〉. 鴻鴈의 그르메와 峽內예 니니(鴻鴈影來連峽內)「舍弟 ··· 三首」〈두시 8:41ㄱ〉. 그리메(법화 5:165) : 六塵의 그리메 像 브투믈 아라〈월석 9:21ㄱ〉. 孔子 보옴으로브터 발애 의 그르메 디 아니며〈소학 4:42ㄱ〉. 그림제(월 2:55) :  그림제 眞實ㅅ  아니로미 니라〈월석 2:55ㄴ〉. 그림재(초발심 9ㄴ) : 모매 그림재와 소리예 이 서 좃  기피 신호리라〈초발 계초:9ㄴ〉. 그름제(백련초해 3) : 그름제 영 影〈백련 4ㄴ〉.
주040)
마초와 : 맞추어. 맞-[應]+호+오+아. ¶마초- :  비 時節에 마초 야 녀르미 외야〈석상 9:34ㄱ〉. 시우레 마초 업더뎌 프른 뫼 노포미 리오디 몯도다(應弦不礙蒼山高)「久雨期王將軍不至」〈두시 5:36ㄴ〉.
주041)
구(求)더시니 : 구하시더니. 求+-+더+시+니. 15세기 국어에서는 선어말어미 ‘-더-’와 ‘-시-’가 연결될 때 ‘-더시-’의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나 ‘-시더-’도 있었다. 15세기 선어말어미의 연결 순서는 일반적으로 ‘객체높임-과거-확인-주체높임-현재-의도-미래-감동-원칙-상대높임’이다. ‘-더시-’와 ‘-시더-’가 공존하듯이 ‘-거시-’도 ‘-시거-’와 공존하였다. 16세기 후반부터 ‘-시-’가 앞서는 순서로 통일되어 갔다. ¶-더시- : 淨飯王이 相  사 五百 大寶殿에 뫼호아 太子 뵈더시니〈석상 3:1ㄱ〉. 鄴城의 두위힐후믄 足히 妖怪ㅣ롭디 아니니 關中엣 죠고맛 아 紀綱 허러 리며 張后ㅣ 즐기디 아니커든 님그미 爲야 驚忙더시니라(鄴城反覆不足怪 關中小兒壞紀綱 張后不樂上爲忙)「憶昔二首」〈두시 3:60ㄴ〉 /-시더- : 太子ㅣ 아 더브러 겨샤 글왌 根源을 子細히 니시고 無上正眞道理 勸시더라〈석상 3:10ㄱ〉. 사리   셗 안해셔 나거든 님그미  翠麟 도로혀 보시더라(箭出飛鞚內 上又回翠麟)「贈太 ··· 王璡」〈두시 24:24ㄱ〉.
주042)
일대(一代)예셔 : 일대에서. 一代+예+셔.
주043)
어드시도다 : 얻으시도다. 얻-[得]+으시+도+다.
주044)
사태(沙汰) : 쌀에 섞인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선(善)과 악(惡)을 구별함. 쌀 안에 섞여 있는 모래나 돌 따위를 걸러낸다는 뜻인데, 이것에서 선악을 구별해 없앤다는 뜻으로 확대되었다.
주045)
강하(江河) : 강(江)은 양자강(揚子江)을, 하(河)는 황하(黃河)를 가리킴.
주046)
정내(鼎鼐) : ①솥과 가마솥. 옛날에 이 둘은 음식물을 삶아 익히는 도구로 쓰였다. ②재상의 자리를 비유하는 말. 여기서는 ①의 뜻으로 쓰였다.
주047)
흐리니 : 흐린 것을. 흐리-[混]+ㄴ#이+.
주048)
시서 : 씻어. 싯-[洗]+어. 15세기에는 ‘싯-’만 쓰이다가 근대국어부터 ‘씻-’이 쓰이며, 각자병서와 합용병서의 혼동으로 ‘-’ 표기도 보인다. 사동사와 피동사는 ‘싯기-’로 같은 형태이다. ¶/ 싯- : 옷 며 발 싯고 니거늘〈석상 11:25ㄱ〉. 東海 기우려 乾坤 싯고져 노라(欲傾東海洗乾坤)「追酬 ··· 見寄」〈두시 11:7ㄱ〉. 싯기-(사동사) : 그  王과 上座와 比丘히 香湯로 菩提樹를 싯기니〈석상 24:48ㄱ〉. 믈 데여 내 발 싯기고(煖湯濯我足)「彭衙行」〈두시 1:13ㄱ〉. 싯기-(피동사) : 溫水 冷水로 左右에 리와 九龍이 모다 싯기니〈월천 8ㄱ〉. 불휘 믌 미틔 싯기여 그처디니 엇뎨 하 디시리오(根斷泉源豈天意)「柟木爲風雨所拔歎」〈두시 6:41ㄱ〉. - : 악명을 고져 아니랴마〈서궁 28ㄴ〉. 씻- : 내  씻쟈〈청노 4:13ㄴ〉.
주049)
리고 : 버리고. 리-[棄]+고. 선행하는 ‘-어’와 함께 ‘-어 리다’ 보조동사 구문을 이룬다. ¶-어 리- : 즐급 드리워 온 들 몯 러 리니〈석상 6:6ㄴ〉.  城에 盜賊 城壕 갓가 리도다(春城鏟賊壕)「收京三首」〈두시 5:8ㄱ〉.
주050)
소 : 솥의. 솥[鼎]++ㅅ. 〈중간본〉에는 ‘소’로 되어 있다.
주051)
새로왼 : 새로운. 새+롭-+ㄴ. ‘새롭다’는 15세기 문헌 중에서 『두시언해』에서만 사용되었다. 『두시언해』에는 ‘새롭다’와 함께 ‘새다’도 쓰였다. ¶새롭- : 赤甲애 사롤  占卜야 올마 사로미 새로외니 巫山과 楚水ㅅ 보 두 번 보과라(卜居赤甲遷居新 兩見巫山楚水春)「赤甲」〈두시 7:13ㄱ〉. 구룸 소개 두 그려긔 디나가 듣디 몯고 바 가온  구스릐 새로외요 貪히 보놋다(雲裏不聞雙鴈過 掌中貪見一珠新)「戱作寄上漢中王二首」〈두시 8:14ㄴ〉 /새- : 묏 지븨  바미 덥고 해셔 밥 머구메 소아 자본 사미 새외도다(山家蒸栗暖 野飯射麋新)「從驛次草堂復至東屯二首」〈두시 7:18ㄱ〉. 三月三日에 하 氣運이 새외니(三月 三日에 하 氣運이 새외니 長安ㅅ 믌 고온 사미 하도다)「麗人行」〈두시 11:17ㄱ〉.
주052)
거슬 : 것을. 것+을.
주053)
조화(調和)놋다 : 조화하는구나! 助化#-++오+ㅅ+다.
주054)
## 서경(書經) : 오경(五經) 중의 하나로,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정치를 기록한 책이다. 고대에는 제도상으로 사관(史官)이 있어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 변동, 문물제도 등을 낱낱이 문자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옛날에는 그저 서(書)라 일컬었으며 때로는 왕조(王朝)의 이름을 위에 얹어 『우서(虞書)』 또는 『하서(夏書)』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공자(孔子)는 이 서를 대단히 중히 여겨 번잡한 것을 정리해 다시 편찬했다는 설이 있으며, 시(詩)와 더불어 제자들의 교육에 핵심적인 교과 과정으로 삼았다. 한(漢)나라 이후 『상서(尙書)』라 일컬었는데, 상(尙)은 상(上)과 통하여 ‘상대(上代)의 서(書)’라는 뜻이라고 한다. 송나라 때 와서는 다시 『서경』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경(經)은 경전(經典)이라는 말로 성인이 산정(刪定)한 책이라는 존중의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은 『상서』 또는 『서경』 두 명칭이 통용되고 있으며, 고증이 어렵고 난해한 글로 알려져 있다.
주055)
위현(韋賢) : 기원전 144~기원전 62. 전한 노국(魯國) 추현(鄒縣) 사람. 자는 장유(長孺)고, 시호는 절후(節侯)다. 사람됨이 질박하고 욕심이 없었으며, 학문에 뜻을 두었다. 무제(武帝) 때 경학박사(經學博士)에 임명되고, 급사중(給事中)에 올랐다. 광록대부첨사(光祿大夫僉事)로 옮기고, 대홍려(大鴻臚)에 올라 소제(昭帝)에게 『시경(詩經)』을 강의했다. 일찍이 곽광(霍光) 등과 함께 선제(宣帝)의 옹립을 논의해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선제 본시(本始) 중에 승상(丞相)을 지냈고, 부양후(扶陽侯)에 봉해졌다. 노시위씨학(魯詩韋氏學)의 개창자로, 『시경』과 『상서(尙書)』에 두루 통해 ‘추로대유(鄒魯大儒)’로 불렸다.
주056)
범숙(范叔) : 범저(范雎, ?~기원전 255). 범저(范且)라고도 하고, 범저(范睢)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위(魏)나라 사람. 자는 숙(叔)이다. 변설에 능했는데, 위상(魏相) 위제(魏齊)를 위해 일하다가 모함으로 태형을 당해 허리뼈가 부러진 뒤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고치고, 왕계(王稽)와 정안평(鄭安平)의 도움으로 진(秦)나라로 달아나 소양왕(昭陽王)을 섬기며 상국(相國)을 지냈다.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을 제안해 큰 성공을 거뒀는데, 이것이 나중에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통일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명장 백기(白起)와 함께 명성이 높아지자 그를 자살하게 만든 뒤 정안평을 장군에 앉혔다. 응(應)에 봉해져 응후(應侯)라고도 부른다. 나중에 조(趙)나라를 공격했다가 정안평이 전투에서 지고 조나라에 항복하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일설에는 진왕에게 논죄를 당해 처형당했다고도 한다.
주057)
선제(宣帝) : 기원전 91~기원전 49. 유순(劉詢). 전한의 제9대 황제. 초명은 병이(病已)고, 자는 차경(次卿)이다. 할아버지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가 무고(巫蠱)의 일에 걸려 자살하고 부모가 모두 해를 당하자 민간에서 길러졌다. 이 때문에 민심의 동정을 잘 알았다. 소제(昭帝)가 죽자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영입했지만 얼마 뒤 황음(荒淫)하다는 이유로 폐위하고 그를 맞아 옹립했다. 즉위한 뒤 통치를 마음을 쏟아 현능(賢能)한 사람을 기용하고 이치(吏治)를 중시하여 패도(覇道)와 왕도(王道)를 적절하게 사용해 명실상부한 정치를 꾀했다. 또 서역도위(西域徒尉)를 두어 변방의 방위를 강화하고, 서역 지방의 생산을 발전시키도록 했다. 감로(甘露) 2년(기원전 52) 남흉노(南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항복하자 장안(長安)에서 접견했다. 25년 동안 재위했다.
주058)
승상(丞相) : 옛날에 군주를 보좌했던 최고위 행정장관(行政長官). 전국(戰國)시대 진도무왕(秦悼武王) 2년에 처음으로 좌우승상(左右丞相)이 설치되었다. 진나라 이후 각 왕조에서 때로는 존립하기도 했고, 때로는 없애기도 했다. 명나라 홍무(洪武) 13년(1380) 중서성(中書省)을 없애고 권한을 육부(六部)에 귀속시켰는데, 이로부터 승상의 제도는 없어졌다.
주059)
소왕(昭王) : 기원전 324~기원전 251). 진소왕(秦昭王). 전국시대 진나라의 국군(國君). 이름은 직(稷) 또는 칙(則)이다. 진무왕(秦武王)의 이복동생이다. 왕위를 이은 뒤 처음에는 어머니 선태후(宣太后)가 섭정을 했는데, 내란을 평정한 뒤 왕권을 강화시켰다. 친정(親政)을 하면서 위염(魏冉)과 범저(范雎) 등을 기용하여 재상으로 삼고, 사마착(司馬錯)과 백기(白起) 등을 장수로 삼아 동진(東進) 정책을 펼쳐 한(韓)나라와 조(趙)나라, 위(魏)나라, 초(楚)나라 등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주난왕(周赧王)의 항복을 받고, 산동(山東)의 여섯 나라가 맺은 합종책(合縱策)을 와해시키면서 세력이 더욱 커졌다. 진나라가 이후 전국을 통일하는 데 기초를 닦았다. 56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소양(昭襄)이다.
주060)
처 : 처음. 〈중간본〉에는 ‘처엄’으로 되어 있다.
주061)
고 : 듯하고. 듯#-+고.
주062)
마 : 이미. 벌써[已]. 16세기 후반에는 ‘이믜(소언 5:43ㄴ), 이믯(소언 5:43ㄴ)’ 등과 동의 관계를 이루기도 하고 ‘장차’를 뜻하기도 한다. ¶(장차) : 머리 셰오 치 디드러 아니 오라 마 주그리니〈월석 17:47ㄴ〉.
주063)
진(秦)의 : 진(秦)에. 秦+의.
주064)
갓 : 가 있는. 가-[去]+∅#잇-+. 15세기의 ‘-어 잇-’은 ‘-아/어#잇-’형, ‘-앳/엣-’형, ‘-앗/엇-’형이 공존했는데 여기서는 세 번째 유형이 쓰였다. ¶-어 잇- : 比丘ㅣ 蓮ㅅ 곳 우희 안자 잇거늘〈석상 24:16ㄱ〉. 기튼 치위예 곳과 플왜 디어 잇니(餘寒折花卉)「送大~遂停니라」〈두시 8:70ㄱ-ㄴ〉. -앳/엣- : 阿僧祗前世劫에 님금 位ㄹ 리샤 精舍애 안잿더시니〈월석 1:2ㄱ〉. 戎事 惣執니 다 侍中의 貂 고잿도다(惣戎皆插侍中貂)「諸將五首」〈두시 5:44ㄱ〉. -앗/엇- : 곧 미 두려이 가 너비 國土 머것다 시니〈능엄 2:63ㄱ〉. 노 臺  부 믌  구벗도다(曾臺俯風渚)「雨三首」〈두시 12:13ㄴ〉.
주065)
도다 : 듯하도다. #-+도+다.
주066)
절륜(絶倫) :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 여러 면에 있어서 매우 두드러지게 뛰어남.
주067)
이 니 : 이와 같으니. 이 -+-+니. 또는 -+으니.
주068)
전(傳)요 : 전함은. 傳#-+오+ㅁ+.
주069)
여 : 진실로. ‘여’은 『두시언해』에서만 쓰였으며, 그밖의 15세기 문헌에서는 ‘여믓’이 쓰였다. ¶여 : 냇 거시 여 너추러 가니 靜一케 호 막오 資賴홀 디니라(有生固蔓延 靜一資隄防)「秋行 ··· 往問」〈두시 7:35ㄱ〉.  門을 지여셔 여 라오미 이실 옷깃 녀오 길 녀매 나가놋다(倚閭固有望 歛衽就行役)「送李校書二十六韻」〈두시 8:19ㄴ〉. 우리 宗族이 여 神秀니 物을 體야  펴믈 됴히 얫도다(吾宗固神秀 體物寫謀良)「登歷下古城員外孫~制此亭다」〈두시 14:33ㄴ〉. 곧 이른 이젯 이리 아니며  녯 이리 아니가 긴 놀앳 소리 激越야 수프를 리텨 가더니 니 지븨 豪華호 여 혜요미 어렵더니(卽事非今亦非古 長歌激越梢林莽 比屋豪華固難數)「曲江三章章五句」〈두시 25:14ㄱ〉. 葵藿  向야 기우리 物性 여 앗디 몯 거시라(葵藿傾太陽 物性固莫奪)「自京 ··· 五百字」〈중간두시 2:33ㄱ〉. 내 事迹 져 본 오히려 슬프도소니 샹녜 사 여 騷屑리로다(撫迹猶酸辛 平人固騷屑)「自京 ··· 五百字」〈중간두시 2:37ㄴ〉. 참조; 여믓 : 녜 두 나 일워 모도온 後에 글워 내니 여믓 시혹 그리 아니면 사미 토와 외다 야 더러우며 앗기다 〈내훈 3:56ㄴ〉.
주070)
무레 그츠리로다 : 무리에서 끊어질 것이도다. 즉 뛰어나기 때문에 무리로부터 떨어져 돋보일 것이라는 뜻이다. 물[群]+에 긏-[斷]+으리+도+다. 원문의 ‘絶倫’에 대한 번역이다. 『두시언해』에서 ‘絶倫’에 대한 번역은 ‘무레 絶等-, 뭀 사게 絶等-, 等倫에 그츠리-, 무레 그츠리, 무레 혀나-’ 등으로 나타난다. ‘긏-’이 자음어미를 만나면 ‘긋디’와 같이 8종성법의 제약으로 치음인 ‘ㅊ’과 동일 서열의 전청자 ‘ㅅ’으로 받침이 표기된다. 이때 ‘ㅅ’의 음가는 [t]이다. ‘衆’의 의미의 낱맡은 ‘물, 믈, 므리’가 있다. 〈선가귀감〉(1579)에 ‘무리’가 처음으로 목격된다. ‘물’은 ‘무리’의 뜻으로 15세기에서는 ‘물, 믈, 무리, 므리’의 형태로 쓰였다. ‘믈, 므리, 물, 무리’에 대해서는「贈鄭十八賁」의 ‘靈 芝草ㅣ 뭀 곳다온 거긔 위두 니(靈芝冠衆芳)’〈두시 19:41ㄱ〉 구절의 ‘뭀’ 항목 참조. ¶물 : 楮公의 글스기  무레 絶等니라(褚公書絕倫)「發潭州」〈중간두시 2:24ㄱ〉. 先生은 죄 뭀 사게 絶等도다(先生藝絶倫)「寄張 ··· 三十韻」〈두시 16:22ㄱ〉. 소 면 어루 더울  權勢ㅣ 무레 그츠니(炙手可熱勢絶倫)「麗人行」〈두시 11:18ㄴ〉. 賊鋒을 摧陷요미 다 무레 혀나리라(摧鋒皆絕倫)〈금삼 서安 ··· 待命二首」〈두시 5:53ㄱ〉.
주071)
예장(豫樟) : ①나무 이름. 옥나무를 일컫는 말. 예장(豫章). ②유능한 인재를 비유하는 말. ③회남(淮南)과 강북(江北)의 경계에 있는 땅 이름. ④누대(樓臺) 이름. 여기서는 ①과 ②의 뜻으로 쓰였다.
주072)
준발(峻拔) : 높이 우뚝하게 솟아올라 있음.
주073)
도량(度量) : 너그러운 마음과 깊은 생각, 또는 일을 잘 알아 경영할 성품.
주074)
예장(豫樟)남기 : 예장나무가. 나모/+이. 15세기 국어에서 ‘나모’[木]. 음운환경에 따라 두 가지 어형으로 나타난다. 첫째 ‘’으로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통합될 때 쓰인다. 둘째, ‘나모’로 공동격조사 ‘와’와 자음으로 시작하는 조사(관형격 ‘ㅅ’ 등), 그리고 휴지가 올 때 쓰인다. 전자는 ‘남, 남, 남, 남로, 남기, 남기라’ 등의 형태로 쓰이고, 후자는 ‘나모와, 나못그티, 나모, 나모 아래’ 등의 형태로 쓰인다.
주075)
기피 : 깊이. 깊-[深]+이. 파생명사는 ‘기픠’이다. ¶기픠 : 光音天이 한 비 리와 므리 下界예 야 기픠 十一億二萬由旬이러니〈월석 1:39ㄴ〉. 시냇 믌 기픠 아야라 자남즉 더니라(溪水纔尺餘)「漲溪」〈두시 13:19ㄴ〉. 기피 : 禪定을 기피 다 五神通 得리도 보며〈석상 13:20ㄴ〉. 님 혜아리샤 기피 머믈워 시놋다(聖慮窅裴佪)「秋日 ··· 三十韻」〈두시 3:10ㄴ〉.
주076)
해셔 : 땅에서. 땅으로부터. ㅎ+애+셔. ‘ㅎ’은 ‘ㅎ말음체언’이다.
주077)
냇 : 나 있는. 나-[出]+∅#잇-+. ‘나-’[生]. 부사형 ‘-아’와 결합한 ‘나’에 ‘-’이 통합된 어형이다. 이때 ‘나#잇-’이 ‘냇-’으로 모음 축약되었다. 15세기의 ‘-어 잇-’은 ‘-아/어#잇-’형, ‘-앳/엣-’형, ‘-앗/엇-’형이 공존했는데 여기서는 세 번째 유형이 쓰였다.
주078)
고 : 듯하고. (의존명사)#-+고.
주079)
어위여 : 넓어. 어위-[廣]+어. ¶어위- : 그 東山애 열 가짓 祥瑞 나니 좁던 東山이 어위며〈월석 2:28ㄴ〉. 그믈 비루 오직 어위에 시면(祝網但恢恢)「秋日 ··· 三十韻」〈두시 3:11ㄱ〉.
주080)
 : 가가. [邊]+이. 〈중간본〉에는 ‘이’로 되어 있다.
주081)
업슨 : 없은. 없-[無]+은.
주082)
도다 : 듯하도다. (의존명사)#-+도+다.
주083)
북두(北斗) :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줄인 말. 초제(醮祭)의 대상(對象)이었다.
주084)
후설(後舌) : ①목구멍과 혀. ②임금의 말을 아랫사람에게 전하고, 신하의 말을 임금에게 전하는 벼슬아치를 비유하는 말. ③요해지(要害地)나 요충지를 비유한다. ④말재주. 또는 언사(言辭). ⑤조선시대 때 왕명 출납의 일을 맡은, 승지(承旨) 또는 승정원(承政院)의 다른 이름. ⑥『용재총화』 1권 제 17항과 3권 제 22항에 의하면 승정원의 승지를 부르는 말인데 그것은 임금의 지시를 아래로 전달하고 다른 관리들의 말을 임금에게 전달하는 것이 그들의 직책이기 때문에 목구멍과 혀를 써먹는 직책이란 의미로 그렇게 써온 것이다. 여기서는 ①과 ②의 뜻으로 쓰였다.
주085)
진신(搢紳) : 벼슬아치의 총칭. 진(縉, 搢)은 백관(百官)들의 관복(官服)과 제복(祭服)에 갖추는 홀(笏)을 허리띠에 꽂는다는 뜻이고, 신(紳)은 관복을 입을 때 매는 큰 띠를 말하는데, 곧 허리띠를 매면서 홀을 끼운다는 의미에서 모든 벼슬아치들을 아우르는 말로 쓰인다.
주086)
상서(尙書) : 관직(官職) 이름. 처음 전국戰國)시대 때 설치되었는데, 장서(掌書)라고도 불렀다.
주087)
알오 : 주관하고. #알-+고. ‘알다’는 기원적으로 ‘’과 ‘알다’가 결합된 낱맡로 보이며, 뜻은 ‘주관하다, 관장하다’이다. 『두시언해』에서는 ‘알-’, ‘말-’로 표기된다. ‘알오’의 ‘오’는 ‘고’로 16세기 중반까지 간행된 문헌에서는 ‘ㄹ’말음이나 모음으로 끝나는 형태에 ‘ㄱ’으로 시작하는 형태(-게, -고 등)가 결합할 때에는 ‘ㄱ’ 대신에 후음 ‘ㅇ’로 표기된다. 〈중간본〉에는 ‘알오’로 되어 있다. ¶알- : 大千世界 다 아라 四生 濟渡야〈석상 3:23ㄴ〉. 群公이 各各 마 아랏도다(群公各典司)「夔府書懷四十韻」〈두시 3:4ㄴ〉. 말- : 黃閣애 기리 諫爭호 말리로소니(黃閣長司諫)「送司馬入京」〈두시 23:42ㄱ〉.
주088)
거느롓도다 : 거느러 있도다! 거느리-[領]+어#잇-+도+다. ‘열-’은 자타동 양용동사이다. 15세기의 ‘-어 잇-’은 ‘-아/어#잇-’형, ‘-앳/엣-’형, ‘-앗/엇-’형이 공존했는데 여기서는 세 번째 유형이 쓰였다. ¶열-(자동사) : 諸經論 븓건댄 乘이 열며 어울우미 잇니〈원각 상1-1:17ㄴ〉. 구루미 의 리예 올니 宮扇이 열오(雲移雉尾開宮扇)「秋興五首」〈두시 6:8ㄴ〉 /열-(타동사) : 녯 누느로 色 對호 부텻 知見을 열며〈석상 19:10ㄴ〉. 구기 시서 새 수를 열오(洗杓開新醞)「歸來」〈두시 3:30ㄴ〉. -어 잇- : 比丘ㅣ 蓮ㅅ 곳 우희 안자 잇거늘〈석상 24:16ㄱ〉. 기튼 치위예 곳과 플왜 디어 잇니(餘寒折花卉)「送大~遂停니라」〈두시 8:70ㄱ-ㄴ〉. -앳/엣- : 녀르미여 겨리여  말도 아니코 안잿거시든〈석상 3:38ㄴ〉. 戎事 惣執니 다 侍中의 貂 고잿도다(惣戎皆插侍中貂)「諸將五首」〈두시 5:44ㄱ〉. -앗/엇- : 장 며늘의 道 어덧더니〈소학언해 6:59ㄱ〉. 微妙호 발와 자최와 료 어덧도소니(妙取筌蹄棄)「寄劉 ··· 四十韻」〈두시 20:23ㄱ〉.
주089)
지형(持衡) : 저울을 들고 물건의 무게를 잼. 공명정대하게 인재를 품평(品評)하는 것을 비유한다.
주090)
조감(藻鑑) : 사람이나 사물의 겉만 보고도 그 인품이나 호오(好惡)를 분별하는 식견(識見)이나 안목.
주091)
성신(星辰) : 성수(星宿). 성관직(星官職) 이름. 28수(宿)의 하나. 주조칠수(朱鳥七宿)의 네 번째 별자리로 공두 일곱 개의 별로 구성되어 있다.
주092)
정숭(鄭崇) : ?~기원전 3?. 전한 부풍(扶風) 평릉(平陵) 사람. 자는 자유(子游)다. 집안은 본래 고밀(高密)의 거족이었는데 할아버지 때 평릉(平陵)으로 옮겼다. 젊어서 군문학사(郡文學史)가 되고 승상대거속(丞相大車屬)까지 이르렀다. 애제(哀帝) 때 대사마(大司馬) 부희(傅喜)가 추천해서 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었다. 여러 차례 직간했다. 부태후(傅太后)의 동생 부상(傅尙)과 애제의 총신 동현(董賢)에 대한 총애가 과도하다고 간언해 죄를 얻었다. 상서령(尙書令) 조창(趙昌)이 무고해 그가 종족들과 내통해 간사스럽다고 고했다. 황제가 묻기를 “그대의 집 문 앞이 시장 같다던데 어떻게 나에게는 끊으려고 하는가?(君門如市 何以欲禁切主上)”고 질책하니, “신의 집 앞은 시장과 같지는 제 마음은 물과 같습니다(臣門如市 臣心如水)”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분노하여 하옥하고 엄단하라 하니, 옥중에서 죽었다.
주093)
애제(哀帝) : 기원전 26~기원전 1. 유흔(劉欣). 전한의 제12대 황제. 원제(元帝)의 손자다. 문사(文辭)와 법률을 좋아했다. 즉위 초 외척 왕씨(王氏)의 권력을 박탈하고 왕망(王莽)과 왕근(王根)을 대사마(大司馬) 직에서 파직했으며, 왕황(王況)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공광(孔光)과 사단(師丹), 하무(何武) 등을 등용해 한전(限田)과 한노비(限奴婢) 제도를 실행에 옮겼다. 얼마 뒤 외척 부씨(傅氏)와 정씨(丁氏)를 기용해 정치를 보좌하도록 하고, 방사(方士)의 말을 들어 진성유태평황제(陳聖劉太平皇帝)로 이름을 고쳤다. 나중에 동현(董賢)을 총애해 포상을 끝도 없이 내려 조정이 날로 쇠퇴해 갔다. 7년 동안 재위했다.
주094)
전선(銓選) : 인물을 전형(銓衡)하여 골라 뽑음.
주095)
평윤(平允) : ①공평(公平)하고 정당(正當)함. ②성정(性情)이 평이(平易)한 것을 이르는 말. 여기서는 ①의 뜻으로 쓰였다.
주096)
권대(眷待) : 사람을 대접하는 태도가 애정이 크고 관대(寬待)함.
주097)
가져셔 : 가져서. 가지-[持]+∅+셔. 〈중간본〉에는 ‘가져서’로 되어 있다. ¶가지- : 後에 아뫼나  보라 가지던 사토 다 마 佛道 일우며〈석상 13:51ㄱ〉. 님 恩惠로 몬져 와 後에 세 번 鐵節을 가지니(主恩前後三持節)「諸將五首」〈두시 5:47ㄱ〉.
주098)
 감(鑑) : 맑은 거울을. 맑은 귀감을. -[淡]+ 鑑+. 원래의 ‘ 보’에서 교정된 것이다.
주099)
머믈우고 : 머물게 하고. 머믈-[停]+우+고. ¶머믈우- : 소 가매 다혀 겨샤 목수믈 머믈우들 몯시니〈월석 10:15ㄴ〉. 群公이 모다 힘니 님 혜아리샤 기피 머믈워 시놋다(群公紛戮力 聖慮窅裴佪)「秋日 ··· 三十韻」〈두시 3:10ㄴ〉.
주100)
들여 : 들려. 듣-[聞]+이+어. ‘들이-’는 ‘듣-’의 사동사이다. ‘들이-’는 사동사와 피동사가 같은 형태인 동사이다. ¶들이-(사동) : 일후믈 간 들이시면〈석상 9:15ㄱ〉. 약 야 먹곡 내 將 늘거셔 아 여곰 들이디 아니호리라(採藥吾將老 童兒未遣聞)「秦州雜詩十七首」〈두시 13:41ㄴ〉 들이-(피동) : 시울  소리 잣 안히 다 들이더라〈석상 3:14ㄱ〉. 能 이리 重譯 해 들이니(能事聞重譯)「奉贈太 ··· 二十韻」〈두시 19:14ㄱ-15ㄱ〉.
주101)
벐 : 별의. ‘볈’의 잘못이다. 〈중간본〉은 ‘볈’로 되어 있다.
주102)
서리예 : 사이에. 서리+예. ‘서리’는 일반적으로 ‘사이’로 해석하나 원래는 ‘사물이 뭉쳐있는 틈 사이’의 의미이다. 즉 ‘’는 ‘둘 가운데’, ‘서리’는 ‘여럿 가운데’의 뜻이다. ‘-예’는 ‘ㅣ’나 ‘ㅣ’계 하향 중모음 뒤에 붙는 처소의 부사격조사이다. ¶狄人ㅅ 서리예 가샤 狄人이 외어늘〈용가 4〉. 差池히 組冕 화 니 다봇 서리예셔 니러나니(差池分組冕 合沓起蒿萊)「秋日 ··· 三十韻」〈두시 3:10ㄱ〉.
주103)
올아 : 올라. 오-[登]+아. ‘오다’는 모음어미와 연결될 때 ‘ㄹ’이 덧생기는 용언에 해당한다. ¶즉자히 神通力으로 樓 우희 라 올아 耶輸ㅅ 알 가 셔니〈석상 6:3ㄱ〉. 나조 河陽ㅅ 리예 올아가라(暮上河陽橋)「後出塞五首」〈두시 5:30ㄴ〉.
주104)
가놋다 : 가는구나. 가-[去]++오+ㅅ+다.
주105)
오 : 혼자. 혼자. 홀로. 다른 사람과 어울리거나 함께 하지 않고 홀로인 상태. 정음 초기 문헌 중에서도 〈용비어천가〉(1445~1447)에는 ‘’로 쓰였던 것이 〈석상 〉(1447)부터는 ‘오’로 쓰였다. 16세기 문헌에는 ‘호, 호은자, 호온자’ 형도 나타난다. 〈중간본〉에는 ‘오아’로 되어 있다. ¶ : 셔 긔벼를 알  나가샤 모딘 도 믈리시니다〈용가35〉. 오 : 뫼 사 믈리시고 오 기픈 道理 더시니〈석상 3:19ㄴ〉. 天機ㅣ 사 이레 갓가오니 오 셔셔 여러 가짓 시름노라(天機近人事 獨立萬端憂)「獨立」〈두시 3:26ㄴ〉/ 호 : 叔咸이 호셔 侍病며 어 大便을 맛보니 더니〈속삼, 효22ㄱ〉. 호은자 : 내 호은자 아도 이긔요리라〈飜朴55ㄱ〉. 호온자 :  하  호온자 가  보내놋다〈백련 3ㄴ〉.
주106)
건 : 걷는. 걷-[步]+. 여기서는 ‘나아가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107)
죄 : 재주.
주108)
녯 : 옛.
주109)
사게 초월(超越)니 : 사람을 초월하니. 『두시언해』에서 ‘초월(超越)다’는 여기와 같이 그대로 쓰인 경우와 ‘건나가다’로 번역된 경우가 있다. ¶건나가- : 긴 개 갈 니 人寰을 可히 건나가리로다(長翮如刀劍 人寰可超越)「畵鶻行」〈두시 16:37ㄴ〉.
주110)
나 : 남은. 남-[餘]+.
주111)
은파(恩波)ㅅ 덕(德)이 : 은혜의 물결의 덕이. 恩波+ㅅ 德+이. 〈중간본〉에는 ‘㤙波ㅅ 德이’로 되어 있다.
주112)
이우제 : 이웃에. 이웆[隣]+에. ¶네 識은 오 잇도소니 오면 이우지 업거니 界 므스글 브터 셔리오〈능엄 3:37ㄱ〉. 武侯의 祠堂이 기리 이우제 갓가오니  體옛 님금과 臣下 祭祀 가지로 놋다(武侯祠屋長鄰近 一體君臣祭祀同)「詠懷古跡二首」〈두시 6:32ㄱ〉.
주113)
비취옛도다 : 비추고 있도다. 비취-[照]+어#잇-+도+다. ‘비취-’는 “빛을 내는 대상이 다른 대상에 빛을 보내어 밝게 하다”라는 뜻의 타동사로 오늘날의 ‘비추-’에 대응된다. 15세기 국어의 ‘비취-’는 자타동 양용동사이다. ¶비취-(자동사) : 世尊하 如來 甚히 쉽디 몯야 功德 智慧ㅅ 젼로 頂上肉髻옛 光明이 빗내 비취시며(世尊하 如來ㅣ 甚希有샤 以功德智慧故로 頂上肉髻ㅣ 光明이 顯照시며)〈석상 21:46ㄴ〉. 峽엣 구루믄 長常 바 비취옛고(峽雲常照夜)〈두시 3:42ㄱ〉. 비취-(타동사) : 放光샤 四天王과 淨居天에 니르리 비취시니(便放身光照四天王 乃至淨居不令人見)〈석상 3:25ㄱ〉. 바 거두니 도로 나그내 비취오(捲簾還照客)「七月夜對月」〈두시 12:7ㄱ〉.
주113_1)
*〈중간본〉에는 ‘聦’으로 되어 있다.
주114)
관로(管輅) : 209~256. 삼국시대 위(魏)나라 평원(平原) 사람. 술사(術士). 자는 공명(公明)이다. 어릴 때부터 별자리 살피기를 좋아했다. 성장하자 풍각(風角)과 점상(占相)에 더욱 정통해졌다. 점을 치면 대개 적중했다고 한다. 청하태수(淸河太守) 화표(華表)가 불러 문학연(文學掾)을 삼았다. 기주자사(冀州刺史) 배휘(裵徽) 아래에서 문학종사(文學從事)로 있었다. 제왕(齊王) 조방(曹芳) 정시(正始) 9년(248) 수재(秀才)로 천거되었다. 일찍이 이부상서 하안(何晏), 위군태수(魏郡太守) 종육(鍾毓)과 『역(易)』에 대해 논쟁했는데, 하안이 “요점만 말해 번거롭지 않다.”라고 칭찬했다. 고귀향공(高貴鄕公) 정원(正元) 2년(255) 소부승(少府丞)에 이르렀다. 용모가 추하고 술을 좋아해서 언행에 거친 면이 있었지만, 『주역』과 수학에 정통하고 관상술에 능했다. 조조(曹操)가 태사로 봉하려 했지만 사양했다. 신출귀몰하게 앞날을 알아맞히어 노숙(魯肅)과 하후연(夏侯淵), 조상(曹爽)의 죽음과 허도(許都)의 대화재를 예언했다. 자신이 48살에 죽을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 나이에 죽었다. 재주는 높지만 장수하지 못하고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주115)
진준(陳遵) : ?~?. 전한 말기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 자는 맹공(孟公)이다. 젊어서는 방종해 얽매임이 없었고, 서법에도 뛰어났다. 애제(哀帝) 말에 처음으로 경조사(京兆史)와 울이령(鬱夷令)에 올랐다.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자 교위(校尉)가 되었는데, 조붕(趙朋), 곽홍(霍鴻) 등의 위세를 진압해 가위후(嘉威侯)에 봉해졌다. 왕망이 그의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하남태수(河南太守)에 임명했다. 경시(更始) 때 대사마호군(大司馬護軍)이 되었는데, 흉노(匈奴)에 사신을 갔을 때 마침 경시가 패망하자 삭방(朔方)에서 머물러 관망하다가 피살당했다.
주116)
척독(尺牘) : 서간(書簡)으로, 길이가 한 자 가량되는 글을 적은 널빤지를 말한다. 척서(尺書). 척소(尺素). 척저(尺楮).
주117)
총명(聦明)호 : 총명함은. 聰明#-+오+ㅁ+.
주118)
관로(管輅)ㆎ게 넘고 : 관로를 능가하고. 管輅+게 넘-[超]+고. ¶行이 俗애 넘디 아니며〈영가 상:20ㄴ〉. 彦昭 玉ㅅ 갑시라와 넘고 郭振 通泉로셔 니러나니라(彥昭超玉價 郭振起通泉)「陳拾遺故宅」〈두시 3:64ㄴ〉.
주119)
척독(尺牘)요 : 척독함은. 尺牘#-+오+ㅁ+.
주120)
갓고로혀리로다 : 거꾸러뜨릴 것이도다. 거꾸로 당길 것이다. 갓골-[倒]+오(부사화파생접미사)#혀-+리+도+다. 또는 갓고로 혀-[引]+리+도+다. ‘갓골-’에서 파생한 파생부사 ‘갓고로’는 ‘디다, 혀다, -왇-, -와티-’ 등과 결합하여 동사로도 쓰인다. ‘갓골-’은 원래 ‘갓-(갓-)’인데. 이 형태는 『두시언해』는 물론 15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용례를 더러 확인할 수 있다. ‘갓-’의 사동사 ‘갓오-’는 『두시언해』만에서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갓고로혀다’의 ‘혀’는 접미사일 가능성과 동사 ‘-’일 가능성이 모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전자로 보는데 ‘갓고로혀다’는 『두시언해』의 이 용례만 보인다. ‘혀-’는 초기 문헌에는 일반적으로 ‘-’가 쓰였으나 ‘혀-’와 혼기되다가 〈원각경언해〉(1465)부터 ‘혀-’로 통일되어 쓰인다. ¶갓- : 四倒 갓오미 외야〈월석 20:96ㄱ〉. 顚倒 갓 씨라〈능엄 1:80ㄴ〉. 웃 對答 갓오 이 對答 正니〈능엄 4:127ㄱ〉. 일후미 筆受ㅣ니 天竺ㅅ 마리 이와 갓 버거 모로매 그를 두르혀고〈원각 하2-1:48ㄱ〉. 倒 갓 시라〈육조 하:22ㄴ-1〉. 어즈러이 폣 긴 소리 갓오(紛披長松倒)「九成宮」〈두시 6:2ㄴ〉. 갓오- : 爛慢히 곳다온 酒樽을 갓오리로다(爛熳倒芳樽)「寄高適」〈두시 21:23ㄴ〉. 갓로 :  닐오 옷 아래 조 야딜 갓로 닙고〈월석 25:22ㄴ〉. 오 갓로 니버 도로 술위 머여 타 와(倒衣還命駕)「重過何氏五首」〈두시 15:11ㄴ〉. 갓골- : 倒 갓골 도〈신류 하:17ㄱ〉. 어즈러이 폣 긴 소리 갓골오(紛披長松倒)「九成宮」〈두시 6:2ㄴ〉. 갓고로 : 어리여 迷惑야 邪曲 信야 갓고로 볼〈월석 9:57ㄴ〉. 긄  三峽 므를 갓고로 흘리리오(詞源倒流三峽水)「醉歌行」〈두시 8:30ㄴ〉. 갓고로디- : 魔王이며 제 귓것히 다 갓고로디니라〈월석 4:14ㄴ〉. 버미 갓고로딘 며 龍이 업더딘 야 가나모 서리예 롓니 믌 그제와 핏 點을 가매 드리우노라(虎倒龍顚委榛棘 淚痕血點垂胸臆)「柟木 ··· 拔歎」〈두시 6:41ㄴ〉. 갓고로왇- : 文殊ㅣ 老維摩 다 딜어 갓고로와시니〈남명 상:43ㄴ〉. 갓고로와티- : 維摩 갓고로와툐 어루 分別야 붓그러움 시소미 어려울 시라〈남명 상:44ㄱ〉.
주121)
교룡(蛟龍) : 고대 전설상에 나오는 물속에 사는 두 종류의 동물. 전설에 따르면 교는 능히 홍수를 일으키고 용은 능히 비구름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주122)
예기(禮記) : 책이름. 49편. 유가의 5경(經) 중 하나. 전한(前漢) 대성(戴聖)이 편집하고, 후한(後漢) 마융(馬融)이 보집(補輯)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이 예에 관하여 논한 내용을 수록했다. 「곡례(曲禮)」 「단궁(檀弓)」 「왕제(王制)」 「월령(月令)」 「예운(禮運)」 「예기(禮器)」 「내칙(內則)」 「학기(學記)」 「악기(樂記)」 「대학(大學)」 「중용(中庸)」 「투호(投壺)」 등의 편이 유명하다. 교육, 예절, 음악, 농사, 관혼상제 등 고대의 문화 전반에 관하여 유가의 입장에서 기록함으로써 유가의 중요한 경전이 되었다. 『주례(周禮)』, 『의례(儀禮)』와 더불어 삼례(三禮)로 불리었다. 특히 「대학」과 「중용」편은 따로 분리되어 송대 주희(朱熹)에 의해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함께 사서(四書)에 편입되었다.
주123)
엇뎨 : 어찌. 후행하는 ‘物이리오’와 호응한다. 『두시언해』에서 ‘엇뎨’와 비슷한 의문사로 ‘엇디’도 쓰였는데 전자는 ‘何, 豈, 寧, 焉, 曷, 安, 胡’ 등의 번역으로 쓰였고 후자는 주로 ‘那, 豈, 奈何’ 등의 번역으로 쓰였다. 이와 관련된 낱맡로 ‘엇디’로 『두시언해』에서 보인다.
주124)
못 : 연못.
주125)
가온 : 가운데의. 가온+ㅅ.
주126)
물(物)이리오 : 물이겠는가? 物+이+리+오. ‘-오’는 선행하는 ‘엇뎨’와 호응한다. 『두시언해』에서 ‘-리오’는 주로 수사의문문에 쓰인다.
주127)
녜록브터 오매 : 예로부터 옴에. 옛날부터. 녜+로+ㄱ#븥-+어 오+오+ㅁ+애. ¶븓-(仗) : 길히 窮迫야 버들 븓노라(途窮仗友生)「客夜」〈중간두시 2:28ㄱ〉. (著) : 프른 매 주으려 사게 븓니라(蒼鷹飢著人)〈금삼 서安 ··· 待命二首」〈두시 5:53ㄱ〉. (憑) :  節制使ㅅ 尊嚴을 븓고져 놋다(亦憑節制尊)「客居」〈두시 6:49ㄴ〉. (依) : 本來 스싀로 迦葉을 븓노니(本自依迦葉)「秋日 ··· 一百韻」〈두시 20:13ㄱ〉. (傍) : 모미 주글 니언 權要 븓니라(殺身傍權要)「三韻三篇」〈두시 25:15ㄴ〉. (火) : 셔울히 다시 블 븓디 아니야(京都不再火)「徃在」〈중간두시 4:24ㄱ〉. (燃) : 뫼히 퍼러니 곳비치 블 븓 도다(山靑花欲燃)〈중간두시 10:17ㄱ〉. (着) : 그윗 것과 아 거시 제이곰 해 브터셔(公私各地著)「行官 ··· 水歸」〈두시 7:36ㄴ〉.
주128)
돗 : 자리. 돇[席]. 현대국어의 ‘돗자리’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주129)
우흿 : 위의. 우ㅎ+의+ㅅ. ‘우ㅎ’은 ‘ㅎ’말음체언이고, ‘의’는 속격조사이다. 〈중간본〉에는 ‘우’으로 되어 있다.
주130)
진보(珍寶)ㅣ니라 : 진보이니라. 진보이다. 珍寶+이+니+라. ‘-니라’는 화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진술할 때 쓰는 종결어미이다.
주131)
묘당(廟堂) : ①태묘(太廟)의 전당(殿堂). ②조정(朝廷). 임금이 조례(朝禮)를 받고 정사(政事)를 논의하는 전당(殿堂). ③조정(朝廷). 군주를 수장으로 삼은 중앙정부(中央政府)를 가리키는 말. ④조정(朝廷). 제왕(帝王)을 대신하는 칭호. ⑤태묘(太廟)와 명당(明堂). 여기서는 ③의 뜻이다.
주132)
묘당(廟堂)애셔 : 묘당에서. 廟堂+애+셔.
주133)
지극(至極)히 : 지극히. 아주 잘. 至極+히.
주134)
다료 : 다스림을. 다리-[理]+오+ㅁ+. ¶네 다 轉輪聖王이 외야 七寶千子 가져 四天下 다리리어늘 엇뎨 마리 갓고 즐기다〈석상 3:23ㄱ〉. 社稷 다리 콰 과 구룸 몬 期會예(社稷經綸地 風雲際會期)「夔府書懷四十韻」〈두시 3:2ㄴ〉.
주135)
아노니 : 아니. 알-[知]++오+니.
주136)
순후(淳厚) : 돈후(敦厚)하고 질박(質朴)함.
주137)
순후(淳厚)리로다 : 순후할 것이도다. 淳厚#-+리+도+다.
주138)
우몽(愚蒙) : 우몽(愚矇). 어리석고 몽매(蒙昧)해 분명하지 않음.
주139)
은륜(隱淪) : ①신인(神人) 등급(等級)의 하나. 보통 신선(神仙)을 가리킨다. ②은거(隱居)함. 자의 타의로 세상을 등지고 숨어서 지낸다는 말이다. ③은자(隱者)를 가리키는 말. ④몸을 감추어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함. 여기서는 ②의 뜻이다.
주140)
재걸(才傑) : 재주가 걸출한. 才傑#-+ㄴ.
주141)
사 : 사람은. 사+.
주142)
이거늘 : 쓰이거늘. -[用]+이-+거+늘. 15세기에 ‘-’는 ‘사용하다[用], (맛이) 쓰다[苦]’, ‘쓰-’는 ‘(글을) 쓰다[書], (갓을) 쓰다[冠]’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사용하다) : 俱夷 묻샤 므스게 시리〈월석 1:10ㄴ〉. 朝廷이 忽然히 哥舒翰 將軍을 시니(朝廷忽用哥舒將)「喜聞 ··· 五首」〈두시 5:20ㄱ〉. -(맛이 쓰다) : 게으르며  업시워 法엣 마 디 아니야〈월석 23:6ㄴ〉. 뉘 엿귀 다 니뇨 로미 나 도다(誰謂荼苦甘如薺)「寄狄明府博濟」〈두시 8:18ㄱ〉. 쓰-(글을 쓰다) : ㅇ 입시울쏘리 아래 니 쓰면 입시울가야소리 외니라〈훈언 12ㄱ〉. 나히 아호배 굴근 字 스니(九齡書大字)「壯遊」〈중간두시 2:38ㄱ〉. 쓰-(갓을 쓰다) : 冠 쓰 거시니〈석상 3:5ㄴ〉.  조초 葛巾애 빈혀 고자 스고(隨意簪葛巾)「早發」〈중간두시 1:50ㄱ〉.
주143)
어린 : 어리석은. 어리-[愚]+ㄴ. 15세기에 명사형은 ‘어룜’과 ‘어륨’이 공존하였다. ¶乃終내 得디 몯니 어리여 미혹야 邪曲 보 信〈석상 9:36ㄴ〉. 小臣 어리고 鈍야 能 배 업소니 朝廷이 아라 시 祿秩 닙오라(小臣魯鈍無所能 朝廷記識蒙祿秩)「憶昔二首」〈두시 3:62ㄴ〉.
주144)
사 : 사람은. 사+.
주145)
수머 : 숨어. 숨-[隱]+어.
주146)
뎻노라 : 꺼져 있노라. -[淪]+디+어#잇-++오+라. ‘디다’는 ‘다’에 ‘디다’가 결합된 동사로 볼 수 있다. ¶다(자동사) : 브리 香樓에 다라 고 아니 브틀〈석상 23:38ㄴ〉. 낟 불휘 져기 요 아니 환 氣運은 매 디 아니다(穀根小蘇息 沴氣終不滅)「喜雨」〈두시 12:10ㄴ〉. 다(타동사) : 내 香水로 브를 고〈석상 23:46ㄱ〉. 뫼햇 귓거슨 브를 부러 거 브어븨 사 바미 다도록 말놋다(山鬼吹燈滅 廚人語夜闌)「山館」〈중간두시 2:12ㄴ〉. 디- : 帝釋이와 金甁엣 므를 븟니 브리 디거늘〈석상 23:47ㄱ〉. 一生애 서르 뎻노니 時節ㅅ 物은 제 蕭森얏도다(生涯相汩沒 時物自蕭森)「風疾이어~三十六韻이라」〈두시 3:14ㄴ〉.
주147)
사마상여(司馬相如) : 기원전 179~기원전 117. 전한 촉군(蜀郡) 성도(成都) 사람. 자는 장경(長卿)이고, 사부(辭賦)를 잘 지었다. 어렸을 때 독서와 검술을 좋아했으며, 전국시대의 인상여(藺相如)를 사모하여 자기의 이름을 상여로 바꾸었다. 임공(臨邛) 땅에서 탁왕손(卓王孫)의 딸인 탁문군(卓文君)과 만나 성도(成都)로 달아나 혼인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처음에 경제(景帝)를 섬겨 무기상시(武騎常侍)가 되었는데, 병으로 사직했다. 양(梁)으로 와서 매승(枚乘)과 교유했다. 무제(武帝)에게 〈상림부(上林賦)〉를 지어 바쳤다. 이것을 읽고 재능이 있다고 여겨 불러 낭(郞)으로 삼았다. 나중에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사신으로 서남이(西南夷)와 교섭하여 공을 세웠다. 효문원령(孝文園令)에 임명되었지만 병으로 사임했다. 작품의 풍격이 다양하고 사조(詞藻)가 아름다웠으며, 한부(漢賦)의 제재와 묘사 방법을 보다 풍부하게 하여 부체(賦體)를 한나라의 대표적 문학 형태로 자리하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 밖에 「대인부(大人賦)」가 있다.
주148)
소갈병(消渴病) : 한의학(韓醫學)에서의 병(病) 이름. 목이 마르고 소변이 자주 나오며 수척해지는 증상을 보인다. 당뇨병과 누붕증(尿崩症) 등을 포함한다.
주149)
자하(子夏) : 기원전 507~기원전 420?. 전국시대 위(衛)나라 사람. 진(晉)나라 온(溫) 사람이라고도 한다. 성명은 복상(卜商)이다. 공자(孔子)의 제자로, 공자보다 44살 연하였다.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이다. 공자가 죽은 뒤에 위나라 문후(文侯)에게 초빙되어 스승이 되었지만 공자의 죽음을 슬퍼하여 실명(失明)했다고 한다(또는 아들의 죽음 때문에 슬피 울어 실명했다고도 한다.) 서하(西河)에서 강학(講學)했다. 이극(李克)과 오기(吳起),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 등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배웠다. 위문후(魏文侯)가 그를 스승으로 섬겨 예(藝)를 배웠다. 학문은 시와 예에 통했고, 공자의 『춘추(春秋)』를 전공하여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의 원류를 이루었다. 주관적 내면성을 존중하는 증자(曾子) 등과 달리 예(禮)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하는 것이 특색이다. 『논어(論語)』에 그의 말이 적지 않게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 공문(孔門)에서의 위치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시서(詩序)』를 썼다고 전한다.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2년(1009) 동아공(東阿公)에 추증되었다.
주150)
삭거(索居) : 친구와 사귀지 않고 떨어져 있음. 쓸쓸하게 홀로 있음.
주151)
장경(長𡖖)의 : 장경이. 長𡖖+의. ‘-의’는 내포문의 의미상 주어를 가리키는 속격조사이다.
주152)
한 : 많은. 하-[多]+ㄴ.
주153)
오라고 : 오래고. 오라-+고.
주154)
자하(子夏)의 : 자하가. 子夏+의. ‘-의’는 내포문의 의미상 주어를 가리키는 속격조사이다.
주155)
흐러 : 흩어져. 흗-[散]+어. ‘흩-→흗-’은 8종성법의 제약 때문이다. ¶五百 比丘 리고 흐러 나가니〈석상 21:31ㄴ〉. 不散 흗디 아니 씨라〈월석 10:63ㄴ〉.  타 忽然히 져믄  이 야  발 흐러 瞿塘엣 돌 소사디게 호라(騎馬忽憶少年時 散蹄迸落瞿塘石)「醉爲 ··· 相看」〈두시 3:52ㄱ〉. 손 흗거든 層層인 城ㅅ 나조 여 글 네게 엇뎨려뇨(客散層城暮 狐狸奈若何)「舟前小鵝兒」〈두시 17:22ㄱ〉.
주156)
사로미 : 사는 것이. 삶이. 살-[居]+오+ㅁ+이.
주157)
조라 : 자주이다. 자조[數]+이+라.
주157_1)
*〈중간본〉에는 ‘囬’로 되어 있다.
주158)
제민(齊民) : ①평민(平民). ②백성(百姓)을 잘 다스림. 여기서는 ①의 뜻이다.
주159)
몰여뇨 : 몰려다님을. 몰리-[驅]+어#-+니-+오+ㅁ+. ¶目連이 노대 그 어미 몰여 드러가며 블러 닐오〈월석 23:87ㄴ〉. 며  秦人 兵士 受苦왼 사호 모 몰여뇨미 가히와 괘 다디 아니도다(况復秦兵耐苦戰 被驅不異犬與鷄)「兵車行」〈중간두시 4:2ㄴ〉.
주160)
머리 : 머리. 15세기 국어에서 ‘머리[頭], 머리털[髮]’을 뜻하는 ‘머리’와 ‘멀리’를 뜻하는 ‘머리’는 동음이의어의 관계에 있었다. ¶머리(頭) : 頭는 머리라〈훈언 14ㄴ〉. 내 머리 도라 라 로 여(莫令回首地)「收京」〈두시 5:9ㄱ〉. 이웃 짓 사미 담머리예 야셔(隣人滿墻頭)「羌村三首」〈두시 2:66ㄱ〉. 머리(髮) : 부톄 阿難일 시기샤 羅睺羅 머리 갓기시니〈석상 6:10ㄱ〉. 도라오매 미천 머리 다 셰도다(及歸盡華髮)「北征」〈두시 1:5ㄱ〉. 머리(遠) : 그제 그 리 粥 가져 드러 머리 조 바다 좌시고〈석상 3:41ㄱ〉. 비록 나그내로 브터 머리 와슈미 셜우나(雖傷旅寓遠)「發秦州」〈두시 1:14ㄴ〉. 梁國ㅅ 江揔ㅣ 지븨 도라오니 오히려 머리 거믄 고 머리 붓그려노라(遠愧梁江揔 還家尙黑頭)「晩行口號」〈두시 2:29ㄱ〉.
주161)
도로혀 : 돌려. 돌-+오+혀-+어. ‘도로혀’는 ‘돌리다’의 뜻과 ‘도리어’의 뜻이 있다. 이에 반해 ‘도혀’는 ‘도리어’의 뜻으로만 쓰인다. 그러나 『두시언해』 번각본에서는 전부 ‘도로혀’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다. ¶도로혀(돌려) :   디 나래 마 모 기우려 디나 그려기와 가 가마괴예 외오 머리 도로혀 보놋다(清秋落日已側身 過鴈歸鴉錯回首)「呀鶻行」〈두시 17:9ㄱ〉. 도로혀(도리어) : 집 안해셔 기 벌어지와 가야미와 머구믈 아쳗고 기 여 도로혀 모 맛날 고 아디 몯호라(家中厭雞食蟲蟻 不知雞賣還遭烹)「縛雞行」〈두시 17:14ㄴ〉. 도혀(도리어) : 다가 變며 變티 아니호로 商量면  도혀 올티 몯리라〈금삼 1:17ㄴ〉. 져근 미 도혀 믌겨리 답사니  주를  긴 두들게 요라(小江還積浪 弱纜且長堤)「水宿 ··· 群公」〈두시 3:19ㄴ〉.
주162)
뭀 : 무리의. 뭇. 물[群]+ㅅ. ‘물’은 ‘무리’의 뜻으로 15세기에서는 ‘물, 믈, 무리, 므리’의 형태로 쓰였다. ‘믈, 므리, 물, 무리’에 대해서는「贈鄭十八賁」의 ‘靈 芝草ㅣ 뭀 곳다온 거긔 위두 니(靈芝冠衆芳)’〈두시 19:41ㄱ〉 구절의 ‘뭀’ 항목 참조.
주163)
사미 : 사람이. 사+이.
주164)
토라 : 같구나. #-+오+라. 선행하는 ‘사미’와 함께 ‘사람과 같구나’의 의미로 쓰인다.
주165)
열자(列子) : ①열어구(列御寇). 선진시대(先秦時代) 초기의 도가(道家)라 전한다. ②많은 사자(士子)를 가리키는 말. ③방언(方言). 군대가 나아가는 행렬(行列). ④책 이름. 『열자(列子)』는 『노자(老子)』, 『장자(莊子)』 등과 함께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담고 있는 중국의 고전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 열어구(列禦寇)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이다. 여기서는 ④의 뜻이다.
주166)
계함(季咸) : ?~?. 서주(西周) 정(鄭) 사람. 신무(神巫)로, 전하는 말로 사람의 생사와 길흉화복을 알았다고 한다.
주167)
추로(鄒魯) : ①추(鄒)는 맹자(孟子)의 출생지인 추나라. 노(魯)는 공자(孔子)의 출생지인 노나라를 일컫는 것으로, 곧 맹자와 공자를 일컫는 말. 또는 공자와 맹자가 주창한 유교(儒敎)를 말하기도 한다. ②추로지향(鄒魯之鄕). 여기서는 ①의 뜻이다.
주168)
무함(巫咸) : 무당. 무함.
주169)
더브러 : 더불어. 함께.
주170)
묻디 : 묻지. 묻-[問]+디.
주171)
몯리로소니 : 못할 것이니. 몯#-+리+로+ㅅ+오+니. ¶지븨 겨시면 輪王이 외시리로소다〈석상 3:1ㄱ〉. 이 世界옌 千佛이 나시리로소니〈월석 1:40ㄱ〉. 녯 功業을  말리로소니  일후믄 어듸 잇뇨(素業行已矣 浮名安在哉)「秋日 ··· 三十韻」〈두시 3:8ㄴ〉.
주172)
모 : 몸을. 몸+.
주173)
용납(容納)디 : 용납하지. 容納#-+디.
주174)
몯니라 : 못한다. 몯#-+니+라. ‘-니라’는 화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진술할 때 쓰는 종결어미이다.
주175_1)
*〈중간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주175)
창망(滄茫) : ①광활해서 끝이 없는 모양. ②모호해서 분명하지 않는 모습. ③몹시 바쁜 모양. 여기서는 ①의 뜻이다.
주175_2)
*〈중간본〉에는 ‘茫은’으로 되어 있다.
주175_3)
*〈중간본〉에는 ‘曠逺ㅣ라’로 되어 있다.
주176)
감격(感激)고져 : 감격하고자. 感激#-+고#지-+아. ¶-고져 : 欲 고져  씨라〈훈언 2ㄱ〉.  城에 소남긧 누늘 보고 도라갈  나고져 비르서 너기노라(春城見松雪 始擬進歸舟)「曉望白帝城鹽山」〈두시 14:30ㄱ〉.
주177)
나 : 하나. -+나. 〈중간본〉에는 ‘니’로 되어 있다.
주178)
장차(將次)ㅅ : 장차. 將次+ㅅ. ‘ㅅ’은 부사화접미사이다. 『두시언해』에는 ‘, ’로도 표기되었다. 〈중간본〉에는 ‘將次ㅅ’로 되어 있다. ¶將次ㅅ : 몸 막  긴 갈 가지고 將次ㅅ 崆峒山 비곗고져 노라(防身一長劒 將欲倚崆峒)「投贈 ··· 二十韻」〈두시 5:43ㄴ〉. 녯 功業을  말리로소니  일후믄 어듸 잇뇨(素業行已矣 浮名安在哉)「夔府書懷四十韻」〈두시 3:8ㄴ〉. 수프렛 곳다온 남 여르믈 내야  업수메 다랏고 닙과 고고리 가지 여희여 다시 디 몯놋다(林香出實垂將盡 葉蔕辭枝不重蘇)「寒雨朝行視園樹」〈두시 15:15ㄱ〉.
주179)
느즈니 : 늦으니. 늦-[遲]+으니.
주180)
훤츨 : 훤칠한. 훤츨#-+ㄴ. 파생부사는 ‘훤츨히’이다. ‘훤츨-’는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되고, ‘훤츨히’는 다른 문헌에서도 쓰였다. ¶훤츨- : 녯 지블 本來 사 훤츨호 依藉호니 너를 빌여 올마 살에 코 宴遊요 停寢노라(古堂本買藉踈豁 借汝遷居停宴遊)「簡吳郞司直」〈두시 7:19ㄴ-20ㄱ〉. 훤츨히 : 臆度앳 議論업서 훤츨히 實로 十二部經엣 眼目이며〈원각 서:10ㄱ〉. 언제 世俗앳  러 리고 훤츨히 바래  타 가려뇨(何當擺俗累 浩蕩乘滄溟)「橋陵 ··· 諸官」〈두시 6:20ㄴ〉.
주181)
흥(興)곳 : 흥이. 興+곳. ‘곳’은 강세보조사이며 음운환경에 따라 ‘옷’으로도 쓰인다. ¶-곳 : 다가 곳 내 門 알 오나 매로 그우리 텨 리고〈월석 23:73ㄱ〉. 열 지븨 몃 사미 잇니오 즈믄 뫼콧 갓 :제 하도다(十室幾人在 千山空自多)「征夫」〈두시 5:12ㄴ〉.
주182)
신기(神奇)로외요미 : 신기함이. 神奇#롭-+오+ㅁ+이.
주183)
잇도다 : 있도다. 있-+도+다.
주184)
체루(涕淚) : ①콧물과 눈물. 보통 눈물을 가리킨다. ②콧물과 눈물이 모두 흐름. 곡읍(哭泣)함. 여기서는 ②의 뜻이다.
주185)
의건(衣巾) : ①의복(衣服)과 패복(佩巾). ②의복(衣服)과 두건(頭巾). 여기서는 ②의 뜻이다.
주186)
그듸 : 그대를. 그듸+. ‘그듸’는 ‘너’보다 상대방을 조금 높여 대우하는 2인칭 대명사이다. 15세기에 ‘그듸, 그디, 그’가 쓰였는데 점차 ‘그’로 통일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두시언해』에서 ‘그듸’와 ‘그’가 같이 쓰였다. ¶耶輸는 겨지비라 法을 모 즐급 드리워 온 들 몯 러 리니 그듸 가아 아라듣게 니르라〈석상 6:6ㄴ〉. 오직 그듸 醉야셔 기 어러온 客을 랑야셔 온 번 서르 디나오매 디 다디 아니다(唯吾醉愛清狂客 百遍相過意未闌)「遣悶 ··· 曹長」〈두시 3:48ㄱ〉. 그 爲야 波羅蜜 서 지시니라〈금삼 3:57ㄴ〉. 그 徐卿의 두 아리 나  奇異호 보디 아니다 됴 믈 感應야 서르 조차 나도다(君不見徐卿二子生絕奇 感應吉夢相追隨)「徐卿二子歌」〈두시 8:24ㄱ〉.
주187)
놀애 : 노래를. 놀애+.
주188)
블로니 : 부르니. 부르-[歌]+오+니.
주189)
므리 : 눈물이. 눈+ㅅ+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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