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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충신도 1:38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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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ㄱ

千鎰投崖

1:38ㄴ

判決事 주001)
판결사(判決事):
조선 시대 장례원(掌隷院)의 정3품 관직. 장례원의 장관이며 노비 송사에 대한 판결 책임관이다. 고려나 조선 초기까지는 도관(都官)에서 노비 전적과 노비 송사를 담당하였으나, 1467년(세조 13) 노비 송사의 증가에 따라 전담기관으로서 장례원이 독립하였고, 그 장으로 판결사 1인을 두게 되었다.
金千鎰 주002)
김천일(金千鎰):
(1537(중종 32)~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의병장. 임진왜란 때 나주에 있다가 고경명(高敬命)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왜적에게 점령된 서울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싸우고,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군대를 도왔으며,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나주 출신. 할아버지는 주부 김윤손(金潤孫)이고, 아버지는 진사 김언침(金彦琛)이며, 어머니는 양성 이씨(陽城李氏)로 부위(副尉) 이감(李瑊)의 딸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김인후(金麟厚)ㆍ유희춘(柳希春) 등과 교유하였다.
羅州 주003)
나주(羅州):
현 전라남도 나주시.
人壬辰倭亂首倡義兵直向京師入守江華 주004)
강화(江華):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읍. 이 문헌에는 ‘江華’를 ‘강홰’로도 표기하고 ‘강화’로도 표기하고 있다. ¶세 겨집은 강홰부 사이라 부 아젼의 쳐라 신우 삼년의 예 강화  도젹야 방히 주기거(열녀도 1 : 18ㄴ).
以通兩湖之路畿輔之民倚以爲保障 주005)
보장(保障):
어떤 일을 보증하고 뒷받침함.
及入晉城與諸將誓以死守城陷左右勸避千鎰不起曰我當死於此與崔慶會等痛哭於矗石樓 주006)
촉석루(矗石樓):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本城洞)에 있는 누(樓). 남강(南江)에 임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八作)집이 웅장(雄壯)한 건물(建物)로, 진주성(晉州城)의 주장대(主將臺)이다.
上自投崖下而死 昭敬大王贈左贊成 주007)
자찬성(左贊成):
앞 대문에서는 ‘左贊成’을 ‘좌찬셩’으로 한글 표기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자찬셩’으로 표기하고 있다.
今 上朝旌門
판결 김쳔일은 나 사이니 임진왜난의 의병을 슈챵여 셔울로 바 향여 강홰 드러가 딕희여  주008)
튱:
충청도(忠淸道).
졀라도 주009)
졀라도:
전라도(全羅道).
길흘 주010)
길흘:
길ㅎ[路] + -을(목적격 조사). 길을. ‘길ㅎ’은 ㅎ종성 체언이다.
통니 긔 주011)
경긔:
경기도(京畿道).
이 의지야 보쟝 삼앗더라 밋 진셩의 드러셔 모 쟝슈로 더브러 죽기로 딕희기 셰고 함셩 주012)
함성(陷城):
성을 함락함.
여 좌우엣 사이 권여 피라 거 쳔일이 니디 주013)
니디:
닐-[起] + -디(보조적 연결 어미). 일어나지.
아니여 오 내 맛당히 예셔 주014)
예셔:
여기서.
주그리라 고 최경회 주015)
최경회(崔慶會):
(1532(중종 27)~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의병장.
등으로 더브러 툑셕누 우희셔 통곡고 스스로 바회 주016)
바회:
바위[岩].
아래 려뎌 주017)
려뎌:
리-[降] + -어(연결 어미) + 디-[落] + -어(연결 어미). 내려져. 떨어져.
주그니라 쇼경대왕이 증 자찬시고 금 샹됴애 문 시니라
천일투애 - 김천일이 낭떠러지에 몸을 던지다
판결사인 김천일(金千鎰)은 나주(羅州) 사람인데, 임진왜란 때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켜 서울로 바로 투입하고, 그리고 강화도로 진을 옮겨 방책(防柵)을 쌓아 지킴으로써 충청도 전라도로 통하는 길을 확보하게 되니, 경기도 백성이 의지하여 그들이 보장 받는 길로 삼았다. 뒤미처 진주성으로 들어가서 모든 장수들과 더불어 죽기를 각오하고 성 지키기를 맹세 주018)
맹세(盟誓):
실천할 것을 다짐함. ‘盟誓’에 대해서도 이 문헌에서는 ‘셰’와 ‘셔’의 두 가지 표기가 공존하고 있다.
하였으나 끝내 성이 적군에게 함락되니, 좌우의 사람들이 피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김천일은 일어나지 않고 이르기를, “나는 마땅히 여기서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촉석루 위에서 통곡하고는 스스로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죽었다. 선조 임금께서 좌찬성을 추증하시고, 지금의 임금께서 정문을 내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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