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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효경언해+책정보

26ㄴ

事君 章第二十一
子曰 君子之事上也 進思盡忠 退思補過 將順其美 匡救其惡 故

27ㄱ

上下能相親也
제21장 사군(事君)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가 임금을 섬기되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며, 물러가서는 허물을 고칠 것을 생각하여, 장차 〈임금의〉 그 아름다운 미덕에는 순종하고, 그 악한 점은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고로 위와 아래가 능히 서로 친할 수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광구(匡救) : 바로잡아 바른길로 가게 함. 우리 근현대사에는 이 말이 왜곡된 적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민원식(閔元植)은 ‘광구 예안(匡救例案)’이란 글을 발표하여 3.1 운동을 비난하는 글을 올려 많은 사람들에게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다. 그렇게 하는 일이 바로잡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어려서 일본에 건너갔다. 1906년 귀국,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와 친교를 맺어 내부 위생과장, 제실 회계심사위원 등을 지냈다. 1907년 내부 위생과장으로 있을 때 ‘위생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1908년 친일파의 거두 이지용(李址鎔)과 함께 대한실업협회를 만들어 반민족적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했다.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소요의 원인과 광구 예안’이라는 제목으로 1919년 4월 9일부터 16일까지 8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하면서 3·1운동을 혹평했다. 1920년 일제가 민족회유책의 일환으로 민간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자 자신이 조직했던 협성구락부를 국민협회로 개칭하고 그 기관지로 4월 1일 ‘시사신문’을 창간했다. 창간 후 조선총독부의 시정방침에 대해 노골적인 논조로 지지를 보냈고, ‘동아일보’와도 맞섰다. 1921년 조선인의 참정권 청원을 목적으로 일본에 갔다가 2월 16일 도쿄 데이고쿠 호텔에서 양근환(梁槿煥)에게 맞아 죽었다.
詩云 心乎愛矣 遐不謂矣 忠心臧之 何日

27ㄴ

忘之
『시경』 〈소아 습상(隰桑)〉에 이르기를, “마음으로 사랑하는데 어찌 고백하지 않으리오. 마음 가운데에 품고 있는데 어느 날에 잊으리오?” 하였다.
습상(隰桑) : 『시경』 「소아」편에 진펄에 자라는 뽕나무의 아름다움을 들어 성현의 삶을 예찬한 시. 여기서는 덕 있는 군자를 사모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인데, 한편에서는 남녀의 깊은 사랑을 노래한 시라고 보기도 한다. 뽕나무는 습한 곳에서 잘 자란다. 뽕나무 하면 중국 항주 소주를 떠올린다. 나무를 심고 누에를 길러 명주 비단을 얻는 잠업 기술을, 중국은 수천 년 동안 거의 이를 독점해 부를 키워 왔다. 중국을 ‘차이나’라 하는바, 흔히 이는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秦) 나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연유는 명말 청초 예수교 선교사들의 주장이 그렇게 상식으로 먹혀 버린 것이다. 진이 등장하기 전부터 페르시아나 인도에서는 중국을 비단 생산과 관련 있는 진(Cin)이나 지나(Cina)로 불렀다. 중국의 누에치기는 이미 신석기 시대에 시작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서는 국가 기간산업으로 자리를 잡는다. 중국 시문학의 얼굴이요, 최초 최고의 시가집인 『시경』에는 305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 135편에 나무와 풀이 올라있다. 특히 뽕나무는 모두 20편에 31번이나 실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식물의 왕좌를 차지한다. 『맹자』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5무의 집 가장자리에 뽕나무를 심으면 50살 먹은 사람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다”라는 말이 글자 하나 바뀌지 않고 두 번이나 등장한다. 뽕나무가 당시 집안 살림의 버팀목이자 대들보였다. 동시에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다리의 구실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니 잠식(蠶食)처럼 뽕나무나 누에와 관련된 말뭉치 역시 잠상이 옛사람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그 무게감을 실감하게 한다. 1972년 발굴을 시작하여 중국 고고학계를 흥분시킨 호남성 창사시의 마왕퇴(馬王堆)의 무덤은 중국 고대 비단 기술의 알맹이를 가늠케 한다. 옷만이 아니라 허리띠와 향주머니, 거울싸개, 베개, 신발 등에도 고도의 명주실 짜기로 알려진 비단이 쓰였다. 비단은 신분별·계급별 차이를 드러내는 의관 제도를 정립시켰다. 중국과 이웃한 유목 민족 사회에서도 지배층은 일반 백성의 가죽옷과 차별성을 더하기 위하여 비단옷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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