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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효경언해+책정보

1ㄱ

古文孝經 孔氏傳
開宗明義 章第一
仲尼閑居 曾子侍坐 子曰 參 先王 有至德要道 以訓天下

1ㄴ

民用和睦 上下亡怨. 女知之乎
『고문효경』 공안국(孔安國)이 전(傳)을 쓰다.제1장 개종명의(開宗明義)
중니(공자)께서 한가로이 계셨다. 그 때 증자가 〈공자를〉 모시고 앉았는데,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아! 선왕(先王)이 지극한 덕과 중요한 도를 두시어 천하 백성이 화목하였고 위와 아래가 서로 원망함이 없었다. 너는 그 사실을 아느냐?” 하였다.
공씨전(孔氏傳) : 공안국(孔安國)이 전을 쓰다. 공자의 효에 대한 말씀을 증자가 정리하여 공씨 집안 벽 속 돌함에 감춰 두었는데 분서갱유 이후 발견되어 노나라 삼로 공자혜가 천자에게 바치니 고문 예서체로 다시 써서 책을 엮게 하였다. 그 후 공안국(孔安國)이 이 책을 구해 전(傳)을 써서 주해한 책이 바로 이 『고문효경』이다.
개종명의(開宗明義) : 중요한 뜻을 열고 대의를 밝힘. 『효경』의 총론에 값한다.
자왈(子曰) :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공자는 유교의 시조로 존경받는 고대 중국의 정치가이며 사상가(전551~전479). 노나라의 무관 숙량흘(叔梁紇)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공자의 ‘자(子)’는 경칭 접미사로 흔히 선생에게 쓴다.
여지지호(女知之乎) : 너는 이를 아는가? 여기 여(女)는 너를 뜻하는 여(汝)의 간략표기로 볼 수 있다. 소리가 같고 뜻이 다른 전의에 값한다.
호(乎) : 의문 조사. 말하자면 한문에서도 실사보다는 허사로서 문법적인 기능을 하면서 문법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형태소들이 있다. 이 형태소는 의향을 물음으로써 하나의 문장을 끝내는 종결어미다. 중세어에서 체언에 의문형 어미 ‘-가/아,-고/오’ 가 통합하여 의문문이 된다. 이 때 ‘-가/아’는 음운탈락에 따라서 ‘ㄱ-〉ㅇ’이 된 것이고, ‘-가/고’의 대립은 판정의문문과 설명의문문의 구별에 의해 갈래짓는다. 중세에는 체언 뒤의 의문 보조사가 바로 결합하여 의문문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현대국어에서는 ‘이것이 집+이+냐’에서처럼 체언+서술격조사의 의문형’에 의해 의문문이 형성된다. 1~3인칭의 주어가 있을 때 ‘-가/고’의 대립은 의문 보조사와 같이 의문사가 포함된 설명의문문의 경우는 ‘-고’, 의문사가 없는 판정의문문의 경우는 ‘-가’가 사용된다. 한편 ‘-가, -고’의 형태는 아주 높임의 쇼셔체의 의문형 어미이고 라체는 ‘-가,-고’ 야쎠체는 ‘-닛가(판정, 설명의문문의 대립 없음), 반말체는 ‘-리, -니’의 형태로 나타난다. 현대국어에서는 해라체는 ‘-느냐’, 하게체는 ‘-는가’, 하오체는 ‘-오’ 하십시오체는 ‘-ㅂ니까’의 형태를 취한다. 너(네) 같은 2인칭 주어를 가지는 문장의 의문문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중세어에는 2인칭 의문문의 경우 관형사형 어미 ‘-ㄴ’ 뒤에 보조사 ‘-다’가 결합한 ‘-ㄴ다’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설명-판정 의문문의 대립 없이 모두 ‘-ㄴ다’로만 사용되었다. 현대어에서는 2인칭 주어를 가지는 의문문도 1, 3인칭 주어의 의문문과 마찬가지로 현대어에서는 해라체는 ‘-느냐’, 하게체는 ‘-는가’, 하오체는 ‘-오’, 하십시오체는 ‘-ㅂ니까’의 형태를 취하여 의문법이 실현된다.
曾子避席曰 參 弗

2ㄱ

敏 何足以知之乎
증자가 자리를 피하매 말씀하시기를, “삼아. 너는 민첩하지 못하니 어찌 족히 그것을 알겠는가?” 하였다.
피석(避席) : 자리를 피함. 윗사람이 물을 때는 민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하는 것이 아랫사람의 예의다.
증자(曾子) : 중국의 철학자(전505~전436). 이름은 삼(參)이고, 자는 자여(子輿)이다. 공자의 문하생이며 『대학』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대학』은 『예기』의 한 부분이고 4서 3경 가운데 하나로, 그는 여기에서 유가의 덕목인 충(忠)과 서(恕)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유가에서 표방하는 효를 재확립하는 데 힘썼는데, “어버이를 기리고, 어버이를 외면하지 않으며, 어버이를 모신다.”라고 하여 효를 세 단계로 갈래를 지었다. 그가 공자의 효에 대한 말씀을 정리하여 벽 속에 감추어 둔 것이 효경의 바탕이 되었다.
子曰 夫孝 德之本也 敎之所繇生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효는 덕의 근본이어서 가르침의 말미암는 바다.
덕지본야(德之本也) : 덕의 근본이다. 덕은 자원으로 보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직(直)과 심(心)을 합친 덕(悳)에 ‘밖에서 사람이 바람직하고 안에서 나에게 얻어진 것’이라 했다. 곧 덕이란 사람이 스스로의 인격수양을 통해서 얻어지고 그것이 다시 행위를 통해 드러남을 뜻한다. 중국에서 전래적으로 덕이란 것은 유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덕은 유학의 정치이념인 덕치(德治)와 예치(禮治)를 설명하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유교사상은 인의 도덕과 그것의 정치적 실현을 말하는 덕치주의를 중요시한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성현이 사람에게 오륜을 가르침으로써 사람을 짐승과 다르게 하는 도덕적 세상을 만든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성현은 지배층으로 나타나고 지배층은 스스로의 인격수양을 통해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형이 되어야 했다. 인간적으로 완성을 이룬 성현은 자신의 수양과 수기를 바탕으로 짐승과 같은 무식한 피지배층인 민초를 가르치고 이끌어 가야 하는 구실을 떠맡게 된다. 이때 지배층이 대다수 무지한 백성을 가르치는 방법은 형벌이나 제도로써 하는 것이 아니고 덕과 예로써 했다. 공자는 ‘백성을 인도하는 데 정치나 제도로써 하고 백성을 가지런히 하는 데 형벌로써 한다면 백성은 임시 책임을 면하려고만 하지 부끄러움을 모른다. 백성을 인도하는 데 덕으로써 하고 백성을 가지런히 하는 데 예를 가지고 한다면 백성은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바로잡힐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논어 위정편). 이러한 덕치의 정치적 성격은 유교가 국가의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한대(漢代) 이후 더욱 선명해진다. 한대에는 동중서(董仲舒)의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에서 보여주듯이, 재난이란 단순히 자연현상의 결과가 아니고 군주의 실정에 따른 하늘의 벌줌으로 풀이하였다. 그래서 통치자인 군주는 이러한 재난을 막기 위해서 덕을 닦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군주는 덕을 닦아 하늘을 감동시키고 현실정치를 올바르게 실행해야만 했다. 송대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공맹의 가르침을 학문적으로 더욱 철저히 체계화하게 되고 덕치주의의 덕치론도 더욱 다듬어졌다. 즉 성리학이 오경보다 사서를 중시하면서 대학이나 중용의 명덕(明德)·성(誠)·천도(天道) 등의 이념을 철학적으로 강화함으로써 덕치의 논리는 더욱 굳건해졌다. 중국 도가에서는 덕을 도(道)의 잠재력 또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초월적 실재로 설명한다. 한편, 유가에서는 덕을 내적인 선(善), 즉 올바른 행동으로 보았다. 덕을 이같이 정의함으로써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맞는 가치관을 세우고자 했다. 덕이란 도의 상호작용으로서 모든 사물에서 드러난다. 씨앗이 저절로 나무로 자라남과 같이 사물을 교화시키는 뿌리 힘이 바로 덕이다. 따라서 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도가 드러난 것이다. 도가의 〈도덕경〉에서 사람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제 구실을 다하는 것이 덕으로 보고 있다. 누구든 이 내부의 작용에 맞추면, 어떤 경우에도 부인할 수 없는 자연의 힘과 조화를 이루며 살게 된다. 우리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위해 욕심이나 경쟁심을 버리면, 최고의 덕을 이루게 된다. 현덕은 밖으로는 만물을 자신에게 돌아오게 만들고, 안으로 하늘의 원리를 영감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復坐 吾語女身體

2ㄴ

髮膚 受于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아라. 내가 너에게 말해 주마. 너의 몸과 머리 터럭과 살은 어버이로부터 받은 것이매 감히 이를 헐어 상하지 않게 함이 효도의 시작이다. 출세를 하고 도리를 행하여 그 이름을 후세에 날림으로써 어버이의 이름을 드러냄이 효도의 끝이다.
신체발부 수우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受于父母不敢毁傷) : 우리 몸과 터럭 하나라도 어버이로부터 받은 것인데 이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신체 발부에 대한 이야기 한 편을 보자. 고종 32년(1895)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 이후 새로이 조직된 김홍집 내각은 음력을 뒤로 하고 양력을 사용하며 소학교를 설치하며 군제를 신식 군대로 바꾸었다. 동시에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내려 이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등 돌발적인 내정개혁을 밀어붙였다. 그 가운데 단발령을 시행하기 위하여 황제였던 고종이 먼저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이발을 했으며 내부대신 유길준은 백성에게 강제로 상투를 자르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을미사변 이후 백성들의 항일 감정이 극에 달했음을 돌보지 않고 행해진 이 개혁은 일반 백성들로부터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신체 발부는 어버이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서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함부로 하면 불효가 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겨오던 선비들이 크게 반발했다. 이르자면 ‘가단두불가단발(可斷頭不可斷髮)’이라 하여 목숨을 내걸고 반대를 한 것이다. 더욱이 김홍집 내각은 친일내각이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단발령이 일본의 배후 조종으로 나온 것으로 판단한 이들은 더욱 분개하여 마침내 의병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가장 앞선 사람이 유인석· 이소응· 이춘영· 김복한 등이었다. 이윽고 김홍집 정부는 이들 의병을 잠재우기 위하여 친위대를 돌연 파견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진 고종의 러시아 공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계기로 김홍집 친일 내각이 무너지고 김홍집은 단발령과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주동으로 주목받고 있던 차에 흥분해 있던 백성들에 의해 피살당하고 단발령 사건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夫孝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
무릇 효란 어버이 섬김에서 시작하여, 임금을 섬김이 중심이요, 〈벼슬길에 나아가 도를 행하는〉 출세함에서 끝난다.

3ㄱ

大雅云 亡念爾祖 聿脩其德
『시경』 대아 〈문왕 편에〉 이르기를, “너의 조상 생각을 안 하느냐? 이로써 그 덕을 닦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대아운(大雅云) : 『시경』 대아편에 이르기를. 『시경』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이다. 이는 공자(전551~전479)가 엮었다고 한다. 그는 이를 문학적 표현의 정형이라고 일컬었다. 많은 주제를 품고 있음에도 그 제재가 줄곧 ‘즐겁되 음탕하지 않고 슬프되 상심하지 않기[樂而不淫, 哀而不傷]’ 때문이다. 기원전 11세기 무렵 주(周)나라 초엽부터 춘추시대 중엽까지의 시가 305편을 엄선하여 모았다. 이렇게 많은 작품 가운데서 가려 뽑았다고 하여 이를 산정(刪定)이라 한다. 크게 풍(風)·아(雅)·송(頌)으로 갈라지며 모두 노래로 부를 수 있다. 말하자면 노래하는 문학이었다. 고대 중국의 향가였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풍은 민간에서 모은 노래로 모두 160편이다. 여러 나라의 노래가 수집되어 있으며 이를 국풍이라 한다. 주남(周南)·소남(召南) 등 15개국의 노래로 나누어진다. 대부분이 서정시로서 이성 사이의 사랑이 내용의 주류를 이룬다. 아는 소아(小雅) 74편과 대아(大雅) 31편으로 구성되며 궁중에서 불러지던 작품이 대부분이다. 형식적·교훈적으로 서사적인 작품들도 있다. 송은 주송(周頌) 31편, 노송(魯頌) 4편, 상송(商頌) 5편으로 구성되는데, 신과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악곡을 모은 것이다. 일종의 궁정문학이다. 주송은 대체로 주나라 초기, 즉 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소왕(昭王) 때의 작품으로 보인다. 노송은 노나라 희공(僖公) 때의 시문이다. 상송은 『시경』 중에서 가장 오래된 시로 여겨져 왔으나, 청대 위원(魏源)이 후대의 작품이라는 증거를 제시했다. 『시경』의 내용은 매우 넓다. 통치자의 전쟁·사냥, 귀족계층의 부패상, 백성들의 애정·일상생활 등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형식상으로는 4언을 주로 하며 부(賦)·비(比)·흥(興)의 수사법을 원용하고 있다. 부는 자세한 묘사, 비는 비유, 흥은 사물을 빌려 전체 시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말한다. 이러한 수법은 후대 시인들이 계승하여 몇 천 년 동안 전통적인 예술적 기교로 자리잡았다. 일본의 하이구나 한국의 시조와 대응되는 형식의 문학이다.
율수기덕(聿脩其德) : 이로써 그러한 덕행을 닦는다. 율(聿)은 ‘이에, 마침내’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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