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기념사업회세종고전 소개공지사항

세종고전 데이타베이스

특수문자입력기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트위터
URL
Ctrl+C를 눌러 클립보드로 복사하시고 Ctrl+v로 붙여넣기 하세요.

전체

역주 효경언해+책정보

발1ㄱ

孝經大義跋
聖人作六經以詔天下後世 其於道德性命之說備矣 然而於孝特加詳焉 至別爲一經者 何耶 盖百行非孝不立萬善 非孝不行所謂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彛也 自天子以至庶人誠不可一日而不講也 隋志曰 孔子旣敍 六經題目不同 指意差別 恐斯道離散 故作孝經以總會之明其枝流 雖分本萌於孝 其說是已 於此盡心焉 則六經之道擧在是矣 秦火旣熄遺經 間出壁書與今文雜行

발1ㄴ

雖經群儒辨論 補綴而輒 復湮廢
至宋朱子始爲刊誤 又次其經傳以復孔氏之舊 繼以鄱陽董氏爲之 註釋極其歸趣 然後 一經之條貫煥 然其有功於聖門甚大 而經之顯晦 實有非偶然者矣
효경대의 발문
성인이 6경(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악기)을 지어서 천하의 후세 사람들을 가르쳤으니, 그로써 도덕과 천성과 명운에 대한 풀이가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효에 대해서만은 특별히 좀 더 상세하게 하여, 따로 하나의 경전(효경)을 삼음에 이르렀으니, 어째서이겠습니까? 무릇 백 가지의 행실은 효가 아니면 만 가지의 선함이 바로 설 수가 없고, 효가 아니면 행하지 않음이기 때문이니, 이것이 이른바 하늘의 경이고, 땅의 의로움이며, 백성의 반듯한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하루라도 익혀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수서(隨書)』 「경적지(經籍志)」에 이르기를, ‘공자께서 지으셨으나 6경의 제목은 같지 않고 가리키는 뜻도 다르니, 유도(儒道)가 흩어질까 염려스럽다. 그러므로 효경을 하나로 모아 묶어서 그 갈래를 밝힌다. 비록 나누어졌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은 효에서 움터 나온 것이다.’ 하시니, 그 말씀이 옳습니다. 이에 마음을 다하면 6경의 도리는 모두 다 이에 귀속됩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로 살아남은 경전들이 더러 나왔으나 비록 유가들의 담론을 거쳐서 보완되기도 하다가도 번번이 다시 없어졌고, 벽서와 금문이 다 섞여서 유통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송나라 주자(朱子)에 이르러 비로소 틀린 것을 바로잡았으며, 또 그 경(經)과 전(傳)의 차례를 공씨(孔氏; 孔安國)의 옛 글로 되살렸고, 이어서 파양(鄱陽)의 동씨(董氏; 董鼎. 董季亨)가 그것을 저본으로 주석(註釋)하여 그 귀취(歸趣; 歸趨)를 극진하게 한 뒤에야 한 경전으로서 모습이 분명해졌으니, 성문(聖門; 孔門)에 미친 공이 매우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효경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감추어짐이 실로 우연한 일은 아닙니다. 〈주자의 간오와 동정의 주석이 나오기를 기다린 셈입니다.〉
惟我 主上殿下以聰明睿智之聖握君師之丕責 化民成俗未嘗不以彛倫爲急 一日御經筵與儒臣論治道 因歎孝經之敎久廢於世 又問其註疏之有無 左右以是編聞卽蒙宣索覽之 嘉賞將鋟榟以廣其傳 猶

발2ㄱ

慮窮閻愚下之民 未喩其義也 下弘文館 悉解以諺語 使人易曉 且命臣略叙其後
생각건대, 우리 주상전하(선조)께서는 총명하시고 지혜로우신 성인(聖人)으로 임금과 스승으로서의 큰 책임을 맡으셔서, 백성을 교화하시고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어 사람의 떳떳한 도리 세움을 급선무로 하지 않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루는 경연(經筵)에 나아가 여러 신하들과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한 도리를 논의하셨는데, 효경의 교화가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음을 개탄하고, 또 그 주석의 유무를 물었습니다. 좌우 신하들이 이 글을 널리 수소문하여 찾아오니 주상께서는 이 책을 보시고, “참으로 훌륭하구나.” 하시며, 간행하여 널리 펴고자 하셨으면서도 오히려 산촌 마을의 백성들이 글의 뜻을 알 수 없을까를 염려하셨습니다. 이에 홍문관에 명을 내려 우리말로 해석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고, 또한 신(유성룡)에게 명하시기를 이 사실을 대략 줄여 글의 끝에 싣도록 하셨습니다.
臣竊惟堯舜之道 孝悌而已 其親九族 平百姓恊萬邦以至鳥獸魚鱉咸若 皆孝之推也 三代聖王率由斯道治化之隆 後世莫及 及其衰也 孔子只以空言與弟子相授受 卽其經中所載 言及古昔必稱先王 盖其傷之也 深矣
自是厥後 微言絶大道壞人心貿貿已 千有五百餘年矣 歷代以來雖不無英君誼 辟其所以把持世道主張化權者

발2ㄴ

不過曰 功利而已 術數而已 孰肯以是爲念哉 則善治之不復而禍亂之相尋也 無怪
신의 생각에 요순의 도(道)란 효제(孝悌)라고 봅니다. 그들(요순)은 9족을 친화하고 백성을 공평하게 밝히고 만방을 화합하여, 그 도가 새나 짐승이나 물고기들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모두가 다 효에 근거하여 미루어 행한 것입니다. 삼대(하은주) 성왕 시절 유도(儒道)로써 백성을 교화함의 융성됨이 후세가 미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마침내 주나라가 쇠퇴하니, 공자는 다만 공허한 말로써 그 경문 가운데 실린 바를 제자들과 주고받을 뿐이었습니다. 옛날을 말할 때면 반드시 선왕(先王)을 들어 말씀하셨다는 것으로 보아, 공자가 심히 안타깝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그 뒤로 미미한 말조차 끊어지고 대도(大道)는 무너져 백성들의 인심은 희미하게 된 지 벌써 천오백여 년이 흘렀습니다. 역대 이래로 비록 훌륭한 임금의 떳떳한 도의를 지키려 함이 없지 않았을지라도 임금들이 치세의 도리로 백성의 교화만을 내세우는 권위 때문에 그것은 다만 공명심과 이로움을 앞세울 뿐이었으니, 또한 그것은 술수일 뿐이었습니다. 누가 이것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훌륭한 정치가 돌아오지 않고 화란만 이어진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今聖上獨穆然深思推究化源乃於聖人之經 尊信表章 旣以是躬行 建極於上 又以是導迪牖民於下 其於復堯舜三代之治也 何有抑 臣又有感焉 聖遠言湮經 殘敎弛古道之行 雖不可一日 而兾然降衷秉彛之天亘萬古 而猶在聖經所書 卽人心所具之理 反而求之 寧有不得者哉 嗚呼 誰無父母 誰非人子 孰倡而不和 孰感而不應 故曰 上有好者下必

발3ㄱ

有甚焉者
지금 성상께서는 홀로 고요히 깊이 생각하시어 교화의 근원이 성인의 경문에 있음을 미루어 구하셨습니다. 이로써 존중하고 믿어 경문을 드러내시어 이미 실천적으로 행함을 통하여 위로는 지극한 법을 보이시고, 또 아래로는 이로써 백성을 깨우쳐 이끌어가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순과 삼대의 치세를 복원하고자 하시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신 또한 생각이 없지 않습니다. 성인의 시대가 멀어지고 말씀이 없어지고 경문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도리를 행함이 느슨해져서 비록 하루만에 충심으로 바른 도리를 세울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하늘이 만고에 걸쳐 있듯이 성인의 경문이 쓰여 있는 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갖춘 도리일 것이니, 다시 돌이켜 도리를 구한다면 어찌 얻지 못할 바가 있겠습니까?
오호라! 누가 부모가 없겠으며, 누가 사람의 자식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노래 부르면 화답하지 않으며, 누가 감동을 주는데 반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르기를, ‘윗사람이 좋아해 주면 아랫사람은 더욱 좋아한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臣知是書之行也 必有油然而起 躍然而趨 沛然而不可禦 比屋可封之美端 可馴致矣 其謂之至德要道者非耶宜 殿下之惓惓於是也
萬曆十七年 六月下澣 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 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春秋館事臣柳成龍奉敎謹跋

발3ㄴ

신(유성룡)이 알기로는, 이 책이 간행되면 반드시 아름다운 기풍이 일어나 뛰는 듯이 힘차고, 소나기가 쏟아지듯이 그 기세를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집집마다 벼슬을 줄 만큼 아름다운 기풍이 생겨나 평화롭게 나라가 다스려 질 것이오니, 그것을 일러 지덕요도(至德要道)라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전하의 간절한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선조 22년(1589, 만력 17) 6월 하순 자헌대부지중추부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춘추관사 신 유성룡이 교지를 받들어 삼가 발문을 쓰다.
유성룡(柳成龍) : 조선 중종 때 학자(1542~1607). 자(字)는 이현(而見)이고 호는 서애(西厓)이다. 그는 중종 37년 10월에 경상도 의성현 외가에서 아버지 유중영(柳仲郢)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병조 판서를 하였고, 정여립 모반 사건 때도 자리를 지켰을 뿐 아니라, 동인이었음에도 광국공신(光國功臣)의 녹권을 받았고, 51세에 영의정에 올랐다. 정치가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주어 실전에 활용하게 하였다. 말년에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복관되었으나, 그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풍원부원군에 봉해졌고, 파직된 뒤에는 고향의 옥연서당에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과 『서애집(西厓集)』, 『신종록(愼終錄)』 등을 저술하였다. 하회마을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간 병산리에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屛山書院)이 있다.
지덕요도(至德要道) : 이 말은 『효경』의 제1장에 나오는 말로서, “중니(공자)께서 한가로이 계실 때 증자가 모시고 앉았는데,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아! 선왕(先王)이 지극한 덕과 중요한 도[至德要道]를 두시어 천하를 화평하게 하셨으니 그리하여 백성이 화목하게 되고 위와 아래에 서로 원망함이 없었다. 너는 이러한 것을 아느냐?’ 하였다.”에서 인용한 말로써, 공자의 효에 대한 생각을 한 마디로 요약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