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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효경언해+책정보

서1ㄱ

孝經大義 序
孔門之學 惟曾氏得其宗 曾氏之書 有二曰大學曰孝經 經傳章句頗亦相似 學以大學爲本 行以孝經爲先 自天子至庶人一也 堯傳一篇 大學孝經之祖也 自克明峻德 以至親睦九族 極而百姓之昭明萬邦之於變 大學之序也 孝之爲道 盖已具於親睦九族之中矣 何也 一本故也
효경대의 서문
공자의 학문은 증씨만이 그 종(宗; 경(經)이나 논(論) 따위의 교설 가운데 중심이 되는 뜻)을 얻었다. 증씨의 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대학』과 『효경』이다. 경전의 장구도 비슷하다. 학문은 『대학』을 근본으로 하고 행실은 『효경』을 우선으로 한다. 이는 황제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 한가지다. 『요전(堯傳)』 한 편은 『대학』과 『효경』의 뿌리다. 큰 덕을 밝힘으로써 9족이 친목함에 이르고 지극해져서 백성들이 밝아지고 만방이 아름답게 변한다는 것은 『대학』의 서문에서도 볼 수 있다. 효의 도리가 9족의 친목 속에 갖추어져 있으니 어찌 그러한가? 그것은 근본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自是舜以克孝 而徽五典 禹以致孝 而叙彛倫 伊尹述成湯之德 一則曰立愛惟親 二則曰奉先思孝 人紀之修孰大乎是 文武周公帥是而行備見於其禮所載

서1ㄴ

上而宗廟之享 下以子孫之保 其爲孝蔑有加焉
功化之盛至使四海之內人人親其親長其長一鱗毛一芽甲之微無不得所 嗚呼 二帝三王之敎可謂大矣 孝經一書卽其遺法也
世入春秋皇綱紐解 孔子傷之三復 昔者明王孝治之言思之深望之切矣 誠使天子公卿躬行其上 凡禮樂刑政之具 壹是以孝爲本 則斯道也 固天性之自然人心之固有 一轉移間王道顧不易易乎 惜也 徒託之空言而僅見於門人記錄之書也 書存而道可擧 雖不能行之一時 猶可詔之來世
今此經之

서2ㄱ

可考者不過漢藝文志而已 而其篇次
則顔注古文二十二章孔壁所藏本也 今文一十八章河間王所得顔之芝本 而劉向之所參校者也 要之出於諸儒傅會 皆非曾氏門人所記舊文矣
이로써 순(舜)이 남달리 효도함으로써 오륜을 아름답게 하였고, 우(禹)가 극진하게 효도함으로써 이륜을 폈다. 이윤(伊尹)이 성탕(成湯)에게 덕을 서술하도록 권면하기를, ‘첫째, 사랑을 세우되 가까운 사람부터 하라. 둘째, 선조를 받들 때는 효도하기를 생각하라.’ 하였으니, 사람의 도리를 닦음에 있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그리고 주공(周公)이 이를 본받아 행한 일을 『예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위로는 종묘에 제향하고 아래로는 자손을 보전하였으니 이보다 더한 효는 없다.
성대한 공덕과 교화가 사해 안에서 사람마다 그 어버이를 친애하고 그 어른을 공경하게 하여, 고비나물이나 떡잎 같은 미물까지도 모두 알맞은 처소를 얻지 못함이 없게 하였다. 아, 이제 삼왕(二帝三王)의 교화가 크다. 그러므로 이 『효경』 한 책은 곧 그 성인의 남긴 법도다.
세상이 춘추시대로 들면서 천자가 세상을 다스리는 기강이 해이해졌기 때문에 공자께서 이를 상심하시어 옛날 밝으신 임금이 효로써 다스렸음을 세 번 되풀이 하였다. 깊은 생각이요, 절실한 바람이었다. 진실로 천자와 공경대부가 그 위에서 몸소 행하여 모든 예악과 형정의 도구를 한결같이 효로써 근본을 삼는다면, 이 도는 타고난 본성이고 고유한 인심이라, 한번 전환하는 사이에 〈훌륭한 다스림이 이룩되리니〉 왕도가 도리어 쉽지 않겠는가? 안타깝다. 한갓 공허한 메아리에 기댄 것이 겨우 도를 들어 행할 수 있으니 비록 당시에는 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다가오는 세상을 가르칠 수 있다.
지금 이 경을 상고할 수 있는 것은 『한서』 예문지가 있기에 가능하다. 그 편차로 말하면, 『한서』 예문지 안사고(顔師古)의 주(注)에 말한 『고문효경』 22장은 공벽(孔壁) 소장본이고, 『금문효경』 18장은 하간왕이 얻은 안지본(安芝本)으로, 유향(劉向)이 교열을 한 것이다. 그러나 요컨대 제유(諸儒)의 부회(傅會)에서 나온 것으로서, 모두가 증씨 문인(門人)이 기록한 옛 글은 아니다.
안사고(顔師古) : 중국 당나라 초기의 학자(581~645). 『한서(漢書)』에 주석을 가함으로써 전대(前代)의 여러 주석을 집대성했다. 자는 사고(師古), 이름은 주(籒)이다. 유교의 경전인 『오경(五經)』의 교정에 종사하여 ‘정본(定本)’을 만들었으며, 『대당의례(大唐儀禮)』의 수찬에 참여하였다.
요지출어(要之出於) 제유부회(諸儒傅會) : 정리하건데, 수많은 유학자들이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적어놓은 것들이다.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 글들을 잘 살펴야 한다는 말임.
唐玄宗開元敕議意非不美 而司馬貞淺學陋識幷而閨門一章去之卒 啓玄宗無禮無度之禍 而其所製序文至以禮爲外飾之所資 仁義爲後來之漸有不知 所謂因心之孝者 果何所因 而又何自而萌乎 學之不講德之不脩 一至於此
桓桓文公特起南夏 平生精力用工易四書爲多 至此書則僅成刊誤

서2ㄴ

一編 註釋大義猶有所未及 噫 人子不可斯須忘孝 則此經爲天子至庶人一日不可無之書 章句已明 而文義猶闕 顧非一大欠事乎
盖嘗有志彙集諸家傅註以明一經而未果 一日余友胡庭芳挈其高弟董眞卿訪余雲谷山中 手携孝經大義一書取 而閱之 則其家君 深山先生 董君季亨之所輯也 其書爲初學設 故其詞皆明白而切實 熟玩之 則義趣精深又有非淺見諛 聞所能窺者
族兄明仲敬爲刊之書塾而廣其傳 此豈惟學者修身齊家之要 而有固有天下者亦豈能外是 而

서3ㄱ

他有化民成俗之道哉
당 현종의 개원(開元; 713~741) 칙의(敕議)는 뜻이 아름다웠으나 사마정(司馬貞)이 천루한 학식으로 규문 한 장을 없앴으므로 마침내 현종의 무례무도한 화를 불러 왔다. 그의 어제 서문에는, 예를 외식의 자료로 삼고 인의가 후세에 모르는 가운데 점차 다시 생겨난 데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른바 마음의 효를 인한다는 것이 과연 어디서 인하고 또 어디서 싹튼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학문이 강론과 연구를 하지 않고 덕을 닦지 않음이 마침내 이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반듯한 문공께서 남하에서 우뚝 일어나 평생의 정력과 공을 『주역』과 사서(四書)에 많이 들였다. 이 책에 이르러서 겨우 틀린 글자를 바로잡아[刊誤] 한 편을 완성하였을 뿐이지, 큰 뜻[大義]을 주석함에는 오히려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아, 사람의 자식이라면 잠시도 효를 잊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경은 천자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책이다. 장구는 분명해졌으나 글 뜻에는 오히려 모자람이 있으니, 어찌 하나의 큰 흠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일찍이 제가의 전주를 모아서 한 경의 뜻을 밝히매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하루는 나의 벗인 호정방(胡庭芳)이 그의 뛰어난 제자인 동진경(董眞卿)을 데리고 운곡 산중으로 날 찾아왔다. 손에는 『효경대의』 한 책을 갖고 있었다. 내가 그 책을 받아서 훑어보니 그의 어른 심산 동계형(董季亨) 선생이 엮은 것이었다. 그 책은 초학들을 위하여 만들어 그 문장이 모두 명백하고 절실하였다. 깊이 생각하고 뜻도 깊어서 견문이 얕은 나로서는 엿볼 수가 없었다.
이제 족형인 명중이 삼가 이 책을 글방에서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펴낸다. 이 책이 어찌 학자들의 수신과 제가에만 긴요하겠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이도 이 책을 젖혀 놓고서 달리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의 도(道)를 이룰 수가 있겠는가?
사마정(司馬貞) : 중국 당(唐)나라 때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쓴 시기는 기원전의 일이고 죽간(竹簡)의 기록이었으니, 전체 130권 가운데 일찍이 한대(漢代)에는 〈효경본기(孝經本紀)〉 등 열 권이 사라지기도 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기 주석서는 남조(南朝) 송(宋) 때 사람인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이니, 사마천부터 약 600년이 지난 것이다. 수(隋)·당(唐)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종이에 서사(書寫)하게 되었으니, 당대(唐代)에 사마정(司馬貞)이 『사기집해』를 근거로 『사기색은(史記索隱)』 30권을 짓고 〈삼황본기(三皇本紀)〉를 보충하여 이에 주석을 붙였다. 그 후 장수절(張守節)이 다시 『사기정의(史記正義)』 130권을 지었다. 이 두 책의 출현이 대체적으로 지금의 『사기』를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서 보듯이 당 현종 때 사마정이 『효경』을 기록하면서 규문(閨門) 한 장(章)을 없앴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효경대의』를 짓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噫 藤五十里國耳 其君一用之 至於四方 草偃風動一時 行事猶斑斑有三代之風 學問之功用固如此
晉武魏文亦天資之美者 惜諸臣無識不能有以啓導而充大之 悠悠皆壤此經之廢蓋千五百餘年 人心秉彝極天罔墜 豈無有能講而行之者 誠有以二帝三王之心爲心 則必以二帝三王之敎 爲敎矣 仁人心也 學所以求仁 而孝則行仁之本也 語曰 如有王者 必世而後仁 愚何幸身親見之
歲在乙巳陽復之月 前進士武夷熊禾序峕大德之九年也

서3ㄴ

아, 등나라는 50리의 작은 나라였으나 그 임금이 이 도(道)를 활용하자 사방의 백성들이 풀이 바람에 쓸리듯이 모두가 감화를 받아 당시의 행사가 오히려 찬란하고 3대의 풍도가 있었으니, 학문의 효용이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이다.
진(晉)의 무제(武帝)나 위(魏)의 문제(文帝)도 타고난 성품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하들이 무식하여 임금을 도와 그 아름다움을 충만하게 확장시키지 못하였다. 유구한 천지에 이 경이 없어진 지 1500여 년이 흘렀다. 하지만 사람의 떳떳한 도리는 천지가 다하도록 없어지지 않는다. 어찌 이 도리를 밝혀 행할 이가 없겠는가? 진실로 2제 3왕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반드시 2제 3왕의 가르침으로 가르침을 삼을 것이다. 인(仁)은 인심(人心)이며 학(學)은 인을 구하는 방법이요, 효(孝)란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 『논어』 자로편에 “가령 왕자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1세 뒤에야 어질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내가 몸소 그것을 〈지금 당장〉 보기를 바라겠는가?
을사년 11월에 전 진사 무이 웅화(武夷熊禾)는 서문을 쓴다. 때는 대덕 9년(130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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