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기념사업회세종고전 소개도움말공지사항

세종고전 데이타베이스

특수문자입력기 팁
출력공유하기
페이스북트위터
URL
Ctrl+C를 눌러 클립보드로 복사하시고 Ctrl+v로 붙여넣기 하세요.

전체

국역 향약제생집성방

국역 향약제생집성방
국역 향약제생집성방
≪향약제생집성방≫은 1398년(태조 7)에 편찬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399년(정종 원년)에 간행되었다. 편찬 작업이 조선 건국 7년째에 시작되었으므로 이 책은 고려 말과 조선 건국 직후의 의료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의서인 셈이다. 무엇보다 ≪향약제생집성방≫에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는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 ≪비예백요방≫ 등의 고유 의서들이 인용되어 있어서, 고려시대 의학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향약제생집성방≫이 한국 의료사에서 지니는 가치는 막대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재 3권 2책이 남아 있으며, 2책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본문정보

이경록

이경록은 1968년에 태어나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고려시대 의료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학부를 졸업한 후 지곡서당(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현재 한독의약박물관 관장으로 일하면서 유물을 매개로 의료사와 전근대 문화를 알리고 있다.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을 비롯한 한국의료사 글들과 번역서들을 냈다. 고려와 조선전기 의료사를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아, 한국 의료의 발전 과정을 실증하는 한편 전근대에서 의료가 갖는 사회적 함의를 참구하고 있다.

국역위원

국역

  • 이경록

교열

  • 엄동명 노영수

윤문

  • 박종국 조경란

색인

  • 조경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고전국역 편집위원회

  • 위원장 : 박종국
  • 위 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김석득
  • 김승곤 김영배 나일성 리의도
  • 박병천 성낙수 오명준 이창림
  • 이해철 임홍빈 전상운 정태섭
  • 조오현 차재경 최홍식 한무희
  • 홍민표

≪국역 향약제생집성방≫ 간행의 말씀

우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56년 10월 9일 창립한 후 ≪세종대왕기념관≫ 건립 사업을 추진하면서 1960년대에 들어 세종대왕과 세종조 문화에 대하여 연구하는 한편, 우리 고전의 현대화를 위하여 1968년 1월부터 고전 국역 사업을 실시하고 있는 바, 올해가 45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까지 한문 고전을 국역하여 간행한 문헌은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태조실록·정종실록·태종실록·문종실록·단종실록·세조실록·예종실록·성종실록·숙종실록·경종실록·영조실록·정조실록(일부)·순조실록·헌종실록·철종실록), 증보문헌비고, 매월당집, 장릉지, 삼강행실도, 공사견문록,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여사제강, 태허정집, 통문관지, 서운관지, 제승방략, 심양장계, 향약채취월령, 국조인물고, 사숙재집, 치평요람, 각사등록, 승정원일기(순종), 학교등록 등이다.

우리 한문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이 한문 고전 국역 사업이나 한글 고전 역주 사업을 벌이는 뜻은 바로 백성들과 소통을 통하여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을 이어 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올해부터는 한문 고전 국역 문헌으로 현재 계속 국역 중인 역사서 ≪치평요람≫과 ≪각사등록≫ 외에, 과학 기술 고전을 국역 간행하기로 되었는 바, 금년에는 ≪향약제생집성방≫, ≪구급이해방≫, ≪제가역상집≫, ≪육일재총서≫ 등을 국역 간행하기로 하였는데, 이번에 ≪향약제생집성방≫을 국역하여 ≪국역 향약제생집성방≫이라는 이름으로 발간하게 되었다.

이 한의학의 고전인 ≪향약제생집성방≫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권중화(權仲和) 등이 편찬하기 시작하여 정종 원년(1399)에 간행한 의서이다. 이 의서는 편찬 작업이 조선 건국 7년째에 시작되었으므로 고려 말과 조선 건국 직후의 의료 상황을 잘 보여주는 의서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는 현재 전하지 않는 ≪신집어의촬요방≫, ≪비예백요방≫ 등의 우리 의서들이 인용되어 있어서, 고려시대 의학을 이해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됨으로 우리나라 의료사에서 지니는 가치는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전30권 중 현재 권4~5(보물 1235호, 한독의약박물관 소장)와 권5~6(보물 1178호, 가천박물관 소장) 3권 2책만 전할뿐이다.

이번에 우리 회가 ≪향약제생집성방≫을 국역 간행함에 있어서, 국역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전하는 한독의약박물관 소장본(한독본) 권4~5와 가천박물관 소장본(가천본) 권5~6 등 3권 2책을 대본으로 한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한독의약박물관과 가천박물관에 감사드린다.

끝으로 이 귀중한 한의학의 고전을 우리 회에서 국역하는데, 이 책의 해제를 써주시고, 또 번역을 해 주신 한독의약박물관 이경록 관장님, 사업비를 지원해 준 교육과학기술부에 감사드리고, 번역 원고를 교열 윤문하여 주신 교열 윤문 위원님, 이 책 국역 간행에 여러모로 수고하여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3년 10월 20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일러두기

1. 이 책은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권6을 국역한 것이다. 원래 ≪향약제생집성방≫은 30권으로 편찬되었지만, 현재는 3권 2책만 남아 있다. ≪향약제생집성방≫ 권4~권5(보물 제1235호)는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향약제생집성방≫ 권5~권6(보물 제1178호)은 가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두 소장본을 모두 국역하였다.

2.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권근(權近)이 쓴 ≪향약제생집성방≫ 서문(1398년, 태조 7년 6월)과 발문(1399년, 정종 원년 5월)을 함께 수록하였다. ≪향약제생집성방≫ 서문과 발문은 각각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과 권22에 수록되어 있다.

3. 본문에서는 국역문, 원문, 주석을 차례로 실었으며, ≪향약제생집성방≫ 원본은 이 책의 맨 뒤쪽을 처음으로 삼아 영인하였다. 아울러 해제와 찾아보기를 통해 이 책에 대한 이해를 돕고, 열람의 편의를 꾀하였다.

4. 국역과 주석은 한글 표기를 원칙으로 삼았다. 간단한 주석은 본문 괄호 안에 넣었으며, 자세한 주석은 각주로 처리하였다. 한자가 필요한 경우에 음이 같을 때는 ‘괄호( )’를 사용하고, 음이 다르거나 원문을 제시할 필요가 있을 때는 ‘꺽쇠[ ]’를 사용하였다. 보충역은 ‘〈 〉’로 표시하였다. 약재명, 처방명, 질병명, 인명 등의 고유명사에 대한 발음이 혼용될 때에는 다음 책의 설명을 기본으로 삼았다.(동양의학대사전편찬위원회, ≪동양의학대사전(東洋醫學大事典)≫ 전12권, 경희대학교 출판국, 1999; 전통의학연구소(傳統醫學硏究所) 편찬, ≪동양의학대사전(東洋醫學大辭典)≫, 성보사(成輔社), 2000.)

5. 국역문과 원문 입력은 원본에 따라 줄바꿈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원본의 작은 글자 즉 세주(細註)는 [ ] 안에 글자 크기를 줄여 표시하였다.

6. 원문 입력은 다음을 원칙으로 삼았다.

⑴ 원문 입력은 원본을 따랐다. 예컨대 ‘삼(蔘)’과 ‘삼(參)’은 약재명으로 동일하게 사용되지만, 원본에 ‘삼(參)’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때 원문은 ‘삼(參)’으로 입력하고, 국역문에는 흔히 쓰이는 대로 ‘삼(蔘)’으로 처리하였다. 원문 제시가 필요할 때는 ‘삼(蔘)[參]’으로 병기하였다.

⑵ 문맥상 오식(誤植)이 분명한 경우에는 바로잡았다. 예컨대 옛책에서 ‘기(己)’와 ‘이(已)’와 ‘사(巳)’는 흔히 혼용된다. 따라서 ‘불사(不巳)’는 ‘그치지 않는다’라는 뜻의 ‘불이(不已)’가 분명하므로, ‘불이(不已)’로 바로잡아 입력하였다.

⑶ 원문이 오염되거나 찢어져서 정확한 판독이 어려운 경우에는, 다른 의서에서 관련되는 기사를 찾아 유추하였다. 이 경우에는 각주에 그 근거를 표시하였다.

⑷ 낙자나 탈자가 있는 경우에는 □를 써서 표시하였다.

7. 이 책에 사용한 각종 부호는 다음과 같다.

⑴ 이 책 국역문에 사용한 각종 부호는 다음과 같다.

① (  ) 음이 같은 한자를 묶음. .

② [  ] 음은 같지 않으나 뜻이 같은 한자를 묶음.

③ 〈 〉 책의 편명이나 보충역을 묶는 데 사용.

④ ≪ ≫ 책명을 묶음.

⑤ “  ” 인용문을 묶음.

⑥ ‘  ’ “  ”로 묶은 인용문 및 대화체 안에서의 재인용이나 강조 부분을 묶음.

⑦ [ ] 세주(細註)를 표시.

⑧ … 말을 줄이거나 원문을 판독할 수 없어서 번역하지 못한 부분에 사용.

⑨ □ 원문에서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나 미상(未詳)인 부분을 표시.

⑵ 이 책 원문에 표점 기호로 다음의 기호를 사용하였다.

① , 한 문장 안에 구의 구분이 필요한 곳에 사용.

② . 서술문이나 어조가 약한 명령문 끝에 사용.

③ □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나 미상(未詳)인 부분을 표시.

④ [  ] 세주(細註)를 표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과 조선초기의 의약
주 1)
이 해제는 내가 쓴 〈조선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과 향약의 발전〉을 비롯한 다음 글들을 토대로 작성되었다(이경록, 〈조선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과 향약의 발전〉, ≪동방학지(東方學志)≫ 149집, 2010;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이경록, 〈조선 세종대 향약 개발의 두 방향〉, ≪태동고전연구(泰東古典硏究)≫ 26집, 2010; 이경록, 〈≪향약집성방≫의 편찬과 중국 의료의 조선화〉, ≪의사학(醫史學)≫ 20권 2호, 2011; 이경록, 〈향약(鄕藥)에서 동의(東醫)로 : ≪향약집성방≫의 의학이론과 고유 의술〉, ≪역사학보(歷史學報)≫ 212집, 2011; 이경록, 〈조선전기 ≪의방유취(醫方類聚)≫의 성취와 한계 -‘상한’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34권 3호, 2012).
이경록

차례

1. 머리말
2.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
1) ≪향약제생집성방≫의 의학적 배경
2) ≪향약제생집성방≫의 판본 소개와 복원
3.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의학론
1) 인용 의서의 분석
2) 처방과 약재의 특성
3) 한계와 과제
4. 맺음말

1. 머리말

건국 직후 조선이 당면한 의료부문의 과제는 붕괴된 의료제도를 개편하는 것과 토산약물의 사용에 급급했던 고려시대 향약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앞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적 의료관이 침착되면서 중앙집권적 의료제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특히 국초부터 조선에서는 대민의료를 강조하면서 지방의료에도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뒤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약재 생산의 확대를 비롯하여 처방의 독자화와 의학지식의 집대성이 추구되었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 地理志)≫ 등의 편찬에서 드러나듯이 강력한 국가 주도의 의학 발전이었다.
고려 의학의 정점에 해당하는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과 ≪비예백요방(備預百要方)≫에서는 모든 산출물이 약효를 지닌다고 간주하였다. 하지만 모든 산출물의 약효에 대한 긍정은 고려가 당면한 약재의 부족 현상과 의학 이론의 일천함을 반영한 인식이기도 하였다. 즉 고려의 의술은 약재와 처방 모두 여의치 못했다. 약재의 측면에서는 토산약재가 부족하다는 것이, 처방의 측면에서는 고려의 질병에 부합하는 치료법이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러한 실정으로 인해 ≪향약구급방≫과 ≪비예백요방≫에서 제시된 향약론은 만물위약론(萬物爲藥論)과 일병소약론(一病少藥論)이었다. 고려에서 생산되는 모든 산출물을 약물로 사용하자는 주장이며, 하나의 질병에 하나의 약물이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주 2)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28~330쪽.
만물위약론과 일병소약론은 고려 의학의 성취인 동시에 그 한계를 보여주는 논리이기도 하다. 여말선초 의료의 발전 단계와 성격이 고려 의료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규정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 역시 약재와 처방의 두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전자는 믿을 수 있는 토산약재를 증가시켜 치료의 지평을 확장하려는 요구였고, 후자는 처방의 독자화를 통해 향약을 점차 이론화하려는 의지였다. 한마디로 중국 의학의 처방(處方)과 당재(唐材, 외국산 약재)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에서 벗어나 의료의 자주화를 추구해나가는 여정이었다.
앞서 거론한 ‘향약(鄕藥)’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몇 종류의 의서들은 조선에서 약재 생산의 확대, 나아가 처방의 독자화를 모색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이 가운데 ≪향약제생집성방≫은 태조 7년(1398)에 편찬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종 원년(1399)에 간행되었다. 편찬 작업이 조선 건국 7년째에 시작되었으므로 이 책은 고려 말과 조선 건국 직후의 의료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의서인 셈이다. 무엇보다 ≪향약제생집성방≫에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는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 ≪비예백요방≫ 등의 고유 의서들이 인용되어 있어서, 고려시대 의학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향약제생집성방≫이 한국 의료사에서 지니는 가치는 막대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향약제생집성방≫은 현재 3권 2책이 남아 있으며, 2책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공개된 것이 최근 20년 전후밖에 되지 않아서,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일서(佚書)’로 간주되어 제대로 다루지 못하였다. 물론 그 중요성까지 망각된 것은 아니었지만, 원문을 열람하지 못한 기존 연구에서는 짧게 언급되는데 그쳤다. ≪양촌집(陽村集)≫ 등에 수록된 권근의 서문과 발문을 근거로
주 3)
권근의 서문과 발문은 ≪양촌집≫과 ≪동문선≫에 실려 있다(≪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동문선(東文選)≫ 권91 〈서(序)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동문선(東文選)≫ 권103 〈발(跋)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또한 ≪증보문헌비고≫에는 권근의 서문이 초략되어 있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246 예문고(藝文考) 5 〈의가류(醫家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향약제생집성방≫은 고려 말 향약 의서와 조선 세종대 ≪향약집성방≫을 잇는 저작으로 설명되었으며,
미키 사카에[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자가 출판(自家 出版), 1963, 114쪽; 미키 사카에[三木榮], ≪朝鮮醫書誌≫ 증수판(增修版), 學術圖書刊行會, 1973, 12~14쪽; 김두종(金斗鍾), ≪한국의학사(韓國醫學史)≫, 탐구당, 1966, 201~202쪽. 이외에도 ≪향약제생집성방≫을 단편적이나마 소개하거나 언급한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김신근(金信根) 편저, ≪한의약서고(韓醫藥書攷)≫,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손홍열(孫弘烈), 〈여말·선초(麗末鮮初) 의서(醫書)의 편찬(編纂)과 간행(刊行)〉, ≪한국과학사학회지≫ 11권 1호, 1989; 김호(金澔), 〈여말선초 ‘향약론(鄕藥論)’의 형성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진단학보(震檀學報)≫ 87집, 1999).
서지학적인 연구가 일부 진행되었을 뿐이다.
김성수(金聖洙), 〈한국의 옛 의서(醫書)〉, ≪고서연구(古書硏究)≫ 13호, 1996; 김중권(金重權), 〈조선초(朝鮮初) 향약의서(鄕藥醫書)에 관한 고찰(考察)〉,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 16집, 1998.
기존 연구를 염두에 두면서도 ≪향약제생집성방≫의 내용과 의의를 본격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글에서는 우선 의학적 측면에서 ≪향약제생집성방≫의 편찬 배경을 정리한 후, 현존하는 ≪향약제생집성방≫의 판본을 소개하고, 본문 일부에 섞인 착오를 바로잡음으로써 원래의 형태를 복원할 것이다. 그리고 복원을 토대로 ≪향약제생집성방≫의 연원을 추적하기 위해 인용 의서를 분석함으로써 의서들간의 계승관계를 정리한다. 아울러 ≪향약제생집성방≫의 모든 처방을 약재별 통계로 가공하여 다른 의서와 비교함으로써 여말선초 의술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향약제생집성방≫의 의학론을 고려시대의 의학론과 비교 검토함으로써, ≪향약제생집성방≫의 역사적 의의까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2.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

1) ≪향약제생집성방≫의 의학적 배경

고려시대 의술의 실태는 의서(醫書)에 집약되어 있다. 널리 알려진 고려의 주요 의서로는 김영석(金永錫)의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을 비롯하여 ≪신집어의촬요방≫, ≪향약구급방≫, ≪비예백요방≫ 등을 꼽을 수 있다.
≪제중입효방≫의 처방으로는 하나밖에 전해지지 않지만, 토산약재로 치료하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고종(高宗)대에 최종준(崔宗峻)이 편찬한 ≪신집어의촬요방≫은 관찬의서로서, 송(宋) 의학(醫學)을 전범으로 삼아 병인론(病因論)과 처방을 구성하는 점이 특색이었다. 이 책은 1개 처방당 평균 약재수가 8.7개에 이를 정도로 복방(複方) 중심이었다. 또한 약재가 당재(唐材) 위주인 데다 고가(高價)인 것까지 감안하면 소수 지배층 중심의 의서에 해당하였다.
반면 ≪향약구급방≫은 ≪신집어의촬요방≫과 비슷한 시기에 간행되었지만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우선 1개 처방당 평균 약재수가 1.37개에 불과할 정도여서 단방(單方) 위주의 특성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사용 약재를 들여다보면 요즘식의 ‘약재(藥材)’ 외에도 식초, 꿀, 쑥, 마늘 등이 빈번하게 처방되었다. 일상 사물을 주된 약재로 활용하는 이유는 약재 생산이 쉽지 않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루는 질병의 종류를 살펴보더라도 이 책은 ≪신집어의촬요방≫과 달리 일반 백성들을 치료 대상으로 삼는 구급의서였다.
그런데 ≪향약구급방≫은 고려에서 ‘향약(鄕藥)’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가장 오래된 자료이기도 하다. ≪향약구급방≫ 본문에서도 고려의 토산약재(土産藥材)에 대해서는 ‘당명(唐名)’에 상응하는 ‘향명(鄕名)’까지 병기하였다. 이것은 ‘향약(鄕藥)’을 중국 의학의 처방에 활용하는 약재로 공인(公認)한다는 뜻이었다. 즉 토산약재에 대해 ‘향명’을 부여함으로써 고려에서는 중국 의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시에 고려 의료의 내적인 성장을 담보할 수 있게 되었다.
≪향약구급방≫ 계열의 의서인 ≪비예백요방≫에서는 편집 체재 외에 치료술, 병증, 병인론 등에서도 이전 의서들보다 훨씬 앞서나갔다. 고려시대 의료의 발전 단계 역시 ≪비예백요방≫의 의학론(醫學論)에 온축되어 있었다. 즉 ‘풍토(風土)’와 ‘질병(疾病)’과 ‘약재(藥材)’는 하나로 묶여 있으므로 고려의 질병은 고려에서 산출되는 향재(鄕材)로 치료할 수 있다는 의토성(宜土性)이 고려 의학의 기본 전제였다. 그리고 모든 산출물이 치료용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만물위약론과 적은 약재로도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일병소약론(一病少藥論)이 고려시대 의학론의 핵심이었다.
주 6)
본문에서 다루는 고려의 의서들에 대한 논의는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V장 참고.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약재 생산이 증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주 7)
여말선초 약재 증가의 구체적인 양상은 본문 3절에서 다루는 ≪향약제생집성방≫의 약재 목록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기록상으로 보아도 민간의 ‘약포(藥圃)’에서 약재를 재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를 들어 원천석(元天錫, 1330∼?)의 문집에서는 ‘약포’와 ‘채약(採藥)’이라는 표현이 연달아 보인다.
≪운곡행록(耘谷行錄)≫ 권1 〈제조목감유거(題趙牧監幽居)〉. “常尋藥圃雨中鋤”; 〈기제춘주신대학교거(寄題春州辛大學郊居)〉. “採藥晴登屋上山”; 〈선옹견화부차운(禪翁見和復次韻)〉. “茶軒煙羃羃, 藥圃雨絲絲.”
조선에 들어서 지방마다 배치된 ‘심약(審藥)’과 ‘약부(藥夫)’는 약초의 증가를 전제로 운영될 수 있었다.
손홍열, ≪한국중세(韓國中世)의 의료제도연구(醫療制度硏究)≫, 수서원(修書院), 1988, 194~197쪽.
그 결과 인삼(人蔘), 복령(茯苓), 백출(白朮) 등이 민간에서 널리 활용되었다.
≪목은시고(牧隱詩藁)≫ 권8 〈시(詩) 자영(自詠)〉. “身世祗今誰得管, 參苓白朮幸相扶”; 권9 〈시(詩) 안기행이수(晏起行二首)〉. “晚年臥病不出戶, 參苓白朮香滿家”; 권28 〈시(詩) 문보법노승소신삼수(聞報法老僧燒身三首)〉. “病裏靑春幾度新, 蔘苓浹髓文熏身”; 권33 〈시(詩) 즉사(卽事)〉. “病以蔘苓扶我寧”; 권34 〈시(詩) 전장자소[<원주>병서](田莊自笑[<원주>幷序])〉. “中爲病侵苦未痊, 蔘苓白朮徒烹煎”; ≪도은선생시집(陶隱先生詩集)≫ 권2 〈시(詩) 제곤슬산승사(題昆瑟山僧舍)〉. “一匊煮蔘苓.” 이외에도 권근(權近)은 오가피(五加皮)가 노인의 치아와 모발에 효능이 있고, 오미자(五味子)는 약재로 채취되어 보관되는 상황을 설명하였다(≪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0 〈시(詩) 오가피(五加皮)〉; 〈오미자(五味子)〉).
하지만 향재(鄕材)나 당재(唐材)가 구득이 쉬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주 11)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吾東方遠中國. 藥物之不産玆土者, 人固患得之之難也.”
널리 알려진 대로 혜민국(惠民局)은 약재를 판매하는 곳이어서 약재 유통에서 빠질 수 없었다. 혜민국에서는 당재까지 수입하여 민간에서 활용하도록 뒷받침하고 있었지만 그 운영은 수월하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약재가 우리 땅[本土]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에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을 설치하고, 약가(藥價) 오승포(五升布) 6천 필을 지급하여 약물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모든 환자가 곡식 몇 말이나 베 몇 필을 혜민전약국에 가져가서 필요한 약을 구할 수 있었다.… 불행히도 관부에서는 백성에게 약가를 철저히 징수하는 반면, 권세가들은 약물을 강제로 싼 값에 사들이므로 결국 약가가 축난다. 이에 빈민은 자활할 수가 없으니, 어찌 몹시 인자스럽지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주 12)
≪삼봉집(三峰集)≫ 권7 〈조선경국전 상(朝鮮經國典 上) 부전(賦典)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 “國家以爲藥材非本土之所産,… 於是, 置惠民典藥局, 官給藥價五升布六千疋, 修備藥物. 凡有疾病者, 持斗米疋布至, 則隨所求而得之.… 不幸有官府之責取, 權勢之抑買, 而藥價耗損. 貧民無以自活, 豈非不仁之甚者也.”
모든 계층이 의료 혜택을 누리는 게 혜민국의 설립 목적이었지만, 실상 백성에게는 약가를 철저하게 징수하고 지배층은 약재를 싸게 억매(抑買)하였다. 이 때문에 이색(李穡)은 병든 노비를 위해 혜민국에서 약을 구하려고 하였지만 쉽게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목은시고(牧隱詩藁)≫ 권30 〈시(詩) 종혜민국중관색약 위노병야(從惠民局衆官索藥 爲奴病也)〉. “先王念民病, 設局散還丹, 邪氣如氷釋, 恩波似海寬, 長鬚方苦痛, 老眼亦艱難, 書札無由惜, 哀矜在衆官.”
이색이 자신의 향재(鄕材)를 다른 이의 치료에 사용하도록 베풀었던 배경이었다.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5 〈시(詩) 오소윤내방 여이향약일상부지 서기산지민간질병 개종신행서지일단 족이자비 가이자관(吳少尹來訪 予以鄕藥一箱付之 庶其散之民間疾病 盖終身行恕之一端 足以自悲 歌以自寬)〉.
전반적으로 약재 구득이 어려운 데다 그 사용마저 지배층에게 독점되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약재가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윤소종(尹紹宗)은 부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재를 구하러 다녔다.
주 15)
≪목은시고(牧隱詩藁)≫ 권26 〈시(詩) 윤장원래 면유주색 좌이갑수 진솔가애 연어사장지례초실지 고록위단가 친지야 부설지교야(尹壯元來 面有酒色 坐而瞌睡 眞率可愛 然於事長之禮稍失之 故錄爲短歌 親之也 不屑之敎也)〉. “自言父母病在躬, 收拾藥材走西東, 似謝來遲言未終, 起而辭去如飄蓬.”
또한 이숭인(李崇仁)이 병들자 그 아들은 곽향(藿香)을 구하러 이색을 방문하였는데 이색이 약재 대신 정신 수양을 치료법으로 제시할 정도로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5 〈시(詩) 이자안병이월여의 인한상당요 동왕문후 방시지지 회복역병발 미능상마 자래구곽향 인유소감 가이자관(李子安病已月餘矣 因韓上黨邀 同往問候 方始知之 會僕亦病發 未能上馬 子來求藿香 因有所感 歌以自寬)〉. “君其安心善自保, 藥餌無如自頤養.”
곽향은 부족했다. 이색 역시 병들었을 때 부자(附子)를 구하지 못해 고생하였다.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7 〈시(詩) 사나연송용호단(謝那演送龍虎丹)〉. “病夫深有感, 附子近來難.”
약재 확보가 여의치 않았던 여말선초는 역설적으로 향약을 활용한 경험방(經驗方)이 적잖이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우선 이색은 옴병[疥]에 걸리자 뽕나무 잿물로 닦는 치료를 받는데, 이 민간 처방은 침(鍼)보다 효과가 좋았다.
주 18)
≪목은시고(牧隱詩藁)≫ 권35 〈시(詩) 환개심불안 수일불음(患疥心不安 數日不吟)〉.
“疥發相攻擾我心, 苦哉連日輟長吟, 三郞特浸桑灰洗, 絶勝仙人頂上針.”
그리고 다년간 질병에 시달리며 약으로 치료하던 이색은 찬음료[氷漿]로 효과를 보자 구급방 속에 기록해야겠다고 적었다.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8 〈시(詩) 유동남대가 시장수고과 유이음악 가동주보 가이기지(柳洞南大街 施漿水苽果 侑以音樂 家童走報 歌以紀之)〉. “我病多年近藥物, 攻邪補虛相甲乙, 炎天氷漿立有效, 備急方中當續筆.”
문학적인 수사일 수도 있지만 기존 처방의 효과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는 경험칙에 근거한 치유가 더욱 신뢰를 줄 수도 있었다.
여말선초 경험방에 대해서는 권근(權近)도 두 가지 사례를 흥미 있게 서술하였다.
주 20)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1 〈설류(說類) 김공경험설(金公經驗說)〉.
전(前) 판사(判事) 김공(金公)은 박주(博州) 지방관으로 있을 무렵 독충에 물린 지 1년이 지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자, 소주(燒酒) 두 잔을 억지로 마시게 하여 생충(生蟲)과 사충(死蟲)을 모두 토한 후 낫게 만들었다. ‘소주는 가슴의 체기를 내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중풍으로 외신(外腎)이 뱃속으로 들어간 가노(家奴)에게는 ‘기운을 아래로 밀면 외신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피마자를 담근 소금물 구유통에 가노(家奴)를 누워 있게 하여 치료하였다고 한다. 이 두 치료법은 예전에 들은 것이 아니라 김공이 짐작해서 조치한 것이었다. 김공은 매우 쉬운 데다 효과가 신속한 이 경험방들을 권근에게 글로 널리 알려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김공의 사례는 경험방의 축적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고려에서는 ≪향약구급방≫이나 ≪비예백요방≫ 등의 향약 의서가 간행되었다. 향약으로 질병을 치료하려는 의도에서 편찬된 이 의서들의 의학론은 만물위약론과 일병소약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같은 의학론은 약재가 부족한 데서 기인한 논리이기도 하므로, 약재 생산이 증가하고 치료가 활성화되면 그 의학론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조선이 건국될 무렵까지 약재 생산은 점증하는 한편 새로운 경험방들도 축적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대민의료에 관심이 컸던 조선으로서는 고려 의료를 계승하되 변화된 의료 여건을 반영하는 새 의서의 편찬이 필요했다. ≪향약제생집성방≫이 간행되는 의학적 배경이었다.

2) ≪향약제생집성방≫의 판본 소개와 복원

정종 원년(1399)에 출간된 ≪향약제생집성방≫의 편찬자는 권중화(權仲和)이다.
주 21)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醴泉之精博, 纂其書.” 예천(醴泉)은 예천백(醴泉伯)인 권중화를 가리킨다.
하지만 권중화가 관약국(官藥局) 관리들을 거느리고 작업했다는 기록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처럼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乃與權公特命官藥局官更考諸方.”
이 책은 개인 저작이 아니라 국왕의 의지에 따라 간행된 관찬의서(官撰醫書)에 속한다. 권근은 ≪향약제생집성방≫ 편찬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찍이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이 있었지만 자못 간요(簡要)해서 아는 사람[論者]들은 그 간략함을 아쉬워하였다. 예전에, 현 판문하(判門下)인 권중화(權仲和) 공이 서찬(徐贊)에게 처방을 더욱 수집하여 ≪간이방(簡易方)≫(≪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인용자)을 짓도록 하였으나, 이 책은 미처 세상에 널리 퍼지지 못하였다.… 좌정승(左政丞)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 공, 우정승(右政丞) 상락백(上洛伯) 김사형(金士衡) 공이… 또한 처방이 미흡할까 걱정하여, 권공(권중화-인용자)에게 특별히 관약국(官藥局) 의관을 시켜 여러 처방을 다시 살피고 동인(東人)의 경험방을 수집하여 병문(病門)을 나누고 갈래를 잡아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이라 이름 짓고 우마(牛馬) 치료법을 덧붙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김중추(김희선-인용자)는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공인(工人)을 모아 목판에 새겨 널리 퍼뜨렸다.
주 23)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甞有三和子鄕藥方, 頗爲簡要, 論者猶病其畧. 曩日今判門下權公[<원주>仲和], 命徐贊者尤加蒐輯, 著簡易方, 其書尙未盛行于世.… 左政丞平壤伯趙公[<원주>浚], 右政丞上洛伯金公[<원주>士衡]… 又患其方有所未備, 乃與權公特命官藥局官更考諸方, 又採東人經驗者, 分門類編, 名之曰鄕藥濟生集成方, 附以牛馬醫方. 而金中樞觀察江原, 募工鋟梓, 以廣其傳.”
당시에 좌정승 조준(趙浚)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은 제생원(濟生院)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각도(各道)에는 의학원(醫學院)을 설치하고 교수(敎授)를 파견하여 치료하였다. 하지만 치료가 미비할까 염려되면서 대중용 의서가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左政丞平壤伯趙公[<원주>浚], 右政丞上洛伯金公[<원주>士衡]上體聖心, 請於中國置濟生院, 給之奴婢, 採取鄕藥, 劑和廣施, 以便於民.… 諸道亦置醫學院, 分遣敎授, 施藥如之, 俾其永賴. 又患其方有所未備”;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右濟生院鄕藥集成方, 爲惠斯民作者也.”
그런데 이 책은 강원도 관찰사 김희선에 의해 인쇄되었으며, 한상경(韓尙敬)ㆍ안경량(安敬良)ㆍ김원경(金元囧)ㆍ허형(許衡)ㆍ이종(李悰)ㆍ방사량(房士良)도 공로가 있었다.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吁, 以平壤上洛之仁厚, 緫其事, 醴泉之精博, 纂其書, 而金公又能勉力, 終始其功, 四公所以嘉惠東民者, 當與此書並流萬世, 而無窮期矣. 幹是院事者, 西原君韓公[<원주>尙敬], 順興君安公[<원주>敬良], 金君[<원주>元冏], 許君[<원주>衡], 李君[<원주>悰], 房君[<원주>士良]皆有勞於此者也.”
이처럼 적지 않은 사람들이 편찬에 관여했으므로 누가 편찬자인지는 기록별로 설명이 분분하였다.
미키 사카에는 이 책을 권중화·김희선·조준·김사형 등의 공통 편찬이라고 정리하였다(미키 사카에[三木榮], ≪朝鮮醫書誌≫ 증수판(增修版), 學術圖書刊行會, 1973, 12쪽).
김휴(金烋)가 인조 14년(1636)에 저술한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에는 ≪향약제생집성방≫ 해제가 들어 있다. 김휴는 ≪향약제생집성방≫ 서문과 ≪향약집성방≫ 서문을 주로 인용하면서 조준이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찬했다고 썼다.
주 27)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의약류(醫藥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학문각(學文閣) 영인, 1969). ≪해동문헌총록≫에서 흥미로운 점은 권근이 쓴 것으로 알려진 ≪향약제생집성방≫의 서문을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표현한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 서문 작성일은 태조 7년(1398) 6월 하순, 정도전이 처형당한 ‘왕자의 난’ 발발은 두 달 뒤인 8월 26일 기사일(己巳日), 발문 작성일은 이듬해인 정종 원년(1399) 5월 상순이다. 서문과 발문을 살펴보면 편찬경위에 대한 설명이 겹치는데, 권근이 동일한 이야기를 서문과 발문에서 되풀이한 점은 이상하다. 혹시 정도전이 ≪향약제생집성방≫ 서문을 쓰고 곧바로 처형을 당하자, 당시의 정치상황 때문에 권근이 서문까지 쓴 것으로 처리한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준은 관직이 가장 높은 관료인 탓에 서문 첫머리에 거론된 것이므로, 조준을 ≪향약제생집성방≫의 실제 편찬자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향약제생집성방≫은 30권으로, 중추인 김희선이 편찬하였다.”라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246 〈예문고(藝文考)5 의가류(醫家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鄕藥濟生集成方三十卷, 中樞金希善撰.” 이 내용은 ≪조선고서목록(朝鮮古書目錄)≫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朝鮮古書刊行會, ≪조선고서목록(朝鮮古書目錄)≫, 朝鮮雜誌社, 1911(아세아문화사 영인, 1972), 90쪽. “鄕藥濟生集成方三十卷, 金希善撰.”
아마도 강원도에서 실제로 간행한 사실에 주목하여 김희선을 편찬자로 간주한 듯하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향약제생집성방≫ 발문에는 권중화가 편찬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향약제생집성방≫은 그 서문과 발문에 나와 있듯이 ≪간이방≫(≪향약간이방≫)을 찬술했던 권중화가 자신의 작업을 토대로 방문(方文)들을 다시 상고(詳考)하고 조선의 경험방을 채집하여 완성한 의서였다.
주 29)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乃與權公特命官藥局官更考諸方, 又採東人經驗者, 分門類編, 名之曰鄕藥濟生集成方”;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又與醴泉伯權相[<원주>仲和]將其甞所撰著鄕藥之方, 更加裒集, 勒成全書.”
그동안 ≪향약제생집성방≫은 이름만 전해지다가 최근에 권4, 권5, 권6 등 3권 2책이 공개되었다. 2책은 각각 한독의약박물관 소장본(1996년 보물 제1235호로 지정, 이하 ‘한독본’)과 가천박물관 소장본(1993년 보물 제1178호로 지정, 이하 ‘가천본’)이다.
주 30)
가천박물관 소장 ≪향약제생집성방≫은 CD-Rom 형태로 제작된 ≪가천 길재단 50주년 기념 가천박물관 소장 국보·보물전≫(가천문화재단, 2008)을 통해 열람이 가능하다. 여기에 수록된 ≪향약제생집성방≫의 이미지 파일은 문화재청에서 작업한 것인데, 두 군데 오류가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첫째는 권6 앞부분의 낙장 부분을 판심 6쪽이라고 기록한 것인데, 원문의 기사를 살펴보면 낙장은 판심 7쪽이다. 둘째는 ‘30쪽 후면과 31쪽 전면’이 탈락되었다고 기록하면서 ‘치간출혈(齒間出血)’ 항목 2쪽을 뒷부분(이미지 90~91쪽)에 배치한 것인데, 가천박물관의 원본을 확인해보면 ‘치간출혈’ 항목 2쪽이 ‘30쪽 후면과 31쪽 전면’의 제 위치에 있다.
한독본은 1996년 서울 인사동의 고서 상인에게 구입하였으며, 가천본은 대구의 어느 상인이 수집하였다가 다른 상인을 거쳐 가천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천본을 발굴한 분에 따르면, 이 자료는 1989년경에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던 청송의 한 고택에서 수집한 것이다. 발견 당시 이 책은 재래식 화장실 바닥의 농약박스에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 분이 현재 보관하고 있는 복사본과 가천본을 비교해보면, 광곽 밖의 메모들이 일치하고 있어서 동일한 책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 한독본(왼쪽)과 가천본(오른쪽)의 비교

우선 두 소장본의 형태부터 살펴보자. 두 의서 모두 목판본(木版本)으로서 광곽(匡郭)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고, 행관(行款)은 12행(行) 24자(字)이며 주(註)는 소자쌍행(小字雙行)이다. 판심(版心)을 살펴보면 중봉(中縫)만 있고 어미(魚尾)는 없다. 한독본은 반곽(半郭) 크기가 대략 14cm☓21.8cm, 종이 크기가 16.8cm☓29.5cm인데 반해, 가천본은 반곽 크기가 대략 14cm☓21.8cm, 종이 크기가 16cm☓25.5cm이다. 인쇄가 된 반곽 크기는 두 소장본이 일치하지만, 한독본의 종이가 확연하게 큰 것이다. 여기에서 ‘대략’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목판본이어서 각 인쇄면마다 반곽 크기가 미세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림 1〉은 한독본과 가천본의 ≪향약제생집성방≫ 권5 이롱(耳聾) 기사를 비교한 것이다. 한눈에 보더라도 한독본과 가천본 사이에는 종이 크기가 상당히 차이 난다. 자세히 보면 한독본과 가천본 사이에 반곽 크기도 약간 다르다. 이것은 두 판본이 별도의 목판으로 인쇄했다는 뜻이다. 〈그림 1〉에서 네모로 표시한 ‘지물(之勿)’을 자세히 대조해보면, 한독본과 가천본의 글씨체가 완연하게 다르다. 목판이 다른 탓이다.
하지만 한독본과 가천본 사이에서 반곽의 크기를 비롯하여 서지사항들이 대체로 일치하는 데다, 글자들의 위치도 두 소장본의 모든 쪽에 걸쳐 동일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어느 한 판본을 인쇄한 뒤, 이 판본에서 인출(印出)한 종이를 모본 삼아 새로운 목판을 제작했음[飜刻]을 의미한다. 한독본과 가천본 가운데 어느 판본이 먼저 판각되었는지는 〈그림 1〉의 동그라미 부분을 비교하면 된다.
〈그림 1〉의 동그라미에서 한독본에는 ‘첨(尖)’과 ‘병(餠)’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지만, 가천본에는 이 글자들이 아예 인쇄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한독본을 몇 십 내지 몇 백 부 인쇄하는 과정에서 ‘첨(尖)’과 ‘병(餠)’ 같은 목판의 몇몇 글자가 깨졌는데, 이 몇 글자 빠진 종이를 새로운 목판에 대고 새긴 번각본(飜刻本)이 바로 가천본이라는 의미이다. 현존하는 한독본은 목판 상태가 비교적 온전했을 때 인쇄하여 글자들이 모두 남아 있는 것이다. 한독본과 가천본의 인쇄 상태를 비교해보더라도, 일부에서는 가천본의 인쇄 상태가 선명하지만, 전반적으로는 한독본이 가천본보다 양호하다. 또한 지질(紙質)을 비교해봐도 가천본은 약간 바스러지는 듯한 느낌이 나는 종이로서 한독본보다 품질이 떨어진다.
이상의 검토로 미루어 한독본과 가천본은 별도의 목판(木版)으로 인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판각된 목판을 활용하여 좋은 종이로 인출한 것이 한독본이다. 그리고 한독본의 목판으로 인출한 것 가운데 약간 상태가 좋지 않은 종이로 번각하여 새로 찍어낸 것이 가천본이다. 별도의 목판으로 나중에 인쇄한 가천본은 조금 작고 거친 종이를 사용하였다.
주 32)
내가 예전에 쓴 〈조선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과 향약의 발전〉(≪동방학지(東方學志)≫ 149집, 2010)에서는 한독본과 가천본이 동일한 판본을 이용하되 인출한 종이만 달랐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 논의한 것과 같이 두 소장본은 별도의 목판으로 인쇄하였으므로, 여기에서 바로잡는다.
그 동안에는 한독본이 권4~권5, 가천본이 권6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즉 한독본 권4는 음산(陰疝)을 비롯한 23개 병증(病症)으로, 권5는 두풍(頭風)을 비롯한 45개 병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가천본 권6은 장풍(腸風)을 비롯한 43개 병증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4(한독본) : 陰疝(‘陰疝’이라는 병증명은 추측임), 積聚心腹脹滿, 心腹痛, 胷痺, 心顚, 咳嗽論, 上喘中滿, 咳逆, 咳嗽短氣, 一切涎嗽, 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咯血膿血, 翻胃 附嘔吐五噎五膈, 吐血, 嘔血, 唾血, 吐血後虛熱胷中痞口燥, 血汗, 鼻衄, 久衄, 大衄, 衄衊, 蠱毒
권5(한독본) : 頭風, 頭風白屑, 目赤爛, 目積年赤, 目飛血赤脉, 目血灌瞳入, 目珠子突出, 白睛腫脹, 目暴腫, 目風腫, 目睛疼痛, 目澁痛, 目痒急及赤痛, 五藏風熱眼, 目偏視風牽, 目風眼寒, 目赤腫痛, 目風淚出, 丹石毒上攻目, 時氣後患目, 目暈, 目昏暗, 目䀮䀮, 眼眉骨及頭痛, 目眵䁾, 眯目, 鍼眼, 熨烙, 熨烙法, 耳聾, 鼻病, 口病, 舌脣, 齒間出血, 齒齗宣露, 牙齒動搖, 牙齒黃黑, 牙齒不生, 牙齒挺生, 揩齒, 喉中生穀賊, 咽喉閉塞不通, 喉痺, 馬喉痺, 咽喉
권6(가천본) : 腸風, 諸痢論, 泄瀉痢, 熱痢, 冷熱痢, 疳痢, 氣痢, 休息痢, 蠱痢, 丹石毒上攻目, 時氣後患目, 目暈, 目昏暗, 目䀮䀮, 目眵䁾, 眯目, 鍼眼, 熨烙, 熨烙法, 耳聾, 鼻病, 口病, 舌脣, 齒間出血, 齒齗宣露, 齒齲, 牙齒動搖, 牙齒黃黑, 牙齒不生, 牙齒挺生, 揩齒, 喉中生穀賊, 咽喉閉塞不通, 喉痺, 馬喉痺, 咽喉, 咽喉腫痛語聲不出, 咽喉卒腫痛, 咽喉生癰, 懸癰腫, 尸咽喉, 狗咽, 咽喉中如有物妨悶
그런데 권별 병증을 위와 같이 목차로 만들어보면 두 소장본 모두 착오가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밑줄로 표시한 병증들은 두 소장본 사이에 일치한다. 병증의 명칭으로 보아 가천본 권6에는 권5 내용이 상당부분 섞여 있는데, 두 소장본의 해당 본문을 대조해 봐도 그 내용이 동일하다. 따라서 두 소장본을 비교하는 동시에 판심(版心)을 확인해서 원형을 복원할 필요가 생긴다.
≪향약제생집성방≫ 판심에는 책 이름[版心題], 권수[卷次], 쪽수[張次]가 나란히 적혀 있다. 예를 들어 ≪향약제생집성방≫ 권4 15쪽인 경우에는 ‘향방(鄕方) 사(四) 십오(十五)’라는 식이다. 권4를 살펴보면 판심 쪽수가 ‘십(十) 뒷면’부터 ‘사십사(四十四)’까지 남아 있고, ‘사십사(四十四)’의 본문 말미에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지사(卷之四)’라는 맺음말이 적혀 있다. 권4의 경우에 1쪽~10쪽 앞면까지는 낙장이고, 10쪽 뒷면~44쪽까지는 완전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권5 판심을 조사해보면 1쪽부터 44쪽까지 확인된다. 구체적으로 한독본 권5에는 판심 1쪽~31쪽, 33쪽~41쪽 앞면까지 남아 있고, 가천본에는 권5 13쪽~44쪽이 남아 있다. 한독본에 없는 판심 32쪽이 가천본에 들어 있는 ‘치우(齒齲)’ 부분이다. 한편 권5 44쪽 이후는 낙장인 상태이지만 낙장 분량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의 권별 분량은 비슷할 것으로 추측되는데, 권4에서는 판심이 44쪽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권6 판심을 살펴보면 권6 1쪽~6쪽, 8쪽~12쪽이 남아 있어서 7쪽은 낙장인 상태이다. 그리고 권6 12쪽 다음에는, 앞서 말한 권5 13쪽~44쪽이 곧바로 잇대어 있다. 즉 가천본을 편철하면서 판심의 쪽수만 맞추느라 권5와 권6의 권수를 착각한 것이다.
주 33)
가천본은 권5와 권6이 판심 13쪽을 중심으로 뒤섞여 있는데, 본문의 오염 상태가 권5의 판심 13쪽에서 갑자기 심해진다. 한동안 권5와 권6의 순서로 제대로 편철되어 있다가 나중에 현재 모습으로 재편철되면서 오염 정도가 급격히 달라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가천본을 수집한 분의 증언과 복사본에 의하더라도 가천본은 원래 권5, 권6의 순서대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권6은 13쪽 이후가 낙장이다. 이상의 검토를 토대로 ≪향약제생집성방≫을 원래 순서대로 바로잡으면 다음과 같다.

〈표 1〉 ≪향약제생집성방≫의 목차
주 34)
이 국역본의 내용 역시 이 표의 목차에 따라 편차가 구성되었다.
번호권4권5권6비고
1陰疝頭風腸風권4 앞부분은 낙장이며 ‘陰疝’은 추측임
2積聚心腹脹滿頭風白屑諸痢論
3心腹痛目赤爛泄瀉痢
4胷痺目積年赤熱痢권6 ‘熱痢’에 낙장이 있음
5心顚目飛血赤脉冷熱痢
6咳嗽論目血灌瞳入疳痢
7上喘中滿目珠子突出氣痢
8咳逆白睛腫脹休息痢
9咳嗽短氣目暴腫蠱痢
10一切涎嗽目風腫
11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目睛疼痛
12咯血膿血目澁痛
13翻胃
附嘔吐五噎五膈
目痒急及赤痛
14吐血五藏風熱眼
15嘔血目偏視風牽
16唾血目風眼寒
17吐血後虛熱胷中痞口燥目赤腫痛
18血汗目風淚出
19鼻衄丹石毒上攻目
20久衄時氣後患目
21大衄目暈
22衄衊目昏暗
23蠱毒目䀮䀮
24眼眉骨及頭痛
25目眵䁾
26眯目
27鍼眼
28熨烙
29熨烙法
30耳聾
31鼻病
32口病
33舌脣
34齒間出血
35齒齗宣露
36齒齲권5 ‘齒齲’는 가천본에 수록됨
37牙齒動搖
38牙齒黃黑
39牙齒不生
40牙齒挺生
41揩齒
42喉中生穀賊
43咽喉閉塞不通
44喉痺
45馬喉痺
46咽喉
47咽喉腫痛語聲不出권5 ‘咽喉腫痛語聲不出’은 가천본에 수록됨
48咽喉卒腫痛권5 ‘咽喉卒腫痛’은 가천본에 수록됨
49咽喉生癰권5 ‘咽喉生癰’은 가천본에 수록됨
50懸癰腫권5 ‘懸癰腫’은 가천본에 수록됨
51尸咽喉권5 ‘尸咽喉’는 가천본에 수록됨
52狗咽권5 ‘狗咽’은 가천본에 수록됨
53咽喉中如有物妨悶권5 ‘咽喉中如有物妨悶’은 가천본에 수록됨
판심10쪽 뒷면~44쪽(권4 완결)1쪽~44쪽(이후 낙장)1쪽~6쪽, 8쪽~12쪽(이후 낙장)

바로잡은 위 목차에 따르면 ≪향약제생집성방≫은 권4~권6에 걸쳐 85개 병증이 남아 있다. 참고로 권채(權採)는 ≪향약제생집성방≫이 338개 병증에 2,803개 처방으로 이루어졌다고 썼다.
주 35)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향약집성방서(鄕藥集成方序)〉(김신근(金信根) 주편(主編), ≪한국의학대계(韓國醫學大系)≫3, 여강출판사(驪江出版社), 1992). “舊證三百三十八, 而今爲九百五十九. 舊方二千八百三, 而今爲一萬七百六.”
위 표에 보이는 ≪향약제생집성방≫의 병증 구성은 세종대에 편찬되는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아주 흡사하다. ≪향약집성방≫의 57개 병문(病門)은 … 21) 제산문(諸疝門), 22) 적취문(積聚門), 23) 심통문(心痛門), 24) 제해문(諸咳門), 25) 제기문(諸氣門), 26) 담음문(痰飮門), 27) 구토문(嘔吐門), 28) 열격문(噎膈門), 29) 비위문(脾胃門), 30) 고독문(蠱毒門), 31) 비뉵문(鼻衄門), 32) 두문(頭門), 33) 안문(眼門), 34) 이문(耳門), 35) 비문(鼻門), 36) 구설문(口舌門), 37) 치아문(齒牙門), 38) 인후문(咽喉門), 39) 제리문(諸痢門), 40) 치루문(痔漏門) … 등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향약제생집성방≫이 ≪향약집성방≫으로 계승되고 있음은 체재 비교에서도 쉽게 확인되는 셈이다. 달리 표현하면 ≪향약제생집성방≫이 ≪향약집성방≫처럼 종합의서로 편찬된 의서라는 뜻이기도 하다.
심지어 ≪향약제생집성방≫ 말미에는 우마의방(牛馬醫方)까지 덧붙여 있었다(≪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그런데 ≪향약제생집성방≫의 인쇄나 편성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권4 서두에 보이는 ‘내적(內積)’은 ‘육적(肉積)’을 잘못 새긴 것이고, 적취심복창만(積聚心腹脹滿)의 병론(病論) 2개는 앞의 병증의 말미에 잘못 놓여 있다. 이 책 편찬의 계기가 된 제생원(濟生院)은 태조 6년(1397) 8월에 설치되었는데,
주 37)
≪태조실록(太祖實錄)≫ 권12 태조 6년 8월 23일(임인).
이 책의 서문은 태조 7년(1398) 6월에, 발문은 정종 원년(1399) 5월에 집필되었다.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아마도 1년 남짓한 기간에 편찬과 인쇄를 서둘러 마치느라 일부 착오가 생겼을 것이다.
인쇄만이 아니라 ≪향약제생집성방≫ 체재에서도 ≪향약집성방≫과 비교하면 미진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우선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병문(病門) 표시 없이 병증만을 나열하면서, 병증 아래에 세부 병증들을 배치하였다. 인용되는 동일한 의서는 한 병증 내에서도 여기저기에 분산되어 있고,
주 39)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심복통(心腹痛)〉; 권5 〈미목(眯目)〉; 〈이롱(耳聾)〉; 〈설순(舌脣)〉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다른 부분에서는 탕제 치료와 침(鍼)·뜸[灸] 등의 기타 치료가 의서별로 한데 묶여 있기도 하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음산(陰疝)〉; 〈심전(心顚)〉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뜸 치료 역시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크게 강조되면서 빈번히 제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뜸 치료법[灸法]을 고정된 치료 항목으로 설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향약집성방≫에서는 병증을 묶어 57개 병문으로 편차를 갈무리하였고 병증 자체도 세분하였다. 인용 의서의 배치와 침구법도 ≪향약집성방≫에서는 병증별로 가지런하게 정리하였다.
주 41)
흉비(胸痺)를 예로 들자면,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흉비(胸痺)〉에서는 ≪이간방(易簡方)≫ 처방을 세 군데로 나누어 인용한데 반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권23 〈심통문(心痛門) 흉비(胸痺)〉에서는 ≪이간방≫을 하나로 묶어서 인용함으로써 깔끔히 정리하였다.
게다가 ≪향약집성방≫에서는 별도로 ‘보유(補遺)’를 붙였으며 ‘향약본초(鄕藥本草)’를 뒤에 추가하였다. 이처럼 ≪향약집성방≫의 편제와 서술 방식이 정교해진 이유는, ≪향약집성방≫이 ≪향약제생집성방≫의 편찬 경험을 계승하면서 그 병증 구성까지 좇아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향약제생집성방≫ 본문을 살펴보면, 제목에 해당하는 병증 아래에 ‘논왈(論曰)’로 시작하는 병론(病論)을 첫머리에 두고 있다. 이어서 치료 처방을 여러 의서에서 인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목적종통(目赤腫痛) 병증(病症)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목적종통(目赤腫痛).
〈≪성제총록≫에서〉 논하기를, “목적종통(目赤腫痛)은 심장[心]과 폐(肺)의 기운이 막혀 쌓인 열(熱)이 흩어지지 못하는 상태에서, 풍사(風邪)의 독기(毒氣)가 족궐음경(足厥陰經 <세주>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을 침범하면서 풍사와 열이 교대로 일어나 위로 눈·미간을 공격함에 따라, 그 〈눈의〉 색깔이 붉어지면서 붓고 아픈 것이다. 마땅히 풍사(風邪)를 제거하고 열기(熱氣)를 덜어내며, 막힌 것을 소통시켜야 한다.”
주 42)
이상의 병론은 ≪성제총록(聖濟總錄)≫ 권103 〈안목문(眼目門) 목적종통(目赤腫痛)〉에 나오는 문장이다.
라고 하였다.
≪본조경험(本朝經驗) <세주>본조경험방(本朝經驗方)≫. 눈이 붉고 짓무르며 아픈 증상을 치료한다.
피마(蓖麻) 잎으로 발바닥 한가운데[足心]를 싸면 즉시 효과가 있다. 효과를 보면 잎을 떼낸다.
주 43)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목적종통(目赤腫痛)〉. “目赤腫痛. 論曰, 目赤腫痛者, 以心肺壅滯, 積熱不散, 風邪毒氣, 干於足厥陰之經, 風熱交作, 上攻於目及兩瞼間, 故其色赤腫痛. 宜祛風邪, 蠲熱氣, 䟽瀹壅滯. 本朝經驗. 治眼赤爛痛. 用蓖麻葉, 足心褁之, 卽差. 差則去葉.”
병론(病論)에서는 생리(生理)·병인(病因)을 포함하여 질병의 발현 양상, 진단법 등 질병의 기전과 치료원리를 다룬다. 대부분의 병론은 중국 의서, 특히 ≪성제총록(聖濟總錄)≫을 인용하였다. 병론에서 하나의 의서만을 인용하는 것은 아니다. 감리(疳痢)의 병론에서는 ≪성제총록≫, 장종정(張從正), 왕빙(王氷)을 연달아 인용하기도 한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6 〈감리(疳痢)〉. 여기에 나오는 장 자화(張子和)는 장종정(張從正)이며, 계현자(啓玄子)는 왕빙(王氷)이다.
질병 원인[病因]으로 ≪향약제생집성방≫ 권4 심전(心顚)에서는 사기(邪氣)의 일종인 풍사(風邪, 삿된 바람기운)를 꼽는다. 풍사는 심전(心顚) 외에도 두풍(頭風), 목편시풍견(目偏視風牽), 목훈(目暈), 아치동요(牙齒動搖) 등에서도 병인으로 거론된다. 그리고 해수론(咳嗽論)에서는 한사(寒邪, 몸 밖의 해로운 찬 기운)를 병인으로 언급하며, 해역(咳逆)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에서는 병증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육기(六氣) 개념 즉 풍·한·서·습·조·화(風寒暑濕燥火)라는 6가지 외부 환경요인을 병인으로 제시한다.
주 45)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그리고 이롱(耳聾), 아치동요(牙齒動搖), 고리(蠱痢)에서는 ≪성제총록≫ 등을 인용하면서 경락(經絡) 개념으로 질병을 설명한다.
요컨대 ≪향약제생집성방≫의 편제에서는 ≪향약집성방≫으로의 계승 관계와 함께 중국 의학에의 경도가 확인된다. 따라서 중국 의학과 향약이 ≪향약제생집성방≫에 미친 영향력을 보다 자세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3.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의학론

1) 인용 의서의 분석

≪향약제생집성방≫은 병론이든 처방이든 다른 의서들의 인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인용을 통한 저술이라고 부를 만하다. ≪향약제생집성방≫ 전체가 남아 있지 않은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현존하는 권4~권6에서 인용한 의서는 51종이다.
51종의 인용 횟수를 분석해보면 ≪향약제생집성방≫의 성격과 특징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성혜방(聖惠方)≫은 세종대의 ≪향약집성방≫에는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의서이지만,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다른 의서를 압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성혜방≫은 ≪향약제생집성방≫의 핵심인 병론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주 46)
예외적으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심전(心轉)〉; 권5 〈두풍(頭風)〉에서는 ≪성혜방≫을 병론으로 인용한다.
≪성혜방≫이 ≪향약제생집성방≫ 권5의 두풍(頭風)에서는 6회나 인용된 반면 권6에서는 전혀 인용되지 않은 점도 주목된다. ≪성혜방≫이 두풍(頭風)에는 유용하지만, 병론(病論)이나 권6의 여러 이질(痢疾)에는 무용하다고 ≪향약제생집성방≫ 편찬자들이 판단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향약제생집성방≫에 인용된 의서의 분포를 통해 조선초기 의학자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표 2〉 ≪향약제생집성방≫의 인용 의서 일람표
주 47)
나는 예전에 ≪향약제생집성방≫의 인용 의서와 약재를 분석하여 본문 〈표 2〉, 〈표 3〉과 동일한 형식의 표를 작성한 적이 있다.(이경록, 〈조선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과 향약의 발전〉, ≪동방학지(東方學志)≫ 149집, 2010, 346~348쪽; 356~359쪽.) 예전의 분석에서는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재인용하는 의서를 별개 인용 의서로 처리하거나, 전거가 표시되지 않은 병론의 출전을 통계에서 누락하는 등의 오류가 있었다. 그리고 ≪향약제생집성방≫ 수록 약재의 정리에서도 일부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따라서 이 국역문의 내용을 토대로 〈표 2〉와 〈표 3〉을 다시 작성한다. 〈표 2〉에서 인용 횟수는 ≪향약제생집성방≫의 병론과 처방을 모두 포함하여 계산하였다. 동일한 의서에서 몇 개의 처방이 ‘우방(又方)’, ‘우치(又治)’라고 하여 잇달아 소개되는 경우에는 별개의 인용으로 처리하였다. 또한 동일한 저서의 약칭이나 이칭은 하나의 의서로 처리하였다. ≪경험(經驗)≫, ≪경험방(經驗方)≫, ≪경험양방(經驗良方)≫, ≪경험비방(經驗秘方)≫처럼 구분이 쉽지 않은 경우도 일부 있으나, 〈표 2〉를 통해 ≪향약제생집성방≫의 주요 전거에 대해서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번호의서인용 횟수비고번호의서인용 횟수비고
1聖濟總錄304중국의서27王氏簡易方2중국의서(649회)
2世醫得效方6528瑞竹堂經驗方2
3經驗良方5129本草集方2
4千金要方3230濟生續方1
5仁齋直指方2831衛生方1
6聖惠方1832御藥院方1
7肘後備急方1733楊氏産乳方1
8簡易方1534楊氏家藏方1
9儒門事親1135楊文蔚1
10和劑局方10 36食療方1
11山居四要1037宣明論方1
12千金翼方938本草1
13百一選方839兵部手集方1
14外臺秘要740范汪方1
15簡易方541類證普濟本事方1
16濟生方442斗門方1
17衍義本草443醫方大成1
18梅師方444廣利方1
19經驗秘方445婦人大全良方1
20醫方集成446廣南衛生1
21日華子347本朝經驗方36향약의서(69회)
22食醫心鑑348鄕藥救急方10
23經驗方349御醫撮要方8
24簡要濟衆方350鄕藥古方8
25必效方251備預百要方7
26諸病源候論2
위 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51종의 의서에서 총 718회가 인용되었다. ≪성제총록≫을 비롯한 중국 의서가 46종 649회이고 ≪본조경험방≫을 비롯한 향약 의서가 5종 69회이다. 인용 의서 가운데 ≪성제총록≫이 304회로 가장 많고 ≪세의득효방≫ 65회, ≪경험양방≫ 51회, ≪본조경험방≫ 36회, ≪천금요방≫ 32회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중국 의서의 직접적인 인용이 90% 가량으로 압도적이라는 점이 한눈에 확인되지만, 향약 의서인 ≪본조경험방≫이 인용 빈도 4위라는 점도 흥미롭다.
주 48)
≪본조경험방≫은 조선의 의서로 판단된다.(김호(金澔), 〈여말선초 ‘향약론(鄕藥論)’의 형성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진단학보(震檀學報)≫ 87집, 1999 참고.)
향약 의서와의 연관성은 조금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중국 의서의 인용에서 드러나는 ≪향약제생집성방≫의 의학적 특징을 꼽자면 세 가지이다.
먼저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중국 왕조 가운데 송(宋)의 의서(醫書)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고려 의학에 미친 중국 의학의 영향을 살펴보면, ≪신집어의촬요방≫에서는 송 의학에의 경도(傾倒)가 분명하지만 ≪향약구급방≫에서는 단방(單方)이나 일상 사물로 주로 치료하는 당(唐)의 의서에 의존하고 있었다.
주 49)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21쪽.
그런데 위 표에서 보이듯이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인용되는 송 의서로는 ≪성제총록≫ 외에도 ≪인재직지방≫, ≪성혜방≫, ≪화제국방≫, ≪제생방≫, ≪제생속방≫, ≪간요제중방≫, ≪양씨가장방≫, ≪유증보제본사방≫, ≪부인대전양방≫ 등이 집중되어 있다.
≪성제총록≫은 처방(處方)만이 아니라 병론(病論)에서도 ≪향약제생집성방≫이 가장 크게 의지하는 의서였다. 대표적으로 ≪향약제생집성방≫ 권4 흉비(胸痺)의 병론은 ≪성제총록≫ 중 흉비열색(胷痺噎塞), 흉비심하견비결(胷痺心下堅痞結), 흉비(胷痺) 항목의 내용을 각각 인용한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 편찬자들은 ≪성제총록≫에서 필요한 부분만 선택했던 것이다. 또한 이 국역본 본문에서 쉽게 확인되듯이 ≪향약제생집성방≫의 병론 중 출전을 표기하지 않은 것들 대부분은 ≪성제총록≫을 인용한 것이다.
반면 ≪향약집성방≫에 이르면 ≪성제총록≫ 외에도 ≪성혜방≫이 자주 활용됨으로써 인용 의서의 비중이 변동된다.
주 50)
≪향약집성방≫에 이르러서는 ≪성혜방≫의 영향력이 상당히 커진다.(이경록, 〈≪향약집성방≫의 편찬과 중국 의료의 조선화〉, ≪의사학(醫史學)≫ 20권 2호, 2011, 242~247쪽 참고.) 본문의 흉비 병론을 계속 사례로 들자면,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흉비(胸痺)〉에서는 ≪성제총록≫을 인용하였지만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권23 〈심통문(心痛門) 흉비(胸痺)〉에서는 ≪성혜방≫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향약제생집성방≫이 발간된 정종대에서 ≪향약집성방≫이 발간된 세종대 사이에 중국 의학에 대한 검토가 의서별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송 의학의 지속적인 수용은 이처럼 조선 초에도 강력하게 진행 중이었다.
다음으로 ≪세의득효방≫이 65회로 두 번째 인용 빈도를 자랑하는데, 이것은 원(元) 의학(醫學)의 유입이 여말선초에야 본격화됨을 시사한다. ≪세의득효방≫ 외에 원 의서로는 ≪산거사요≫, ≪서죽당경험방≫, ≪어약원방≫이 ≪향약제생집성방≫에 인용되었다. 원래 고려에서는 원(元)과의 의학교류가 아주 제한적이어서 의관(醫官)이나 의서(醫書)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은 일이 드물었다.
주 51)
고려의 의료제도에 새겨진 원(元) 의학의 흔적은 의학제거사(醫學提擧司)이다. 충렬왕 15년(1289)에 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가 설치되었는데, 의학제거사도 이때 설치는 된 듯하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6 공민왕 5년 10월.) 아마도 고려의 의인(醫人)들을 시험하여 원의 의관(醫官)으로 임용하려는 의도였을 터이나, 실제 기록이 미미한 것으로 보아 그 활동은 미약하였다. 한편 이능화는 대원의료(對元醫療)가 활발하였다고 이해한다.(이능화(李能和), 〈조선의약발달사 3(朝鮮醫藥發達史 三)〉 3장 6절, ≪조선(朝鮮)≫ 1931년 6월호~12월호, 1931 참고.)
고려에서 송 의학 수입에 적극적이었던 점과는 대비되는 특징인데, 고려 말로 가면서 조금씩 늘어나던 원 의학의 유입이 조선 초의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인용 빈도로 현상하고 있다. 특히 유완소(劉完素)·장종정(張從正)·이고(李杲)·주진형(朱震亨)의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와 관련해서는, 유완소의 ≪선명론방(宣明論方)≫이나 장종정의 ≪유문사친(儒門事親)≫ 등이 직접 인용되어 있어서
유완소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6 〈설사리(泄瀉痢)〉에 인용되어 있고, 장종정은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상천중만(上喘中滿)〉; 〈일체연수(一切涎嗽)〉;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등에 인용되어 있다.
조선 초에는 금원사대가의 영향력이 의서에 반영될 정도로 커졌음을 엿볼 수 있다.
이경록, 〈향약(鄕藥)에서 동의(東醫)로 : ≪향약집성방≫의 의학이론과 고유 의술〉, ≪역사학보(歷史學報)≫ 212집, 2011, 252~253쪽; 이경록, 〈조선전기 ≪의방유취≫의 성취와 한계 -‘상한’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34권 3호, 2012, 479~481쪽 참고.
마지막으로 당의 대표적인 의서인 ≪천금요방≫이 32회로 적지 않게 인용되어 손사막(孫思邈)의 의학론이 여전히 호평을 받고 있다. 손사막의 또 다른 저작인 ≪천금익방≫이 9회 인용된 것을 합치면, 손사막의 인용 빈도는 41회로 늘어난다. 그리고 4세기 초에 갈홍(葛洪)이 쓴 ≪주후비급방≫도 17회나 인용되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향약제생집성방≫과 다른 향약 의서들과의 연관성을 살펴보자. 향약 의서 5종의 69회 인용 가운데 ≪본조경험방≫은 36회를 차지하고 있어서, 여말선초의 향약 경험방들이 ≪본조경험방≫을 거쳐 ≪향약제생집성방≫으로 직접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향약제생집성방≫이 편찬될 무렵까지의 의술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본조경험방≫의 처방을 살펴보면, 치료법에 관한 이론적 설명은 없으나 다양한 경험의 축적이 엿보인다. 탕제 외에도 뜸을 비롯하여 훈증, 찬물을 목 뒤에 붓기, 피마 잎으로 발바닥 싸기, 귓가에 칼을 부딪히는 소리를 내어 귓속 벌레를 내쫓기, 피마 뿌리로 양치하기 등의 치료법들이 동원된다. 찹쌀, 막 길어온 물, 참나무 등도 사용되지만, 약물보다는 ‘약재(藥材)’라고 할 만한 백부자(白附子), 대극(大戟), 고삼(苦蔘), 용담(龍膽), 남칠(藍漆), 호국(好麴), 추실(楸實), 상피(桑皮) 등이 처방되는데 대체로 채취가 쉬운 것들이다. 그리고 ≪본조경험방≫에서는 단방(單方)이 절반 이상이지만, 약재 2~3개 정도의 복방(複方)도 존재하며
주 54)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상천중만(上喘中滿)〉;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권5 〈아치동요(牙齒動搖)〉; 권6 〈설사리(泄瀉痢)〉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4개의 약재를 사용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발견된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목적란(目赤爛)〉; 〈목혼암(目昏暗)〉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여러 종류의 약재를 배합하여 치료하는 여말선초 복방화(複方化)의 편린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의학의 영향은 ≪신집어의촬요방≫, ≪향약구급방≫, ≪비예백요방≫의 인용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어 ≪향약구급방≫에서는 목구멍이 막힐 때에 환자의 양쪽 귀를 불어서 음식물이 내려가도록 처방하며, 진자(榛子)를 씹거나 마늘을 콧구멍에 넣도록 처방하기도 한다.
주 56)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상권(上卷). “食噎方. 喉塞也. 食噎, 使兩人提耳, 吹兩耳, 卽下. 又嚼下榛子[<원주>以榛子開月, 甚驗故也]. 又削大蒜, 內鼻中, 卽下.”
이 처방은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세주까지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번위(翻胃)[<원주>부구토오열오격(附嘔吐五噎五膈)]〉. “鄕藥救急. 治食噎, 嚼下榛子[<원주>以榛子開胃, 甚驗故也]. 又方. 削大蒜, 納鼻中, 卽下.”
하지만 ≪향약제생집성방≫이 ≪향약구급방≫을 완전히 추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향약제생집성방≫은 ≪향약집성방≫과 마찬가지로 종합의서를 지향한 반면 고려의 ≪향약구급방≫은 ‘구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병’만을 다루는 차이가 있었다.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하권(下卷) 〈고전록험방(古傳錄驗方)〉. “右摠五十三部, 皆倉卒易得之藥. 又不更尋表裏冷熱, 其病皆在易曉者錄之. 雖單方效藥, 審其表裏冷熱, 然后用者, 亦不錄焉. 恐其誤用致害也.”
≪향약구급방≫과는 계통이 다른 ≪신집어의촬요방≫까지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인용되는 점도 주목된다. 인삼, 사향 등 고가의 희귀 약재를 처방하는 ≪신집어의촬요방≫은 약재 수급이 어려웠던 고려에서는 소수 지배층에게 어울렸다. 조선에 들어 ≪신집어의촬요방≫ 처방이 ≪향약제생집성방≫에 수록되어 대중용으로 활용된다는 것은 그동안 약재 생산이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인삼환(人蔘丸), 인삼탕(人蔘湯), 인삼측백산(人蔘側栢散) 등 인삼이 많이 처방되고 있었다.
주 59)
‘〈표 4〉 ≪향약구급방≫, ≪신집어의촬요방≫,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 약재표’에서 보이듯이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인삼은 처방빈도가 4위에 이를 정도로 널리 사용된다.
고려의 ≪향약구급방≫에서 인삼 사용을 억제하여 한 번도 처방하지 않은 것을 상기하면,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03~304쪽.
고려후기 이래 인삼은 일반 백성들이 사용할 정도로 공급이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약의 발전 상황은 ≪신집어의촬요방≫과 ≪향약제생집성방≫에 보이는 동일한 명칭의 처방을 비교해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눈이 어두운 증상을 치료하는 주경환(駐景丸) 처방은 두 의서에 모두 실려 있다. ≪신집어의촬요방≫의 주경환은 토사자(兔絲子), 차전자(車前子), 숙건지황(熟乾地黃)을 졸인 꿀로 반죽하여 환약으로 만들도록 처방하였다.
주 61)
≪의방유취≫ 권66 〈안문(眼門)3 성혜방(聖惠方)2 치안혼암제방(治眼昏暗諸方)〉.
그런데 ≪향약제생집성방≫의 주경환에서는 토사자(兔絲子), 차전자(車前子), 결명자(決明子), 영양각(羚羊角), 방풍(防風)을 졸인 꿀로 반죽하여 환약으로 만들도록 처방하였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목황황(目䀮䀮)〉.
두 의서의 효능과 제조 방법은 비슷하지만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약재 수가 증가한 사례였다.
한편 ≪향약제생집성방≫에 여말선초의 대표적인 향약 의서인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과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이 인용되어 있지 않은 점은 의외이다. 그동안에는 이 두 의서가 ≪향약제생집성방≫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향약제생집성방≫이 권4~권6만 남아 있을 뿐이므로 다른 권에서는 ≪삼화자향약방≫과 ≪향약간이방≫이 자주 인용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권근은 ≪삼화자향약방≫이 소략하고 ≪향약간이방≫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고 썼다.
주 63)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甞有三和子鄕藥方, 頗爲簡要, 論者猶病其畧. 曩日今判門下權公[<원주>仲和], 命徐贊者尤加蒐輯, 著簡易方, 其書尙未盛行于世.”
≪삼화자향약방≫은 그 효용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향약집성방≫에서는 ≪삼화자향약방≫이 향약 의서들 가운데 인용 빈도가 1위일 정도로 중시되었다. 따라서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삼화자향약방≫이 전혀 인용되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향약간이방≫은 ≪향약제생집성방≫의 저본이었으므로,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향약간이방≫이라는 인용 표시를 추가할 필요가 없었다고 추측된다.
이상에서 다룬 바와 같이 현존하는 ≪향약제생집성방≫ 권4~권6에서는 다수의 중국 의서와 향약 의서를 인용하고 있다. 중국 의서의 인용 분포를 통해서는 송(宋) 의학에의 몰입과 원(元) 의학을 포함한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의 영향력 확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인용된 향약 의서들에서는 약재의 다양화에 못지않게 치료법의 발전상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고려에서는 다른 계열이었던 ≪향약구급방≫과 ≪신집어의촬요방≫이 조선에 들어서는 ≪향약제생집성방≫으로 수렴되었다. 이러한 향약 의서의 계승과 처방의 변화는 고려후기에서 조선 초를 거치면서 약재 종류가 다양화하고 생산이 늘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여말선초의 약재 증가와 의술 수준의 실상은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과 약재에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2) 처방과 약재의 특성

≪향약제생집성방≫ 서문에 의하면 지역에 따라 기질, 풍속, 음식에 차이가 있듯이 처방도 달라야 했다. 처방이 구차하게 중국(中國)과 같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향약이 당재의 대체수단이 아니라 올바른 치료 수단이며, 향약을 사용하는 독자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신선해서 약기운이 완전하게 살아 있는 향약의 약효가 약기운이 증발된 고가의 당재보다 뛰어나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세상[五方]에는 각각 토성(土性)이 있어서 10리(里) 거리면 풍토(風土)가 달라진다. 평소 생활의 음식(食飮), 감정[嗜慾], 맛[酸醎], 기온[寒暖]의 차이에 맞춰 치료 약물도 상이한 약제가 필요하므로, 반드시 중국과 동일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먼 땅의 약물은 구하다가 얻기도 전에 병이 심해지기도 하고, 가격을 치르고 구하였지만 썩고 좀먹어서 약기운이 이미 새버리기도 한다. 〈이것은〉 약기운이 완전하여 귀중한 토산 약물[土物]만 못한 것이다. 따라서 향약(鄕藥)으로 치료하는 것이 반드시 힘은 절약되고 효과는 신속할 것이다. 이 방서의 편찬이 우리 백성들에게 은혜됨이 얼마나 큰가.
주 65)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且五方皆有性, 十里不同風. 平居之時, 食飮嗜慾酸醎寒暖之異宜, 則對病之藥, 亦應異劑, 不必苟同於中國也. 况遠土之物, 求之未得而病已深, 或用價而得之, 陳腐蠧敗, 其氣已泄. 不若土物氣完而可貴也. 故用鄕藥而治病, 必力省而效速矣. 此方之成, 其惠斯民爲如何哉.”
조선에는 조선의 질병에 적합한 약재가 산출되고 있으며, 조선의 약재를 통해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토성(宜土性)에 대한 자각은 고려 이래 향약론의 공통된 전제인데 ≪향약제생집성방≫에서도 동일한 인식이 발견되는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 발문에 보이는 “어느 곳이든 약이 있으며 어떤 병이든 치료할 수 있다.[隨處而有藥, 隨病而可醫]”는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지적도 의토성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의토성을 전제로 삼으면서 권근은 모든 질병에 약재 하나 즉 단방(單方)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하였다.
주 67)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自唐以來其方世增, 方愈多而術益踈. 盖古之上醫, 唯用一物以攻一疾, 後世之醫, 多其物以幸有功. 故唐之名醫許胤宗有獵不知兔, 廣絡原野之譏, 眞善喩也.”
중국에서도 당(唐) 이래 그 방문(方文)이 시대마다 증가되었지만, 방문이 많아질수록 의술은 더욱 소루해졌다는 것이다. 옛적에 용한 의원은 한 가지 약재만으로도 병을 고쳤는데, 후대에 처방 약재가 늘어나는 것은 ‘사냥하는데 토끼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 온 들판에다 널리 그물을 치는 격이다’라는 비유였다. 이를테면 권근은 일병소약론이 치료의 원칙이라고 생각하였다.
권근은 일병소약론이 조선에도 적용된다고 믿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끔 한 가지 향약으로 한 가지 질병을 치료하되 그 효험이 매우 신통했다고 적었다.
주 68)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國俗往往能以一草而療一病, 其效甚驗.”
권근은 ≪향약제생집성방≫의 특징도 마찬가지라고 서술하였다.
〈≪향약제생집성방≫에 실린 내용은-인용자〉 모두 구하기 쉬운 약물에 이미 효과를 본 치료술들이다. 만약 여기에 정통하게 된다면 한 가지 질병에 한 가지 약물만 사용해도 되니, 굳이 산출되지 않아서 얻기 어려운 것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주 69)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皆易得之物, 已驗之術也. 苟精於此, 則可能一病用一物, 何待夫不産而難得者哉.”

권근에 따르면 ≪향약제생집성방≫은 의토성을 전제로 삼으면서, 두 가지의 편찬 원칙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하나의 질병을 하나의 약재로 치료하자는 일병일약(一病一藥)의 원칙으로서, 이것은 고려의 ≪향약구급방≫이나 ≪비예백요방≫처럼 일병소약론의 입장에서 질병에 대응하려는 논리였다. 둘째, 비싸고 약기운이 증발된 중국약재 대신 토산약재를 주로 사용하자는 향재 우선의 치료 원칙이었다. 하지만 고려 의서들과 ≪향약제생집성방≫ 사이에는 처방 약재에 대한 입장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권근의 주장이 여말선초 의료의 실상을 반영한 것인지는 이제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을 분석하면 확인된다.
현존하는 ≪향약제생집성방≫ 권4~권6에는 85병증에 676처방이 수록되어 있으며 약재 1,635개가 사용되었다. 병증에 따라 약재 통계를 〈표 3〉과 같이 작성하면 ≪향약제생집성방≫ 처방의 특징이 일목요연해진다. 이 표에서는 조제에 필요한 약재를 모두 수록하였으며, 제조 과정에서 효능을 강화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첨가된다면 꿀, 소금, 식초, 물 등도 약재에 포함하였다. 하지만 병증 첫머리의 병론(病論)에는 처방이 없으므로 제외하였고, 약을 복용시에 함께 먹는 술, 물, 밥, 미음 등은 의례적인 음식으로 간주하여 통계에서 제외하였다. 또한 치료법 간의 차이를 밝히기 위해 탕제 처방과 기타 처방으로도 세분하였으며, 향약 처방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향약 의서 5종의 처방을 별도로 표시하였다.

〈표 3〉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별 약재 통계표
번호권별 병증약재/처방수(탕제처방 약재/처방수, 기타치료 약재/처방수)처방당 약재수(탕제처방당 약재수, 기타 치료 처방당 약재수)향약 의서 약재/처방수향약 의서 처방당 약재수
1권4 陰疝15/9(12/6, 3/3)1.7(2.0, 1.0)--
2권4 積聚心腹脹滿56/23(55/22, 1/1)2.4(2.5, 1.0)2/12.0
3권4 心腹痛37/23(35/21, 2/2)1.6(1.7, 1.0)11/52.2
4권4 胷痺30/12(30/12, -)2.5(2.5, -)2/12.0
5권4 心顚15/13(9/7, 6/6)1.6(1.3, 1.0)3/21.5
6권4 咳嗽論----
7권4 上喘中滿130/29(130/29, -)4.5(4.5, -)8/42.0
8권4 咳逆25/9(22/6, 3/3)2.8(3.7, 1.0)--
9권4 咳嗽短氣16/5(16/5, -)3.2(3.2, -)--
10권4 一切涎嗽54/11(54/11, -)4.9(4.9, -)--
11권4 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107/26(106/25, 1/1)4.1(4.2, 1.0)17/53.4
12권4 咯血膿血13/4(13/4, -)3.3(3.3, -)--
13권4 翻胃[附嘔吐五噎五膈]38/24(33/19, 5/5)1.6(1.7, 1.0)3/40.8
14권4 吐血30/19(29/18, 1/1)1.6(1.6, 1.0)--
15권4 嘔血7/3(7/3, -)2.3(2.3, -)--
16권4 唾血6/3(6/3, -)2.0(2.0, -)--
17권4 吐血後虛熱胸中痞口燥8/3(8/3, -)2.7(2.7, -)--
18권4 血汗3/2(2/1, 1/1)1.5(2.0, 1.0)--
19권4 鼻衄16/13(13/10, 3/3)1.2(1.3, 1.0)2/21.0
20권4 久衄2/2(1/1, 1/1)1.0(1.0, 1.0)--
21권4 大衄6/3(6/3, -)2.0(2.0, -)--
22권4 衄衊7/4(6/3, 1/1)1.8(2.0, 1.0)--
23권4 蠱毒20/14(19/13, 1/1)1.4(1.5, 1.0)--
24권5 頭風37/19(27/10, 10/9)1.9(2.7, 1.1)1/11.0
25권5 頭風白屑8/2(4/1, 4/1)4.0(4.0, 4.0)--
26권5 目赤爛30/15(15/7, 15/8)2.0(2.1, 1.9)8/42.0
27권5 目積年赤8/1(8/1, -)8.0(8.0, -)--
28권5 目飛血赤脉3/1(-, 3/1)3.0(-, 3.0)--
29권5 目血灌瞳入6/1(6/1, -)6.0(6.0, -)--
30권5 目珠子突出9/2(8/1, 1/1)4.5(8.0, 1.0)--
31권5 白睛腫脹3/1(3/1, -)3.0(3.0, -)--
32권5 目暴腫6/3(1/1, 5/2)2.0(1.0, 2.5)--
33권5 目風腫5/2(5/2, -)2.5(2.5, -)--
34권5 目睛疼痛26/4(26/4, -)6.5(6.5, -)--
35권5 目澁痛8/1(8/1, -)8.0(8.0, -)--
36권5 目痒急及赤痛1/1(-, 1/1)1.0(-, 1.0)--
37권5 五藏風熱眼35/6(32/5, 3/1)5.8(6.4, 3.0)--
38권5 目偏視風牽11/2(11/2, -)5.5(5.5, -)--
39권5 目風眼寒20/4(16/3, 4/1)5.0(5.3, 4.0)4/14.0
40권5 目赤腫痛1/1(-, 1/1)1.0(-, 1.0)1/11.0
41권5 目風淚出11/3(9/1, 2/2)3.7(9.0, 1.0)1/11.0
42권5 丹石毒上攻目5/2(4/1, 1/1)2.5(4.0, 1.0)--
43권5 時氣後患目26/11(16/3, 10/8)2.4(5.3, 1.3)4/41.0
44권5 目暈9/2(9/2, -)4.5(4.5, -)--
45권5 目昏暗16/7(15/4, 1/3)2.3(3.8, 0.3)5/15.0
46권5 目䀮䀮17/2(17/2, -)8.5(8.5, -)--
47권5 眼眉骨及頭痛10/1(10/1, -)10.0(10.0, -)--
48권5 目眵䁾11/1(11/1, -)11.0(11.0, -)--
49권5 眯目31/22(17/7, 14/15)1.4(2.4, 0.9)6/51.2
50권5 鍼眼13/2(13/2, -)6.5(6.5, -)--
51권5 熨烙----
52권5 熨烙法6/4(-, 6/4)1.5(-, 1.5)--
53권5 耳聾81/49(7/3, 74/46)1.7(2.3, 1.6)0/10.0
54권5 鼻病34/24(9/6, 25/18)1.4(1.5, 1.4)--
55권5 口病17/8(6/3, 11/5)2.1(2.0, 2.2)--
56권5 舌脣40/28(9/6, 31/22)1.4(1.5, 1.4)4/22.0
57권5 齒間出血13/6(2/1, 11/5)2.2(2.0, 2.2)--
58권5 齒齗宣露7/3(-, 7/3)2.3(-, 2.3)--
59권5 齒齲21/12(4/1, 17/11)1.8(4.0, 1.5)1/11.0
60권5 牙齒動搖44/20(10/2, 34/18)2.2(5.0, 1.9)9/51.8
61권5 牙齒黃黑8/2(-, 8/2)4.0(-, 4.0)--
62권5 牙齒不生10/3(-, 10/3)3.3(-, 3.3)--
63권5 牙齒挺生14/3(-, 14/3)4.7(-, 4.7)--
64권5 揩齒7/1(-, 7/1)7.0(-, 7.0)--
65권5 喉中生穀賊2/2(1/1, 1/1)1.0(1.0, 1.0)--
66권5 咽喉閉塞不通21/13(15/8, 6/5)1.6(1.9, 1.2)--
67권5 喉痺25/16(13/7, 12/9)1.6(1.9, 1.3)13/71.9
68권5 馬喉痺3/2(3/2, -)1.5(1.5, -)--
69권5 咽喉9/4(7/3, 2/1)2.3(2.3, 2.0)--
70권5 咽喉腫痛語聲不出5/3(5/3, -)1.7(1.7, -)--
71권5 咽喉卒腫痛6/5(3/3, 3/2)1.2(1.0, 1.5)--
72권5 咽喉生癰15/2(15/2, -)7.5(7.5, -)--
73권5 懸癰腫12/7(-, 12/7)1.7(-, 1.7)--
74권5 尸咽喉4/4(4/4, -)1.0(1.0, -)--
75권5 狗咽5/3(4/2, 1/1)1.7(2.0, 1.0)--
76권5 咽喉中如有物妨悶11/3(11/3, -)3.7(3.7, -)--
77권6 腸風48/15(47/14, 1/1)3.2(3.4, 1.0)6/41.5
78권6 諸痢論----
79권6 泄瀉痢32/15(30/13, 2/2)2.1(2.3, 1.0)2/12.0
80권6 熱痢41/15(41/15, -)2.7(2.7, -)11/33.7
81권6 冷熱痢48/21(46/20, 2/1)2.3(2.3, 2.0)11/33.7
82권6 疳痢21/5(21/5, -)4.2(4.2, -)--
83권6 氣痢4/1(4/1, -)4.0(4.0, -)--
84권6 休息痢12/3(12/3, -)4.0(4.0, -)--
85권6 蠱痢2/1(2/1, -)2.0(2.0, -)--
총계85병증1635/676(1234/421, 401/255)2.42(2.93, 1.57)135/691.96

전체 처방 676개 가운데 탕제 처방은 421개로서 1,234개의 약재가 사용되었고 기타 처방 255개에는 401개의 약재가 사용되었다. 탕제 처방 421개는 전체 처방의 62.3%로서 절대 다수이지만, 침[鍼], 뜸[灸], 찜질[熨], 도포[塗], 점안[點眼], 양치[漱], 목욕[沐], 세안[灌] 등등의 기타 처방 37.7% 역시 작은 비중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면 치아 통증을 치료하는 세신산(細辛散) 처방에서는 노봉방(露蜂房)·형개(荊芥)·세신(細辛)을 가루 내어, 일부는 콧속에 넣거나 치아의 통증 부위를 문지르도록 처방하고 있다.
주 70)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아치동요(牙齒動搖)〉.
드물지만 평두침(平頭鍼, 끝이 뭉툭한 침)을 이용한 외과 처치도 제시된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위락법(熨烙法)〉.
이처럼 여말선초에는 탕제 대신 뜸이나 침도 널리 사용하였다. 원천석(元天錫)은 “눈썹에 뜸을 뜨는 것을 피할 수 없겠구나.”라고 하여 뜸으로 치료하였다.
≪운곡행록(耘谷行錄)≫ 권1 〈목백견화부차운삼수(牧伯見和復次韻三首)〉. “刺舌猶難兔灸眉.”
그리고 질병에 따라 치료법도 달라지는 점이 위 표에서 확인된다. 치아 질환을 다루는 권5 치간출혈(齒間出血)~개치(揩齒)에서는 탕제 치료를 거의 처방하지 않았다. 50개의 처방 가운데 탕제 처방은 4개에 불과하며 46개는 기타 처방이었다. 반면 이질(痢疾) 치료를 수록한 권6 제리론(諸痢論)~고리(蠱痢)에서는 탕제 치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질을 치료하는 61개 처방 가운데 탕제 처방이 58개이고 기타 처방은 3개에 불과하다.
위 표에서 1처방당 평균 약재수는 2.42개이다. 자세히 살피면 탕제 처방의 평균 약재수는 2.93개이며, 기타 처방의 평균 약재수는 1.57개로서 큰 차이를 보인다. 기타 처방일 경우에는 단방(單方)에 가까운 특성을 보이는 반면, 탕제 처방은 3개에 육박하는 약재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고려의 ≪향약구급방≫에서는 1처방당 평균 약재수가 1.37개였으며, 약재가 없는 처방을 빼고 계산하더라도 1.43개에 불과하였다.
주 73)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67~371쪽.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고려에 비해 1처방당 평균 약재수가 증가하는 복방화(複方化) 경향이 뚜렷한 것이다.
복방화는 ≪향약제생집성방≫에 수록된 다른 향약 의서들의 평균 약재수와 비교하면 더욱 확연해진다. 위 표에 나온 바와 같이 676개의 처방에는 향약 의서의 69개 처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69개 처방에는 135개의 약재가 사용되었으므로, 1처방당 평균 1.96개의 약재가 사용되었다. 향약 의서 5종에 이미 수록되었던 처방들이므로, 이 1.96이라는 수치는 고려시대부터 ≪향약제생집성방≫ 편찬 무렵까지의 향약 처방의 수준이다. 그런데 ≪향약제생집성방≫ 전체에서는 1처방당 평균 2.42개의 약재가 사용되었으므로 이즈음에 평균 약재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향약제생집성방≫의 탕제 처방으로만 한정한다면 1처방당 평균 2.93개이므로, 처방 약재의 증가폭을 짐작할 수 있다. 권근은 일병일약(一病一藥)을 주장했지만, 실상 조선초기에 처방 약재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실제로 원천석은 단방(單方)이 효과가 없다고 한탄하였다.
주 74)
≪운곡행록(耘谷行錄)≫ 권5 〈시(詩) 병중음삼수(病中吟三首)〉. “早與錢兄久絶交, 病無良藥守寒巢, 有神妙術從何得, 無效單方可以拋.”
요컨대 1처방당 평균 약재수가 고려의 ≪향약구급방≫에서는 1.37개였고 고려~조선 초까지는 1.96개로 증가했는데,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2.42개에 달했다. 고려 향약의 일병소약론이 ≪향약제생집성방≫ 단계에 들어 일병다약론(一病多藥論)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고려 의서의 처방 약재와 비교했을 때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약(藥)’의 종류에서도 의미깊은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향약제생집성방≫ 편찬에 앞서 서울에 제생원(濟生院)을 설치하고 향약(鄕藥)을 채취하여 백성을 치료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려에서는 모든 산출물이 약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되었는데, 조선 초에 이르러서는 처방 약재가 ‘채취하는 약재’를 지칭하게 된 것이다. 점차 향약의 범위가 ‘광의의 약물(藥物)’에서 ‘협의의 약재(藥材)’로 엄밀해지는 기미였다. 이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 ≪향약제생집성방≫ 권4~권6의 모든 처방 약재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의 숫자는 ≪향약제생집성방≫의 수록 횟수이며, 숫자가 없는 것은 1회 등장한 것이다.

<문단>蜜(73), 生薑(58), 鹽(42), 人蔘(36), 杏仁(35), 酒(34), 半夏(28), 細辛(24), 皂莢(23), 橘皮(22), 防風(22), 黃蘗(22), 乾薑(20), 生地黃(20), 桑皮(19), 葶藶子(19), 棗(19), 桔梗(18), 茯苓(18), 荊芥(18), 艾(17), 麩(16), 大黃(15), 川芎(15), 醋(15), 黃芩(15), 當歸(13), 枳殼(13), 升麻(12), 豉(12), 紫蘇(12), 車前子(12), 糯米(11), 烏梅(11), 厚朴(11), 白芷(10), 五味子(10), 枳實(10), 麪(9), 白麪(9), 吳茱萸(9), 赤茯苓(9), 天南星(9), 葱(9), 梔子(9), 墨(8), 白礬(8), 酥(8), 赤芍藥(8), 地骨皮(8), 玄蔘(8), 瓜蔕(7), 桃仁(7), 麵糊(7), 白芍藥(7), 百草霜(7), 白朮(7), 蒜(7), 山芋(7), 柴胡(7), 郁李仁(7), 紫莞(7), 蒲黃(7), 香附子(7), 胡桃(7), 黃連(7), 乾地黃(6), 苦蔘(6), 栝樓(6), 麴(6), 蘿蔔(6), 麥門冬(6), 米泔水(6), 米醋(6), 萞麻(6), 射干(6), 阿膠(6), 罌粟殼(6), 牛膝(6), 漿水(6), 竹葉(6), 菖蒲(6), 天麻(6), 酢糊(6), 側栢葉(6), 薤(6), 決明子(5), 粳米(5), 伏龍肝(5), 麝香(5), 五倍子(5), 樗白皮(5), 猪脂(5), 地楡(5), 川椒(5), 靑黛(5), 鶴蝨(5), 槐花(4), 枸杞子(4), 亂髮(4), 冷水(4), 露蜂房(4), 大豆(4), 桃皮(4), 獨活(4), 麻(4), 麻油(4), 馬齒莧(4), 蔓菁子(4), 蔓荊實(4), 薄荷(4), 虵蛻(4), 生油(4), 熟地黃(4), 惡實(4), 柳枝(4), 楮葉(4), 蒺藜子(4), 蒼朮(4), 草烏(4), 茺蔚子(4), 兎絲子(4), 黑豆(4), 牽牛子(3), 京三稜(3), 藁本(3), 槐皮(3), 菊花(3), 藍葉(3), 藍漆(3), 䗶(3), 大戟(3), 童子小便(3), 馬兜零(3), 馬藺(3), 木通(3), 白附子(3), 小豆(3), 粟米(3), 水(3), 羚羊角(3), 薏苡仁(3), 人尿(3), 磁石(3), 楮樹皮(3), 知母(3), 糠(2), 芥子(2), 乾柿(2), 槐子(2), 臘茶(2), 大麥(2), 桃葉(2), 燈草(2), 牡蠣(2), 木香(2), 防己(2), 法醋(2), 覆盆子(2), 釜底黑(2), 石決明(2), 石膏(2), 石斛(2), 新汲水(2), 羊蹄草(2), 羊脂(2), 蘘荷(2), 蠶砂(2), 蠶退紙(2), 楮實(2), 豬肉(2), 前胡(2), 酒糊(2), 秦艽(2), 蒼耳子(2), 靑布(2), 楓葉(2), 荷葉(2), 香油(2), 糊(2), 黃蠟(2), 茄蔕, 葛根, 葛根粉, 甘菊花, 甘草, 建茶, 乾漆, 雞蘇苗, 雞翅, 雞屎, 雞屎白, 雞血, 古銅錢, 羖羊角, 羖羊角屑, 古靑布, 古鞋, 苦瓠, 瓜根, 括樓根, 槐葉, 槐枝, 膠, 膠飴, 韮, 瞿麥, 男哺乳, 蠟紙, 莨菪子, 鹿角, 鹿角膠, 丹蔘, 稻稈灰, 桃枝, 冬瓜, 冬葵子, 童子乳汁, 銅錢, 頭垢, 頭髮, 馬屎, 馬踏板, 馬糞, 麻繩, 馬新屎汁, 麻油紙, 馬啣鐵, 麻鞋𩍥, 蔓菁花, 芒硝, 梅, 麪粥, 木賊, 米, 蜜糊, 飯, 白犬兒乳汁, 白斂, 白馬尿, 白石英, 白鮮皮, 白屑, 栢實, 白楊, 白楊皮, 白布, 百合, 鼈, 補骨脂, 茯神, 北前胡, 蒜糊, 酸石榴皮, 山茱萸, 桑上白茸, 橡實, 桑椹, 桑枝, 桑灰汁, 生椒, 石蓮子, 石蠏, 石灰, 蟬殼, 旋復花, 消蠟, 小兒乳汁, 松葉, 松脂, 松花, 水糊, 茱萸, 醇酒, 豉湯, 柿, 食茱萸, 神麴, 新筆, 羊肝, 羊屎, 羊肉, 羊蹄根, 釅醋, 藜蘆, 軟石膏, 鷰屎, 蓮子心, 臙脂, 烏麻油, 烏賊骨, 龍膽, 牛膽, 牛脂, 郁李根, 雄雞屎, 熊膽, 雄雀屎, 遠志, 葳靈仙, 蝟皮, 油, 乳, 乳汁, 六畜, 栗殼, 李根白皮, 益母草, 人屎灰, 人莧子, 雌雞屎, 薔薇, 杵頭糠, 苧麻, 楮皮, 赤松皮, 井花水, 虀, 薺苨, 竈中心土, 早禾稿, 鍾乳, 竹茹, 紙, 地膚子, 眞木, 眞蚌粉, 榛子, 秦椒, 秦皮, 茶, 蒼米, 天門冬, 天仙子, 茜草, 鐵, 鐵沙, 鐵鐶, 靑柳枝, 靑魚, 靑蒿花, 椒, 楸實, 唾, 炭灰, 澤瀉, 破鼓皮, 蒲萄根, 玄胡索, 胡荽, 紅米, 紅花, 滑石, 黃瓜根, 黃耆, 黃牛乳, 烸炲, 黑牛尿.
주 75)
이 목록에 대해서는 애매하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예컨대 냉수(冷水), 수(水), 신급수(新汲水), 정화수(井花水)가 실제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물[水]을 치료용 약물로 판단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목록은 ≪향약제생집성방≫ 권4~권6에서 처방을 직접 구성하는 약물을 대상으로 삼아 작성되었으므로, 조선초기의 약재 활용 실태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앞서 여말선초의 약재 증가와 유통 확대 경향을 서술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실상은 위의 목록과 같다. 물론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처방 약재로 수록된다는 점이 조선초기에 실제로 그만큼 사용되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의서상의 처방과 실제 활용 사이의 간극을 감안하더라도, 위의 처방 약재들이 바로 고려와 조선초기에 향약으로 이용하던 약재의 목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향약제생집성방≫ 약재의 특징을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고려 의서들의 처방 약재까지 포함하여 비교표를 만들어 보자.

〈표 4〉 ≪향약구급방≫, ≪신집어의촬요방≫,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 약재표
주 76)
≪향약구급방≫은 ≪한국의학대계(韓國醫學大系)≫1(김신근(金信根) 주편(主編), 여강출판사(驪江出版社), 1992)을 토대로 작성하였으며, ≪신집어의촬요방≫은 ≪어의촬요연구≫(안상우·최환수, 한국한의학연구원, 2000)에 ≪향약제생집성방≫의 기록을 보완하여 작성하였다.
순위≪향약구급방≫(처방수)≪신집어의촬요방≫(처방수)≪향약제생집성방≫(처방수)
1醋(27)蜜(53)蜜(73)
2蜜(22)甘草(42)生薑(58)
3鹽(21)人蔘(30)鹽(42)
4當歸(15)乾薑(27)人蔘(36)
5艾(15)肉桂(23)杏仁(35)
6生地黃(12)當歸(22)酒(34)
7蒜(12)茯苓(19)半夏(28)
8油(12)麝香(17)細辛(24)
9甘草(11)附子(15)皂莢(23)
10藍漆(11)川芎(15)橘皮(22)
11猪脂(11)龍腦(14)防風(22)
12雞子(10)防風(14)黃蘗(22)
13皂莢(10)白朮(14)乾薑(20)
14人乳(9)巴豆(14)生地黃(20)
15麵(9)木香(13)桑皮(19)
16大豆(8)檳榔(13)葶藶子(19)
17石灰(8)生薑(13)棗(19)
18葱(8)大黃(12)桔梗(18)
19蒲黃(8)鹽(11)茯苓(18)
20黃蘗(8)黃芩(11)荊芥(18)
21薤(7)黃連(10)艾(17)
22葵子(7)朱砂(10)麩(16)
23栝樓(7)杏仁(10)大黃(15)
24麻子(7)皂莢(10)川芎(15)
25棗(6)芍藥(9)醋(15)
26桑皮(6)黃耆(9)黃芩(15)
27小便(6)山藥(8)當歸(13)
28白芍藥(6)犀角(8)枳殼(13)
29生薑(6)細辛(8)升麻(12)
30小豆(6)雄黃(8)豉(12)
≪향약제생집성방≫에서 꿀[蜜], 소금[鹽], 술[酒] 등 일상 음식들이 처방 약재로 활용된 점은 ≪향약구급방≫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향약구급방≫과 달리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생강(生薑), 인삼(人蔘), 행인(杏仁), 반하(半夏), 세신(細辛), 조협(皂莢), 귤피(橘皮), 방풍(防風) 같은 ‘약재(藥材)’의 비중이 훨씬 높다. 의서간의 약재를 비교해보면 ≪신집어의촬요방≫과 ≪향약제생집성방≫의 주요 약재들은 순위가 다를 뿐이지 상당한 부분이 겹친다. ≪향약제생집성방≫이 고려의 ≪향약구급방≫과 ≪신집어의촬요방≫을 종합하고 있음은 처방과 약재를 분석한 〈표 3〉에 의해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표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감초(甘草), 용뇌(龍腦), 파두(巴豆), 빈랑(檳榔) 등이 ≪신집어의촬요방≫에서는 자주 처방되었지만 ≪향약제생집성방≫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수입 약재에 해당하는 감초, 용뇌, 파두, 빈랑 등이 빠지면서, 향재(鄕材) 활용이 더욱 강화된다는 뜻이다. 조선초기 처방 약재의 이러한 변화가 보여주는 특징은 만물(萬物)을 약물(藥物)로 활용하려는 데서 탈피하여, 제생원 등에서 확보한 ‘재배(栽培) 향재(鄕材)’로 치료하려는 경향이었다. 앞서 살핀 ≪향약제생집성방≫의 편찬 원칙 가운데, 비싸고 약기운이 증발된 중국약재 대신 토산약재를 주로 사용하자는 향재 우선의 치료 원칙은 굳건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요컨대 처방 약재의 분포로 미루어보아, ≪향약제생집성방≫ 단계에 들어 기존의 만물위약론은 약재위약론(藥材爲藥論)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의토성(宜土性)’에 대한 자각을 배경으로 당재(唐材)에 대한 향약(鄕藥)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의토성의 강조는 고려와 조선에서 공통된 주장이었다. 하지만 여말선초에 의료 여건이 변화함에 따라 의술 수준은 달라지고 있었다.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질병마다 평균 2~3개의 약재를 처방하고 있었으며, 치료 약재에서도 재배 약재를 주로 사용하였다. 한마디로 ≪향약제생집성방≫에 보이는 일병다약론(一病多藥論)과 약재위약론(藥材爲藥論)은 고려 의술의 단계였던 일병소약론과 만물위약론을 극복한 향약론이었다.

3) 한계와 과제

간행 이후 ≪향약제생집성방≫은 조선 사회에서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향약제생집성방≫ 발문에서 ‘제생원(濟生院)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라고 적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주 77)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향약제생집성방≫ 편찬은 일반 백성들의 치료를 위한 대민 사업의 일환이었다. 실제로도 ≪향약제생집성방≫은 약을 구하기 쉽고 병을 치료하기 쉬우므로,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향약집성방서(鄕藥集成方序)〉. “自是藥易求而病易治, 人皆便之.”
흔히 조선에서 ≪향약제생집성방≫은 ‘향약집성방’이라고 약칭되었다. 예컨대 세종 12년(1430) 3월에 의학의 취재(取才) 의서로 거론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주 79)
≪세종실록(世宗實錄)≫ 권47 세종 12년 3월 18일(무오). “詳定所啓諸學取才經書諸藝數目. … 醫學, 直指脉, 纂圖脉, 直指方, 和劑方, 傷寒類書, 和劑指南, 醫方集成, 御藥院方, 濟生方, 濟生拔粹方, 雙鍾處士活人書衍義, 本草, 鄕藥集成方, 針灸經, 補註銅人經, 難經, 素問括, 聖濟摠錄, 危氏得效方, 竇氏全嬰, 婦人大全, 瑞竹堂方, 百一選方, 千金翼方, 牛馬醫方.”
≪향약제생집성방≫을 가리키는 게 확실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향약집성방≫은 1년이 지난 세종 13년(1431) 가을에야 편찬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해동문헌총록≫에서 ≪향약제생집성방≫을 ‘조준이 편찬한 ≪향약집성방≫’이라고 설명한 것도 동일한 이해였다.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의약류(醫藥類) 신증향약집성방(新增鄕藥集成方)〉. “我廟以權仲和所著鄕藥簡易方及趙浚所撰鄕藥集成方, 治法藥名猶有未備者.”
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세종 15년(1433)의 ≪향약집성방≫을 ≪해동문헌총록≫에서는 ‘신증향약집성방(新增鄕藥集成方)’ 즉 ‘새로 증보한 ≪향약집성방≫’이라고 표기하면서 ‘신증집성방(新增集成方)’으로도 줄여 불렀다.
주 81)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의약류(醫藥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權採新增集成方序”;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의약류(醫藥類) 신증향약집성방(新增鄕藥集成方)〉. “新增鄕藥集成方[<원주>七十五卷, 補遺十卷].” 이경록, 〈≪향약집성방≫의 편찬과 중국 의료의 조선화〉, ≪의사학(醫史學)≫ 20권 2호, 2011, 239쪽 참고.
조선시대 의학에서 ≪향약제생집성방≫은 ≪향약집성방≫으로 연결되는 가교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은 이상과 같은 의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약재를 조금 더 거론하자면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감초(甘草)가 2번밖에 나오지 않는데,
주 82)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권6 〈냉열리(冷熱痢)〉.
그나마 처방을 보완 설명하거나 중국 의서를 인용하는 정도이며 중요한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감초를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적극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감초가 아직 국내에서 생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초가 조선에서 토착화에 성공한 것은 성종대에 이르러서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 권178 성종 16년 윤4월 29일(기유).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07~312쪽 참고.
또한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곽향(藿香)이나 부자(附子)도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이숭인이나 이색이 곽향과 부자를 구하지 못하여 애를 먹었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심지어 조선에서는 약재가 생산되지 않아서 질병을 얻게 되면 약재를 구하러 이리저리 헤매다가 약은 얻지 못하고 병은 더욱 깊어진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삼봉집(三峰集)≫ 권7 〈조선경국전 상(朝鮮經國典 上) 부전(賦典)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 “國家以爲藥材非本土之所産, 如有疾病, 其孝子慈孫傍求奔走, 藥未之得而病已深, 有不及救治之患.”
따라서 향약 생산은 더욱 확대되고 그 종류도 다양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경록, 〈조선 세종대 향약 개발의 두 방향〉, ≪태동고전연구(泰東古典硏究)≫ 26집, 2010 참고.
그리고 고려 이래 당재에 대한 향약의 우월성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향재 약효가 당재와 동일하거나 뛰어난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었다. 향재의 치유를 통해 경험방을 축적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 때문에 여말선초에 국왕은 향재가 아닌 당재로 치료받고 있었다. 고려 공민왕 21년(1372)과 23년(1374)에는 약재(藥材)와 약방(藥方)을 하사해 준 것을 명(明)에 감사하였다.
주 86)
≪고려사(高麗史)≫ 권43 세가(世家)43 공민왕 21년 11월; ≪고려사(高麗史)≫ 권44 세가(世家)44 공민왕 23년 2월.
정총(鄭摠, 1358∼1397)은 〈사약재표(謝藥材表)〉에서 약재를 중국에 요청하였는데,
≪복재선생집(復齋先生集)≫ 하(下) 〈표전(表箋) 사약재표(謝藥材表)〉. “惟良藥不產於小邦, 致陪臣爲求於上國.”
양약(良藥)은 중국에서 산출된다고 인식한 것이었다. 조선에 들어서도 태조의 치료를 위해 태종은 용뇌(龍腦), 침향(沈香), 소합(蘇合), 향유(香油) 등 18종의 약재를 명(明)에서 구하였다.
≪태종실록(太宗實錄)≫ 권5 태종 3년 6월 18일(갑자); ≪명사(明史)≫ 권320 열전(列傳)208 외국(外國)1 조선(朝鮮).
≪향약제생집성방≫ 약재의 한계에 대해서는 권채(權採)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중국과는 다른 약재명이 꽤 많아서 의술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 약재 부족을 한탄하는 지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 89)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향약집성방서(鄕藥集成方序)〉. “藥名之異於中國者頗多, 故業其術者, 未免有不備之嘆.”

조선과 중국의 약재명이 다른 탓에 약재가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인식이었다. 약재위약론에도 불구하고 향약의 약성, 채취법, 포제법은 확립되지 않았으며 약재의 지리적 분포 역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으로서는 필요한 약재를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향약의 생산 실태와 그 약효를 파악해야 했다. 주요 토산약재의 종류와 약성을 확정하는 작업이 바로 세종대의 ≪향약채취월령≫ 편찬이며, 모든 토산약재를 지속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수취에 대비하려는 것이 ≪팔도지리지≫를 비롯한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물 항목의 작성 배경이었다. 전자가 162가지 주요 향재를 정리한 것이라면, 후자는 전국의 모든 향재로 정리 범위를 확장한 사업에 해당한다.
한편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 90% 가량이 중국 의서에 의존하고 있었음은 앞서 살핀 바와 같다. 중국 처방을 주된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중국 의학에의 의존성이 심화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며, 동시에 조선 약재로 중국 처방을 보다 자유로이 활용할 정도로 조선 의학의 수준이 올라섰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런데 조선의 질병은 조선의 약재로 치료할 수 있다는 의토성의 논리에 비추어 볼 때, 조선의 풍토로 인한 질병을 중국 의서에 의지해서는 모두 치료할 수 없었다. 중국의 질병을 토대로 저작된 중국 의서의 처방이 조선의 질병과 완전히 부합할 수는 없는 탓이었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만의 독특한 처방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의학은 이제 약재의 측면을 넘어 고유 처방의 조사와 수렴 작업으로 본격 확장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조선에서 통용될 처방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조선의 질병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재인식을 요구하였다. 어떤 증상을 질병이라고 규정할 것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체제의 측면에서 보자면, 조선 의료가 동아시아의료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의미였다. ≪향약제생집성방≫ 단계의 이같은 의학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곧이어 세종대에 편찬되는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이다.
주 90)
여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이경록, 〈≪향약집성방≫의 편찬과 중국 의료의 조선화〉, ≪의사학(醫史學)≫ 20권 2호, 2011; 이경록, 〈향약(鄕藥)에서 동의(東醫)로 : ≪향약집성방≫의 의학이론과 고유 의술〉, ≪역사학보(歷史學報)≫ 212집, 2011; 이경록, 〈조선전기 ≪의방유취≫의 성취와 한계 -‘상한’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34권 3호, 2012 참고.
요컨대 ≪향약제생집성방≫의 편찬 이후에 조선 의학계에는 향약 생산의 확대 외에도 향재를 정리하고 처방을 이론화하는 과제가 부여되었다.

4. 맺음말

이 글에서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의학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고 판본을 정리하면서 원래의 형태를 복원하였다. 아울러 ≪향약제생집성방≫의 인용 의서를 제시하고, 수록 처방과 약재들의 특성을 검토함으로써 여말선초 의료의 발전 단계를 논의하였다.
고려의 향약은 ‘풍토(風土)’와 ‘질병(疾病)’과 ‘약재(藥材)’를 한데 묶는 의토성(宜土性)의 토대 위에서 성립하였다. 크게 보아 ≪비예백요방≫ 등에 나타나는 고려의 향약론은 만물위약론(萬物爲藥論)과 일병소약론(一病少藥論)이었다. 고려의 모든 산출물이 약물로 활용될 수 있으며, 하나의 질병을 하나의 약물로 치료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고려의 향약론은 약재 생산의 증가와 치료의 활성화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여말선초의 약재 점증과 경험방 축적에 대응하여 편찬된 의서가 바로 ≪향약제생집성방≫이었다. 권중화(權仲和)가 정종 원년(1399)에 편찬한 ≪향약제생집성방≫은 제목에 그 뜻이 담겨 있듯이,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각종 처방들을 종합한 관찬의서였다.
현존하는 ≪향약제생집성방≫ 권4~권6에서는 85개 병증별로 병론과 처방들이 배치되었다. 치료법으로는 탕제 처방이 다수이지만 침, 뜸, 찜질 등등의 다양한 처방도 제시되었다. 그리고 ≪향약제생집성방≫의 인용 의서로는 중국 의서 49종과 향약 의서 5종이 활용되었다. 인용된 중국 의서의 분석을 통해 여말선초에 송(宋) 의학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원(元) 의학을 비롯한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의 영향력도 증대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향약제생집성방≫이 이전 시기의 향약을 계승하고 있음은 5종의 향약 의서에서 확인되었다. 특히 계통이 달랐던 ≪향약구급방≫과 ≪신집어의촬요방≫이 조선에 들어 ≪향약제생집성방≫으로 종합된 것은 의서의 계승관계에서 주목할 만하다.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을 분석한 결과 1처방당 평균 약재수는 2.39개여서 복방화(複方化)의 경향이 뚜렷하였다. 아울러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처방되는 약재는 고려처럼 ‘모든 산출물’이 아니라 ‘재배(栽培) 약재(藥材)’가 상당수였다. 따라서 ≪향약제생집성방≫의 향약론은 하나의 질병에 많은 약재를 사용하며[一病多藥論], 재배 약재 위주로 치료한다[藥材爲藥論]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향약의 일병소약론과 만물위약론을 극복한 논리였다.
하지만 명(明)의 약재 하사에 감사하는 표문에서 드러나듯이 향약에 대한 신뢰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당재와 중국식 처방에 경도된 지배층이 일반 백성들에게 향약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약재 정책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중국 의학에 대한 깊은 의존을 극복하는 것이 조선 의학의 과제였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약재 생산이 아직도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산 약재의 종류 및 약성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고, 처방도 부족하였다. 이에 따라 향재의 시기적, 공간적 분포를 명확히 파악하는 작업과 함께 조선의 질병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인식과 치료법의 총합이 진행되어야 했다. 전자가 세종대에 진행되는 ≪향약채취월령≫·≪세종실록 지리지≫의 편찬 작업이라면, 후자는 ≪향약집성방≫·≪의방유취≫의 편찬 배경이었다. 약재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질병체계 및 처방에 대한 집대성이 진행되면서 조선 의학은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할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의학을 계승하면서 조선전기 의학의 발전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향약제생집성방≫ 편찬의 역사적 의의라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 문헌

1. 자료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어의촬요연구≫(안상우·최환수, 한국한의학연구원, 2000)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유문사친(儒門事親)≫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명사(明史)≫
≪목은문고(牧隱文藁)≫ ≪목은시고(牧隱詩藁)≫ ≪운곡행록(耘谷行錄)≫ ≪도은선생시집(陶隱先生詩集)≫ ≪삼봉집(三峰集)≫ ≪복재선생집(復齋先生集)≫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동문선(東文選)≫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조선고서목록(朝鮮古書目錄)≫(朝鮮古書刊行會, 朝鮮雜誌社, 1911)

2. 연구논저

김두종(金斗鍾), ≪한국의학사(韓國醫學史)≫, 탐구당, 1966.
김성수(金聖洙), 〈한국의 옛 의서(醫書)〉, ≪고서연구(古書硏究)≫ 13호, 1996.
김신근(金信根) 편저(編著), ≪한의약서고(韓醫藥書攷)≫,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김중권(金重權), 〈조선초(朝鮮初) 향약의서(鄕藥醫書)에 관한 고찰(考察)〉,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 16집, 1998.
김호(金澔), 〈여말선초 ‘향약론(鄕藥論)’의 형성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진단학보(震檀學報)≫ 87집, 1999.
손홍열(孫弘烈), 〈여말·선초(麗末鮮初) 의서(醫書)의 편찬(編纂)과 간행(刊行)〉, ≪한국과학사학회지≫ 11권 1호, 1989.
손홍열(孫弘烈), ≪한국중세(韓國中世)의 의료제도연구(醫療制度硏究)≫, 수서원(修書院), 1988.
이경록, 〈≪향약집성방≫의 편찬과 중국 의료의 조선화〉, ≪의사학(醫史學)≫ 20권 2호, 2011.
이경록, 〈조선 세종대 향약 개발의 두 방향〉, ≪태동고전연구(泰東古典硏究)≫ 26집, 2010.
이경록, 〈조선전기 ≪의방유취≫의 성취와 한계 -‘상한’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34권 3호, 2012.
이경록, 〈조선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과 향약의 발전〉, ≪동방학지(東方學志)≫ 149집, 2010.
이경록, 〈향약(鄕藥)에서 동의(東醫)로 : ≪향약집성방≫의 의학이론과 고유 의술〉, ≪역사학보(歷史學報)≫ 212집, 2011.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이능화(李能和), 〈조선의약발달사(朝鮮醫藥發達史)〉, ≪조선(朝鮮)≫ 1931년 6월호~12월호, 1931.
미키 사카에[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자가 출판(自家 出版), 1963.
미키 사카에[三木榮], ≪朝鮮醫書誌≫ 증수판(增修版), 學術圖書刊行會, 1973.
주1)
이 해제는 내가 쓴 〈조선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과 향약의 발전〉을 비롯한 다음 글들을 토대로 작성되었다(이경록, 〈조선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과 향약의 발전〉, ≪동방학지(東方學志)≫ 149집, 2010;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이경록, 〈조선 세종대 향약 개발의 두 방향〉, ≪태동고전연구(泰東古典硏究)≫ 26집, 2010; 이경록, 〈≪향약집성방≫의 편찬과 중국 의료의 조선화〉, ≪의사학(醫史學)≫ 20권 2호, 2011; 이경록, 〈향약(鄕藥)에서 동의(東醫)로 : ≪향약집성방≫의 의학이론과 고유 의술〉, ≪역사학보(歷史學報)≫ 212집, 2011; 이경록, 〈조선전기 ≪의방유취(醫方類聚)≫의 성취와 한계 -‘상한’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34권 3호, 2012).
주2)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28~330쪽.
주3)
권근의 서문과 발문은 ≪양촌집≫과 ≪동문선≫에 실려 있다(≪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동문선(東文選)≫ 권91 〈서(序)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동문선(東文選)≫ 권103 〈발(跋)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또한 ≪증보문헌비고≫에는 권근의 서문이 초략되어 있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246 예문고(藝文考) 5 〈의가류(醫家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향약제생집성방≫은 고려 말 향약 의서와 조선 세종대 ≪향약집성방≫을 잇는 저작으로 설명되었으며, 미키 사카에[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자가 출판(自家 出版), 1963, 114쪽; 미키 사카에[三木榮], ≪朝鮮醫書誌≫ 증수판(增修版), 學術圖書刊行會, 1973, 12~14쪽; 김두종(金斗鍾), ≪한국의학사(韓國醫學史)≫, 탐구당, 1966, 201~202쪽. 이외에도 ≪향약제생집성방≫을 단편적이나마 소개하거나 언급한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김신근(金信根) 편저, ≪한의약서고(韓醫藥書攷)≫,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손홍열(孫弘烈), 〈여말·선초(麗末鮮初) 의서(醫書)의 편찬(編纂)과 간행(刊行)〉, ≪한국과학사학회지≫ 11권 1호, 1989; 김호(金澔), 〈여말선초 ‘향약론(鄕藥論)’의 형성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진단학보(震檀學報)≫ 87집, 1999). 서지학적인 연구가 일부 진행되었을 뿐이다. 김성수(金聖洙), 〈한국의 옛 의서(醫書)〉, ≪고서연구(古書硏究)≫ 13호, 1996; 김중권(金重權), 〈조선초(朝鮮初) 향약의서(鄕藥醫書)에 관한 고찰(考察)〉,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 16집, 1998.
주6)
본문에서 다루는 고려의 의서들에 대한 논의는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V장 참고.
주7)
여말선초 약재 증가의 구체적인 양상은 본문 3절에서 다루는 ≪향약제생집성방≫의 약재 목록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기록상으로 보아도 민간의 ‘약포(藥圃)’에서 약재를 재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를 들어 원천석(元天錫, 1330∼?)의 문집에서는 ‘약포’와 ‘채약(採藥)’이라는 표현이 연달아 보인다. ≪운곡행록(耘谷行錄)≫ 권1 〈제조목감유거(題趙牧監幽居)〉. “常尋藥圃雨中鋤”; 〈기제춘주신대학교거(寄題春州辛大學郊居)〉. “採藥晴登屋上山”; 〈선옹견화부차운(禪翁見和復次韻)〉. “茶軒煙羃羃, 藥圃雨絲絲.” 조선에 들어서 지방마다 배치된 ‘심약(審藥)’과 ‘약부(藥夫)’는 약초의 증가를 전제로 운영될 수 있었다. 손홍열, ≪한국중세(韓國中世)의 의료제도연구(醫療制度硏究)≫, 수서원(修書院), 1988, 194~197쪽. 그 결과 인삼(人蔘), 복령(茯苓), 백출(白朮) 등이 민간에서 널리 활용되었다. ≪목은시고(牧隱詩藁)≫ 권8 〈시(詩) 자영(自詠)〉. “身世祗今誰得管, 參苓白朮幸相扶”; 권9 〈시(詩) 안기행이수(晏起行二首)〉. “晚年臥病不出戶, 參苓白朮香滿家”; 권28 〈시(詩) 문보법노승소신삼수(聞報法老僧燒身三首)〉. “病裏靑春幾度新, 蔘苓浹髓文熏身”; 권33 〈시(詩) 즉사(卽事)〉. “病以蔘苓扶我寧”; 권34 〈시(詩) 전장자소[<원주>병서](田莊自笑[<원주>幷序])〉. “中爲病侵苦未痊, 蔘苓白朮徒烹煎”; ≪도은선생시집(陶隱先生詩集)≫ 권2 〈시(詩) 제곤슬산승사(題昆瑟山僧舍)〉. “一匊煮蔘苓.” 이외에도 권근(權近)은 오가피(五加皮)가 노인의 치아와 모발에 효능이 있고, 오미자(五味子)는 약재로 채취되어 보관되는 상황을 설명하였다(≪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0 〈시(詩) 오가피(五加皮)〉; 〈오미자(五味子)〉).
주11)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吾東方遠中國. 藥物之不産玆土者, 人固患得之之難也.”
주12)
≪삼봉집(三峰集)≫ 권7 〈조선경국전 상(朝鮮經國典 上) 부전(賦典)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 “國家以爲藥材非本土之所産,… 於是, 置惠民典藥局, 官給藥價五升布六千疋, 修備藥物. 凡有疾病者, 持斗米疋布至, 則隨所求而得之.… 不幸有官府之責取, 權勢之抑買, 而藥價耗損. 貧民無以自活, 豈非不仁之甚者也.”모든 계층이 의료 혜택을 누리는 게 혜민국의 설립 목적이었지만, 실상 백성에게는 약가를 철저하게 징수하고 지배층은 약재를 싸게 억매(抑買)하였다. 이 때문에 이색(李穡)은 병든 노비를 위해 혜민국에서 약을 구하려고 하였지만 쉽게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목은시고(牧隱詩藁)≫ 권30 〈시(詩) 종혜민국중관색약 위노병야(從惠民局衆官索藥 爲奴病也)〉. “先王念民病, 設局散還丹, 邪氣如氷釋, 恩波似海寬, 長鬚方苦痛, 老眼亦艱難, 書札無由惜, 哀矜在衆官.” 이색이 자신의 향재(鄕材)를 다른 이의 치료에 사용하도록 베풀었던 배경이었다.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5 〈시(詩) 오소윤내방 여이향약일상부지 서기산지민간질병 개종신행서지일단 족이자비 가이자관(吳少尹來訪 予以鄕藥一箱付之 庶其散之民間疾病 盖終身行恕之一端 足以自悲 歌以自寬)〉.
주15)
≪목은시고(牧隱詩藁)≫ 권26 〈시(詩) 윤장원래 면유주색 좌이갑수 진솔가애 연어사장지례초실지 고록위단가 친지야 부설지교야(尹壯元來 面有酒色 坐而瞌睡 眞率可愛 然於事長之禮稍失之 故錄爲短歌 親之也 不屑之敎也)〉. “自言父母病在躬, 收拾藥材走西東, 似謝來遲言未終, 起而辭去如飄蓬.” 또한 이숭인(李崇仁)이 병들자 그 아들은 곽향(藿香)을 구하러 이색을 방문하였는데 이색이 약재 대신 정신 수양을 치료법으로 제시할 정도로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5 〈시(詩) 이자안병이월여의 인한상당요 동왕문후 방시지지 회복역병발 미능상마 자래구곽향 인유소감 가이자관(李子安病已月餘矣 因韓上黨邀 同往問候 方始知之 會僕亦病發 未能上馬 子來求藿香 因有所感 歌以自寬)〉. “君其安心善自保, 藥餌無如自頤養.” 곽향은 부족했다. 이색 역시 병들었을 때 부자(附子)를 구하지 못해 고생하였다.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7 〈시(詩) 사나연송용호단(謝那演送龍虎丹)〉. “病夫深有感, 附子近來難.”
주18)
≪목은시고(牧隱詩藁)≫ 권35 〈시(詩) 환개심불안 수일불음(患疥心不安 數日不吟)〉.
“疥發相攻擾我心, 苦哉連日輟長吟, 三郞特浸桑灰洗, 絶勝仙人頂上針.” 그리고 다년간 질병에 시달리며 약으로 치료하던 이색은 찬음료[氷漿]로 효과를 보자 구급방 속에 기록해야겠다고 적었다.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8 〈시(詩) 유동남대가 시장수고과 유이음악 가동주보 가이기지(柳洞南大街 施漿水苽果 侑以音樂 家童走報 歌以紀之)〉. “我病多年近藥物, 攻邪補虛相甲乙, 炎天氷漿立有效, 備急方中當續筆.”
주20)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1 〈설류(說類) 김공경험설(金公經驗說)〉.
주21)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醴泉之精博, 纂其書.” 예천(醴泉)은 예천백(醴泉伯)인 권중화를 가리킨다. 하지만 권중화가 관약국(官藥局) 관리들을 거느리고 작업했다는 기록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처럼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乃與權公特命官藥局官更考諸方.”
주23)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甞有三和子鄕藥方, 頗爲簡要, 論者猶病其畧. 曩日今判門下權公[<원주>仲和], 命徐贊者尤加蒐輯, 著簡易方, 其書尙未盛行于世.… 左政丞平壤伯趙公[<원주>浚], 右政丞上洛伯金公[<원주>士衡]… 又患其方有所未備, 乃與權公特命官藥局官更考諸方, 又採東人經驗者, 分門類編, 名之曰鄕藥濟生集成方, 附以牛馬醫方. 而金中樞觀察江原, 募工鋟梓, 以廣其傳.”당시에 좌정승 조준(趙浚)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은 제생원(濟生院)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각도(各道)에는 의학원(醫學院)을 설치하고 교수(敎授)를 파견하여 치료하였다. 하지만 치료가 미비할까 염려되면서 대중용 의서가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左政丞平壤伯趙公[<원주>浚], 右政丞上洛伯金公[<원주>士衡]上體聖心, 請於中國置濟生院, 給之奴婢, 採取鄕藥, 劑和廣施, 以便於民.… 諸道亦置醫學院, 分遣敎授, 施藥如之, 俾其永賴. 又患其方有所未備”;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右濟生院鄕藥集成方, 爲惠斯民作者也.” 그런데 이 책은 강원도 관찰사 김희선에 의해 인쇄되었으며, 한상경(韓尙敬)ㆍ안경량(安敬良)ㆍ김원경(金元囧)ㆍ허형(許衡)ㆍ이종(李悰)ㆍ방사량(房士良)도 공로가 있었다.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吁, 以平壤上洛之仁厚, 緫其事, 醴泉之精博, 纂其書, 而金公又能勉力, 終始其功, 四公所以嘉惠東民者, 當與此書並流萬世, 而無窮期矣. 幹是院事者, 西原君韓公[<원주>尙敬], 順興君安公[<원주>敬良], 金君[<원주>元冏], 許君[<원주>衡], 李君[<원주>悰], 房君[<원주>士良]皆有勞於此者也.” 이처럼 적지 않은 사람들이 편찬에 관여했으므로 누가 편찬자인지는 기록별로 설명이 분분하였다. 미키 사카에는 이 책을 권중화·김희선·조준·김사형 등의 공통 편찬이라고 정리하였다(미키 사카에[三木榮], ≪朝鮮醫書誌≫ 증수판(增修版), 學術圖書刊行會, 1973, 12쪽).
주27)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의약류(醫藥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학문각(學文閣) 영인, 1969). ≪해동문헌총록≫에서 흥미로운 점은 권근이 쓴 것으로 알려진 ≪향약제생집성방≫의 서문을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표현한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 서문 작성일은 태조 7년(1398) 6월 하순, 정도전이 처형당한 ‘왕자의 난’ 발발은 두 달 뒤인 8월 26일 기사일(己巳日), 발문 작성일은 이듬해인 정종 원년(1399) 5월 상순이다. 서문과 발문을 살펴보면 편찬경위에 대한 설명이 겹치는데, 권근이 동일한 이야기를 서문과 발문에서 되풀이한 점은 이상하다. 혹시 정도전이 ≪향약제생집성방≫ 서문을 쓰고 곧바로 처형을 당하자, 당시의 정치상황 때문에 권근이 서문까지 쓴 것으로 처리한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준은 관직이 가장 높은 관료인 탓에 서문 첫머리에 거론된 것이므로, 조준을 ≪향약제생집성방≫의 실제 편찬자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향약제생집성방≫은 30권으로, 중추인 김희선이 편찬하였다.”라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246 〈예문고(藝文考)5 의가류(醫家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鄕藥濟生集成方三十卷, 中樞金希善撰.” 이 내용은 ≪조선고서목록(朝鮮古書目錄)≫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朝鮮古書刊行會, ≪조선고서목록(朝鮮古書目錄)≫, 朝鮮雜誌社, 1911(아세아문화사 영인, 1972), 90쪽. “鄕藥濟生集成方三十卷, 金希善撰.”
주29)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乃與權公特命官藥局官更考諸方, 又採東人經驗者, 分門類編, 名之曰鄕藥濟生集成方”;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又與醴泉伯權相[<원주>仲和]將其甞所撰著鄕藥之方, 更加裒集, 勒成全書.”
주30)
가천박물관 소장 ≪향약제생집성방≫은 CD-Rom 형태로 제작된 ≪가천 길재단 50주년 기념 가천박물관 소장 국보·보물전≫(가천문화재단, 2008)을 통해 열람이 가능하다. 여기에 수록된 ≪향약제생집성방≫의 이미지 파일은 문화재청에서 작업한 것인데, 두 군데 오류가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첫째는 권6 앞부분의 낙장 부분을 판심 6쪽이라고 기록한 것인데, 원문의 기사를 살펴보면 낙장은 판심 7쪽이다. 둘째는 ‘30쪽 후면과 31쪽 전면’이 탈락되었다고 기록하면서 ‘치간출혈(齒間出血)’ 항목 2쪽을 뒷부분(이미지 90~91쪽)에 배치한 것인데, 가천박물관의 원본을 확인해보면 ‘치간출혈’ 항목 2쪽이 ‘30쪽 후면과 31쪽 전면’의 제 위치에 있다. 한독본은 1996년 서울 인사동의 고서 상인에게 구입하였으며, 가천본은 대구의 어느 상인이 수집하였다가 다른 상인을 거쳐 가천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천본을 발굴한 분에 따르면, 이 자료는 1989년경에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던 청송의 한 고택에서 수집한 것이다. 발견 당시 이 책은 재래식 화장실 바닥의 농약박스에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 분이 현재 보관하고 있는 복사본과 가천본을 비교해보면, 광곽 밖의 메모들이 일치하고 있어서 동일한 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주32)
내가 예전에 쓴 〈조선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과 향약의 발전〉(≪동방학지(東方學志)≫ 149집, 2010)에서는 한독본과 가천본이 동일한 판본을 이용하되 인출한 종이만 달랐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 논의한 것과 같이 두 소장본은 별도의 목판으로 인쇄하였으므로, 여기에서 바로잡는다.
주33)
가천본은 권5와 권6이 판심 13쪽을 중심으로 뒤섞여 있는데, 본문의 오염 상태가 권5의 판심 13쪽에서 갑자기 심해진다. 한동안 권5와 권6의 순서로 제대로 편철되어 있다가 나중에 현재 모습으로 재편철되면서 오염 정도가 급격히 달라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가천본을 수집한 분의 증언과 복사본에 의하더라도 가천본은 원래 권5, 권6의 순서대로 되어 있었다.
주34)
이 국역본의 내용 역시 이 표의 목차에 따라 편차가 구성되었다.
주35)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향약집성방서(鄕藥集成方序)〉(김신근(金信根) 주편(主編), ≪한국의학대계(韓國醫學大系)≫3, 여강출판사(驪江出版社), 1992). “舊證三百三十八, 而今爲九百五十九. 舊方二千八百三, 而今爲一萬七百六.” 위 표에 보이는 ≪향약제생집성방≫의 병증 구성은 세종대에 편찬되는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아주 흡사하다. ≪향약집성방≫의 57개 병문(病門)은 … 21) 제산문(諸疝門), 22) 적취문(積聚門), 23) 심통문(心痛門), 24) 제해문(諸咳門), 25) 제기문(諸氣門), 26) 담음문(痰飮門), 27) 구토문(嘔吐門), 28) 열격문(噎膈門), 29) 비위문(脾胃門), 30) 고독문(蠱毒門), 31) 비뉵문(鼻衄門), 32) 두문(頭門), 33) 안문(眼門), 34) 이문(耳門), 35) 비문(鼻門), 36) 구설문(口舌門), 37) 치아문(齒牙門), 38) 인후문(咽喉門), 39) 제리문(諸痢門), 40) 치루문(痔漏門) … 등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향약제생집성방≫이 ≪향약집성방≫으로 계승되고 있음은 체재 비교에서도 쉽게 확인되는 셈이다. 달리 표현하면 ≪향약제생집성방≫이 ≪향약집성방≫처럼 종합의서로 편찬된 의서라는 뜻이기도 하다. 심지어 ≪향약제생집성방≫ 말미에는 우마의방(牛馬醫方)까지 덧붙여 있었다(≪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주37)
≪태조실록(太祖實錄)≫ 권12 태조 6년 8월 23일(임인). 이 책의 서문은 태조 7년(1398) 6월에, 발문은 정종 원년(1399) 5월에 집필되었다.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주39)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심복통(心腹痛)〉; 권5 〈미목(眯目)〉; 〈이롱(耳聾)〉; 〈설순(舌脣)〉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다른 부분에서는 탕제 치료와 침(鍼)·뜸[灸] 등의 기타 치료가 의서별로 한데 묶여 있기도 하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음산(陰疝)〉; 〈심전(心顚)〉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주41)
흉비(胸痺)를 예로 들자면,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흉비(胸痺)〉에서는 ≪이간방(易簡方)≫ 처방을 세 군데로 나누어 인용한데 반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권23 〈심통문(心痛門) 흉비(胸痺)〉에서는 ≪이간방≫을 하나로 묶어서 인용함으로써 깔끔히 정리하였다.
주42)
이상의 병론은 ≪성제총록(聖濟總錄)≫ 권103 〈안목문(眼目門) 목적종통(目赤腫痛)〉에 나오는 문장이다.
주43)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목적종통(目赤腫痛)〉. “目赤腫痛. 論曰, 目赤腫痛者, 以心肺壅滯, 積熱不散, 風邪毒氣, 干於足厥陰之經, 風熱交作, 上攻於目及兩瞼間, 故其色赤腫痛. 宜祛風邪, 蠲熱氣, 䟽瀹壅滯. 本朝經驗. 治眼赤爛痛. 用蓖麻葉, 足心褁之, 卽差. 差則去葉.”병론(病論)에서는 생리(生理)·병인(病因)을 포함하여 질병의 발현 양상, 진단법 등 질병의 기전과 치료원리를 다룬다. 대부분의 병론은 중국 의서, 특히 ≪성제총록(聖濟總錄)≫을 인용하였다. 병론에서 하나의 의서만을 인용하는 것은 아니다. 감리(疳痢)의 병론에서는 ≪성제총록≫, 장종정(張從正), 왕빙(王氷)을 연달아 인용하기도 한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6 〈감리(疳痢)〉. 여기에 나오는 장 자화(張子和)는 장종정(張從正)이며, 계현자(啓玄子)는 왕빙(王氷)이다.
주45)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주46)
예외적으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심전(心轉)〉; 권5 〈두풍(頭風)〉에서는 ≪성혜방≫을 병론으로 인용한다.
주47)
나는 예전에 ≪향약제생집성방≫의 인용 의서와 약재를 분석하여 본문 〈표 2〉, 〈표 3〉과 동일한 형식의 표를 작성한 적이 있다.(이경록, 〈조선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과 향약의 발전〉, ≪동방학지(東方學志)≫ 149집, 2010, 346~348쪽; 356~359쪽.) 예전의 분석에서는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재인용하는 의서를 별개 인용 의서로 처리하거나, 전거가 표시되지 않은 병론의 출전을 통계에서 누락하는 등의 오류가 있었다. 그리고 ≪향약제생집성방≫ 수록 약재의 정리에서도 일부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따라서 이 국역문의 내용을 토대로 〈표 2〉와 〈표 3〉을 다시 작성한다. 〈표 2〉에서 인용 횟수는 ≪향약제생집성방≫의 병론과 처방을 모두 포함하여 계산하였다. 동일한 의서에서 몇 개의 처방이 ‘우방(又方)’, ‘우치(又治)’라고 하여 잇달아 소개되는 경우에는 별개의 인용으로 처리하였다. 또한 동일한 저서의 약칭이나 이칭은 하나의 의서로 처리하였다. ≪경험(經驗)≫, ≪경험방(經驗方)≫, ≪경험양방(經驗良方)≫, ≪경험비방(經驗秘方)≫처럼 구분이 쉽지 않은 경우도 일부 있으나, 〈표 2〉를 통해 ≪향약제생집성방≫의 주요 전거에 대해서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주48)
≪본조경험방≫은 조선의 의서로 판단된다.(김호(金澔), 〈여말선초 ‘향약론(鄕藥論)’의 형성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진단학보(震檀學報)≫ 87집, 1999 참고.)
주49)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21쪽.
주50)
≪향약집성방≫에 이르러서는 ≪성혜방≫의 영향력이 상당히 커진다.(이경록, 〈≪향약집성방≫의 편찬과 중국 의료의 조선화〉, ≪의사학(醫史學)≫ 20권 2호, 2011, 242~247쪽 참고.) 본문의 흉비 병론을 계속 사례로 들자면,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흉비(胸痺)〉에서는 ≪성제총록≫을 인용하였지만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권23 〈심통문(心痛門) 흉비(胸痺)〉에서는 ≪성혜방≫을 인용하였다.
주51)
고려의 의료제도에 새겨진 원(元) 의학의 흔적은 의학제거사(醫學提擧司)이다. 충렬왕 15년(1289)에 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가 설치되었는데, 의학제거사도 이때 설치는 된 듯하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6 공민왕 5년 10월.) 아마도 고려의 의인(醫人)들을 시험하여 원의 의관(醫官)으로 임용하려는 의도였을 터이나, 실제 기록이 미미한 것으로 보아 그 활동은 미약하였다. 한편 이능화는 대원의료(對元醫療)가 활발하였다고 이해한다.(이능화(李能和), 〈조선의약발달사 3(朝鮮醫藥發達史 三)〉 3장 6절, ≪조선(朝鮮)≫ 1931년 6월호~12월호, 1931 참고.) 고려에서 송 의학 수입에 적극적이었던 점과는 대비되는 특징인데, 고려 말로 가면서 조금씩 늘어나던 원 의학의 유입이 조선 초의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인용 빈도로 현상하고 있다. 특히 유완소(劉完素)·장종정(張從正)·이고(李杲)·주진형(朱震亨)의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와 관련해서는, 유완소의 ≪선명론방(宣明論方)≫이나 장종정의 ≪유문사친(儒門事親)≫ 등이 직접 인용되어 있어서 유완소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6 〈설사리(泄瀉痢)〉에 인용되어 있고, 장종정은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상천중만(上喘中滿)〉; 〈일체연수(一切涎嗽)〉;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등에 인용되어 있다. 조선 초에는 금원사대가의 영향력이 의서에 반영될 정도로 커졌음을 엿볼 수 있다. 이경록, 〈향약(鄕藥)에서 동의(東醫)로 : ≪향약집성방≫의 의학이론과 고유 의술〉, ≪역사학보(歷史學報)≫ 212집, 2011, 252~253쪽; 이경록, 〈조선전기 ≪의방유취≫의 성취와 한계 -‘상한’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34권 3호, 2012, 479~481쪽 참고.
주54)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상천중만(上喘中滿)〉;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권5 〈아치동요(牙齒動搖)〉; 권6 〈설사리(泄瀉痢)〉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4개의 약재를 사용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발견된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목적란(目赤爛)〉; 〈목혼암(目昏暗)〉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주56)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상권(上卷). “食噎方. 喉塞也. 食噎, 使兩人提耳, 吹兩耳, 卽下. 又嚼下榛子[<원주>以榛子開月, 甚驗故也]. 又削大蒜, 內鼻中, 卽下.” 이 처방은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세주까지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번위(翻胃)[<원주>부구토오열오격(附嘔吐五噎五膈)]〉. “鄕藥救急. 治食噎, 嚼下榛子[<원주>以榛子開胃, 甚驗故也]. 又方. 削大蒜, 納鼻中, 卽下.” 하지만 ≪향약제생집성방≫이 ≪향약구급방≫을 완전히 추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향약제생집성방≫은 ≪향약집성방≫과 마찬가지로 종합의서를 지향한 반면 고려의 ≪향약구급방≫은 ‘구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병’만을 다루는 차이가 있었다.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하권(下卷) 〈고전록험방(古傳錄驗方)〉. “右摠五十三部, 皆倉卒易得之藥. 又不更尋表裏冷熱, 其病皆在易曉者錄之. 雖單方效藥, 審其表裏冷熱, 然后用者, 亦不錄焉. 恐其誤用致害也.”
주59)
‘〈표 4〉 ≪향약구급방≫, ≪신집어의촬요방≫,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 약재표’에서 보이듯이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인삼은 처방빈도가 4위에 이를 정도로 널리 사용된다. 고려의 ≪향약구급방≫에서 인삼 사용을 억제하여 한 번도 처방하지 않은 것을 상기하면,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03~304쪽.
주61)
≪의방유취≫ 권66 〈안문(眼門)3 성혜방(聖惠方)2 치안혼암제방(治眼昏暗諸方)〉. 그런데 ≪향약제생집성방≫의 주경환에서는 토사자(兔絲子), 차전자(車前子), 결명자(決明子), 영양각(羚羊角), 방풍(防風)을 졸인 꿀로 반죽하여 환약으로 만들도록 처방하였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목황황(目䀮䀮)〉.
주63)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甞有三和子鄕藥方, 頗爲簡要, 論者猶病其畧. 曩日今判門下權公[<원주>仲和], 命徐贊者尤加蒐輯, 著簡易方, 其書尙未盛行于世.” ≪삼화자향약방≫은 그 효용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향약집성방≫에서는 ≪삼화자향약방≫이 향약 의서들 가운데 인용 빈도가 1위일 정도로 중시되었다. 따라서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삼화자향약방≫이 전혀 인용되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주65)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且五方皆有性, 十里不同風. 平居之時, 食飮嗜慾酸醎寒暖之異宜, 則對病之藥, 亦應異劑, 不必苟同於中國也. 况遠土之物, 求之未得而病已深, 或用價而得之, 陳腐蠧敗, 其氣已泄. 不若土物氣完而可貴也. 故用鄕藥而治病, 必力省而效速矣. 此方之成, 其惠斯民爲如何哉.”조선에는 조선의 질병에 적합한 약재가 산출되고 있으며, 조선의 약재를 통해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토성(宜土性)에 대한 자각은 고려 이래 향약론의 공통된 전제인데 ≪향약제생집성방≫에서도 동일한 인식이 발견되는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 발문에 보이는 “어느 곳이든 약이 있으며 어떤 병이든 치료할 수 있다.[隨處而有藥, 隨病而可醫]”는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주67)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自唐以來其方世增, 方愈多而術益踈. 盖古之上醫, 唯用一物以攻一疾, 後世之醫, 多其物以幸有功. 故唐之名醫許胤宗有獵不知兔, 廣絡原野之譏, 眞善喩也.”
주68)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國俗往往能以一草而療一病, 其效甚驗.”
주69)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皆易得之物, 已驗之術也. 苟精於此, 則可能一病用一物, 何待夫不産而難得者哉.”
주70)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아치동요(牙齒動搖)〉. 드물지만 평두침(平頭鍼, 끝이 뭉툭한 침)을 이용한 외과 처치도 제시된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위락법(熨烙法)〉. 이처럼 여말선초에는 탕제 대신 뜸이나 침도 널리 사용하였다. 원천석(元天錫)은 “눈썹에 뜸을 뜨는 것을 피할 수 없겠구나.”라고 하여 뜸으로 치료하였다. ≪운곡행록(耘谷行錄)≫ 권1 〈목백견화부차운삼수(牧伯見和復次韻三首)〉. “刺舌猶難兔灸眉.”
주73)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67~371쪽.
주74)
≪운곡행록(耘谷行錄)≫ 권5 〈시(詩) 병중음삼수(病中吟三首)〉. “早與錢兄久絶交, 病無良藥守寒巢, 有神妙術從何得, 無效單方可以拋.”
주75)
이 목록에 대해서는 애매하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예컨대 냉수(冷水), 수(水), 신급수(新汲水), 정화수(井花水)가 실제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물[水]을 치료용 약물로 판단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목록은 ≪향약제생집성방≫ 권4~권6에서 처방을 직접 구성하는 약물을 대상으로 삼아 작성되었으므로, 조선초기의 약재 활용 실태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주76)
≪향약구급방≫은 ≪한국의학대계(韓國醫學大系)≫1(김신근(金信根) 주편(主編), 여강출판사(驪江出版社), 1992)을 토대로 작성하였으며, ≪신집어의촬요방≫은 ≪어의촬요연구≫(안상우·최환수, 한국한의학연구원, 2000)에 ≪향약제생집성방≫의 기록을 보완하여 작성하였다.
주77)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향약제생집성방≫ 편찬은 일반 백성들의 치료를 위한 대민 사업의 일환이었다. 실제로도 ≪향약제생집성방≫은 약을 구하기 쉽고 병을 치료하기 쉬우므로,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향약집성방서(鄕藥集成方序)〉. “自是藥易求而病易治, 人皆便之.”
주79)
≪세종실록(世宗實錄)≫ 권47 세종 12년 3월 18일(무오). “詳定所啓諸學取才經書諸藝數目. … 醫學, 直指脉, 纂圖脉, 直指方, 和劑方, 傷寒類書, 和劑指南, 醫方集成, 御藥院方, 濟生方, 濟生拔粹方, 雙鍾處士活人書衍義, 本草, 鄕藥集成方, 針灸經, 補註銅人經, 難經, 素問括, 聖濟摠錄, 危氏得效方, 竇氏全嬰, 婦人大全, 瑞竹堂方, 百一選方, 千金翼方, 牛馬醫方.” ≪향약제생집성방≫을 가리키는 게 확실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향약집성방≫은 1년이 지난 세종 13년(1431) 가을에야 편찬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해동문헌총록≫에서 ≪향약제생집성방≫을 ‘조준이 편찬한 ≪향약집성방≫’이라고 설명한 것도 동일한 이해였다.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의약류(醫藥類) 신증향약집성방(新增鄕藥集成方)〉. “我廟以權仲和所著鄕藥簡易方及趙浚所撰鄕藥集成方, 治法藥名猶有未備者.”
주81)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의약류(醫藥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權採新增集成方序”;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의약류(醫藥類) 신증향약집성방(新增鄕藥集成方)〉. “新增鄕藥集成方[<원주>七十五卷, 補遺十卷].” 이경록, 〈≪향약집성방≫의 편찬과 중국 의료의 조선화〉, ≪의사학(醫史學)≫ 20권 2호, 2011, 239쪽 참고.
주82)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권6 〈냉열리(冷熱痢)〉. 그나마 처방을 보완 설명하거나 중국 의서를 인용하는 정도이며 중요한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감초를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적극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감초가 아직 국내에서 생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초가 조선에서 토착화에 성공한 것은 성종대에 이르러서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 권178 성종 16년 윤4월 29일(기유).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07~312쪽 참고. 또한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곽향(藿香)이나 부자(附子)도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이숭인이나 이색이 곽향과 부자를 구하지 못하여 애를 먹었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심지어 조선에서는 약재가 생산되지 않아서 질병을 얻게 되면 약재를 구하러 이리저리 헤매다가 약은 얻지 못하고 병은 더욱 깊어진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삼봉집(三峰集)≫ 권7 〈조선경국전 상(朝鮮經國典 上) 부전(賦典)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 “國家以爲藥材非本土之所産, 如有疾病, 其孝子慈孫傍求奔走, 藥未之得而病已深, 有不及救治之患.” 따라서 향약 생산은 더욱 확대되고 그 종류도 다양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경록, 〈조선 세종대 향약 개발의 두 방향〉, ≪태동고전연구(泰東古典硏究)≫ 26집, 2010 참고.
주86)
≪고려사(高麗史)≫ 권43 세가(世家)43 공민왕 21년 11월; ≪고려사(高麗史)≫ 권44 세가(世家)44 공민왕 23년 2월. 정총(鄭摠, 1358∼1397)은 〈사약재표(謝藥材表)〉에서 약재를 중국에 요청하였는데, ≪복재선생집(復齋先生集)≫ 하(下) 〈표전(表箋) 사약재표(謝藥材表)〉. “惟良藥不產於小邦, 致陪臣爲求於上國.” 양약(良藥)은 중국에서 산출된다고 인식한 것이었다. 조선에 들어서도 태조의 치료를 위해 태종은 용뇌(龍腦), 침향(沈香), 소합(蘇合), 향유(香油) 등 18종의 약재를 명(明)에서 구하였다. ≪태종실록(太宗實錄)≫ 권5 태종 3년 6월 18일(갑자); ≪명사(明史)≫ 권320 열전(列傳)208 외국(外國)1 조선(朝鮮).
주89)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향약집성방서(鄕藥集成方序)〉. “藥名之異於中國者頗多, 故業其術者, 未免有不備之嘆.”
주90)
여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이경록, 〈≪향약집성방≫의 편찬과 중국 의료의 조선화〉, ≪의사학(醫史學)≫ 20권 2호, 2011; 이경록, 〈향약(鄕藥)에서 동의(東醫)로 : ≪향약집성방≫의 의학이론과 고유 의술〉, ≪역사학보(歷史學報)≫ 212집, 2011; 이경록, 〈조선전기 ≪의방유취≫의 성취와 한계 -‘상한’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34권 3호, 2012 참고.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