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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책정보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서문
東國新續三綱行實圖 序

서1ㄱ

東國新續三綱行實圖 序
降衷秉彛 人所同得 好是懿德 眞心具焉 循是性而制其行 則其極也 至於動天地而感鬼神 古所謂人是小底天者 其不以此乎 然而一時任君師之責者 不能盡其獎勸導率之方 則民雖興起於行而閼而不遂 恒苦鼓之而弗申 得不爲世道計者之太息矣乎 恭惟我莊憲王命副提學偰循 始撰忠孝烈女之行 專責編摩之任 係以圖贊而鋟榟廣布 實創於宣德年間
噫 我海東聖人旣已制禮作樂 則宸念所及 首先玆事 固所宜然 在廷諸臣 奉行不暇 寧有所毫末贊揚而仰裨聖謨者乎 其儼一功令而不言而化 疾若桴鼓 則躬行之成效而振德之明徵也 一書之頒 千里響應者 吁其盛矣
若稽往牒 秦漢以前 五敎三物 左右並建 俱所先務而 交致其振作之道 遂得以炳焉與前代同風 槪諸文獻有徵 則其人以也 後來之咏嘆至治者 咸歸之 降及

서1ㄴ

後世 憑籍視傚 用輓頹俗 樹之風聲而不至墜地 則其所以牖民化俗者 雖有淺深之不同 而猶可得以窺攬而持循 帝王之維持世道 而納民軌物者 端不外乎此矣 莊憲王特更闡而廣之耳 其闤闠下里之觀感而興者 可想已 厥後至康靖王朝 加以諺解以重布 恭僖王朝增續而嗣纂 繼體之所惓惓每在於此 前聖後聖之所作爲 固同一揆而無所間然矣
抑箕子封於東方而夫子欲居之者殆以仁賢之化猶有存者而可進於夏也 然則箕子 乃我東之夫子也 此書自三國至於我國 以彰徹之行 得叅之數 菫堇若此 眞得古人所云嚴而核之意矣 萬曆壬辰兵亂後如干年 至癸丑冬 副提學臣李惺 副應敎臣韓纘男校理臣朴鼎吉修撰臣鄭廣

서2ㄱ

敬等但自弘文館承命裹集而不設局 其所撰定者 就亂後忠孝烈女㫌表人等 作三卷而進 又於甲寅秋 殿下更發德音 仰體列聖之宏撫 特設續編撰集廳 晉原府院君臣柳根以下實承編次之命 總之閱五朔而功訖 忠臣一卷 孝子八卷 烈女八卷 釐爲十七卷而投進 兵塵幾歲 賊鋒不退 匹夫匹婦之橫被所脅而倉卒捐生 自盡其心者 比平時何啻倍蓰 則聞見之詳 自不免於過多 亦其勢然耳 抑古者忠孝各擅其美 而史臣以蘭桂異質而齊芳讚之 莫敢有所軒輕 至於此錄中致死於所天者 蓋亦諒其行之不昧於此心也 其行有合於此 則方可得錄 否則無敢以採焉 念惟前賢重瑕瑜之義 而今此所錄人數雖多 皆据實行之可稽 旣往

서2ㄴ

復勘定 重加叅詳 可免瑕之混瑜也 則更無遺憾 而得以有辭於後世矣
萬曆四十三年 乙卯十二月 二十一日 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忠勤貞亮效節恊策扈聖功臣輔國崇祿大夫海平府院君兼知經筵事 臣 尹根壽 拜手稽首 謹序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서문
하늘이 천부적으로 내린 품성[秉彛]이란 사람들이 누구나 타고난 것인바, 이로써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것은 진심(심성, 곧 참되고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체) 에 갖춰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천성을 따라서 그 행실을 절제함으로써 지극함에 이른다면,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도 감동시킬 수 있으니, 옛말에 이른바, ‘사람은 작으나 그 바탕은 하늘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 시대에 임금으로서 백성의 스승된 사람이 능히 장려하고 이끌어내는 방책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백성이 비록 행실에 옮기려고 하여도 막히고,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됨으로써 항상 고통을 호소하는 북을 울리나 펴지 못하니, 어찌 세도(世道)를 경영하려는 자가 크게 탄식하지 않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우리 장헌대왕(세종)께서 부제학 설순에게 명을 내려 비로소 충신과 효자와 열녀의 행적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 일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아서 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그림과 찬(贊)을 넣어 목판에 새김으로써 널리 반포하였으니 실로 선덕 연간(명나라 선종 때, 1426~1435)에 만들어진 것이다.
주 3)
세종 16년(1434) 11월에 세종의 명으로 한문본 『삼강행실도』가 간행된 사실을 말함.
아, 우리 해동성인(세종)께서 예악(禮樂)을 지으신 뒤, 성상의 마음 속에 가장 먼저 생각하신 것이 이 일이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해야 할 바였다. 조정의 여러 신하들은 받들어 봉행함에 겨를이 없었으니,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찬양하여 성상의 뜻을 우러러 도움을 준 것이 있었겠는가? 엄숙하게 한 가지 업무를 명령하면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교화되어, 그 빠르기가 ‘북채와 북’과 같았으니,
주 4)
『한비자』에 나오는 말로, ‘임금의 걱정은 응하는 자가 없는 데 있으니, 한 손으로 쳐서는 아무리 빨라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신하의 근심은 하나를 얻지 못하는 데 있으니, 오른손으로 원을 그리고 왼손으로는 네모를 그리면 양쪽 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말하면, 군주가 북채와 같다면 신하는 북과 같고, 기예가 수레와 같다면 일함은 말과 같은 것이다.[人主之患在莫之應 故曰 一手獨拍 雖疾無聲 人臣之憂在不得一 故曰 右手畫圓 左手畫方 不能兩成 故曰 至治之國 君若桴 臣 若鼓 技若車 事若馬]’
이는 〈세종께서〉 몸소 실천한 것의 효험이 이루어진 것이며, 성덕을 베푸심이 밝게 드러난 것이다. 이 책 『삼강행실도』 한 권을 반포하니 천리만리까지 메아리쳐 화답함이 아! 그 가득참이여. 지난 옛문헌을 살펴보건대, 진·한(秦漢) 이전엔 오교(五敎), 삼물(三物)을 좌우로 나란히 세워, 먼저 힘써야 할 일을 갖추고, 그것을 진작시키는 도리에 대하여 번갈아 서로 주고받기를 애씀으로써 마침내 찬란한 전대(前代)의 풍속과 같게 되었다. 대개 상고할 문헌이 있으면 바로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따를 수 있으며, 후세 태평성대를 맞이할 때 모두 그것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또한 후세 사람이 이 책을 참고하여 본을 삼아서 퇴락하여 가는 풍속과 성예가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이끌어 간다면, 이 책은 백성을 깨닫게 하여 풍속을 교화함에 비록 어느 정도의 깊고 낮음은 같지 않더라도, 오직 이를 거울삼아서 지키고 따르게 한다면, 제왕(帝王)의 치세로서 백성을 도리의 범주 안에 들어오도록 함은 결코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세종 장헌대왕께서는 단지 다시 밝혀 확충하였을 뿐인데, 그 당시 저잣거리 마을에서 이 책을 보며 감동하여 흥분하던 〈백성들의〉 모습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이후 성종 강정왕조에 이르러 언해를 더하여 다시 널리 반포하였고, 중종 공희왕조에는 증보 속간하여 찬술을 이어갔다. 왕위를 계승하신 임금들이 항상 이 일에 정성을 쏟았으니, 앞선 임금과 뒤를 이은 임금께서 지은 것이 진실로 한결같은 법도요, 간극이 없음이라.
주 5)
성종 21년(1490) 4월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간행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이어서 중종 9년(1514)에는 증보 언해하여 『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한 사실도 말하고 있다. 또한 명종, 선조, 영조 때에 계속해서 『삼강행실도』(언해본)를 복간한 바도 말하고 있다.
그런즉 기자가 조선을 배양하고 공자가 이곳에 살고자 하였던 바는 아마도 어질고 현철한 교화가 여전히 남아있어 중화(中華)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런즉 기자는 곧 우리 나라의 공자라. 이 책은 삼국에서 조선조에 이르도록 드러내 표창할 만한 행적을 가진 사람의 수가 가까스로 이와 같으니, 진실로 옛 어른들이 이른바 ‘엄정하게 가려내다’라는 뜻에 맞는 것이다. 만력 연간의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이 있은 후에 몇 번의 해가 바뀌어 계축년(광해군 5년, 1613) 겨울에 이르러서, 부제학 이성(李惺)과 부응교 한찬남(韓纘男), 교리 박정길(朴鼎吉)과 수찬 정광경(鄭廣敬) 등이 일을 함께 했다. 이는 다만 홍문관으로부터 왕명을 받아 수집하였으니, 별도로 편집국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거기서 찬정한 것은 임진란 이후 충신과 효자와 열녀의 정표를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세 권으로 만들었다. 또 갑인년(광해군 6년, 1614) 가을에 전하께서 다시 윤음을 내려 열성조의 큰 뜻을 본받아 특별하게 속편을 만들기 위한 찬집청을 설치하셨다. 진원부원군 유근(柳根) 이하 제신들이 교열하라는 명을 받들어 총 다섯 달만에 작업이 끝났으니, 충신 1권, 효자 8권, 열녀 8권까지 모두 17권으로 정리하여 올렸다. 왜란은 몇 해가 되도록 이어져 적당들이 물러나지 않았으므로, 보통 사람들이 저들의 협박을 당하여 갑자기 목숨을 버리거나 자진하였으니 그 사람들이 평시에 비해 어찌 갑절뿐이랴. 듣고 본 대로 상세하게 적었기에 저절로 많아진 것이니 사실이 그러한 것뿐이다.
또한 옛날에는 충신과 효자가 각기 그 미덕을 발휘하였고, 역사를 기술하는 사신은 난초와 계수가 성격은 다르지만 나란히 그 꽃다운 이름을 찬양하여 감히 우열을 논하지 않았다. 이 채록 중에 실린 사람이 군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자들은 대개 또한 그 흔들리지 않음을 헤아려 그 행동이 이런 규범에 합당하면 가히 수록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감히 채록됨이 없었다.
전대 성현은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는 뜻을 중시하였으니, 이제 행실도에 오른 사람의 수효가 비록 많다고는 하나, 모두가 다 실제의 행실에 근거한 것이다. 기왕에 다시 살펴보고 거듭 상세하게 살펴서 티가 없도록 한즉, 다시는 유감스런 일이 없게 된다면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이다.
광해군 7년(1615, 만력 43년) 을묘년 12월 21일. 수충 공성 익모 수기 광국 충근 정량 효절 협책 호성 공신 보국숭록대부 해평부원군 겸지경연사 신 윤근수(尹根壽) 두 손 모아 절하고 머리 조아려 삼가 서문을 짓다.
주3)
세종 16년(1434) 11월에 세종의 명으로 한문본 『삼강행실도』가 간행된 사실을 말함.
주4)
『한비자』에 나오는 말로, ‘임금의 걱정은 응하는 자가 없는 데 있으니, 한 손으로 쳐서는 아무리 빨라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신하의 근심은 하나를 얻지 못하는 데 있으니, 오른손으로 원을 그리고 왼손으로는 네모를 그리면 양쪽 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말하면, 군주가 북채와 같다면 신하는 북과 같고, 기예가 수레와 같다면 일함은 말과 같은 것이다.[人主之患在莫之應 故曰 一手獨拍 雖疾無聲 人臣之憂在不得一 故曰 右手畫圓 左手畫方 不能兩成 故曰 至治之國 君若桴 臣 若鼓 技若車 事若馬]’
주5)
성종 21년(1490) 4월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간행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이어서 중종 9년(1514)에는 증보 언해하여 『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한 사실도 말하고 있다. 또한 명종, 선조, 영조 때에 계속해서 『삼강행실도』(언해본)를 복간한 바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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