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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오륜행실도+책정보

3:22ㄴ

王氏感燕【南北朝 宋】

3:23ㄱ

王氏霸城王整之姊嫁爲 衛敬瑜妻 年十六而敬瑜亡 父母舅姑咸欲嫁之 乃截耳置盤中爲誓 乃止遂手爲亡壻種樹數百株 墓前柏樹忽成連理 一年許還復分散女 乃爲詩曰 墓前一株栢根連復並枝妾心能感木頹城何足奇所住戶有鷰巢常雙飛來去後忽孤飛女感其偏棲乃以縷繫脚爲誌後歲此鷰果復更來猶帶前縷女復爲詩曰 昔年無耦去 今春猶獨歸 故人恩旣重 不忍復雙飛 雍州刺史西昌侯 藻嘉其美節乃起樓於門題曰貞義衛婦之閭又表於臺

3:23ㄴ

年少夫亡最可憐 爺孃欲嫁節彌堅 跣行剪髮終無改 凜冽高風罕比肩
雌燕依棲節婦堂 孤飛往復數年强 主人已逝竟誰托 不食哀鳴死冢傍
왕시 송나라 위경유의 쳬니 나히 십뉵셰에 경 죽으니 부모와 싀부뫼 가이려 대 왕시 스로 귀 버히고 셰여 가디 아니고 지아비 무덤 알 손으로 나모 수 쥬 심것더니 그듕 잣남기 홀연히 년리【나모결이  년 거시라】되엿다가 만에 도로 호이니 왕시 글을 지어 오

3:24ㄱ

묘젼에 쥬 남기 불희 년고 가지 아올랏도다 쳡의 이 능히 남글 감동게 니 긔량 쳐의 셩을 문희치미 엇디 죡히 긔특리오 엿더라 잇 우 져비 깃드려 양 이 왕다가 홀연이 암져비 외로이 라니니 왕시 감창여 실로 져비 발에 여 보람엿더니 년에 다시 오히려 실을 엿거 왕시 다시 글을 지어 오 녯에 이 업시 가더니 올봄에 오히려 홀로 도라오도다 고인이 은졍이 듕니 마 다시 으로 디 아니도다 니 

3:24ㄴ

사이 왕시의 졀을 아다이 너겨 문에 누 짓고 오 뎡의 위부지문이라 다
12. 왕씨감연(王氏感燕)【남북조 시대 송(宋)나라】 - 왕씨가 제비를 감동시키다
왕씨는 송나라 위경유(衛敬瑜)의 아내이다. 나이 열여섯에 위경유가 죽으니, 부모와 시부모가 개가 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왕씨 스스로 귀를 자르고(베이고) 맹세하여 개가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지아비 무덤 앞에 손으로 나무 수백 그루를 심었다. 그 가운데 잣나무가 갑자기 ‘연리(連理)’【 두 나무가 한데 잇닿은 것이다.】가 되었다가 한 해만에 다시 나뉘었다. 왕씨가 시(詩)를 지어 말하기를, “무덤 앞의 한 그루 잣나무가 뿌리가 얽히고 또 가지도 어우러져 아내의 마음일랑 나무를 감동케 하잔가 기량 처의 성을 무너뜨림이 무엇이 기이할까.”라고 하였다. 있는 곳 〈살고 있는 집〉 창 위에 제비가 깃들어 매양 쌍쌍이 왕래하다가 홀연히 암제비가 외롭게 날아다녔다. 왕씨는 슬프게 여기어 실을(로) 제비 발에 매어 표시하였다. 〈그 제비는〉 다음 해에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여전히 실을 매고 있었다. 왕씨가 다시 시를 지어 말하기를, “지난해에는 짝이 없이 돌아가더니 올 봄에도 여전히 홀로 돌아 왔는가? 고인(故人, 죽은 제비)의 은정이 중하니 차마 또다시 짝을 지어 날 수가 없었는가?”라고 하였다. 그 때의 사람들이 왕씨의 절개를 아름답게 여기어 그의 집 문에 누(樓)를 짓고(써) 말하기를, ‘정의위부지려(貞義衛婦之閭)’라고 하였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다니 참으로 가련해
부모는 개가시키려 했으나 절개 참으로 굳어.
꺼림 없이 머리털을 잘라내고 끝내 변함없으니
늠름하고 높다란 풍도를 어디 견줄 수가 없어라.
암제비는 정절당(情節堂)의지하여 살아 살며
홀로 날라서 갔다가 돌아오기를 그 몇 해던가.
주인은 이미 죽어 갔다니 그 누구를 의탁하랴
먹지 안하고 슬피 울다가 죽어 그 곁에 묻혀.
<삼강행실언해문>
衛敬瑜의 겨집 李氏 스믈힌 저긔 남진 죽거늘 父母ㅣ 긋 얼유려 커늘 머리 무지고 발 바사 盟誓코 다 남진 아니호리라 더니 지븨 삿기 치 져비  암 오나 李氏 感動야 닐오 날 다 고 바래 실 야 이듬예  오 와 李氏ㅅ 밥 먹더니 잇 樣子로 두서  그리거늘 李氏 그를 지 昔年에 無偶去니【녯 예  업시 가니】今春에 還獨歸로다【옰 보  오 오도다】古人情意 重【녯 사 디 重】不忍更雙飛로다【다 雙 야 로 디 몯도다】 이듬예 오니 李氏 마 죽거늘 져비 그 지븨셔 슬피 울어늘 사미 義 너겨 마 주거 아모  무뎃니라 니대 그 져비 바 그 무더믜 라가아 슬피 울며 밥 아니 머거 죽거늘 사미 그 겨틔 묻고 號 져븨 무더미라 니라
남북조(南北朝) : 남북조(南北朝)
송(宋) : 송(宋)
왕씨(王氏) : 왕씨(王氏)
왕정(王整) : 왕정(王整)
위경유(衛敬瑜) : 위경유(衛敬瑜)
연리(連理) : 연리(連理)
누계(縷繫) : 누계(縷繫)
옹주(雍州) : 옹주(雍州)
자사(刺史) : 자사(刺史)

〈남북조지도〉

왕시 송나라 위경유의 쳬니 나히 십뉵셰에 경 죽으니 : 왕씨(王氏)는 송(宋)나라 위경유(衛敬瑜)의 처(妻)이니 나이 열여섯 살에 위경유가 죽으니. 원문 ‘王氏霸城王整之姊嫁爲 衛敬瑜妻 年十六而敬瑜亡’의 언해인데,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왕씨는 패성왕 왕정(王整)의 누나로서 시집가서 위경유의 처가 되었는데, 나이 열여섯에 남편 위경유가 죽었다.’이니, ‘패성왕 왕정의 누나’라는 귀절을 생략하였다. 즉 왕씨는 패성왕 왕족의 아주 가까운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강행실도』에서는 이씨(李氏)라고 하였고, 그 원문도 ‘衛敬瑜早喪 妻李氏 年二十而寡’라고 하여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이로 보아, 『삼강행실도』의 오류를 『오륜행실도』 편집자가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바로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당나라 이연수(李延壽)의 『남사(南史)』에 나오는 기록이 『오륜행실도』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 보아 올바로 고쳤음을 알 수 있다.
부모와 싀부뫼 가이려 대 : 친정 부모와 시부모가 재혼시키려 하였는데.
호이니 : 나누이니. 나누어지니.
묘젼에 : 묘전(墓前)에. 무덤 앞에.
쥬 남기 불희 년고 : 한 그루 나무가 뿌리 얽히고.
가지 아올랏도다 : 가지가 어우러졌구나. 가지가 아울렀구나. 한데 뭉쳤구나.
남글 : 나무를. ‘[木]’이 모음과 만나면 연음이 되어 ‘ㄱ’이 살아난다. ‘남기, 남글, 남게’.
긔량쳐의 셩을 문희치미 : 기량(杞梁) 처(妻)의 성을 무너뜨림이. 이 말은 원문 ‘퇴성(頹城)’을 언해한 말인데, 성을 무너뜨린 이야기는 『열녀전(列女傳)』 제4권 「정순전(貞順傳)」에 나오는 ‘제기양처(齊杞梁妻)’의 이야기다.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에서는 ‘식처곡부(殖妻哭夫)’라는 제목으로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문희치미’는 ‘무너뜨림이’의 말이다.
져비 깃드려 : 제비 깃들어. 제비가 집을 지어.
양 이 왕다가 : 늘 쌍쌍이 왕래(往來)하다가.
암져비 외로이 라니니 : 암제비가 외롭게 날아다니니.
감창여 : 감창(感愴)하여. 느낌이 가슴에 사무쳐 슬퍼서. 감동하여.
보람엿더니 : 표시하였더니. 표시해 두었더니. ‘보람’은 ‘표시’, ‘보람하다’는 ‘표시하다’의 말이다.
년에 : 내년(來年)에. 이듬해에.
오히려 실을 엿거 : 여전히 실을 띠었거늘(매었거늘). ‘다’는 ‘띠를 띠다’이다. ‘오히려[猶]’는 ‘여전히, 똑같이’의 뜻이었으나 현대말에서는 앞말과 반대 뜻을 가리키는 말로 뜻이 변하였다. 『시경(詩經)』 「대아(大雅)」편 ‘탕(蕩)’이라는 시에서, ‘雖無老成人 尙有典刑’의 해석은 ‘비록 늙고 훌륭한 사람은 없으나 여전히 법도는 있거늘’이라야 하지만, ‘비록 老成엣 人이 업스나 오히려 典刑이 잇거’〈시경언해 18:4〉로서 ‘상(尙)’을 ‘오히려’로만 언해하고 있다.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에서도, ‘又末世衆生이 尙未遇玄化야’를 ‘ 末世 衆生이 오히려 기픈 敎化 맛나디 몯야’〈금강경삼가해 2:9〉로 언해하고 있지만, 여기서도 ‘오히려’는 ‘여전히’의 뜻임을 알 수 있다.
녯에 : 옛 해에. ‘예’는 아주 먼 과거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지난’을 말하고 있다.
뎡의위부지문이라 다 : ‘정절을 지키고 의로웠던 위경유 부인을 정려(旌閭)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원문에는 ‘정의위부지려(貞義衛婦之閭)’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강행실도』에서는 그녀의 무덤을 ‘제비무덤[燕冢]’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 출처를 찾아보니 『남사(南史)』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와 같다. “南北朝時期, 襄陽的衛敬瑜很早就去世了, 他的妻子是灞陵王整的妹妹, 當時才十六歲. 她的父母和公婆, 都勸她改嫁, 她哭著不答應, 並把自己的耳朵割下來放入盤中發誓, 家人才只好作罷. 王氏女居住的房子裡有個燕巢, 一對燕子常飛進飛出, 後來忽然剩下一只孤燕. 她同情它的不幸, 又為自己而感傷, 就對這只燕子說:‘你能懂得我立志守節的心情嗎?’ 並用一縷線系在它的腳上做為記號. 第二年春天, 這只燕子又飛來了, 依然孤飛如故, 腳上還系著那縷線. 她看到後心有感觸, 作了一首詩:‘昔年無偶去, 今春猶獨歸. 故人恩義重, 不忍復雙飛’ 這只燕子春來秋去, 經過了七個寒暑. 來年再飛來的時候, 王氏女卻已經去世了. 燕子繞著房子不停地哀鳴, 家人看到了, 就告訴它埋葬的地方. 燕子飛到墓旁, 哀叫著不食而死. 家人把它葬在王氏女的墓旁, 起名‘燕冢’. 後來唐朝的李公佐, 根據這個故事寫了”『燕女墳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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