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사리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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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9년 7월에 세종의 명으로 궁궐 안에 불당을 짓도록 한 내용부터 낙성식을 거행할 때 부처님의 사리가 나타났던 영험 등을 기록하였다. 세종은 자재암 주지 신미(信眉)와 신미의 아우 김수온에게 명령하여 「삼불예참문(三佛禮懺文)」을 짓게 하였다. 세종이 직접 지은 악곡 7곡과 악장 9편으로 구성된 ‘친제신성(親制新聲)’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국어사적으로는 ‘훈민정음’으로 적힌 7품 이하 관리들의 고유어 이름이 보인다.

이종찬(李鍾燦)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남.
1960.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5.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문학석사
1985. 한양대학교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76~98.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87. 3.~88. 12.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장
1993. 3.~94. 12. 동국대학교 문과대학장
1998. 9.~현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1978. 2. 『조선고승한시선』 동국대학교 역경원
1978. 2. 『한문의 이해』 탐구당
1981. 4. 『한문학개론』 이우출판사
1985. 3. 10. 『한국의 선시』(고려편) 이우출판사
1991. 4. 20. 『한국한문학사』(공저) 반도출판사
1993. 1. 30. 『조선선가의 시문』 동국대학교 역경원
1993. 11. 10. 『한국불가시문학사론』 불광출판사
1997. 12. 30. 『초의집(草衣集)』(역서) 동국대학교 역경원
1998. 11. 25. 『한국한문학의 탐구』 이회문화사
1998. 11. 25. 『한국한시대관』(역주). 이회문화사
1998. 『허공의 딸국질』(선시의 이야기) 도서출판 여시아문
2004. 12. 21. 『허응당집』(역주) 불사리탑
2008. 4. 5. 『명심보감』(하루 한번 마음 다잡기) 역저. 새문사
2010. 3. 22. 『옛 시에 취하다』(수상록) 동국대학교 출판부
2011. 2. 11. 『맹자』(역주) 새문사
2013. 현재. 한국한문학회 고문

역주위원

사리영응기 : 이종찬

교열·윤문·색인위원

  • 사리영응기 : 박종국, 홍현보

편집위원

  • 위원장 : 박종국
  • 위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 김석득 김승곤 김영배
  • 나일성 노원복 리의도
  • 박병천 성낙수 오명준
  • 이창림 이해철 임홍빈
  • 전상운 정태섭 조오현
  • 차재경 최홍식 한무희
  • 홍민표

『역주 사리영응기』를 내면서

우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68년 1월부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을 국역하기 시작하여 447책을 펴내 전체 실록을 완역하였고, 『증보문헌비고』 40책 완간 등 수많은 국학 자료의 번역사업을 벌여 오고 있다. 아울러 1990년 6월부터는 “한글고전 역주 사업”의 첫발을 내디디어, 『석보상절』 권6·9·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그 성과물을 간행하여 왔다. 이제 우리 회는 올해로써 한글고전 역주 사업을 추진한 지 23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를 맞게 되었고, 600책이 넘는 국역, 학술 간행물이 말해 주듯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 국역‧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국역 사업을 벌이는 뜻은 바로 백성과의 소통을 통하여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까지 역주하여 간행한 문헌과 책 수는 『석보상절』 4책, 『월인석보』 17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남명집언해』 2책,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1책, 『구급방언해』 2책, 『금강경삼가해』 5책, 『선종영가집언해』 2책, 『육조법보단경언해』 3책, 『구급간이방언해』 5책, 『진언권공, 삼단시식문언해』 1책, 『불설아미타경언해, 불정심다라니경언해』 1책, 『반야심경언해』 1책, 『목우자수심결·사법어 언해』 1책, 『신선태을자금단·간이벽온방·벽온신방』 1책,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1책, 『언해두창집요』 1책, 『언해태산집요』 1책, 『삼강행실도』 1책, 『이륜행실도』 1책, 『정속언해‧경민편』 1책, 『상원사중창권선문‧영험약초‧오대진언』 1책,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1책, 『두시언해』(권10, 11) 2책, 『여씨향약언해』 1책, 『번역소학』(권6·7·8·9·10) 1책, 『소학언해』 4책, 『논어언해』 2책, 『대학언해』 1책, 『중용언해』 1책, 『맹자언해』(권1·2·3·4·5) 1책, 『연병지남』 1책 등 모두 90책이다.

이제 우리가 추진한 “한글고전 역주 사업”은 15세기 문헌을 대부분 역주하고 16세기 이후 문헌까지 역주하는 데 이르렀다. 올해는 그 가운데 15세기 문헌으로 『사리영응기』와 그밖에 『병학지남』, 『화포식언해』 등 지난해에 이어 16세기와 17세기 문헌을 중점적으로 역주할 예정이다.

그런데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는 세종 때 간행한 문헌임에도 그동안 언해본 위주로 역주사업을 벌여오다 보니 언해본이 아닌 이 책은 예외로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반 백성의 이름을 정음으로 표기한 문헌으로는 최초인 이 문헌은 국어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그 표기를 직접 보고, 또 어떻게 써졌는지를 살피는 일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우리의 말글 역사임에 틀림없다. 특히 이 『사리영응기』는 세종 32년(1450)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문헌으로서 세종이 살아있을 때의 한글 문헌 중 하나라는 점과,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인쇄에 썼던 갑인자를 그대로 사용한 문헌이라는 점, 그리고 세종이 궁중에 불당을 짓고 찬불가를 직접 지었다는 내용 등은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할 만하다.

이번에 우리 회가 펴내는 역주본은,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이고, 이를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이종찬 명예교수께서 번역을 맡아 주셔서 더욱 의의가 크다 하겠다.

조선시대의 초기 한글 문헌은 어느 것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문헌이 없다. 우리 회에서 이 책을 역주 간행함에 있어, 역주해 주신 동국대학교 이종찬 명예교수님과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준 교육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2013년 8월 15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과 한글 관계 문헌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15, 16세기의 우리말을 연구하는 전문학자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이를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며 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의 저본은 동국대학교도서관 소장본(貴21809-김57ㅅ)이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원문 본문·원문 협주문·현대어 풀이·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으며, 원전과 비교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장(張), 앞[ㄱ], 뒤[ㄴ] 쪽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1ㄱ舍利靈應記

1ㄴ臣瑢領之 又命內侍府謁者臣李春

(3) 현대말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다만, 현대말 풀이에서, 옛글의 구문과 다른 곳은 이해를 돕기 위하여 〈 〉 안에 보충하는 말을 넣었다.

(4) 원문의 띄어쓰기는 문장의 단락에 맞게 띄어 썼다.

(5) 한자 원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문 풀이·주석과 구별하였고, 원문의 협주(작은 글씨 2행으로 기록된 것)를 편의상 【 】 표시로 묶어 원문과 같은 크기로 나타내었으며, 이에 대한 현대문 해석도 같게 하였다.

(6) 찾아보기는 주석에서 풀이한 것을 모아 배열하였다. 배열순서는 우리말 큰 사전의 순서를 따랐다.

(7) 『사리영응기』 원문의 내용이 본문 사이사이에 협주 주소(註疏)를 많이 포함하여 본문의 흐름이 끊어지므로,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본문만을 전체 발췌하여 뒤에 다시 보이고 풀이하였다.

『사리영응기』 해제
이종찬(동국대학교 국문학과 명예교수)

1. 배경

조선조는 유교를 국가적 이념으로 삼았기에 지난 왕조의 이념이었던 불교를 배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러했던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국가적 공식 종교로는 인정된 것이 아니로되, 개개인의 신앙적 지표로는 여러 면으로 이어져 왔다. 여기 논의되는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만 하여도 국가적 공식 행사는 아니라 하더라도 궁중에서의 불교적 의식으로 거행되었으니, 이는 역대 군주들의 불교 신봉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이 나오게 되는 배경부터 살피는 것이 순서일 듯하여, 역대 군왕들의 불교 의식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태조는 임신년(壬申年, 1392) 7월에 등극을 하고, 그해 10월 9일에 <인명 realname="自超">자초(自超) 주001)
자초(自超):
1327~1405. 조선 초기의 승려. 호는 무학(無學). 속성은 박씨. 고려말에 중국에 들어가 지공(指空) 화상에게 법을 묻고, 나옹(懶翁) 화상을 오래도록 따라 의발을 이어받았다. 조선 태조가 즉위한 해에 대사를 불러 왕사로 삼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로 봉했다.
왕사로 삼는다.
정총(鄭摠):
1358~1397. 자는 만석(曼碩). 호는 복재(復齋). 본관 청주. 조선의 개국공신1등.『태조실록』, 태조 1년(1392) 10월 9일.
“중 자초를 봉하여 왕사로 삼다.[封僧自超爲王師]”
그해 윤12월에 <인명 realname="鄭摠">정총(鄭摠) 주003)
이색(李穡):
1328~1396.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본관은 한산.
에게 대장경 인출의 발원문을 지어 올리라 하니, 정총이 부정적 발언을 하자, 태조는 <인명 realname="李穡">이색(李穡) 주004)
정명(正名):
명분을 바로 세운다.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 “자로가 여쭙되,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대접하여 정치를 하려 하면 선생님은 무엇을 우선하시겠습니까. 공자 말씀하시되 ‘반드시 명분을 바룰 것이다. ……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리롭지 않고, 말이 순리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지 않고, 예악이 일지 못하면 형벌이 적중되지 않고, 형벌이 적중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수족을 둘 데가 없다.’ 하시다.” 하였다.(子路曰 衛君待子爲政 子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 名不正則 言不順 言不順則 事不成 事不成則 禮樂不興 禮樂不興則 刑罰不中 刑罰不中則 民無所措手足)
도 불교를 믿지 않았느냐 하며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태조실록』, 태조 1년(1392) 윤12월 4일.
첨서중추원사 정총에게 명하여 『대장경』을 인출할 원문을 지어 올리게 하니, 정총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어찌 불사(佛事)에 정성껏 하십니까? 청하옵건대, 믿지 마옵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색은 유학의 종사(宗師)가 되었는데도 불교를 믿었으니, 만약 믿을 것이 못된다면 이색이 어찌 이를 믿었겠는가?”라고 하였다.(命僉書中樞院事鄭摠 製印出大藏經願文以進 摠曰 殿下何拳拳於佛事 請勿信 上曰 李穡爲儒宗信佛 若不足信 穡豈信哉 摠對曰 穡爲世大儒 而取譏於人者 良以此也 上曰 然則穡反不及於汝乎 其勿復言)
이에 정총이 대답하기를, “이색은 세상에서 학식이 높은 선비가 되었는데도 남에게 비난을 받는 것은 진실로 이것 때문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색이 도리어 그대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지천사(支天寺)로 경판을 수송하는 일이나, 대장경의 운반에 호송의 행렬을 명하는 등
『태조실록』, 태조 7년(1398) 5월 12일.
대장(隊長)과 대부(隊副) 2천 명으로 하여금 『대장경』의 목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운반하게 하였다.(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寺)
검교 참찬문하부사 유광우에게 명하여 향로를 잡고 따라오게 하고, 오교(五敎)·양종(兩宗)의 중들에게 불경을 외우게 하며, 의장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命檢校參贊門下府事兪光祐行香 五敎兩宗僧徒誦經 儀仗鼓吹前導)
이 있다. 문소전(文昭殿) 옆의 불당 건설의 직접적 계기도 태조가 삼신여래의 불상을 주조하다 마치지 못하고 승하한 뒷일의 계승이라는 것이니, 조선 초기 임금들의 신불적 자세를 십분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그 후 태종은 척불(斥佛)의 의지가 강했지만, 태조의 호불(好佛)로 인하여 차마 크게 개혁하지는 못하고,
『태종실록』, 태종 1년(1401) 윤3월 23일.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헌부에서도 또한 오교·양종의 명리의 중[僧]을 파하고, 절과 토지 노비는 모조리 공가(公家)에 붙이고, 오직 산문의 도승에게 맡겨두기를 청하였는데, 나도 역시 그 불가함을 알고 꼭 파하려고 하나, 태상왕(태조)께서 바야흐로 불사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차마 갑자기 혁파하지를 못한다.”라고 하였다.(上笑曰 憲府亦請罷五敎兩宗名利之僧 其寺社土田臧獲 盡屬于公 唯任置山門道僧 予亦知其不可欲罷之 以太上方好佛事 故不忍遽革)
무해무덕하게 보게 되었다.
『태종실록』, 태종 14년(1414) 6월 20일.
임금이 편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불씨의 도는 그 내력이 오래 되니, 나는 헐뜯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으려 하나, 그 도를 다하는 사람이면 나는 마땅히 존경하여 섬기겠다. 지난날에 승려 자초(自超)는 사람들이 모두 숭앙하였으나, 끝내 그는 득도한 경험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나는 노상의 행인과 같이 본다. 만약 지공(指空)과 같은 승려라면 어찌 존경하여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군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옳습니다.”라고 하였다.(視事于便殿 上曰 佛氏之道 其來尙矣 予欲無毁無譽 然有盡其道者 則吾當尊事之 往者有僧自超 人皆仰之 卒無得道之驗 如此輩 吾視之如路人 若指空則其可不尊事耶 群臣皆曰 然)
세종은 신불(信佛)을 넘어 호불에 가깝다 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조에는 불교에 관한 기사가 208건이나 되는 것도 하나의 예라 할 것이나, 이 중에는 유생이나 관료들의 불교 비판적 기사도 많으니 단순한 세종의 호불로 보기에는 무리이기는 하지만, 유생들의 불교 비난이나 철폐의 기사에는 허락하지 않는 “불윤(不允)”으로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뒷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은 대군일 때도 신불을 넘어서 광신(狂信)과 같은 면모를 보이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유<세주>(瑈, 수양대군의 이름)가 승려의 무리에 뒤섞여 뛰고 돌아 땀이 등을 적시되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이 불교를 혹하게 믿어 일찍이 이르기를, ‘불교가 공자(孔子)의 도보다도 나은데 정자(程子)나 주자(朱子)가 비방한 것은 불씨(佛氏)의 도를 깊이 몰랐기 때문이다. 천당과 지옥과 죽고 삶의 인과는 실로 있는 이치이지 결코 허탄함이 아니다. 불교를 모르고 배척하는 자는 모두가 망녕된 이이니 나는 취하지 않는다.’ 하였다. 종실 중에서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용(瑢)이 깊이 공경으로 믿는다.
『세종실록』, 세종 31년(1449) 7월 1일.
수양 대군 이유(李瑈)와 도승지 이사철에게 명하여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유가 승도(僧徒) 속에 섞여서 뛰어 돌아다녀 땀이 흘러 등이 젖었어도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이 불도의 가르침에 혹신(惑信)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공자의 도보다 나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그르다고 한 것은 불씨(佛氏)를 깊이 알지 못한 것이었다. 천당·지옥과 사생·인과가 실로 이치가 있는 것이요, 결코 허탄한 것이 아닌데, 불씨의 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자는 모두 망령된 사람들이라, 내 취하지 않겠다.” 하였다. 종실 중에 이유와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깊이 존경하여 신봉하였다.(命首陽大君瑈都承旨李思哲 祈雨于興天寺 瑈雜於僧徒中 踴躍周匝 汗流沾背 略無倦色 惑信釋敎 嘗謂 勝於孔子之道 程朱非之 不深知佛氏者也 天堂地獄 死生因果 實有是理 決非虛誕 不知佛氏之道而斥之者 皆妄人 吾不取也 於宗室中 瑈及安平大君瑢深敬信之)
하였다. 이 『사리영응기』를 쓰게 되는 불당 건설에도 이 두 대군에게 감독하도록 한 것이 세종의 뜻이었다.
이 『사리영응기』가 탄생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조선조의 깊은 불교적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2. 작자

김수온(金守溫, 1409~1481)의 자는 문량(文量)이고, 호는 괴애(乖崖), 식우(拭疣)이다. 본관은 영동(永同)이요, 김훈(金訓)의 아들이고, 승려인 신미(信眉)의 아우이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가 되고, 23년(1441)에 식년문과에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있을 때 세종의 특명으로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였다. 세종 27년(1445)에 승문원교리로 『의방유취(醫方類聚)』 365권을 3년에 걸쳐 편찬하였고,
『세종실록』, 세종 27년(1445) 10월 27일.
집현전 부교리 김예몽·저작랑 유성원·사직 민보화 등에게 명하여 여러 방서(方書)를 수집해서 분문류취(分門類聚)하여 합해 한 책을 만들게 하고, 뒤에 또 집현전 직제학 김문·신석조, 부교리 이예, 승문원 교리 김수온에게 명하여 의관(醫官) 전순의·최윤·김유지 등을 모아서 편집하게 하고, 안평 대군 이용(李瑢)과 도승지 이사철·우부승지 이사순·첨지중추원사 노중례로 하여금 감수하게 하여 3년을 거쳐 완성하였으니, 무릇 3백 65권이었다. 이름을 『의방유취(醫方類聚)』라고 하사하였다.(命集賢殿副校理金禮蒙著作郞柳誠源司直閔普和等 裒集諸方 分門類聚 合爲一書 後又命集賢殿直提學金汶辛碩祖副校理李芮承文院校理金守溫 聚醫官全循義崔閏金有智等編集之 令安平大君瑢都承旨李思哲右副承旨李師純僉知中樞院事盧仲禮監之 歷三歲而成 凡三百六十五卷 賜名曰醫方類聚)
다음 해에는 『석가보(釋迦譜)』를 증수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28년(1446) 12월 2일.
사직 김수온에게 명하여 석가보를 증수하게 하다.(命副司直金守溫 增修釋迦譜)
세조 3년(1457)에 문과 중시에 합격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정조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한성부윤, 공조판서를 거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 2년(1471)에 좌리공신 4등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서거정(徐居正), 강희맹(姜希孟) 등과 문명을 나란히 하면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도왔다. 고승 신미의 동생으로 불교에 조예가 깊어 세종과 세조의 불교 신봉에 일조하여 불경의 국역에도 공이 컸다. 유저로 『식우집(拭疣集)』이 있다.
아버지의 불충스러웠던 일로 물의가 되기도 하였고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1월 30일.
김훈에게 장 1백 때려 전라도 내상으로 귀양보냈다. 처음에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아뢰기를, “옥구진 병마사 김훈이 조모의 복을 당해서 빈소에 가지 않고 마음대로 상경하여 여러 달을 머물고 있으면서 몰래 인덕궁에 출입하고, 첩기(妾妓) 벽단단을 인연하여 잔치를 베풀고 의복을 하사(받았습니다. 그를 핵문(劾問)하기에 이르자 사실대로 대답하지 아니하니, 매우 간휼(奸譎)합니다. 빌건대, 직첩을 거두고 그 사유를 국문하여 율문에 의하여 죄를 논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기시다.(杖金訓一百 流全羅道內廂 初 司憲府劾啓 沃溝鎭兵馬使金訓持祖母之服 不奔殯所 擅自上京 累月淹留 隱密出入于仁德宮 因妾妓碧團團設享 受賜衣服 迨其劾問 不以實答 甚爲奸譎 乞收職牒 鞫問其由 依律論罪 上可之)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 6월 5일.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훈련 주부 김수온이 이제 서반에서 동반으로 옮겨 임명되었사온데, 그 아비 김훈이 기왕에 불충을 범하였으므로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할 수 없나이다.”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온이 문과 출신으로 이미 동반을 지냈는데, 너희의 말이 늦지 아니하냐. 또 조정의 신하로서 이 같은 흠절이 있는 자가 자못 많은데, 너희들이 그것을 다 쫓아낼 것이냐. 속히 서경함이 마땅하니라.” 하였다. 수온의 형이 출가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신미라고 하였는데, 수양대군 이유(李瑈)와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심히 믿고 좋아하여, 신미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무릎 꿇어 앞에서 절하여 예절을 다하여 공양하고 수온도 또한 부처에게 아첨하여 매양 대군들을 따라 절에 가서 불경을 열람하며 합장하고 공경하여 읽으니, 사림에서 모두 웃었다.(司諫院啓 訓鍊注簿金守溫 今以西班 移敍東班 其父訓曾犯不忠 告身未可署經 上曰 守溫出身文科 已經東班 乃言不亦晩乎 且庭臣有如此瑕類者頗多 若等其悉去之乎 宜速署經 守溫之兄 出家爲僧 名曰信眉 首陽大君瑈安平大君瑢酷信好之 坐信眉於高座 跪拜於前 盡禮供養 守溫亦侫佛 每從大君往寺 披閱佛經 合掌敬讀 士林笑之)
형이 이름난 승려로 왕족과 가깝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위 주 참조.
『세종실록』, 세종 30년(1448) 7월 26일.
생원 유상해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듣건대, 요망한 중 신미가 꾸미고 속이기를 백 가지로 하여 스스로 생불이라 하며, 겉으로 선을 닦는 방법을 하는 체하고 속으로 붙여 사는 꾀를 품어서 인심을 현혹시키고 성학(聖學)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 신미의 아우인 교리 수온이 유술로 이름이 났는데, 이단의 교(敎)를 도와서 설명하고 귀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붙어서 아첨하여 진취(進取)의 자료로 삼으니, 비옵건대, 수온을 잡아다가 그 죄의 이름을 바루고, 특히 요망한 중을 베어 간사하고 요망한 것을 끊으면, 신하와 백성이 모두 대성인의 하는 일이 보통에서 뛰어남이 만만(萬萬)인 것을 알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生員兪尙諧等上疏曰 臣等聞妖僧信眉矯詐百端 自謂生佛 陽爲修善之方 陰懷寄生之謀 其眩惑人心 蓁蕪聖學 莫之勝說 且信眉之弟校理守溫以儒術著名 而助說異端之敎 依阿貴近 以資進取 乞將守溫 正名其罪 特斬妖僧 以絶邪妄 則臣民咸知大聖人之所爲 出於尋常萬萬也不報)
본 『사리영응기』를 쓰게 되는 것도 이러한 불교적 조예를 가질 수 있었던 가계와 주변의 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 서지

3.1. 책의 체제

이 책의 체제는 다음과 같다.
표지 : 당초문양(唐草紋樣)의 바탕에 황갈색 표지.
외제 : 사리영응기 단(舍利靈應記 單).
책의 제원 : 세로 30.4cm×가로 19.8cm.
내제 :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
판식(板式) :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세로 22.1cm×가로 15.8cm.
자행수 : 매면 9행, 15자. 쌍행주(雙行註).
판심제(版心題) : 영응기(靈應記).
판심 : 상하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
활자 :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
갑인자(甲寅字):1434년(세종 16)에 만든 동활자. 일명 위부인자(衛夫人字). 왕명에 의하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천(李蕆), 직제학 김돈(金墩), 직전(直殿) 김호(金鎬), 호군 장영실(蔣英實), 첨지사역원사(僉知司譯院事) 이세형(李世衡), 사인(舍人) 정척(鄭陟), 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이 명나라 후기의 판본으로 글자 본을 삼아 만들었다. 경자자보다 모양이 좀 크고 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것이 20여만 자가 되었다.
이 갑인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개주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에 개주된 활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주조했다는 의미의 초주(初鑄)를 붙여 구별한다. 또 하나 특기할 일은 정음 활자도 주조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석보상절』이나 『월인천강지곡』을 인쇄하기 위해 주조 된 것이다. 그래서 ‘초주갑인자 병용 한글자’ 또는 ‘월인석보 한글자’라 일컫는다. 본 『사리영응기』의 정음표기 활자도 이 활자인 셈이다.
지질(紙質) : 저지(楮紙).
위 체제의 책은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귀중본(貴21809-김57ㅅ)으로 분류 보존되어 있는 것이고, 원문은 『식우집(拭疣集)』 권2에 실려 있다. 이 원문은 본문만 있지, 주로 달린 쌍행의 글은 없다. 그렇다면 이 단행본으로 간행된 『사리영응기』도 김수온의 편집인지, 아니면 어느 제3자가 편집하면서 주석을 첨가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작자의 신변적 정황이나 주석문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이 『사리영응기』를 써 올리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는 방편으로 주석을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식우집』 권2에는 석가여래의 사리 출현의 글 2편이 더 있다. 그 영이(靈異)한 형상은 이 『사리영응기』와 유사하다. 하나는 「여래현상기(如來現相記)」이고, 또 하나는 「견성암영응기(見性庵靈應記)」이다. 「여래현상기」의 앞 부분만 보이면 다음과 같다.
임금님이 즉위하신 지 10년(1464) 4월 어느날, 효령대군 신 이보(李𥙷)가 와서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소원을 같이하는 승속들과 화암사에서 부처님께 공양하여 분신사리 약간 잎을 애걸하여 서로 봉안할 곳을 상의하니 모두가 ‘회암사는 우리나라의 큰 절로서 3 화상의 부도가 있는 곳이니 어찌 여기에 봉안하지 않겠는가.’ 하여, 이에 여러 선행을 모아 서남쪽에 석종을 세워서 사리가 평안하게 하였습니다. 이 달 28일 경술에 승속인 수만 인들이 모여 원각도량을 개설하고 낙성을 하였습니다. 이때 향 폐백을 내리시어 신으로 하여금 부처님께 바치어 이 회합을 성대하게 하셨습니다. 이날 밤 2경에 새로 조성한 석종 위에 홀연 광채가 천전당(天殿堂) 위로 비치어 나무들이 다 밝히 구별되더니 4경에 이르러 그 광채가 더욱 빛나고 또한 기이한 향기 퍼지고 가벼운 번갯불도 빛나더니 감로의 이슬이 뜰에 내렸습니다. 또 석종 위의 공중에는 신승(神僧) 대여섯 행렬이 있는 듯 없는 듯하더니 탁자 위에 분신사리 850잎이 보였습니다. 다음날 신해에 석종에다 공양을 하니 또 서기(瑞氣)가 공중에 알연히 떠 있었고, 저녁이 되자 서기가 석종으로부터 일어나 빙빙 돌다가 서남방을 향하여 사라지더니 그 위에 석가여래의 황금빛 장육(丈六) 진신이 나타나 원만한 모습에 위엄스런 용모 빛나시니 사부대중이 놀라고 기뻐 파도처럼 달려 예배하였습니다.”라고 하고, 삼가 분신사리 약간 잎을 가져다 바치니, 임금과 중궁이 강녕전에 있다가 봉함을 열고 보시니, 광명이 투철하여 이리저리 비치니 마치 여래의 온몸이 지척 사이를 떨어지지 않은 듯하였다. 두 전하께서 더욱 공경을 더하여 매수를 세어보니 또 나뉘어진 분신이 3백 70잎이었다. 함원전에 공양하게 되매 또 나뉘어진 분신 46잎을 얻었다.
이에 임금이 손수 특사(特赦)의 글을 지어 중외(中外)에 선포하였다. 도성 안에 옛날에 흥복사가 있었는데 허물어진 지가 이미 오랜지라, 곧 중창하라 명령하시고 원각사라는 현액을 내리시니 문무백관들이 하례의 글을 올리었다. 그 후 5월 9일 신유에 특별히 신 <인명 realname="">이보와 <인명 realname="洪允成">인산군 홍윤성을 보내어 향의 폐백을 올리고 석종에 공양을 하니, 또 상서로운 빛이 사방으로 넘쳐나 산천과 공중이 대낮처럼 밝았다. 사리가 또 나뉘어 3백 잎이 되어 <인명 realname="">보와 <인명 realname="洪允成">윤성이 복명을 하고 분신사리를 올리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셨다. 대신에게 명하여 일을 독려하게 하여 원각사를 시작하고 또 불상을 조성하였다. 이에 <시간 realname="0000-06-13L0">6월 13일 을미에 바로 불상을 조성하던 곳에 누런 구름이 드리우고 하늘에서 꽃비가 사방으로 내리고 때로는 서기가 석종에서 나와 세 갈래 길에 빗겨 있다가 위로 솟으니 도성 안 남녀들이 우러러 보고 기뻐하며 일찍이 없던 일에 감탄하였다. 임금은 또 글을 지어 중외에 선포하셨다.(上卽位之十年夏四月有日 孝寧大君臣𥙷來啓曰 臣嘗與同願緇素供佛于檜菴寺 乞舍利 卽分身若干粒 相興謀所以安之 咸曰 檜菴 我國之大刹 而三和尙浮圖之所在 盍安於是 乃募諸善 樹石鍾于西南隅 以妥舍利 用是月二十八日庚戌 會緇素數萬餘指 設圓覺道場以落之 時降香弊 令臣獻佛 以賁其會 是夜二鼓 新厝石鍾上 忽放光屬天殿堂 山木皆可瞭辨 至四更 其光尤煜煜 且有異香芬馥 輕電閃㸌 甘露降庭 又於石鍾上空中 神僧五六行道 若有若亡 見卓子上舍利分身八百五十枚 翼日辛亥 供養石鍾 又有瑞氣空濛掩靄 及夕 瑞氣從石鍾而起 盤旋繚結 向西南而去 其上現釋迦金色丈六眞身 相好圓滿 威光煜赫 四衆驚喜 奔波膜拜 謹將分身舍利若干粒以進 上與中宮 御康寧殿 開封視之 光明瑩徹 輝映交射 如來全身 不違咫尺 兩殿尤加敬重 數其枚 則又已分身三百七十粒 及供養于含元殿 又得分身四十六枚 於是 上手製赦文 宥中外 都城中 舊有寺曰興福 廢毀巳久 卽令重創 賜額圓覺 百官具箋陳賀 越五月初九日辛酉 特遣臣補及仁山君臣洪允成 齎香弊 供養石鍾 又有祥光四溢 山川大虛 煜煜如晝 舍利又分身三百粒 補及允成復命 以分身舍利進 上益大喜 命大臣董役 經始圓覺寺 且造佛像 乃於六月十三日乙未 直造佛之處 黃雲靉靆 天雨四花 時有瑞氣 出自石鍾 三道橫亘 屬于其上 都人士女 瞻仰歡喜 歎未曾有 上又製文 赦中外)
그런데 『사리영응기』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에 아무 기사가 없으나, 「여래현상기」는 세조실록에 기사가 실려 있다.
『세조실록』, 세조 10년(1464) 5월 2일.
영순군 이부에게 명하여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근일에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원각 법회를 베푸니, 여래가 현상하고 감로가 내렸다. 누런 가사의 중 3인이 탑을 둘러싸고 정근하는데 그 빛이 번개와 같고, 또 빚이 대낮과 같이 환하였고 채색 안개가 공중에 가득 찼다. 사리 분신(舍利分身)이 수백 개였는데, 곧 그 사리를 함원전에 공양하였고, 또 분신이 수십 매였다. 이와 같이 기이한 상서는 실로 만나기가 어려운 일이므로, 다시 흥복사를 세워서 원각사로 삼고자 한다.”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고, 이어서 하례를 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효령대군 이보(李補)가 부처를 만드는 데 매우 독실하여 어릴 때부터 늙기에 이르도록 더욱 열심인데, 회암사를 원찰로 삼고 항상 왕래하면서 재를 베풀더니, 이 때에 이르러 여래가 현상하였고, 신승(神僧)이 탑을 둘러쌌었다. 다른 사람은 모두 보지 못하였으나, 오로지 이보(李補)만이 이를 보았다고 스스로 말하였다.(命永順君 溥傳于承政院曰 近日孝寧大君於檜巖寺設圓覺法會 如來現相 甘露降 黃袈裟僧三 繞塔精勤 其光如電 又有放光如晝 彩霧滿空 舍利分身數百 卽以舍利供養於含元殿 又分身數十枚 如此奇祥 實爲難遇 予欲復立興福寺爲圓覺寺 承政院啓曰 允當 仍請行賀禮 從之 …… 孝寧大君 補奉佛甚篤 自少至老尤甚 以檜巖寺爲願刹 常往來齋施 至是 如來現相 神僧繞塔 他人皆不得見 而唯補自言見之)
그렇다면 김수온의 「여래현상기」도 단행본으로 편집되었을 가능성도 연상이 된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는 또 다른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원본인 갑인자본을 그대로 복사하듯이 필사한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초판본 외에도 많은 필사본이 유통되지 않았나 짐작이 간다.

3.2. 내용

세종 31년(1449) 7월에 문소전(文昭殿) 옆에 불당을 건설하라고 명령하여 그달 28일에 시작하여 그해 11월 20일에 마치고, 자재암 주지 신미(信眉)와 김수온에게 명령하여 「삼불예참문(三佛禮懺文)」을 짓게 한 것이다.
내용별로 나누어 보면,
1. 본문(1) : 세종 31년(1449) 7월 왕명에 의하여 예불참문을 짓게 됨.
2. 주소(註疏):
2.1. 초입도량정념작관(初入道場正念作觀, 처음 도량에 들어 바른 생각으로 관을 세움)
2.2. 여시작관이 거불(如是作觀已擧佛, 이렇게 관을 세우고나서 부처를 들다)
2.3. 작불요묘(作佛要妙, 부처께 예배하는 요령과 묘법)
2.4. 일체공경(一切恭敬, 일체의 공경)
2.5. 작관이 동발시언(作觀已同發是言, 관을 하고나면 함께 이런 말을 함)
2.6. 공양이 귀명례삼보(供養已歸命禮三寶, 공양이 끝나고 삼보에게 지성 공경으로 예배함)
2.7. 제불찬(諸佛讚, 모든 부처님께 찬양)
2.8. 삼보찬(三寶讚, 삼보의 찬양)
2.9. 참회(懺悔, 참회함)
2.10. 오참(五懺, 5가지 참회)
2.10.ㄱ. 아제자등지심참회(我弟子等至心懺悔, 우리 제자들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
2.10.ㄴ. 아제자등지심권청(我弟子等至心勸請, 우리제자들 지극한 마음으로 권청함)
2.10.ㄷ. 아제자등지심수희(我弟子等至心隨喜, 우리 제자들 지극한 마음으로 따라 기뻐함)
2.10.ㄹ. 아제자등지심회향(我弟子等至心廻向, 우리 제자들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함)
2.10.ㅁ. 아제자등지심발원(我弟子等至心發願, 우리 제자들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함)
2.11. 삼자귀의(三自歸依, 3번 자신에 귀의)
3. 본문(2) : 신성악곡(新聲樂曲)과 악장(樂章)을 짓다.
4. 본문(3) : 수양대군에게 악인을 영솔하고 음악을 알리게 하다.
5. 본문(4) : 11월 28일 재계 시작, 12월 2일, 살육을 금하고, 51명의 비구스님과 대군을 비롯한 관원에게 임무를 맡기다.
6. 본문(5) : 3일에, 부처님을 대궐에 모셨다가, 다시 새 불전에 모시게 함.
7. 본문(6) : 4일, 향을 받들음.
8. 본문(7) : 5일 점안을 함.
9. 소(疏)
10 본문(8) : 6일, 낙성연.
11. 소(疏)
12. 본문(9) : 낙성연의 저녁, 안평대군과 영응대군과 대회 참여자에게 명하여 지성으로 사리를 구하라 함. 불전 앞에 참여한 이가 261인이다. 그날 저녁 2 잎의 사리와 다음날 아침 4 잎의 사리를 얻었다.
13. 본문(10) : 시, 4언 46구 184자의 장편.
14. 소(疏)
14.1. 정근입장인명(精勤入場人名, 정성 근면으로 도량에 든 인명) 261명의 명단.

4. 의의

이 『사리영응기』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논의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조선 초기 군왕이나 왕족들의 불교 신봉이 돈독하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3년 후의 기록으로서, 불사에 참여하였던 사람의 이름을 정음으로 기록함으로서, 정음의 실제적 활용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것이다.

4.1. 조선초의 불교 애호

위에서도 보았듯이 조선왕조가 유교적 이념으로 건국을 하나, 전 왕조의 이념이었던 불교적 사유를 쉽사리 떨쳐내지는 못한다. 태조가 임신년(壬申年, 1392) 7월 17일에 수창궁(壽昌宮)에서 등극을 하고, 9월 21일, 대사헌 남재(南在, 1351~1419)가 시무(時務) 11조를 상소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불교에 대한 경계를 알리는 글이었으니,
삼대(三代) 이래로 유학의 도(道)가 밝지 못하온데, 진(秦)나라의 분서(焚書)를 겪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에 이르러 불교(佛敎)가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왔는데, 초왕(楚王) 영(英)이 가장 먼저 이를 좋아했으나 마침내 단양(丹陽)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양(梁)나라 무제(武帝)는 이를 가장 독실히 믿었으나 대성(臺城)에서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불도징(佛圖澄)은 조(趙)나라를 능히 보존하지 못하였고, 구마라즙(鳩摩羅什)은 진(秦)나라를 능히 보존하지 못하였고, 지공(指空)은 원(元)나라를 능히 보존하지 못했으니, 역대(歷代)의 군주가 그 교(敎)를 공경하여 능히 그 복을 누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 동방으로 말한다면, 신라가 불교에 미혹하여 그 재력(財力)을 다 없애서 탑묘(塔廟)가 민가(民家)에 절반이나 되더니, 마침내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되었고, 고려의 의종(毅宗)은 3만 명의 중들을 공양(供養)한 것이 한 달에 십여 곳의 절에까지 이르렀으나, 마침내 임천(臨川)에서 탄식함이 있었으며, 공민왕은 해마다 문수 법회(文殊法會)를 개최하고 보허(普虛)와 나옹(懶翁)을 국사로 삼았는데, 보허와 나옹이 모두 사리(舍利)가 있었지마는, 나라의 멸명을 구원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일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설(說)은 믿을 것이 못됨이 명백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불교의 청정 과욕(淸淨寡欲)을 흠모하려 한다면, 선왕(先王)의 공묵무위(恭默無爲) 사상을 본받을 것이고, 불교의 자비 불살(慈悲不殺)을 본받으려 한다면 선왕의 능히 관인(寬仁)하고 능히 호생(好生)하는 덕을 생각할 것이고, 불교의 인과응보의 설(說)을 두려워한다면 선한 자를 상주고 악한 자를 처벌하고, 죄 가운데 의심나는 것은 경하게 처벌하고, 공 가운데 의심나더라도 중하게 상주는 것으로 규범을 삼을 것입니다. 이같이 한다면 다만 백성들만 그 은택을 입을 뿐만 아니라 천지 귀신도 또한 몰래 돕게 될 것입니다.(大司憲南在等上言 一 三代以降 斯道不明 及經秦火 人心益晦 至漢 明帝時 佛氏之敎 始入中國 楚王 英最先好之 卒被丹陽之死 梁 武帝最篤信之 未免臺城之餓 佛圖澄不能存趙 鳩摩羅什不能存秦 指空不能存元 未聞歷代人君敬其敎而能享其福者也 以我東方言之 新羅惑於浮屠 竭其財力 塔廟半於閭閻 遂至於亡 高麗 毅王歲飯僧三萬 月至佛寺十餘所 卒有臨川之嘆 恭愍王歲開文殊會 以普虛懶翁爲師 普虛懶翁俱有捨利 無救於亡 由是觀之 佛氏報應之說 不足信明矣 伏惟殿下慕佛氏淸淨寡欲 則以先王恭默無爲爲法 效佛氏慈悲不殺 則以先王克寬克仁好生之德爲念 畏佛氏報應之說 則以賞善罰惡 罪疑惟輕 功疑惟重爲範 如是則非獨生民蒙其澤 天地鬼神亦且陰佑之矣)
『태조실록』, 태조 2년 1월 16일에는, 대사헌 남재가 다시 불교의 폐해를 진술한다.(上坐殿 大司憲南在 極陳佛氏之弊)
조선조의 불교의 경계에 대한 글로는 처음 보여지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남재는 태조를 도와 조선을 세운 1등의 개국공신으로 태조가 등극한 후 은거하다가 태조가 직접 찾아 1등공신으로 책봉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해 10월 9일에 자초(自超, 無學)를 왕사로 책봉하고, 주017)
위 주2 참조.
12월에는 정총(鄭摠, 1358~1397)이 대장경을 인출(印出)하라는 명을 받고 불교를 믿지 말 것을 건의하다 거절되는 일이 있었다. 주018)
『태조실록』, 태조 11년(1392) 윤12월 4일.
정총도 개국 1등공신이다.
태종은 즉위하는 해에, 사헌부에서 바로 오교 양종(五敎兩宗)의 혁파의 상소를 받지만, 경연에서 강의하면서 “태상왕이 불사를 좋아하셔서 차마 급히 개혁할 수가 없다.” 한다.
『태종실록』, 태종 1년(1401) 3년 윤3월 23일.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헌부(憲府)에서도 또한 오교·양종의 명리(名利)의 중[僧]을 파하고, 사사(寺社)·토전(土田)·장획(臧獲)은 모조리 공가(公家)에 붙이고, 오직 산문의 도승(道僧)에게 맡겨두기를 청하였는데, 나도 역시 그 불가함을 알고 꼭 파하려고 하나, 태상왕께서 바야흐로 불사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차마 갑자기 혁파하지를 못한다.”라고 하였다.(上笑曰 憲府亦請罷五敎兩宗名利之僧 其寺社土田臧獲 盡屬于公 唯任置山門道僧 予亦知其不可 而切欲罷之 以太上方好佛事 故不忍遽革)
그래서 태종은 중도적 처지로 바뀌면서 불도를 진심으로 닦는 이에게는 존경을 하지만, 도를 얻지 못하면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다하여, 태조가 아끼었던 자초(무학) 대사에게까지도 경의를 갖지 않았다.
『태종실록』, 태종 14년(1414) 6월 20일.
임금이 편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불씨(佛氏)의 도는 그 내력이 오래 되니, 나는 헐뜯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으려 하나, 그 도를 다하는 사람이면 나는 마땅히 존경하여 섬기겠다. 지난날에 승(僧) 자초(自超)는 사람들이 모두 숭앙하였으나, 끝내 그는 득도(得道)한 경험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나는 노상의 행인과 같이 본다. 만약 지공(指空)과 같은 중이면 어찌 존경하여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니, 군신(群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옳습니다.”라고 하였다.(視事于便殿 上曰 佛氏之道 其來尙矣 予欲無毁無譽 然有盡其道者 則吾當尊事之 往者有僧自超 人皆仰之 卒無得道之驗 如此輩 吾視之如路人 若指空則其可不尊事耶 群臣皆曰 然)
다음은 이 『사리영응기』와 관계되는 세종의 불교 관계 기사를 열거하여 본문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세종 즉위년(1418) 10월 8일.(사헌부에서 연화승을 금하고 민간의 사채 및 신역을 거두지 말 것을 상소하다)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불교의 도는 마땅히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으며 욕심을 적게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하겠거늘, 지금 무식한 중의 무리가 그 근본을 생각지 않고 절을 세우고 부처를 만든다 설법을 하고 재를 올린다 운운하며, 천당·지옥이니 화복이니 하는 말로 우매한 백성을 현혹하여 백성의 입 속의 먹을 것을 빼앗고, 백성의 몸 위에 입을 것을 벗겨다가 흙과 나무에 칠을 하여 만들고 이것에 옷과 음식을 이바지하니, 정사를 좀먹고 백성을 해침이 이보다 더 큼이 없사오며, 더군다나 이런 흉년 든 해에 이같이 함은 진실로 마음 아픈 일이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서울 밖에서 권선문을 가지고 마을에 드나드는 자를 엄중히 금지할 것이오며, 만약 영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법에 따라 논죄하고, 그 속이고 꾀어 취한 재물은 다 몰수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司憲府上疏曰 佛氏之道 當以淸淨寡欲爲本 今無識僧徒 不顧其本 曰創寺造佛 曰法筵好事 將天堂地獄禍福之說 眩惑愚民 奪民口中之食 脫民身上之衣 以塗土木 以供衣食 蠱政害民 莫甚於此 況此凶歉之歲 誠爲痛心 伏望京外持願文出入閭里者 痛行禁理 如有違令者 依律論罪 其誑誘所取之物 悉令收沒 以賑飢饉之民)

■세종 1년(1419) 11월 1일.(산릉에 나아갈 때 불교 의식을 겸용하는 것에 대한 이론)

편전(便殿)에서 정사를 보았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산릉에 나아가는 의식에 불교 의식을 겸용하는 것이 옳겠소.”라고 하니, 변계량은 겸용하여도 좋다고 하였으나, 홀로 허조가 옳지 못하다고 대답하였다.(御便殿視事上曰 赴山陵儀, 兼用佛儀可乎 卞季良以爲 兼用可也 獨許稠對曰 不可)

■세종 1년 11월 28일.(의정부·육조·대간에서 올린 절의 노비를 혁파하라는 상서)

국가에서 회암사는 불교의 수법 도량(修法道場)이요, 진관사는 수륙 도량(水陸道場)이므로, 노비를 넉넉하게 주어 공양하게 하였으니, 여기에 있는 자는 진실로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고 욕심을 적게 하여, 불조(佛祖)의 임금을 수하게 하고 나라를 복되게 하는 정신을 계승하고, 국가의 무거운 은혜에 보답하여야 할 것인데, 이제 회암사 중 가휴(可休)·정후(正厚)와 진관사 중 사익(斯益)·성주(省珠) 등 수십여 인은 항상 절의 계집종과 음욕을 방자히 행하여 삼보(三寶)를 더럽혔고 국법을 범하였습니다. 이름난 절로서 이와 같을진댄, 딴 절 중들의 더럽고 행실이 없음은 단정코 알 수 있습니다. …… 각 절의 노비를 모두 관에 이속(移屬)시키고, 중들로 하여금 괴롭게 수행하게 하여, 그 도를 바르게 하기를 비나이다.(議政府上書曰 國家以檜巖作法之場津寬水陸之所 優給奴婢 以資供養 居是者 誠宜淸淨寡欲 以續佛祖 壽君福國 以報重恩 今檜巖寺僧可休正厚 津寬寺僧斯益省珠等數十餘人 常與寺婢恣行淫欲 汚染三寶 以干邦憲 號爲名刹 尙且乃爾 其他寺社僧徒汚穢無行 斷可知矣 …… 乞將各寺奴婢 悉令屬公 令僧徒苦志修行 以正其道)

■세종 1년 11월 29일.(상왕이 중들의 불안을 불식키 위해 회암사 등에 전토를 더 줄 것을 말하다)

상왕이 조말생과 원숙에게 묻기를, “절의 노비를 이제 다 혁파하였는데, 중들의 생각에는 또 장차 절의 전토를 혁파하여 불도가 영영 끊어진다 할 것이니, 이것도 또한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불교를 물리치려고 하나, 그 업(業)이 이미 오래되어서 갑자기 혁파할 수 없으니, 회암사 같은 이름난 절에는 전토를 더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니, 조말생 등이 답하여 아뢰기를, “상교가 매우 합당합니다.”라고 하였다.(上王問趙末生元肅曰 寺社奴婢 今已盡革 僧徒之心以爲 又將革其土田 僧道永絶矣 是亦不可不慮也 雖欲闢之 其業已久 不可遽革 莫若如檜巖等名刹 加給田土 以慰其心 末生等對曰 上敎甚當)

■세종 3년(1421) 7월 2일.(사간원의 불교 억제책)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만약 불교가 세상에 시행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습속이 이미 익숙해졌으므로, 그 법을 갑자기 배척할 수가 없으며, 그 무리들을 하루 아침에 다 제거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우선 미리 방법을 만들어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도록이라도 하고, 엄중히 금지하여 거리낌없이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중이 출가하는 법은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의거하여 법을 밝혀 엄격히 다스리고, 그 도첩(度牒)의 법식도 또한 처음 입사(入仕)하는 예에 의거하여 승록사(僧錄司)에서 예조에 보고하고, 예조에서는 대간(臺諫)에 공문을 보내어 서경(署經)을 거쳐 시행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이름과 수효를 또한 알지 않을 수 없으니, 원컨대, 서울과 지방의 관리로 하여금 그 경내의 중들을 조사하여, 그 도첩을 상고해서 기록하여 안적(安籍)을 만들어서, 저곳에서 이곳으로 이사하지 못하도록 하며, 인보(隣保)의 법에 의거하여, 나누어 맡는 승려를 정하여, 통솔자가 있게 하고, 그들이 출입할 때는 서울은 예조에서, 지방은 당지의 관원이 그 고장(告狀)을 받아, 그 길 잇수[里數]의 멀고 가까운 것을 계산하고, 그 왕래하는 기일을 써서 통행장(通行狀)을 줄 것이며, 도첩이 없는 자나, 몸이 승적(僧籍)에 기재되지 않은 자나, 출입할 때에 행장이 없는 자나, 갔다가 돌아오면서 기일을 넘긴 자나, 저곳에서 이곳으로 이사한 자가 있으면, 무시로 고찰하여 엄중히 법을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司諫院上疏曰 若以佛氏之敎 行於世也已久 習俗旣熟 其法不可遽斥 其徒不可一朝盡去 則姑且預爲之方 勿至濫溢 嚴爲之禁 勿使橫行可也 願自今僧人出家之法 依經濟六典 申明糾理 其度牒之式 亦依初入仕例 僧錄司報于禮曹 禮曹移關臺諫 署經施行 且其名數 亦不可不知 願令中外官吏推其境內僧徒 考其度牒 錄成案籍 毋令彼此移徙 依隣保之法 定其色掌僧人 使有統率 其出入之時 京中則禮曹 外方則所在官受其告狀 計其道路遠近 書其往來日期 以給行狀 其有無度牒者身不付籍者出入無行狀者往返過期者彼此移徙者 無時考察 痛繩以法上不允)

■세종 6년(1424) 3월 12일.(불교의 폐해와 개혁에 관한 성균관 생원 신처중 등 1백 1명의 상서문)

오직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신라의 말기에 불교를 존숭하고 신봉하여 탑묘(塔廟)를 세우고, 국왕이 믿는 것을 이름하여 비보(裨補)라 하고, 경대부가 믿는 것을 원찰(願刹)이라 일컬어, 숫놈 하나가 부르면 암놈 백 마리가 화답하듯이 온 세상이 그대로 따라서, 즐거이 귀와 눈에 익히게 되고 골수에 젖어 의리로 깨닫게 할 수 없고 구설로 다툴 수도 없어서, 그대로 내려온 폐단이 지난 왕조에 이르러서는 부처를 섬기기를 더욱 근실히 하여, 암자도 짓고 탑도 세워 해마다 흥행하지 아니한 때가 없어서, 필경에는 국왕의 존엄한 몸으로 친히 부처의 문[桑門]에 거둥해서 제자의 예로 공손하게 거행하여 무부 무군의 교를 제창하며 불충 불효의 풍속을 이루니, 인심은 허물어지고 천리도 멸망되었으니, 강충(降衷)의 성품이 어디에 있으며, 수도하는 가르침은 들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것이 풍속을 상하게 하고 국가와 조정을 그르치게 한 것이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成均館生員申處中等一百一人詣闕上書曰 惟我大東新羅之季 崇信浮屠 營立塔廟 國君信之則號爲裨補 卿大夫信之則稱爲願刹 一雄唱百雌和 擧世靡然悅而從之 習於耳目 浹於骨髓 未可以義理曉也 亦未可以口舌爭也 因循之弊 至於前朝 事佛益勤 而營菴立塔 無歲不興 至以國君之尊 親擧玉趾 屢幸桑門 恭行弟子之禮 以倡無父無君之敎 以成不忠不孝之俗 毁人心滅天理 降衷之性安在 修道之敎未聞 其所以傷風敗俗 迷國誤朝者 良有以也)

■세종 6년 4월 5일.(불교의 혁파에 관해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36개소의 절만을 남겨두자는 예조의 계)

석씨(釋氏)의 도는 선·교 양종 뿐이었는데, 그 뒤에 정통과 방계가 각기 소업(所業)으로써 7종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잘못 전하고 거짓을 이어받아, 근원이 멀어짐에 따라 말단이 더욱 갈라지니 실상 그 스승의 도에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또 서울과 지방에 사사(寺社)를 세워, 각 종(宗)에 분속시켰는데, 그 수효가 엄청나게 많으나, 중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절을 비워두고 거처하는 자가 없으며, 계속하여 수즙(修葺)하지 않으므로 점점 무너지고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조계·천태·총남 3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화엄·자은·중신·시흥 4종을 합쳐서 교종으로 하며, 서울과 지방에 중들이 우거할 만한 곳을 가려서 36개소의 절만을 두어, 양종에 분속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전지를 넉넉하게 급여하고 우거하는 중의 인원을 작정하며 무리지어 사는 규칙을 작성하여, 불도(佛道)를 정하게 닦도록 할 것입니다. 이어 승록사(僧錄司)를 혁파하고, 서울에 있는 흥천사를 선종 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종 도회소(敎宗都會所)로 하며, 나이와 행동이 아울러 높은 자를 가려 뽑아 양종의 행수 장무(行首掌務)를 삼아서 중들의 일을 살피게 하기를 청합니다.(禮曹啓 釋氏之道 禪敎兩宗而已 厥後正傳傍傳 各以所業 分而爲七宗 傳誤承訛 源遠而末益分 實有愧於其師之道 且中外多建寺社 分屬各宗 其數猥多 緇流四散 曠廢莫居 修葺不繼 漸致頹毁 乞以曹溪天台摠南三宗 合爲禪宗 華嚴慈恩中神始興四宗 合爲敎宗 擇中外堪寓僧徒之處 量宜置三十六寺 分隷兩宗 優給田地 酌定居僧之額 群居作法 俾之精修其道 仍革僧錄司 以京中興天寺爲禪宗都會所 興德寺爲敎宗都會所 揀取年行俱高者 以爲兩宗行首掌務 令察僧中之事)

■세종 7년(1425) 6월 27일.(환속한 승려 중 재예가 있는 사람은 승직에 있던 경력을 임명에 반영토록 하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환속한 사람 박의문·김여정 등의 소장을 상고하여 본즉, 전자에 각기 불교 종파 중에서 선택되어 직임을 받았다가, 이제 환속하고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원하여 성중과 애마(成衆愛馬; 둘 다 궁성의 수위나 임금의 시중을 맡았던 관원)로 차등 정정[差定]하기를 청하옵는 바, 본조에서 이 사건을 자세하게 상고하옵건대, 단지 이 사람뿐이 아니오라 모두 환속한 뒤에 벼슬길에 종사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처음 입사(入仕)할 때에 시험 보이는 것을 면제시키고, 그 조상 계보와 재능과 인품을 상고하여 성중 애마에 상당한 곳으로 정하여 보내되, 그 중에 재예가 있어서 일을 맡길 만한 자는 제수할 때에 승직에 있던 것을 통계하여 임명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吏曹啓 還俗人朴義文金麗精等狀考 在前各宗中選受職 今而還俗 願欲從仕 乞於成衆愛馬差定 本曹據此看詳 非徒此人 凡還俗後自願從仕者 除初入仕試取 考其祖系才品 成衆愛馬相當處定送 其中有才藝可任者 除授時通計僧職敍用 從之)

■세종 14年(1432) 2월 14일.(효령 대군이 한강에서 수륙재를 개설하자 길사순이 중지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다)

효령 대군 이보가 성대하게 수륙재를 7일 동안 한강에서 개설하였다. 임금이 향을 내려 주고, 삼단(三壇)을 쌓아 중 1천여 명에게 음식 대접을 하며 모두 보시를 주고, 길가는 행인에게 이르기까지 음식을 대접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날마다 백미 두어 섬을 강물 속에 던져서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베풀었다. 나부끼는 깃발과 일산이 강을 덮으며, 북소리와 종소리가 하늘을 뒤흔드니, 서울 안의 선비와 부녀(婦女)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양반의 부녀도 또한 더러는 맛좋은 음식을 장만하여 가지고 와서 공양하였다. 중의 풍속에는 남녀가 뒤섞여서 구별이 없었다. 전 판관 길사순이 글을 올려 중지하라고 간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孝寧大君𥙷大設水陸于漢江七日 上降香 築三壇 飯僧千餘 皆給布施 以至行路之人 無不饋之 日沈米數石于江中 以施魚鰲 幡蓋跨江 鍾鼓喧天 京都士女雲集 兩班婦女 亦或備珍饌以供 僧俗男女 混雜無別 前判官吉師舜上書諫之 不允)

■세종 16년(1434) 4월 12일.(집현전 부제학 설순이 회암사의 사찰 수리와 아울러 불교의 폐단에 대하여 상서하다)

집현전 부제학 <인명 realname="">설순 등이 상서하기를, “그윽이 듣자오니, 부도(浮屠)란 것은 외방의 교로서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취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하옵니다. 그 교가 무부 무군하며, 세상을 미혹하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것이라 함은 진실로 선현들이 이미 자세히 말한 바이고, 전하께서도 밝게 아시는 바이므로, 신 등은 이에 감히 군말씀[贅言]을 더 아뢰지 못하옵니다마는, 잠깐 좁은 소견으로써 우러러 천총(天聰)을 더럽히나이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저번에 미친 중이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꾀어서 백성의 고혈을 짜 내어 가지고 떼를 지어 한강에 모여 수륙재의 모임을 베풀었사온바, 이에 위로는 거가(巨家)·대족(大族)으로부터 여항의 부녀에 이르기까지 우러러 받들고 시주하기를, 오직 남에게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재물을 소모하고, 풍속을 무너뜨림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었으되, 유사가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국가에서 이를 금하지 아니하매, 점차 퍼져 나가서 서로 만연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더욱 거리낌이 없게 되었나이다. 귀하고 이름난 사람을 인연하여 앞으로 회암사를 다시 세우려 함에 그 비용으로 드는 전곡과 화폐가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되오니, 그 폐단이 지난날보다 더욱 심하고 많으옵니다.”라고 하였다. ……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말을 내 이미 다 아노라.”라고 하였다.(集賢殿副提學偰循等上書曰 竊聞浮屠者 本方外之敎 理國家者所不取也 其無父無君 惑世誣民 固前賢之所詳論 而殿下之所灼知也 臣等玆不敢贅 姑以管見 仰瀆天聰 竊惟往者狂僧 欺誘愚俗 浚民膏血 群聚漢江 設水陸會 於是上自巨家大族 下至閭巷婦女 瞻奉施舍 惟恐不及 傷財敗俗 莫此爲甚 有司不敢言 國家不之禁 轉相滋蔓 以至今日 益無畏憚 因緣貴顯 將欲重創檜巖 錢穀貨幣 不可勝計 其弊尤甚於往日者萬萬矣 …… 上曰 爾等之言 予已知悉)

■세종 21년(1439) 4월 18일.(사헌부에서 흥천사 안거회의 철폐와 규찰하는 사령을 전대로 시행하도록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불교는 본래 이적의 한 법(法)이온데, 만세에 강상을 헐어버리오니, 성도(聖道)에 있는 거칠은 잡풀밭입니다. 군신의 의를 버리고 부자의 친을 끊으며, 거짓으로 삼도(三途) 의 설을 지어내고 허망하게 육도(六道)의 설을 떠벌리어 드디어 우매한 백성들로 하여금 화를 무서워하고 복을 사모하게 하여 생령을 좀먹는 일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타고나옵신 성인으로 밝고 빛나게 닦으신 학식으로, 그 불교의 허탄하고 망령됨을 밝게 통촉하시지 못하심이 없으시옵거니와, 근자에 흥천사 사리각은 태조께옵소 창건하신 바로, 전하께서는 그 집의 기울어져 무너짐을 차마 그냥 보시지 못하시와 이에 수리할 것을 명하시오니, 이것은 전하께서 선조를 받드시는 성심에서 나오신 것이지, 불법에 미혹되어 그러하옵심이 아닐 것이옵니다. 이 절에 사는 자들은 그 전조(田租)만 거두어도 또한 의식을 마련하기에 족할 것이므로 앉아서 그 이득을 누립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확연하게 강단(剛斷)을 내리시고 특히 교지를 내리시와 빨리 흥천사의 안거회를 파하게 하시고, 두 절에는 왕지(王旨)를 받은 뒤에 추핵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시고 규찰하는 사령(使令)을 그전대로 시행하게 하옵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司憲府上疏曰 佛氏 本夷狄之一法 毁萬世之綱常 而聖道之蓁蕪也 棄君臣之義 絶父子之親 謬起三途 虛張六道 遂使愚民畏慕禍福 耗蠧生靈 有不可勝言矣 殿下以天縱之聖緝熙之學 其於釋氏之誕妄 罔不洞照矣 近者興天舍利閣 乃太祖所創 殿下不忍視其傾圯 爰命修葺 此乃殿下出於奉先之誠心 非惑於佛氏而然也 居是寺者 但收其田租 亦足以資衣食而坐享其利也 …… 伏望殿下 廓回剛斷 特降愈音 亟罷興天安居之會 還收兩寺取旨推劾之命 糾察之令 依舊施行 不允)

■세종 23년(1441) 윤11월 14일.(사리각 경찬회에 관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본월 10일에 글을 갖추어 흥천사의 사리탑 경찬회를 파하기를 청하였던 바, 전지(傳旨)하시기를, ‘한(漢)나라 이후로부터 역대의 임금이 부처를 섬기지 아니한 이가 없었으므로 나도 한다.’ 하시니, 신 등이 명을 들은 뒤로 통분하옴을 이기지 못하와, 이튿날 또 그 뜻을 말씀드렸더니, 또 전지하시기를, ‘너희들의 말한 바는 모두 내가 아는 바이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를 여뀌잎처럼 작다고 일컬었고, 불교가 천하에 퍼졌는데, 작은 나라라고 하여 어찌 못하겠느냐.’ 하시니, 신 등이 명을 듣고 더욱 놀래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 임금이 상소를 보고 이르기를, “옛적 우리 태조께서 이미 사리각을 창건하시고, 또 경찬회를 베풀었으므로 나도 전의 법을 따라 수리한 것인데, 어찌 두세 번 진청(陳請)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하시다.(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上疏曰 臣等於本月十日 具疏請罷興天舍利塔慶讃會 傳旨若曰 自漢以來歷代君主 莫不事佛 予亦爲之 臣等聞命以還 不勝憤咽 翼日又口陳其意 傳旨又曰 爾等所言 皆予所知 古稱我國小如蓼葉 佛法遍天下 小邦何獨不爲 臣等聞命 尤切驚駭 …… 上覽疏曰 昔我太祖旣創舍利閣 又設慶讃會 予亦因前規修之耳 何必再三陳請乎)

■세종 23년 윤11월 20일.(성균 생원 조변륭 등이 경찬회의 일로 신하들이 간하는 말을 듣기를 청하다)

성균 생원 <인명 realname="">조변륭 등 4백여 인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윤11월 18일에 전하의 흥천사 경찬회의 명을 엎드려 듣자옵고 삼가 이유를 갖추어 우러러 성상께 아뢰었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오니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 전하께서 이미 부처의 옳지 못함을 알으시면 속히 고쳐서 착한 것에 따름이 가하옵거늘, 여러 신하들의 간하는 말에 매양 이미 안다고 하시고는 아직까지 윤허하지 않으시니, 능히 과실을 고치지 못하실 뿐 아니라, 또 뉘우칠 줄을 못하시고 도리어 허물과 그름을 꾸미고 덮으시니, 이는 허물을 들이는 실수가 부처를 숭상하는 실수보다 더하옵니다. 이제 우리 국가의 억만년 무궁한 업(業)이 겨우 세 성왕을 전하였사온데, 전하께서 생각지 않으심이 이처럼 극진함에 이르시면 자손 만세의 모양이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아무쪼록 고치시기를 전하께 깊이 바라옵니다.”라고 하였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成均生員曹變隆等四百餘人上疏曰 臣等於閏十一月十八日 伏聞殿下興天慶讃之命 謹具情由 仰干冕旒 未蒙兪允 不勝慷慨 …… 殿下旣知佛氏之非是 則速改從善可也 其於群臣之諫 每曰已知之 而尙不頷肯 非惟不能改過 而又不知悔過 而反爲文過以飾非 是則入過之失 尤愈於崇佛之失矣 今我國家億萬世無窮之業 纔傳三聖 而殿下之不思 至於此極 則子孫萬世之儀形 將若之何 庶幾改之 深有望於殿下 不報)

■세종 23년 윤11월 24일.(성균관 유생 유이 등이 경찬회에 관해 상소하고, 임금의 마음을 돌리기를 의정부에 청하다)

성균 생원 유이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근래에 흥천사의 일을 가지고 두 번 천총(天聰)을 모독하였사오나, 아직도 윤허를 얻지 못하오니 통분을 이기지 못하와 두세 번 번거롭게 하옴을 피하지 아니하였습니다. …… 하물며 전하께서는 만백성의 대표로서 불교를 숭상해 믿으심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는 원숭이에게 나무에 오르기를 가르치고 더러운 진흙 위에 다시 더러운 진흙을 칠하는 것과 같사오니, 불교를 숭상하는 징조를 장차 어떻게 막으오리까. 신 등은 천년 이래에 요·순 같은 임금을 만나서 스스로 세상에 드문 시대를 만났다고 여기었더니, 이단을 물리치는 한가지 일에도 두세 번이나 간하였으되 능히 천청(天聽)을 돌이키지 못하와, 가슴속이 답답하여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을 어찌 뜻하겠습니까. 폐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신 등이 평일에 전하께 바라던 바가 땅을 쓸은 듯하옵니다. 진실로 신 등의 아뢴 말이 정치의 대체에 어그러짐이 있어 족히 위에서 들을 것이 못 된다면, 신 등이 어찌 감히 천청을 두 번이나 모독하여 외람되게 광참(狂僭)한 말을 올리겠습니까. 신 등은 생각하기를, 좋은 약이 입에는 쓰나 병에는 이롭고, 충성된 말이 귀에는 거슬릴지라도 행함에 도움된다고 하오니, 전하께서 깊이 살피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라고 하였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成均生員柳貽等上疏曰 臣等近將興天之事 再瀆聰聽 尙未蒙允 不勝痛悼 不避再三之瀆 …… 況殿下以萬民之表 崇信佛敎 乃至於此 則是敎猱升木 如塗塗附 廣袖高髻之漸 將何以禦之 臣等千載之下 獲逢堯舜之君 自以爲不世之遇 豈意闢異端一事 再三進諫 未能上回天聽 鬱鬱飮泣於胸中哉 弊至如此 則臣等平日所望於殿下者 掃地如也 苟若臣等之進言 有違於治體 而不足上聞 則臣等何敢再瀆天聰而冒進狂僭之說哉 臣等以爲良藥苦口而利於病 忠言逆耳而利於行 伏惟殿下深察焉不報)

■세종 23년 윤11월 25일.(경찬회를 근일에 행하려 하다가 좌우의 논의에 따라 일단 중지하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강론(講論)하고, 성학(聖學)에 우유(優游)하였으니, 내가 어찌 불교를 숭상해 믿겠느냐. 다만 그 법이 오래고 멀어서 갑자기 고치기 어려운 것이다. 전자에 한두 대신이 내게 이르기를, ‘불교를 갑자기 없앨 수 없다.’고 하더니, 이제 경찬회를 파하기를 간하는 데에 그 사람도 소문에 서명하여 올렸으니, 인신(人臣)으로서 군부(君父)에게 이처럼 기망할 수 있겠느냐. 경찬회의 일은 예로부터 있었는데, 이제 만약 천연하면 간하는 말이 어지러울 것이니, 근일에 행함이 마땅하다. 너희들은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도승지 조서강이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성상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제공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우선 성상의 뜻에 따르는 것이 옳지 않겠소.”라고 하니, 우승지 이승손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본래 불교를 숭상하는 임금이시라면 이 일은 족히 간할 것이 못 되오나, 즉위하신 이후로 한 가지 일이라도 불교에 영향을 미친 것이 없으셨는데, 이제 갑자기 경찬회를 일으키시매, 이러므로 모든 신하들이 마음을 다하여 간하오니, 이것도 일이 작을 때에 방지하고 점점 커지기 전에 막는 뜻입니다. 경찬회를 그만두지 아니하오면, 장차 절을 세우고 부처를 만들어 머리 깎은 중들이 세력을 펴서 폐단을 바로잡지 못할 것입니다. 방금 성을 쌓는 역사가 바야흐로 한창이옵고, 사신이 올 때가 또한 임박하였으니, 신은 아직 중지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매, 좌우에서 모두 그 논의에 따르니, 임금이 그렇게 여기었다.(上謂承政院曰 予自少講論經史 優游聖學 予豈崇佛敎 但其法久遠 未易遽革 曩者一二大臣謂予曰 佛法未可遽革 今諫慶讃 其人亦署名疏中以進 人臣於君父 不可如是欺罔 慶讃之事 自古有之 今若遷延 則諫諍紛紜 當於近日行之 爾等擬議以聞 都承旨趙瑞康顧左右曰 上意至此 諸公謂何 姑從上意 無乃可乎 右承旨李承孫曰 殿下本崇佛之主 則此事固不足諫 卽位以來 無一事及於佛 而今乃遽起慶讃 是以凡百臣僚盡心諫諍 此亦防微杜漸之意 慶讃不已 則將至於建寺造佛 而髡首鴟張 弊不能救矣 方今築城之役方殷 使臣之來又逼 臣謂莫如姑停之 左右皆從其議 上然之)

■세종 23년 12월 9일.(지중추원사 정인지 등이 불교를 숭상하는 것에 대한 우려와 실망을 상소하다)

지중추원사 정인지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근일에 듣자옵건대, 전하께서는 흥천사의 부도(浮屠)에 경찬회를 행하시려고 모든 일을 준비하셨다고 하오니, 신 등은 그 옳지 못함을 삼가 아뢰었사오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등은 자도 걱정 먹어도 걱정이 되와 삼가 소회를 뒤에 나열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낱낱이 받아들이시고 다시 삼사(三思)하고 유념하시어 일국 신민의 바라는 바에 부응하옵소서.
1. 신 등은 그윽이 듣자옵건대, 고려 태조 이후로 부처를 섬기는 일이 점점 성하여 5백 년 사이에 대대로 옳은 정치가 없고, 말엽에 이르러서는 풍속이 크게 허물어져서 대소 부녀들이 사찰에 연달고, 무뢰한 승도들이 여염집에 혼잡하여, 음란한 풍속이 크게 행하고 정치·교화가 쇠미하여 드디어 어지러워 망하는 데 이르니, 태종께서는 그 일을 목격하시고 도첩(度牒)의 법을 세우시고 절에 가는 영(令)을 엄하게 하시니, 큰 중이 없어지고 새로 창건하는 절을 금하게 되어 수십 년 사이에 풍속이 바로 잡혀서, 실로 국가의 공고한 기틀이 마련되었거늘, 이제 전하께서 다시 그 근원을 열으시니, 말류를 어찌 막으오리까. 이것이 신 등의 절통해 하는 바입니다.
1.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로부터 제왕들이 부처에게 귀의하지 아니한 이가 없고, 또 천하가 부처에게 귀의하는데, 우리 나라는 여귀잎처럼 작거늘, 어찌 홀로 폐할 수 있으랴.’ 하셨으나, 신 등은 생각하기를, 한(漢)·당(唐) 이후로 역대 제왕이 간혹 부처를 섬겨서 큰 화패(禍敗)는 없는 이가 있었으나, 모두 가히 본받을 것은 못된다 하겠습니다. 당(唐) 고조는 승니(僧尼)를 사태(沙汰)하였는데, 태종 말년에 이르러 애착이 많아서 다시 부도(浮屠)를 세워 정관의 정치에 누가 되었고, 태종이 죽은 지 수십 년도 못되어 당나라에 화가 참혹하였으니, 부처의 힘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천지의 기운이 스스로 성하고 쇠함이 있어 진(秦)·한(漢) 이후로 대대로 좋은 정치가 없고, 이단이 날마다 성하여 승니(僧尼)와 도사를 비록 갑자기 끊을 수는 없사오나, 임금으로서 처리하는 도리는, ‘갑자기 끊을 수 없으니 아직 숭상해 믿는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비유하건대, 좋은 곡식을 기르는 자가 가라지를 갑자기 없앨 수 없다고 하여 따라서 북돋우어 키울 수 없는 것과 같고, 또 여귀잎 같은 나라로서 중이 되는 자가 날마다 많아서 놀고 앉아 먹고 국가의 의무를 도피하는 자의 근거지가 될 것이오니, 이것도 국가에서 마땅히 엄하게 금할 것이옵니다.
1. 전왕조의 불교가 성한 나머지에 사람들이 모두 불교에 귀의하여 세도(世道)가 휩쓴 듯하였는데, 태종께서 영의정 하륜과 더불어 모의하고 엄하게 배척을 가하여 10에 7, 8을 없애어 우리 도를 밝히고 풍속을 다시 바르시와, 오늘날에 이르러 온 나라 신민들이 모두 불교가 옳지 못함을 알게 되어 이단을 물리치고 정도로 돌아가게 하시매 들인 힘은 적되 공은 많을 때이온데, 전하께서 도리어 독단으로 모든 의논을 배척하고 일으켜서 높여 섬기시니, 이것이 신 등의 소망에 어긋나는 바이옵니다.”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知中樞院事鄭麟趾等上疏曰 臣等近日伏聞殿下欲慶讃興天寺浮屠 措辦諸事 臣等謹陳其不可 未蒙兪允 臣等寢食輾轉 謹以所懷條列于後 伏望殿下一一採納 更留三思 以副一國臣民之望 一 臣等竊聞高麗自太祖以來 事佛漸盛 五百年間 世無善政 至于末葉 風俗大毁 大小婦女絡繹寺刹 無賴僧徒混雜閭閻 淫風大行 政敎衰微 遂至亂亡 太宗目擊其事 立度牒之法 嚴上寺之令 絶棟樑之僧 禁新創之寺 數十年間 風俗歸正 實爲社稷鞏固之基 今殿下復開其源 末流安可塞哉 此臣等之所以痛切者也 一 殿下以爲 自古帝王 莫不歸佛 且以天下歸佛 而我國小如蓼葉 安得獨廢哉 然臣等以爲漢唐以後歷代帝王 間有事佛 無大禍敗者 皆非所以可法也 唐高祖沙汰僧尼 太宗末年多愛,復立浮屠 以累貞觀之治 崩未數十年 唐室之禍慘矣 佛力果安在哉 天地之氣 自有盛衰 秦漢以後 世無善治 異端日熾 僧尼道士 雖不得遽絶 然君上處之之道 不可謂未能遽絶而姑崇信之也 譬如養嘉穀者 不可以稂莠爲不可遽除 從而培壅之也 且以蓼葉之國 爲僧者日衆 遊手坐食 以爲逋逃之藪 此亦國家之所當痛禁者也 一 前朝佛法爛熳之餘 人皆歸佛, 世道靡然 太宗 與一相河崙謀議 痛加排闢 十去七八 吾道以明 風俗復正 至於今日 一國臣民皆知佛氏之非正 闢異端歸正道 事半功倍之秋也 殿下乃反獨斷排群議而起之 尊而事之 此臣等之所以缺望者也 上終不允)

■세종 28년(1446) 10월 9일.(사헌부 집의 정창손이 불사를 정지시키기를 상소하였다)

사헌부 집의 정창손 등이 상소하기를, “불교가 괴탄(怪誕)하고 환망(幻妄)하여 나라를 미혹시키고 조정을 그릇되게 하는 것은, 사책(史策)을 상고해 보면 실패한 자취가 명백합니다. 그러하오나 역대의 군신(君臣)들이 그 그릇된 점을 깨닫지 못하고서 숭신(崇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진실로 보응의 설과 화복의 논이 사람의 마음에 깊이 들어간 때문입니다. …… 지난번 흥천사에서 경찬하던 날로부터 불법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시기에 시종과 대간이 번갈아 장소를 올리고 대궐을 지키면서 힘껏 간하였사오나, 천의(天意)를 돌이키지 못하였으니, 조야에서 지금까지 실망하고 있습니다. ……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고명하신 성학(聖學)으로서 어찌 불교에 미혹하여 이러한 신봉하는 행사를 만들어 복상(福祥)을 기원하겠습니까. 다만 세자의 성효가 천성에서 나왔음으로써 전하께서 그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감히 이 일을 하게 되었지마는, 신 등은 가만히 생각하기를, 천만세의 후에는 역대의 불교를 좋아한 군주와 더불어 사책(史策)에 이름이 함께 전하게 될 것이니, 신 등은 매우 두려워하며 매우 원통히 여깁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강단(剛斷)을 크게 돌리시어 사교를 제거하되, 의심하지 마시고 빨리 정파하기를 명하신다면, 유학에 매우 다행하겠사오며 국가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도승지 황수신·우승지 박중림을 내전에서 불러 보시고, 조종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찬경(讚經)을 피람(披覽)한 예와 지금 대간이 와서 간하는 일을 말씀하시고, 또 말하기를, “대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대신들도 모두 이와 같은데, 무릇 일을 가부를 의논할 때에는 ‘옳습니다.’고 하였다가, 후일에는 ‘그릅니다.’라고 하니, 내가 만약 말한 사람이 아무라고 가리킨다면 부끄러울 것이니, 이로써 감히 말을 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대개 우의정 하연을 가리킨 것이다. 황수신 등이 밖으로 나가니, 임금이 또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장령 강진에게 이르기를, “불경을 써서 피람(披覽)하라는 일로써 대간에게 전지(傳旨)한 지가 지금 벌써 7, 8월이 되었다. 전일에 정부에서 불사(佛事)를 정지시키기를 청하더니 이튿날 사헌부에서 또 말하게 되니, 이것은 반드시 정부의 말을 듣고 와서 계한다. …… 임금과 신하는 의리로써 합하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도가 합하지 않으면 떠나게 되는데, 만약 나로써 합하지 않는다고 여겨서 몸을 떠나게 된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신하가 되어 임금을 속임이 이 지경에 이른다면 용납해 참고 있겠는가. 다만 이단의 일로 인하여 간신(諫臣)을 처벌한다면 여러 사람이 반드시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혐의를 피하는 일은 현명한 사람은 하지 않는 법인데, 내가 비록 부덕한 사람이지만, 임금이 되어 간사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보고서도 혐의를 피하고자 하여 처벌하지 않는다면, 어찌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정사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정창손·강진과 지평 조욱·유맹부, 사간원 우사간 변효경, 지사간 정지담, 헌납 원내인·박윤창, 정언 윤배·김통을 의금부에 내리고, 이내 좌부승지 이사철에게 명하여 가서 이들을 국문하게 하였다.(司憲府執義鄭昌孫等上疏曰 佛氏之所以怪誕幻妄 迷國誤朝 稽諸史策 覆轍昭昭 然歷代君臣 莫覺其非 靡不崇信者 誠報應之說禍福之論 入人深也 …… 曩因興天慶讃之日 佛法復萌 當是之時 侍從臺諫 迭上章疏 守闕力爭 未回天意 朝野至今缺望 …… 臣等竊念殿下高明聖學 豈惑於佛 作此崇奉 以祈福祥也 直以聖子誠孝 出於天至 殿下重違其意 敢爲此擧 臣等竊謂千萬世之後 與歷代好佛之主同垂於史策 臣等深竊懼焉 深竊痛焉 伏望殿下廓回剛斷 去邪勿疑 亟命停罷 斯道幸甚 國家幸甚 疏上 上大怒 引見都承旨黃守身右承旨朴仲林于內 語祖宗賓天之後 讃經披覽之例與今臺省來諫之事 且曰 非止臺諫 當今大臣 皆若此 凡事當議可否之時則曰可 後日曰否 予若指言某也則可愧矣 是以不敢發言也 蓋指右議政河演也 及守身等出 上又使首陽大君謂掌令康晋曰 以寫經披覽 傳旨臺諫 今已七八月矣 前政府請止佛事 明日憲府亦言之 是必聞政府之言而來啓 …… 君臣以義合 故道不合則去 若以予爲不合 引身而去 則予何言哉 人臣而欺君至此 其可容忍乎 但因異端之事而罪諫臣 衆必疑之 然避嫌 賢者不爲 予雖不德 旣爲人君 見姦詐不直之人 欲避嫌而不之罪 則豈可謂好善惡惡之政乎 遂下昌孫晋及持平趙頊柳孟敷司諫院右司諫卞孝敬知司諫鄭之澹獻納元乃仁朴允昌正言尹培金統于義禁府 仍命左副承旨李思哲往鞫之)

■세종 31년(1449) 7월 1일.(수양대군과 도승지 이사철에게 흥천사에서 기우제 하라 명하다)

수양대군 이유(李瑈)와 도승지 이사철을 명하여 흥천사에서 기우제 하게 하였는데, 이유가 승도(僧徒) 속에 섞여서 뛰어 돌아다녀 땀이 흘러 등이 젖었어도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이 불도의 가르침에 혹신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공자의 도보다 나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그르다고 한 것은 불씨(佛氏)를 깊이 알지 못한 것이었다. 천당·지옥과 사생·인과가 실로 이치가 있는 것이요, 결코 허탄한 것이 아닌데, 불씨의 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자는 모두 망령된 사람들이라, 내 취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종실 중에서 이유와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깊이 존경하여 신봉하였다.(命首陽大君瑈都承旨李思哲 祈雨于興天寺 瑈雜於僧徒中 踴躍周匝 汗流沾背 略無倦色 惑信釋敎 嘗謂 勝於孔子之道 程朱非之 不深知佛氏者也 天堂地獄 死生因果 實有是理 決非虛誕 不知佛氏之道而斥之者 皆妄人 吾不取也 於宗室中 瑈及安平大君瑢深敬信之)

■세종 31년(1449) 12월 3일.(세자의 쾌차로 보사재·보공재를 베풀다)

세자의 병이 나았으므로, 보사제(報祀祭)를 종묘와 사직에 행하고, 또 보공재(報功齋)를 불당과 흥천사에서 베풀되, 향악을 연주하여 받들게 하였다.(以世子疾愈 行報祀 祭宗廟社稷 又設報功齋于佛堂及興天寺 奏鄕樂以供之)
이렇듯 사간원이나 유생들의 끈질긴 상소가 있어도 세종은 자신의 불교 신봉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것이 이 『사리영응기』가 탄생하게 되기까지 이르게 된 배경적 힘이었던 것이다. 다음은 이 『사리영응기』가 이루어진 시기와 연관되는 대군들이 호불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자.

■세종 29년(1447) 9월 24일.(불골을 흥천사 사리각에 간직하게 하다)

안평대군 이용에게 명하여 불골(사리)을 흥천사의 사리각에 간직하게 하였다. 불골은 본디 이 각에 있었는데 일찍이 대궐 안에서 들여왔던 것이었다. 외인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었는데 이번에 돌려간 것이었다.(命安平大君瑢 藏佛骨于興天寺舍利閣 佛骨本在此閣 嘗取入禁中 外人莫之知 至是還之)

■세종 30년(1448) 7월 21일.(생원 유상해 등이 불당의 역사를 파할 것을 상소하다)

생원 유상해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또 생각하기를 귀척(貴戚)의 신하는 간절한 기개와 풍성한 충성으로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는 사람이니, 임금이 만일 허물이 있으면 허물을 고치게 하고 틀리는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 다른 신하의 비할 것이 아닌데, 지금 효령 대군은 부도(浮屠)를 높이고 믿어서 밖에서 주창하고, 안평 대군은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안에서 호응하옵니다. 안팎이 서로 응원하여 부처를 섬기기를 날로 부지런히 하며, 혹은 토목을 크게 일으키어 사사(寺社)를 영건하고, 혹은 금을 녹여 경을 쓰는 등 재물을 백단으로 허비하여 성상의 마음을 그르쳐서 오늘의 일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왕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의심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불당의 역사를 파하여 신 등의 바람에 부합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生員兪尙諧等上疏曰 臣等又謂貴戚之臣 愷切忠藎 而與國同休戚者也 君若有過 則繩愆糾繆 非他臣之可比今也孝寧大君崇信浮屠而倡之於外 安平大君同心協力而應之於內 內外相援 而事佛日勤 或大興土木 營建寺社 或銷金寫經 費財百端 以誤聖上之心 以致今日之事 是則無惑乎王之不知也 伏惟殿下罷其佛堂之役 以副臣等之望)

■세종 30년 7월 25일.(대간이 관사를 닫고 와서 불당을 정지할 것을 청하다. 안평대군이 의정부와 육조 당상의 청으로 밀지를 받들고서 두세 번 왕복하다)

대간(臺諫)이 관사를 닫고 와서 불당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의정부와 육조 당상이 와서 청하므로, 안평대군이 밀지를 받들고서 사람을 물리치고 왕복한 것이 두세 번이나 되었는데, 근시(近侍)와 사관(史官)은 모두 참석하여 듣지 아니하였다.(臺諫闔司來請停佛堂 不報 議政府六曹堂上亦來請 安平大君承密旨 屛人往復者再三 近侍及史官 皆不與聞)

■세종 30년 8월 5일.(수양과 안평 대군이 궁금 옆에 불당을 설치하다)

대간이 불당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두세 번이나 청하였으나, 마침내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만년에 병으로 대신과 접견하지 못하였는데, 광평과 평원 두 대군이 연하여 죽고, 소헌 왕후가 또 승하하니, 임금의 마음이 힘입을 데가 없었다. 이에 수양대군 이유와 안평대군 이용이 사설에 혹하여 먼저 뜻을 열고 인도하여 궁금 옆에 불당을 두므로, 일국의 신료가 극진히 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히려 하늘을 돌이키지 못하여 성덕(聖德)에 누를 끼쳤으니, 이것은 실로 두 대군의 빌미를 연한 허물이었다.(臺諫請停佛堂之役再三 竟不報上晩年以病不得與大臣接見 而廣平平原二大君連逝 昭憲王后又薨 聖心無聊 於是首陽大君瑈 安平大君瑢惑於邪說 先意啓迪 置佛堂於宮禁之傍 一國臣僚 莫不極諫 而尙不回天 以累聖德 此實兩大君啓迪之過也)

■세종 30년 12월 5일.(불당 경찬회를 베풀다)

불당이 이룩되니, 경찬회를 베풀고 5일 만에 파하였다. 불당의 제도가 사치와 화려함이 지극하여 금과 구슬이 눈을 부시게 하고, 단청이 햇볕에 빛나며, 붉은 비단으로 재봉하여 기둥에 입혀서 주의(柱衣)라고 이름하여 더럽혀짐을 방지하고, 향나무를 새겨 산을 만들고 금부처 세 구를 그 가운데 안치하였으니, 그 금부처는 안평대군이 일찍이 성녕대군 집에서 감독해 만든 것이다. 근위대로 하여금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가를 호위하는 의식과 같이 대내에 메고 들어가게 하여, 친히 관람하신 뒤에 불당에 안치하였다. 그 바깥담을 쌓을 때에 자꾸 얼어서, 담의 안팎에 숯불을 피워서 따뜻하게 하니, 잠시 만에 담이 말랐다. 종친·대군·제군(諸君)들이 다투어 일재(日齋)를 베풀어 혹 뒤질까 염려하였고, 의정부 좌참찬 정분과 병조판서 민신이 그 역사에 제조(提調)가 되었으므로, 모두 털옷[毛衣]을 하사하고, 이명민은 역사를 감독한 일로써 품계를 뛰어 올려 벼슬을 제수하였다. 정분과 민신은 처음에는 의정부와 육조의 당상관으로써 예에 따라 간하였으나, 감독의 명을 받음에 미쳐서는 지극히 사치하게 하기를 힘써서 임금의 뜻을 맞추니, 식자들이 이를 비난하였다. 경찬회를 베풀자, 도승지 이사철에게 명하여 기일 전에 그곳에서 치재(致齋)하고 모든 일을 통찰하게 하며, 또 각사(各司)의 장관으로 하여금 공급할 찬품(饌品)을 친히 감독하게 하니, 모두 내주 옹인(內廚饔人)이 장만한 것으로 어선(御膳)과 다름이 없고, 또 외승(外僧)과 사장(社長)을 불당밖의 건천(乾川)에서 공궤하니, 하룻동안에 공궤한 사람이 7, 8백 명에 내려가지 아니하고, 소비한 쌀이 2천 5백 70여 석이었다. 신곡을 지어 관현에 올리고, 악기를 모두 새로 만들어서 공인(工人) 50명과 무동(舞童) 10명으로 미리 연습시켜서 부처에게 공양하여, 음성공양이라고 일렀으니, 종(鍾)·경(磬)·범패(梵唄)·사(絲)·죽(竹)의 소리가 대내에까지 들리었다. 정분·민신·이사철·박연·김수온 등이 여러 중들과 섞이어 뛰고 돌면서 밤낮을 쉬지 아니하니, 땀이 나서 몸이 젖어도 피곤한 빛이 조금도 없었다. 이명민이 한 환자(宦者)와 더불어 선언하기를, “바야흐로 정근(精勤)할 때에 문에 나와 돌아보니, 사리가 빛을 내는데, 빛이 불꽃과 같고, 가운데에 흰 기운이 있어 진하게 맺혀서, 떨어지는 것이 진주와 같았다.”고 하니, 듣는 자들이 비난하기를, “진실로 그런 것이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문밖에 있는 명민만이 홀로 보고, 당 안에 있는 여러 사람은 보지 못하였을까.”라고 하였다. 회를 파하고는 수양 대군이 경찬회를 그림으로 그리고, 또 계문(契文)을 지어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벌여 써서 축(軸)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으니, 주서 성임도 참여하였다. 수양 대군이 말하기를, “너는 공자(孔子)의 도(道)와 석가(釋迦)가 누가 낫다고 이르느냐.”라고 하니, 성임이 대답하기를, “공자의 도는 내가 일찍이 그 글을 읽어서 대강 그 뜻을 알거니와, 석씨(釋氏)에 이르러서는 내가 일찍이 그 글을 보지 못하였으니, 감히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매, 대군이 말하기를, “석씨의 도가 공자보다 나은 것은 하늘과 땅 같을 뿐만 아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비록 불사르고 갈아 없애려 해도 베풀어 할 곳이 없다’ 한 것은, 이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佛堂成 設慶讃會 凡五日而罷 佛堂制作 窮極侈麗 金珠眩目 丹靑耀日 以絳綃裁縫被楹 謂之柱衣 以防汚毁 刻香木爲山 安黃金佛三軀于其中 其金佛 安平大君嘗監鑄于誠寧大君第 令近仗具冠帶 如衛大駕儀輿入于內 親賜觀覽 然後安于佛堂 其築外垣時方凍洌 垣之內外 燃炭以溫之 須臾而燥 宗親大君諸君爭設日齋 惟恐或後 議政府左參贊鄭苯兵曹判書閔伸提調其役 皆賜毛衣 李命敏以督役 超資授職 苯伸初以政府六曹隨例諫諍 及承監督之命 務極奢侈 以稱上意 識者譏之 及作會 命都承旨李思哲 先期致齋于其所 統察諸事 又令各司長官親監供給饌品 皆內廚饔人所辦 與御膳無異 又供外僧及社長於佛堂外乾川 一日所供 不下七八百人 所費米二千五百七十餘石 爲製新曲 被之管弦 樂器皆令新造 以工人五十舞童十人預習之 用以供佛 謂之音聲供養 鍾磬梵唄絲竹 聲聞大內 苯伸思哲朴堧金守溫雜於群僧 踴躍周匝 不徹晝夜 汗出渾身 略無倦色 命敏與一宦者宣言 方精勤時 出門顧見 舍利放光 光如火焰 中有白氣 濃結滴落 若眞珠然 聞者譏之曰 誠有是歟 何故在門外命敏獨見 而堂內衆人 未之見也 會罷 首陽大君圖慶讃會 又製契文 列書與會人名 作軸分與之 注書成任亦與焉 首陽大君語曰 汝謂孔子之道 與釋迦孰優 任曰 孔子之道 吾嘗讀其書 粗知其義 至若釋氏 吾不嘗見 其書未敢知也 大君曰 釋氏之道過孔子 不啻霄壤 先儒曰 雖欲挫燒舂磨, 無所施 此未知其理而妄言者也)

■세종 31년(1449) 11월 1일.(세자의 병으로 약사재·수륙재를 행하게 하다)

수양대군 이유·도승지 이사철에게 명하여 약사재(藥師齋)를 불당에서 행하게 하니, 병조 정랑 김수온이 이에 따르고, 안평대군 이용에게 수륙재를 대자암에서 행하게 하니, 소윤 정효강이 이에 따랐다. 수온은 간승(姦僧) 신미의 아우이었다. 몹시 불도를 좋아하여 깊이 그 학설을 믿어 왔고, 항상 말하기를, “만일 불경을 읽어서 그 뜻을 얻으면, 『대학』·『중용』은 찌꺼기에 불과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효강은 천성이 사특하고 괴팍하여 부처를 독실히 너무 좋아하였다. 길에서 중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공경하기를 다하였는데, 김수온과는 입술과 이처럼 서로의 관계가 밀접하였으므로, 모든 불사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들을 임명토록 하였다.(命首陽大君瑈都承旨李思哲 行藥師齋于佛堂 兵曹正郞金守溫從之 安平大君瑢行水陸齋于大慈菴 少尹鄭孝康從之 守溫 姦僧信眉之弟也 酷好佛 深信其說 恒言曰 若讀佛經得其旨 則大學中庸 特粗粕耳 孝康性傾邪剛愎 好佛甚篤 道見僧則必下馬致敬 與守溫爲唇齒 凡有佛事 必命之)

4.2. 불교 의식과 궁중 음악의 자료적 가치

소(疏)로 기록된 주소(註疏)에는,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고 사리의 출현을 기원하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부처님께 예배하기 위한 도량(道場)을 건설하면서, 부처님을 뵙는 의식에서 삼보(三寶)에게 공양하고 회향하는 절차와 찬송 및 참회의 글들은 한 편 한 편이 훌륭한 시문학이다. 이 역시 불교 가송의 뛰어난 작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불찬(諸佛讚)이나 삼보찬(三寶讚)의 찬시는 게송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 중의 1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眉細初疑柳葉靑 又驚新月暮天生
假饒騪巧吳王筆 畵也元來畵不成
눈썹 가늘어 처음엔 푸른 버들잎인가 의심하고
또 초승달이 저녁 하늘에 돋음에 놀라다.
교묘한 오왕의 붓을 빌린다 해도
그림이라 원래 그림으론 이룰 수가 없네.
이는 작관이동발시언(作觀已同發是言)의 주소 아래에 있는 수십 편 게송의 일부이니, 부처님의 32상호(相好)의 하나인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을 찬미한 것이다. 1수의 시로 독립시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이 항에 있는 염언(念言)의 십 수 편이 모두 이러한 수준 높은 작품이니, 이것만으로도 연작의 장편시라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또 주목되는 것은 세종이 직접 신성악곡(新聲樂曲)을 지었으니, 앙홍자지곡(仰鴻慈之曲)등 7곡이고, 악장 9수를 지었으니 귀삼보(歸三寶) 등이다.
常住十方界 無邊勝功德
大捨大慈悲 廣爲衆生益
歸依至心禮 消我顚倒業
항상 시방세계에 머무니, 가없는 좋은 공덕
큰 희사와 큰 자비로, 널리 중생에 이익이 되니
지극한 마음의 예로 귀의하여, 나의 전도된 업을 소멸시키소서.
이는 귀삼보의 악장이다. 악장의 형식이 원래 시이니 여기서도 시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사리영응기』에서 군왕의 문학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본 〈사리영응기〉의 말미의 시는 전형적 게송(偈頌)이니, 작자 김수온의 게송문학이 추가되는 셈이다.
새로 지은 악장을 가지고 찬양의 음악을 알리게 하여 행사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궁중음악의 실물을 보인 셈이어서, 조선조 음악의 산 기록으로 남게 된 좋은 자료이다.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는 이가 45인이라 했으니 45인조의 관현악인 셈이고, 그 때 등장하는 악기의 하나하나가 다 열거되어 있어 조선 초기 악기의 실상을 살피기에도 좋은 자료이다. 화동(花童)이 10인이니 의식에 올리는 꽃이 10가지인 셈이다.

4.3. 정음 표기의 인명(人名)

본문이 끝나고 4언의 장시(長詩)로 마무리한 뒤에, 그 말미에 ‘정근입장인명(精勤入場人名)’이 있어, 당시 이 경찬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이 인명의 기록에는 몇 가지의 흥미로운 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총 261명인데 기록의 순서가 승려 52명, 대군이 6명, 일반 관리가 203명이니, 이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첫째, 불교적 행사인 이 간행 사업에 참여한 인명을 기록함에 있어서 왕족인 대군보다도 사업의 주체인 승려를 앞세웠다는 것은 사리(事理)를 분명히 한 당시의 사회적 질서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것은 불교적 행사이기에 불교를 앞세웠다는 단순한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유교적 이념에 근거한 당시의 정명적(正名的) 주021) 정명(正名):
명분을 바로 세운다.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 “자로가 여쭙되,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대접하여 정치를 하려 하면 선생님은 무엇을 우선하시겠습니까. 공자 말씀하시되 ‘반드시 명분을 바룰 것이다. ……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리롭지 않고, 말이 순리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지 않고, 예악이 일지 못하면 형벌이 적중되지 않고, 형벌이 적중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수족을 둘 데가 없다.’ 하시다.” 하였다.(子路曰 衛君待子爲政 子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 名不正則 言不順 言不順則 事不成 事不成則 禮樂不興 禮樂不興則 刑罰不中 刑罰不中則 民無所措手足)
사고를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47명의 이름이 정음으로 표기된 점이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는 이들의 이름이 한자로 표기될 수 없는 우리 고유어 호칭이었기 때문이지만,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이라면 이런 경우에 한자의 차음으로 표기(이두식 표기)하였던 것이다. 이 책의 인명 표기는 바로 세종이 정음을 창제한 근본적 취지에 부합되는 것이어서 매우 의의가 깊다 하겠다.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吾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라 말한 바와 같이 백성의 ‘말’을 기록하려는 군왕의 뜻에 바로 부합하는 좋은 실례이다. 그간의 이 『사리영응기』에 대한 고찰이 주로 정음 표기의 인명에 대한 어학적 고찰에 기울었으나, 주022)
안병희(安秉禧), 「초기 한글 표기의 고유어 인명에 대하여」, 『언어학』2, 1977. 서울대학교. 안병희, 「중세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 연구」, 『규장각』3. 서울대학교도서관. 정상훈, 「갑인자 사리영응기에 대하여」, 『동원론집』 제7집. 동국대학교 대학원.
필자는 그보다는 ‘말’의 기록을 정음의 실용적 수단으로 삼았던 창제자의 실험 정신이 정확히 반영된 것이라는 점에 더 무거운 의미를 두고 싶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록된 이름이 ‘문자적 이름으로서의 명칭(名稱)’이 아니고, ‘언어적(정음적) 부름 수단으로서의 호칭(呼稱)’이었다는 점이다. 조심스러운 추론이기는 하나, 여기에 정음으로 표기된 인물들이 주로 하급 관리임을 고려한다면, 하층민에게는 기록 대상으로서의 문자적인 이름인 명칭은 필요하지 않았고, 부름 수단으로서의 언어적 호칭만이 통용되었던 당시의 풍속을 반영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정음 호칭을 기록하면서도 개개인의 성(姓)은 한자로 기록하고 활자도 본문의 크기와 같이 했음은 성(姓)은 씨족 공동의 문자적 명칭인 개념을 지닌 대상이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여기서도 유교의 명분론을 중시하였던 조선조 사회의 질서 의식을 엿보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음으로 표기함으로써 한자로는 정확히 표기할 수 없는 이름, 곧 이것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대로 정확하게 발음해야 그 사람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면에서, 정음이 한자보다 매우 주도면밀한 문자임을 실험하고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이두로도 족하다는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의 상소를 대하면서 새 글자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계기를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다분히 세종의 의중이 표출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47명의 직함 중 대부분은 상림원 급사(上林園給事)인데, 상림원은 궁중의 정원을 맡은 관서의 이름으로, 세조 4년에 장원서(掌苑署)로 개칭이 된다. 상림원 사정(司正)이 7품이고 급사(給事)는 전직(殿直)이나 섭대부(攝隊副)와 함께 9품으로서, 최하위의 군직(軍職)이다. 그러니까 정음으로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궁중의 잡무를 맡은 하위직 인물이었던 셈이다.
『사리영응기』에 나오는 사람 중에서 정음으로 표기된 사람 47명의 이름을 모두 보이면 다음과 같다.
司協郞 前典樂署典律 臣 <인명 realname="">韓실구디
服勤副尉 前上林園司正 臣 <인명 realname="">朴검
服勤副尉 前上林園司正 臣 <인명 realname="">朴타내
服勤副尉 前上林園司正 臣 <인명 realname="">金올마내
調協郞 前典樂署副典律 臣 <인명 realname="">高오디
調協郞 前典樂署副典律 臣 <인명 realname="">李오마디
尙工副尉 上林園副司正 臣 <인명 realname="">薛쟈가
尙工副尉 行上林園副給事 臣 <인명 realname="">姜타내
典引郞 前掖庭署左班殿直 臣 <인명 realname="">河마디ᇰ
典引郞 前掖庭署左班殿直 臣 <인명 realname="">金타내
上林園給事 臣 <인명 realname="">金도티
上林園給事 臣 <인명 realname="">盧고소미
上林園給事 臣 <인명 realname="">車매뇌
前上林園給事 臣 <인명 realname="">姜리대
龍賁侍衛司 前後領攝隊副 臣 <인명 realname="">崔올미동
前上林園副給事 臣 <인명 realname="">林더믈
前上林園副給事 臣 <인명 realname="">金재
前上林園副給事 臣 <인명 realname="">金검불, 臣 <인명 realname="">劉은, 臣 <인명 realname="">梁오지, 臣 <인명 realname="">金구디, 臣 <인명 realname="">崔수새, 臣 <인명 realname="">咸디, 臣 <인명 realname="">金막, 臣 <인명 realname="">金막, 臣 <인명 realname="">龍오마디, 臣 <인명 realname="">姜관, 臣 <인명 realname="">權모리쇠, 臣 <인명 realname="">玄더대, 臣 <인명 realname="">石, 臣 <인명 realname="">姜, 臣 <인명 realname="">姜막, 臣 <인명 realname="">金, 臣 <인명 realname="">許우루미, 臣 <인명 realname="">田오마디, 臣 <인명 realname="">朴북쇠, 臣 <인명 realname="">金어리, 臣 <인명 realname="">閔막, 臣 <인명 realname="">金돌히, 臣 <인명 realname="">石눅대, 臣 <인명 realname="">李아가지, 臣 <인명 realname="">朴곰, 臣 <인명 realname="">姜타내, 臣 <인명 realname="">朴오마대, 臣 <인명 realname="">姜막, 臣 <인명 realname="">金거매, 臣 <인명 realname="">李쟈근대.
이 밖에 다른 사람들의 이름에서도 ‘方羅睺羅’와 같이 발음을 한자로 적은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우선 한자로 적을 수 있는 이름은 최대한 한자로 적으려고 했지만 한자로 표기하지 않았던 이름은 정음으로 쉽게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훈민정음 창제 이후 사람 이름을 정음으로 적은 문헌은 이 책이 처음이다. 참고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광해군 9년, 1617)에서는 한자 이름과 정음 이름을 나란히 병기한 것을 볼 수 있으니, 한자로 썼지만 더욱 확실한 이름을 적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명 realname="虫介">虫介벌개, <인명 realname="裴敬仝">裴敬仝배경동, <인명 realname="李石乙大">李石乙大니돌대, <인명 realname="李毛知">李毛知니모디, <인명 realname="良里加">良里加냥니가,
<인명 realname="卵乙同">卵乙同알동, <인명 realname="內隱伊">內隱伊논이, <인명 realname="裵鐵重">裵鐵重배텰듕, <인명 realname="金芿叱達">金芿叱達김늣달, <인명 realname="多勿">多勿다믈,
<인명 realname="張愁伊同">張愁伊同댱쉬동, <인명 realname="末今">末今말금, <인명 realname="仇叱非">仇叱非굿비, <인명 realname="李介未致">李介未致니개미티, <인명 realname="李召史">李召史니조이,
<인명 realname="建金伊">建金伊건쇠, <인명 realname="石乙含">石乙含돌함, <인명 realname="孫末叱世">孫末叱世손귿셰, <인명 realname="是加">是加시개, <인명 realname="金聆金">金聆金김녕쇠.
한자 표기가 정음 표기와 다른 것을 볼 때, 한자는 이두식으로 뜻을 표기하였고, 그 부분을 정음으로 표기하여 부르는 이름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정음이 얼마나 면밀한 글자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사리영응기』가 부르는 이름 그대로를 적은 것과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정음 표기는 이두식 표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니 이미 현실음과 괴리가 생겨 어색함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쓰여진 정음 활자는 『석보상절(釋譜詳節)』의 주석(註釋)에 사용하였던 활자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보아 두 책이 같은 시기에 주자소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이 책의 활자는 갑인자(甲寅字)인데, 이 갑인자는 세종 16년(1434)에 만든 동활자로서 진(晉)나라 위부인자(衛夫人字) 서체와 닮았다고 하여 일명 ‘위부인자’라고도 한다. 세종의 명에 의하여 지중추원사 이천(李蕆), 직제학 김돈(金墩), 직전 김호(金鎬), 호군 장영실(蔣英實), 첨지사역원사 이세형(李世衡), 사인(舍人) 정척(鄭陟), 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이 명나라 후기의 판본(『효순사실(孝順事實)』, 『위선음즐(爲善陰騭)』, 『논어(論語)』 등)으로 글자 본을 삼아 만든 활자이다. 경자자(세종 2년, 1420)보다 모양이 좀 크고 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것이 큰 글자와 작은 글자를 모두 합하여 20여만 자에 이른다. 이 갑인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개주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에 개주된 활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주조했다는 의미의 초주(初鑄)를 붙여 구별하는데, 이 초주갑인자로 찍은 책들은 다음과 같다.(손보기, 『세종시대의 인쇄출판』(1986),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학연의(大學衍義)』,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분류보주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 동국세년가(東國世年歌), 표제주소소학(標題註疏小學), 주문공교창려선생집(朱文公校昌黎先生集),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당유선생집(唐柳先生集),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전후집(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前後集),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 사여전도통궤(四餘纏度通軌), 칠정산내편(七政山內篇), 칠정산외편(七政山外篇), 시선(詩選), 동국정운(東國正韻),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석보상절(釋譜詳節),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 춘추경전집해(春秋經傳集解), 시전대전(詩傳大全),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 증간교정왕장원집주분류동파선생시(增刊校正王狀元集註分類東坡先生詩), 국어(國語), 태양통궤(太陽通軌), 수시력첩법입성(授時曆捷法立成), 오성통궤(五星通軌), 중수대명력(重修大明曆), 경오원력(庚午元曆), 교식통궤(交食通軌), 대통력일통궤(大統曆日通軌), 선덕십년월오성능법(宣德十年月五星凌法), 수시력입성(授時曆立成), 산곡시주(山谷詩註), 당시고취(唐詩鼓吹), 당시고취속편(唐詩鼓吹續編), 당송귀법(唐宋句法), 전한서(前漢書), 신간보주석문황제내경소문(新刊補註釋文黃帝內經素問), 소미통감집석(少微通鑑輯釋), 소학집주(小學集註),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어제시(御製詩),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영가진각대사증도가집(永嘉眞覺大師證道歌集), 좌익원종공신록권(左翼原從功臣錄券), 국조보감(國朝寶鑑),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동국지지(東國地誌), 진법(陳法),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능엄경발(楞嚴經跋), 북사(北赦),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어제시(御製詩),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표해록(漂海錄), 황화집(皇華集), 정선당송십가연주시격(精選唐宋十家聯珠詩格), 동문선(東文選), 문선(文選), 향산시초(香山詩抄), 시대문(詩大文), 서대문(書大文), 수계선생평점간재시집(須溪先生評點簡齋詩集), 후한서(後漢書).
또 하나 특기할 일은 정음 활자도 주조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석보상절』이나 『월인천강지곡』을 인쇄하기 위해 주조된 것인데, 한자는 이미 만든 갑인자를 썼고, 한글은 새로 만들어 보충한 것이다. 그래서 ‘초주갑인자 병용 한글활자’ 또는 ‘월인석보 한글자’라 일컫는다. 『사리영응기』의 정음표기 활자가 이 활자이다. 원본들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음의 표기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사리영응기 24장 앞뒤쪽〉

〈석보상절 권21, 1장 앞뒤쪽〉

〈월인천강지곡 상, 1장 앞뒤쪽〉

〈동국정운 권6, 40~41장〉

태종 3년(1403) 2월에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동활자의 주조를 명하였는데, 이때 수개월 걸려 완성된 활자가 계미자(癸未字)이다. 이 글자는 밀랍에 잘 꽂힐 수 있도록 그 끝을 송곳 모양으로 뾰족하게 만들어졌다. 그 후 세종은 세종 2년(1420)에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는데, 활자와 조판용 동판을 튼튼하게 만들어 서로 잘 맞도록 하여, 인쇄중 밀랍을 녹여 사용하지 않아도 활자가 움직이지 않아, 인쇄의 능률이 계미자보다 훨씬 증가하여 하루에 20여 장을 찍어냈다. 세종은 세종 16년(1434) 7월에 또다시 개주에 착수하여 큰 자와 작은 자의 동활자 20여만 개를 만들게 하였으니, 이것이 갑인자이다. 이는 글자체가 매우 아름답고 명정한 필서체이며, 이 갑인자에 이르러 활자의 네모를 평평하고 바르게, 그리고 조판용 동판도 완전한 조립식으로 튼튼하고 정교하게 개조하였기 때문에 대나무만으로 빈틈을 메워 조판해 인쇄하는 단계로까지 발전시켜 하루의 인출량이 40여 장으로 대폭 증진되었다.
갑인자는 선조 13년(1580)에 재주할 때까지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어 전해지고 있는 인본이 가장 많다. 이 활자는 정교하고 아름다워 조선 말기까지 보주 또는 개주되면서 주용되었다. 네모난 해서체는 칼로 깎은 듯하여 계미자와 경자자에 실증을 느낀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크고 아름다운 붓길대로 나타내는 서체를 따서 갑인자 활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기술상으로도 경자자보다 옆면을 비스듬하게 등쪽에서 좁혀서 만들어 밀랍을 쓰지 않고 판을 짤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다. 인쇄술의 능률이 한 단계 뛰어 높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우리글을 창제하고 처음으로 한글 활자를 찍어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세종 29년(1447)에 인출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세종 30년(1448)에 인출된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한글이 모두 갑인자로 찍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영응기』를 포함해서 모두 4가지의 책에서 초주갑인자 한글 활자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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