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기를 바라는 것. 통합형 어미 ‘-ㄴ’은 명사구 보문 구성의 ‘-ㄴ#(의존명사)+(보조사)’에서 단어 및 형태소 경계가 소멸되어 생성됨. 청원 구문의 동사[願-/라-/請-/빌- 등]와 염원(念願)의 의미가 있을 때만 통합될 수 있다. 이 구문은 선·후행문 전체가 직접화법을 구성하는 형식으로 구성되며 ‘願’ 등의 주체는 항상 화자 자신이다.
말아야 할 것이다. 말지어다. 어간 ‘말-’에 어미구조체 ‘-올디어다’의 통합형. ‘-ㄹ디어다’는 모음으로 끝난 동사 어간에 붙는 종결 형식. ‘마땅히 그리하여라’ 정도의 뜻을 명령조로 장중하게 나타냄. 15세기 원각경언해(1465) 이전 문헌까지는 ‘-(오/우)-ㅭ디어다’ 또는 ‘-(오/우)-ㄹ띠어다’로 표기되었음. ¶ 깃븐 내디 마디어다〈몽법18〉. 校正홀띠어다〈법화1:10ㄴ.〉
비방하여[誹謗]. 남을 비웃고 헐뜯어서 말하여. 구결문 “亦乃謗讟(역내방독)야”에서 ‘謗讟(방독)야’에 대한 번역. 대부분 한자어 ‘誹謗’으로 반영했으나, 여기서 한글로 ‘비’이라 옮긴 것이 색다르다. 특히 ‘謗’은 중국음운학 36자모에서 순중음 ‘滂’[pʰ]모 계열자인데 이를 ‘’으로 반영한 것은 설명이 쉽지 않다. ‘說法’에 대한 ‘셜웝’(번박,상75)과 함께 역사적 설명이 필요하다.
좋은 일을 함으로써 쌓이는 것이 공(功)이며, 그런 수행을 통해서 얻어진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공(功)은 복되고 이로운 결과를 가져오며, 선행(善行)의 덕은 공을 닦음으로써 얻어진다.
이 혜아리디 몯리라
Ⓒ 언해 | 신미 / 1467년(세조 13) 월 일
이러한 미묘(微妙)한 뜻이 비록 모든 사람의 경지이나, 만약에 예로부터 반야(般若)의 종지(種智)를 심은 대승(大乘) 근기(根器)의 사람이 아니면 능히 한 생각에 바른 믿음[信]을 내지 못할 것이니, 어찌 한갓 믿지 않을 따름이겠는가? 또 비방(誹謗)하여 도리어 무간옥(無間獄)을 끌
(=불러들일)
사람이 자주 있을 것이니, 비록 믿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한 번 귀에 지나게 하여 잠시(暫時)라도 인연을 맺으면
‘짓는다[作]’는 뜻. 몸[身]·입[口]·뜻[意]으로 짓는 동작과 말과 생각하는 온갖 움직임과 그 세력을 말함. 개인은 이 업(業)으로 말미암아 육도에 윤회하게 되며, 여러 사람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에 의해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된다고 한다. 따라서 착한 업은 착한 결과를, 악한 업은 악한 결과를 가져온다.
번. 차례. 한문 “時或一思(시혹일사)컨댄”에서 ‘一思’에 대한 보충 번역에 나타난 것이다. 중세국어에서 ‘디위’는 ① 번. 어떤 일의 횟수나 차례, ② 지위(地位), ③ 경계(境界) 등을 나타냈는데, 여기서는 의존명사로 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이 經을 마아홉 디위 닑고 마아홉 燈의 블 혀고〈석상9:32ㄴ〉. ② 學地 호 地位라〈월석12:18ㄱ〉. ③ 녜는 楊州 올히여 디위예 新都 形勝이샷다〈악장가사: 신도가.〉
맞는 것이다. 한문 “纖芥投針(섬개투침)”의 문면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맞다, 맞히다’ 정도의 의미로 이해된다. 한문 주석서들에서는 ‘投針’을 ‘(바늘에) 꽂히는 것’으로 풀이하나, 반드시 그렇게 풀이하지 않더라도 불가능한 상황을 표현하므로 구결문과 언해문을 충실히 따라 풀이한다.
스스로 굴복하여 물러남을. 물러나는 마음을. 한문 “若自生退屈(약자생퇴굴)”에서 ‘退屈’에 대한 번역. 보살수행에서 흔히 퇴굴심을 일으키는 3가지는 ① 부처님의 지혜가 광대 심원(深遠)하다 함을 듣고, ② 6바라밀의 행이 수행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③ 번뇌장·소지장을 버리고, 대열반·대보리의 깨달음이 얻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퇴굴(退屈)하는 마음을 낸다고 한다.
빨라. -[速]+아(어미). 오늘날의 ‘르’불규칙과 같은 활용을 하는 용언은 15세기 문헌에서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누르다[壓], 브르다[號], 모다[不知], 므르다[退], 흐르다[流], 다[乾/渴] 정도. 이 밖의 대부분은 ‘ㄹ·ㅇ’형으로 활용한다(올아, 달아 등). ¶눌러〈석상3:14ㄱ〉. 블러〈석상3:7ㄱ〉. 몰라〈용가85〉. 믈러〈월석10:45ㄴ〉. 흘러〈훈언1ㄴ〉. 라〈능엄6:86ㄱ.〉
반드시[須]. 구결문 “切須在意(절수재의)라”에서 ‘切須’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어떤 내용을 더욱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정도의 뜻으로 이해된다. 15세기 문헌에서 한자 ‘須’에 대한 번역으로는 ‘반기’를 비롯하여 ‘반시(두초24:32)·반개(두초25:2)·모로매’ 등으로 대역되었다.
데 두며 모 데 두라
Ⓒ 언해 | 신미 / 1467년(세조 13) 월 일
어려운
(=위태로운)
데에 다다름에 미쳐 뉘우쳐도 이익(利益)이 있는 바가 없을 것이니, 원컨대 모든 도(道) 닦는 사람은 방일(放逸)한 마음을 내지 말며 탐욕[貪]과 음욕[婬]에 집착하지 말고 머리에 〈붙은〉 불을 구하듯이
(=끄듯이)
하여 살피기를 잊지 말라. 덧없는 세월은 빨라 몸은 아침이슬 같고 목숨은 저녁에 비치는 서녘의 해
수고로운. 고통스러운. 오늘날 ‘수고’는 기원적으로 한자어 ‘受苦’에서 비롯된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일을 하느라고 힘을 들이고 애를 씀. 또는 그런 어려움”을 뜻하는 말로 국어화가 진행되었다. 여기 ‘受苦’는 ‘受(받을 수)·苦(아픔/고통 고)’로 한자의 본래 의미대로 사용된 것이다.
업인(業因)의 결과. 행업(行業)으로 인하여 받는 결과. 전에 행동했던 선업이나 악업에 의해 나중에 그 대가로서 받는 즐거움이나 고통 등의 결과. 인간 또는 동물로 태어나는 것과 같은 과보의 총체적인 양상은 총보(總報)이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남녀나 빈부의 차별이 있는 것 같은 과보의 개별적인 양상은 별보(別報)라 한다.
받거늘. 받았는데 (하물며). ‘-곤(온)’은 ‘…-곤(-온)…며…녀(-려, -리오)’와 같은 문장 구조와 호응하는 것이 원칙. ¶너비 善根 시므디 아니닌 일훔도 듣디 몯리온 며 보미녀〈영험5〉. 여기서는 “ 어루…快樂 受곤 며…暫時나 信 내야 일운 功德이”와 같은 문장 구조로 표현된 것이다.
가장[最]. 15세기 국어에서 ‘’은 “여러 형제나 자매 중에서 맨 위”를 뜻하는 ‘맏이’[伯]의 뜻으로 ‘’[最]와는 구분되었으니, 음절 말음 위치에서 ‘ㄷ-ㅅ’의 차이로 뜻이 달라지는 최소대립어. ¶去聲은 노 소리라〈훈언14ㄴ〉. 내 아리 비록 디라도〈월석2:5ㄴ.〉
다른 사람에게 물질 등을 베풀어 주는 것. 6바라밀의 하나. 보시의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분류가 있다. 재(財)·법(法) 2종 보시를 비롯하여, 3, 4, 5, 6, 8종 등으로 나뉜다. 그 중에서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 등으로 나누는 3종 보시가 가장 대표적이다. ‘무외시’는 계(戒)를 지녀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는 것을 말한다.
성자(聖者)가 도달하는 4가지 단계의 경지. 번뇌가 단절되어 가는 경지를 넷으로 구분한 성자의 단계적 지위. 소승불교에서 구분하는 성자의 4단계. 과(果)는 목표에 도달한 경지. 4단계는 예류(預流)·일래(一來)/사다함, 불환(不還)/아나함, 아라한(阿羅漢) 등을 말한다.
무량무변하건마는.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한계(限界)가 없이 무한하건마는. ‘-마’은 앞의 사실을 인정을 하면서도 그와 어긋나는 상황을 나타내는 보조사. 고려가요에 ‘-마’이, 15세기에는 일반적으로 ‘-마’이, 16세기에는 ‘-마’이 사용되었다. ¶西京이 셔울히마〈서경별곡〉. 히 쳐비 이셔야 자내 미나 편리언마 노여 가〈청주간찰29:5.〉
얻은. 찾은. 여기서 동사 ‘얻다’는 “거저 주는 것을 받아 가지다.”의 의미보다는 “구하거나 찾아서 가지다.”와 같이 주체의 적극적인 행위의 결과로 해석되는 것이 적절하다. 한문 “所獲功德니”에서 ‘所獲(소획)’에 대한 번역. 얻-[獲]+오(대상활용의 선어말어미)+ㄴ(관형사형 어미).
더하니[加]. 문맥상 “더 높으며 귀하니” 정도의 뜻. 15세기 문헌에는 ‘더으-’형이 일반적이고 ‘더-’형이 극소수이다. 동사의 일반형 ‘-다’형을 기준으로 삼아 점차로 ‘더으다’가 ‘더다’로 바뀌어감. 유추(類推)에 의한 변화. ‘다다’[盡]가 ‘다다’로 바뀐 것도 같은 과정으로 이해된다.
티끌이. 드틀[塵]+이(조사). ‘티끌’은 티와 먼지를 통틀어 이르는 말. 15세기 문헌에는 ‘드틀’과 ‘듣글’이 공존하였는데, 둘은 형태는 다르나 동일한 어원에서 변화했을 것으로 보이는 한 묶음의 단어 즉 쌍형어(雙形語)라 할 수 있다. ¶다 아 듣글 라 듣그레 劫을 혜여도〈법화3:86ㄴ.〉
반드시. 구결문 “切須在意(절수재의)니라”에서 ‘切須(절수)’에 대한 번역. 반드시. 응당(應當). 마땅히.
데 둘디니라
Ⓒ 언해 | 신미 / 1467년(세조 13) 월 일
〈앞의 단락에 대한 의미를 어떤〉 비유로도 조금도 말하지
(=설명하지)
못할 것이니, 경(經)에 이르시되 “만약에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있는 칠보(七寶)로써 저
(=그)
세계에 사는 중생(衆生)에게 보시(布施)·공양(供養)하여 모두 충만히 하고, 또 저
(=그)
세계에 사는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사과(四果)를 얻게 하면 그 공덕(功德)이 한량없고 끝이 없다.” 하건마는 한 번 밥 먹을 〈정도로 잠깐의〉 때이지만, 이 법(法)을 정히
(=바르게)
생각하여 얻은
(=찾은)
공덕(功德)만 같지 못하다고 하심과 같으니, 이런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의 이 법문(法門)이 가장 높으며 가장 귀하여 모든 공덕(功德)에 비유하는 것으로도 미치지 못할 것이로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시되, “일념 정심(一念正心) 이것이 〈곧〉 도량(道場)이라, 항하사 〈같은〉 칠보탑(七寶塔)을 만드는 것보다 더하니, 보탑(寶塔)은 결국에
(=끝에는)
무너져 티끌이 되거니와 일념(一念) 정심(正心)이야말로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이다.” 하셨으니, 원컨대 도(道) 닦는 모든 사람은 이 말을 찾아서 맛보고 반드시 마음속에 둘지니라
어느. 오늘날 ‘어느’는 표제어처럼 관형사로만 쓰이나, 중세국어에서는 ① 관형사, ② 부사(어찌), ③ 대명사 등 3가지로 쓰였다. ¶① 어느 날오[何日]〈두초21:16〉. ② 어느 다 리〈월곡1〉.③ 어늬 브린 어늬 지빈 어늬 왼 몰라〈월석12:26ㄱ.〉
모양을. 구결문 “其狀(기상)을”에 대한 번역. 15·16세기에 ‘얼굴’은 ‘형체(形體)’ 또는 ‘모습’이라는 뜻. 근대국어 자료 동문유해(1748)에 ‘얼굴’[容顔](상18)로 쓰인 예가 나타나며, 그 후로 점차 “안면·낯” 정도의 뜻으로 의미 영역이 축소되어 오늘날에 이름.
맞추어. 둘 이상의 대상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여 살펴. 구결문 “其功(기공)을 可驗(가험)이라”에서 ‘驗(험)’에 대한 번역으로, “검증·검사·증험·증명하다” 정도의 뜻을 나타낸다. 마초-[驗]+아(어미)→마촤. 15세기 문헌에는 ‘마초아’가 절대 우세하며, ‘마촤’는 활음화에 의해 [maʦʰwa]로 실현됨을 표기에 반영한 것이다. 어간 ‘마초-’는 ‘맞-’에 접미사 ‘-호-’가 결합한 파생어. 15세기 말까지의 자료에서 ‘마초아’는 90여회, ‘마촤’는 1회로 나타난다.
무리가. 물[流·衆]+이(주격조사). 15·16세기 문헌에서 ‘물’은 ‘무리’[衆·流]를, ‘믈’은 ‘물’[水]을 뜻하는 말로 구별되었으며, 훈민정음 초기문헌에서 ‘衆’의 뜻을 나타내는 것에 ‘므리’형도 공존한다. ¶特은 므리예 로 다씨라〈석상6:7ㄱ〉. 이것의 원순모음화형, 또는 ‘물〉무리’로 재구조화된 ‘무리’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에 나타난다. ¶ 쥐 무리예 욕 배 되디 몯 거시라〈동신,열1:4ㄴ.〉
비슷하게. 즉-[髣髴]+이(부사 파생접미사). 15세기 문헌에는 ‘즛-’형도 나타나는데 둘은 쌍형어라 할 수 있다. ‘즛-’형이 일반적이며, ‘즉-’형은 고립적이고 16세기 문헌에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일희 자최 즛 狼迹山이라 니〈월석4:27ㄱ〉. 汲黯 닌 즉도다〈번소9:41ㄱ.〉
야려
Ⓒ 언해 | 신미 / 1467년(세조 13) 월 일
또 세간(世間)에 행함이 있는 일은 그 모양
(=형상)
을 가히 볼 수 있으며, 그 공(功)을 가히 맞추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한 가지 일을 얻고도 쉽지 않음을 기리거니와
(=찬탄하거니와)
, 우리의 이 심종
(心宗=마음)
은 모양을 가히 볼 수 없으며, 모습을 가히 볼 수 없어 언어의 길
(=표현)
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없으므로 천마(天魔)·외도(外道)가 헐뜯을 문(門)이 없으며, 석범
개구리가. 구결문 “蛙(와)ㅣ”에 대한 번역. 머구리[蛙]+Ø(무형의 주격조사). ‘개구리’는 민물이나 땅 위에서 사는 동물로, 여기서는 상식의 가르침에 구속되어 있는 식견이 좁은 사람들[범부(凡夫)]을 비유함. ¶우믌 머구리려 바 니디 몯호〈법화3:156〉. 蟼 머구리 黽 머구리 蛙 머구리 와 〈자회,상12〉. 표준어 ‘개구리’에 대응되는 함경방언. 신증유합에 오늘날의 ‘개구리’에 해당하는 ‘개고리’가 나타난다. ¶蛙 䵷 개고리 와〈신유,상15ㄴ.〉
넓음을. 넓은 것을. 한문 “滄海之闊(창해지활)”에서 ‘闊(활)’에 대한 번역. 넙-[廣·闊]+움(명사형어미)+을(목적격조사). ‘넙-〉넓-’으로 재구조화한 시기는 18세기 여사서언해(1736)에 ‘널펴’(서4)가 쓰인 것으로 볼 때 18세기에 들어서의 일일 것으로 추정된다.
여우가. 한문 “野干(야간)이”에 대한 번역. 들여우[野狐]가. 여[狐]+이(주격조사). 모음 조사와 연결될 때는 ‘여’의 말모음 ‘ㅡ’가 탈락한다. ¶의갗爲狐皮〈정음해례:종성해〉. 여기 사자(獅子)와 대비된 ‘여우’는 아직 불법(佛法)을 깨닫지 못한 무리, 또는 성문(聲聞)·연각(緣覺) 등과 같이 아직 소승에 머물러 있는 무리를 비유한다.
수지하는 이는. 법을 받아서 잊지 않고 지니고 실천하는 사람은. ‘수지’의 참뜻을 이해하려면,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 중 간경, 독경/독송 등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간경(看經)은 경전을 읽고 그 뜻을 새기는 것을, 독경(讀經) 또는 독송(讀誦)은 경전을 읽는 것을 뜻한다. ‘독경·독송’에 비해 ‘간경’을 으뜸으로 치는 것은, 경전의 내용을 잘 파악하며 소화해 내며 읽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간경은 참선·염불과 함께 유력한 수행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수지(受持)는 ‘간경’처럼 이해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 즉 신(身=몸)·구(口=말)·의(意=생각)까지 ‘나’라는 존재의 모두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믿는 것은 물론이고 실천도 함께 한다는 뜻을 내포하므로 ‘간경’보다 몇 걸음 앞서 있는 것이다.
만든. -[作]+ㄴ(관형사형어미). 15세기 일반형은 ‘-’이고, ‘-’은 이와 쌍형어의 관계. 16세기에는 ‘-’형도 나타난다. ¶담 답야 오 보육 라[直答曰作脯라]〈소언6:72ㄱ〉. 宗諤의 바에 난이라[宗諤所制也ㅣ니라]〈소언6:101ㄱ.〉
수승한 지혜가 있어 수행을 능히 감당할 만한 기류(機類). 지혜나 직관력이 매우 좋아서 반야류의 경전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근기가 있는 사람. ‘근기’는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받고 교화를 입을 수 있는 소질과 수행을 통해서 얻은 능력.
性이니
Ⓒ 언해 | 신미 / 1467년(세조 13) 월 일
슬프다. 우물에 사는 개구리가 바다의 넓음을 어떻게 알며, 여우가 사자의 울음
(=포효)
을 어찌 능히 행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알아야 할 것이로다. 말법(末法) 세상에서 이 법문(法門)을 듣고 쉽지 아니한 뜻을 내어 신해(信解)를 수지(受持)하는 사람은 이미 무량겁(無量劫) 동안에 많은 성인(聖人)을 섬기어 많은 선근(善根)을 심고 반야(般若)의 정(正)한 인
심은 것이다. 시므-[種]+니+라(어미). 자음 어미 앞에서는 어간 ‘시므-/시-’형이, 모음 어미 앞에서는 ‘-’형이 선택되었다. 충청·전라·제주 방언에 남아 있는 ‘싱구-’는 ‘심ㄱ-’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됴 根源을 시므고〈석상19:33ㄴ〉. 根源을 기피 시니〈석상20:50ㄴ〉. 됴 根源을 기피 심거〈석상21:57ㄴ.〉
‘큰 수레’라는 뜻으로, 보살도의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적 흐름. 자기 혼자만의 해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모든 중생들을 한꺼번에 태우고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저 언덕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함. 이타(利他) 구제의 입장에서 널리 인간 전체의 평등(平等)과 성불(成佛)을 이상으로 삼고, 그것을 부처의 가르침의 참다운 대도(大道)임을 주장하는 교리.
에 신심(信心)을 내는 사람은 반드시 알아라. 〈그 사람은〉 이미 무량불소(無量佛所)에 많은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다.”라고 하셨으며, 또 말씀하시길, “대승(大乘)을 발한 사람을 위하여 말하고 최상승(最上乘)을 발한 사람을 위하여 말하리라.” 하셨으니, 원컨대 도(道)를 구하는 모든 사람은 겁을 내어 약한 마음을 내지 말고 반드시 용맹스러운 마음을 발하라
우리의 셈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 비유하면 둘레가 40리쯤 되는 바위가 3년에 한 번 씩 내려오는 천사의 부드러운 옷깃에 스치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 ‘劫엣善因’은 [[劫엣][善]因]의 구성으로 ‘劫엣因’은 “겁(劫) 동안에 쌓은 인(因)” 정도의 의미를 나타낸다.
(-을) 달게 여겨. 달게 여기고. 구결문 “甘爲下劣(감위하열)야”에서 ‘甘(감)’에 대한 번역으로, 한자 ‘甘’의 뜻 중에서 “달다·달게 여기다”를 참고할 만하다. 현대어로 옮기기 어려운 부분으로, 한문 주석서들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풀이가 일정치 않다. 문맥상 “자족(自足)하다” 정도의 의미가 느껴진다. 15세기 자료에는 “…을 맛들-”식으로 나타나며, 현대어로는 “-을 좋아하거나 즐기다” 정도의 의미가 된다. ¶노 거나 婬亂 맛들어나 수으를 즐기거나〈석상9:37ㄱ.〉
어렵게. 어렵게. 어-[難]+이(부사화 접미사). 표기법사의 관점에서는 정음 초기문헌에는 ‘어려’로 표기하다가, 능엄경언해(1461)부터는 ‘어려이’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사오나’와 마찬가지로 부사 파생접미사 ‘-이’와 결합할 경우에 이 책(사법어 포함)에만 특이하게 나타나는 예외적 표기. ¶어려〈월석, 서23ㄴ〉. 어려이〈능엄1:86ㄱ.〉
삼가야 할 것이니라. 삼가-[愼]+아(선어말어미)+ㄹ디니라(통합형어미). 여기 당위법(當爲法)은 ‘-(오/우)-ㄹ디니라’로 표현되었지만, 원각경언해(1465) 이전 문헌에는 ‘-(오/우)+ㅭ+디니라’ 또는 ‘-(오/우)+ㄹ+띠니라’로 표현되었다. 선행 어간이 ‘ㅏ’인 경우에는 ‘-오/우-’의 또 다른 이형태 ‘-아-’가 통합하여 외형상 나타나지 않았다. ¶愼 삼갈 신〈광주천자13ㄱ〉. 일후믈 알면 一切世間앳 天人이 禮數야 절디니라〈석상21:48ㄴ〉. 홀 싸미 반기 이 나갈띠니라〈법화6:119ㄱ〉.
할진댄. 할 것 같으면. ‘X(오/우)ㄹ딘댄’은 “Xㄹ 것이면” 정도의 뜻으로, 앞 절의 일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뒷 절 일의 조건이나 이유, 근거로 삼음을 나타내는 연결어미. 1464년까지 성립된 문헌에는 ‘-(오/우)ㅭ딘댄’ 또는 ‘-(오/우)ㄹ띤댄’으로 표기되었으나, 1465년 원각경언해부터는 ‘ㆆ’과 ‘각자병서’ 폐지로 표제어처럼 적었다. ¶이 말옷 虛티 아니딘댄 내 두 히 도로 녜 리라〈석상20:19ㄴ〉. 正宗 通達코져 홀띤댄 모로매 몬져 序分을 굘띠니〈법화1:16ㄴ〉.
가죽주머니를. 가죽포대를. 갗[皮]+[囊.주머니]+(목적격조사). ‘가죽주머니’[被囊]는 사람의 ‘육신·몸뚱이’ 즉 목숨(=생명)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한문 “放下皮囊(방하피낭)”에서 ‘皮囊(피낭)’에 대한 번역. 형태음소 ‘/갗/’을 연철하여 /갗/로 적을 수 있었겠으나,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 등 일부 문헌에만 적용됐고, 이 책에서는 15·16세기 국어 문헌의 보편적인 종성 표기법 ‘8종성가족용’ 방법에 따라 ‘갓’로 적었다. ¶의갗爲狐皮〈정음해례 종성해〉. 소내 갓신 잡고〈남명,상52ㄱ〉. 솔옷 든 지노라〈두초3:12ㄴ〉. 囊 〈자회,중7ㄴ〉. 漉水囊은 므레 거리 치라〈월석25:56ㄴ〉.
버릴지니라. 버려야 할 것이니라. 구결문 “放下皮囊(방하피낭)이니라”에 대한 번역. 리-[放下]+오+ㄹ디니라(어미구조체). 한문의 ‘放下(방하)’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집착을 버리고 해탈하는 일. 또는 집착을 일으키는 여러 인연을 놓아 버리는 일을 가리킨다. 수행자가 ‘보배’를 잡고자 한다면 생명을 버릴 정도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수행해야 함을 강조한 표현이다.
Ⓒ 언해 | 신미 / 1467년(세조 13) 월 일
이제 이미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면 손 비우고 돌아가는 것이 옳지 못한 것이니,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사람으로서 생이 끝나면)
만겁(萬劫)에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기
(=태어나기)
어려울 것이니, 청컨대 모름지기 삼가야 할지니라. 어찌 지혜로운 사람이 보배 있는 데를 알고도 도리어 구하지 않고 간난(艱難)함을 오래 원망하고 한탄하리요? 만약에 보배를 얻으려고
원(願):얻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기를 바라는 것. 통합형 어미 ‘-ㄴ’은 명사구 보문 구성의 ‘-ㄴ#(의존명사)+(보조사)’에서 단어 및 형태소 경계가 소멸되어 생성됨. 청원 구문의 동사[願-/라-/請-/빌- 등]와 염원(念願)의 의미가 있을 때만 통합될 수 있다. 이 구문은 선·후행문 전체가 직접화법을 구성하는 형식으로 구성되며 ‘願’ 등의 주체는 항상 화자 자신이다.
마롤디어다:말아야 할 것이다. 말지어다. 어간 ‘말-’에 어미구조체 ‘-올디어다’의 통합형. ‘-ㄹ디어다’는 모음으로 끝난 동사 어간에 붙는 종결 형식. ‘마땅히 그리하여라’ 정도의 뜻을 명령조로 장중하게 나타냄. 15세기 원각경언해(1465) 이전 문헌까지는 ‘-(오/우)-ㅭ디어다’ 또는 ‘-(오/우)-ㄹ띠어다’로 표기되었음. ¶ 깃븐 내디 마디어다〈몽법18〉. 校正홀띠어다〈법화1:10ㄴ.〉
비야:비방하여[誹謗]. 남을 비웃고 헐뜯어서 말하여. 구결문 “亦乃謗讟(역내방독)야”에서 ‘謗讟(방독)야’에 대한 번역. 대부분 한자어 ‘誹謗’으로 반영했으나, 여기서 한글로 ‘비’이라 옮긴 것이 색다르다. 특히 ‘謗’은 중국음운학 36자모에서 순중음 ‘滂’[pʰ]모 계열자인데 이를 ‘’으로 반영한 것은 설명이 쉽지 않다. ‘說法’에 대한 ‘셜웝’(번박,상75)과 함께 역사적 설명이 필요하다.
업(業):‘짓는다[作]’는 뜻. 몸[身]·입[口]·뜻[意]으로 짓는 동작과 말과 생각하는 온갖 움직임과 그 세력을 말함. 개인은 이 업(業)으로 말미암아 육도에 윤회하게 되며, 여러 사람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에 의해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된다고 한다. 따라서 착한 업은 착한 결과를, 악한 업은 악한 결과를 가져온다.
디위:번. 차례. 한문 “時或一思(시혹일사)컨댄”에서 ‘一思’에 대한 보충 번역에 나타난 것이다. 중세국어에서 ‘디위’는 ① 번. 어떤 일의 횟수나 차례, ② 지위(地位), ③ 경계(境界) 등을 나타냈는데, 여기서는 의존명사로 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이 經을 마아홉 디위 닑고 마아홉 燈의 블 혀고〈석상9:32ㄴ〉. ② 學地 호 地位라〈월석12:18ㄱ〉. ③ 녜는 楊州 올히여 디위예 新都 形勝이샷다〈악장가사: 신도가.〉
마조미라:맞는 것이다. 한문 “纖芥投針(섬개투침)”의 문면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맞다, 맞히다’ 정도의 의미로 이해된다. 한문 주석서들에서는 ‘投針’을 ‘(바늘에) 꽂히는 것’으로 풀이하나, 반드시 그렇게 풀이하지 않더라도 불가능한 상황을 표현하므로 구결문과 언해문을 충실히 따라 풀이한다.
믈루믈:스스로 굴복하여 물러남을. 물러나는 마음을. 한문 “若自生退屈(약자생퇴굴)”에서 ‘退屈’에 대한 번역. 보살수행에서 흔히 퇴굴심을 일으키는 3가지는 ① 부처님의 지혜가 광대 심원(深遠)하다 함을 듣고, ② 6바라밀의 행이 수행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③ 번뇌장·소지장을 버리고, 대열반·대보리의 깨달음이 얻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퇴굴(退屈)하는 마음을 낸다고 한다.
라:빨라. -[速]+아(어미). 오늘날의 ‘르’불규칙과 같은 활용을 하는 용언은 15세기 문헌에서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누르다[壓], 브르다[號], 모다[不知], 므르다[退], 흐르다[流], 다[乾/渴] 정도. 이 밖의 대부분은 ‘ㄹ·ㅇ’형으로 활용한다(올아, 달아 등). ¶눌러〈석상3:14ㄱ〉. 블러〈석상3:7ㄱ〉. 몰라〈용가85〉. 믈러〈월석10:45ㄴ〉. 흘러〈훈언1ㄴ〉. 라〈능엄6:86ㄱ.〉
모:반드시[須]. 구결문 “切須在意(절수재의)라”에서 ‘切須’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어떤 내용을 더욱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정도의 뜻으로 이해된다. 15세기 문헌에서 한자 ‘須’에 대한 번역으로는 ‘반기’를 비롯하여 ‘반시(두초24:32)·반개(두초25:2)·모로매’ 등으로 대역되었다.
수고(受苦)왼:수고로운. 고통스러운. 오늘날 ‘수고’는 기원적으로 한자어 ‘受苦’에서 비롯된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일을 하느라고 힘을 들이고 애를 씀. 또는 그런 어려움”을 뜻하는 말로 국어화가 진행되었다. 여기 ‘受苦’는 ‘受(받을 수)·苦(아픔/고통 고)’로 한자의 본래 의미대로 사용된 것이다.
과보(果報):업인(業因)의 결과. 행업(行業)으로 인하여 받는 결과. 전에 행동했던 선업이나 악업에 의해 나중에 그 대가로서 받는 즐거움이나 고통 등의 결과. 인간 또는 동물로 태어나는 것과 같은 과보의 총체적인 양상은 총보(總報)이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남녀나 빈부의 차별이 있는 것 같은 과보의 개별적인 양상은 별보(別報)라 한다.
수(受)곤:받거늘. 받았는데 (하물며). ‘-곤(온)’은 ‘…-곤(-온)…며…녀(-려, -리오)’와 같은 문장 구조와 호응하는 것이 원칙. ¶너비 善根 시므디 아니닌 일훔도 듣디 몯리온 며 보미녀〈영험5〉. 여기서는 “ 어루…快樂 受곤 며…暫時나 信 내야 일운 功德이”와 같은 문장 구조로 표현된 것이다.
:가장[最]. 15세기 국어에서 ‘’은 “여러 형제나 자매 중에서 맨 위”를 뜻하는 ‘맏이’[伯]의 뜻으로 ‘’[最]와는 구분되었으니, 음절 말음 위치에서 ‘ㄷ-ㅅ’의 차이로 뜻이 달라지는 최소대립어. ¶去聲은 노 소리라〈훈언14ㄴ〉. 내 아리 비록 디라도〈월석2:5ㄴ.〉
공덕(功德)이:공덕임에야. “수(受)곤…며…공덕(功德)이” 구문. 세간에서 행한 선업만으로도 고통스런 윤회에서 벗어나고 좋은 과보를 얻어 유쾌함과 즐거움을 받을 수 있는데, 가장 높고 깊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음을 내어 이룬 공덕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는 말이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옛: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전 우주에 있는. ‘삼천대천세계’는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 의거하여 불교에서 파악하고 있는 전 우주를 뜻하는 말. ‘NP1(三千大千世界)옛 NP2(七寶)’ 구성으로서, 이 문장에서는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칠보)” 정도의 의미를 나타낸다.
보시(布施):다른 사람에게 물질 등을 베풀어 주는 것. 6바라밀의 하나. 보시의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분류가 있다. 재(財)·법(法) 2종 보시를 비롯하여, 3, 4, 5, 6, 8종 등으로 나뉜다. 그 중에서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 등으로 나누는 3종 보시가 가장 대표적이다. ‘무외시’는 계(戒)를 지녀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사과(四果):성자(聖者)가 도달하는 4가지 단계의 경지. 번뇌가 단절되어 가는 경지를 넷으로 구분한 성자의 단계적 지위. 소승불교에서 구분하는 성자의 4단계. 과(果)는 목표에 도달한 경지. 4단계는 예류(預流)·일래(一來)/사다함, 불환(不還)/아나함, 아라한(阿羅漢) 등을 말한다.
무량무변(無量無邊)컨마:무량무변하건마는.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한계(限界)가 없이 무한하건마는. ‘-마’은 앞의 사실을 인정을 하면서도 그와 어긋나는 상황을 나타내는 보조사. 고려가요에 ‘-마’이, 15세기에는 일반적으로 ‘-마’이, 16세기에는 ‘-마’이 사용되었다. ¶西京이 셔울히마〈서경별곡〉. 히 쳐비 이셔야 자내 미나 편리언마 노여 가〈청주간찰29:5.〉
어돈:얻은. 찾은. 여기서 동사 ‘얻다’는 “거저 주는 것을 받아 가지다.”의 의미보다는 “구하거나 찾아서 가지다.”와 같이 주체의 적극적인 행위의 결과로 해석되는 것이 적절하다. 한문 “所獲功德니”에서 ‘所獲(소획)’에 대한 번역. 얻-[獲]+오(대상활용의 선어말어미)+ㄴ(관형사형 어미).
더으니:더하니[加]. 문맥상 “더 높으며 귀하니” 정도의 뜻. 15세기 문헌에는 ‘더으-’형이 일반적이고 ‘더-’형이 극소수이다. 동사의 일반형 ‘-다’형을 기준으로 삼아 점차로 ‘더으다’가 ‘더다’로 바뀌어감. 유추(類推)에 의한 변화. ‘다다’[盡]가 ‘다다’로 바뀐 것도 같은 과정으로 이해된다.
드트리:티끌이. 드틀[塵]+이(조사). ‘티끌’은 티와 먼지를 통틀어 이르는 말. 15세기 문헌에는 ‘드틀’과 ‘듣글’이 공존하였는데, 둘은 형태는 다르나 동일한 어원에서 변화했을 것으로 보이는 한 묶음의 단어 즉 쌍형어(雙形語)라 할 수 있다. ¶다 아 듣글 라 듣그레 劫을 혜여도〈법화3:86ㄴ.〉
어느:어느. 오늘날 ‘어느’는 표제어처럼 관형사로만 쓰이나, 중세국어에서는 ① 관형사, ② 부사(어찌), ③ 대명사 등 3가지로 쓰였다. ¶① 어느 날오[何日]〈두초21:16〉. ② 어느 다 리〈월곡1〉.③ 어늬 브린 어늬 지빈 어늬 왼 몰라〈월석12:26ㄱ.〉
얼구를:모양을. 구결문 “其狀(기상)을”에 대한 번역. 15·16세기에 ‘얼굴’은 ‘형체(形體)’ 또는 ‘모습’이라는 뜻. 근대국어 자료 동문유해(1748)에 ‘얼굴’[容顔](상18)로 쓰인 예가 나타나며, 그 후로 점차 “안면·낯” 정도의 뜻으로 의미 영역이 축소되어 오늘날에 이름.
마촤:맞추어. 둘 이상의 대상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여 살펴. 구결문 “其功(기공)을 可驗(가험)이라”에서 ‘驗(험)’에 대한 번역으로, “검증·검사·증험·증명하다” 정도의 뜻을 나타낸다. 마초-[驗]+아(어미)→마촤. 15세기 문헌에는 ‘마초아’가 절대 우세하며, ‘마촤’는 활음화에 의해 [maʦʰwa]로 실현됨을 표기에 반영한 것이다. 어간 ‘마초-’는 ‘맞-’에 접미사 ‘-호-’가 결합한 파생어. 15세기 말까지의 자료에서 ‘마초아’는 90여회, ‘마촤’는 1회로 나타난다.
무리:무리가. 물[流·衆]+이(주격조사). 15·16세기 문헌에서 ‘물’은 ‘무리’[衆·流]를, ‘믈’은 ‘물’[水]을 뜻하는 말로 구별되었으며, 훈민정음 초기문헌에서 ‘衆’의 뜻을 나타내는 것에 ‘므리’형도 공존한다. ¶特은 므리예 로 다씨라〈석상6:7ㄱ〉. 이것의 원순모음화형, 또는 ‘물〉무리’로 재구조화된 ‘무리’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에 나타난다. ¶ 쥐 무리예 욕 배 되디 몯 거시라〈동신,열1:4ㄴ.〉
즈기:비슷하게. 즉-[髣髴]+이(부사 파생접미사). 15세기 문헌에는 ‘즛-’형도 나타나는데 둘은 쌍형어라 할 수 있다. ‘즛-’형이 일반적이며, ‘즉-’형은 고립적이고 16세기 문헌에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일희 자최 즛 狼迹山이라 니〈월석4:27ㄱ〉. 汲黯 닌 즉도다〈번소9:41ㄱ.〉
머구리 :개구리가. 구결문 “蛙(와)ㅣ”에 대한 번역. 머구리[蛙]+Ø(무형의 주격조사). ‘개구리’는 민물이나 땅 위에서 사는 동물로, 여기서는 상식의 가르침에 구속되어 있는 식견이 좁은 사람들[범부(凡夫)]을 비유함. ¶우믌 머구리려 바 니디 몯호〈법화3:156〉. 蟼 머구리 黽 머구리 蛙 머구리 와 〈자회,상12〉. 표준어 ‘개구리’에 대응되는 함경방언. 신증유합에 오늘날의 ‘개구리’에 해당하는 ‘개고리’가 나타난다. ¶蛙 䵷 개고리 와〈신유,상15ㄴ.〉
너부믈:넓음을. 넓은 것을. 한문 “滄海之闊(창해지활)”에서 ‘闊(활)’에 대한 번역. 넙-[廣·闊]+움(명사형어미)+을(목적격조사). ‘넙-〉넓-’으로 재구조화한 시기는 18세기 여사서언해(1736)에 ‘널펴’(서4)가 쓰인 것으로 볼 때 18세기에 들어서의 일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여우가. 한문 “野干(야간)이”에 대한 번역. 들여우[野狐]가. 여[狐]+이(주격조사). 모음 조사와 연결될 때는 ‘여’의 말모음 ‘ㅡ’가 탈락한다. ¶의갗爲狐皮〈정음해례:종성해〉. 여기 사자(獅子)와 대비된 ‘여우’는 아직 불법(佛法)을 깨닫지 못한 무리, 또는 성문(聲聞)·연각(緣覺) 등과 같이 아직 소승에 머물러 있는 무리를 비유한다.
수지(受持)닌:수지하는 이는. 법을 받아서 잊지 않고 지니고 실천하는 사람은. ‘수지’의 참뜻을 이해하려면,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 중 간경, 독경/독송 등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간경(看經)은 경전을 읽고 그 뜻을 새기는 것을, 독경(讀經) 또는 독송(讀誦)은 경전을 읽는 것을 뜻한다. ‘독경·독송’에 비해 ‘간경’을 으뜸으로 치는 것은, 경전의 내용을 잘 파악하며 소화해 내며 읽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간경은 참선·염불과 함께 유력한 수행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수지(受持)는 ‘간경’처럼 이해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 즉 신(身=몸)·구(口=말)·의(意=생각)까지 ‘나’라는 존재의 모두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믿는 것은 물론이고 실천도 함께 한다는 뜻을 내포하므로 ‘간경’보다 몇 걸음 앞서 있는 것이다.
:만든. -[作]+ㄴ(관형사형어미). 15세기 일반형은 ‘-’이고, ‘-’은 이와 쌍형어의 관계. 16세기에는 ‘-’형도 나타난다. ¶담 답야 오 보육 라[直答曰作脯라]〈소언6:72ㄱ〉. 宗諤의 바에 난이라[宗諤所制也ㅣ니라]〈소언6:101ㄱ.〉
시므니라:심은 것이다. 시므-[種]+니+라(어미). 자음 어미 앞에서는 어간 ‘시므-/시-’형이, 모음 어미 앞에서는 ‘-’형이 선택되었다. 충청·전라·제주 방언에 남아 있는 ‘싱구-’는 ‘심ㄱ-’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됴 根源을 시므고〈석상19:33ㄴ〉. 根源을 기피 시니〈석상20:50ㄴ〉. 됴 根源을 기피 심거〈석상21:57ㄴ.〉
대승(大乘):‘큰 수레’라는 뜻으로, 보살도의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적 흐름. 자기 혼자만의 해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모든 중생들을 한꺼번에 태우고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저 언덕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함. 이타(利他) 구제의 입장에서 널리 인간 전체의 평등(平等)과 성불(成佛)을 이상으로 삼고, 그것을 부처의 가르침의 참다운 대도(大道)임을 주장하는 교리.
겁(劫):우리의 셈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 비유하면 둘레가 40리쯤 되는 바위가 3년에 한 번 씩 내려오는 천사의 부드러운 옷깃에 스치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 ‘劫엣善因’은 [[劫엣][善]因]의 구성으로 ‘劫엣因’은 “겁(劫) 동안에 쌓은 인(因)” 정도의 의미를 나타낸다.
맛드러:(-을) 달게 여겨. 달게 여기고. 구결문 “甘爲下劣(감위하열)야”에서 ‘甘(감)’에 대한 번역으로, 한자 ‘甘’의 뜻 중에서 “달다·달게 여기다”를 참고할 만하다. 현대어로 옮기기 어려운 부분으로, 한문 주석서들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풀이가 일정치 않다. 문맥상 “자족(自足)하다” 정도의 의미가 느껴진다. 15세기 자료에는 “…을 맛들-”식으로 나타나며, 현대어로는 “-을 좋아하거나 즐기다” 정도의 의미가 된다. ¶노 거나 婬亂 맛들어나 수으를 즐기거나〈석상9:37ㄱ.〉
어려:어렵게. 어렵게. 어-[難]+이(부사화 접미사). 표기법사의 관점에서는 정음 초기문헌에는 ‘어려’로 표기하다가, 능엄경언해(1461)부터는 ‘어려이’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사오나’와 마찬가지로 부사 파생접미사 ‘-이’와 결합할 경우에 이 책(사법어 포함)에만 특이하게 나타나는 예외적 표기. ¶어려〈월석, 서23ㄴ〉. 어려이〈능엄1:86ㄱ.〉
너교:여김을. 여기는 마음을. 마음속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하거나 생각함을. 너기-+옴(명사형어미)+(목적격조사). ‘너규믈’도 가능하지만, 15세기 자료를 통틀어 ‘너규믈’(2) 대 ‘너교’(12)로 쓰는 것이 훨씬 우세하다. ¶어엿비 너규믈 드리우샤〈능엄2:26ㄴ.〉
삼갈디니라:삼가야 할 것이니라. 삼가-[愼]+아(선어말어미)+ㄹ디니라(통합형어미). 여기 당위법(當爲法)은 ‘-(오/우)-ㄹ디니라’로 표현되었지만, 원각경언해(1465) 이전 문헌에는 ‘-(오/우)+ㅭ+디니라’ 또는 ‘-(오/우)+ㄹ+띠니라’로 표현되었다. 선행 어간이 ‘ㅏ’인 경우에는 ‘-오/우-’의 또 다른 이형태 ‘-아-’가 통합하여 외형상 나타나지 않았다. ¶愼 삼갈 신〈광주천자13ㄱ〉. 일후믈 알면 一切世間앳 天人이 禮數야 절디니라〈석상21:48ㄴ〉. 홀 싸미 반기 이 나갈띠니라〈법화6:119ㄱ〉.
홀딘댄:할진댄. 할 것 같으면. ‘X(오/우)ㄹ딘댄’은 “Xㄹ 것이면” 정도의 뜻으로, 앞 절의 일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뒷 절 일의 조건이나 이유, 근거로 삼음을 나타내는 연결어미. 1464년까지 성립된 문헌에는 ‘-(오/우)ㅭ딘댄’ 또는 ‘-(오/우)ㄹ띤댄’으로 표기되었으나, 1465년 원각경언해부터는 ‘ㆆ’과 ‘각자병서’ 폐지로 표제어처럼 적었다. ¶이 말옷 虛티 아니딘댄 내 두 히 도로 녜 리라〈석상20:19ㄴ〉. 正宗 通達코져 홀띤댄 모로매 몬져 序分을 굘띠니〈법화1:16ㄴ〉.
갓:가죽주머니를. 가죽포대를. 갗[皮]+[囊.주머니]+(목적격조사). ‘가죽주머니’[被囊]는 사람의 ‘육신·몸뚱이’ 즉 목숨(=생명)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한문 “放下皮囊(방하피낭)”에서 ‘皮囊(피낭)’에 대한 번역. 형태음소 ‘/갗/’을 연철하여 /갗/로 적을 수 있었겠으나,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 등 일부 문헌에만 적용됐고, 이 책에서는 15·16세기 국어 문헌의 보편적인 종성 표기법 ‘8종성가족용’ 방법에 따라 ‘갓’로 적었다. ¶의갗爲狐皮〈정음해례 종성해〉. 소내 갓신 잡고〈남명,상52ㄱ〉. 솔옷 든 지노라〈두초3:12ㄴ〉. 囊 〈자회,중7ㄴ〉. 漉水囊은 므레 거리 치라〈월석25:56ㄴ〉.
룔디니라:버릴지니라. 버려야 할 것이니라. 구결문 “放下皮囊(방하피낭)이니라”에 대한 번역. 리-[放下]+오+ㄹ디니라(어미구조체). 한문의 ‘放下(방하)’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집착을 버리고 해탈하는 일. 또는 집착을 일으키는 여러 인연을 놓아 버리는 일을 가리킨다. 수행자가 ‘보배’를 잡고자 한다면 생명을 버릴 정도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수행해야 함을 강조한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