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천하의 기연(機緣)은 제각기 다르며, 양의(良醫)의 처방도 또한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처님께서 한 법계(法界)에 따라 수많은[塵沙] 법문(法門)을 내시면, 〈대중은〉 문마다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이것을 아는 이는 기류(機類)에 따라 이익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에 들어가는 것은 느릴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으며, 관심(觀心)의 행법(行法)에는 어려움도 있고 쉬운 것도 있습니다. 인도하는 자의 방편에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잘 다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시대가 마침 말세(末世)의 운수를 맞게 되었으니, 사람의 근본은 그로 말미암아 선[禪那]에 의지하게 되면 높게는 미루어 성인의 경지에 갈 수 있습니다. 의학(義學)을 논하게 되면 하등으로 불리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가사[方袍]를 입은 승려와 인류(人類, 圓頂)가 모두 풍진(風塵)의 객(客)이 되고, 속인[白衣)]과 고빈(高賓)이 영원히 나락(那落)에 떨어지는 무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 전하께서는 세상의 도(道)가 야박하게 되고, 시류(時流)가 급박하게 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당시에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서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오대진언(五大眞言)보다 함께 할 것이 없는데도 선정(禪定)에 전념하지 않고, 의리(義理)를 탐구하지 않고, 다만 지녀서 외우는 것으로 하여금 복을 얻는다고 한결같이 경전의 말씀만을 하는 말세(末世, 叔世)에,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 중 이보다 더 높은 가르침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경전은 범어나 한문의 기이한 문자로 되어 있어서 읽는 이들이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이에 당본(唐本) 주석서를 구해 언해(諺解)로 거듭 인간(印刊)을 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 외우고 익히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 날카롭고 둔함의 차이는 지니고 지키는 것보다 더 나태해지는 것이 없고, 귀천(貴賤)의 차이는 간략한 것보다 더 받들어 지킬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윽한 자질을 지니게 되면 모두 다 개개가 나아갈 바의 분수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깨달음의 언덕에 떨어지게 되어 사생(四生)이 해탈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견문(見聞)을 입혀주게 될 것입니다.
또 존망(存亡)과 유현(幽顯)이 일상을 돌이켜 즐겁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조종(祖宗) 선령(先靈)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오묘한 자질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주상 전하께서 오랜 동안 자손[金枝]들을 지혜롭게 길러 오셔서 옥엽(玉葉)처럼 번성하게 하시니, 글을 외울 적에는 모두 장수(長壽)하시기를 칭송해서 말하기를, ‘높으신 오대의 경험과 밝고 밝은 여론[衆口]이 역력히 많아졌습니다.’ 전하께서는 능히 이처럼 원만하게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성종 16년(성화 21년, 1485) 을사 맹하 소승 신 학조 삼가 발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