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각(始覺)이 다름이 없으니 사상(四相)이 본래 한가지로 한 각(覺)인 까닭이다. 또 적멸(寂滅)이 둘이 없음은 이것이 자각(自覺)이고, 세계와 중생은 이것이 각타(覺他)이고, 성불(成佛) 두 자(字)와 생(生)과 열(涅=열반)이 꿈과 같음은 이것이 각만(覺滿)이니, 이룸이 이것이 원만(圓滿)한 뜻인 까닭이며, 동(動)과 적(寂)이 둘이 없어야 비로소 원만한 까닭이다. 그러나 ‘생(生)이 본래 성불(成佛)이다.’라고 이르심이, 오직 이 원각경(圓覺經)과 화엄경(華嚴經)이고, 남은 것은 성(成)의 뜻이 머금어 있을 뿐 바로 가리키지 아니하시니라. 오직 말씀이 범부(凡夫)가 들음에 놀라우며, 이(理)가 상례(常例)의 뜻에(보다) 넘을새 부처께서 이미 드물게 말씀하시며, 어리석은 사람이 많이 비방(誹謗)하느니, 이제 교리(敎理)를 자세히 하여 간략히 여섯 문(門)을 드느니라. 하나는 소승(小乘) 유부(有部)에 오직 실달태자(悉達太子)가 일생에 성불하시거니와 남은 이는 다 분(分)이 없고, 둘은 대승(大乘) 시교(始敎)에 삼무수겁(三無數劫)에 행위(行位)에 만족하시어야 비로소 성불(成佛)을 득(得)하심이고, 셋은 종교(終敎)의 상(相)이 다하여 성(性)이 나타남이 이름이 정각(正覺)을 이룸이고, 【상(相)이 다하여 성(性)이 나타남은 이 교(敎)에 이르되, ‘일체 중생의 본각(本覺) 진심(眞心)이 본래 염(念)을 여의니 여실(如實)히 알지 못하므로 홀연(忽然)히 염이 일어 생(生)하며, 주(住)하며, 이(異)하며, 멸(滅)하느니, 염(念)이 제 상(相)이 없어서 본각(本覺)에 여의지 아니하여 안팎에 훈습(熏習)한 힘으로 처음의 멸상(滅相)을 끊고 마지막에 생상(生相)에 이르도록 한 염(念)이 상응(相應)하면 심성(心性)을 볼 것이니, 심(心)이 곧 상주(常住)이니, 이름이 정각(正覺)을 이룸이다.’】 넷은 화엄경(華嚴經)에 이르신 십신위(十信位)가 원만(圓滿)하여 초발심주(初發心住)에, 곧 정각(正覺)을 이룸이고, 【화엄경(華嚴經)이 간략히 칠위(七位)가 있느니, 제2회(第二會)에 십신(十信)을 이르시고, 제3회(第三會)에 십주(十住)를 이르시고, 제4에 십행(十行)을 이르시고, 제5에 십향(十向)을 이르시고, 제6에 십지(十地)를 이르시고, 제7에 첫 여섯 품(品)은 등각(等覺)을 이르시고, 다음의 세 품(品)은 묘각(妙覺)을 이르시니, 초발심주(初發心住)는 십주(十住) 중의 첫 하나이다. 성정각(成正覺)은 경(經·화엄경)에 이르시되, ‘초발심(初發心)할 때에 곧 아뇩보리(阿耨菩提)를 득(得)할 것이라고 하시니라.’】 다섯은 돈교(頓敎)에 일념(一念)에 (깨달아) 안 시절이, 곧 이름이 불(佛)이고, 여섯은 원교(圓敎)에 본래 성불(成佛)이니, 그러므로 화엄경(華嚴經)에 이르시되, “여래(如來)께서 정각을 이루실 때에, 그 신(身) 중에 널리 일체 중생의 정각 이룸을 보며, 일체 중생의 열반(涅槃)에 듦을 널리 봄에 이르러 다 한 성(性)에(과) 같으니, 이른바 ‘성(性)이 없음이다.’”라고 하시며, 또 이르시되,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자심(自心)의 염염(念念)에 언제나 부처께서 정각(正覺)을 이룸이 있으심을 반드시 알 것이니, 어찌해서인가. 제불(諸佛) 여래(如來)가 이 마음을 여의지 아니하여 정각을 이루시는 까닭이다. 자심(自心)과 같아서 일체의 중생심(衆生心)이 또 이와 같아 다 여래(如來)께서 정각을 이룸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시니라. 이제 경문(經文)이 만약 관(觀)을 이루어 비로소 능히 앎을 어림잡을진댄 곧 넷과 다섯의 두 문(門)에 마땅하고, 만약 (깨달아) 안 중생이 ‘본래 다 부처이다.’라고 하심을 어림잡을진댄 오직 여섯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