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力) 등은, 이승(二乘)이 분(分)이 있고, 이는 분이 없는 까닭이다. 일과 이와 삼을 차례같이(=대로) 신(身)과 구(口)와 염(念)이 잘못(=그릇) 하심 없음에(=으로) 매기고, 넷은 달리 여기심(=생각하심)이 없음이고, 【부처께서 중생에 귀(貴)와 천(賤)과 공경(恭敬)과 대수롭지 않게 여김과 원수(怨讐)와 친함들에 다름이 없으신 까닭이다.】 다섯은 정(定)이 아닌 마음이 없으심이고, 여섯은 알지 못함이 없으시며, 버리심이고, 【중생이 세 가지의 수(受)가 있느니, 고수(苦受)와 낙수(樂受)와 고(苦)가 아니며, 낙(樂)이 아닌 수(受)이니 고수(苦受)에는 진(嗔)을 내고, 낙수(樂受)에는 사랑함을 내고, 고(苦)가 아니며 낙(樂)이 아닌 수(受)에는 어리석음을 내느니, 다른 사람은 근(根)이 둔(鈍)하므로 고수(苦受)와 낙수(樂受)를 많이 알고, 고(苦)가 아니며 낙(樂)이 아닌 수(受)에는 알지 못하여 버리는 마음을 두거니와 부처는 고(苦)가 아니며 낙(樂)이 아닌 수(受) 중에 생시(生時)를 아시며, 주시(住時)를 아시며, 멸시(滅時)를 아시느니 그러므로 사뢰되, “부처께서 알지 못함이 없으시며 버리심이다.】 일곱은 욕이고, 【욕(欲)은 즐겨 하고자 함을 사뢰니, 부처께서 선(善)한 법(法)의 은(恩)을 아시어, 늘 많은 선한 법을 모으고자 하시는 까닭이며 닦아 익히시는 마음이 족함이 없으신 까닭이다.】 여덟은 정진(精進)이고, 아홉은 염(念)이고, 열은 혜(慧)이고, 열하나는 해탈(解脫)이고, 【무루지혜(無漏智慧)와 서로 맞으므로 유위해탈(有爲解脫)이고, 일체의 번뇌습(煩惱習)이 다하므로 무위해탈(無爲解脫)이다.】 열둘은 해탈지견(解脫知見)이니 【해탈(解脫) 중의 지혜가 무량(無量), 무변(無邊)하여 청정(淸淨)하신 까닭이다. ‘지견(知見)’이라고 이름은(=이르는 것은) 논(論)에 묻되, “오직 지(知)를 이를지니 어찌하여 또 견(見)을 이르느냐?” 대답하되, “지(知)를 이르고 (또) 견(見)을 일러야 일이 장차 굳느니 비유하건대 노끈[繩]이 둘이 하나에 합하면 굳음과 같으니라.”】 위 여섯은 다 ‘덜어내심 없다.’라고 이른 것이다. 【논(論)에 묻되, “부처께서 일체의 법 중에 덜어내심이 없으시니 어떤 까닭으로 오직 여섯 (가지) 일 중에 덜어내심이 없으시냐.” 대답하되 “일체의 자기의 이(利)와 남을 이롭게 하심 중에 네가 일이 능히 갖추느니, 욕(欲)은 일체의 선법(善法)을 구하시는 근본(根本)이고, 정진(精進)은 능히 행하시고, 염(念)은 능히 지키어 간수하시느니, 문을 지킨 사람이 어진 일랑은 듦을(=허락하는 소리를) 듣고, 모진 일랑은 막아서 금지함과 같으니라.” 혜(慧)는 일체의 번뇌(煩惱)를 비추시느니 이 네 (가지) 법을 쓰시어야 이를 이루신다. 이 네 법의 과보(果報)가 두 가지가 있느니, 하나는 해탈(解脫)이고, 둘은 해탈지견(解脫知見)이다. 해탈지견은 이 해탈지견을 쓰시어 이 두 가지의 해탈상(解脫相)을 아시느니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해탈이다. 많은 해탈상을 아시느니, 이른바 시해탈(時解脫)과 불시해탈(不時解脫)과 혜해탈(慧解脫)과 구해탈(俱解脫)과 괴해탈(壞解脫)과 불괴해탈(不壞解脫)과 팔해탈(八解脫)과 불가사의(不可思議) 해탈과 무애(無礙) 해탈 등이다.】 열셋과 (열)넷과 (열)다섯은 일체의 신(身)과 구(口)와 의(意)의 업(業)이 지혜의 행을 좇으심이고, 열여섯과 (열)일곱과 (열)여덟은 지혜로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아시되, 통달하여 가림이 없으심이다. 묻되, “무견정상(無見頂相) 등도 또 좇아 할 이가 없거늘 어찌하여 이르지 아니하시느냐?” 대답하되, “이 십팔 중은 오직 지혜 공덕을 이르시고, 자연스러운 과보(果報)의 법을 이르지 아니하시니라.” 위에 역(力) 등을 따라 이 네 과(科)에 이르도록 온전히 지론(智論)을 의지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