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해〕 묘법의 처음과 끝을 다하신 후에야 일어나신 큰 일을 다 하시며, 모든 부처의 지행을 아우르신 후에야 여래의 전신을 보시리니, 이 경전을 지으심이 문수 문답에서 비롯하시고 보현의 권발에서 끝나시어 28품의 조리가 하나가 꿰어지시니【‘조’는 가지이고 ‘리’는 줄기[脈]이다.】, 처음과 끝을 다하시며 지행을 아우르심이니, 대사 인연이 이에 마치시며, 여래의 법신이 이에 온전해지셨도다. 지는 능히 깨달음을 발하므로 처음 지으심이고, 행은 능히 덕을 이루므로 끝마침을 이루심이니, 중간 사법이 지행을 서로 도와 발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느니라. 화엄경의 맨 첫 인문에서 문수로 믿음을 발하시어 나아가 닦을 차례를 여시고, 맨 마지막 과문에서 보현으로 법을 맺으시어 깨달음 이후의 행을 보이시니, 이 경전의 뜻이 마치 같으시니라. 보현은 덕이 가득하지 못한 데가 없으심이 이르신바 보(普)이시고, 위를 돕사오시고 아래를 이롭게 하심이 이르신바 현(賢)이시니, 곧 묘덕이 다 갖추어지셔서 위로 부처의 교화를 돕사오시고 아래로 여러 물(物)을 이롭게 하시는 호칭이시니라. 권발은 힘써 나아가게 하시는 뜻이니, 앞에서 비록 부처의 지견을 여시어 인지심을 밝히시며 부처의 본래의 자취를 나타내시어 과지각(果地覺)을 이루시며 묘원하신 행을 밝히심에 미치시어도 아직 이 등각행상이시니, 만일 이에 앉으시고 나아가지 아니하시면 묘각이 이루어진 덕에 이지러짐이 있으시어 향상도(向上道)에 다다르지 못하실 것이므로 또 힘쓰게 하여 나아가게 하시어 덕이 가득하지 못한 곳이 없으시어 위를 돕사오시며 아래를 이롭게 하시어 과후상행(果後常行)을 이루시어 묘각도(妙覺道)를 다하게 하고자 하시므로 이름이 보현권발(普賢勸發)이라 하여 상행(常行) 유통(流通)이 되니라. 화엄경에 11지에 이르시어 불공덕해(佛功德海) 일체가 만족하신 후에야 보현상행(普賢常行)을 설하시어 이름이 선입세간삼매(善入世間三昧)니, 만법과 서로 응한 불이진실법문(不二眞實法門)이라 하시니, 곧 이 뜻이시니라. 이르신 상행(常行)은 각관(覺觀)이 없으시며 작임(作任)이 없으시며【‘임(任)’은 맡기는 것이다.】 물아(物我)가 합해지시며 염정(染淨)이 같으시어 일체가 평상(平常)하시어 편안히 자재(自在)하신 것이니, 이것이 묘각 향상(妙覺向上)의 일이시며 자나평도(遮那平道)의 가르침이시니, 이른바 평실(平實)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이 경전을 자세히 하시어 부처의 지견해에 의지하여 류(流)를 따라 들어가시어 일체 불공덕해 만족하신 후에야 류(流)를 거슬러 나시어야 가히 이를 밟으시겠거늘 가엾은 오늘날 사람은 끝을 바라보며【시남의료(市南宜僚)가 노후(魯侯)더러 이르되, “남월(南越)에 건덕국(建德國)이 있으니, 그 백성이 큰 도를 밟으며 그 삶이 즐겁습니다.” 노후가 이르되, “양식이 없으니, 어찌 가리오?” 시남자가 이르되, “임금의 비용을 적게 하시고 임금의 욕심을 적게 하시면 비록 양식 없어도 족하리니, 임금이 강 건너시며 바다에 〈배를〉 띄우시고 바라보되 그 끝을 보지 못하며 더 갈수록 다다를 곳을 모르거든, 임금 보내올 사람은 가장자리에서 돌아오리니, 임금이 이로부터 머시리이다.”】 흙 무더기를 좇아【최승천왕(最勝天王)이 부처님께 아뢰되, “어찌 보살이 생(生) 없는 법에서 생(生) 있음을 봅니까?” 부처님께서 천왕(天王)더러 이르시되, “반드시 알아라. 모든 법이 멸함이 없으므로 이런 까닭으로 생이 없으니,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성(性)이 변하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오직 세속에 의거하여 생멸이 있음을 볼 뿐이지, 다 허망하여 진실로 있음이 아니니, 만일 모든 보살이 깊은 반야를 행하면 무명 인연으로 제행이 나고, 행(行)에 의하여 식(識)이 나고, 널리 일러 유(有) 때문에 생(生)하고, 생하면 곧 늙음이 있고, 늙으므로 죽음과 시름하여 서러움이 있음에 이르도록 곧 참답게 아나니, 이런 까닭으로 행을 닦음은 무명을 끊음을 위함이니, 무명이 그치면 다른 11지(支)가 옮으며 옮아 좇아 멸하여 몸이 그치면 명(命)이 좇아서 멸하듯 하니, 천왕아, 반드시 알아라. 사견 외도가 해탈을 구하기 위하여 오직 죽음을 그치고자 하고 생(生) 그칠 줄을 알지 못하니, 만일 법이 나지 아니하면 곧 멸이 없으니, 비유한다면, 사람이 흙 무더기로 사자를 치는 것과 같아서 사자가 사람을 좇으면, 흙 무더기가 절로 가만히 있나니, 보살도 또 그러하여 오직 생을 그치면 죽음이 절로 멸하느니라. 개는 오직 흙 무더기를 좇고 사람 좇음을 알지 못하여 흙 무더기가 끝내 가만히 있지 못하나니, 외도도 또 그러하여 생 그침을 알지 못하므로 끝내 죽음을 벗어나지 못하나니, 보살이 깊은 반야를 행하여 인연 제법 생멸을 잘 아느니라.”】 세속의 어리석은 더러운 식견으로 묘각평실(妙覺平實)하신 행을 비유하여 여러 교문(敎門)에 헒을 오로지 일삼아 거리낌 없이 벗어나 닦지 아니하여 굳게 지킴이 때가 없어 멋대로 구름을(=윤회함을) 받나니, 능엄경에서 이르신바와 같이 비유한다면, 평인(平人)이 망량으로 〈제가〉 제왕이로라 하고 일컫다가 스스로 죽음을 취하듯 하니, 삼가지 마는(=않는) 것이 옳으냐? 부처를 배울 사람이 다 흙 무더기를 좇는 무리 같아서 교법을 비난하고 세속을 잡아서 지(智)를 버리며 행(行)을 그쳐 한갓 닦을 것이 없다고 여기면, 묘법(妙法)의 시종(始終)을 또 어찌 밝히며, 대사(大事) 인연이 또 그치는 지경에 거의 이르리라. 그러면 부처의 지견에서 비롯하시고 보현상행(普賢常行)에서 마치심이, 한껏 보이심은 교(敎)에 있으시고 갖추어 증명하심은 사람에게 있나니, 통달한 사람이 마음을 다하여야 할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