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
4생 주158) 의 무리가 난〈생〉은 ‘상’에 응하고, 태〈생〉은 ‘정’에 응하고, 습생은 어울음에 응하고, 화〈생〉은 여읨에 응하니,
이런고로 이르시기를, ‘응할 곳을 따른다’고 하신 것이다.
어지러운 생각을 이르기를 ‘상’이고,
사랑 맺음을 이르기를 ‘정’이고,
‘기’ 붙음을 이르기를 어울음이니, ‘습’을 어울어 생기게 하는 것이다.
모습이 도망함을(=없는 것을) 이르기를 여읨이니, 여기에서 여의어 저곳에 나는 것이다.
정·상·합·리는 ‘생’있는 것이 다 구비하건만, 이는 많은 분〔몫〕으로 이르실 따름이다.
난생이 처음에 있는 것은 상념이 처음 움직이거든 정애가 〈그〉 후에 일어나며, 또 태·습·화가 겸한 까닭이다.
이 글에 논하신 ‘상’은 내분의 더러운 ‘상’이고, 외분의 깨끗한 ‘상’이 아니며,
논하신 ‘화’는 옮아서 ‘세’하는 업의 화생이고
【‘세’는 허울 벗는 것이다.】 의생 주159) 의생: 부모가 낳은 육신이 아니고,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
하는 미묘한 화〈생〉이 아니다.
정·상·합·리가 서로
변역 주160) 함은 혹 ‘정’이 변하여 ‘상’이 되며, 어울음이 변하여 여읨이 되어 일정한 ‘업’이 없으며,
‘난’이 바뀌어 ‘태’가 되며, ‘습’이 바뀌어 ‘화’가 되어 일정한 모습이 없으니,
이런고로 받는 업보가 혹〈은〉 오르며(=올라가며) 혹〈은〉 잠기어 일정한
‘취’ 주161) (=윤회의 길)가 없으니,
이것이 중생이 서로 잇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