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신속삼강행실도 발문
신이 스스로 생각하건대,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의 윤상(倫常) 관계는 하늘과 땅을 걸쳐, 고금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없지 않고, 하루도 멈춤이 없는데, 이것이 바로 성(본성)입니다. 생각하건대 이런 성(性)이 있기에, 위에서 교화하기 쉽고, 아래서는 교화를 빨리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옛날, 성왕께서 삼강(三綱)을 나라 다스리는 근본으로 하신 것도 바로 이런 전초였습니다. 우리 동방은 기자께서 『구도』로 다스려 내려온 일맥으로서, 천백세가를 내려오매, 법이 발라 삼대의 전통을 잃지 않았습니다. 비록 다섯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히고, 오대(五代)와 원나라의 중원 침입이 있었음에도, 우리 해동(조선)까지는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순수성으로 말하자면, 예악(禮樂)의 발원지인 중원(중국)도 우리보다 얼마 순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조에 이르러 치국은 백성의 교화를 우선으로 해야 함에, 고금의 『삼강행실』을 편찬하여 세인들이 평생 아끼게 한 것은 앞선 성왕님의 교훈입니다. 『속삼강행실』을 편찬하여, 앞의 책과 짝을 이루게 하는 것은, 또한 이후의 성왕이 전대의 성왕의 업적을 이어 더욱 발전시키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임금님께서 세상 만물을 교화하는 근본은, 인간의 강상을 벗어나지 않고, 삼강의 차례도 오상의 앞에 놓여있다고 하시면서도, 이것이 역사책에 여기저기 산재되어 요점이 분명치 않거나, 사람의 귀와 눈이 어둡고 몽매하여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안(역사책을 말함)으로나 밖(보고 듣는것을 말함)으로나 〈모두〉 직접 그림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만력 임자년(1612)에 이르러 홍문관의 유신(儒臣) 부제학 이성, 응교 한찬남, 교리 박정길에게 찬하라고 명하셨으니, 이에 신하들은 모두 받들어 따릅니다.
우리나라는 예의가 바른 것으로 천하에 널리 울려 퍼졌고, 앞선 선왕님께서 두 책을 편찬해 내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미덕을 따르도록 간행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당하여 일부 충, 효, 열을 한 사람이 빠져 전하지 못하면, 너무 아쉽다고 생각하여, 그들로 하여금 중외에 전하는 소문을 조사하여, 칭찬할 만한 사람을 책에 편집해 넣도록 하셨습니다. 이듬해 갑인년(1614)에 도감을 설치하고, 여러 재신(宰臣)들을 선발하여, 재차 수정토록 했습니다. 그 다음해 을묘년(1615)에 『여지승람』에 있는 여러 명을 발췌해 앞부분에 편집해 넣고, 전 해에 수집해 모은 것과 함께 그림과 전(傳), 언해(諺解)까지 합해, 하나의 책으로 편성했습니다. 붉은 마음 임금을 사랑하기가 금석같이 굳세어, 마음에 오로지 국가만 있고, 자신은 없는 마음으로 ‘충신(忠臣)’ 한 권을 펴냈습니다. 모든 행위를 돈화하는 원천이 되고, 다해도 다해도 못다하는 정성으로 작은 약쑥으로라도 부모님의 끝없는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는 것으로 ‘효자’ 여덟 권을 펴냈고, 고치지 않는 곧은 정절을 갖고 변함 없는 정조를 세워 푸른 솔과 맑은 샘물 같은 맹세로, 칼이 들어와도 변치 않은 사람을 모아 ‘열녀’ 여덟 권을 편찬했고, 또한 이름만 남아 있되, 사적이 없는 이들을 같이 넣어 간행하오니, 모두 1650여 장이고 그 사람 수도 이와 같습니다.
간행하는 일은 갑인년(1614) 7월에 시작해서, 을묘년(1615) 10월에 끝이 났는데, 모두 17권이었습니다. 무릇 사람이 평소에 살아가면서, 일을 하고 공사를 봄에 모두 안으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서로 공경하며 부부가 화목하기가 사람들 모두 다르지 않습니다. 큰 재난에 부딪치고 위기를 겪게 될 때야 비로서 충·효·절·열의 어려움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한 남자 또는 한 여자만의 조행(操行)이 불요불굴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원인을 파헤쳐 보면, 그것은 우리 조상 역대 임금님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교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지금 임금님도 솔선수범을 하고, 백성의 성향에 맞게 잘 인도하여, 어리석은 남녀들로 하여금 감동을 받아, 실천케 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나라의 각 곳에 퍼져 만세토록 전해지는 것은 이 책 속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우리 임금님은 「청아」, 「인지」, 「관저」 시의 교화 또한 끝이 없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문왕의 모범적인 행위를 모방하여 모든 나라의 믿음과 존경을 얻었다.[儀刑文王 萬方作式]” 주005) 의형문왕 만방작식(儀刑文王萬方作式): 『시경』 대아의 첫 편이다. 원문은 “의형문왕 만방작부(儀刑文王萬邦作孚)”이다. 뜻인즉, 문왕의 모범적인 행위를 모방하여 모든 나라의 믿음과 존경을 얻었다는 말이다.
,또한
“자기 처에게 모범을 보여주어 아우에게까지 미치게 함으로써 가정과 나라까지 다스린다.[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 주006) 형우과처 지우형제 이어우가방(刑于寡妻至于兄弟以御于家邦): 『시경』 대아 편에 나오는 시로서, 뜻인즉 “자기 처에게 모범을 보여주어 아우에게까지 미치게 함으로써 가정과 나라까지 다스린다.”는 말이다.
는 바로 이를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광해군 7년(만력 43, 1615) 12월 21일 갈충진성 위성공신 가의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 성균관사 예문관제학 영양군 신 유몽인은 엎드려 절하고 손을 펴서 먼저 발문을 쓰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