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행실도 4:5ㄱ
王琳
汝南人 주001) 여남인(汝南人): 『오륜』의 ‘汝南人’은 『이륜』에는 ‘字巨尉’임.
年十餘歲喪父母 因遭大亂 百姓奔逃 惟琳兄弟 獨守塚廬 號泣不絶 弟季 出遇赤眉 爲賊所捕 琳自縛詣賊 請先季死 賊矜而放遣之
四方多難劇紛如 兄弟攀號獨守廬 爲季投身先乞死 豺狼安得不矜且
弟兄相愛卽天彝 急難誰知有此兒 要識
世人 주002) 세인(世人): 『오륜』의 [시]의 ‘世人’은 『이륜』에는 ‘至誠’임.
無不感 請看兇醜遣歸時
Ⓒ 편찬 | 이병모·윤시동 외 / 1797년(정조 21)
왕님은 한나라 여남 사이니
나히 십여 셰에 주003) 나히 십여 셰에: 나이가 십여 세에. 나이가 십여 세 되었을 때에. ‘나히 십여 셰’는 ‘NP1-이 NP2’ 자체로 명사문을 이루던 흔적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륜(초)』, 『이륜(중・영)』에는 각각 ‘나히 여나닌 저긔’, ‘나히 여라인 저긔’로 변역되어 계사 ‘이’가 개입한 문장을 보여 준다. ‘셰(歲)’는 ‘ㅅ’이 구개음으로 바뀜에 따라 ‘ㅖ’가 ‘ㅔ’로 단모음화하였다.
부모 여희고 난리 만나 셩이 다 라나되 오직 님의 형뎨 부모 분묘
직희여 주004) 직희여: 지켜. 『이륜(중・영)』에는 ‘딕여셔’로 등장한다. 중세 문헌에서는 (『석보상절』을 제외하면) 주로 그 어간이 ‘디킈-’나 ‘딕킈-’(16세기 이후)로 나타나던 것이나 근대 문헌에서는 어중 유기음 /ㅋ/을 재음소화한 ‘딕희-’ 혹은 ‘딕-’의 표기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곳의 ‘직희-’는 물론 어두 구개음화(ㄷ〉ㅈ)를 반영한 표기이지만 『오륜』에서는 구개음화 이전의 (보수적) 표기형인 ‘딕희-’가 보다 우세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특이하게 『석보상절』에서는 “수(守)”의 의미로 ‘딕희-’(‘딕-’는 없음)와 ‘딕-’의 형태가 공존한다. ¶手苦 딕희여 이셔〈9:12ㄱ〉. 各各 나 딕흰 神靈이〈9:30ㄱ주〉. 그 어미 이 니 東山 딕희오고〈11:40ㄴ〉 ; 이제 神通力으로 이 經을 딕야 護持야〈21:59ㄱ〉. 이러한 공존은 ‘딕희/딕’의 활용형(예: 딕야)으로부터 ‘딕-’가 재구조화됨으로써 ‘딕희/딕-~딕-’가 쌍형 어간으로 존재한 현실을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우선 (‘딕-’가 분석될) ‘딕야’의 출현 빈도가 높을 뿐 아니라, ‘딕희/딕-’와 ‘딕-’의 성조가 평거(平去) 내지 평평(平平)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문헌에 등장하는 ‘딕-’의 존재도 ‘딕희/딕-’의 쌍형 어간으로 존재한 ‘딕-’의 방증이 될 것이다. ¶比丘 시고 뷘 房 딕라 시니〈월인석보(1459) 7:6ㄱ〉. 이런 險 길헤 어우러 딕사다〈월인석보 22:9ㄴ〉. 門 딕 사미 어디니란 드로 듣고 모디니란 마가 禁止홈 니라〈원각경언해(1465) 상2-2:106〉.
울기 긋치
오륜행실도 4:5ㄴ
디 아니더니 아이 나가다가 도적의게 잡히니 님이 스로 결박여 도적의게 나아가 몬져
죽어디라 주005) 죽어디라: 죽기를 바란다. 죽고 싶다.『이륜』류에는 ‘죽거지라’로 나타나, ‘-거지라〉-어지라’의 변화를 보여 준다. 중세어에서는 화자의 “소망”을 표현하는 데 쓰인 종결형 ‘-거지라’는 선행 어간이 타동사이면 ‘-어지라’로 교체되었으나, 『오륜』에서는 선행 어간의 타동성 여부에 관계없이 ‘-어지라’로 통일된 양상을 보여 준다. ‘-어지라’가 ‘-어디라’로 나타난 것은 구개음화를 의식한 부정 회귀(不正回歸, fausse régression)의 결과이다.
쳥대 도적이
불샹이 주006) 불샹이: 불쌍히. 『이륜(초)』에는 ‘어엿비’, 『이륜(중・영)』에는 ‘어엿’로 나타나, 종래의 ‘어엿브-’를 ‘불샹-’가 대치한 양상을 보여 준다. 『오륜』의 다른 곳에는 ‘불샹이’를 대신하여 원순모음화가 반영되지 않은 ‘블샹이’의 꼴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긍(矜), 린(僯)”을 뜻하는 ‘블샹-’는 『계축일기』를 위시하여 17세기 문헌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대군을 강홰로 옴기니 블샹더라 거〈계축일기 상:39ㄴ〉.
너겨 다
노화 주007) 노화: 놓아. 『이륜』류에는 ‘노하’로 나타난다. 이곳의 ‘노화’는 선행 음절 ‘ㅗ’의 영향으로 일종의 원순성 동화가 일어나 후행 음절에 원순성 반모음 w가 첨가된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보내니라
Ⓒ 편찬 | 이병모·윤시동 외 / 1797년(정조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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