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행실도 3:68ㄱ
林氏斷足 주001) 임씨단족(林氏斷足): 임씨가 다리를 잘리다.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1395) 4월 27일 기록에, “완산(完山)의 절부(節婦) 임씨(林氏)의 정문(旌門)을 세웠다. 임씨는 완산 사람 최극부(崔克孚)의 아내며, 대빙재(待聘齋)의 학생 임거(林柜)의 딸이다. 왜구에게 붙들리어 욕을 보이려 하매, 듣지 아니하여 왜구가 한쪽 팔을 베어내고 또 한쪽 다리를 떼어내어도 듣지 않으므로, 왜구가 찔러 죽였다.[旌表完山節婦林氏閭. 林氏, 完山人崔克孚妻, 待聘齋生柜之女也. 陷於倭寇, 欲汚之, 不從. 寇斷一臂, 又刖一足, 猶不從, 寇刺殺之]라고 하였다.
【本朝 주002) 】오륜행실도 3:68ㄴ
林氏
完山府 주003) 완산부(完山府): 도읍명으로 지금의 전주(全州). 후백제의 도읍지. ‘부(府)’는 고려, 조선 때 대도호부사, 보호부사가 있던 지방관아의 하나. 이 『오륜행실도』의 언해문에서는 원문의 ‘완산부’를 ‘젼쥬’(全州)라고 풀이하였으나, 처음 『삼강행실도』 언해문에서는 생략되어 있고, 『태조실록』의 기록엔 ‘임씨는 완산 사람 최극부의 아내며 대빙재 학생 임거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 공민왕 5년(1356) 전주목이던 것을 완산부라 하였는데, 조선 태조가 창업을 이루어 임금의 고향이라서 ‘완산유수부’로 승격시켰다가, 태종 3년(1403)에 지금의 전주부(全州府)로 개칭하였기 때문에 시대에 따른 지명을 보게 되는 것이다.
儒士柜 주004) 유사거(儒士柜): 유사(儒士) 임거(林柜). 완산부의 선비로서, 태조실록에, ‘대빙재(待聘齋)의 학생 임거(林柜)’라고 하였으니, 『상서(尙書)』를 공부하는 유신이라는 말이다. 대빙재는 고려 예종이 국학(國學)의 진흥을 위해 베푼 칠재(七齋) 가운데 하나인데, 조선 초기까지 이어져 내려왔음도 알 수 있다. 칠재의 여택재(麗澤齋)는 『주역(周易)』을 익히는 분과이고, 대빙재는 『상서』를, 경덕재(敬德齋)는 『시경(詩經)』을, 구인재(求仁齋)는 『주례(周禮)』를 복응재(服膺齋)는 『대례(戴禮)』를, 양정재(養正齋)는 『춘추(春秋)』를, 강예재(講藝齋)는 무술(武術)을 익히던 분과였다고 한다.
之女也
適 주005) 적(適): 여기서는 ‘시집가다’의 의미로서, 주로 ‘~의 계집이 되다, ~의 처가 되다’로 언해된다.
知
樂安郡事 주006) 낙안군사(樂安郡事): 본래 백제의 파지(波知) 또는 분사(分沙)였는데, 663년 당(唐)나라 치하에서 분차주(分嵯州)로 고치고, 귀단(貴旦), 고서(臯西), 수원(首原), 군지(軍支) 등의 현을 관할하였다. 757년(경덕왕16) 분령군(分嶺郡)으로 고침. ‘언해’에서는 ‘낙안(樂安) 원(員)’이라 하고 있는데 ‘지낙안군사(知樂安郡事)’의 언해이니, ‘지 - 군사’를 ‘원님’으로 언해한 것이다.
崔克孚 주007) 최극부(崔克孚): 낙안의 지군사(知郡事). 고려 말 조선 초기 사람이다. ‘지군사(知郡事)’는 벼슬 이름으로 군사, 군비, 군무(郡務)를 장악함.
倭寇本府 林被執 賊欲汗之 林固拒 賊斷一臂 又斷一足 猶不屈 被害
林氏完山禮義家 倭奴突入肆兵戈 兇渠白刃焉能浼 之死心堅
矢靡他 주008) 시미타(矢靡他): 그에게 순종할 것을 맹세함. ‘시(矢)’는 ‘맹세하다’, ‘미(靡)’는 ‘순종, 복종’의 뜻.
貞烈高風擧世驚 臨危捨命不倫生 一身取舍分明甚 義重方知死亦輕
Ⓒ 편찬 | 이병모·윤시동 외 / 1797년(정조 21)
님시 본됴 젼쥬 션 거의 이니 낙안원 최극부의 쳬 되엿더니 왜적이 잡아 핍박고져 니 님시 좃디 아니대 도적이
과 다리 오륜행실도 3:69ㄱ
버히되 주009) 과 다리 버히되: 팔 하나와 다리 하나를 칼로 베었으나. 이 책 『오륜행실도』에서는 ‘’과 ‘다리’로서 표기를 명확히 구분하였는데, 15세기 『삼강행실도』에서는 ‘’과 ‘발’이라고 언해하고 있음을 본다. 즉 ‘’은 본디 ㅎ종성체언인 ‘ㅎ[臂]’이었다. 그러나 일찌감치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도 ‘ 爲臂’(해례 24)라고 표기하면서 ㅎ을 생략하고 있다. 물론 ‘ㅎ’의 표기가 ‘월인천강지곡(192장), 법화경언해(2:12), 두시언해(9:22), 능엄경언해(2:114) 등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고, ‘(팔짱)(번역소학 10:13. 금강경삼가해 3:4), 쇠(팔찌)(두시언해 20:9), 톡(팔뚝)(두시언해 15:43. 구급방언해 상:36)’ 등의 합성어가 쓰이고 있으나 『구급간이방』(1489)과 『훈몽자회(訓蒙字會)』(1527)에서부터는 ‘’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발[足]’(월인천강지곡 119)과 표기와 발음이 비슷하여 혼란을 막기 위한 표기 변화로 볼 수 있다. 결국 ‘ㅎ’이 ‘’로 변했지만 ㅎ의 존재를 인식하던 언중은 ‘발’과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라고 표기하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오히려 굴티 아니고 죽으니라
Ⓒ 편찬 | 이병모·윤시동 외 / 1797년(정조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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