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행실도 3:34ㄱ
趙氏
貝州人 王則 주001) 왕측(王則): 북송 때의 탁주(涿州) 사람. 인종 때 하북 패주(貝州)에서 일어난 종교 반란 지도자다. 그는 패주에서 선의군(宣義軍)에 들어가 소교(小校)가 되었음. 그런데 패주에서는 미륵불을 신봉하는 신앙의 풍습이 있었는데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신도가 많았던 것이 특징이다. 얼마 뒤에 왕측은 이 집단의 수령이 되어 현령(縣令)을 체포하고 통판(通判)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안양(安陽)이라고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고 하였으나, 마침내 관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동명왕’을 자칭한지 66일만이었다.
反 聞趙有殊色 使人刦致之 欲納爲妻 趙日號哭 慢罵求死 賊愛其色不殺 多使人守之 趙知不脫 乃紿曰 必欲妻我 宜擇日以禮聘 賊從之 使歸其家 家人懼其自殞 得禍于賊 益使人守視 賊具聘幤 盛輿從來迎 趙與家人訣曰 吾不復歸此矣 問其故 答曰 豈有爲賊汚辱至此 而尙有生理乎 家人曰 汝忍不爲家族計 趙曰 第無患 遂涕泣登輿而去 至州廨 擧䈴視之 已自縊輿中死矣 尙書屯田員外郞張寅 有趙女詩
美色從來禍所嬰 賊修婚禮强來迎 登輿泣與
오륜행실도 3:34ㄴ
家人訣 汚辱如斯不苟生
就死從容世所難 屹然高義重於山 莫言殊色爲身崇 留得
香名汗竹間 주002) 향명한죽간(香名汗竹間): ‘향기로운 이름을 대나무 사이에 뿌리다’라는 말. 중국 고대 요(堯)임금의 두 딸이 있었으니,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었다. 아황과 여영은 바로 순(舜)에게 시집을 갔다. 순이 천자가 되자 아황은 후(后)가 되고 여영은 비(妃)가 되었다. 그후 순은 치수 사업을 위하여 남방을 순행하던 중에 사망하자, 아황과 여영은 그를 따라 죽으며 눈물을 소상강 강가의 대나무 숲에 뿌리었다. 그런데 눈물이 피로 바뀌어 대나무를 피로 물들였다. 그리하여 소상강(瀟湘江)의 대나무는 지금도 피로 얼룩져 있다. ‘소상반죽(瀟湘斑竹)’이란 성어도 여기에서 생긴 것이다. 위의 시에서 ‘향기로운 이름을 대나무 사이에 뿌리다’라고 한 것은 이와 같은 역사의 고사를 배경으로 갖고 있다.
Ⓒ 편찬 | 이병모·윤시동 외 / 1797년(정조 21)
됴시 주003) 됴시: 조씨(趙氏)는. 구개음화와 된소리화가 일어나지 않은 표기다. 구개음화는 한글문헌에 나오는 용례들을 볼 때, ‘ㄷ’의 구개음화는 17세기와 18세기의 교체기에 일어났다고 보아 큰 잘못이 없을 것(이기문)이다. 유희(柳禧)는 『언문지(諺文志)』(1824)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발음 습관에 ‘댜뎌’나 ‘탸텨’를 ‘쟈져’나 ‘챠쳐’와 동일하게 발음하는 것은 앞의 것이 발음하기 어렵고 뒤의 것이 발음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된소리되기는, 한자어에서 어두(語頭)에 겹글자를 표기하는 말이 없고, 그 자체로는 된소리로 발음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끽(喫), 쌍(雙), 씨(氏)’ 등만이 된소리로 표기하고 있다. 그나마 15세기에는 예삿소리 ‘시’로 표기되다가 후대에 와서야 ‘씨’로 표기하고 있다. 조선 선조 9년(1576)에 유희춘이 엮은 『신증유합(新增類合)에서도 ‘시’라고 하였고, 여기 『오륜행실도』(1797)에서도 ‘시’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19세기 이후에야 ‘씨’가 된 것으로 보인다. ¶姓 셩 셩 氏 시 시〈신증유합 하:2〉.
송나라 패쥬 사이니
반적 왕측이 그 얼골 고으믈 듯고 주004) 반적 왕측이 그 얼골 고으믈 듯고: 반적(反賊, 반란의 적) 왕측(王則)이, 그녀(조씨)의 얼굴이 곱다는 말을 듣고. ‘수색(殊色)’을 ‘얼골’이라고 풀이한 것으로 보아, 중세어 ‘얼골’이 ‘모습, 틀’의 뜻이었지만 여기서는 현대어와 같은 뜻 ‘얼굴’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겁박여 안 삼고져 니 됴시 날마다
울고 지저 죽기 구호 주005) 울고 지저 죽기 구호: 울면서 〈왕측을〉 꾸짖어 죽기를 구(求)하였으나.
도적이 그 을 앗겨 죽이디 아니고
사으로 딕희니 주006) 사으로 딕희니: 사람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니.
됴시 죽을 틈이 업서 소겨 오 날을 안 삼고져 거든 일여 녜로 마즈라 대 도적이
고디 드러 주007) 집으로 도라보내고 주008) 집으로 도라보내고: 집으로 돌려보내고. 원문 ‘家人懼其自殞 得禍于賊 益使人守視’를 생략하였다. 『삼강행실도』에서는, ‘집사미 절로 주그면 도게 灾禍 어가 두리여 더욱 사 야 딕킈오더니(집안사람이 스스로 죽으면 도적에게 재화를 당할까 두려워 더욱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더니)’라는 풀이를 하였다.
납고 술위와 추죵을 오륜행실도 3:35ㄱ
셩히 야 됴시 려 올 주009) 납고 술위와 추죵을 셩히 야 됴시 려 올: 〈도적(왕측)이〉 수레와 몸종을 성대히 하여 조씨를 맞아 올 때[賊具聘幤 盛輿從來迎].
됴시
집사 주010) 과 영결여 오 내 다시 도라오디 못리라 집사이 그 연고 무니 오 엇디 도적의게 이러시 욕을 보고 살리이시리오 대 집사이 오 네 마 집의 화 각디 아니다 됴시 오 근심 말라 고
눈믈을 리고 술위에 올라 가더니 주011) 눈믈을 리고 술위에 올라 가더니: 눈물을 흘리고 수레에 올라 타고 가더니. 『삼강행실도』에서는 ‘술위’를 ‘’(공주나 옹주가 타던 가마)라고 하였다.
집의 다라 발을 것고 보니 셔 술위 속에 목여 죽엇디라 그 사이
됴녀시란 글을 지으니라 주012) 됴녀시란 글을 지으니라: ‘조녀시(趙女詩)’라는 글을 지었다. 즉 ‘조씨 여인을 위한 시’라는 제목의 시다.
Ⓒ 편찬 | 이병모·윤시동 외 / 1797년(정조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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