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취(積聚)는 기(氣)가 쌓여서 생기는 증상이다. 적(積)은 음기(陰氣)가 오장에 쌓인 것이고, 취(聚)는 양기(陽氣)가 육부에 쌓인 것이다. 심복창만(心腹脹滿)은 가슴과 배가 더부룩하고 그득한 증상을 말한다.
≪성제(聖濟)
성제총록(聖濟總錄)
≫에 이르기를, “장부(臟腑)[府藏]가 조화되지 못하면 기혈(氣血)이 뭉쳐서 적취(積聚)를 이루게 된다. 적취가 쌓여서 기가 통하지 못하게 되면 장(臟)의 기와 충돌한다. 이에 따라 가슴과 배가 더부룩하고 답답해지면서 숨이 가빠진다. 여기에 한사(寒邪)가 덮치게 되면 장부에서 싸움이 일어나므로, 음양(陰陽)이 서로 다투다가 결국 가슴과 배가 아프게 되며 심한 경우에는 설사한다.” 주002)이상의 병론은 ≪성제총록(聖濟總錄)≫ 권72 〈적취문(積聚門) 적취심복창만(積聚心腹脹滿)〉에 나오는 문장이다. ≪향약제생집성방≫은 항목별로 앞에서 ‘병론’을 실은 다음, 여러 의서에서 처방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병론의 절대 다수가 ≪성제총록≫이다.라고 논하였다.
당(唐) 나라의 손사막(孫思邈, 581~682년)이 지은 30권짜리 의서이다. ≪천금요방(千金要方)≫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이 정식 명칭이다. 이 책은 의학 총론에서 시작하여 본초(本草)·제약(製藥)을 비롯하여 임상의 각과를 망라하고 있다. ≪황제내경(黃帝內經)≫ 이래의 중국 의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종합의서로서 후대 의서의 모범이 되었다.
복숭아씨[桃仁]·살구씨[杏仁]·욱리씨[郁李仁] 등은 약재로 사용하는데, 복숭아나 살구 속에 씨(속알) 2개가 동시에 들어있는 것을 쌍인(雙仁)라고 한다. 흔히 쌍인은 독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서, 약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골라 내서 버린다. ‘두알들이’는 북한의 한의서 번역본에서 사용하는 단어인데,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 이 책에서도 쌍인은 두알들이로 번역한다.
도 버린 후, 마른 밀가루[乾麵]와 반죽하여 떡처럼 만든다. 만약 반죽이 되게[乾] 되면 물[淡水]을 섞는다. 마치 보통 때 물로 밀가루를 반죽하는 것과 같다. 떡처럼 만들 때는 일정한 크기로 만드는데, 환자 손바닥 크기로 2개를 만든다. 절대로 뜨거울 정도가 되지 않도록 노릇하게 살짝 구워서 공복에 1개를 먹으면 곧바로 설사하게 된다. 설사를 못하면 다시 1개를 먹는다. 상황에 따라 뜨거운 미음[粥汁]을 마시면서 설사[利] 할 때까지 마신다. 만약 오후가 되어도 설사가 멈추지 않으면 초반(醋飯
식초로 간을 한 밥
)으로 멈추게 한다. 설사 후에는 당연히 허한 상태가 되는데, 병이 아직 낫지 않은 경우에는 환자의 체력을 고려하여 1~2일 뒤에 다시 한번 복용시키고, 완쾌되면 그친다. 어린이 역시 적절하게 분량을 가늠하되 낙(酪) 주005)
낙(酪):
짐승의 젖을 달여서 진하게 졸인 것을 말한다.
이나 쇠고기·말고기 등을 못 먹게 하면 언제나 효과가 있다. 다만 위중할 경우에는 〈환자의〉 체력을 적절히 헤아려 치료한다. 여러 번 시험했는데, 신효(神效)하였다.
≪간요제중≫은 ≪간요제중방(簡要濟衆方)≫을 가리킨다. 송(宋) 나라 인종(仁宗)이 지방관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치료하는데 활용하도록 간행한 관찬의서이다. 태의사(太醫使) 주응(周應)이 인종의 명을 받아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의 중요 처방을 뽑아 편찬하였다. 5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상·중·하 3책(冊)으로 1051년에 반포하였다.
오랜 적취[久積]로 인해 속이 냉해져 소화가 안 되고 계속 구토하거나, 냉기가 위장에 있는 증상을 치료한다.
반하(半夏) 5냥을 씻어서 걸러내어 가루 낸다. 매번 2돈을 복용하는데, 메밀가루[白麪] 1냥과 반죽하여 바둑알처럼 빚은 다음 물에 넣어 메밀이 익을 정도까지 끓인다. 생강초[生姜醋
에 담아 환자의 머리맡에 놓는다. 환자의 입과 코를 기름에 닿게 해서 코끝에 기름을 묻혀 기름이 향기를 내뿜게 한다. 환자가 소리를 지르며 기름을 마시려고 해도 마시지 못하게 하면, 〈마침내〉 극도로 피로해져서 잠이 들게 된다. 그때 머리카락[髮]이 〈기름을 찾아〉 입 밖으로 나오는데, 사람을 시켜 계속 지켜 보게 하였다가 〈머리카락이〉 나왔을 때 석회가루를 바른 손으로 잡아챈다. 잠시 후 완전히 뽑아보면 그것이 바로 머리카락이다. 처음 뱃속에서 나올 때는 고인 물 속의 우거진 물풀[茸菜]처럼 생겼는데 〈길고 짧은 머리카락〉 길이 때문에 그 형태가 이렇게 된 것이다.
당(唐) 나라의 손사막(孫思邈, 581~682년)이 자신의 ≪천금요방(千金要方)≫을 보충하여 682년 경에 지었다. 30권으로 되어 있으며 인도와 고구려 등 외국 의학까지 다루고 있는 종합의서이다. ≪천금요방(千金要方)≫과 ≪천금익방(千金翼方)≫은 모두 손사막(孫思邈)의 저술이어서, ≪천금방(千金方)≫이라고 통칭되기도 한다.
징가(癥痂)와 현벽(痃癖)의 줄임말이다. 징(癥)은 뱃속에 단단한 덩어리가 뭉친 것을 말한다. 특히 징(癥)은 그 덩어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가(痂)는 그 덩어리가 떠돌아다니는 증상을 가리킨다. 벽(癖)은 허리 부위에 덩어리[痞塊]가 뭉친 증상을 말한다. 보통 때는 손으로 만져지지 않다가 통증이 일어날 때는 만져진다.
3세기 말~4세기 초에 진(晋) 나라 갈홍(葛洪)이 편찬한 의서로서, 정식 명칭은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이다. 질병의 원인과 증상을 간략히 서술하면서 편리하고 효과적인 치료법을 수록한 처방서이다. 양(梁) 나라 도홍경(陶弘景)이 ≪주후비급방≫을 증보하여 ≪주후백일방(肘後百一方)≫을 완성하였고, 금(金) 나라 양용도(楊用道)는 여기에 ≪증류본초(證類本草)≫의 단방(單方)을 추가하여 ≪부광주후방(附廣肘後方)≫이라고 이름붙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문종(文宗)대에 ≪주후방(肘後方)≫을 새로 판각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으로 뱃속에 돌 같은 게 들어있어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에 밤낮으로 울며, 치료를 못하면 100일 만에 죽는 증상을 치료한다.
우슬(牛膝) 1근을 술 1말에 담가 뜨거운 잿불 속에 밀봉(蜜封)했다가 따뜻한 채로 맛이 배어나게 한다. 5홉에서 1되까지 복용하는데, 체력에 따라 복용량을 달리 한다. 다른 처방에는 우슬 큰 1줌[大把]을 줄기와 잎까지 술에 넣고 끓여, 나을 때까지 복용한다. ≪백요방(百要方)
≪백요방≫은 ≪비예백요방(備預百要方)≫의 약칭이다. ≪비예백요방≫은 고려시대 의서로서 ≪백요(百要)≫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원서는 현존하지 않으며 ≪향약제생집성방≫이나 ≪의방유취≫에 단편적으로 인용되어 있다. 따라서 의서들간의 선후 관계를 통해 간행 시기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 의서들의 처방들을 대조해보면 ≪향약구급방≫ → ≪삼화자향약방≫ → ≪비예백요방≫으로의 전승이 확인된다. ≪비예백요방≫의 간행 시기는 기록에 없지만, 단서를 찾자면 ≪비예백요방≫이 조선 태조 7년(1398)에 편찬을 시작한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인용되고 있어서, ≪비예백요방≫이 늦어도 태조 7년 이전에는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삼화자향약방≫이 고려 후기의 의서라는 기존 연구를 고려하면, ≪비예백요방≫은 고려 말에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록 처방을 비교해보면, ≪비예백요방≫은 주로 ≪향약구급방≫과 ≪삼화자향약방≫ 두 의서를 통합하면서, 고려의 ≪신집어의촬요방≫을 참고하고 중국 의서의 일부 처방도 채용하여 치료 범위를 확장시켰다. 이 책 해제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비예백요방≫에서는 고려의 모든 사물을 약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하나의 질병은 한두 가지 약재로 충분히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결가(結瘕)와 기적(氣積)으로 배가 돌처럼 단단하고 숨이 차서 눕지 못하며 소변을 눌 수 없는 증상을 치료하는 방기탕(防己湯).
방기(防己), 백합(百合)[말린 것], 욱리인(郁李仁)[껍질을 제거하고 별도로 고약(膏藥)[膏]처럼 간 것, 〈이상의 약재들은〉 각각 1냥], 목통(木通)[썬 것 1냥 반], 오수유(吳茱萸)[오래된 것을 물에 7차례 씻은 후 볶은 것 반 냥], 진귤피(陳橘皮)[끓는 물에 담갔다가 흰 속을 제거하고 불에 말린 것], 당귀(當歸)[잘라 불에 말린 것], 적복령(赤茯苓)[검은 껍질을 제거한 것, 〈이상의 약재들은〉 각각 3푼].
위의 약재들을 가루 내고 매번 3돈을 물 2종지·생강(生薑) 반 푼과 함께 1종지가 될 때까지 달여서, 찌꺼기를 버리고 공복으로 따뜻하게 복용한다.
자른 경삼릉초(京三稜草) 1섬[石]과 물 5섬을 1섬이 되도록 끓여서 찌꺼기를 버리고, 3말짜리 즙이 될 때까지 다시 달인다. 그리고 구리 그릇[銅器]을 솥 안에 넣고 진한 엿처럼 중탕하는데, 그릇 안에는 꿀[蜜]을 넣는다. 주022)
≪향약집성방≫의 동일한 기사에서는 ≪외대비요≫를 인용하면서 “〈그 즙을 담은〉 구리 그릇[銅器]을 솥 안에 넣고 진한 엿처럼 중탕하는데, 약을 출납(出納)할 때는 그릇을 잘 봉한다.[銅器中重釜, 煎如稠糖, 出內密器中.]”라고 하였다(≪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권22 〈적취문(積聚門) 징가(癥瘕) 외대비요(外臺秘要)〉). ‘밀(蜜)’인지 ‘밀(密)’인지에 따라 해석이 판이해진 경우인데, 문맥으로 본다면 ≪향약집성방≫의 내용이 맞다.
매번 〈중탕한 꿀〉 1숟가락을 술 1종지에 타서 복용한다. 동이 틀 때 한 번 복용하고, 낮에는 점심 전에 한 번 복용하는데, 언제나 허기진 상태에서 복용한다.
≪천금방(千金方)≫:당(唐) 나라의 손사막(孫思邈, 581~682년)이 지은 30권짜리 의서이다. ≪천금요방(千金要方)≫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이 정식 명칭이다. 이 책은 의학 총론에서 시작하여 본초(本草)·제약(製藥)을 비롯하여 임상의 각과를 망라하고 있다. ≪황제내경(黃帝內經)≫ 이래의 중국 의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종합의서로서 후대 의서의 모범이 되었다.
두알들이[雙仁]:복숭아씨[桃仁]·살구씨[杏仁]·욱리씨[郁李仁] 등은 약재로 사용하는데, 복숭아나 살구 속에 씨(속알) 2개가 동시에 들어있는 것을 쌍인(雙仁)라고 한다. 흔히 쌍인은 독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서, 약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골라 내서 버린다. ‘두알들이’는 북한의 한의서 번역본에서 사용하는 단어인데,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 이 책에서도 쌍인은 두알들이로 번역한다.
≪간요제중(簡要濟衆)≫:≪간요제중≫은 ≪간요제중방(簡要濟衆方)≫을 가리킨다. 송(宋) 나라 인종(仁宗)이 지방관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치료하는데 활용하도록 간행한 관찬의서이다. 태의사(太醫使) 주응(周應)이 인종의 명을 받아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의 중요 처방을 뽑아 편찬하였다. 5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상·중·하 3책(冊)으로 1051년에 반포하였다.
≪천금익방(千金翼方)≫:당(唐) 나라의 손사막(孫思邈, 581~682년)이 자신의 ≪천금요방(千金要方)≫을 보충하여 682년 경에 지었다. 30권으로 되어 있으며 인도와 고구려 등 외국 의학까지 다루고 있는 종합의서이다. ≪천금요방(千金要方)≫과 ≪천금익방(千金翼方)≫은 모두 손사막(孫思邈)의 저술이어서, ≪천금방(千金方)≫이라고 통칭되기도 한다.
징벽(癥癖):징가(癥痂)와 현벽(痃癖)의 줄임말이다. 징(癥)은 뱃속에 단단한 덩어리가 뭉친 것을 말한다. 특히 징(癥)은 그 덩어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가(痂)는 그 덩어리가 떠돌아다니는 증상을 가리킨다. 벽(癖)은 허리 부위에 덩어리[痞塊]가 뭉친 증상을 말한다. 보통 때는 손으로 만져지지 않다가 통증이 일어날 때는 만져진다.
≪주후방(肘後方)≫:3세기 말~4세기 초에 진(晋) 나라 갈홍(葛洪)이 편찬한 의서로서, 정식 명칭은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이다. 질병의 원인과 증상을 간략히 서술하면서 편리하고 효과적인 치료법을 수록한 처방서이다. 양(梁) 나라 도홍경(陶弘景)이 ≪주후비급방≫을 증보하여 ≪주후백일방(肘後百一方)≫을 완성하였고, 금(金) 나라 양용도(楊用道)는 여기에 ≪증류본초(證類本草)≫의 단방(單方)을 추가하여 ≪부광주후방(附廣肘後方)≫이라고 이름붙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문종(文宗)대에 ≪주후방(肘後方)≫을 새로 판각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백요방(百要方)≫:≪백요방≫은 ≪비예백요방(備預百要方)≫의 약칭이다. ≪비예백요방≫은 고려시대 의서로서 ≪백요(百要)≫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원서는 현존하지 않으며 ≪향약제생집성방≫이나 ≪의방유취≫에 단편적으로 인용되어 있다. 따라서 의서들간의 선후 관계를 통해 간행 시기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 의서들의 처방들을 대조해보면 ≪향약구급방≫ → ≪삼화자향약방≫ → ≪비예백요방≫으로의 전승이 확인된다. ≪비예백요방≫의 간행 시기는 기록에 없지만, 단서를 찾자면 ≪비예백요방≫이 조선 태조 7년(1398)에 편찬을 시작한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인용되고 있어서, ≪비예백요방≫이 늦어도 태조 7년 이전에는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삼화자향약방≫이 고려 후기의 의서라는 기존 연구를 고려하면, ≪비예백요방≫은 고려 말에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록 처방을 비교해보면, ≪비예백요방≫은 주로 ≪향약구급방≫과 ≪삼화자향약방≫ 두 의서를 통합하면서, 고려의 ≪신집어의촬요방≫을 참고하고 중국 의서의 일부 처방도 채용하여 치료 범위를 확장시켰다. 이 책 해제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비예백요방≫에서는 고려의 모든 사물을 약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하나의 질병은 한두 가지 약재로 충분히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향약집성방≫의 동일한 기사에서는 ≪외대비요≫를 인용하면서 “〈그 즙을 담은〉 구리 그릇[銅器]을 솥 안에 넣고 진한 엿처럼 중탕하는데, 약을 출납(出納)할 때는 그릇을 잘 봉한다.[銅器中重釜, 煎如稠糖, 出內密器中.]”라고 하였다(≪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권22 〈적취문(積聚門) 징가(癥瘕) 외대비요(外臺秘要)〉). ‘밀(蜜)’인지 ‘밀(密)’인지에 따라 해석이 판이해진 경우인데, 문맥으로 본다면 ≪향약집성방≫의 내용이 맞다.